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Society for Dance Documentation & History

pISSN: 2383-5214 /eISSN: 2733-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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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Choi Seung-hee’s National Dance Studio’s Concert Tour of the USSR in the 1956-57 and the Glocality of the Dance Works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과 공연작품들의 글로컬리티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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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 Dance Journal Vol.60 No. pp.213-242
DOI : https://doi.org/10.26861/sddh.2021.60.213

A Study on the Choi Seung-hee’s National Dance Studio’s Concert Tour of the USSR in the 1956-57 and the Glocality of the Dance Works

Yang, Mina*
HK Professor, Foreign Studies Institute, Chung-Ang University
* 양민아 minayang919@gmail.com

+ 이 논문은 2012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2S1 A6A3A02033580).
++ 이 논문은 2020년 12월 15일 HK+(인문한국) 연합학술대회 <아시아와 북방, 문화접점의 확인: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에서 발표된 “1950년대 최승희의 소련 순회공연 작품들의 글로컬리티와 트랜스 컬쳐 연구”를 수정·보완한 것임. 이와 더불어 이 연구는 배은경의 저서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 (1950-1957)(서울: 민속원, 2020)에 대한 서평(“최승희 연구의 새로운 과제,” 무용역사기록학 59, 2020, 177-185쪽)을 준비하며 시작된 것으로 일부 유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
2021-02-10 2021-03-02 2021-03-25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can be divided into two. The first is to clarify the detailed schedule of the concert tour of the USSR, which was the last schedule of the Choi Seung-hee’s National Dance Studio, dispatched to the Eastern Europe tour in September 1956. This clarification includes an identification of the purpose, signification of this concert tour and the dance works. The second is to analyze the phenomenon of Choi Seung-hee’s glocality in her dance works based on the trends of her creation in the 1950s and the Soviet audiences’ reception of her works.



The Choi Seung-hee’s National Dance Studio held a concert tour of the Soviet Union for 44 days from November 30, 1956 to January 12, 1957. In this tour, the North Korean government had a political purpose to advocate North Korea's position among socialist countries and to strengthen the solidarity among them.



After Choi Seung-hee’s return to North Korea, in the form of her works she used the stagecraft of Soviet ballet for her choreographies of North Korean dance. And In the content and subject of her works, she pioneered the North Korean dance drama “North Korean Ballet”, which dealt with socialist patriotism and proletarian internationalism following socialist realism. In her other dance works, she portrayed the North Koreans’ wise, optimistic, and diligent lives and showed the model of North Korean socialists. Although foreign audiences’ reception was different, her artistry was recognized in Eastern Europe, including the USSR, and caused a great repercussion.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과 공연작품들의 글로컬리티 연구

양민아*
중앙대학교 외국학 연구소 HK 연구교수

초록


본 연구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1956년 9월 최승희와 안성희를 필두로 동유럽 순회공연에 파견된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 단원을 포함한 107명의 대규모 북한예술단의 마지 막 일정이었던 소련 순회공연의 세부 일정을 밝히고, 그 목적과 의의 그리고 공연 작품들을 알아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작품들을 통해 1950년대 최승희의 작품창작 경향과 소련의 예술가들 및 관객들의 수용양상을 바탕으로 공연작품들에 나타난 최승희식 글로컬리티 현상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다.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는 1956년 11월 30일-1957년 1월 12일까지 약 44일간 소련 순회공연을 가졌다. 이번 순회공연에서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 <맑은 하늘 아래서>, <조선의 어머니>와 25개 의 민속무용 소품을 공연하였다. 이번 공연을 통해서 최승희는 자신의 예술성을 세계무대에서 인정받고 자 했으며, 북한 정부는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북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우방 국가들과의 결속 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월북 이후, 최승희는 현대의 무용 예술양식에 한민족의 특수성을 녹여내어 세계무대에서 북한무용을 세계적인 예술의 반열에 올리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그녀는 북한무용을 형식 면에서는 소련의 발레의 형식과 연출 기법을 활용하고, 내용과 주제 면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예술창작방법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하여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다룬 민족무용극 “북한 발레”를 개척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사도성의 이야기>(1954)이다. 무용소품에서는 한민족의 슬기롭고 낙천 적이며 근면한 생활상을 형상화하여 북한의 모범적인 사회주의 민중들의 모습을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최승희의 방식으로 글로컬리티를 표현한 무용작품들로 해외 관객들의 수용양상은 다르지만 소련을 위 시한 동유럽의 예술무대에서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다.



    Ⅰ. 서 론

    최승희(崔承喜, 1911~1969)는 우리나라의 전통춤을 유럽의 무대 연출방식으로 재창조 하며, 대한민국을 넘어 남과 북의 무용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1946년 월북이후, 1950년대는 최승희가 북한을 기반으로 대내외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그 예술성을 소 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인정을 받았던 제2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다. 1955년은 최승희 무용인생 30주년을 맞아 인민배우의 칭호를 받은 의미 있는 해였다. 1956년에는 북한에서 문화 예술계를 한설야가 독점하면서 안막과 최승희 부부는 권력의 절정기를 맞 는다.1) 같은 해 9월 동유럽 순회공연에 최승희와 그녀의 딸 안성희를 포함한 107명의 대 규모 북한예술단이 파견되었다.

    기존의 연구들에서 그녀의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활동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실제 1차 사료의 검토 없이, <로동신문>과 조선예술의 글들을 바탕으로 순회공연을 언급하고 있어 저작물마다 방문시기와 방문 국가, 공연 작품 등이 상이한 부분이 존재한다.2) 연구자 들마다 조금씩 차이는 보이지만 기존의 선행연구3)에 따르면 1950년대 최승희는 4회의 소 련 및 동유럽 순회공연4)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련 및 동유럽 순회공연의 내용은 <로동신문>에서 보도하고는 있지만, 순회공연에 대한 세부 일정을 비롯한 구체적인 공연 내용의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중앙 국 립 문학·예술 아카이브(ЦГАЛИ)에 공연 및 방문 기록을 통해서 1956-57년 소련 순회공연 의 세부일정과 그 의의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글로컬리티(Glocality)는 1990년대부터 시작된 세계화(Globalization)현상이 각 지역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며 파생된 새로운 혼종문화적 특성이다. 글로벌 문화와 로컬 문화가 조우했을 때 그 변화의 방향성은 세계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갖는 문화로 수렴되거나 아니 면 또 다른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도 한다.5)김수환(2009)은 글로컬리티를 전지구적 (Global)인 것을 배경으로 한 지역적(Local)인 것의 콘텐츠화 과정에서의 문화적 대화로 보고 있다.6)김호연(2017)은 1930년대 후반 최승희가 해외에서 공연한 작품들을 글로컬리 즘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그녀의 작품을 타자가 인식한 춤의 보편성과 특수성으로 분석하 고 있다.7) 본 연구에서는 러시아예술사연구소(РИИИ)에 프로그램8)과 공연리뷰가 소장되 어 있는 1956-57년의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9)의 소련 순회공연 작품들에서 형식적 측면 에서는 소련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공연예술형식인 발레극의 형식과 연출 및 안무 기법, 그리고 내용과 주제 측면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예술창작방법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 북한 발레(Корейский Балет)라고 부르는 최승희식 민족무용극에서 어떻게 구현되 는지 글로컬리티의 관점에서 검토해 볼 것이다.

    본 연구는 코로나 19가 심각한 상태에 진행되어 러시아에 소재한 아카이브 방문이 어려 워 추가로 새로운 자료들의 발굴이 어려웠고, 북한에서 발행된 자료들 또한 접근이 용이하 지 않았기에 2차 자료들에 근거하여 수행된 점을 제한점으로 미리 밝혀둔다. 따라서 추후 에 코로나 19 상황이 좋아진다면 러시아와 북한의 자료를 추가로 확보하여 후속연구에서 수정·보완할 예정이다.

    Ⅱ. 1956-57년 소련 순회공연의 일정과 목적

    1. 1956-57년 소련 순회공연의 일정

    1956년 동유럽 순회공연에는 최승희와 안성희를 포함하여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무용단원과 음악가들 107명의 인원이 파견되었다. 1956년 9월 7일 평양을 출발하여 1957 년 1월 22일까지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알바니아,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을 순회하 는 138일간 83회의 공연을 실시한 대장정이었다. <표 1>의 상세 일정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소련 순회공연은 44일(1956년 11월 30일 –1957년 1월 12일)10)로 이번 장기 해외 순회공연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이들은 소련에만 44일을 체류하며 키예프, 드네프로페트 로프스크, 하리코프,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5개 도시에서 25회 공연하였다. 소련이 크기도 하지만 동유럽 순회공연 일정의 1/3가량을 소련에서 체류하며 공연하였고, 특히 모스크바 에서는 13일간 체류하며 8회 공연과 함께 1957년의 새해를 맞았다. <표 1>은 소련 문화부 에서 담당하여 진행한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의 세부 일정 이다. 이 세부 일정은 기존의 연구들에서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북한예술단의 소련에서의 상세 공연일정 및 행보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표 2>에서 볼 수 있듯이 소련에서는 키예프에서부터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 일행을 전담하는 문화부 담당자들 겔 만(Гельман), 콜로바쉬킨(Колобашкин), 드로즈도프(Дроздов), 제바킨(Зевакин)을 배 치하여 예술단 일행과 전 일정을 함께 하도록 했다. 모스크바와 드레프로페트로브스크에 서는 현지 코디네이터 및 문화부 직원들이 합류했다. 드레프로페트로브스크에서 바비축(Б абийчук), 모스크바에서 슬라노프(Славнов), 듀제프(Дюжев), 스테파노프(Степанов), 블라디미로프(Владимиров), 할라지예프(Халаджиев)가 공동으로 국립 최승희 무용연 구소 예술단 단원들을 담당한 것으로 소련 정부가 이들을 국빈으로써 예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표 1.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 일정11)

    SDDH-60-1-213_T1.gif
    표 2.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 소련 순회공연의 소련 문화부 업무와 담당자들12)

    SDDH-60-1-213_T2.gif

    2. 소련 순회공연의 목적과 의의

    1945년 광복 이후, 북한은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놓여있었다. 초기 북한은 사회주 의 국가로써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소련의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의 전 분야의 시스템 을 받아들이며 소련문화는 북한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동시에 소련은 북한의 사회주의화 를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북한과 소련의 문화교류를 위해 1945년 11월 12일 평양에 소비에트대외문화교류총협회(Всесоюзное Общество Культурной Связи с Заграницей, ВОКС)의 지부인 대소련북한문화교류협회(Северо-Корейское Общество Культурной Связи с СССР, КОКС) 다른 명칭으로는 ‘조소문화협회(朝蘇 文化協會)’가 창립되었다.13) 1958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북한 유학생들의 단체 망명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 기관을 통한 북한과 소련과의 문화교류는 사회주의 문화수용을 위한 필수적인 절차였다.

    이와 더불어 북한은 국내뿐 아니라 “사회주의 예술의 우월성을 세계에 널리 시위하 자”14)라는 기조 하에 1947년부터 꾸준히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여 북한의 예술을 선 전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한예술단의 해외공연은 더욱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소련 순회공연의 목적은 민족무용의 성과를 우방국가들에게 널리 소개하는 동시에 국가 간 친선 및 문화교류 사업의 강화 목적이 있었다.15) 이와 더불어 실제로는 무력으로 한반도의 사회주의화를 계획하고 있던 북한 정권이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 년 6월에 소련에 순회공연단을 파견한 것은 표면적으로 평화와 문화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숨은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16)

    북한에서 최승희는 북한 정부의 전폭적 지원 하에 1946년 평양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이는 1953년에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승격되었다. 최승희는 1930년대 미국 과 유럽을 비롯한 해외 순회공연의 경험을 바탕으로 1950년대에 국립 무용연구소의 무용 수들과 함께 국가차원에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로의 장기 해외공연을 4차례 실행 할 수 있었다. 북한 정부는 최승희을 위시한 북한예술단의 순회공연을 통해서 한반도의 사회주의화를 위한 투쟁의 실상을 알리고 동시에 북한무용예술의 우수성 그리고 우방국간 의 연대감 형성을 꾀했다. 1950년대 북한 정부의 북한예술단의 해외 순회공연 파견에 대한 정치적인 목적은 차치하고 예술가로서 최승희는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의 무대에서 자신의 민족 발레를 통해 자신의 예술성을 검증 받고자 했다.17) 장구통 안에 자신의 사진을 넣어 소련 관객들에게 사인하여 나누어 준 일에 예술단 단장 허정숙과의 불화설18)과 자신을 “새장 속에 갇힌 새”19)로 표현한 일 등을 보면 예술가로서의 창작과 공연의 열정이 더 컸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해외 순회공연은 최승희의 예술성과 북한의 민 족예술의 수준을 알리고 동시에 우방 국가들과의 친선 및 문화교류 사업을 강화하기 위함 이었음을 알 수 있다.20)

    3. 월북 이후, 최승희의 작품 창작 경향

    근대무용의 아이콘 최승희는 1929년 이시이 바쿠(石井漠) 무용단을 탈퇴한 이후, 소련 영사관의 후원으로 소련 유학을 계획했으나 무산되어 크게 좌절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로21) 유년 시절부터 소련의 예술에 대한 열망이 매우 컸다. 최승희는 일찍이 이시이 바쿠 에게서 배운 현실 의지적 경향의 현대무용과 오빠 최승일과 남편 안막의 프롤레타리아 예 술운동의 영향을 받았다.22) 1930년대 후반, 세계 순회공연 당시 관람한 <지젤>과 <파리 쟝> 등의 발레에서 감명을 받은 후, “코리안 발레” 작품을 제작하여 한국의 무용예술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높여야 겠다23)는 포부를 품게 되었다. 그녀가 말하는 “코리안 발레”는 민족 무용극으로24) 그녀는 서양의 무용 예술양식에 조선의 특수성을 녹여내어 세계무대에 서 한국무용을 무대예술로써 인정받게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김호연(2017)은 이 미 1930년대 후반의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을 통해서 한국무용공연은 넌버벌 퍼포먼스로 언어의 한계를 넘어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우리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었음에 주목 하고 있다.25) 그리고 타자(他者) 즉 다른 문화권의 관객들은 최승희의 작품을 통해서 한국 무용의 원형적 특질을 깊게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한국적인 이미지를 인식하고 수용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26)

    월북 이후, 이러한 최승희의 작품 창작 경향은 크게 형식과 내용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최승희는 작품 창작의 형식과 틀을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의 발레와 오페라에서 찾는다. 그녀는 소련과 동유럽 순회공연 때마다 서양의 공연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다수의 발레와 오페라 작품을 관람하였고,27) 이번 1956-57년 소련 순회공연 당시 <백조의 호수>, <잠자 는 숲속의 미녀>, <돈키호테>, <이고르 공>, <스파르타쿠스> 등 17작품에 달하는 발레와 오페라 작품을 관람하고 클래식 발레의 기법과 유럽식 무대연출을 북한춤에 어떻게 반영 할 것인가를 연구했다.28) <표 1>에서 소련 순회공연의 일정을 보면 방문 도시마다 발레, 서커스 등 다양한 공연을 관람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고, 헝가리에서도 오페라 하우스에서 <호두까기 인형>, <카르멘>, <돈 카를로스> 관람29)한 것으로 확인되며, 여타 동유럽 국가 의 순회공연 시에 다수의 클래식 발레와 오페라 공연을 관람했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이러 한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해 준다. 이와 더불어 그녀는 1956년 2월 27일 무용예술의 가일 층 발전을 위하여란 주제로 열성자회의 보고요지에서 “민족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소련 선진 예술과 우리 친선국가 민중들의 예술을 반드시 연구하여 그의 우수한 성과들을 우리 민족적 토대위에 적합하게 섭취 하여야 한다.”30)고 주장했다. 그리고 “클래식 발레의 기초위에 새로운 우리 무용 스타일을 개척하는 문제와 우리는 민족적 전통과 특성을 벗어 나지 말아야 하며 고전에서 좋은 것을 발굴하여 발전시키지 않고 세계적인 무용예술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또한 북한민중의 이익에 알맞은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없다.”31) 따 라서, 소련의 클래식 발레에 기초한 북한무용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최승희 작품의 내용적인 측면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예술 창작방법론인 사회주의 리얼리 즘이 북한에 수용되면서 주요 무용극에서 역사적 주제를 통해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와 조국 통일의 위업 달성을 위한 내용들을 다루며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32) 1934년 8월 17일 제1차 소비에트 작가 연맹 회의에서 사회주의 예술가들의 예술창작의 규범이 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작품 안에서 현실적인 삶의 혁명적인 발전 과 정을 보여주고, 대중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와 더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예술작품은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민중성(대중성)과 당의 추구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당파성의 원칙하에 창작되어야 했다.33) 따라서 민중들의 생활 상과 민족의 전통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는 민속춤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주요 무 용예술의 장르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련의 모이세예프 민속발레단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속무용단의 전형으로 인식되었다.34)기어스도프(Giersdorf)는 동독 무용에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현상을 언급하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데올로기 적 필요에 의해 끊임없이 재정의되며 수용되었기에 나라마다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 음을 언급하고 있다.35)이진아(2020)는 월북이후, 최승희의 무용창작의 특징을 엘리트 계 급이 아닌 민중들을 위한 무용36)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 또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 으로 볼 수 있다.

    최승희는 북한무용동작과 기법적 특성을 첫째로 민족생활과 민족적 성격이 갖는 제반 특성들이 여실히 표현되는 것; 둘째로 우리민족생활과 민족적 성격들을 표현한 민족무용 예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 내용; 셋째로 이러한 무용예술을 창작한 무용예술가들과 관중들의 미적 취향의 특성에 의해 규정된다37)고 보고 작품에 이러한 북한무용의 특성을 담아낼 수 있도록 노력했다.

    무용소품에서도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바탕으로 한민족 문화의 특수성과 긍정적인 측 면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생활상의 동작들을 반영하여 표현했기 때문에 민족적 특성이 뚜 렷이 부각될 수 있었다.38) 이러한 일상의 동작들에서 최승희는 우리민족의 정의롭고 용감 하고, 근면하고 낙천적이며, 고결하고 엄정하여, 다정 다감하고 정열에 찬 모습 등을 표현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더불어 남성무용동작에서는 활달하고도 힘차며, 장렬하고도 유창 하며, 흥겹고도 무게감 있는 특징이, 여성무용동작에서는 우아하고도 강인하며 부드러우면 서도 날카로우며, 명랑하면서도 섬세한 민족적 특징이 표현되었다.39) 북한의 무용예술가 와 관객들은 고상하고 참된 것, 선명하고 간결한 것, 평이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지향하기 에 무용작품에서 고도의 사상성과 진실성, 완미성과 감동성, 선명성과 간결성, 평이성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40)

    최승희는 북한무용의 기본 동작과 생활동작 및 노동동작들에 대한 체득과 함께 북, 장 고, 소고, 향발, 부채 등 민속무용도구와 이를 다루는 방법에서 민족의 특색과 고유한 기법 을 착안했다. 그리고 전통의상에서도 특색 있는 민족무용 동작을 표현할 수 있었다.41) 그 녀는 무용작품 창작에 있어서 그 예술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민족적 독창성’과 ‘현대성’의 조화가 중요함42)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무용의 동작과 기법의 특성을 깊이 이해하고 체득하여 시대의 요구에 맞게 발전시키고, 작품에서 영웅 서사시적 장면과 혁명적 인간의 성격들을 ‘민족적 독창성’과 ‘현대성’이 잘 조화되도록 그려내는 중요한 예 술적 과제를 해결해야했다.43) 이는 바로 그녀가 작품 안에서 글로벌 문화로서의 발레의 형식과 기법, 그리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현대성과 로컬문화로서의 북한무용 의 조화를 통해 글로컬리티의 예술적 구현을 위해 노력했음을 증명해 준다.

    정병호(1995), 김채원(2008), 한경자(2020)에 의하면 월북 전 최승희의 창작 경향은 소 품 위주였으나 월북 이후 대형무용극을 제작하기 시작했다.44) 이렇듯 최승희는 평양에 자 리를 잡은 후, 소련의 클래식 발레 형식에 근거하여 북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대형 민족주의적 무용극, 무용소품으로 독무, 중무, 군무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 구성과 창작에 집중했다.45) 1949년 <반야월성곡>을 시작으로 “민족의 독립과 사회적 해방을 위해 싸우 는 북한 민중의 투쟁을 반영”46)하는 대형무용극을 창작하기 시작하는데 동유럽 순회공연 에서 공연했던 작품들 <조선의 어머니>, <사도성의 이야기>, <맑은 하늘아래서>가 이러한 성격의 작품들이다.47) 이 중 소련의 발레 예술형식을 최승희 식으로 북한춤에 적용시켜 만든 대작이 바로 <사도성의 이야기>이다.48) 월북 이후, 최승희는 이러한 작품 경향의 연 장선상에서 최승희 스타일의 글로컬리티를 표현한 무용작품을 세계무대에서 선보이고 싶 어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글로컬 리티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Ⅲ. 1956-57년 소련 순회공연 작품들과 글로컬리티 양상

    1. 소련 순회공연 작품들

    1956-57년 소련 순회공연 작품들은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 <맑은 하늘 아래서>, <조선의 어머니>의 3작품과 최승희와 그녀의 딸 안성희에 의해 안무된 민속춤 및 우랄 민족춤 <세묘라>를 포함한 민속무용 소품 25작품이었다. 본 연구와 긴밀하게 관련 있는 소련 순회공연 작품에 관련된 선행연구로는 1956-57년도 소련 순회공연의 프로그램을 기 본 텍스트로 최승희 무용작품과 그 내용을 역사적 관점에서 면밀히 고찰한 한경자(2020) 의 연구49)와 전 생애를 걸친 최승희의 작품세계를 분석한 김채원(2008)의 연구50), 특히 당시 순회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던 <사도성의 이야기>의 구성 뿐만 아니라 북한 과 소련과의 사회·문화적 관계 안에서 작품을 분석한 김채원(2013)의 연구51)가 있다. 그리 고 <사도성의 이야기>를 모티프 라이팅으로 분석한 유미희(2006)52)의 연구도 시사점을 준다.

    <표 1>의 방문일정에서 보면, <조선의 어머니>와 <사도성의 이야기>는 단독공연 형태 로 이루어졌고, <맑은 하늘 아래서>는 원래 4막 9장이나 단장으로 짧게 재구성하여 민속 무용 소품과 함께 공연으로 구성하였다. 막과 장의 작품구성은 발레형식에서 차용했음을 증명해준다. 총 25회의 소련 공연 중 <사도성의 이야기>는 10회 공연으로 가장 많았고, <맑은 하늘 아래서>와 민속무용 소품공연은 9회, <조선의 어머니>는 키예프에서만 1회 공 연되었다. 이와 더불어 <표 4>에 기재된 민속무용 소품 프로그램으로 5회의 에스트라다 형식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최승희 대형 무용극 작품 중 가장 완성도 높고, 한민족 문화의 특수성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인정받는 <사도성의 이야기>는 이번 순회공연의 대표 프로 그램으로 편성53)되어 공연 횟수가 가장 많고 또 전막 공연을 선보였다.

    특히 1956년 <사도성의 이야기>가 북한 최초의 총천연색 영화로 제작되는데, 최승희와 그 단원들은 6월에 영화 촬영을 마치고 동유럽 순회공연 길에 올랐다. 이 무용극을 영화화 한 정준채 감독은 <사도성의 이야기>를 안무가의 의도가 우아한 민족 음악과 완벽하게 조 화되어 훌륭하게 형상화된 작품으로 평가하며 이 작품의 영화화에 고민이 많았으나 민족 적 색채를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소회를 남겼다.54) 무용극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표 3>에서 볼 수 있다.

    표 3.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의 무용극 프로그램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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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 무용극은 내용과 주제 면에서 한민족의 독립투쟁, 사회적 해방을 위한 애국주의에 입각하여 계급을 초월한 사랑, 적군의 침입에서 용감히 싸워 나라를 구하는 영웅, 그리고 이러한 영웅의 후손이 바로 북한의 민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북한의 무용극들 은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사회주의 국가들의 예술창작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영향을 받 아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적인 경향을 나타낸다.58) 최승희가 본인이 주인공을 해야 하는 이 유도 있었겠지만, 무용극의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무용극의 주인 공들은 고난을 겪고 강인한 여성 지도자로 변모하는 모습,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성 중심의 유교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기존의 전통적 환경에서 무용극 을 통하여 여성을 주인공으로하여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주의 사회에 서 새로운 사회주의 여성상을 관객들에게 일깨워줄 수 있었던 일례로 볼 수 있다. 이진아 (2020)는 이러한 최승희 작품을 ‘사회주의 조선무용’으로 규정하고 여성이 강한 남성성을 수행하는 젠더수행의 관점에서 해석하였다.59) 특히 <조선의 어머니>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딸 안성희가 전쟁 중에 전사한 것으로 생각하고 미국과의 전쟁 중에 딸을 잃은 어머 니의 마음을 무용극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최승희는 1951년 동베를린에서 개 최된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1등을 하며 세계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또한 <조 선의 어머니>는 자본주의의 수장이며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공의 적인 미국의 침략에 대항 한 북한의 어머니로 대표되는 노동계급의 승리를 다루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여타 사회주의 국가들의 노동자들이 처한 상 황에 공감하고, 국제적 연대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북한 사회에서는 노동계급의 민족적 임 무와 국제적 임무는 동일하게 인식되었고,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60)

    아래 <표 4>는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 민속무용 소품의 프로그램이다. 민속무용 소품에는 최승희가 월북 전에 창작한 1930년대 작품들 <즉흥무>, <초립동>, <신로심불로>부터 1950년대 작품까지 고루 선정되어 있고, 안성희의 작품들로 추정되는 <집시춤>, <파랑새> 등은 작품 창작년도와 주제를 확인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 다. 안성희가 1953년부터 소련에서 유학하면서 창작한 작품들로 추정된다. 우랄 민족춤 <세묘라>가 공연 작품목록에 포함되어 있는데, 동유럽 및 소련 관객들을 위한 대한 배려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비슷한 제목의 작품들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샘물터에서(У кл юча)>, <샘물터에서(У родника)>, <일몰(Закат)>, <저녁노을(Вечерная заря)>이 그것 이다. 북한무용소품 레퍼토리61)에는 1960년에 창작 된 <시냇가에서>라는 작품이 보이는 데 순회공연시기보다 창작연대가 후대이므로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우리말로 작성된 작품제목을 이중 번역하게 되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작품들이 있다. 이 표에서 <Танец ракушки>는 직역하면 <조개춤>이지만 <향발무>로 의역하였다. <진주의 무희 (Жемчужина)>는 최승희가 안무한 춤으로 확인되기에, <향발무>나 <바라춤>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조개의 크기가 작기에 <향발무>를 의역한 것이라고 유추했다. 추후에 순회공 연과 관련된 북한자료를 볼 수 있다면 보다 정확한 작품 제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표 4.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의 민속무용 소품 프로그램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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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자(2020)도 동의하듯이 1956-57년 소련 순회공연 작품들은 발레극 형식을 차용하 여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의 대형 무용극작품들과 사회주의의 체제에서의 노동자로서의 낙관적인 삶의 모습과 한국무용을 현대적 무대예술로 재해석한 민속무용 소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64) 최승희는 북한무용 작품들에서 아름다운 민족 생활과 슬기로운 민족적 성 격 그리고 애국주의적인 사상 감정을 대중들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향유할 수 있도 록 민족무용의 형식을 통해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65)

    2. 최승희식 글로컬리티의 구현 양상

    공연예술분야에서 글로컬리티에 대한 논의는 연극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파트리 스 파비스(Patrice Pavis)는 브라이언 싱글턴(Brian Singleton)의 글로벌 연극의 정의 즉, 각 나라에서 재해석된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의 한 부분이 아니라 “국가-간의(inter-national)관 객들을 위한 초-문화적(trans-cultural) 산물”66)임을 언급하면서 그러나 연극은 글로벌이라 는 세계적 획일화 과정에 흡수되지 않으며, “현지 관객의 지역적 필요에 응답”하며 변모하는 연극의 글로컬화67)가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초문화적(Transcultural) 공연산물 은 “하나의 세계 문화에 통합”되기 위해 작품 안에서 각 문화요소들이 국제적 관점에서 유기적으로 구체화되었을 때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68) 따라서 본 장에서는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 소련 순회공연의 프로그램에서 “북한 발레(Корейски й Балет)”라고 표기된 대표작품 <사도성의 이야기>를 예시로 형식 면에서 민족무용극에 유럽의 발레의 형식과 연출 기법의 활용방법, 내용과 주제면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북한의 현실에 맞게 표현한 최승희식 글로컬리티의 구현 양상을 살펴볼 것이다.

    최승희는 월북 이후, ‘한민족의 생활에서 극히 새로운 것, 선진적인 것, 아름다움 것을 반영하고 민족적이면서 동시에 전 인류적인 내용을 지닌 작품의 창작’69)에 노력하였다. <사도성의 이야기>는 최승희가 자신만의 민족무용극인 “북한 발레”를 제작하기 위하여 소 련의 발레 예술을 연구하여 창작한 작품 중 가장 완성도 있는 대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최승희와 가야금 명인 최옥삼의 공동작업의 결과물로 1954년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초연 된 이 작품은 최승희식 글로컬리티의 구현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선례이다.

    최승희의 무용극 대본집70)과 영화 <사도성의 이야기>에 등장한 춤을 분석한 김채 원71)과 유미희의 연구72) 그리고 <사도성의 이야기>에서 최옥삼의 음악을 분석한 김해숙 의 연구73)를 토대로 <사도성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춤들을 분류해 보면 아래 <표 3>와 같다. 김채원은 춤을 15개로 유미희는 16개로 구분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두 연구를 비교하여 16개의 춤으로 정리하였다.

    표 5.

    <사도성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무용소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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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채원(2013), 한경자(2020)는 <사도성의 이야기>가 소련의 발레예술 기법을 차용한 북 한발레라고 보고 있는데 형식적인 면에서 막과 장으로 무용극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2막 금희(최승희)와 순지(조한구)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 순지는 등장하 여 춤을 추지는 않지만 단소를 연주하고, 단소 연주에 여자 주인공 금희가 독무 <털부채 춤>를 춘다. 그리고 최승희는 무용극 창작에서 문학적 묘사를 안무에 반영하는 형식을 취 하고 있는데 <사도성에 이야기>의 2막에서 이러한 예시가 잘 나타난다. 봉건사회에서의 불합리한 신분제도로 인해 이별하게 되는 장면을 표현하는 두 남녀주인공의 2인무 <사랑 과 이별의 춤>은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장면 묘사에서 시작되었다.

    “꿈 같이 만났던 그들이 꿈 같이 헤어져야만 하는구나. 금희는 슬픔도 애착도 이별의 정도 모든 것을 가까스로 이겨내려는 듯 애절한 마음을 다짐하여 진정시키고 순지 앞에 몸을 던지 듯 꿇어앉는다. 홍옥의 목걸이를 풀어 근엄히 영영 만날 길 없는 그의 손에 들려준다. 옥은 부서져도 붉은 마음은 변함없다고...”74)

    이처럼 2막에서 최승희는 남녀 주인공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의 과정을 문학적 묘 사에 기초하여 남녀 주인공의 독무와 2인무를 번갈아 배치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이는 발레극에서 장면 구성 방식과 매우 유사함을 볼 수 있다.

    동작의 측면에서 본다면 김채원(2013)은 남성 무용수들의 동작에서 발레나 코사크 춤에 서 보이는 카브리올(Cabriole), 파드샤(Pas de chat), 그랑 쥬테(Grand jeté)등75)의 동적이 며, 도약하는 동작들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최승희가 처음으로 시도한 발레연구의 결과물 로 한국무용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과 발레 등의 외래무용의 동작들을 유기적으로 조화시켜 만든 새로운 스타일의 북한무용으로 평가하고 있다.76) 3막의 남녀군무 <해녀와 어부>에서 한국의 어촌의 생활상과 한민족의 긍정적인 품성을 표현하기 위해 해녀가 바다 속에서 올라와 해풍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쓰다듬는 춤, 작렬하는 태양의 눈부신 빛발을 가리며 추는 춤, 어부들과 짝을 지어 춤추며 부끄러워하면서도 행복해 하는 춤, 맑은 하늘 위에 떠있는 구름을 보며 밝은 미래를 상상하는 춤 등 해녀와 어부의 특징적인 4개의 주요 동작들을 반복, 가공, 대조의 방법을 이용하여 구성하였다.77) 최승희는 <사도성의 이야기> 에서 안무할 때 춤을 먼저 안무한 후에 내용을 구성하였는데, 이는 춤들이 독립된 작품으 로써 완성도와 예술성을 높일 수 있는 동시에 춤과 주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데 일조하 였다. 이는 3막 <해녀와 어부>와 5막 <전쟁의 춤>에서 잘 나타난다.78)

    따라서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는 최승희가 조선민족무용기본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 춤문화의 전통을 바탕으로 세계 무용예술의 장점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예술 을 창조하고 이를 통해 무용예술을 다양화하고 발전시킨 것79)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사도성의 이야기>는 한국무용예술의 특징을 유럽식의 무대에서 효과적이고 극적 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발레무대연출 기법과 발레 동작을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노마 사와코(野間佐和子)는 최승희의 무용을 “조선의 전통적 민족무용을 독자적인 감수성의 필 터를 통해 변화시켜 만든 것”80)으로 한경자는 <사도상의 이야기>를 기존의 발레무용극의 고정관념을 깨고 민족무용극의 가능성을 증명한 선례로 평가하고 있다.81) 이처럼 최승희 방식의 글로컬리티가 구체화 된 작품이 바로 <사도성의 이야기>이다.

    3. 최승희식 글로컬리티의 수용 양상

    최승희는 북한의 무용은 전통과 혁신에 대한 막스-레닌주의 원칙을 견지하여 민족 생활 과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전통을 창조적 계승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첫째,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무용예술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 둘째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발전 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요소를 발전시켜야 했다.82) 그녀는 북한무용의 특징을 “조선 의 맛”이라고 규정하여 무용작품에서 시대성과 인간성을 진실하게 표현하려고 했다.83) 즉 “옛것을 위한 옛것”이 아니라 민족의 생활상과 노동의 모습을 모티브로 하여 시대정신을 구현한 현대적인 무용작품의 창작을 위해 노력했다.84)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에 대해 소련의 예술가들과 비평가 및 관객들 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요 소련 예술가들의 평을 <로동신문>에는 최승희로 대표되는 북한의 예술적 성과로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최승희는 순회공연의 성과와 소회를 <문학신문>에 “뜻이 같으니 세상도 넓다”라는 제목의 글로 기고했다. 제목에서 나타난 것 처럼 최승희는 5개월간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의 15만여 명의 관객들 앞에서 북한무용작품 들을 공연하면서 깊은 공감과 호평을 받아 방문하는 곳마다 공감할 수 있는 나라가 많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85)

    소련의 주요 언론매체들은 <사도성의 이야기>를 최승희가 민족무용의 기법으로 대작을 창작하고 연출할 수 있는 그녀의 예술적 능력을 증명할 수 있었던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 다. 이 작품은 민족적 색채가 짙으면서도 작품의 주제와 내용이 명료하여 외국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서정적이며 우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깊이가 있는 북한춤의 특징이 잘 표현되었다.86) 대표적인 소련 예술가들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공연에 대한 다음 과 같은 호평을 남겼다. 키로프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 안무가를 역 임하고 <바흐취사라이의 샘>(1934)을 안무한 로스티슬라브 자하로프(Р. Захаров, 1907-1984)는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공연을 보고 주요 당기관지 <프라브다(Правд а)>에 “모스크바 예술계의 큰 사변이다”라는 장문의 감상평을 남겼으며, 소비에트 대표 안 무가인 카시얀 골레이조브스키(К. Голейзовский, 1892-1970)는 <맑은 하늘 아래서> 를 극찬했다. 그밖에도 대대로 발레예술가 집안이며, 볼쇼이 극장의 발레안무가로, 프로코 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발레를 안무한 레오니드 라브로브스키(Л. Лавровский, 1905-1967)는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의 작품성을 높이 샀으며, 1940-60년대 볼쇼이 극장 수석무용수와 안무가를 역임하고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백조의 호수>를 안무한 아사프 메쎄레르(А. Мессерер, 1903-1992)는 남성무용수들의 군무에 발레기법이 도입된 사실에 주목하면서 민족적 형식에 발레기법이 절묘하게 잘 융합되었음을 지적했다.87) 당 시 레닌그라드 컨서바토리(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컨서바토리) 무용교육과 학과장인 니콜라이 이바노프스키(Н. П. Ивановский, 1893-1961)는 최승희와 그녀의 공연에 대 해 아래와 같은 평을 남겼다.88)

    “최승희는 쏘련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무용가의 한 사람이다. 무용 창작가로서, 무용 연출가로서 그리고 무용수로서의 최승희의 독창적 천품은 놀랄 만하다. 공연 중에 한 사람도 퇴장한 사실이 없는 현상은 바로 그의 예술의 높이를 말하여 준다.”89)

    소련의 공훈배우(후에 인민배우로 승격)로 키로프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무 용수였던 주코프스카야(Зубковская И. 1923-2001)는 신문 <소비에트 문화(Советская Культура)>에 “시적 예술(Поэтическое искусство)”90)이라는 제목으로 국립 최승희 무 용연구소의 <사도성의 이야기>와 민속무용 소품공연에 대한 상세한 공연평을 게재하였다.91) 이 평에 따르면 <사도성의 이야기>는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에게 절대적 인 공감을 얻었으며, 특히 주인공 금희를 연기한 최승희의 풍부한 연기력과 표현력 그리고 작품의 유기적 구성과 완성도는 극찬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여자 주인공 금희(최승희)의 상대역인 남자 주인공 순지역을 맡은 조한구의 역동적인 남성적 캐릭터 그리고 남성 군무는 최승희 무용극의 독특한 특징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와 함께 2막의 남녀주인공들의 2인무 <사랑과 이별의 춤>과 4막의 최승희의 독무 <맹세의 춤>은 동양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내면의 감정표현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92) <사도성의 이야기>의 동유럽에서의 흥행가능 성은 이미 초연당시 북한 주재 외교관들에게 의해 검증되었다. 헝가리 출신 한반도 전문가이 며 1954년 9월부터 1956년까지 북한주재 헝가리 대사관에 문화관으로 재직했던 쇠베니 얼러다르(Sövény Aladár, 1914-1980)는 1954년 모란봉 극장에서 <사도성의 이야기>의 초 연을 보고 자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유럽 어느 수작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작품으로 반드시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고 극찬을 했으며 그의 예견은 적중했다.93)

    이 밖에도 무용극 <조선의 어머니>가 불가리아와 알바니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소련에서 <사도성의 이야기>가 주목 받았던 것과 상반된다. 불가리아에서는 아름다운 예 술을 가진 북한을 침략한 미국에 대해 공분을 샀고, 알바니아에서는 미국의 침략에 대항해 영웅적으로 싸운 북한의 어머니로 대표되는 북한의 민중들에게 동정과 연민 그리고 국제 적 연대감을 느끼며 공감을 살 수 있었다.94) 이처럼 사회주의 국가들이지만 각자 고유의 문화의 차이로 작품을 다르게 수용하고 선호하는 작품도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소품들 중에서 <행복한 젊은이>의 명랑하고 낙천적인 어깨춤과 <샘물터에서>의 서정적 이고 평화로운 한민족의 생활모습을 그린 여성들의 <물동이 춤>이 호평을 받았다. <진주 의 무희>는 서정적이며, 이번 동유럽공연에서 초연한 안악 고분벽화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 한 장검무 <비천도>는 높은 예술성과 환상적인 표현이 잘 되었다는 평이 있었다.95) 최승 희 스스로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관객들은 북한예술을 비롯하여 동양의 예술을 깊이 이 해하지 못하고 있음은 인정하고 있다.9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순회공연 작품들에서 한 국무용의 전통적 동작들이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되었고,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새로 운 민족적인 동작들이 잘 표현되었기에 외국 관객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었다.97) 그리고 한국무용의 특징적인 동작들인 상반신의 부드럽고 깊으며 서정적인 움직임이 매혹적이었 으며, 굴곡이 많은 포물선의 연속 특히 여성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서정적 표현들이 소련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98) 마지막으로 이번 순회공연에서 최승희의 딸이 자 <진주의 무희>, <파랑새>, <집시춤>을 공연한 안성희가 최승희의 뒤를 잇는 북한을 대 표하는 무용가로 부각되고 각인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순회공연으로 최승희의 <사도성 의 이야기>를 통해 북한의 예술성을 공고히 하는 계기도 되었지만, 최승희의 후계자로서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사회에 안성희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따라서 이번 공연의 최대 수혜자는 안성희였다.

    이처럼 <사도성의 이야기>와 <맑은 하늘 아래서> 그리고 <조선의 어머니> 그리고 민속 무용 소품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중요시하는 민중들의 문화인 민속춤을 소재로 유럽 의 공연형식에 북한민중들의 긍정적인 생활상을 무대예술화한 결과물이다. 이들 작품들은 최승희식으로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표현한 혁명 무용 작품들 이었으며, 소비에트가 추구하는 예술론을 최승희식으로 글로컬화하여 표현한 작품들 이었 기에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어 동유럽 관객들 극찬을 받을 수 있었다.

    Ⅳ. 결론

    1945년 광복이후, 북한은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놓여있었다. 사회주의 건설기의 북한 정부는 소련이 그러했듯이 예술을 활용하여 북한 민중들의 사회주의화에 노력을 기 울였다. 월북 이전부터 “코리안 발레”를 만들고 싶어 했던 최승희의 예술적 창작열과 북한 정부의 정치적 목적이 부합하여 1950년대 북한의 무용예술의 기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월북 이후, 최승희는 사회주의의 예술창작 방법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민중 들의 문화이며 생활상을 여실히 표현하는 북한의 민속춤의 정립과 무대화에 힘을 기울였 다. 이를 위해 형식적으로는 유럽의 발레의 형식과 연출 기법을 차용하여 북한무용에 맞게 활용하였고, 내용과 주제 면에서는 북한의 현실에서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북한 민중들의 슬기롭고 낙천적이며 용맹한 모습을 그린 최승희 표 민족무용극 “북한 발레”는 최승희식 글로컬리티의 산물로 대중들 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 북한 민중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동시에 사회주의 선 전효과와 해외에서는 북한의 예술성을 인정받고 우방 국가들과의 친선과 결속을 강화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1956-57년 소련 순회공연 프로그램에서 국립 최승희 발레 스튜디오(Корейска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балетная студия имени Цой сын х и)라고 표기하고, 또 소련이 사회주의 이후 다민족 대통합과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민속춤과 설화에 발레양식을 접목시킨 민족발레장르 출현과 맥을 같이하는 민족발레 (Национальный балет)99) 작품인 혁명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 <맑은 하늘 아래> 그리고 <조선의 어머니>는 사회주의 문화를 공유하는 동유럽 블록국가들의 관객들에게 각 기 다양한 이유로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최승희는 북한정부의 절대적 비호를 받고 있어 체제에 부응하는 작품들을 창작해야만했기에 그녀가 진정으로 만들고 싶었던 민족발 레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진아의 주장처럼 그녀는 친일의 행적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조선의 무희’에서 ‘조선의 어머니’100) 해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사회주의의 어머니’로의 이미지 변신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처럼 최승희의 작품들은 사회주의 국가의 예술창작 방법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 는 사회주의 문화예술의 큰 틀 안에서 한민족의 춤문화를 유기적으로 구현한 글로컬리티 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여러 정치적 의도는 차치하더라도 북한이라는 사회주 의 국가의 매우 제한적인 창작환경에서 그녀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그녀의 예술성은 높 이 살 만 하다. 최승희는 우리민족예술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해외공연의 성과는 북한 정 부의 민족예술 발전의 정확한 시책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101) 소련에 모이세 예프 민속 발레가 있는 것처럼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최승희 북한 발레라고 불릴 수 있는 최승희 표 민족발레를 만들고 싶어 했고, 이번 1956-57년 소련 순회공연에서 그 예술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본 연구는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수행되어 1차 사료의 접근이 불가하여 매우 제한적인 아카이브 자료들과 기존의 선행연구들을 기반으로 수행되었음을 연구의 제한점으로 서두 에 밝혔다. 소련 및 동유럽 순회공연과 관련된 자료들이 추가로 발굴될 수 있다면 최승희 의 작품들이 동유럽 각 나라들의 관객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고, 어떠한 이유로 호응을 얻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추후에 코로나 19가 종식되면 러시아 자료와 북한 자료 그리고 동유럽 자료들을 통하여 미흡한 점들을 수정·보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Figure

    Table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 일정11)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 소련 순회공연의 소련 문화부 업무와 담당자들12)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의 무용극 프로그램55)

    1956-57년 국립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소련 순회공연의 민속무용 소품 프로그램62)

    <사도성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무용소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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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양민아는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무용전공)를 졸업하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문화 인류학 및 민족학과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문화”로 사회학 석사학위를, “문화간 상호소통 제도화의 여러 형식들 (한·러 문화교류를 중심으로)”로 문화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중앙대학교 외국학연구소에서 HK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구 관심사는 디아스포라 춤문화와 소비에트 연방시기의 공연예술활동이며, 한·러 문화예술교류에서 전통공연예술의 역할과 비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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