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Society for Dance Documentation & History

pISSN: 2383-5214 /eISSN: 2733-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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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al Transformation of Yukhwadae 육화대(六花隊)의 문화변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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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 Dance Journal Vol.61 No. pp.97-121
DOI : https://doi.org/10.26861/sddh.2021.61.97

Cultural Transformation of Yukhwadae

Sung, Eunmi*
Director, Jeongjae Research Association
* 성은미 sem_angel@hanmail.net

+ 이 논문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의 교류 메커니즘 연구’(한양대학교, 2021)를 토대로 하였음.
2021-05-10 2021-06-17 2021-06-21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court and private versions of Yukhwadae (六花隊, Formation of six flowers) of the Joseon Dynasty in order to identify the pattern of coexistent and exchange of different cultures such as the royal court and the private sector. The development and changes of Yukhwadae illustrate a way of cultural transformation of dance.



To clarify the cultural transformation of Yukhwadae, this study analyzes the court's documentary records centering on Akhak Gyebum (Canon of Traditional Music) and the civilian literature records centering on the records of Gyobang Gayo (Song of Gyobang).



In Yukhwadae, which was transferred to the public from the courts revealed through literature, all ritual articles of Dangakjeongjae, such as jukganja (pole bearer), uimul (instrument), and changsa (song or chant), were eliminated, and the overall format was simplified. In addition, the content of dance was selectively accepted and reinterpreted, and costumes and music were transformed to be suitable for the private sector. Therefore, through this study, it was found that the strict form of the royal court Yukhwadae was exchanged with the private sector and transformed into a popular and diverse form suitable for civilian performances.



As such, it was found through the results of this study that different cultures were exchanged between the royal court and the private sector during the Joseon Dynasty. I suggest to consider dance from a perspective of cultural exchange, researching various dance cultural exchanges, and contributing to the development of dance.



육화대(六花隊)의 문화변용

성은미*
(사)정재연구회 이사

초록


본 연구는 조선시대에 궁중과 민간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지만, 궁중무용인 육화대 (六花隊)가 교방에 교류되어 민간무용 육화대로 문화변용 한 것을 밝히고자 한다. 이에 본 연구는 무용 을 통해 궁중과 민간의 문화교류를 드러내고자 했다는 데에 의미를 두며,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의 교류 를 육화대의 문화변용으로 밝힘으로써, 무용이 서로 다른 문화 교류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하였다는 것 을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당악정재 육화대는 무원 여섯 사람이 각각 꽃을 들고 춤을 추는 화무(花舞)로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향되었다. 그러나 궁중무용 육화대가 교방에 교류되어 민간무용으로 연희되었던 문헌기록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민간의 문헌인 교방가요의 기록을 분석하여 궁중무용 육화대가 민간으로 전해지며 어떻 게 문화변용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궁중의 문헌 기록은 악학궤범을 중심으로, 민간의 문헌 기록은 교방가요의 기록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육화대의 문화변용을 밝히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 도출한 결과 궁중에서 민간에 전파된 육화대는 당악정재의 형식인 죽간자(竹竿子), 의 물(儀物), 창사(唱詞)가 모두 변화되었으며, 형식이 간소화되었다. 또한 춤의 내용은 선택적으로 수용되 어 재해석되었고, 복식과 음악은 민간에 적합하도록 변용되었다. 따라서 궁중의 엄격한 형식의 정재인 육화대가 교방에 교류되어 민간 연희에 적합하도록 대중적이고 다양한 형식으로 변용되어 민간화되었 음을 알 수 있었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통해 조선시대 궁중과 민간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가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 며,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이 교류하여 무용이 변화하고 발전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무용을 문화교류의 시각으로 확장하여 바라보며 다양한 무용문화교류를 연구하여 무용 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기대 한다.



    I. 들어가는 말

    문화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화되는 것으로 변화의 과정에서 진화하거나 도태되어 사 라지기도 한다. 오랜 시간 진화되어 이어온 문화는 그 가치가 인정되고 높이 평가되어 우 리의 소중한 문화유산1)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조선 시대는 궁중과 민간이라는 사회적 신 분 계층이 나뉘어 서로 다른 문화가 존재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궁중에서는 엄격한 궁중의 법도가 있었고, 민간에서는 그와는 다른 민간의 문화가 형성되어 각각의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 궁중무용이 민간에 교류되어 민간의 문화에 적합하도록 문화 변용 되기도 하였으며, 역으로 민간의 무용이 궁중으로 유입되어 궁중무용으로 문화변용 되었다.

    육화대는 조선 초기의 악전(樂典)인 악학궤범(1493)에 처음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2) 문헌 기록상 500년 이상 전해 내려온 오래된 춤으로 우리의 소중한 무형문화유산이다. 이 후 조선 후기의 궁중정재 무보인 정재무도홀기(1893)에 전하고 있으며, 무원 여섯 사람 이 각각 꽃을 들고 추는 화무(花舞)로 구성되어있다.

    육화대는 궁중에서 전해 내려온 무용이지만 민간문헌인 교방가요(1872)에서도 기록 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궁중의 육화대가 교방으로 교류되어 민간에 수용되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하지만 교방가요에 기록된 육화대가 궁중정재 가인전목단과 유사하다는 선 행연구가 있다.3) 선행연구에는 좌우 협무가 있다는 점과 무원이 가운데 화준을 중심으로 꽃을 들고 춤을 춘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였지만 그 내용만으로는 육화대를 가인전목단 으로 단정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리고 교방가요에는 궁중에서 사용하던 정재 종목명을 다르게 변경하여 기록하기도 했다. 예컨대, 헌선도를 헌반도로, 무고를 고무로, 선유락을 선악으로 기록하였다. 하지만 그 종목들은 가인전목단을 육화대로 변경했다는 경우와 같이 기존의 있는 다른 정재 종목 명으로 변경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방가요의 육화대를 가인전목단으로 보는 데에는 기존에 있는 다른 정재 종목명으로 변경한 점과 춤의 구성 및 내용 등 다방면에서 심층적 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처럼 기존 연구에서는 교방가요의 육화대를 가인전목단으로 보고 있지만, 본 연구 자는 기록 그대로를 받아들여 교방가요의 육화대로 인정하고 본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그리고 궁중의 임금 앞에서 연행하는 정재는 궁중무용으로, 임금이 없는 교방이나, 민간에 서 궁중무용을 변용하여 연희하는 것은 민간무용으로 범주를 설정하였다.

    교방가요에 궁중정재 육화대가 기록되었다는 점은 당시 문화사를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지점이며,4) 궁중 문화가 지역 문화에 교류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교류된 지역에 적합하도록 문화변용 된 것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궁중의 육화대는 악학궤범을 중심으로, 민간의 육화대는 교방가요를 중심으로 연구하 고, 궁중무용 육화대가 교방으로 전파되어 민간무용 육화대로 어떻게 변화되어 연희되었 는지 육화대의 문화변용을 밝히고자 한다.

    II. 정재의 문화변용 사례

    궁중의 연향무(宴享舞)를 총칭하는 정재(呈才)는 여기나 무동이 궁중에서 임금님 또는 궁중의 비빈(妃嬪)들 앞에서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임금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축원하는 연례무(宴禮舞)이다.5) 그러나 임금이 부재(不在)한 교방에서도 정재가 연희되었 는데, 교방에서 잔치를 열 경우에는 예를 갖추기는 하나 궁중에서 춘 정재 그대로를 원칙 적으로 출 수가 없는 시대적 구조였기 때문에 그 내용과 형식이 기존의 궁중에서의 정재와 는 다르게 변용하여 추었다.

    정재의 문화변용에 대한 기존의 선행연구를 살펴보았을 때 선상기를 통해 궁중 정재가 지방과 민간으로 교류되는 과정에서 궁중 정재의 모습이 민간 연희화 하면서 상당한 변화 를 가져왔으며,6) 역으로 민간에서 시작된 민간무용이 궁중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연행 형식과 내용이 변화되었고,7) 궁중정재와 지방관아의 교방정재와는 구별되는 춤8)이라는 연구 결과가 도출된바 있다.

    예컨대, 지방 교방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던 기록을 통해서 짐작해볼 수 있다. 제주에서는 수령에 의해 봄, 가을 두 차례로 나누어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중앙에서 순무어사(巡撫御 使)9)를 파견하여 양로연을 연행하기도 하였다. 1680년(숙종 6)에 순무어사 이증(李增)이 80세 이상의 남녀 노인에게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다음의 <도판 1>은 제주도의 양로연을 그린 기록화로 《탐라순력도》중 <제주양로>의 그림이다.

    도판 1.

    《탐라순력도》중〈제주양로〉의 일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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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의 중앙을 살펴보면 궁중의 정재인 포구락(抛毬樂)의 포구문 보이고, 우측에는 배가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바로 옆에 무고(舞鼓)를 추고 있는 기녀가 보이며 악사 들도 보인다. 이와 같이 제주도의 양로연에서 궁중의 악무(樂舞)가 연행되었던 기록화를 통해서 지방의 교방으로 궁중의 정재가 교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민간의 노인들이 궁중의 정재를 관람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임금 앞에서 엄격한 형식을 갖추어 연행되었던 궁중 정재를 지방의 교방에서 민 간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그대로 연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궁중에서 시작된 정재가 교방 에 교류되어 정착하는 과정에서 민간연희에 적합하도록 걸러지고 선택적 수용하고 재해석 하여 문화변용 되었을 것이다. 궁중 정재는 잔치의 규모에 따라 격식과 규모가 달라지지만, 교방에서는 궁중 정재의 형식과 격식을 그대로 할 수 없었다.

    교방 연희를 기록한 교방가요에는 정재와 함께 민간의 판소리, 잡희, 잡요 및 단가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연희 종목은 조선후기 유랑예인 집단의 연희를 나타낸 것으 로 이러한 연희들은 시정이나 민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들이었으며, 기녀들이 담당 하는 연희나 가창물이 아니었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방에 소속된 기녀들이 궁중에서 배워온 정재 종목들을 연습하는 교방에서 정재와 민간의 연희 종목을 함께 했다는 것은 조선시대 지방의 교방들은 중앙의 궁중 문화와 지방 문화를 상호 교류하는 거점 역할을 하였으며, 궁중 문화와 민간 문화의 문화접변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녀들은 민간의 잔치에도 동원되어 정재를 연희하였으며,12) 이때 연희한 정재 도 궁중의 정재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시대 에는 효행을 권장하는 의미에서 부모를 위한 헌수(獻壽)에 관원들이 장악원에 여기와 악공 을 청하여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었으며,13) 임금이 미리 배려하여 신하의 부모를 위한 헌수에 여기와 악공을 보내기도 했었다. 다음은 세종이 효정(孝靖) 이 정간(李貞幹, 1360~1439)의 어머니에게 음식과 삼정재(三呈才)를 내려주었던 사례이다.

    이정간의 어머니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시고 이어 풍악을 내려 주니, 안숭선이 아뢰기를, “신급제(新及第)의 영친연(榮親宴)에도 풍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다만 가기(歌妓) 5, 6인 을 보낼 뿐이온데, 이것은 특별히 내리시는 사악(賜樂)이니 마땅히 기악(器樂)도 함께 내려 주어서 그를 영광스럽게 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삼정재(三呈才)를 하사하시라고 명 하였다.14)

    이정간은 자신도 80세 노령이면서 100세의 어머니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희롱 하는 등 출천지효(出天知曉)로 세종이 그 사실을 알고 그의 품계를 정2품으로, 부인을 정 대부인(貞大夫人)으로 봉하고 궤장을 하사하였으며, 그의 어머니에게 사악(賜樂)을 내려주 었다. 이와 같이 임금이 신하의 어머니에게 사악을 내려주었던 사례에서 궁중 연례(宴禮) 때에 하는 가무(歌舞)인 삼정재(三呈才)가 민간에 전해질 수 있었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 으며, 이때의 연희된 정재는 궁중의 임금 앞에서 하는 정재와는 달랐을 것이다.

    1862년(철종 13년) 2월 6일에 철종은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의 회방연 (回榜宴)에 사악을 내려주었다. 정원용은 여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일생에 한 번 을 받기도 어려운 임금의 사악을 회근·회방·91세에 세 번이나 받았다.15) 정원용의 친척 여성이 쓴 한글 가사인 뎡상공 회방긔록 을 살펴보면 정원용의 회방연에 사악으로 내려 준 궁중정재의 종목명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향발무는 쟁기춤으로, 헌 선도는 반도춤으로, 선유락은 배따라기로16) 기록되어 있어 궁중정재가 민간에서 다르게 불러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선유락은 평양 지방의 읍지인 평양지(平壤志, 1590년, 선조 23년)에는 발도가(發棹 歌)로, 평양 지방의 계산기정(薊山紀程, 1803년, 순조 3년)에는 이주곡(離舟曲)과 선풍무 (旋風舞)로, 평양 지방의 금능집(金陵集, 1825년, 순조 25년)에는 선리요(船離謠), 황주 지 방의 연계기정(燕薊紀程, 1828년, 순조 28년)에는 선악(船樂)과 선리(배따라기), 성천 지방 의 선루별곡(仙樓別曲, 1838년, 헌종 4년)과 연행가(燕行歌)에는 배따라기 등으로 지역마 다 다르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서도 궁중의 정재가 민간으로 교류되며 종목명의 변화와 함께 그 내용과 형식도 변화되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III. 궁중과 민간의 육화대

    본 절에서는 조선시대의 궁중에서 연행되었던 당악정재 육화대가 민간에 전파되어 어떻 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궁중정재 육화대는 악학궤범을, 민간의 <육화 대>는 교방가요를 중심으로 분석할 것이다.

    1. 궁중의 육화대

    다음 <도판 2>는 악학궤범에 전하는 궁중 육화대의 원문이다.

    도판 2.

    성은미(연구자), 궁중의 육화대17),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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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의 초입배열도를 보면, 당악정재의 특성인 죽간자와 의물을 든 무원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앙의 치어인을 중심으로 무원 6인이 양대로 갈라서 좌무 3인과 우무 3인이 각각 남의와 홍의를 입고 있다. 북향으로는 건(乾), 감(坎), 간(艮), 동향에는 인(寅), 묘(卯), 진(辰), 서향에는 신(申), 유(酉), 술(戌), 남향에는 손(巽), 이(离), 곤(坤)으로 4방향 의 자리에 의미 있는 한자로 무원의 위치를 정하고 있다.

    악학궤범의 육화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악관이 천년만세 인자(引子)를 연주하고 박을 치면 죽간자를 든 두 사람이 족도하면서 앞으로 나가 좌우로 갈라서고, 음악이 그치면 문화심사(問花心詞)를 구호한다. 새로운 꽃이 손에 있으매 고운 봄빛을 마냥 즐기고 보배로운 띠를 허리에 띠었으매 육궁의 치장을 본받았 습니다. 다행이 뜰에서 펼쳐진 놀이에 참여하였으니 궁궐에 나온 이유를 진술하기 원하옵니 다. 끝나고, 박을 치고 앞의 음악(천년만세)을 연주하면, 죽간자를 든 두 사람은 족도한다. 박을 치면 뒤로 물러나 좌우로 갈라선다. 박을 치면 치어인(致語人)이 족도하며 조금 앞으로 나가서고, 음악이 그치면 오른 소매를 치켜들고 화심답사(花心答詞)를 창한다. 죽지사(竹枝 詞)는 곡조는 아름다우나 치세의 음악은 아니옵고 도엽가(桃葉歌)는 정은 많지만 정인의 들음 에는 맞지않습니다 새소리를 상국에서 채취하고 옛일을 전인에게서 찾아 편장으로 만들어야 제일가는 명품이 되옵니다 미천한 몸임은 부끄러우나 즐거운 자리를 돕기 원합니다 금루곡 소리 재촉하니 흘러가는 구름이 멈추리라 생각되고 화려한 옷소매 펼럭이니 눈송이 나부낄 줄 아옵니다 감히 마음대로 못하와 성상의 분부를 기다리옵니다 끝나고, 박을 치고 앞의 음악 (천년만세)을 연주하면, 치어인은 염수하고 부복했다 일어나서 족도한다. 박을 치면 춤추며 사수무 뒤로 물러나간다. 여러 기(妓)의 사이에 선다. 동쪽에 있는 홍의(紅衣)의 첫째 사람은 꽃을 받들고, 홍자(紅者)는 오른손으로 잡고 남자(藍者)는 왼손으로 잡는다. 족도하며 앞에 나가 서고, 음악이 그치면 홍두 제1념시(紅荳第一念詩)를 창한다. 절득 은근하였으니 빛이 정(正)히 새롭도다 교홍 눈자에 이슬이 초균하고 능해 응경궁이라 이르지 마소 높이 중방(衆 芳)을 눌러 봄을 점쳤도다 끝나고 박을 치면 앞의 음악(천년만세)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뒤로 물러나 자리로 돌아온다. 서쪽에 있는 남의(藍衣) 첫째 사람이 꽃을 받들고 족도하며 나가 홍의의 첫째 사람이 아직 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곧 서로 자리를 바꾸어 앞으로 나간다. 이하도 이에 준한다. 앞 자리에 섰다가 , 음악이 그치면 남 제1념시(南第一念詩)를 창한다. ⋯(중략)⋯끝나고 박을 치면 앞의 음악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물러나 자리로 돌아오고 음악 이 그친다. 앞의 음악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화대(花隊) 여섯 사람은 왼쪽으로 돌아 회무(回 舞) 사수무 하면서 두 대열을 지어 붉은 옷 입은 사람은 건(乾), 감(坎), 간(艮)의 위치에 서고, 남색 옷을 입은 사람은 손, 이, 곤의 위치에 선다. 나란히 가서 서면 음악이 그친다. 악관이 최자영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감의 위치에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무퇴하여 이(离)의 위치에 서고, 이(离)의 위치에 있는 남색옷 입은 사람은 무진하여 감(坎)의 위치에 선다. 모두 팔수무, 물러날 때에는 서쪽을 경유하고 나갈 때에는 동쪽을 경유한다. 이하도 마찬가지다. 서로 자리를 바꾸어 서면 음악이 그친다. 악관이 중강(中江)영(令)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감의 위치에 있는 남색 옷 입은 사람(두 번째 사람)은 동쪽을 향해 춤추고, 간(艮)의 위치에 있는 붉은 옷 입은 사람은 서쪽을 향해 맞춤 추고 건(乾)의 위치에 있는 붉은 옷 입은 사람(세 번째 사람)은 서쪽을 향해 등지고 춤추면 일성(一成)이 이루어지고, 음악의 마지 막이 된다. 앞 대열의 세 사람은 염수하고 족도하며 북쪽을 향하고, 박을 치면 앞 대열의 세 사람은 꽃을 받들고 무퇴하여 손(巽), (离), (坤)의 위치에 서고, 뒷 대열의 세 사람은 꽃을 받들고 무진하여 건(乾), (坎), (艮)의 위치에 선다. 감의 위치에 있는 붉은 옷 입은 사람은 동쪽을 향해 춤추고, 간의 위치에 있는 남색 옷 입은 사람은 서쪽을 향해 등지고 춤추면 일성이 이루어지고, 음악의 마지막이 된다. 앞 대열의 세 사람이 염수족도하며 북쪽을 향하면 음악이 그친다. 악관이 최자영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감의 위치에 있는 붉은 옷 입은 사람은 무퇴하여 이(离)의 위치에 서고, 이의 위치에 있는 남색 옷 입은 사람은 무진하여 감의 위치에 서며, 앞 대열의 세 사람은 무퇴하여 손(巽), (离), (坤)의 위치에 서고, 뒷 대열의 세 사람은 무진(舞進) 모두 팔수무이다 하여 건(乾), (坎), (艮)의 위치에 서면 음악이 그친다. 악관이 천년만세 인자를 연주하고 박을 치면 화대 여섯 사람이 왼쪽으로 돌며 회무하여 맨 먼저의 대열을 짓는다. 박을 치면 죽간자를 든 두 사람은 족도하며 조금 앞으로 나가 서고, 음악이 그치면 퇴(退)구호한다. 푸르고 붉은 아름다운 자태 고운 경치를 경쟁하옵 고 맑은 노래 아치 있는 춤 모두 빛난 자리에서 재주를 보입니다. 우아한 음악 끝나려 하오매 절하고 물러나렵니다 끝나고 박을 치면, 앞의 음악(천년만세)을 연주하고, 죽간자를 든 두 사람이 족도하다가 박을 치면 뒤로 물러난다. 박을 치면 화대 여섯 사람은 무진 하고 협수무 박을 치면 염수 족도하고 박을 치면 무퇴하고 퇴수무 음악이 그친다.18)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개의 당악정재에서는 죽간자를 든 기녀가 구호를 하고, 그 다음 에 춤추는 기녀가 치어를 하는데, 육화대에서는 죽간자를 든 기녀와 치어인이 서로 문답하 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것을 죽간자를 든 기녀가 ‘문화심사(問花心詞)’를 ‘구호(口號)’한 다고 했고, 치어인이 ‘화심답사(花心答詞)’를 ‘창(唱)’한다고 하였다. 특히 춤의 절차에 있 어서도 방향마다 8괘와 12간지를 의미하는 한자를 두고 무원이 자리를 바꿔가면서 사를 창하고 춤추는 구성으로 연출되어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 한자들의 의미는 악학궤 범권1에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북향의 건, 감, 간과 남향의 손, 이, 곤은 8괘(八卦)를 의미하고, 동향의 인, 묘, 진과 서향의 신, 유, 술은 12간지(干支)를 뜻한다. 따라서 육화대 에서 무원들이 자리에 변화를 주며 춤을 추는 것은 주역의 8괘(八卦)에 입각해 8풍(八 風)의 변화와 시공간의 변화를 춤으로 표현한 것으로 우주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궁중의 육화대를 연출한 의미에 대해서는 악학궤범의 서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악학궤범의 서문에는 “춤은 8풍을 행하여 그 절주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모 두 자연의 법칙이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춤의 절차가 자연법칙과 관 계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악서(樂書)를 인용하여 “8방(八方)의 바람이 12율(律) 이 도는 것과 같으면 순한 기(氣)가 응하고 화한 악이 일어나서 정성(正聲)에 이른다”19)고 하여, 율려(律呂)가 8방의 바람을 따르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춤이 8풍을 행하는 데 이는 12율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듯이, 춤을 행하는 데에도 이를 따라야 기가 순행 하여 조화로운 악이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0)

    육화대에서 무원의 이동 방향에 대해 악학궤범권1에 있는 <팔음도설(八音圖說)>을 제 시하면 <도판 3>과 같다.

    도판 3.

    성은미(연구자),악학궤범의 <팔음도설(八音圖說)>21),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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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중 육화대에서 <도판 3>의 <팔음도설>을 응용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데, 궁중 육화 대에서 각각 무원의 자리마다 둔 한자의 의미는 <도판 3>에서 ‘건감간진손이곤태(乾坎艮 震巽離坤兌)’는 8괘의 괘 이름으로 ‘역(易)’을 형상화하여 자연의 조화를 도식화한 것으로 8풍을 의미하며,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는 12방위를 나 타내며, 12율려22)와 시간을 뜻한다. 이 내용은 천지자연의 기(氣)로서 음과 양이 만나면 8풍이 생기는 것이며, 8풍은 절기의 변화를 일으키므로 8풍의 바람은 절기의 순행을 이끌 고, 음양의 조화로 인한 풍으로 절기의 변화는 무원의 춤추는 자리를 괘로 상징하였다.23) 궁중정재에 이것을 표현하며 연출한 것은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정치를 하는 데에는 어디 에도 치우침이 없이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리고 치어인의 ‘화 심답사(花心答詞)’의 내용24)을 통해서도 균형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2. 민간의 육화대

    다음은 궁중의 육화대가 민간에 전파되어 진주지방에서 연희되었던 기록으로 교방가요 에 실린 내용이다.

    <도판 4>의 민간으로 전해진 진주지방의 육화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판 4.

    성은미(연구자), 민간의 육화대25),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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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명의 기녀가 일제히 절하고 음악이 시작되면 쌍쌍이 마주하여 춤을 춘다. 꽃을 둘러싸 고 주위를 돌다가 그 다음에는 꽃을 꺾어 춤추면서 이동할 때 각각 타래머리에 꽂고 춤을 춘다. 춤을 마치면 절하고 나간다.

    쌍쌍이 고운 나비가 꽃에 날아와 제 맘대로 노닐 다가 빛깔 고운 소매를 나부끼며 감고 돌기 몇 번이던가 옥 같은 아름다운 꽃가지 꺾어들어 새까만 타래머리에 꽂았으니 연관선자 가 요대에 나린 듯

    소기 4명 동기 2명 채화 1시렁

    해금 피리 잠율(세피리) 장고 교방고(북)26)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림에서 여섯 명의 기녀가 가운데 채화를 두고 꽃을 들고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기녀의 복식은 수수한 치마 저고리의 평복 차림이고 여섯 명 의 악사도 보인다. 그리고 춤의 절차는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앞서 살펴보았던 조선 초 기 악학궤범에 기록된 궁중의 육화대를 진주교방의 기록인 교방가요의 육화대와 비교 해보면 과연 같은 종목의 춤일까 싶을 정도로 많이 변모한 것을 볼 수 있다. 내용과 형식 모두가 궁중정재 육화대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으며, 춤 사이의 여백을 두어 연출하고자 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다르게 추어질 수 있는 여지가 많이 보인다. 교방가요 육화대의 그림만을 보면 궁중정재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27)을 연상시키기도 하며, 감상 시 첫 구절 만 보면 궁중정재 박접무(撲蝶舞)의 창사28)를 떠올리게도 된다.

    IV. 육화대의 문화변용

    1. 구성에서 변용

    궁중의 육화대와 민간에 전파된 진주지방의 육화대의 구성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위의 <표 1>을 보면 무원구성에서 궁중의 육화대는 죽간자 2인, 치어인 1인, 기 6인으로 무원은 9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진주지방에 전파된 육화대는 소기 4인, 동기 2인으로 총 6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궁중에서 민간으로 전파되면서 무원 중 죽간 자와 치어인이 사라지고, 문화 접변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표 1.

    궁중과 민간의 육화대의 구성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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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사에서 궁중의 육화대는 죽간자가 ‘문화심사(問花心詞)’를 하고, 치어인의 답사로 ‘화 심답사(花心答詞)’를 창한다. 죽간자의 ‘문화심사’와 치어인의 ‘화심답사’의 묻고 대답하는 형식은 다른 궁중정재에는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그리고 동쪽 홍의의 첫 번째 기녀가 홍 두 제1념시를, 서쪽 남의 첫 번째 기녀가 남 제1념시를, 동쪽 홍의 두 번째 기녀가 홍두 제2념시를, 서쪽 남의 두 번째 기녀가 남 제2념시를, 동쪽 홍의 세 번째 기녀가 홍두 제3념 시를, 서쪽 남의 세 번째 기녀가 남 제3념시를 창하고 끝으로 죽간자가 퇴구호(退口號)를 하고 마친다. 따라서 궁중의 육화대는 총 9번의 창사가 있다. 그러나 진주지방에 전해진 육화대는 감상하고 기록한 한시가 있으며, 이 헌어(獻語)는 7언 4구의 창사로 볼 수 있다. 진주지방의 육화대는 궁중정재의 다소 지루할 수 있는 많은 내용의 창사를 변화시키고 민 간에서 연희되기 적합하도록 문화접변하여 수용된 것이다. 궁중의 육화대에서 죽간자와 치어인의 문답형식의 창사가 끝난 후 무원들의 창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봄에 피는 꽃 매화 와 해당화의 아름다움과 궁중의 풍경을 노래한다. 하지만 민간에 전파되어 문화변용 된 육화대의 한시를 살펴보면 나비가 꽃에 날아와 노니는 모습을 시작으로 해서 춤추는 기녀 가 꽃을 꺾어 머리에 꽂은 모습이 마치 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아름다운 용모의 선인 같다는 내용으로 춤추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것은 궁중정재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일 수 있는 내용이 민간에 문화접변하며 현실화된 표현 이라고 해석되며, 그 한시에 ‘연관선 자가 요대에 나린 듯’이란 표현을 통해서 민간에 전해져 변화된 육화대의 느낌을 좀 더 알 수 있다. 그것은 궁중의 육화대는 유교의 정치철학을 원리로 만들었는데, 진주지방으로 전해지면서 신선(神仙), 선가(仙家)적인 내용으로 변화된 것이다.

    반주음악에서 궁중정재 육화대는 궁중의 음악인 ‘천년만세 인자(引子),’ ‘천년만세’를 ‘최자령(嗺子令),’ ‘중강령(中腔令)’으로 연주된다. 하지만 민간에 전해진 육화대는 따로 악 곡이 기록되어있지 않다. 다만 진주지방의 육화대에 삽입된 삼현육각의 그림을 참고하면, 조선 후기 음악 문화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변화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33) 민간에서 사용 되기 적합하도록 변용되었을 것이라 사료된다.

    의물에서 궁중정재 육화대는 당악정재의 특성인 죽간자 2인, 인인장 2인, 정절 8인, 용선 2인, 봉선 2인, 작선 2인, 미선 2인, 개 4인으로 총 스물넷으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진주지방 에 전해진 육화대에는 의물이 없다. 의장(儀仗)은 천자(天子)나 왕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격식을 갖추어 세우는 것으로, 궁중의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민간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물을 민간에서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므로 변화된 것이다.

    복식은 악학궤범 권9의 여기복식(女妓服飾)을 참고하면 궁중의 육화대는 궁중정재의 기녀 복식으로 잠, 유소, 차, 대요, 수화, 단의, 상, 대, 흑장삼, 혜아, 말군, 남저고리이다. 그리고 민간에 전파된 육화대의 복식은 교방가요 그림을 통해 평복의 치마, 저고리와 댕기머리를 한 것을 볼 수 있다. 복식 또한 민간에 전파되면서 민간에 적합하도록 변용되 었다. 다만 악학궤범 권2를 보면 여기(女妓)의 단장(丹粧)과 복식(服飾)을 갖추는데 일상 복(常服)도 입는다34)고 기록되어 있어 잔치의 규모와 격식에 따라서 복식을 달리 입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궁중에서 하는 격식 문화를 민간에서는 그대로 할 수 없었으므로 궁중의 정재 복식 문화를 변용하여 사용하였다.

    무구는 궁중정재의 육화대는 악학궤범에 꽃(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주교방 에서 추어진 육화대의 무구는 교방가요에 채화(綵花)라고 기록되어 있어 둘 다 꽃을 의 미하며, 무구는 선택적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궁중정재 육화대가 민간으로 전파되고 수용되면서 구성에서 무원편성, 창사, 반주음악, 의물, 복식, 무구에 문화접변 되어 선택적으로 수용하였고, 문화변용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전개구조에서 변용

    다음은 궁중에서 진주지방에 전해진 육화대의 전개구조는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비교하 여 분석해 보았다.

    <표 2>의 도입부분을 살펴보면, 궁중의 육화대는 당악정재의 특성인 죽간자를 든 기녀 가 나와서 진구호를 한다. 진구호는 대개의 당악정재에서는 정재를 시작하겠다고 알리는 것인데, 육화대에서는 ‘문화심사’라고 하며 묻는 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죽간자의 ‘문화심 사’가 끝나고 들어가면 치어인이 나와서 ‘화심답사’로 죽간자의 물음에 답을 하는 형식으로 정재를 시작하는 것이 조금 특별하다. 그런데 그에 비해서 진주지방의 육화대는 죽간자가 있는 당악정재의 형식이 사라지고 여섯 명의 무원이 일제히 절하는 향악정재의 형식처럼 바뀌었다. 이것은 도입부에서 죽간자와 치어인이 하는 문화심사와 화심답사의 내용이 궁 궐에 나온 이유를 묻고 답하는 것이라 민간에서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의 교류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문화접변하는 과정에서 탈락된 것이다.

    표 2.

    궁중과 민간의 육화대의 전개구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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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부분을 살펴보면, 궁중의 육화대는 동쪽에 홍의를 입은 무원 3인과 서쪽의 남의를 입은 무원 3인이 동서로 나뉘어서 있다가 동쪽의 홍의를 입은 첫 번째 무원이 꽃을 받들고 나와서 홍두 제1념시를 창하고 들어가면, 서쪽에 남의를 입은 첫 번째 무원이 꽃을 받들고 나와서 남 제1념시를 창하고 들어가고, 또 다시 동쪽의 홍의를 입은 무원 두 번째가 꽃을 받들고 나와서 홍두 제2념시를 창하고 들어가고 이어서 그 다음도 같은 형식으로 하고 마 지막 서쪽의 남의를 입은 세 번째 무원이 남 제3념시 창하고 들어가면 6인의 무원은 왼쪽 으로 돌아 ‘사수무’를 하면서 홍의는 건, 감, 간의 위치에 서고 남의는 손, 이, 곤의 자리에 서 서는 것으로 전개는 구성되어있다. 이 부분이 민간에 전파되어서는 ‘음악이 시작되면 무원이 쌍쌍이 마주하고 춤추고, 꽃을 둘러싸고 그 주위를 돈다’라고 진주지방의 육화대는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궁중 육화대의 전개 부분이 민간에 그대로 수용되어서 각각의 무원이 하는 6번의 창사를 들으며 감상한다는 것은 민간 연희에서는 어울리기 어 려운 부분이므로 창사는 탈락되고 음악과 춤의 동작만 선택적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절정부분에서 궁중의 육화대는 무원들이 자리이동을 하며 서로 방향을 바꾸어 방향에 변화를 준다. 먼저 감의 위치에 있는 무원과 이의 위치에 있는 무원이 자리를 바꾼다. 그리 고 ‘팔수무’를 추면서 물러날 때는 서쪽을 경유하고 나아갈 때는 동쪽을 경유한다. 악관이 ‘중강령’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남의 두 번째 사람은 동쪽을 향채 춤추고, 간의 위치에 있 는 홍의 사람은 서쪽을 향해 맞춤 추고(對舞), 건의 위치에 있는 홍의 사람은 서쪽을 향해 등지고 춤추면(背舞) 일성이 이루어지고 음악이 마지막이 된다. 앞 대열의 세 사람이 염수 족도하고 북향하고, 박을 치면 꽃을 받들고 무퇴하여 손, 이, 곤의 위치에 선다. 뒷대열의 세 사람은 꽃을 받들고 무진하여 건, 감, 간의 위치에 선다. 감의 위치에 있는 홍의 사람은 동쪽을 향해 춤추고 간의 위치의 남의 사람은 서쪽을 향해 맞춤 추고, 건의 위치에 있는 남의 사람은 서쪽을 향해 등지고 춤추면 일성이 이루어지고 음악이 마지막이 된다. 앞 대 열의 세람이 염수족도 하여 북향을 하면 음악이 그친다. 악관이 ‘최자령’을 연주하고 박을 치면 감의 위치에 있는 홍의 사람은 무퇴하여 이의 위치에 서고 이의 위치에 있는 남의 사람은 무진하여 감의 위치에 서며 앞 대열의 세 사람은 무퇴(無退)하여 손, 이 곤의 위치 에 서고 뒷대열의 세 사람은 무진(舞進)(모두 팔수무 한다)하여 건, 감, 간의 위치에 선다. 음악이 그친다.

    이와 같이 궁중에서 육화대의 춤은 방향의 변화를 주면서 그 자리마다 8괘와 12간지의 뜻을 두고 춤을 춘다. 이것은 춤을 추는 자리에 의미를 두고 방향의 변화를 주어 우주의 질서와 조화의 의미를 궁중무용 육화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궁중정재 육화대의 무원의 위 치 변화를 그림으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도판 5>와 같이 무원의 위치 변화가 있었던 궁중의 <육화대>는 민간에 전파되면서 무 원의 위치 변화와 방향 변화에 대한 내용은 사라지고 ‘꽃을 꺾고 춤추면서 이동할 때 각각 타래머리에 꽃을 꽂고 춤을 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민간에서 8괘와 8풍의 의미와 12간 지와 12율려 등의 어려운 뜻을 가진 한자와 그 의미를 알고 향유하기란 지루하고, 어려울 가능성이 있으므로, 궁중정재 육화대의 방위에 따른 무원의 이동 변화와 춤의 방향 변화를 표현하는 것은 탈락되었다. 다만 궁중정재에는 기록되지 않은 중앙에 꽃을 두고 그 주위에 서 아름다운 춤동작으로 꽃을 꺾어 들고 춤추고, 또 머리에 꽃을 꽂으며 춤을 추는 동작을 만들어서 춘 것이라 사료된다. 그러므로 민간에 전파된 육화대는 궁중 육화대의 꽃이라는 모티브만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춤의 구성은 다른 내용으로 변용된 것이다.

    도판 5.

    궁중 육화대의 무원 방향 변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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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에서 궁중의 육화대는 악관이 ‘천년만세 인자’를 연주하고 박을 치면, 무원 여섯 사 람이 왼쪽으로 회무하여 맨 먼저의 대열을 짓는다. 마지막에 무원들이 처음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끝나는 것이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죽간자가 퇴구호 하고 여섯 무원이 무진하며 ‘협수무’를, 무퇴하며 ‘퇴수무’를 하면 음악이 그치며 마친다. 결말은 대개 의 당악정재의 마무리와 같은 형식으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민간에 전파된 육화대는 춤을 마치면 절하고 나가는 것으로 변용되어서 춤을 끝내며 도입과 마찬가지로 향악정재의 형식을 보인다. 다만, 한자로 된 7언 4구의 시가 헌어로 있으므로, 춤을 마치고 헌어를 했을 것이라 사료된다.

    따라서 전개구조에서도 궁중의 육화대가 민간의 육화대로 교류되어 전파된 그대로 수용 되지 않고 민간의 문화에 적합하도록 문화접변 하여 많은 부분이 걸러지고 탈락되고 재해 석 하여 변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V. 맺음말

    본 연구는 궁중에서 민간으로 전파되고 수용된 육화대(六花隊)의 문화변용을 분석하였 다. 궁중정재 육화대는 악학궤범의 문헌기록으로, 민간에서는 진주 지역에 전해진 교방 가요의 문헌기록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먼저 궁중의 육화대와 민간 육화대의 구성을 분석해 도출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민간 육화대의 무원구성은 궁중정재 육화대의 무원 9인 보다는 축소되었다. 죽간자와 치어 인이 사라지고, 소기4인과 동기 2인으로 총 6인으로 변용되었다. 둘째, 궁중의 육화대의 창사는 죽간자, 치언인, 동쪽홍의 1, 2, 3, 서쪽남의 1, 2, 3과 죽간자의 퇴구호가 있어 총 9번의 창사가 있다. 그러나 민간 육화대의 창사는 춤에 대한 감상시를 한시로 기록하는 것으로 7언 4구의 헌어로 변용되었다. 셋째, 궁중의 육화대의 반주음악은 ‘천년만세인자,’ ‘천년만세’를 ‘최자영,’ ‘중강영’으로 연주하였다. 그러나 민간 육화대 반주음악은 따로 기 록되어 있지 않고 삼현육각의 그림만 실려 있어 민간의 향제음악으로 변용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넷째, 의물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민간에 전파된 육화대에서는 모두 탈락되었다. 다섯째, 복식은 화려한 궁중의 정재 복식에서 민간에서 사용하기 적합하도록 평복의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댕기머리로 변용되었다. 여섯째, 궁중 육화대의 무구는 꽃 (花)이고, 민간 육화대의 무구는 채화(綵花)로 기록되어있다. 둘 다 꽃을 무구로 사용하여 선택적 수용되었다.

    다음은 궁중의 육화대가 민간의 육화대로 교류되어 변용된 전개 구조를 분석해 도출한 결과이다. 첫째, 도입 부분에서 궁중의 육화대에 있는 죽간자가 민간의 육화대는 없으므로 죽간자의 창사인 ‘문화심사’가 없으며, 치어인도 없으므로 치어인의 ‘화심답사’도 없다. 다 만 민간의 육화대는 여섯 명의 기녀가 일제히 절하는 것으로 변용되었다. 둘째, 전개에서 민간 육화대는 무원의 창사가 없고, 쌍쌍이 마주하여 춤을 추고 꽃을 둘러싸고 주위를 도 는 것으로 단순하게 변용되었다. 셋째, 절정에서는 궁중의 육화대는 무원이 이동하는 방향 이 8괘와 12지신의 한자의 의미에 따라 정해져 있어 동선 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민간의 육화대는 방위에 대한 한자가 없다. 방향 이동에 대한 지시도 없으며, 한자 의미대로 대열 을 맞추거나 임금이 있는 북향을 높여 향하는 것이 없이, 단순히 꽃을 꺾고 춤추고 이동할 때 각각 타래머리에 꽃을 꽂고 춤을 추는 것으로 변용되었다. 꽃이라는 소재만 선택적 수 용되고 춤의 구조는 모두 변용되었다. 넷째, 결말에서 궁중의 육화대는 무원 여섯 사람이 맨 먼저의 대열로 서고 죽간자의 퇴구호를 하고 마치지만, 민간의 육화대는 죽간자가 없으 므로 퇴구호도 없으며, 춤을 마치면 절하고 나가는 것으로 문화변용 되었다. 다만, 헌어가 있으므로 춤을 마치고 헌어를 했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러므로 궁중의 육화대는 민간으로 전파되고 수용되면서 민간의 문화에 적합하도록 문 화접변 하여 춤의 구성과 전개 구조가 선택적 수용되고, 변화하여 재해석되었으며, 꽃이라 는 모티브와 여섯 명의 무원이 춤을 추는 것 외에는 모두 문화변용 되었다.

    이상의 연구에서 도출한 결과를 통해 조선시대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이라는 서로 다른 무용 문화가 교류하여 무용이 변화하고 발전하였다는 것을 밝혔다. 무용을 문화교류의 시 각으로 확장하여 바라보며 다양한 무용문화교류를 연구하여 무용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높이고 앞으로의 무용 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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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순력도》중〈제주양로〉의 일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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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은미(연구자), 궁중의 육화대17),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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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은미(연구자),악학궤범의 <팔음도설(八音圖說)>21),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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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은미(연구자), 민간의 육화대25),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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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중 육화대의 무원 방향 변화도

    Table

    궁중과 민간의 육화대의 구성 비교

    궁중과 민간의 육화대의 전개구조 비교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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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조선왕조실록홈페이지[Joseon-wangjosillog hompeiji,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검색일: 2021.06.22.],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저자소개

    성은미는 한양대학교 대학원 무용학과에서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의 교류 메커니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사단법인 정재연구회에서 활동 중이며, 연구 관심분야는 궁중무용과 민간무용, 무용문화교류, 무용사회학, 무용인류학, 무용사 이다. 주요 연구는 “궁중예술과 민간예술의 교류 메커니즘,” “胎敎舞踊 參與에 따른 姙産婦의 分娩 自信感 및 社會的 體形不安” 등이 있다.

    Footnote

    • 장래의 문화적 발전을 위하여 다음 세대 또는 젊은 세대에게 계승·상속할 만한 가치를 지닌 과학, 기술, 관습, 규범 따위의 민족 사회 또는 인류 사회의 문화적 소산, 정신적·물질적 각종 문화재나 문화 양식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문화유산,” 표준국어대사전, [검색일: 2021.06.22.], https://stdict.korean.go.kr/main/main.do.
    • 신역 악학궤범, 이혜구 역(서울: 국립국악원, 2000), 293쪽 참고. 육화대는 송나라 대곡(大曲)에서 나온 것 같다 고 서술했다.
    • 손선숙, “조선후기 진주 교방의 정재 공연양상- <sup>『</sup>교방가요<sub>』</sub>를 중심으로,” 한국음악사학보 46, 2011, 179쪽.
    • 김지원, “육화대의 전승 양상 고찰-조선 시대에서 대한제국기까지의 문화사적 관점을 중심으로-,” 우리춤과 과학기술 48, 2020. 57쪽.
    • 김온경, 윤여숙, 한국춤총론(부산: 두손컴, 2016), 70쪽.
    • 정은경, “조선시대 선상기(選上妓)에 관한 궁중정재와 민간연희의 교섭,” 한국민속학 39, 2004, 374쪽.
    • 김윤지, 김운미, “조선후기 춤 교섭과 그 문화적 이해,” 무용역사기록학 36, 2015, 105쪽.
    • 박은영, “조선 후기 궁중·교방 정재 및 민속무용의 상호교섭과 변모 양상,” 한국문학과예술 1, 2008, 51쪽.
    • 조선 시대에 지방에서 변란이나 재해가 일어났을 때 두루 돌아다니며 사건을 진정하던 특사로 왕명으로 특별한 사명을 띠고 지방에 파견되던 임시 벼슬.
    • 《탐라순력도》중〈제주양로〉의 일부, [2021.06.22.], http://www.k-heritage.tv/upload/DataFolder/now/0406 _maintop_01.jpg.
    • 교방가요, 정현석 편, 성무경 역(서울: 보고사, 2002), 54쪽.
    • 성은미, 김운미, “궁중예술과 민간예술의 교류 메커니즘,” 우리춤과 과학기술 48, 2020, 79-81쪽 참고.
    • 세종실록 권90, 세종 22년(1440) 8월 11일(경진); 庚辰/御勤政殿受朝。上曰: “大抵立法非難, 行法爲難。 旣立 其法, 則雖有不得已之故, 不可廢也。昔高麗之八關會、我朝之講武, 雖遇旱乾凶歉之歲, 常行不廢。今養老宴之 法, 誠爲美典, 亦宜永爲遵行, 不可廢也。
    • 세종실록 56권, 세종 14년(1432) 5월 4일 (신유): 賜酒肉于李貞幹之母, 仍賜樂。 安崇善啓: “新及第榮親宴, 亦賜樂, 然但遣歌妓五六人, 此乃特賜之樂, 宜幷賜樂器以榮之。” 命賜三呈才。
    • 철종실록 권9, 1857년 1월 4일 정사; 철종실록 권14, 1862년 1월 1일 갑신; 고종실록 권10, 1873년 1월 1일 신사.
    • 조경아, “장악원 무동과 기녀의 춤을 사가(私家)에 내려주다: 정원용 회방연(回榜宴)의 사례를 중심으로,” 무용 역사기록학 43, 2016, 80쪽.
    • 악학궤범, 호사문고(蓬左文庫) 소장본(서울: 국립국악원, 2011), 209-213쪽.
    • 신역 악학궤범, 이혜구 역(서울: 국립국악원, 2000), 293쪽 참고.

      원문 내용: 岳州千年萬歲引子 擊拍奉竹竿子二人足蹈而進左右分立樂止 口號問花心詞 新花在手 逞綽約之春光 寶帶圍腰 學六宮之粧束 幸預在庭之樂 願陳詣闕之由 訖 擊拍奏前樂奉竹竿子二人足蹈擊拍而退左右分立 擊拍致 語人足蹈小進而立樂止 擧右袖唱花心答詞 竹枝調美 殊非治世之音 桃葉情多 未合正人之聽 採新聲於上國 追古 事於前修 賦以篇章 第其名品 顧慚美品 願助陳歡 金縷聲催 想行雲而可駐 華茵影過 知回雪之將飄 未敢自傳 伏 侯宸旨 訖 擊拍奏前樂致語人斂手俛伏而起足蹈擊拍舞退 四手舞 而出 立於諸妓之間 在東紅衣第一人奉花 紅者 執右手藍者執左手 足蹈而進立于前樂止唱紅頭第一念詩 折得慇懃色正新 嬌紅嫩紫露初均 休言能解應傾國 高壓 群芳艶占春 訖 擊拍奏前樂擊拍退復立左西藍衣第一人奉花足蹈而進 紅衣第一人未復位前卽相換而進後倣此 立 於前位樂止 唱藍第一念詩 ⋯(중략)⋯訖 擊拍奏前樂擊拍退復位樂止奏前樂擊拍花隊六人左旋回舞 四手舞 作兩 隊 紅衣人立於乾坎艮藍衣人立於巽离坤 齊行而立樂止樂奏嗺子令 擊拍坎紅衣人舞退立於离离藍衣人舞進立於坎 並八手舞Ο退則由西進則由東後倣此 換位而立樂止樂奏中腔令 擊拍坎藍衣人東向而舞艮紅衣人西向對舞 乾紅衣 人西向背舞 爲一成樂之終 前隊三人斂手足蹈北向 擊拍前隊三人奉花 舞退立於巽离坤 後隊三人奉花舞進立於乾 坎艮 坎紅衣人東向而舞 艮藍衣人西向對舞 乾藍衣人西向背舞 爲一成樂之終 前隊三人斂手足蹈北向樂止 樂奏嗺 子令 擊拍坎紅衣人舞退立於离 离藍衣人舞進立於坎前隊三人舞退立於巽离坤後隊三人舞 並八手舞 進立於乾坎 艮樂止 樂奏千年萬歲引子 擊拍花隊六人左旋回舞還作初列 擊拍奉竹竿子二人足蹈小進而立樂止口號 嫩綠嬌紅 競爭姸於麗景 淸歌妙舞 俱效技於華筵 雅音垂成 拜辭以退 訖 擊拍奏前樂奉竹竿子二人足蹈 擊拍而退 擊拍花隊 六人舞進 挾手舞 擊拍斂手足蹈 擊拍舞退 退手舞 樂止. 굵은 글씨는 연구자의 강조표시임.

    • 樂書 권104 樂圖論: “八方之風, 周於十二律如此, 則順氣應之, 和樂興, 而正聲格矣.” 참고.
    • 김미영, “<sup>『</sup>악학궤범(樂學軌範)<sub>』</sub>의 사상적 체계를 통한 <육화대(六花隊)> 춤절차의 의미,” 大韓舞踊 學會 59, 2009, 7쪽.
    • 악학궤범, 호사문고 소장본, 64쪽.
    • 황종(黃鍾), 대려(大呂), 태주(太簇), 협종(夾鍾), 고선(姑洗), 중려(仲呂), 유빈(蕤賓), 임종(林鍾), 이칙(夷則), 남려(南呂), 무역(無射), 응종(應鐘).
    • 앞글, 7쪽.
    • 採新聲於上國 追古事於前修 賦以篇章 第其名品: 새소리를 상국에서 채취하고 옛일을 전인에게서 찾아 편장으 로 만들어야 제일가는 명품이 되옵니다.; 이혜구 역주, 신역 악학궤범, 육화대(六花隊) 참고.
    • 교방가요, 정현석 편, 성무경 역,(서울: 보고사, 2002), 56-57쪽.
    • 앞글, 176쪽 참고.

      교방가요 원문; 六妓齊拜 樂作 雙雙對舞 繞花周行 次第折花而舞 移時 各揷於髻而舞 舞已拜出 雙雙粉蝶弄花來 彩袖翩翩繞幾回 折得瓊枝揷烏髻 硏光仙子下瑤臺 少妓四 童妓二 綵花一架 奚琴 笛 箴篥 杖鼓 敎坊鼓.

    • 정재무도홀기 계사 참고.
    • 궁중정재 <박접무>의 창사 첫 구절: 彩蜨雙雙探春光(색동나비 쌍쌍이 봄빛을 찾아)
    • 앞글, 168쪽: ‘정재의 헌사는 헌선도에서 육화대까지 헌어가 있다. 이곳의 헌사(獻詞)나 헌어(獻語)는 구호(口 號)와 치어(致語)를 말한다.’ 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감상을 기록한 한시를 7언 4구의 창사로 볼 수 있다.
    • 앞글, 178쪽. 육화대의 반주음악이 따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림을 참고하였다.
    • 육화대의 복식이 따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sup>『</sup>악학궤범<sub>』</sub> 권9에 여기 복식을 참고하였다.
    • 앞글, 178쪽. 육화대의 복식이 따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림을 참고하였다.
    • <sup>『</sup>정재무도홀기<sub>』</sub>를 살펴보면 조선 후기로 갈수록 민간의 빠른 곡조인 가곡의 농(弄), 락(樂), 편(編) 등의 민간 음악이 궁중 정재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禮曺倭野人宴에서는 女妓가 常服을 입는다.
    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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