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한성준(1874~1941)은 조선후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걸쳐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전통춤을 창안한 한국 전통춤의 거장이다. 그는 유명한 고수로서 공연활동을 시작한 1930 년대 이후에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춤과 접목시켜 전통춤을 예술작품으로 무대화하였다. 한성준이 창작한 춤이 백여 편1)에 이르지만 현재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승무, 태평무, 살풀이춤만이 대중에게 알려져, 더 많은 가치 있는 종목 발굴과 재평가가 필요하다. 오늘 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한성준 춤은 정중동의 정수가 잘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성준 춤은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축적되어온 문화적 자산의 바탕위에 정립되 어왔다. 또한 고유의 문화를 전승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구체적인 활동을 펼침으로써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민족 고유의 춤 문화 전달자로서 큰 역할 을 하였다.2)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용 강습소인 ‘조선무용연구소’와 ‘조선음악무용연구 회’를 설립하여 무용을 체계적으로 지도하고 후진들을 양성하여 전통무용의 전수체계를 확립하였다.3)
그의 전통춤 맥을 이어온 대표적 제자로 강선영, 한영숙이 있다. 그중 강선영은 한성준 이 타계한 후 그의 춤 중에서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 92호4) 태평무 보유자로 지정되었 다. 강선영은 태평무의 원형 보존은 물론이거니와 스승 한성준이 정립한 전통춤을 재현하 고 전승하는 것이 중요함을 자각했다. 그 결과 2000년 《한성준선생, 그 춤의 재현》5)이라 는 이름으로 한성준 문하에서 배운 40여종의 춤 가운데 신선무, 승무, 바라춤, 즉흥무, 검 무, 한량무, 훈령무, 장고춤, 태평무 9개 종목을 무대에서 재현하였다.
주지하다시피 한성준은 전통춤 안무가이기 이전에 고수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런 그의 이력으로 미루어볼 때 타악이 주된 소품으로 사용된 작품은 분명 그의 천재성이 어떻게 발현되어 있는지 주목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명고수로 알려져 있는 한성준이 만든 장고춤의 음악적, 미적 가치를 살펴 타 장고춤과는 다른 그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고찰하고 그 장고춤이 어떤 형태로 후손에게 전승되어 살아있는지 살펴보고자 한 다. 그는 소리와 장단의 조화를 중요시하였는데, 본래 춤과 음악은 분리되지 않은 불가분 적 관계임을 인식하고, 치밀한 음악적 분석 위에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춤을 더함으로써 무대화된 전통춤을 창작하였다. 장고춤은 그러한 춤과 음악이 일체화된 예술 작품일 것이 다.6)
박종성7)에 의하면 장고춤은 농악무와 함께 확산되었고, 장고잡이들의 춤이 큰 역할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장고춤은 기본적으로 남자들의 춤이고, 여자들이 출 경우에는 궁글채 없이 열채만 쥐고 추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8) 그런 의미에서 남성무용수인 한성 준이 창안한 장고춤은 여성무용수인 강선영에게 전수되면서 궁글채 없이 추는 여성의 장 고춤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장고춤은 전통춤의 대표적인 레퍼토리 중에 하나로 많은 한국 무용가들에 의해서 활발 히 공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어의 정립이 일원화되어 있지 않고 ‘장고’와 ‘장구’ 가 혼용되고 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혹은 무용가의 선택에 의해 ‘장고춤’ 또는 ‘장구춤’, ‘장고무’ 등의 용어가 혼용되어 전해오고 있다. 《한성준선생, 그 춤의 재현》 공연 팸플릿 에 나와 있는 작품명은 장고춤으로 표기되어 있고 무용용어해설집9)과 한국예술사전10)에 서도 장고춤으로 작품 명칭이 표기되어 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장고춤’과 ‘장고’로 용어 를 통일하였다. 또한 장고채의 명칭에서 궁편을 치는 채를 ‘궁궐채’, ‘궁굴채’, ‘궁글채’,11) ‘궁채’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연구에서는 궁글채로 통일하였다.
현재 장고춤은 남북한은 물론 전 세계에 한민족을 대표하는 전통춤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장고춤이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그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에 전통춤의 무대화는 물론 한국무용사 발전에 공헌했던 한성준 장고춤의 형성배경과 예술적 가치 그리고 전승양상을 고찰하는 것에 연구의 목적을 둔다. 이 연구의 제한점은 시대적 상황에 의해 한성준과 강선영이 직접 공연한 장고춤 영상자료를 확보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제한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부분은 강선영에게 한성준 장고춤을 전수 받아 후학들에게 이를 전수하고 있는 양성옥의 대담과 공연기록12)과 동영상13)이 이를 보 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한성준 장고춤을 복원하여 전수한 강선영으로부터 춤사위와 장단의 특이성, 손장단, 복식 고증 등을 직접 사사받은 양성옥과의 인터뷰와 함 께 강선영의 생전 고증 자료들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 증언과 활동을 뒷받 침할 수 있는 문헌자료와 공연 팸플릿을 중심으로 수집, 정리하였다.
한성준의 예술 활동에 관한 선행연구는 다음과 같다. 현재 한성준에 관한 논문과 장고춤 에 관한 논문을 살펴보면 춤의 분석에 관한 연구14)와 예술사적 가치를 조명한 연구15) 또 는 그의 예술정신에 관한 연구16)와 근대춤에 대한 연구17)로 근대무용 정착에 있어 한성준 의 영향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고 인물과의 비교연구로는 다른 남성무용가들의 비교연구18) 가 있다. 학술지 논문으로는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활동19) 및 음악활동과 춤 활동을 연계 하여 조명한 연구20) 등이 있다. 그밖에 춤사위분석21)이나 비교연구22)가 주를 이룬다. 한 성준은 무용부문 뿐만 아니라 음악활동연구23) 와 피리시나위에 관한 연구24)로 음악부문 에서도 한성준의 예술활동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선행논문을 검토한 결과, 한성준에 대한 학술적 측면에서의 조망은 전통춤에 대한 이해 를 높이고 전승의 가치에 대한 제고와 전승의 실천에 주요한 동기가 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고수로서 음악적인 영역과 전통무용가로서 춤꾼의 영역을 접목 하여 한성준 장고춤의 전승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인물로서 나아 가 장고라는 악기와 춤을 결합한 장고춤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II. 한성준 장고춤의 예술계보
1. 한성준 장고춤의 형성배경
한성준(1874~1941)은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6~7세부터 외조부 백운채가 북 치고 춤추는 것을 가까이 보면서 성장하였다. 이후 7~8세부터 홍패(紅牌), 백패(白牌) 사 령으로, 그리고 고사당(告祠堂) 차례와 묘소 소분(掃墳) 등에서 삼현육각(三絃六角), 소리, 춤 등의 공연과 줄타기를 했다. 14세 때에는 3년간 서학조에게 줄과 재주를 공부하였다. 20세가 될 때까지 수덕사에 들어가 박순조에게 춤과 장단을 집중적으로 익혔다.25) 20세가 될 때까지 춤과 장단을 집중학습한 결과 장단과 소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춤 이 장단의 시작이라는 것을 한성준 본인 스스로 밝히고 있다.26) 따라서 한성준은 주어진 장단에 동작을 맞춰가는 방식이 아니라 춤과 장단을 통합된 하나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성준은 21세부터 홍성, 서산, 태안 등으로 활동을 넓혀 갔고 굿판과 농악 등 민속연희 에 동참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계문(全桂文, 1872-1940)27)에게 북 장단과 춤사위를 배우 기도 하였다. 그 후 고향을 떠나 전국을 순회하며 옛 관기의 궁중무용과 기생들의 춤 반주 를 해주면서 춤과 음악을 학습하고 공연하기도 하였다.28) 또한 라디오방송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연주자들과도 인맥을 넓혀나갔다. 결과적으로 전통춤 보다는 음악분야에서 더욱 뛰어난 명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풍류장단, 노래장단, 춤장단 등 다양한 장단을 구비하 고, 장고, 북, 쇠가락에 능했으며 창극에서 배역을 맡아 소리를 했고, 대금 또한 학습한 경력을 통해 소리와 대금 음악도 보유하고 있었다.29)
이처럼 한성준은 고수의 역할로서 음악활동을 먼저 시작하였으며 소리와 장단의 조화를 중요시 여겼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소리와 장단이 몸짓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인식하 고 차츰 무용 활동을 확장시켜 나갔다. 특히 전통음악과 전통무용의 교차연구를 통하여 장고잡이의 명수인 한성준에 의하여 재탄생된 한성준 장고춤의 형성배경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특히 전통춤 공연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1935년 부민관에서 기생, 부인(婦人), 남도사 람, 취미로 춤을 추던 대학생 등의 제자들과 함께 공연하였다. 공연작품은 승무, 학무, 태평 무, 신선무, 살풀이춤, 한량무, 검무, 바라무, 사공무, 농악무 등으로 구성됐다.30) 그러나 이 공연은 서양식 무대 형식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이어 그는 1937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여 체계적으로 교육과 공연활동을 이 어갔다. 1938년 5월 2일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창립이후 첫 공식 공연으로 부민관에서 조선 일보가 주최한 전조선향토연예대회 중고무용대회에 참가하여 지도와 창작 및 직접 출연도 하였다.31) 공연작품은 승무, 단가무, 검무, 한량무, 신선음악, 상좌무, 상좌무, 살풀이춤, 사자무, 태평무, 학무, 급제무, 사호락유가 구성되었다.32) 같은 해 6월 23일 조광회(朝光 會) 주최의 고전무용대회로 부민관에서 공연을 개최했고 공연구성은 5월의 레퍼토리와 유 사하다. 다만 사호락유는 공연종목에서 제외되고 농악, 소경춤, 군노, 사령무가 추가되었 다.33) 9월에는 고전음악무용대회 참여하였고34) 방송국과 신문, 잡지에서 춤을 소개하였 다. 1939년 2월 21일부터 3월 20일까지 조선음악무용 도동기념(渡東記念) 대공연 남선순 업(南鮮巡業)에 대전, 군산, 전주, 이리, 목포, 광주, 순천, 여수, 통영, 마산, 진주, 부산, 경주, 포항, 대구, 김천, 청주, 충주, 조치원, 공주 등 1개월간 순회공연을 하였다.35) 공연종 목은 검무, 한량춤, 신선음악, 살풀이춤, 급제무, 태평무, 신장무(神丈舞), 동자무, 노승무, 바라무(鉢羅舞), 라도무(羅渡舞), 농악무, 학무, 단가무, 애국행진곡, 소경춤, 군노사령의 총 17개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이전 공연과 차이점은 사자무가 제외되고 신장무, 동자무, 발 라무, 애국행진곡이 추가되었고, 농악무는 계속 공연되었다. 1940년 2월 27일에는 조선일 보사가 후원한 도동기념 공연을 개최하였다.36) 같은 해 4월 일본 동경의 히비야공회당을 비롯한 주요도시 순연에 앞서 부민관에서 기념공연을 하였다. 공연종목은 애국행진곡, 동 자무, 검무, 단가무, 한량무, 고무(鼓舞), 살풀이춤, 가야금병창, 태평무, 속곡(俗曲), 사정 무, 아리랑무, 도라지타령무, 바라무, 학무, 신선무, 급제무, 농악무의 18개 작품으로 구성 되었다. 이전 공연과 차이점은 사정무, 가야금병창, 속곡, 아리랑무, 도라지타령무가 처음 공연종목으로 구성되었다.
시대의 변천에 따른 공연작품 구성에서 이전의 발표회에서 신선음악 또는 신선악의 종 목으로 표기되었던 작품이 신선무로 변화된 것으로 보아 해당 작품에서 춤사위가 발전되 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무(鼓舞)가 처음 등장하였고, 1938년 농악으로 소개되었던 것이 1939년 이후 농악무로 변경되었음은 역시 춤 역할이 강조되었음으로 추정된다. 이상 과 같이 조선음악무용연구회 공연에 등장하는 농악, 농악무, 고무(鼓舞)와 같은 작품은 장 고춤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춤의 역할이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40년 20여 명의 제자들과 동경 히비야 공회당에서 3일간 공연37)한 것을 보고 시인 김소운은 “⋯떵! 하는 長鼓(장고) 소리에 당신의 한쪽 어깨가 슬쩍 솟구치자 ⋯ 白衣人 (백의인)의 멋과 꿈이⋯한성준! 당신의 춤은⋯”38)이라는 싯구로 표현하였다. 시의 제목 ‘당신의 춤은’의 내용 안에 학춤인 듯, 장고춤인 듯 표현되었으나 한성준 본인의 춤을 감상 한 이후 시에서 ‘장고’가 거명되고 있다. 이 공연에 발표된 공연종목은 한량무, 검무, 신선 무, 바라무, 학무, 태평무, 하인무, 노장무, 승무, 농악무로 밝혀진다.39) 공연종목에 장고춤 이 구체적으로 거명되지는 않았으며 농악무는 공연작품에 포함되었다.
이상으로 공연활동에 대하여 시대 순으로 공연종목을 살펴본 것과 같이 한성준이 직접 장고춤을 추었다는 문헌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김소운의 시에 나타난 장고라는 단 어와 함께 한성준의 춤 감상 이후에 표현된 것을 한 조각의 유의미한 가능성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제기해 본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한성준선생, 그 춤의 재현》 공연 팸플릿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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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생의 문하를 거쳐간 수많은 제자들은 승무와 장고춤의 최승희40), 학춤의 조택원 등을 비롯하여, 일본 동보가극단의 안무자 미바시 렌꼬(三橋蓮子)는 승무를⋯미국인 이도데 이크는 승무와 장고춤을 배우는 등⋯일제치하 암흑기에도 우리춤을 보급하고 뿌리를 내렸다.
이 글 전체를 살펴보면 장고춤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장고춤은 한성준 선생이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제자들에게 전수한 춤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공연을 복원 발표한 주체자인 강선영은 초대의 말씀에서 “⋯이번 무대에서는 그 시절에 입고 추었던 의상들을 그대로 재현했으며, 제자들의 동작에 묻어나오는 기교적인 면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원형 그대로의 동작을 재현⋯” 했다고 말했다. 당시 한성준의 직계로서 유일한 생존 제자인 강선영의 고증을 신뢰하지 못할 근거는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한성준 장고춤의 형성배경을 고찰한 결과, 다음의 세 가지 추론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박종성에 의하면 장고춤은 농악과 함께 이루어졌고, 남성들의 춤으로 분류한다. 다만 여성들의 장고춤에서는 궁글채를 들지 않고 열채만 쥐고 춤춘다. 이는 남성무용수인 한성준이 창안한 장고춤이 여성무용수인 강선영에게 전수되면서 열채만 쥐고 춤추는 현재 의 춤사위로 전승되었을 수 있다.
둘째, 한성준의 춤 공연에는 농악, 농악무의 명칭으로 이와 관련된 춤 종목이 매 공연마 다 연행되었다. 일본 히비야 공회당 공연을 감상한 시인 김소운은 한성준의 춤을 직접 감 상한 후 장고라는 용어와 한성준의 춤에 대한 표현을 구체화하였다. 이는 짧은 순간이라도 한성준이 직접 장고를 메고 무대에 올랐을까? 하는 의구심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셋째, 강선영의 복원으로 공연된 한성준 춤의 재현 공연 팸플릿에는 한성준이 심혈을 기울여 장고춤을 창안하여, 국내외 다수의 무용가들에게 전수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 국에서 1970년대 전후 무용연구소에서는 남성 무용지도자가 입장단과 함께 장고 손장단으 로 입춤, 수건춤, 장고춤을 지도하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한국 전통춤의 대가인 한성준의 장고춤은 일반 대중에게 거리감 없이 민속성을 기반으로 다가갔던 것인 가? 하는 또 하나의 가설이다.
민속춤의 본질은 일반에 가깝게 접근해 있으나 원류가 명확하지 않기에 작자미상, 또는 가능한 범위내에 많은 추론을 동반하기도 한다. 한성준 장고춤 역시 유파별 다양한 장고춤 가운데 한 종목으로 전통 춤사위를 유지하고 있는 가치를 검증하고 전승체계를 확립할 당 위성을 지니고 있다.
2. 강선영의 장고춤 공연활동
강선영(姜善泳, 1925-2016)은 한성준의 손녀인 한영숙(韓英淑, 1920-1989)과 함께 한 성준 제자 계보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고 국가에서 인정한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였다. 강선영은 한성준이 창립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연구생을 지도하는 한편, 발표회 때마다 프로그램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공연종목은 한량무, 학춤, 태평무, 승무, 북춤, 장고춤, 살풀이춤, 초립동, 훈령무, 바라춤, 검무 등 다양한 춤을 추었 다. 1941년 한성준이 타계 한 후 강선영은 1953년 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신작발표·문하 생 발표회·창작무용안무 등으로 활동역영을 확장하였다. 1960년 강선영무용단을 설립하여 세계 각국의 민속예술제에 참가하면서 한국 전통무용의 세계화에 앞장섰다.
강선영은 한성준으로부터 사사한 태평무로 1988년 12월에 제 92호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강선영은 전통의 원형이 무시되면 전통춤으로써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서 춤 의 정통성을 반드시 지켜 나가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 제자들은 스승이 태평무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다음 해인 1989년, 우리춤의 전승과 보존을 목적으로 ‘태평무 보존 회’를 결성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태평무 보유자로 지정된 지 10년 만인 1998년에 강선영 은 고향 안성에 태평무 전수관을 설립하였다. 2000년 강선영은 태평무의 원형 보존은 물론 스승 한성준이 1930년대 창작한 전통춤 레퍼토리의 원형을 재현하는데 역점을 두어 스승 의 춤 재현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갖게 된다. 여기서 그는 한성준 문하에서 배운 40여 종의 춤 가운데 신선무, 승무, 바라춤, 즉흥무, 검무, 한량무, 훈령무, 장고춤, 태평무를 선 택하여 춤을 복원하였다. 2000년 2월 28일 《한성준선생, 그 춤의 재현》 공연 이후 강선영 은 한국 무용계에 끼친 스승의 업적을 기리고자 한성준 춤비 건립 위원장이 되어 2001년 4월 19일 태평무 전수관 앞마당에 한성준 춤비를 세웠다.41) 스승에 대한 춤의 가치를 전 승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강선영 장고춤은 한성준 춤 재현공연 이전과 이후를 기점으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한성준 춤 재현공연 이전에 강선영 장고춤은 본인이 재구성한 춤사위로 구성 되었다. <표 1>과 같이 한성준 장고춤 재현 이후 강선영 무용단의 장고춤 공연연보는 강선 영 장고춤과 한성준 장고춤을 공연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선택적으로 연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성준 장고춤의 복원이 이뤄지기 이전에도 강선영은 170여 개국 1,500여 회가 넘는 국내외공연 기록 중 장고춤을 주요 공연종목에 포함하였다. 강선영의 국내외 공연 기록 중 장고춤 공연연보는 <표 1>과 같다.
강선영은 1960년 강선영무용단을 설립하여 세계 각국의 민속예술제에 참가하면서 한국 전통춤의 세계화를 실천하였다. 장고춤은 <표 1>과 같이 강선영무용단의 주요 공연종목으 로 구성되었다. 강선영은 본인이 안무한 장고춤을 다수 공연하였고, 2000년에는 한성준 장고춤을 복원하여 공연하기 시작하였다. 한성준의 장고춤은 생전에 그가 직접 공연하였 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강선영에게 전수하여 현재 강습회를 통해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42) 강선영은 이를 2000년 공연에서 복원하여 양성옥이 공연자로 출연하였다. 따라서 한성준 장고춤의 전승계보는 한성준에 이어 그의 제자인 강선영에 의해 복원되었고 현재 는 양성옥을 중심으로 전승현황을 이어가고 있다.
III. 한성준 장고춤의 예술적 가치
장고는 춤의 영역을 포함하여 전통예술의 반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쓰이는 전통악기 이다. 장고는 우리 타악기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악기로 지휘의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장고춤은 궁편과 채편의 다양한 조화로써 음률을 구성하고, 움직임과 소리의 조화로 이루 어진 춤이다. 장고춤은 다양한 유파로 발전하여 왔으며 한국춤 종목가운데 역동적이고 정 적인 움직임이 상존한다.
이와 같이 장고춤은 역동적인 형태와 정적인 형태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역동적 인 형태의 대표적인 장고춤은 설장고로부터 비롯되었다. 궁글채와 열채를 사용하여 가락 을 자유자재로 연주한다. 역동성을 지닌 장고춤의 형태는 움직임이 경쾌하고 동적이다. 그 리고 정적인 형태의 장고춤은 오른손에 열채를 사용하여 가락을 치는 동작으로 기방에서 유래되었다.
두 가지 형태의 장고춤은 장고를 메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역동성을 표출하는 장고춤 은 궁편을 밑으로 채편을 위로 한다. 반면에 정적인 형태의 장고춤은 반대로 궁편을 위로 하고 채편을 아래로 멘다. 춤의 형태에 있어서는 두 가지 모두 독무, 대무, 군무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변화와 기교가 첨가되어 기예의 수준에 이르기도 한다.
한국무용가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장고 장단을 두드리고 장고춤을 추어봤을 정도로 장 고춤은 한국무용에서 대중화된 작품이다. 대중화된 만큼 다양한 유파의 장고춤이 현행되 고 있다. 장고춤은 춤의 등장, 춤의 동작, 장고를 메는 방법에까지 다양한 형태의 특이성을 지닌다. 유파별 장고춤의 음악과 형식에 있어서도 처음에 민요 가락에 맞추어 천천히 흥을 돋우다가 설장고를 삽입하여 빠른 장단으로 몰아가 끝을 맺는 이를테면 두 가지 형태를 접목시킨 춤도 많이 성행되고 있고, 또한 안무자에 의해 춤의 특성에 따른 음악 변화를 주거나, 태평가→어랑타령, 어랑타령→청춘가→경복궁타령, 천안삼거리(천안삼거리에 의 한 변주곡) 또는 호적시나위가 많이 연주된다.43)
한성준 장고춤은 앞의 두 가지 유형 중 정적인 형태의 장고춤으로 분류할 수 있다. 권번 을 중심으로 장단에 기초를 둔 형식으로 장고가락을 위주로 창안되었다. 한성준 장고춤은 궁편을 위로, 채편을 밑으로 하는 정적인 형태에 해당되며 장고를 비스듬히 메고 추는 춤 이다. 한성준 장고춤은 우리나라 경기민요 ‘한강수타령’을 기악곡화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한강수타령→자진한강수타령→한강수타령으로 끝맺는다. 한성준 장고춤의 복식은 흰 색저고리에 남끝동과 자주고름 그리고 붉은 치마로 구성되었다.44)
당시 공연자였던 양성옥45)에 의하면 기존의 여러 유파별 장고춤과의 특이성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대다수의 장고춤은 궁글채와 열채를 사용하여 궁편의 장단을 궁글채로서 구성하는 형식을 취한다. 한성준 장고춤의 특이성은 장단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구체적 안무의 형식 구조 는 장단을 치기위한 춤사위로 궁편에 궁글채를 사용하지 않고 손장단으로 구성함으로서 대삼 소삼이 정확하며 궁글채를 사용해서 궁편장단을 이어가는 것 보다 장단에 대한 이해와 기술 력이 훨씬 우수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46)
한성준 춤 재현공연에서 장고춤을 연행했던 양성옥과의 인터뷰에서도 역시 한성준 장고 춤은 다른 유파의 장고춤과 달리 궁글채를 사용하지 않고 궁편의 손장단과 장고기법을 중 요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시절의 제자 교육 과정에서도 춤과 장단과의 조화를 강조하여 공연 현장은 물론 연습 기간에도 현장반주를 곁들였다. 춤을 배우는 제자들에게 반드시 장고장단을 익히고 기본가락을 습득하게 함으로써 음악과 춤의 일원화된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여 신체로부터 저절로 장단을 춤으로 우러나올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다.
한성준 장고춤의 2000년 초연 당시 동영상에서 나타난 춤사위는 <표 2>와 같이 정리하 였다.
<표 2>에 제시한 바와 같이 한성준 장고춤의 반주음악은 한강수타령→자진한강수타령→한강수타령으로 이어져 굿거리32장단→자진모리24장단→굿거리8장단으로 구성되어 있 다. <표 2>의 한성준 장고춤 춤사위용어에서 반복되는 춤사위용어는 중복해서 표기하지 않았다.
한성준 장고춤의 대표적인 춤사위는 한강수타령 반주음악에 맞추어 뒷걸음사위, 하늘을 향하는 사위, 양손 떨어뜨리는 사위, 일자좌우새 사위, 활사위, 열채원돌림 사위, 따라붙는 디딤 사위, 원돌려멤 사위, 손목 엎는 사위, 장고가락 사위, 뒤꿈치 찍으며 도는 사위, 찍고 드는 사위, 어깨 메는 사위, 좌우세 디딤 사위, 잔디딤 전진 사위, 뜀사위, 장고 어르는 사 위, 깨끼 사위, 열채 궁편가락 사위, 장고 휘감는 사위, 열채 채편 치는 사위, 장고 울림통 가락 사위, 꽃봉오리 사위, 뿌리는 사위로 구성되어있다. 자진 한강수타령 반주음악에는 들사위, 태극사위, 엎고 제치는 사위, 겹걸음 디딤 사위, 건너딛는 사위로 구성되어있다. 이어지는 한강수타령 반주음악에는 빙글도는 사위, 비껴든 사위, 열채 원돌려 여미는 사위, 몸통트는 사위, 궁떡가락 사위로 구성되어있다.
다음은 2000년 《한성준선생, 그 춤의 재현》 공연 당시 한성준 장고춤을 공연한 양성옥 과의 인터뷰47) 내용이다.
장고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춤의 발원은 흥에서 시작하여 수련기간을 통해 춤사위가 조형적으로 변하여 멋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좋은 춤체의 춤사위를 탄생시켜... 강선영 선생님이 춤을 추실 때 감정이 나시면 눈빛이 우리제자들을 매료시켰어... 특히 장고춤 에서 선생님의 눈빛은 한마디로 빛났고 ‘생글생글, 초롱초롱’한 눈이었다고 나는 그렇게 표현 하고 싶어... 그 속에서 춤의 흥과 멋이 표출되는데 지금도 춤출 때 스승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전승, 전수하기 위해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떠올리지... 올곧게 추고 있지만 오랜 기간 연습에 서 오는 습득, 체득, 감득에서 나오는 춤사위가 좋은 춤을 만들지, 그것이 선생님이 바라는 춤의 사상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가깝게 가는 길이라고 생각해... 이 장고춤을 남성에게 가르친 다면 남자들의 기백이 들어간 춤으로서 정적인 춤이지만 남성의 멋이 담긴 춤체로 표출되어 야 하지, 예전에는 남자선배님들이 장고춤을 많이 췄고 요즘은 여성들에게 적합한 춤으로 발전되어서 정적인 춤사위로서 매력적인 여성의 자태가 깃들어야하고 우아미속에 완롱미가 습합되어 매력적인 춤이 되는 거야... 한국여인의 정취와 매력이 담겨있기 때문이지... 강선영 선생님은 한성준선생님이 장단가락을 중요시 했다고 하셨어, 선생님께서는 장단을 연습할 때 팔이 아픈데 손이 치는 것이 아니라 장단이 장단을 치는 것이 되는 것 이라고 말씀하셨지, 장고춤에는 긴장과 이완의 묘미가 있는데 장고춤에 깃든 신명은 한국인만이 갖고 있는 심성 이 나타나잖아, 춤사위가 절정에 이를 때 흥과 멋을 느끼고 장고춤은 ‘얼쑤, 얼씨구’하는 우리 민족만이 갖는 추임새가 있어... 또 장고춤에는 정적인 아름다움이 있고 기교에는 멋스러움이 있고 곡선적인 아름다움이 있지... 춤의 아름다움은 반주음악과의 조화에 있는데 한강수타령 을 반주음악으로 쓴 이유는 우리 민족의 민요이기 때문 아니었을까?
강선영에게 직접 전수받은 양성옥의 인터뷰는 한성준 장고춤의 세밀한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전승의 구심점 역할로 작용한다. 이러한 점은 실체가 정확하지 않지만 그 원형을 조 합하고 재편성하여 춤 정신과 기법적인 측면을 이어간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게다가 원형성을 올곧게 간직하여 전승활동을 이어 간다면 더할 나위없는 순기능으로 작용할 가 능성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춤사위에 내재된 흥과 멋, 한과 신명의 정서 표출 가운 데 장고춤은 춤 장단의 가락과 어우러지는 흥과 멋스러움의 흥취를 표출한다. 1970년대 무용에 입문하기 위해 무용연구소를 방문하면 남성무용수인 지도자가 입장단으로 민요나 구 음을 부르며 장구 반주 장단으로 입춤이나 수 건춤, 장고춤 등을 전수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때의 장고춤사위는 궁글채로 강 하게 치는 것보다는 열채와 손장단으로 장고 장단을 끌어 나가는 형태였다. 장고춤의 안무 시작은 <도판 1>과 같이 굿거리 장단에 맞춰 뒷걸음사위로 입장하며 시작되었다. 솔로와 군무 장고춤 모두 동일한 안무구도를 갖춘다. 한성준 장고춤으로 특징짓는 보편적 장고춤 의 표현미라 할 것이다. 인터뷰 내용에서도 유사한 맥락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성준 장고춤의 예술적 가치를 고찰하기 위하여 앞서와 같이 장고의 특징, 반주음악의 구성, 복식, 기보와 타법, 춤사위용어해설, 춤사위 사진 그리고 재현공연을 했 던 양성옥의 인터뷰까지 살펴보았는데 그 결과 춤의 특징은 첫째, 고전적이고 정적인 춤사 위 속에 무자(舞者)의 흥과 멋, 춤의 기량을 볼 수 있다. 둘째, 장고가락과 춤사위의 조화로 움이 있다. 셋째, 뒷걸음사위로 무대중앙까지 등장한다<도판 1>.48) 다른 유파의 장고춤에 서는 정면을 보고 등장하거나 이미 등장하여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넷째, 한성준 장고춤의 마무리는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춤사위가 궁·떡을 치며 끝을 맺는다. 일반적인 장고춤의 마무리는 음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춤이 끝나는 것이 보편적이다. 다섯째, 왼 손에 궁글채를 사용하지 않고 손장단을 친다. 여섯째, 장고기법의 덩·덕·떡·딱의 음색이 분 명하며, 열채의 뜨르닥다의 음색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일곱째, 열채로 궁편 피를 친 다. 여덟째, 장고의 울림통과 테두리를 친다. 이러한 특징적인 춤사위로 구성된 한성준 장 고춤에 대하여 평론가들의 평문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이세기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한성준 장고춤은 춤의 높은 경지를 한눈에 보여 주는 절제미가 넘치는 춤이라고 표현하였 다. 다른 장고춤처럼 눈부시게 휘돌아가지 않고 무자(舞者)가 자신의 무태를 뽐내기 위해 장고 장단치기의 여러 모습을 장면마다 끊어 추고 장고를 메고 마음껏 휘돌거나 채를 올려치 지 않고 아래로 내려치는 것이 특색이다. 오른손으로 아랫 쪽을 치면서 그때마다 마치 정지된 듯한 춤의 동작을 보여준다.49)
또한 성기숙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경쾌하면서도 절도 있는 리듬의 조화과 돋보이는 한성준의 장고춤은 흥과 멋을 주조로 한다. 장고춤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양성옥의 독무에 이어 군무진에 마무리하는데 소리의 장고장단을 타고 넘는 소리의 율동과 절묘하게 조화되는 춤사위가 일품이다.50)
이와 같이 한성준 장고춤은 궁글채 대신 손장단으로 표출함으로써 가락에 대한 보다 높 은 기술력을 필요로하는 것에서 다른 장고춤과 구별되는 예술적 가치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곧 소리와 장단의 중요성을 강조한 고수로서 한성준이 음악활동을 계속해 가면서 움 직임에 뒤따라오는 소리와 장단의 선후관계를 규정지은 바와 같이 한성준이 장고를 활용 한 춤을 구성한 것은 당연한 흐름이라 볼 수 있다.
고선아와 전화 인터뷰에서는 많은 무용가들의 장고춤이 전반부는 민요반주로 시작되어 후반부는 설장고춤을 추는 것이 요즘의 흐름이라면, 한성준 장고춤은 굿거리에서 자진굿 거리 다시 굿거리장단으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다른 춤을 삽입하지 않는 전통 장고춤사위 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옛날 그대로야~ 무용가들은 설장고춤을 하지 않았어. 설장고는 농악 했던 사람들이 했던 거야. 그래서 한성준 장고춤은 춤가락을 많이 넣은 것이 가장 큰 특징이야. 70~80년대 이후 무용가들에게 설장고가 보급되면서 앞에 굿거리 춤추고 설장고가 따라 붙자나. 그런데 한성 준 춤은 굿거리를 춤추고 설장고가 붙지 않아 옛날 그대로야~51)
고선아의 증언에서도 역시 결과적으로 한성준 장고춤의 예술적 가치는 장단의 중요성을 출발점으로 한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장단에 능했던 고수로서 음악적 재능은 악기와 춤의 융합형태를 구상하여 실천에 옮김으로써 특유의 예술적 가치로 평가할 수 있다.
양성옥의 인터뷰와 평론가들의 평문에서도 장단치기의 묘미, 무자(舞者)의 무태, 흥과 신명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고선아와의 인터뷰에서와 같 이 근대 장고춤의 원형성을 유지하고 있음은 매우 중요한 한성준 장고춤의 예술적 가치라 할 수 있다.
IV. 한성준 장고춤의 전승양상
한성준 장고춤이 무용계에 처음 소개된 것은 2000년 강선영의 복원에 따라 양성옥이 재현한 《한성준선생, 그 춤의 재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강선영이 한성준 장고춤을 복원 하여 양성옥에게 지도할 때 한성준으로부터 장단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전수한 것으로 전 해진다. 특히 장단을 연습할 때 팔이 아프도록 장단을 치게 될 때도 팔과 손의 힘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장단이 장단을 치는 것이라고 한성준의 표현을 빌려 강조하였다. 한성준 장고 춤은 2년 후 서울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한성준-강선영으로 이어지는 송영환의 춤》 공연에서 양성옥의 지도에 의해 송영환의 독무로 공연되었다. 공연지도 과정에서 양성 옥은 강선영에게 전수받은 대로 손장단의 중요성과 권번으로 전해온 정적형태로써 무자 (舞者)의 무태, 특이성을 강조하였다.
송영환은 다음 해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한성준 강선영으로 이어지는 2003 송영환 의 춤 -두 번째 춤판-》 공연에서 역시 양성옥의 지도 아래 한성준 장고춤을 독무로 공연 하였다. 같은 해 9월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린 《제6회 전통예술원 교수연주회》 공연 에서는 양성옥이 독무로 공연하였다.
2005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명가 강선영 불멸의 춤> 공연에서 양성옥의 한성준 장고 춤 독무 그리고 군무로 연결되는 장고춤 공연이 있었다. 공연 후 평론가 성기숙은 “경쾌하 면서도 절도 있는 리듬의 조화가 돋보이는 한성준의 장고춤은 흥과 멋을 주조로 한다. 장 고춤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양성옥의 독무에 이어 군무진에 마무리하는데 소리의 장고장단을 타고 넘는 소리의 율동과 절묘하게 조화되는 춤사위가 일품이다”52)라고 평하 였다. 공연 평문에서도 경쾌한 리듬의 조화에 따른 흥과 멋을 평하였고, 그 종목에서 빼어 난 춤꾼으로서 양성옥을 평하고 있다. 한성준 장고춤에서 가락의 조화를 진수로 하는 예술 적 가치와 함께 재현자인 양성옥의 무대표현력에 대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함으로 서 전통 장고춤사위의 원형을 간직한 표현미에 대해 우수하게 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같은 해 경복궁 민속박물관에서 국악신문사 주최로 송영환의 독무인 한성준 장고춤이 공 연되었다.
2006년 미국 뉴욕 링컨센터 스테이트 시어터에서 《전통의 유산 A Legacy in Tradition Kang Sun Young》 공연에서 양성옥의 독무와 이어 연결되는 군무로 구성되었다. 미국 뉴 욕 링컨센터 스테이트 시어터에서는 한국 예술가의 공연으로는 <명성황후(1997)>와 유니 버설발레단의 <심청(1998)>의 공연이 있었고, 한국 전통무용은 강선영의 공연무대가 처음 인 것으로 전해진다.53) 이후 2009년 서울 남산 국악당 상설공연에서 송영환의 독무로 장 고춤이 공연되었다. 이어서 2012년 국립국악원 예악당 《제5회 대보름 명인전》 공연에서 양성옥의 독무 장고춤이 공연되었다. 2013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춤과 함께한 80 년 명가 강선영 불멸의 춤》이 공연되었다. 이 때에 한성준 장고춤은 송영환 외 5인으로 구성되어 이전과는 조금 더 다른 구도로 재구성되어 공연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한성준 장고춤은 강선영 생전에 독무, 2인무, 6인 군무, 독무와 군무로 이어지는 복합 형태로 다양 하게 재구성하여 전승되었음을 볼 수 있다. 2014년 두리춤터에서는 송영환과 송영인 2인 무가 공연되어 한성준 장고춤이 새로운 구도로 재구성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장하였다. 2018년 서울 남산 국악당 《2018 서울시무형문화재 제 45호 한량무 공개발표회 전통춤의 귀휴 한량무》 공연에서 송영환에 의해 한성준 장고춤 독무 공연이 있었다. 같은 해 국립국 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있었던 《수요춤전: 무도,무도,무도》 공연에서 서희정에 의한 독무로 공연되었다.
여기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성준 장고춤은 2000년 그의 제자인 강선영에 의해 복원되 었고, 강선영의 제자인 양성옥에 의해 재현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꾸준히 그들의 제자로 연결되는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보존회를 비롯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 원 한누리무용단, 한국의 집에서 교육되고 있다. 구체적인 전승 공연은 독무와 2인무와 군 무의 형태로 이어진다. 2019년 2월 16~17일, 7월13~14일 두 차례에 걸쳐 (사)우리춤협회 주최 한국무용강습회에서 전승이 진행되었음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앞에 정리한 한성준 장고춤의 공연 일정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 3>과 같이 한성준 장고 춤의 공연연보와 전승현황으로 고찰된다.
<표3> 공연연보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한성준 장고춤의 전승현황은 한성준에서 강선영 으로 이어 양성옥 그리고 송영환, 이정민, 박시원, 최지선, 최영미, 황규선, 황귀자, 채형지, 송영은, 이소정, 서희정, 이명신으로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모형화하면 <도판 2> 한성준 장고춤의 전승현황과 같다.
현재 한성준 장고춤의 전승현황은 양성옥이 그 중심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 된다. 양성옥은 독자적인 역할로서 독무형태의 한성준 장고춤을 공연하고 있으며 전승을 원하는 무용가들에게 독무, 2인무, 군무, 독무와 군무가 융합된 형태의 군무 장고춤을 지도 함으로써 한성준 장고춤 전승 활동을 하고 있다. 한성준에게 직접 사사받은 강선영 그리고 강선영에게 직접 사사받은 양성옥, 향후 그 계보로 후학들에게 전승될 것이다.
V. 결론
이 논문의 서론에서는 한성준 장고춤의 전승현황을 고찰하게 된 배경을 밝힘과 동시에 연구목적을 서술하고, 그에 대한 연구방법과 연구의 제한점에 대해 후술(後述)하였다. 그 리고 선행연구를 검토하여 한성준 춤의 가치와 예술성을 파악하고 장고춤의 전승과 공연 연보를 정리하였다. 이는 한성준 장고춤의 흐름을 파악함으로써 전승과정을 정립하고 한 성준 장고춤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다양한 형태의 장고춤의 특이성을 도출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2000년 《한성준선생, 그 춤의 재현》 공연에서 복원·안무한 강선영에서 양성옥으로 이어지는 장고춤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특이성을 도출하였다.
첫째, 궁글채를 사용하지 않고 궁편을 손바닥 장단으로 구성한다. 이는 소리와 장단의 중요성을 강조한 한성준의 음악활동과 더불어 춤을 접목하면서 장고춤으로 거듭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음악은 한강수타령에서 자진한강수타령, 이어서 다시 한강수타령으로 끝맺는 민요조의 반주음악으로 구성되었다. 셋째, 춤의 특징은 음악의 변화에 따른 우아하 고 아름다운 몸짓과 경쾌하고 절도 있는 리듬의 조화로 절제미와 한국적 미를 담고 있다. 넷째, 일반적인 장고춤의 유형은 장단을 연주하며 춤추는 형식보다는 춤사위 위주의 형식 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때 한성준 장고춤은 춤사위를 위한 장단 즉, 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장단을 연주하며 손장단을 중요시하여 춤추는 형식으로 장고춤을 구성하였다는 특색을 알 수 있다. 다섯째, 복식은 흰 저고리에 남끝동과 자주고름 그리고 붉은 치마로 구성되었다.
결론적으로 한성준 장고춤은 다양한 유파별 장고춤과는 근본적인 차별성을 지닌다. 손 장단과 열채로 궁편을 치는 사위, 춤을 시작할 때 뒷걸음으로 등장하는 무대 구성, 작품의 마무리장면에서 춤 동작이 끝남과 동시에 궁·떡하는 장단으로 마무리하는 특이성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권번에서 전해지는 기방무용의 정적형태로 구성되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근대시기의 원형성을 내재한 전통 장고춤으로써 춤사위를 표현하는 특성을 지닌다.
향후, 춤사위의 구성에 미적 특이성과 가치가 인정되는 한성준 장고춤의 전승 필요성이 요구되는 바이다. 현재 한성준 장고춤의 전승현황은 2000년 《한성준선생, 그 춤의 재현》 에서 강선영에 의해 복원되었고 양성옥에 의해 재현되어 현재 송영환, 이정민, 박시원, 최 지선, 최영미, 황규선등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이들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보존회를 비롯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한누리무용단, 한국의 집에서 교육받은 무용가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성준류 전통춤은 현재 승무와 태평무 그리고 살풀이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이들 종목 이외에도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은 춤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근대시기 한성준이 집대성한 100여 가지의 작품들 중에서 일부만 전해지고 있음은 한국무용사에서 매우 안타까운 현실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한성준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근대춤의 형태가 소멸될 수 있는 위기의식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한성준은 악(樂)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고수였던 만큼 그의 장고춤도 장단의 원리에 따른 춤사위로 구성되었다. 이는 근대 무용의 소중한 자산이라는 점에서 고전화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이 논문을 계기로 무용 후학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 이외에 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은 한성준 춤의 여러 종목들에 대한 전수활동과 전승이 이어져야함을 강조하고 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