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코로나19(COVID-19) 팬데믹으로 공연예술의 현장은 비대면이라는 환경적 조건 속에서급격하게 변화하였다. 관객과 동일한 시공간에서 몸 대 몸의 공존을 통해 의미가 발생한다고 여겨졌던 무용예술은 매개된 공연과 라이브 공연이 교차하는 환경 안에서 무대의 현장성을 다시 사유하게 되었다(박성혜 2020;박수영 2021;이성곤, 한석진 2024;김주희 2024). 작품의 생산과 유통은 온라인 스트리밍·영상화·플랫폼 배급으로 이동하였다. 무용과 디지털 매체의 결합은 팬데믹 이전부터 이어져 왔지만 팬데믹은 이 결합을 일부 창작자의 선택적 실험이 아니라 창작과 수용의 전제 조건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이전과 구별된다(정옥희 2022). 더욱이 이러한 변화는 한시적 위기에 대한 대응에 그치지 않고 원격 협업과 영상 매개 공연이 팬데믹 이후의 무용 현장에 지속적으로 남으면서 매개된 무대를 동시대 춤의 작동 조건으로 전환시켰다. 따라서 매개된 무대 속에서 춤추는 몸이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현존의 의미를 발생시키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유효한 미학적 과제로 남아 있다.
본 연구는 이 물음을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의 춤에 관한 사유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매개된 춤에 나타나는 춤추는 몸이 어떻게 사유로 작동하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다만 이러한 동시대 춤의 현상은 기존의 라이브 공연과 동일한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춤의 조건 안에서 현존의 의미가 다르게 발생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이에 본 연구는 영상 매체가 라이브 춤을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넘어 매개된 조건 안에서도 춤추는 몸이 어떻게 사유의 은유로서 작동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를 논의하기 위한 본 연구의 분석 대상은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 1949-)의 「The Barre Project: Blake Works II」(2021)이다. 이 작품은 팬데믹으로 극장이 폐쇄되던 시기에 줌(Zoom)을 통한 원격 안무 리서치를 거쳐 관객 없는 극장에서 촬영된 뒤 디지털 플랫폼으로 공개된 댄스 필름이다. 이 작품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은 포사이드가 발레 훈련의 기본 장치인 바(barre)를 중심으로 하면서 동시에 원격 협업과 무대 영상과 프레임의 결합, 클로즈업의 편집을 능동적으로 활용하여 전통적인 무대와는 다른 시공간과 움직임의 양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에 본 연구는 「The Barre Project」를 통해 매개된 조건 안에서 춤추는 몸이 단순히 공연 기록물이나 가상의 이미지로 환원되지 않고, 공간·몸·시선의 차원에서 사유체로 작동할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춤을 사유의 은유로 정립하는 바디우의 『비미학(Petit manueld'inesthétique)』(2010)을 중심 이론틀로 삼는다. 바디우에게 ‘춤은 몸 자체가 곧 사유인 사유체(corps-pensée)’(Badiou 2010, 116)로서 스스로 진리를 생산할 수 있음을 몸에 새겨 보여주는 사유의 형상이다. 춤추는 몸은 언어로 포착되기 직전의 순수한 발생의 순간에 놓인 사유를 몸으로 드러낸다(장인주 2025, 226). 즉 바디우에게 춤은 사유가 발생할 공간이 마련되고 그 안에서 몸이 정형화된 의미를 벗어나며 이를 응시하는 시선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사유체로 성립하는 것이다. 이 같은 춤의 움직임을 바디우는 “잠재적인 운동”(Badiou 2010, 116)이라 부른다.
본 연구는 바디우가 제시한 춤의 여섯 원리를 공간·몸·시선의 세 측면으로 재구성하고이 원리들이 무대라는 조건에 국한되지 않고 매개된 조건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검토한다. 이때 바디우의 잠재적 운동 개념에 따라 매개된 조건에서 춤추는 몸이 사유체로 성립하는가를 몸의 운동 방식 자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물음과 관련하여 포스트코로나 시대 무용에 관한 논의는 라이브니스(liveness)와 현존과관객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성곤, 한석진(2024)은 온라인으로 매개된 무용공연이 현장 공연의 불완전한 대체물에 그치지 않고 공연의 생생함과 현존이 구현될 수 있음을 관객의 관람 경험을 통해 밝혔다. 박성혜(2020)는 팬데믹이라는 조건 속에서 소수의 관객을 향한 공연이나 개념적 성격의 무용이 지니는 예술적 가치를 재조명하며 무용의 현장성이 물리적 공동 현존만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논의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은 팬데믹 이후 무용의 공연 방식과 매체 환경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지만 대체로 라이브니스와 현존을 공연이 성립하는 시공간적·제도적 조건의 차원에서 다루며 매개된 조건 속에서 춤추는 몸 자체가 어떻게 사유를 발생시키는지는 상대적으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바디우의 관점에서 무용을 논의한 연구들은 주로 『비미학』의 「사유의 은유로서의춤」을 중심으로 춤추는 몸의 사유성을 다루어 왔으나(나일화 2012;김지인, 최상철 2022;장인주 2025) 바디우의 춤 사유를 동시대 춤 일반이나 라이브 공연의 특성을 기술하기 위해 활용하는데 머문 경향이 있다. 이에 본 연구는 바디우의 춤 사유를 매개된 춤의 몸을 독해하는 준거로 전유하고 특히 잠재적 운동 개념을 매개된 조건으로 확장하여 적용한다는 점에서 선행 연구와 구별된다. 나아가 본 연구는 매개된 춤을 문화적·사회적 논제로 다루기보다 미학적으로 탐색한다는 데 차별점을 둔다.
본 연구는 먼저 바디우의 비미학을 토대로 춤을 사유체로 정립하고 그 사유가 매개된조건 속에서 전개되는 방식을 검토한 뒤 이를 바탕으로 「The Barre Project」를 분석한다. 이에 따른 연구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바디우의 비미학은 매개된 춤의 춤추는 몸을 사유체로 이해하는 데 어떤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가? 둘째 「The Barre Project」에서 춤추는 몸은 공간·몸·시선의 차원에서 어떻게 사유체로 작동하는가?
연구 방법은 문헌 연구와 작품 분석을 병행한다. 이론적 고찰을 위해 바디우의 『비미학』을중심 텍스트로 삼고 포스트코로나 시대 춤에 관한 학술 연구를 함께 참조한다. 작품 분석에서는 영상 자료를 일차 근거로 삼고 프로그램 북과 프리뷰·인터뷰 기사·공연 리뷰 등을 보조 자료로 활용한다. 분석은 2장에서 도출한 공간·몸·시선의 세 측면과 매개된 조건의 결합을 분석틀로 삼는다. 이 가운데 원격 협업, 무대 촬영, 분할 화면과 클로즈업처럼 영상 매개의 방식이 전환되는 지점이자 세 측면이 구체적인 움직임 관계로 관찰되는 장면을 중심으로 줌 회의 장면, 바를 둘러싼 움직임, 손 클로즈업 장면을 선정하여 교차적으로 살펴본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제한점을 지닌다. 첫째, 바디우의 비미학을 중심 분석틀로 삼으므로 다른 미학적·매체론적 관점에서의 해석은 후속 과제로 남는다. 둘째, 매개된 춤의 다양한 사례 가운데 「The Barre Project」 한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하므로 일반화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줌을 통한 원격 협업·영상과 무대의 결합·부분 신체의 클로즈업 등 동시대 춤의 조건을 다층적으로 응축하고 있어 매개된 춤에서 춤추는 몸이 사유체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하는 사례로서 의미를 지닌다.
Ⅱ. 바디우의 사유의 은유로서 춤
본 장은 춤추는 몸이 사유체로 성립하는 근거와 그 사유가 매개된 춤까지 미칠 수 있는조건을 마련한다. 바디우에게 춤은 그의 철학이 몸의 차원에서 가장 응축되어 드러나는 자리이며 존재와 사건과 진리에 관한 그의 철학은 예술론인 비미학을 거쳐 춤추는 몸에서 구체화된다. 본 연구가 주목하는 것은 그 몸이 어떻게 사유로 작동하는가이다. 이를 위해 본 장은 비미학의 전제를 개괄한 뒤 1절에서는 춤이 사유의 은유로 성립하는 조건인 잠재적 운동과 사라짐의 특성을 살펴보고 2절에서는 바디우가 제시한 춤의 여섯 원리를 공간·몸·시선의 세 범주로 재구성한다. 나아가 이 원리가 영상으로 기록되거나 디지털로 매개된 춤을 해석하는 데 어떤 조건에서 유효한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비미학은 예술과 철학의 관계를 다시 묻는다. 바디우는 『비미학』에서 예술을 철학에 종속시켜 온 세 도식을 비판하고 예술이 과학·정치·사랑과 더불어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자율적 절차임을 드러낸다(나일화 2012, 88). 예술은 철학이 해석해 주기를 기다리는 대상이기보다 스스로 사유하는 절차이며, 본 연구는 이 같은 바디우의 사유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한다(Badiou 2010, 서문).
바디우는 춤을 개별 예술 장르의 하나이기 이전에 몸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자리로 본다. 그에게 춤이 예술이 아닌 것은 춤이 “예술의 가능성의 표지(signe), 몸에 새겨진 표지”이기 때문이다(Badiou 2010, 132). 무용수가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에 사유가 처음 생겨나며 몸의 움직임이 곧 사유의 발생이다. 바디우가 춤추는 몸을 사유체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본 연구는 사유의 은유이자 사유체의 출현으로서의 춤을 분석의 준거로 삼는다.
1. 춤의 잠재적 운동성
비미학의 관점에서 춤은 몸을 통해 사유가 일어나는 사건이다. 여기에서 사건이란 그순간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이자 아직 어떤 이름도 붙지 않아 무엇이라 규정되기 이전의 것을 뜻한다. 춤은 찰나에 사로잡힌 몸이며 이는 있게 될 시간 이전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Badiou 2010, 118). 춤추는 몸은 그러한 사건의 자리에 놓인 사유를 몸으로 드러내며(장인주 2025, 229), 이러한 관점은 동시대 무용을 고정된 미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대신 무엇이 춤인가를 근본에서 다시 묻게 한다(김지인, 최상철 2022, 39). 이때 몸이 드러내는 사유는 언어로 개념화되고 이름 붙여진 사유를 무너뜨려 출현과 사라짐의 경계에 놓인 사건적 사유이다(Badiou 2010, 117).
이러한 사유가 일어나는 자리가 사유체다. 사유체는 몸 자체가 곧 사유인 상태를 가리킨다. 바디우에 따르면 이는 “몸 안에 붙들린 사유로서가 아니라 사유인 몸으로서” 몸을 보여주는 일이다(Badiou 2010, 95). 즉 움직이고 있는 그 몸이 이미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본 연구는 이 사유체 개념을 몸의 현존이 물리적 공동현존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출발점으로 읽는다. 사유가 몸의 운동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면, 그 사유의 성립은 몸이 관객과 같은 자리에 있는가보다 몸이 어떻게 움직이며 나타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 같은 춤의 작동 방식을 “잠재적인 운동”이라 부르며 춤의 본질을 그 움직임안에 내재한 현실화 이전의 가능성에 둔다(Badiou 2010, 114). 그는 이 운동성을 니체(Friedrich Nietzsche)로부터 전유한다. 춤은 자기 자신의 중심에 매여 그 중심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전개되는 가벼운 움직임이다(Badiou 2010, 115). 여기에서 가벼움은 민첩함이나 물리적 무게의 부재가 아니라 몸이 외부의 명령에도 내부의 충동에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자기 중심을 유지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본 연구는 이 잠재적 운동을 매개된 춤을 독해하는 핵심 준거로 삼는다. 춤의 본질이 실현된 동작이 아니라 그 안에 유보된 가능성에 있다면, 이 가능성은 무대라는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움직임의 내적 구조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때 충동은 니체가 말한 신체적 유혹, 즉 몸의 본능적 저속함을 뜻하는 동시에 우리가일상에서 맺는 모든 연결 관계를 뜻하기도 한다. 흥겨운 음악이 흐를 때 몸이 절로 들썩이듯 외부의 자극에 곧바로 이끌려 반응하는 것이 그러한 연결이다. 바디우가 춤을 원초적 엑스터시로 보는 입장에 반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에게 춤은 몸이 충동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다. 음악에 복종하는 춤이 음악을 군악으로 만든다는 그의 비판 역시 리듬에 대한 자동적 반응이 이러한 연결의 전형이기 때문이다(Badiou 2010, 119).
한편 바디우가 말하는 억제는 운동의 현실화 자체를 미루는 일이며 자유로운 주체성의상실과는 무관하다. 빠르게 회전하던 몸이 멈추기 직전 속도를 늦추며 다음 움직임으로 이행하는 순간처럼 운동은 바로 실행되는 대신 잠시 유보된다. 이때 드러나는 것이 빠름 속에 숨겨진 느림이며 억제하는 힘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 안에, 운동 자체의 내부에 현실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Badiou 2010, 114). 따라서 춤추는 몸은 예측 가능한 움직임을 실행하여 새로운 생성의 힘을 막아 버리는 대신 아직 이어질 여지를 자기 안에 남겨 두는 억제와 유보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춤에서 나타나는 빠름과 느림 사이 그리고 몸짓과 몸짓이 아닌 것 사이의 비결정성은 강도적 조건을 가진다. 춤추는 몸의 강도는 “긍정적 내면성이 해방되는 것으로서의 생성”이다(Badiou 2010, 114). 이처럼 바디우의 잠재적 운동은 실현과 유보, 빠름과 느림 사이의 비결정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이 비결정성을 매개된 춤을 읽는 미학적 지표로 전유한다. 즉 카메라와 편집이 개입하는 조건에서도 몸이 완결된 형상으로 굳지 않고 다음 움직임의 가능성을 유보하는 한 그 몸은 여전히 사유체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매개를 현장의 결핍으로 보는 관점과 다르게 매개된 조건에서 사유체의 성립 여부를 몸의 운동 방식 자체에서 찾으려는 본 연구의 관점을 뒷받침한다. 바디우는 춤추는 몸이 완벽하게 기호화된 지식을 재현하지 않고 매 순간 백지 상태에서 사유한다고 보며 이를 ‘고정되지 않은 것의 은유’로 설명한다(나일화 2012, 96).
무엇보다 이러한 잠재적인 운동은 바디우적 춤의 특성인 사라짐을 발현한다. 춤은 다른어떤 예술보다도 사라짐에 가까운 예술이다. 무용수가 어떤 선을 만들어 내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지워지고 하나의 움직임은 다음 움직임에 자리를 내주며 곧바로 소멸한다. 바디우는 이 사라짐을 춤의 본질로 강조한다. 움직임이 하나의 형태로 굳어 남는다면 그것은 이미 정해진 기호가 되어 더 이상 사유가 아니며 오직 사라지기 때문에 춤은 매번 새로 발생하는 사유일 수 있다.
그는 이를 두고 춤이 가장 큰 영원의 무게를 지닌다고 말한다. 영원은 사라지는 것을사라지는 그대로 간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Badiou 2010, 133). 그렇다면 사라지기에 오히려 영원의 무게를 지닌다는 이 역설은 무대라는 현장을 떠나 영상으로 기록되고 매개되는 춤에 대해서도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사라짐이 춤의 본질이라면 기록과 매개라는 조건에서도 춤은 여전히 사유로 작동할 수 있다. 본 연구가 3장에서 매개된 조건의 춤을 다루는 것은 바로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2. 사유체로서의 춤
바디우는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의 춤에 관한 사유를 경유하여 무용의 여섯 원리를 제시한다(Badiou 2010, 120). 이는 공간의 필요불가결함·몸의 익명성·성의 지워진 편재성·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남·벌거벗음·절대적 시선이다. 이 원리들은 사유의 은유로서의 춤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이며, 그 자체로는 병렬되어 있다(나일화 2012, 94). 이에 본 연구는 이 여섯 원리를 공간·몸·시선의 세 측면으로 재구성한다. 이 재구성은 여섯 원리를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하거나 임의로 축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유체가 성립하는 사건의 구조에 따라 이들 원리를 세 위치로 구분한 해석적 범주화이다. 바디우에게 춤은 하나의 사건이며 그 사건은 춤이 일어나는 자리, 그 자리에서 춤추는 몸, 그리고 그 몸을 지각하는 시선이라는 세 위치를 통해 성립한다. 공간의 필요불가결함은 춤이 발생하는 자리에 관한 규정이다. 몸의 익명성·성의 지워진 편재성·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남·벌거벗음은 이 네 원리가 모두 춤추는 몸이 특정 인물이나 정체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 계열을 이루므로, 춤추는 몸의 존재 방식에 관한 규정으로 묶인다. 절대적 시선은 그 몸을 보는 자의 조건에 관한 규정이다. 즉 공간·몸·시선은 여섯 원리를 관통하는 세 축을 이루며 이 세 위치를 관통하는 것이 1절에서 살펴본 잠재적 운동이다. 다만 여섯 하위 원리가 모든 장면에서 동일한 비중으로 나타난다고 보지는 않으며, 각 장면에서 두드러지는 원리를 중심으로 읽는다.
첫째는 공간의 측면이다. 모든 공연예술이 공간을 요구하지만 바디우는 말라르메를 인용하며 오직 춤만이 공간을 자신의 본질 안에 포함하는 유일한 예술이라 규정한다(Badiou 2010, 121). 연극과 회화가 무대와 화면을 고유한 장소로 미리 전제하는 것과 달리 춤에는 주어진 공간이 없다. 무용수가 팔을 뻗는 순간 팔과 몸통 사이에 거리가 생기고 발을 내딛는 순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경로가 생긴다. 이처럼 춤의 공간이란 춤추는 몸이 순간마다 만들어 내는 관계 그 자체다.
말라르메는 이러한 자리를 어떤 치장도 없는 자리 그 자체, 즉 “자리의 처녀성”(Badiou2010, 122)이라 부른다. 이 자리는 생겨나는 순간 사라진다. 만약 춤의 공간이 남는다면 그것은 규칙이 된다. 이 자리는 주인공의 자리이고 이 방향은 정면이라는 식으로 공간이 코드화되는 순간 몸은 더 이상 사유하지 않고 이미 알려진 것을 반복하게 된다. 공간이 발생과 동시에 소멸하기에 고정된 지식으로 정착할 틈이 생기지 않으며 매번 새로 생겨나기에 매번 새로 사유할 수 있다. 1절에서 살펴본 사라짐이 공간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는 동시대 무용을 살펴보는 데에도 유효하다. 이나현(2020)은 동시대 안무가 “매체와 공간 그리고 감상 방식에서 변화”를 보이며 안무의 의미 자체를 확장시켜 왔다고 본다(112). 프로시니엄 무대가 정면을 미리 정해 두고 관객에게 지정된 방식으로 보게 하는 공간이라면, 장소특정적 춤이나 디지털로 매개된 춤 등은 어디든 중심이 될 수 있는 공간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장소의 변용은 공간의 성격뿐 아니라 퍼포머와 움직임과 관객이 맺는 관계적 관습까지 새롭게 조직한다.
다만 본 연구의 대상처럼 춤이 스크린을 매개로 할 때도 실제 공간의 조건이 충족되는지는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레임은 무엇을 화면 안으로 가져오고, 무엇을 밖에 둘지를 정한다는 점에서 공간을 미리 결정하는 장치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춤의 공간은 몸의 운동에서 비로소 발생한다. 따라서 문제는 프레임 안에서도 움직임이 공간을 새로 열어 내는가에 있다. 이에 본 연구는 3장에서 포사이드의 작품에 나타난 공간의 양상을 분석함으로써 이 문제를 비판적으로 탐구해 보고자 한다.
둘째는 몸의 측면이다. 몸의 익명성·성의 지워진 편재성·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남·벌거벗음이라는 네 원리는 춤추는 몸이 특정 인물이나 정체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 계열을 이룬다. 바디우는 무용수의 몸이 하나의 상징일 뿐이라는 말라르메의 사유를 계승한다(Badiou 2010, 122). 여기에서 상징은 모방과 표현 모두에 반대된다. 연극의 몸이 재현에 붙들려 역할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달리 어떤 역할에도 종속되지 않은 춤추는 몸은 순수한 출현의 상징이다(Badiou 2010, 122).
바디우가 이 몸을 익명적이라 부르는 근거는 표현의 부재에 있지 않다. 춤이 시작되기전에는 그 몸이 누구인지 정해져 있지 않고 춤추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 몸이 나타나듯이(Badiou 2010, 123), 미분화된 강도를 내포한 몸의 잠재적 힘이 움직임으로 분출될 때 그 몸은 익명의 상태에 놓인다(나일화 2012, 95). 즉 춤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그 몸이 무엇인지 정해지기에 춤추는 몸은 사회가 미리 정해 둔 정체성 안의 어떤 사람일 수 없다. 이나현(2012)이 포사이드의 작업에서 무용수를 ‘나’라는 주체가 사라진 익명적 몸으로 읽어 낸 것도 이와 맞닿는다(103).
성의 지워진 편재성은 이 익명성의 연장선에 놓인다. 바디우(2010)에 따르면 춤은 성적으로 나뉜 위치들의 만남과 헤어짐으로 구성되며 안무는 그 만남·포옹·헤어짐을 공간적으로 관계 맺는 일이다(124). 이 세 단계는 본래의 목적에서 떨어져 나와 억제된 강도의 순수한 형식으로 남는다. 여기에서 지워지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재현 체계다. 남성성이 능동과 지지로 연결되고 여성성이 수동과 전시로 연결되던 자리에 마주침과 어긋남 그리고 지지와 저항이라는 비인칭적 관계가 나타난다. 몸의 무게와 근력과 질감의 차이는 여전히 지각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의 표상으로 고정되지 않고 힘의 전달과 무게의 교환이라는 안무적 관계로 드러난다. 말라르메에게 여자 무용수가 여자가 아니듯 바디우에게 춤추는 몸은 성적 지시가 작동하기 이전의 몸이다. 이 지점에서 누구의 몸인가라는 물음은 무엇을 사유하는 몸인가라는 물음으로 이행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남과 벌거벗음이라는 나머지 두 원리도 이 계열 위에서 이해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남은 몸이 무용수의 소유물이기를 그치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디우에게 춤이 사유의 은유인 것은 무용수가 몸에 익힌 앎을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Badiou 2010, 126).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앎을 바탕으로 하면서 동시에 이를 가로지르는 몸짓이다. 무용수는 무엇을 할지 미리 정해 두기보다 움직이면서 안다. 다만 이는 몸을 내맡기는 방임과 다르며, 고도의 훈련을 통해서만 이르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벌거벗음 또한 실제 누드를 뜻하지 않는다. 바디우는 이 벌거벗음이 치장을 벗어 버림으로써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사건이 이름 이전에 주어지듯 모든 치장 이전에 주어지는 것이라 말한다(Badiou 2010, 122). 오히려 무대 위의 누드는 성적 코드와 검열의 담론을 즉시 불러들여 몸에 가장 두꺼운 의미를 새겨 넣는다. 벌거벗음은 춤이 서사, 음악적 장치, 무대 장식에 기대지 않으며 나아가 기능적이거나 재현적인 움직임에도 기대지 않으면서 움직임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네 원리가 공통으로 지시하는 것은 춤추는 몸이 명명 이전의 사유가 발생하는 익명적 장소라는 점이다.
매개된 조건은 이 네 원리에 대해 하나의 물음을 제기한다. 촬영 뒤 삽입되는 소리는무용수가 듣지 않은 감정을 추가하고 편집은 춤이 만들어 내지 않은 강약을 부여하며 프레임은 몸의 어느 부분을 보여줄지 정한다. 이는 춤 바깥에서 몸에 의미를 더한다는 점에서 명명 이전의 몸이라는 원리를 흔드는 듯 보인다. 하지만 같은 조건이 원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도 작동할 수 있다. 얼굴과 전신을 재구성하는 촬영과 편집을 통해 프레임이 몸을 특정 인물로 묘사하지 않을 때, 익명성은 무대에서보다 뚜렷해지고 그 몸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의 표상으로도 고정되기 어려워진다. 성의 편재성 또한 마찬가지다. 벌거벗음의 경우 촬영과 편집이 몸에 부여된 기존의 재현적 맥락을 약화시키고 움직임 그 자체를 전면화할 때, 매개는 코드화된 의미가 느슨해질 가능성을 연다.
또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남도 다르게 나타난다. 무대에서 무용수가 스스로 이루어내던 벗어남이 매개된 조건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촬영되고 편집될지를 온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남이 발생할 가능성이 열린다. 무용수는 운동만을 수행할 뿐 자신의 이미지를 소유하지 못한다(이성곤, 한석진 2024, 17). 이를 주체성의 박탈로 읽을 수도 있지만 몸이 원래 소유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리에 따르면 매개가 그 소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원리가 실현되는 조건이 된다. 다만 매개가 네 원리를 실현하는가 아니면 가로막는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며, 프레임과 편집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에 본 연구는 3장에서 포사이드의 작품에 나타난 몸의 양상을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셋째는 시선의 측면이다. 절대적 시선은 객석에 앉은 특정 관객의 눈을 가리키지 않는다. 바디우는 말라르메를 따라 춤의 관객이 철저히 비인격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Badiou 2010, 128). 관객은 사적인 욕망이나 취향을 내려놓고 춤에서 일어나는 사유에 참여하는 자리에 놓인다. 앞의 원리가 몸에 관한 조건이라면 절대적 시선은 보는 이에 관한 조건이다.
여기에서 ‘절대적’이라는 규정은 시선의 강도가 아니라 시선이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음을 뜻한다. 일상의 시선은 무대 위의 몸을 볼 때, 바로 성별을 나누고 위계를 정하며 정서를 부여하고 기량을 판단함으로써 새로 나타난 것을 이미 알려진 것으로 환원한다. 바디우가 춤을 스펙터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스펙터클은 관객이 자신의 욕망을 무대에 투사하기를 요구하지만 춤은 그러한 시선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곳에서는 춤의 벗어남이 지워진다(Badiou 2010, 129).
따라서 절대적 시선은 무언가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하지 않음으로써 성립한다. 몸이 아무리 익명이 되더라도 시선이 그것을 다시 인물로 환원한다면 앞서 살펴본 원리들은 무너진다. 바디우가 이 시선을 “번득이는 시선”이라 부르며 고도의 시선 집중과 구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Badiou 2010, 128). 1절에서 살펴본 사라짐의 역설에 따르면 시선이 붙잡아야 하는 것은 존재와 사라짐의 관계다. ‘낭만발레의 발레리나가 남성적 시선의 대상으로 놓였다’(이나현 2012, 105)는 관점은 춤추는 몸이 대상화의 시선에 노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절대적 시선은 이러한 대상화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매개된 무용에서 이 원리는 새로운 조건에 놓인다. 카메라는 대상을 선택하고 분절한다는 점에서 대상화의 가능성을 지닌다. 프레이밍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정하고 근접으로 몸을 부분으로 나누며 편집으로 언제 무엇을 볼지 설정한다. 실제로 온라인 공연의 무용 관객들은 영화적 연출이 시선의 자율성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클로즈업이나 발걸음과 숨소리가 전달될 때 공연의 생생함을 느꼈다고 진술했다(이성곤, 한석진 2024, 17). 시선의 선택권이 제한되는 동시에 무대에서는 불가능했던 지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디우의 관점에서 주목할 것은 현장감의 성취 여부가 아니라 시선의 성격이다. 몸의 일부가 화면을 가득 채울 만큼 확대될 때 그 부위는 특정 인물에도 서사에도 묶이지 않으며, 대상화가 약화되고 운동 자체가 전면화될 가능성이 생긴다. 이때 카메라의 시선은 욕망의 시선이기를 중단하고 대상이 명명 이전의 상태로 드러나게 하는 절대적 시선으로 전환될 수 있다.
나아가 절대적 시선이 이미 비인격적 조건이라면 그 성립은 관객과 무용수가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데 의존하지 않는다. 현장이 원본이고 매개된 것은 그 복제라는 전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이성곤, 한석진 2024, 3). 동시에 공연의 생생함이 반드시 같은 시공간의 공유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서로 다른 시공간을 연결하는 가운데 현존을 구현한 사례 또한 보고된다(이성곤, 한석진 2024, 2-3).
물론 앞선 연구에서 말하는 생생함은 관객의 지각적 경험에 관한 것이며, 절대적 시선은시선이 사적 욕망에서 벗어날 때 성립한다는 점에서 양자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논의는 물리적 공동현존이 부재한 조건에서도 관객의 시선이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카메라의 근접은 몸을 명명 이전의 상태로 드러내기보다 얼굴과 표정을 부각하여 특정 인물로 환원할 수도 있다. 클로즈업으로 인해 무용수에게 배우에 가까운 수행이 요구되었다는 창작자의 진술은 이러한 위험을 보여 준다(이성곤, 한석진 2024, 16). 따라서 매개된 조건에서 절대적 시선이 성립하는가는 카메라가 신체의 어느 부분에 근접하는지, 그리고 그 근접이 몸을 특정 인물과 정서로 환원하는지 혹은 움직임의 출현 자체로 드러내는지에 달려 있다. 이에 본 연구는 3장에서 포사이드의 작품에 나타난 시선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Ⅲ. 「The Barre Project」에 나타난 사유하는 춤 분석
본 장은 2장에서 살펴본 사유체 개념과 공간·몸·시선의 세 측면을 틀로 삼아 윌리엄 포사이드의 「The Barre Project」를 분석한다. 본 장은 각 장면을 개별적으로 기술하기보다 공간·몸·시선의 세 측면이 작품 안에서 어떻게 맞물려 춤추는 몸을 사유체로 작동하게 하는지를 고찰한다. 1절은 줌 회의 장면을 중심으로 분리된 몸들이 하나의 안무 공간을 구성하는 공간성을 논의한다. 2절은 바를 중심으로 발레 어휘가 고정된 형태로 굳지 않는 잠재적 움직임과 사라짐을 다룬다. 3절은 손 클로즈업 장면을 중심으로 움직임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응시하는 절대적 시선을 분석한다. 이하 본 연구에서는 작품의 정식 명칭인 「The Barre Project: Blake Works II」를 「The Barre Project」로 줄여 표기한다.
1. 다층적 안무의 공간성
포사이드의 「The Barre Project」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극장이 폐쇄되고 무대의 작동방식이 변화하던 시기에 제작된 약 35분 분량의 댄스 필름이다. 작품은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의 음악을 바탕으로 하며 발레 훈련의 기본 장치인 바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관객이 없는 로스앤젤레스의 극장 무대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촬영한 영상이 기본 층위를 이루지만 작품은 이 무대 영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대 위 움직임 사이사이에 안무 과정을 담은 줌 회의 화면이 삽입되고 손을 확대한 클로즈업 화면이 삽입된다. 안무 역시 주로 줌을 통해 진행되었다. 포사이드는 버몬트의 집에 머물렀고 타일러 펙(Tiler Peck), 렉스 이시모토(Lex Ishimoto), 로만 메히아(Roman Mejia), 브루클린 맥(Brooklyn Mack)은 각자의 조건 속에서 원격 리허설과 무대 촬영에 참여하였다(Parry 2021). 작품은 이 같은 분산된 협업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작품 내부로 끌어들인다.
무대 영상과 분할된 줌 화면 그리고 손 클로즈업 장면에서는 서로 다른 거리와 시간을지닌 층위들이 번갈아 나타난다. 이처럼 작품은 무용수와 관객이 물리적으로 함께 있어야 한다는 전통적 공연의 공간 조건을 따르지 않고 이질적인 공간들이 겹쳐지면서 움직임이 새롭게 조직되는 다층적 안무 공간을 형성한다. 본 절은 그 가운데 줌 회의 장면을 중심으로 프레임이 춤의 공간을 어떻게 재구성하며, 그 공간 속에서 춤추는 몸이 어떻게 사유로 작동하는지를 살펴본다.
2장에서 살펴본 대로 춤의 공간은 몸의 운동이 매번 새로 만들어 내는 관계다. 작품은로스앤젤레스의 극장 무대에 있는 네 명의 무용수가 버몬트의 포사이드와 줌으로 회의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며 전반부에 줌 회의 장면이 두 차례 더 삽입된다.

도판 1.
첫 번째 줌 회의 장면(The First Zoom Meeting Scene).
(출처: William Forsythe, The Barre Project, 2021, https://videotanz.ru/ballet/the-barre-project/)
<도판 1>처럼 포사이드는 과거에 촬영해 둔 움직임 영상을 줌 화면 안에서 공유하고현재 구상하는 프레이즈와 안무 노트를 무용수와 나눈다. 첫 장면이 안무가와 무용수 사이의 관계를 보여 준다면, 두 번째 줌 회의는 <도판 2>처럼 무용수들 사이의 관계로 초점을 옮긴다.

도판 2.
두 번째 줌 회의 장면(The Second Zoom Meeting Scene).
(출처: William Forsythe, The Barre Project, 2021, https://videotanz.ru/ballet/the-barre-project/)
이 장면에서 펙과 메히아와 맥은 같은 연습실에 있고 자가격리 중인 이시모토는 자신의집에서 참여한다.
여기서 프레임은 이 몸들을 하나의 공간으로 합치지 않고 각각의 몸을 화면 안의 고유한자리에 배치한다. 분할된 프레임과 전송의 지연 그리고 서로 다른 장소와 시차는 네 사람을 한 공간의 몸으로 합치는 대신 저마다의 자리를 유지한 채 하나의 화면에서 만나게 한다. 펙이 박자를 세며 파세(passé)와 셰네(chaînés)와 턴의 타이밍을 공유하고 다른 무용수들이 서로의 움직임을 확인하며 자신의 움직임을 맞추어 갈 때, 네 사람은 하나의 리듬으로 융합되지 않는다. 이들 각자는 자신이 놓인 장소와 화면의 시차를 내재하고 서로를 향해 움직임을 조율한다.
자가격리 중인 이시모토가 다른 장소에서 참여하는 장면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의 몸은 다른 무용수들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으며 그 분리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그럼에도 그는 화면 안에서 박자와 프레이즈를 공유하며 하나의 안무 공간에 참여한다. 분산된 몸들이 이렇게 관계를 맺을 때 프레임은 무대라는 단일한 공간을 대신하여 사유가 발생하는 공간을 새로 마련한다. 이 점에서 줌 화면은 거리를 극복한 매체이기보다 분산된 몸들이 사유를 발생시키는 공간을 여는 조건이다.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 물리적 공존의 부재가 오히려 춤이 사유체로 성립하는조건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군무가 정돈된 앙상블로 구성될 경우, 함께 있는 몸들은 하나의 통합된 형상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이때 관객의 시선은 전체가 이루는 완성된 구도로 향하기 쉽다. 반면 이 작품에서 몸들은 처음부터 흩어져 있고 프레임은 그 분리를 지우지 않는다. 관객은 완성된 이미지를 바라보는 대신 각각의 몸이 시차를 담고 서로를 향해 움직임을 맞추어 가는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 여기에서 매개가 만들어 낸 분리는 몸을 완성된 형상으로 통합해 소비하는 시선을 차단하고 몸을 매 순간 사유가 일어나는 자리로 드러낸다.
이때 안무가와 무용수의 관계 역시 일방적 전달의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줌 회의에서포사이드는 과거의 리서치 영상을 공유하고 안무 노트를 제시하는 위치에 있지만 그가 화면에서 하는 것은 완성된 동작을 시범하여 모방하게 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음악과 몸의 관계 그리고 프레이즈의 방향과 조정 방식을 무용수와 나누며 영상과 언어를 통해 움직임이 생겨날 토대를 함께 마련한다. 무용수는 그 말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음악의 밀도와 화면의 지연과 타자의 박자에 호응하면서 자신의 움직임을 다시 만든다(Crompton 2022). 무용수가 보여 주는 것은 포사이드의 제안을 그대로 옮긴 결과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다시 새롭게 생성되는 몸짓이다.
이 장면이 완성된 공연이 아니라 춤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기록이라는 점은 오히려 사유체의 작동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 자리는 정해진 동작을 재현하기보다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움직임을 매번 새로 결정하는 자리이기에 포사이드의 말은 결과를 지정하는 명령이기보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움직임이 생겨날 여지를 여는 계기로 작동한다. 이렇게 매번 새롭게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몸이 2장에서 살펴본 사유체다.
나아가 안무가 형성되는 과정이 그대로 노출될 때 어떤 배치도 결정적인 것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동시대 무용에서 안무 과정을 관객에게 드러내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The Barre Project」의 특이점은 그 과정이 줌 회의라는 비대면 협업의 형태를 띤 채 완성된 댄스 필름 안에 다시 삽입된다는 데 있다. 관객은 다듬어진 안무의 결과와 더불어 화면으로 매개된 안무가의 노트와 무용수들이 서로의 움직임을 맞추어 가는 과정을 영상 속 또 하나의 영상으로 보게 된다.
박자가 새로 매겨지고 프레이즈가 다듬어지며 과거의 영상이 현재의 화면 위에 겹쳐지는 동안 어느 배치도 결과로 고착화되지 않는다. 안무가의 노트는 다음 시도에서 다시 새롭게 생성될 잠정적 제안으로 나타나고, 무용수들이 맞추어 가는 박자와 방향은 계속 다시 수행되는 관계로 지속된다. 어떤 확정된 의미로도 굳어지지 않은 채 형성되어 가는 상태에 머물기에 이 장면의 공간은 정형화된 지식으로 정착하지 않는다. 프레임이 춤의 공간을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춤이 형성 중인 상태로 제시될 때, 춤추는 몸은 매 순간 사유하는 사유체로 발현된다.
2. 바를 통한 잠재적 움직임
「The Barre Project」에서 바는 작품의 제목이자 중심 장치로서 대부분의 움직임을 관통한다. 빈 무대 위의 움직임은 펙의 솔로에서 출발하여 듀엣과 삼인무와 사인무로 이어지며 이 구성은 모두 바를 중심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본 절은 이 솔로·듀엣·삼인무·사인무를 개별 장면으로 나누어 기술하기보다 이들이 발레 어휘를 변형하는 하나의 짜임을 이룬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 전체를 잠재적 움직임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2021년 4월 8일 DanceTabs에 게재된 Parry의 글에 따르면, 바는 발레 훈련의 기본 도구라는 전통적 의미와 팬데믹 시기 분산된 훈련의 조건을 동시에 환기하는 한편 단순한 지지대를 넘어 안무 공간을 규정하고 포사이드의 여러 움직임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기준점으로 작동한다. 포사이드는 영상 오프닝에서 이 작품을 어떤 형태로든 바 훈련을 통해 스스로를 유지해 온 모든 무용수에게 바친다고 밝히며, Sadler’s Wells가 공개한 프로그램 북 또한 정규 수업에 접근할 수 없던 시기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바레 훈련을 이어 간 무용수들에게 헌정된 작품임을 설명한다.
발레 수업에서 바는 몸을 곧게 정렬하고 중심축을 지탱하는 견고한 도구이며 여러 무용수가 하나의 바를 나란히 잡고 같은 동작을 같은 방향으로 반복할 때 그것은 몸들을 하나의 정돈된 집합으로 묶는 역할을 한다. 「The Barre Project」의 바는 이러한 구도와는 다른 조건에서 출발한다. 이 작품은 무용수들이 한 스튜디오에 모여 같은 바를 나란히 잡을 수 없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팬데믹 시기 많은 무용수들은 스튜디오의 고정된 바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의자·책상·벽면 등을 임시 지지대로 삼아 각자의 공간에서 훈련을 이어 갔다. 작품의 바는 이 분리의 경험을 지우고 본래의 공동성을 복원하기보다 그 경험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두세 명의 무용수가 같은 바를 함께 잡는 장면에서도 그들의 움직임은 하나로 정렬되지않는다. 같은 바를 잡은 무용수들은 손을 바에 올린 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열고 저마다의 리듬으로 회전하며 중심축을 각기 다르게 흩었다 다시 잡는다. 바를 잡는 방식 또한 안정을 위한 고정과는 거리가 멀다. 무용수들은 바를 계속 붙잡기보다 손끝으로 스치듯 닿거나 가까이 머물다 멀어지고 때로는 바에서 떨어진 채 그 선을 시각적 기준으로만 남긴다. 이는 2021년 3월 26일에 게재된 Slayton의 글에서도 뒷받침된다. Slayton은 작품의 첫 부분에서 무용수들이 바를 파트너처럼 대하면서도 움직임을 수행할 때에는 바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이는 바가 몸을 고정하는 지지대라기보다 접촉과 이탈이 반복되는 관계적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변화는 발레 어휘가 수행되는 방식에서도 확인된다. 무용수들의 몸에는 턴듀, 파세, 피루엣, 아라베스크, 에티튜드, 제떼와 같은 발레 어휘가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그들은 그 앎을 완성된 형태로 고정하지 않는다. 턴듀는 파세와 피루엣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골반과 어깨는 고전 발레의 이상적 정렬에서 미묘하게 벗어나며 팔과 다리의 선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열리고 틀어진다. 이 어휘들은 바와의 거리·순간적 지연·중심축의 흔들림 속에서 매번 다르게 수행된다. 움직임은 음악의 박자와 정확히 포개지지 않고 그 사이에 미세한 어긋남과 지연을 둔다. 빠르게 바 주변을 도는 순간에도 몸은 음악에 완전히 동기화되지 않으며 회전 직전의 준비와 방향 전환의 찰나 중심축이 흔들렸다 다시 세워지는 순간이 빠른 동작들 사이에 나타난다.
이러한 유보의 양상은 펙의 솔로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펙은 포사이드의 빠른움직임을 통과하다가 한 다리로 단순한 균형을 잡거나 아라베스크를 짧게 지속하고 상체의 분리된 미세한 움직임을 행한 이후 다시 박자를 끌어 올린다. Slayton(2021)은 그녀가 다리를 앞으로 뻗어 긴 균형을 지속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세를 완성된 형태로 유지하는 대신 다른 방향과 다른 박자로 변형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완성된 자세를 유지하는 관습적 관계로부터 벗어나는 양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펙은 2장에서 살펴본 잠재적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즉 그녀는 완성된 동작을 실행하여 다음 움직임이 나타날 가능성을 소거하는 대신 그 여지를 자기 움직임 안에 남겨 둔다.
이 유보는 빠른 움직임 사이에 들어서는 짧은 멈춤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펙이회전에 들어가기 직전에 몸은 잠시 정지하는 듯 보이지만 그 정지는 힘이 빠져나간 상태와는 다르다. 오히려 몸은 다음 움직임으로 나아갈 힘을 방출하지 않은 채 멈춰 있다. 관객이 지각하는 것은 정지된 형태가 아니라 바로 풀려날 힘이 몸 안에 눌린 채 대기하는 밀도다. 2장에서 살펴본 억제된 강도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때 빠른 동작 사이의 짧은 정지는 흐름을 끊는 단절이기보다 다음 움직임을 고르는 제어의 시간으로 작동하며 빠름 속에 감추어진 이 느림이야말로 무용수의 몸이 매 순간 움직임을 다시 생성함으로써 일상에서 규정된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앎, 즉 사유의 과정을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작품의 가벼움이 발생하는 방식과도 이어진다. 무용수들은 상승하고 회전하며 빠르게 이동하지만 그 가벼움은 발레 테크닉의 유려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몸은 무게를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바닥을 밀어내고 축을 바꾸며 다음 방향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가벼움을 만든다. 2장에서 살펴본 가벼움이 여기에서는 무게를 다루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The Barre Project」의 상승과 가벼움은 천상을 향한 발레의 고정된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힘과 속도 그리고 균형과 불균형을 조정하는 몸의 운동성으로 나타난다. 가벼움이 무게를 다루는 능력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는 충동을 억제하며 움직임을 유보하는 잠재적 움직임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발레의 정형화된 어휘가 매번 다르게 수행되면서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 굳지 않는다. 이는 2장에서 살펴본 사라짐이 고도로 규범화된 발레 어휘 속에서 실현되는 양상이다. 발레 어휘를 변형하는 작업 자체는 동시대 발레에서 드물지 않지만 이 작품에서 변형은 정렬과 동기화로부터 벗어나 무용수마다의 고유한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방향으로 실행된다. 같은 바를 잡고 같은 어휘를 수행하면서도 무용수들이 저마다 다른 움직임으로 각자의 고유함을 유지하는 것은 이들의 몸이 규범적 동일성으로 수렴하지 않는 사유체이기 때문이다. 무용수들은 이미 습득한 발레를 익숙한 형식으로 반복하지 않고 그 앎을 잠시 유보한 채 바와 음악과 카메라와 타자의 리듬 사이에서 다시 선택한다. 이때 발레는 자신의 문법을 유지하면서도 그 문법을 매번 새로 배열하는 운동으로 확장된다. 이는 포사이드의 작업에서 발레가 이미 알려진 어휘를 다시 배열하고 변형하는 문법 체계로 다루어지는 것과 맞닿는다(이나현 2012;Crompton 2022).
이러한 미세한 차이는 촬영과 편집을 거쳐 결국 관객에게 드러난다. 바 워크 장면은 무대 위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기보다 영상 프레임 안에서 다시 배열된 움직임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무대 전체를 한눈에 담는 대신 무용수의 몸을 따라가며 극장 객석에서라면 무대를 조망하느라 지나쳤을 변화들을 몸에 밀착한 거리로 드러낸다. 같은 바를 잡은 몸들이 서로 세밀하게 어긋나는 방향과 바와 손 사이의 거리와 중심축의 미세한 흔들림이 화면 안에서 가까이 나타난다. 하나의 움직임이 다음 움직임으로 이행하는 사이, 즉 잠재적 움직임이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순간이 화면에서 가시화되는 것이다.
이에 관객은 정돈된 군무의 총체적 이미지가 아니라 같은 바 위에서 무용수마다 갈라지는 움직임을 가까이에서 감각하게 된다. 음악적 시간성 또한 이 드러남에 관여한다. 제임스 블레이크의 음악이 제시하는 박자와 몸의 움직임은 완전히 포개지지 않고 미세한 어긋남을 유지하여 동작은 박자보다 조금 늦거나 이르게 놓인다. 2장에서 살펴본 대로 리듬에 대한 자동적 반응은 춤을 음악에 종속시킨다. 이 어긋남은 몸이 리듬에 자동으로 반응하기를 그치고 자기 운동을 유지함을 뜻한다. 음악과 몸은 하나로 합쳐지지 않은 채 서로의 리듬을 지키며 그 어긋남이 오히려 움직임에 긴장과 생동을 부여한다.
결국 「The Barre Project」에서 바를 둘러싼 움직임은 바를 안정과 정렬의 도구로 사용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발레 어휘가 하나의 형태로 굳지 않는 잠재적 움직임을 드러낸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바를 잡고 움직인다는 사실만으로 몸들이 하나의 동일한 집합을 이루는 것은 아니며 이 작품의 무용수들은 오히려 매 순간 미루어지고 조절되는 움직임 속에서 각자의 사유를 발생시킨다. 바와 마주한 춤추는 몸은 정해진 형식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잠재적 움직임을 통해 사유체로 작동하는 몸이라 할 수 있다.
3. 손 클로즈업과 시선의 변용
작품의 후반부에는 바와 손의 클로즈업 장면이 나타난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무용수의 전신에서 벗어나 바 위에 놓인 손만을 확대한다. <도판 3>처럼 초반에는 화면이 네 개의 프레임으로 나뉘어 각 프레임의 손들이 시간 차를 두고 바 위에 놓이고 한 손은 두 손으로 늘어나 다른 프레임의 손들과 교차하거나 겹치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어 분할된 화면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손들은 하나에서 둘로 다시 여러 손으로 늘어난다. 손가락은 바의 표면을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손등과 손바닥은 짧게 닿았다 떨어지며 손목과 팔은 서로의 표면을 지나간다.

도판 3.
네 개로 분할된 프레임의 손들(Hands in a Four-Way Split Frame).
(출처: William Forsythe, The Barre Project, 2021, https://videotanz.ru/ballet/the-barre-project/)
앞의 두 절이 다층적 공간과 바를 둘러싼 잠재적 움직임을 다루었다면 손 클로즈업 장면은 그 움직임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곧 관객의 시선이라는 문제를 전면에 세운다. 전신이 사라지고 손이라는 부분만 확대되는 이 장면에서 관객은 무용수의 얼굴도 전체적인 움직임의 구도도 볼 수 없으며 오직 바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손들의 미세한 움직임만을 응시하게 된다. 카메라가 몸을 부분으로 확대하는 이 장면은 언뜻 몸을 대상화하는 전형처럼 보이지만 2장에서 살펴본 절대적 시선이 매개된 조건에서 어떻게 성립하는지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의 손은 정서적 분위기의 연출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Slayton(2021)은 무용수의손이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듯 바 위를 움직이며 감각적이고 낭만적인 정조를 형성한다고 해석한다. 특히 두 손이 서로 포개지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순간을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는다. 이러한 독해는 손 클로즈업이 지닌 촉각적 감수성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하지만 손의 움직임을 낭만적 정조로만 읽으면 관객의 시선은 손이 자아내는 분위기를 감상하고 소비하는 자리에 머문다. 이는 무용수의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 즉 앞서 절대적 시선과 구별했던 대상화의 시선과 연결된다. 본 절은 이 장면을 분위기의 감상을 넘어 손들이 바 위에서 사유를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살펴본다. 손들은 같은 바 위에서 만나지만 하나로 합쳐지지 않으며 각자의 방향과 리듬을 유지한 채 스치고 겹치다 다시 멀어진다.
손 클로즈업의 화면 구성은 이러한 움직임의 방식을 시각적으로 뒷받침한다. 초반의 네분할 프레임은 팬데믹 시기 분산된 협업의 조건과 접속시킬 때 흩어진 몸들이 각자의 공간에 놓였던 배치를 떠올리게 한다. 각 프레임의 손들은 같은 바의 표면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시차와 방향을 유지한다. 분할이 하나의 프레임으로 합쳐진 뒤에도 손들이 융합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전환을 단순한 결합으로 읽기 어렵게 한다. 손가락이 바의 표면을 미끄러지고 손등과 손바닥이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동안 각 손은 자신의 방향과 리듬을 지킨다. 이때 바는 여러 손을 하나로 묶는 중심이기보다 서로 다른 손들이 각자의 움직임을 유지하며 만나는 표면으로 작동한다. 분할된 화면이 몸들을 하나로 합치지 않던 방식이 손이라는 더 작은 단위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나아가 카메라는 이 손이 한 사람의 것인지 여러 사람의 것인지를 확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화면은 손끝과 손바닥·손등·손목·팔의 짧은 움직임만을 확대하여 그 손들의 주인을 식별할 단서를 삭제한다. 이때 관객은 그 손을 특정 인물의 몸으로 소유하거나 그 인물의 감정을 읽어 내는 대신 손과 손이 만나고 헤어지는 움직임 그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2장에서 살펴본 몸의 익명성이 부분 신체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양상이다. 전신을 보여 주는 무대라면 관객의 시선은 손의 주인을 곧바로 알아보고 그의 표정과 서사에 손의 움직임을 겹쳐서 해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굴과 전신이 화면 밖으로 빠지고 손만 남을 때 손은 누구의 것으로도 정해지지 않은 채 움직임으로만 나타난다. 전신의 부재와 부분 신체의 확대가 오히려 시선을 움직임의 발생으로 이끄는 이러한 작용은 매체가 부재하는 몸을 통해 사유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이나현 2023).
이렇게 손이 누구의 것으로도 정해지지 않을 때 시선은 그 손을 하나의 대상으로 소유하지 못한 채 움직임만을 바라보게 된다. 이때 관객의 시선이 향하는 자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확대된 화면 앞에서 관객은 손 전체를 거리를 두고 보지 못하고 그 미세한 움직임을 화면의 표면을 따라간다. 대상을 ‘거리를 두고 소유하는 봄’이기보다 표면에 ‘밀착하여 움직임의 결을 따라가는 봄’인 것이다. 이러한 봄은 대상의 윤곽을 한눈에 파악하는 광학적 시각과 구별되는 촉지적 시각(haptic visuality)에 가깝다. 앞서 절대적 시선을 몸이 출현하고 사라지는 순간에 주목하는 시선으로 보았듯, 손 클로즈업이 이끌어 내는 이 밀착된 봄은 그 절대적 시선이 매개된 조건에서 취하는 구체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매개는 절대적 시선을 약화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무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시선의 이동은 손 클로즈업의 시간성을 통해 구체화된다. 관객은 완성된 포즈보다 손이 바에 닿기 직전의 머뭇거림, 손등이 다른 손의 표면을 지나는 짧은 지속 그리고 겹침이 고정되기 전에 흩어지는 순간을 따라가게 된다. 바 장면의 발레 어휘가 완결을 미루며 다음 움직임으로 열려 있었듯, 손 또한 닿음과 이탈 사이에서 움직임을 잠시 유보한 채 이어질 가능성을 남긴다. 손끝의 속도와 닿고 떨어지는 사이의 간격은 움직임과 움직임을 연결하는 제어의 시간을 만든다. 이러한 유보의 시간은 카메라가 한정된 화면 안에서 움직임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응시하게 할 때 지각된다. 클로즈업은 주변을 화면 밖에 두고 손이라는 한 부분만을 남김으로써 극장 객석에서는 지나치기 쉬운 움직임의 미세한 단위를 관객 앞으로 끌어온다.
손 클로즈업 장면은 공간·몸·시선의 세 측면을 하나의 장면 안에 응축한다. 서로 다른방향과 리듬을 유지하며 만나고 흩어지는 손들은 춤의 공간이 몸들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양상을 드러낸다. 바에 닿고 다른 손과 겹치는 손짓이 하나의 형태로 고정되기 전에 미끄러지거나 흩어지며 다음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는 잠재적 움직임이 가시화된다. 또한 그 출현과 소멸을 화면 가까이에서 좇는 관객의 자리에서는 절대적 시선이 성립한다. 이처럼 공간·몸·시선이 손이라는 작은 신체 단위에서 겹쳐질 때 카메라는 무대에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사유체의 조건을 연다. 전신이 물러나고 손의 움직임만 남는 순간, 춤추는 몸은 매개된 조건에서도 명명 이전의 사유가 발생하는 자리로 나타난다.
Ⅳ. 결 론
본 연구는 알랭 바디우의 춤에 관한 사유를 토대로 춤추는 몸을 사유체로 정립하고 그사유가 영상으로 매개된 춤에서도 성립할 수 있는지를 윌리엄 포사이드의 「The Barre Project」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바디우가 제시한 춤의 여섯 원리를 공간·몸·시선의 세 측면으로 재구성하고 잠재적 움직임이라는 성질이 각 측면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의 준거로 삼았다.
본 연구가 처음 제기한 물음은 바디우의 비미학이 매개된 춤의 춤추는 몸을 사유체로이해하는 데 어떤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가였다. 바디우에게 춤은 몸 자체가 곧 사유인 사유체이며, 몸이 그 순간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사실은 춤의 결핍이 아니라 춤이 사유가 되는 조건이다. 이러한 사유는 기록과 매개라는 조건 또한 춤에 대한 결핍으로만 단정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다음으로 「The Barre Project」에서 춤추는 몸이 공간·몸·시선의 차원에서 어떻게 사유체로 작동하는지를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줌 회의 화면은 흩어진 몸들을 하나로 통합하지 않은 채 각자의 자리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무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가 발생하는 공간을 열었다. 바를 둘러싼 발레 어휘는 완결된 형태로 굳지 않고 다음 움직임으로 열려 있는 잠재적 움직임을 드러냈으며 손 클로즈업 장면은 전신이 물러나고 손만 남을 때 관객의 시선이 대상을 소유하기를 그치고 움직임의 출현과 소멸을 응시하는 자리로 이행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세 측면은 각기 다른 장면에서 나타나며 동시에 손 클로즈업이라는 하나의 장면에서 발현되었다. 이를 통해 매개된 조건이 사유체로서의 춤을 가로막기보다 무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조건을 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결과는 매개된 춤을 바라보는 물음의 방향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매개된춤에 관한 기존 논의가 주로 현장의 생생함을 얼마나 담아내는가를 물으며 그것을 현장 공연의 불완전한 대체로 여겨 왔다면 본 연구는 매개된 조건에서도 춤이 사유로 작동하는가를 탐구하였다.
이 지점에서 본 연구는 바디우의 사유를 무용 작품 분석의 구체적 준거로 전유함으로써철학적 개념과 무용학적 분석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는 그동안 이론적 논의에 머물던 바디우의 ‘사유하는 몸’ 개념을 구체적인 안무와 영상의 층위에서 읽어 낼 수 있음을 고찰한 것이다. 더불어 본 연구는 매개된 춤을 현장 공연의 대체물로 보는 관점을 넘어 디지털로 매개된 동시대 무용을 미학적으로 분석하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무용학적 의미를 지닌다.
이에 후속 연구를 위한 방향을 제언한다. 첫째, 「The Barre Project」는 촬영과 편집이안무 구성의 일부로 설계된 경우이므로, 공연 실황의 단순 기록이나 중계처럼 매개 방식이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여 어떤 조건에서 매개가 사유체로서의 춤이 성립할 가능성을 여는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 둘째, 관객이 움직임의 출현과 사라짐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다루는 수용 연구를 통해, 매개된 조건에서 관객의 시선이 구성되고 변용되는 방식을 경험적으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논의는 동시대의 춤이 피하기 어려운 매개라는 조건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지며, 그 물음의 중심에 춤추는 몸을 놓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