Ⅰ. 서 론
조선시대는 고려시대 후반의 무인(武人) 정권을 벗어나 양반과 선비 등의 문인이 지배하는 시기이다. 양반과 관료의 지배계층 소속자들은 거의 시(詩)와 서(書)에 능했고 거문고와 시조를 즐기는 등 예술 문화를 누리면서 생활화했다. 이러한 지역 문화 발전은 왕이나 지 방 수령에 의한 연희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의 전반적인 활동은 국력을 성장시키고 문화생활 수준을 향상하며 예술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이대희 2003, 215).
조선시대 15-19세기 당시 역시 경주 지역은 외국 사신(使臣)들을 맞이하는 환영(歡迎) 및 환송연(歡送宴)과 국외로 나가는 통신사를 위한 전별연(餞別宴), 문인들의 팔도 유람 기행 후 연희, 사적인 향유를 위한 주연(酒宴) 등이 열렸다. 특히 18세기는 정치·외교적으로 조선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정세가 매우 안정적이었고 통신사들에 사행 경험의 축적으로 기록들이 정형화가 이루어진 시기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타국과의 교류를 위해 국내에 찾아온 사신들은 한양에서 출발하여 충북 충주를 거쳐 경북 안동, 영천, 경주 등을 지나 동래, 부산으로 이어지는 노정을 이동했으며 각 고을수령이 제공한 숙소에 머무르면서 문 화생활을 누렸다(정영문 2018, 72).
특히 경주는 조선통신사들이 서울을 지나 동래까지 가기 전에 유숙하면서 사연(賜宴)을 베푸는 중요한 거점지역으로 여러 연행이 이루어졌으며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생활을 유지해 왔다. 이에 대해 15세기-19세기에 일어난 연희의 악(樂)과 무(舞)를 중심으로 형식적인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이 지역만의 독자적인 차별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또한 지금까지 경주 지역에 관한 문화예술과 관련 연구는 현재 처용(김성혜 2023)과 황 창무(이종숙 2018)에 집중되어 있고 이 지역만의 공연 활동의 분석은 미흡한 실정이다. 특히 경주의 연희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관점 등에 관하여 공연 활동 분석은 연구되지 않았다. 이에 본 연구는 역사적 사실과 변화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후대에 정확한 정보전달과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본 연구는 15-19세기 조선 후기를 시기적 범위로 삼아 사료를 선정하였다. 공간적으로는 일본 행로가 기록된 ‘통신사행록’과 국내 명승지를 다룬 ‘유람록’을 교차 선택했으며, 사료의 객관성 확보를 위해 당대 문인들의 ‘개인 문집’을 중심으로 분석 대상을 추출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활용한 경주 지역 공연 문화 관련 사료는 주로 18세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 15-19세기 전 시기로 확장하여 일반화하기에는 시기적 공백과 자료의 편중성 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이 사료는 경주지방에서 연행된 공연들의 주체와 문화 공간, 악, 무의 향유 방식, 문인들의 감상평 등에 관한 구체적 시사점을 제공하며 지역의 특색 있는 춤 문화에 관한 내용을살펴보는 데에 유용하다.
본고는 조선시대 문학의 검토를 통해 지역 공연의 특수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또한 「동경유록(東京遊錄)」에 기록된 1767년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11가지 정재에 관한 일 차적 연구(박지웅 2022)에 대해 일부 해석의 오역 정정을 했으며, 내용을 수정 및 보완하여 세부적으로 구체화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15-19세기 경주지방에서 일어난 공연 중에서 춤 문화를 중점적으로 조명할 것이다. 특정 시기 연행 활동의 독자성을 살펴봄으로써 경주 지역의 공연 특 성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Ⅱ. 경주 관기들의 공연 활동
지역 간의 문화생활 교섭은 선상기 제도의 활성화와 중인계층의 역할 강화 등을 들 수 있다(김윤지, 김운미 2015, 122). 먼저 지방의 선상기(選上妓)는 진연(進宴)이 있을 때 서 울로 상경하였다가 다시 자신이 속해 있는 악부로 돌아와 본래의 직업을 수행하게 된다. 이 중에 실력이 출중한 자는 자주 궁중의 연향을 위해 선발되거나 다른 지방으로 선출되어 추어진 기록이 확인된다. 이때 궁중에서 추어진 정재는 전국 각지 지방으로 전파되었다고 본다. 경주 관아의 향기(鄕妓)들도 역시 연향을 위해 자주 서울로 올라왔다가 귀향(歸鄕)했 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행록, 개인 문집 등 기록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진연의궤』를 근거로 1744년(영조 20)에 선상된 기녀는 경주를 포함하여 충주, 공주, 원주, 안동, 해주, 전주, 황주, 안악, 평양, 함종, 청주, 성산, 상주, 나주, 성천, 안주, 광주 등 18 고을에서 선발되었다. 이때 경주 기녀 옥간과 채옥은 처용무, 순랑은 교방고를 추었 다. 1828년 11월 27일 상소의 내용에서는 경주의 관기 6명이 처용무를 잘 추는 사람으로 뽑혔는데 이어 1829년은 경주 기생의 뛰어난 처용무에 각별한 보수를 주라는 내용을 확인 해 볼 수 있다(宋芳松 2013, 95-101). 이로써 경주의 기녀들은 처용무의 기예가 뛰어나 전국 각지를 대표하여 손꼽혀 뽑혔음이 기록상 나타나 있다.
한편, 중인 계층은 18세기부터 교방과 민속을 통해 예술 양식을 발견하여 향유를 목적으로 하는 데에 매개체 역할을 함으로써 새로운 유형의 양식과 예술인을 배출해 낸다(김윤 지, 김운미 2015, 122-123). 즉 이들은 궁중과 교방, 교방 간에 지방과의 교섭을 통해 문화적 소통의 경로를 제공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17-18세기 당시 경주 관기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 이외에 경주 인근의 부산, 영천 등에 파견되어 공연되는 사례가 확인되며, 이 활동들은 아래의 <표 1> 을 통해 알 수 있다.
표 1.
경주 관기들의 공연 활동 (Performance Activities of Gyeongju Gwan-gi)
(박지웅, 「경주교방」 ‘新羅十舞’ 연행양상 고찰 : 「東京遊錄」을 중심으로(A Study on the Performance Aspects of ‘Silla Sibmu’ (Ten Dances of Silla) in Gyeongju Gyobang: Focusing on Donggyeong Yurok), 2022.08.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지역 | 경주관기들의 공연활동 | |
|---|---|---|
| 문헌 | 공연 날짜 | |
| 영천 | 『승사록(乘槎錄)』 | 1763.8.16 |
| 부산 | 『동사록(東槎錄)』 | 1682.5.29 |
| 『해유록(海遊錄)』 | 1719.5.13. | |
| 『승사록(乘槎錄)』 | 1763.9.04 | |
| 1763.9.10 | ||
| 1763.9.11 | ||
| 1763.9.15 | ||
| 『일관기(日觀記)』 | 1763.9.10 | |
| 1763.9.11 | ||
| 1763.9.12 | ||
|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 1763.9.09 | |
| 1763.9.10 | ||
| 1763.9.11 | ||
| 경주 | 『졸옹집(拙翁集)』 | 1580 |
| 『동사록(東槎錄)』 | 1624.9.10 | |
| 『동사일기(東槎日記)』 | 1711.6.01 | |
| 『일본록(日本錄)』 권1 | 1763.8.17 | |
| 『해사일기(海槎日記)』 | 1763.9.10 | |
| 『청성집』 | 1763 | |
| 『당주집(鐺洲集)』 『동경유록(東京遊錄)』 | 1767.12.01 | |
| 『후검기행(後劒器行)』 | 1778 | |
<표 1>을 살펴보면 경주 교방의 기녀들은 경상도 주변에 있는 지역으로 파견되어 다른 소속 관기들과 함께 공연했다.
1682년 5월 29일 사신연(使臣宴)은 부산을 비롯하여 밀양, 경주, 울산 등의 기생들이참여했다(洪禹載 『東槎錄』 5월 29일). 이후 1763년 8월 16일 영천의 전별연에서 경주 기 생의 기악(妓樂)은 최고라 언급되었다. 같은 해 9월 10일에 부산에서 열린 전별연에서 연 희에 참여한 주체와 관객은 위계에 따라 착석했다. 전악, 공인, 예인 중에서도 안과 밖을구분해 앉았는데 경주의 기생은 가운데에 앉았다. 이 연희에서는 경주 기생 백련이 황창곡을 추고 나머지 기생들은 검무와 대풍류를 겸했는데 황창곡은 신선하다고 했다(원중거 2006, 41-53). 기녀들이 선출돼 공연한 사례를 통해 지역 관기마다 실력의 차이는 있었을거라 본다. 사실 오래전부터 여러 명기(名妓)들을 지명하여 뽑아오게 했으며 기악은 수많은 읍 중에서 경주와 동래에서 맡은 기록(원중거 2006, 52-53)을 통해 경주 관기의 재예가 뛰어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경주 관기들은 부산에서 1719년 5월, 1763년 9월에 11차례 공연했다. 이때 참여한 경주 기생은 일취(日翠)와 소아(小娥), 백련(白蓮), 해섬(海蟾), 연이(蓮伊), 옥낭(玉 娘), 취월(翠月), 취정(翠晶), 취섬(翠蟾), 취애(翠愛), 노기(老妓) 비점(翡點), 운월(雲月), 종애(鍾愛) 등이 있는데, 비점과 영매는 거의 모든 사행록에 등장한다(박지웅 2022, 47).
이어 1763년 9월 10일의 부산의 통신사연(賜宴)과 다음날 개인 사연(私宴)에서도 여러읍의 기생들이 참여했음에도 음악은 경주의 악으로 연주되었는데, 기록상에서 많은 음악이배출되어 나온 것이 경주라고 언급된 바 있다(남옥 2006, 213-215). 사연(賜宴)에서 경주 기녀들은 황창과 처용, 천도를 추었는데 다른 두 읍의 향기들과 함께했다. 이처럼 영천과 부산에서의 사연(賜宴)은 주최한 지역이 공연의 중심이 되는 것보다 주로 경주의 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경주의 기녀들은 다른 지역에 지명되어 오래전부터 공연되는기록이 여러 차례 확인된다. 이와 같이 경주지방 향기들은 궁중에서 선출된 것 이외에 인근 지역에 파견되어 추어진 것은 지방간에도 문화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의 『일본록』 권 1에도 이런 사실은 나타난다. 그는 통신사연의 여정 중에 많은 교방을 거쳐 공연을 봤지만, 그가 본 경주의 연희가 여정의 최고라 한 바 있다(성대중 2006, 28). 따라서 경주 관기들은 사신단들을 위한 연희에서 기량을 갈고 닦아 각자의 기예를 뽐냄으로써 실력이 우수했다는 것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사절단의 통로는 좌로(左路), 중로(中路), 우로(右路)로 분산하기에 이른다. 좌로는울산의 염포에서 한양까지 이르는 길로서 안동, 영천, 경주를 지나 충주를 거슬러 경유하였으며 전남 담양에서부터는 남한강의 수로를 이용했다. 경북 경주를 포함하여 부산, 안동과 충북 충주는 1655년까지를 종기로 공식적인 연희가 벌어진 지역이다(김상원 2019, 77-78).
한편, 17-18세기 당시 경주 지역은 대부분 통신사를 위한 전별연과 관아에서 개최한 사연(私宴)이 열렸다. 경주 기녀들은 1580년, 1624년 9월, 1711년 6월, 1763년 8월, 9월, 1767년, 1778년 등 여러 차례 공연했으며 18세기 중․후반에 활동이 활발했는데 그중 1763 년에 자주 나타났다. 경주 지역의 공연은 1624년 이후로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1700년대 중, 후반에 재개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이 당시 지역 경제와 관련이 있는데, 『증정 교린지』의 기록을 통해 거점지역의 흉년과 통신사행의 민폐로 지방 경제에 부담을 가중하기에 경주의 전별연을 폐지하기로 한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정영문 2018, 66). 또한 재 정 상황을 고려하여 경비를 절감하고 인근 지역에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을 원칙으로 했으며 동래부 인근 10개의 읍에 끼치는 폐단이 가장 심각했다고 한다. 이에 숙종 37년 정월 25일 지공의 부담이 커서 부산에서만 시행하고 1811년 통신사행까지도 나머지 고을에서는 시행 하지 않았다(변광석 2005, 34-38).
한편, 조엄의 「해사일기」에서 “중년에는 충주, 안동, 경주, 동래중에서 세 곳의 잔치는없앴지만, 좌수사로 하여금 날을 가려 거행하라”는 공연의 제한을 두고 있다는 내용이 있 다(趙曮 『海槎日記』, 九月 十日). 위의 기록을 통해 완전한 폐지보다는 빈도의 횟수를 줄 여 시기적 제한을 둔 연희가 열린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경주는 경상도 내에 경제적 재정 부담으로 인해 1600년대 시기에는 다소 공연의 활동 빈도가 낮았지만, 경주 관기는 18세기까지 지속적으로 활발히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은 경제적 상황이점차 호전되면서 그동안 위축되었던 공연 활동이 일정한 제한 속에서도 조금씩 재개되는양상을 보였다.
Ⅲ. 경주 지역의 공연 문화
1. 공간적 구성
경주 지역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크게 실내와 실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귀빈(貴賓)과 공무를 위한 객사(官史)를 접대하기 위해 읍치(邑治)에 객사를 두었다.
〔사료 1〕
객관이 누추하고 좁아서 비록 倚風樓 한 채가 있었으나, 올라가 眺望하며 답답한 심회를 시원히 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것이 이 고을의 큰 결점이었다. ··· (중략) ··· 임오년 겨울에 내가 奉命使臣으로 경주에 오니, 나의 벗 資憲大夫 金淡이 府尹이었으며, 承議郞 辛仲磷이 通判이었다. ··· (중략) ··· 이미 통판과 의논하여 장차 객관을 重修하기로 하고, 재목을 축적하고 기와를 구우면서 시일을 기다리고 있을 뿐일세.’ 하였다. ··· (중략) ··· 辛通判이 일의 유래를 자세히 사뢰고, 객관의 옛터에다 규모를 더 크게 경영하여 지으려고 하니, ··· (중략) ··· 먼저 大廳 5칸을 세우니 앞 뒤에 툇마루가 있고, 크고 시원하고 널찍하다. 동편과 서편에 軒이 있으니, 각각 上房과 곁방[挾室]이 있어 서늘하고 따뜻함이 알맞게 되어 있다(李荇, 『新增東國輿地勝覽』 券 21, 慶尙道 慶州部 宮室 客官).
동경관(東京館)으로 불리는 객관(客館)은 고려 1320년(충숙왕 7)에 불이 타서 소실되고 조선시대 15세기 때부터 잦은 화재로 재건이 이루어졌다. 또한 공간이 협소한 객관을 새로 증축하기로 한 경주 부윤은 객관의 옛터에다 규모를 더 확장하여 지었다. 이는 정청, 동헌, 서헌 등 세 개의 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앞면 5칸과 옆면 3칸의 단층 기와집 세 채가 이어진 총 45칸의 규모로 교방과 매우 가까운 곳에 밀접해 있다. 이 객관은 고려와 조선조 7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지방 관청으로 조정의 고관이나 귀빈의 숙소 또는 연회장으로 쓰이거나 고을의 중요 문물이나 서책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조철제 2004, 130).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 임금의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시는 기능이 더해져 경주부윤의 집무소인 동헌이나 내아(內衙)보다 크고 웅장하였다(국립경주박물관 2013, 39).
『경주도읍지』는 경주 악부라는 교방이 객사 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경통지』 권 7과 『교남지』에는 ‘좌객사북즉교방’이라고 되어 있다(최효식 2007, 232). 객사와 교방은 위치상 근접해 있으며 문화적 소통을 위해 교방이 핵심 매개체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그림은 조선 18세기 말 「경주읍내전도」이며 경주 읍 전체를 그린 지도이다. <도판 1>은 각 장소의 명칭이 기재 되어 있는데 경주 관아의 동헌은 왼쪽에 있고 그 오른편에 객사인 동경관이 있다.
〔사료 2〕
위태로운 포석정엔 음악 소리 진동하고 ...... 중략 ...... 나는 화계현을 따라 반월성 에서 묵었는데 대동한 기녀와 무리 지은 춤이 하나하나 드러났다 (『自著』 권 7, 古詩 後劒器行<戊戌 用杜詩公孫大娘釰器行韻>).
〔사료 3〕
신해일에 왕은 기병(騎兵) 50여 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가니, 신라왕이 백관에게 명령하여 성 밖에서 영접하게 하고,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高麗史節要』 券 1, 太祖神聖大王).
〔사료 4〕
임해전 높은 곳에서 해가 긴 봄날에 조정에 일이 없으니 신하들과 연회를 했네. 임금이 취기에 거문고를 타고 나면 좌우 신하들 아름다운 가사를 새롭게 다투어 겨루네(尹愭, 『無名子集』 券 6, 其三百四十三).
〔사료 5〕
별궁 임해전엔 검의 광채가 생겨났네. 시림의 누런 잎에 가을바람 쓸쓸하고 붉은 입술 소매에 향기가 그치네. 풍속에 지금도 무기(舞妓)가 전하고 혼탈과 울지모두 명성을 떨쳤네(『自著』 券 7, 古詩 後劒器行).
임해전은 궁실로서 효소왕 6년 9월, 혜공왕 5년 3월, 헌안왕 4년 9월, 헌강왕 7년 3월, 경순왕 5년(931)에 왕이 여러 신하와 연회를 베푼 장소이다(『三國史記』 卷 11, 新羅本紀 11 憲康王). 이를 시초로 조선시대에도 여러 문인과 선비들의 연희 장소가 되었다.
또한 공연은 실외(外)의 공간인 정자, 누각, 누대 등에서도 이루어졌는데 아래의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사료 6〕
임오년(1462, 세조 8) 겨울에 내(서거정)가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경주에 오니, 나의 벗 자헌대부 김담(金淡)이 부윤이었고 승의랑(承議郎) 신중린(辛仲磷)이 통 판(通判)이었다. 경상감사 복천군(福川君) 권개(權愷)가 의풍루에서 나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민주면 2014, 88).
〔사료 7〕
의풍루 위에 아름다운 선경이 펼쳐지거든.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요염함을 서로 다투고 또다시 대장 깃발을 세우거나 휘장을 치거든 앉은 손님 모두가 신선과 같기를 바라고(徐居正 『四佳集』 券 40).
〔사료 8〕
위에 누(樓)를 세우니 다섯 칸이었다. 바라보면 날아갈 듯하다. 아래로는 수많은 인가를 굽어보고, 여러 산을 사면에 둘렀으니, 마치 이들을 자리 아래에 둔 듯하다. 한 달쯤 되는 동안에 웅장하게 한 고을의 장관을 이루었으니 그 기쁨을 짐작 할 수 있다. 김공이 임기가 차서 떠나가고, 영가(永嘉) 권극화(權克和)공이 대신 하여 부윤이 되어 와서 기둥에 단청을 하여 김공의 뜻을 이어 완성하였다. 권공 (權公)은 그 위에 다시 더 빛나게 하려고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이름을 지어주 기를 청하여, 빈현루(賓賢樓)라는 큰 글씨 석 자[三字]를 얻어 편액(扁額)으로 달았다(李荇 『新增東國輿地勝覽』 券 21, 慶尙道).
〔사료 9〕
고려 중엽 이후로 문관은 안일에 빠지고 무관은 즐김을 일삼아 누대(樓臺)는 풍악과 가무의 장소가 되고, 화월(花月)은 놀고 구경하며 음영하는 자리가 되었다(민주면, 2014, 94).
〔사료 10〕
맑음. 경주에 묵어 군관으로 하여금 활을 쏘게 했다. 후에 주인이 풍악과 전별연을 베풀어 봉황대(鳳凰臺)에 올랐다가 밤이 되어야 돌아왔다(任守幹 『東槎日記』, 六月 一日).
〔사료 11〕
좌석 사이에는 연회의 기풍이 뿌려지고 북두칠성과 견우성 사이에 가장자리 빛이 횡으로 비틀려있네. 백제 산하에 한번 손을 던지니 반월누대엔 더욱이빛이 움직이네. 몸을 뒤집어 검을 던지려다가 다시 머뭇거리고 수놓은 버선은 오히려 땅의 서리가 가득차네(成大中 『靑城集』 券 3, 次玉流子李汝亮 明淵 劒 舞詩, 詠黃昌舞).
경주 누정은 동경관 객사를 중심으로 야외에 지어졌는데 동쪽에는 빈헌루, 서쪽에는 의 풍루를 세웠다. 이렇게 객사에 부속되어 누정을 세웠는데 이러한 사례는 우리나라 성천 지역의 강선루와 제천의 한벽루, 밀양 객사의 누각인 영남루, 울산 객사 ‘학성관’ 누각인 태화루, 삼척시 객사 ‘진주관’ 누각인 촉석루 등이 있다(심순희, 김춘식 2024, 163-167). 이와 같은 조선시대 객사 부속 누각은 각종 연회와 사신, 관료, 문인들의 접대 장소로 이용 되어 우리 조상들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누정은 본래 자연환경을배경으로 조성된 풍류와 휴식을 위한 공간과 학문 교류를 위한 공간, 군사 훈련을 점검하고 활쏘기를 수련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곡(李穀)의 의풍루 시(詩) 서문에서 “서루(西樓)에 오르자 시원하게 앞이 트여 성곽과 산천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신라 고도의 웅장한 형세와 멀리 트인 조망과 그 번화하고 아름다움은 동남에서 으뜸이다”(민주면 2014, 96-98).라고 했는데 주변에 산으로 둘러싸 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441년 하동 정인지가 지은 기문에 따르면 동편 빈헌루는 무예 시험장으로 이용하기에 지형적으로 적합했다. 고려 중엽(中葉) 이후 문관(文官)과 무관은 놀기를 즐겨 해 누 대(樓臺)는 풍악과 노래와 춤의 장소로 쓰였다. 그러므로 경주는 누정을 단순히 자연경관 감상 외에도 관아와 객사 등에도 누정을 두어 사신이나 손님 접대와 연회의 장으로 삼았 다. 이러한 관아와 객사, 누정의 근접성은 공연을 위한 인력을 자주 보강하고 공간의 제공 등 공연 목적 수행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경주 지역의 연행은 객사를 포함하여 의풍루(倚風樓), 빈헌루(賓賢樓), 봉황대, 포석정, 반월성, 별궁 임해전, 반월누대 등에서 베풀어졌으며 이 장소들은 조선통신사 사행 단이 거쳐 간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임해전(臨海殿)은 안압지 서쪽에 있는 궁궐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나 군신들의 연회 및 귀빈의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다. 경주에서는 때때로 객사 안과 밖에서 같이 공연이 이루어진다. 이는 문인들이 산수 유람을 즐기며 정자, 누대, 누각을 짓는 풍습이 발전하면서 누대에 오르는 미적 관습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공간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경치를 구경하고 풍류를 즐기는 공간, 집회나 학문을 전수하는 예술 창작의 공간, 지식인들의 숭고미를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장소로 쓰이기 때문이다 (최성애 2010, 32).
2. 시기별 구성
조선후기는 정치적 안정화와 경제적 잉여로 인해 문화생활의 수요와 창작 욕구가 제고 되면서 장르 간의 춤 교류가 가속화되었다(김윤지, 김운미 2015, 122). 이러한 양상은 연행의 구조적 특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각 지역의 문화예술은 향유라는 공통점을 배제하고 연행 주체자, 연행 목적과 내용, 향유자 등 공연예술로서의 성격이나 특징이 달라진다. 1400년대부터 1700년대까지 경주에서 여러 연행이 이루어진바 이들이 시기별로 공연이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기록을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사료 12〕
의풍루 위에 아름다운 선경이 펼쳐지거든.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요염함을 서로 다투고 또다시 대장 깃발을 세우거나 휘장을 치거든 앉은 손님 모두가 신선과 같기를 바라고 황랑은 칼을 뽑아 희롱할게고 처용은 소매를 늘어뜨려 춤을 추니 옥적의 맑은 소리는 고요한 밤에 더딜 제 난간 기대어 가정의 기문을 읽어 마음을 다스리고 글재주가 보잘것없으나 학사의 시에 화답하네!(徐居正, 『四佳集』).
사료 12는 서거정이 집필한 1488년 무신본 중에 당시 62세 때부터 지은 시문집의 내용 이다. 경상도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가는 그의 벗을 송별하는 연이 베풀었으며 이때 야외 의풍루에서 주연(酒宴)이 이루어졌다. 여러 기생은 황창무와 처용을 추고 옥적을 연주했 다. 이 세 공연 종목은 홍성민의 『졸옹집』에서도 보이는데 1580년에 외방 관료를 위한 감 사(監司) 환영연에서는 주로 몇 가지의 악기와 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연행되었다.
〔사료 13〕
윤부윤이 화려한 연희를 베푸는 데 그중에 음악을 갖추고, 술을 즐긴다. 밤이되어 촛불을 켜고 연희를 이어 나갔다. 싫증이 나도록 최대한 즐기고 임금의 은혜가 아니면 무슨 까닭으로 이것을 얻는가. 즐거움을 다하면 슬픔이 더욱 느껴지네. 지금 저 옥적, 가야금, 포구, 처용무, 황창무는 신라를 온전히 기리고 무절제한 연희에 쓰이는 도구들로서 오늘날 태평을 즐기는 음악이다. 그들은 옥적을 불고 쟁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지만, 오직 자기들만의 유희를 누렸을 뿐이다(『拙翁集』 卷 7, <錄鷄林錄>).
이 시기에 관기들은 포구, 처용무, 황창무 등 세 가지 춤으로서 비교적 간략히 추었다. 악기는 가야금과 옥적의 관현악이 연주되었다. 그중에 경주의 향악기로 볼 수 있는 옥적 연주가 특징적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681-692)이 얻은 흑옥대(黑玉帶)로 이 대나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모든 일이평정되었으니 ‘만파식적’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지봉유설(芝 峯類說)』, 『동경잡기(東京雜記)』 등에는 경주에 전해지는 옥적을 신라의 보물로 인식하는기록이 있다. 경주 옥적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은 『부사집(浮査集)』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남색 빛을 내는 남전옥(藍田溫)으로 기이한 모양을 가지며 7개 구멍으로 길이는 한자 9촌이다”라 했다(成汝信 『浮査集』 券1,<詩○七言絶句>). 조선 중기 당시 부사(浮査) 성여신 (成汝信, 1546-1632)은 진주에 살면서 인근 부사들과 교유관계를 맺으며 산수 유람했다. 이들과 함께 인근 유적들을 방문하면서 경주의 옥피리 감상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 연도는 파악할 수 없지만 대략 16세기 중반경으로 짐작해 본다. 지금까지 살펴본 경주의 연행 시기와도 비슷하기에 당시 옥적에 관한 역사적 신뢰성을 더해준다. 한편 『부선생안(府 先生案)』(1843)에는 서울에 사는 접위관(接慰官) 이인석이 동래에 왔다가 되돌아가는 길에 옥피리 한 개를 경주부(慶州府)에 전하면서 ‘동도(東都)의 옛 유물이니 악부(樂府)에 간직해 두라’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조철제 2004, 126-149). 이처럼 옥피리가 경주에서 전해 내려오는 악기라는 사실은 여러 사료에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1500년대 비슷한 시기의 공연은 주로 처용, 황창무, 옥피리가 자주 연행되었으며 이러한 경주의 향악 춤과 악기는 신라 음악 문화의 원형을 지속적으로 보존·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18세기에는 국내외 사신들을 위한 환송과 환영연이 자주 일어난 시기이다. 성대중이 일본 통신사로 가기 전에 경주에서 본 황창무에 대해 글을 남김으로써 여전히 황창무가 계속 추어짐을 알 수 있다. 기녀들의 복식과 가면 장식을 통해 황창랑의 모습을 제대로 재현하였고 검무의 실력은 뛰어남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유한준(俞漢雋, 1732-1811) 『후검기행』(『自著』 권 7, 古詩 後劒器行<戊戌 用杜詩公孫大娘釰器行韻>)에서는 다른 검무의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사료 14〕
동경의 온갖 놀이 묘미는 당할 것이 없고 개중에 검무(劍舞)가 남방의 으뜸이라네. 진중(예전에 진한이라 불리었다)은 예로부터 제왕의 땅 돌이켜 번화함을 한번 우러러 생각해 본다. 신라는 혼돈의 구멍 뚫은 듯 망한 지 오래고 후대 왕은 덕이 박해 고상(翺翔)에 빠졌다. 위태로운 포석정엔 음악 소리 진동하고 별궁 임해전엔 검의 광채가 생겨났네. 시림의 누런 잎에 가을바람 쓸쓸하고 붉은 입술 구슬 소매에 향기가 그치네. 풍속에 지금도 무기(舞器)가 전하고 혼탈(渾脫)은 제비가 꿰차듯 날아오르는 듯하네. 좌중의 황창무는 더욱 절묘하고 사부(事符)의 소년 왕기(汪踦)에 슬픔이 더하네. 나는 화계현을 따라 반월성에서 묵었는데 대동한 기녀와 무리 지은 춤이 하나하나 드러났다. 가랑비가 붉은 정자의 장막을 적시고 구름이 비단옷을 끌 듯 채색된 방에 펄럭인다. 부윤의 풍류에 진수성찬 차려지고 모임의 연희는 5일을 베풀었다네. 요동치는 서리 같은 칼은 멈추지 않고 다시 미인을 이끌고 비단 치장한 비파를 탄다. 맑고 깊은 밤에 술이 물 흐르듯 오가고 큰 노랫소리가 붉은 일출에 당도한다. 지금도 들판엔 곡식이 황폐하건만 환락으로 근심 병을 버릴 수 없다네(박지웅 2022, 187-188).
경주 부윤이 베푼 연희는 실내 별궁 임해전과 야외 공간인 포석정, 반월성에서 5일 동안 악(樂), 가(歌), 무(舞)의 종합적인 향연이다. 별궁 임해전에서는 황창무, 혼탈무, 검무 등 3가지 춤으로 종목은 간략했지만 모두 칼춤으로 같이 추어졌다. 야외에서는 무리 지은 춤이 하나하나 드러나며 여러 춤이 차례대로 진행된다. 이는 풍류연임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연희가 이어지면서 장소의 변화가 여러 군데에서 일어난다.
특히 이 공연은 앞서 살펴본 16세기 이전 사연과는 몇 가지 상이한 점이 있다. 첫 번째는 기존의 향토색이 짙은 황창무 이외에도 당나라의 혼탈무가 추어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춤은 유득공柳得恭 선생(1748-1807년)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1784년)에서도 찾 아볼 수 있다.
〔사료 15〕
고영인顧寧人,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두보의 시 공손대랑의 제자가 검무를 추는 것을 보고의 서문에는 “연성에서 공손대제가 혼탈무 추는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상서 『곽산운열전』에는 “중종 황제가 측근 신하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장작대장 종진경이 혼탈무를 추었다”라고 했다. 호삼성의 『통감』 주에는 “장손무기가 검은 털실로 혼탈 모자를 만들었 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모방하여 조공혼탈이라 불렀고, 이것이 발전하여 춤이 되었다”라고 했다. 중종 신륭 2년 3월, 병주 청원현위인 여원태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최근 수도와 시장에서 사람들이 혼탈을 쓰고, 멋진 말을타고, 호복을 입고 ‘소막차’를 부르니 이는 우아한 음악이 아니다.” [구의 설명은 여기서 끝난다.] 오늘날 검무를 추는 기생들은 군복과 전립을 착용해야 하는데, 이를 흔히 ‘검무’라고 부르며, 이는 당나라 시대의 혼탈춤이다(柳得恭, 『古 芸堂筆記』 券 6, 渾脫舞).
위의 기록에서 조선시대 후기 기녀들은 군복과 전립을 갖추어 입고 혼탈 검기무를 추었 다고 언급했다. 『도곡집』 기록에 나타난 ‘혼탈무 추는 남은 모습은 간드러지고 서리 덮인 칼날은 하얗게 빛나는구나’ 대목에서도 이 춤은 관서 지방에서도 추어짐을 알 수 있다(李 宜顯 『陶谷集』 券 3, 渾脫裊餘姿 霜刃耀白日).경주 지역의 혼탈무는 어느 지역에서 유래했 는지 기록상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그러나 이 당시 경상도와 관서 지방 등에는 혼탈무가 흔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경주에서도 역시 혼탈무와 향악 춤인 검무, 황창무를 병행하며 추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경주부윤이 검무를 보면서 지금도 무기(舞器)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 부분에서 무 기의 정체성에 대해 몇 가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중종 신룡 2년(706) 3월 당시 저잣거리에 서도 기녀들이 혼탈모를 쓰고 춤을 추면서 마치 살아 움직이듯 공중으로 높이 뛰어오르는모습을 표현했다. 이때의 이 무기는 머리에 착용하는 모자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이 춤은 본질적으로 검무에 해당하므로, 기녀들이 연행 과정에서 칼을 주요 무구(舞具)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한편으로는, 혼탈과 황창무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기녀들이 '황창탈'을 착용하고 춤을 추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이종숙 2018, 77-78).
두 번째는 앞선 연희에서 볼 수 있었던 가야금과 옥피리와 같은 신라 향악기가 아닌 비파와 같은 중국에서 전해진 악기가 연주된다. 비파 연주는 현재 제시된 사료에서 볼 수 없던 내용이다. 경주 객사에서 노기(老妓) 비점과 기생 영매는 주로 문인에게 계림(鷄林)의 구보, 신라의 옛 악보로 거문고를 연주하는 등의 모습을 선보인 바 있다. 통신사 성대중과 신유한 등 여러 문인이 비점의 노래 실력과 거문고 실력에 찬사를 보내는 등 기생 영매는젊은 시절부터 거문고와 노래, 춤에 능하여 전문적으로 기예를 궁중과 타지방에서 자주 펼쳤다. 그러나 비파가 서역에서 들여와 5세기경 고구려에 전해지면서 고려시대와 조선시 대에 궁중과 지방의 일반인들도 연주했다. 이 당시 이러한 대중성을 받아들여 비파 연주가 진행되었을지 모른다.
이로써 15세기와 19세기 간격의 시기에 경주 공연의 형태와 구조적 변화는 있었다. 경 주 지역에서 추어진 연희는 대부분 향악기 연주와 더불어 황창무, 처용무, 검무가 주를 이 루었고 대부분 연향에서 추어졌다. 지금까지 제시된 사료에서는 공연 내용이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존 기록을 검토해 볼 때 「후검기행」에 나타난 공연은 앞선 모습과는 다르다. 경주만의 신라 시대 고유성(固有性)을 담은 모습이보이기도 했지만 삼국 시대에 들여온 당나라 악기 등을 수용하여 중국의 검무와 같이 추어 지면서 당나라 문화와 혼재되어 있다. 이는 신라의 독자적인 문화와 당나라의 영향과 관련 하여 있다고 본다. 신라와 당나라의 사신 간의 교류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패권 다툼을벌이고 있던 시기의 국제 정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에 당이 들어서고 신라가 이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이후 문화적으로 성숙한 경지에 도달했다(김진숙, 김정현, 이수희 2011, 208-209). 이런 역사적인 바탕으로 신라 나름의 문화를 다져 놓으면서 고유의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후기 궁중 검무는 신라 때 황창의 설화에 의하여 창제되어 전래하지 못하고 중국 홍문연의 내용으로 내려와 가면을 벗고 추기 시작했으며 정체성이 희박해졌다(이흥구, 손 경순 2010, 42-44). 15세기-19세기에 걸쳐 선천, 영변, 진주 지방에서 추어진 검무들 역시 황창랑의 탈과 가면이 없었다.
이어 황창무의 가면 연희는 18세기 당시에도 계속 추어졌음을 『청성집』 권 3에 실린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성대중은 일본 통신사로 참여하여 가는 도중에 교방 악부에서이 춤을 보고 가면 장식이 여전히 전해진다고 했다. 경주는 조선시대 당시 가면을 착용한 연례가 없어졌는데도 ‘황창랑의 탈’을 지속적으로 착용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경주 지역 에서는 황창무를 통해 신라의 무용 전형을 고수하려는 독자적인 노력이 확인된다.
한편, 지방에서 추어지는 대부분의 춤은 궁중 정재 등의 종목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않는다. 전국 각지에 공연된 춤은 평안도, 전라도, 경상도 등지에서 다르고, 각양각색이다. 평안도 평양(김은자 2003)과 성천 지역(김은자 2004)은 지역만의 차별성을 두고자 10가지이상의 궁중 정재와 그 지방만의 춤을 섞어 추었다. 관서 지방은 궁중 정재를 포함하여 사자무(獅子舞), 승무, 입춤 등 민속무가 함께 이루어졌다(송혜진 2011, 312-313).
반면 경북 경주 지역은 15-19세기 사이에 많은 공연 종목 수를 보이는 것이 1767년 『당주집』(朴宗. 『鐺洲集』 권15,「遊錄」)을 통해 드러났으며, 부윤이 벌인 연희는 초무, 아 박, 향발, 무동, 처용, 정자, 반도, 주무, 포구락, 황창무, 학무까지 11개 춤으로 구성된 것을확인할 수 있다. 이 종목을 바탕으로 연행마다 정재가 가감(加減)되어 추었다. 이 중의 학 무는 18세기 후반에 경주 악부로 유입되어 기존 춤 구성에 추가되었다.
이 춤의 발생은 본래 삼국사기, 고구려 벽화, 백제금동대향로에 묘사되어 삼국 시대에서부터 기원하여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고려시대에 전승되었다. 조선시대 15세기 중반에 창작된 향악정재로 구분되어 1795년(정조 19) 『정리의궤』를 통해 학무가 공연된 사실이 드러났다.
표 2.
조선시대 지방에서 추어진 학무 (Crane dance, hakmu, performed in the provinces during the Joseon Dynasty)
(박지웅, 「경주교방」 ‘新羅十舞’ 연행양상 고찰 : 「東京遊錄」을 중심으로(A Study on the Performance Aspects of ‘Silla Sibmu’ (Ten Dances of Silla) in Gyeongju Gyobang: Focusing on Donggyeong Yurok), 2022. 08.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지역 | 공연 시기 | 문헌(간행연도) | 저자 | |
|---|---|---|---|---|
| 평안도 | 평양 | – | 『평양지』(1590) | 윤두수 |
| 성천 | – | 『성천지』 원지(1603) | 이상희 | |
| – | 『성천지』 속지(1656) | 이동로 | ||
| 1838 | 『선루별곡』 | 저자 미상 | ||
| 황해도 | 황주 | 1829.3.26 | 『심전고』 『연계기정』(1829) | 박사호 |
| 경상도 | 진주 | 19세기 | 『교방가요』(1872) | 정현석 |
| 경주 | 1767 | 『당주집』 『동경유록』(1767) | 박종 | |
위의 <표 2>를 미루어 볼 때 지방의 학무는 각 지역에서 뽑아 궁중으로 올리던 기녀나 향기에 의해 평안도와 경상도 등지에서 추어졌다. 먼저 16세기 평안도 평양에서 시작되어 성천을 거쳐 경상도 경주와 진주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지역은 ‘끝에는 학춤으로 이어가니 이는 새로 생긴 악(樂)이다’라고 기록(박지웅 2022, 202)된 것으로 보아 이 전에는 없다가 1767년 경주 악부에 최초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해 본다.
학무의 진행 구조는 『고려사(高麗史)』 악지와 『악학궤범』의 기록으로 볼 때 학무와 연 화대무가 각각 독립적으로 추어지거나 함께 상연되기도 한다. 『악학궤범』의 내용을 보면 조선시대 성종 때 ‘학연화대처용무합설’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중에 경주의 학무는 ‘학연화대합설무’ 구조로 진행된다. 사실 조선시대 『진찬의궤』와 『진연의궤』에 따르면 궁중에서 학연화대무가 한 장르로 모습을 보이는 것은 1877년부터이다. 이후 1887년(고종 24), 1892년(고종 29), 1901년(고종 38), 1902년(고종 39)까지 야진 연, 야진찬에서 몇 차례 보인다. 이로써 학연화대무가 조선 후기에 생겨난 공연 형태라는사실을 전해 주며 이보다 앞선 시기에 경주에서는 이미 추어짐을 알 수 있다.
경주의 학무 이외에도 경남 진주 지역에서 추어진 모습이 『교방가요』에 나타난다. 이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지만 비슷하면서도 차이점이 있다. 학무와 연화대의 합작으로 연꽃 속의 소녀와 학과 함께 춤을 춤으로써 학연화대무가 진행된다.
특히 학무(鶴舞)와 연화대무(蓮花臺舞)의 결합 과정에서, 연꽃 속에서 등장하는 동녀(童 女)들이 추는 춤의 형태상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경주는 학이 연꽃에서 나온 소녀와 함께 무대 위에서 춤을 추었지만, 진주는 소녀가 학 위에 올라타 춘다.
또한 경주는 유일하게 남자만 백학을 분장하고 춤을 춤으로써 유일한 남성 춤이다. 반면 진주 지방과 궁중은 기녀들이 등장하는 점과 비교해 볼 때 가장 큰 특이점이라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경주는 연꽃에서 나온 소녀의 모습마저도 남장(男裝) 복식을 갖추고 있다. 조 선시대 당시 녹사(錄事)나 서리(書吏)가 쓰던 관모를 어린 소녀에게 착용하게 함으로써 학과 소녀를 모든 남성의 이미지로 바꾸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학의 형태는 궁중의 학과 달리 다른 지방의 학과 같은 백색이다. 그러나 진주 지방 학의 수가 달랐는데 진주 지역은 2마리이고 경주에서만 1마리이다.
따라서 학무는 지방과 궁중과 비교해 볼 때 학과 춤의 형태, 전개 과정 등 다른 양상으로 보인다. 경주와 진주 지방은 가까운 지역에 비슷한 시기에 학춤이 추어졌음에도 공연 양상이 획일적이지 않고 학의 형태나 무원의 수 등이 달랐다. 비단 이 두 지역만의 차이가 아니라 궁중에서도 차이를 엿볼 수 있으며 학무는 궁중과 지방에서 지속해서 변화의 과정을겪었다고 본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종합해 보면 경주에서 열린 연희는 15-19세기에 걸쳐 여러 종류의 연희가 열렸다. 이는 지방 감사(監司)를 환영하는 잔치, 외국 사신들을 위한 사연(賜宴), 문인이나 선비들의 풍류연(風流宴)이나 주연(酒宴)과 같은 사연, 통신사들을환송(歡送)하는 전별연 등 다양했으며, 각각 연행 장소와 연행 목적, 그리고 이 공연을 누리는참여 계층 등이 다르다. 저마다 같은 양상으로 공연되지는 않았으며 춤의 진행 구조, 공연의 종목 수, 춤의 특징이 다른 양상으로 펼쳐졌다. 먼저 전국 각지에 공연된 춤의 종목은 평안도, 전라도, 경상도 등지에서 다양했으며 저마다 궁중 정재와 그 지역만의 춤을 섞어 추었다. 경주 악부도 역시 궁중 정재를 연희했지만, 그 연행에 따라 종목의 수가 가감되기도 했다.
이 당시 서경 악부는 궁중정재에 ‘배따라기’를 더해 추고 평안도 성천 악부도 정재에 ‘사자무’를 섞어 춤으로써 저마다 자신의 지방에서 유래한 민속춤과 함께 추었다. 마찬가지로 경주에서도 신라의 춤으로 볼 수 있는 황창무와 처용이 자주 등장했는데 이 모습은 많은 기록에서 볼 수 있다. 게다가 이 춤은 전국 각지에서 손꼽힐 만큼 자주 공연에 출연하여 추어졌고, 관기들의 기예는 누구보다 출중했다는 점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경주의 관기들은 이 춤을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였으며, 시대적 변천 속에서도 신라의 문화적 전통을 고수하고자 주체적으로 노력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더불어 타 문화를 수용하여 당대의 유행을 반영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당시 민간 문화에 흡수된 당나라의 검무(劍舞)를 연행함으로써 연희 종목의 외연을 확장하였으며, 타 문화권과 활발히 교류했던 면모 또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학무가 1767년에 악부로 유입되었지만, 그 기원이 궁중과 지방 중에 어디인지는알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지방과 궁중의 춤과 비교해 볼 때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들은 학의 형태와 전개 구성이 달랐으며 그 연행 주체자의 성별도 상이했다. 결과적으로 경주 지역은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변용을 시도한 것으로 판단된다.
Ⅳ. 맺음말
조선시대 정치적, 경제적 영향과 선상기의 활동, 중인계층의 영향으로 경주 지역의 관기 들은 지역의 안팎으로 공연 활동을 활발히 했다. 특히 경주 관기들은 실력이 출중하여 궁 중과 주변 지역에 파견되어 자주 연향에 참여했고 18세기 통신사들 사행 기록에 확인되는사례가 있다. 이에 경주 향기들은 가장 인기 있었고 그들의 공연 수준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함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당시 관기들은 주로 귀빈 이나 문인들의 거처인 객관이나 임해전 등에서 공연하거나 의풍루(倚風樓), 빈헌루(賓賢 樓), 봉황대, 포석정, 반월성, 별궁 임해전, 반월누대 등 야외 등지에서 연희가 베풀었다.
본 고는 지금까지 조선시대 15-19세기에 기록된 경주 공연에 관한 사적 사료를 살펴봄 으로써 춤을 중심으로 공연 문화 양상을 고찰할 수 있었고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경주에서 열린 연희는 지방 감사를 위한 연(監司宴), 통신사들을 위해 베푼 사연 (賜宴), 사적인 모임을 위한 회연(會宴), 환송연(歡送宴), 전별연(餞別宴) 등이 열렸다. 이를 들여다보면 1400년대에는 부윤으로 보내는 송별연, 1580년대 외방 관료를 위한 감사연(監 司宴), 1624년 9월 10일, 1763년의 전별연(餞別宴), 1711년 신묘 6월 1일, 1763년 8월 17 일, 1767년 12월 1일은 통신사(通信使)들을 위한 환영연(歡迎宴), 1778년 지역 관료가 문 인(文人)들에게 베푼 풍류연 등이 있었다.
이렇게 15-19세기에 벌어진 공연은 주최자, 공연 목적, 향유자 등이 다르다. 즉, 주체자 인 관기들은 다양한 감상자를 상대로 연희했으며, 이러한 공연을 즐기는 감상자들은 주로 문인, 선비, 기행가, 통신사, 지역 관료 등이 있다. 이에 따라 치러진 공연은 각각 연희의 진행에 있어 구조적 특성에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공연별로 연행 공간과 향유 계층, 목적이 달랐던 만큼, 동일한 내용과 형식의 공연이 반복되기보다는 각 맥락에 맞게 차별화되어 연행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연향은 규모에 따라 진행 절차 간소화의 여부가 결정되며 진행 일수와 참여하는 주체자의 인원수에 대해 영향이 미치게 된다. 이 중에 통신사의 환영연은 외국 사신을 위해 연행됨으로써 규모의 크기가 컸으며 많은 여기(女妓)들이 참여했다. 반면 개인적으로 베풀어진 사연이나 송별연 등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소박하게 이루어졌으며 참여하는 여기의 숫자도 적다.
둘째, 공연에서 춤의 종목의 수와 종류가 달랐다. 전국 각지 내에서 추어진 정재는 거의 유사하면서도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정재 종목들은 경주에서도 비 슷하게 추어졌지만, 대부분 궁중의 향악, 당악정재들이 가감(加減)되었다. 경주에서 공연된 춤 종목들은 연희에 따라 차이가 컸으며 적게는 2가지에서 많게는 11가지까지 수를 달리 했다.
셋째, 신라의 원형을 바탕으로 변화와 재창작이 일어났다. 1500년대와 1700년대에 연희는 처용과 황창무, 옥피리 등이 연주되었다. 특히 황창무는 다른 지방과 다르게 가면을 쓰고 황창랑의 모습을 재현시켜 춤으로써 신라의 전형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며 옥피 리는 신라의 향악기로 다른 관악기가 있었음에도 자주 연주되었다. 그러나 경주는 시대에 변화적 양상에 따라 주변의 정세에 맞추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당나라의 악기와 혼탈무를 받아들여 공연되고 있었다.
특히 학무가 1767년에 경주 악부로 유입되어 이후 기존 공연의 종목에 추가되어 추어졌 다. 그 기원의 출처는 알 수는 없지만 궁중 및 다른 지역과 별개로 다른 양상을 가지고 추어지고 있다.
따라서 15-19세기 경주 관기들의 공연 활동은 공연의 목적과 공간, 그리고 종목에 따라 다양했으며 크고 작은 공연이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궁중과 지방간의 춤 양식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지역만의 특수성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지방마다 이와 중복되는 부분은 있으나 완전한 동일성을 갖지 않기 위해 지역적 정체성에 부합하는 독창 적인 춤과 음악을 새롭게 형성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는 어떤 관습으로부터 시작되어 새로운 문화 형식으로 등장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선조들이 갖는 개인 사연이나 집단 연희가 문화예술의 확장으로 나가는 양상을 경주 지역의 공연을 토대로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러한 지역과 궁중 간에 문화적 교류는 본연의 인식보다는 창작과 변용을 일으켜 자신만의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을 거쳐 나갔다.
본 고는 경주 지역에서 이루어진 공연사적 문헌 사료를 통해 이 지역 공연 문화의 정형 성을 제고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다른 지역의 공연과의 맥락적 관계를 통해 문화예술의 양식과 구조적 차별성에 대해 살폈다. 그러나 15-17세기의 공연 양상은 잔존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본고에서 도출한 18세기의 특징과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 없으며, 향후 전 시기를 아우르는 추가 사료의 발굴과 비교 연구가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