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이 연구의 목적은 조선시대에 ‘사적공간’에서 춤추는 모습이 담긴 그림을 통해, 친목·헌수·풍속 공간에 나타난 춤 문화를 밝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춤 문화를 그림을 통해 읽 어내려는 이 연구는 3단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 글은 3단계의 결과물이다. 공간을 기 준으로 연구대상을 나누어, 1단계는 왕실공간의 춤 그림(조경아 2019), 2단계는 관아공간 의 춤 그림(조경아 2020), 3단계는 사적공간의 춤 그림을 연구하였다. 이 글은 3단계에 해당하는 연구로서, 연구대상 자료는 아래의 <표 1>과 같다.
연구대상의 범주인 ‘사적공간’은 공적인 공간과 상대되는 개념이다. 1단계와 2단계의 연 구가 왕실공간과 관아공간이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행해진 춤 그림이 대상이었다면, 이 글 에서는 개인의 사적인 공간에서 춤추었던 그림이 연구대상이다. 왕실과 관아공간의 춤 그 림에서는 실존 인물과 실제 행사가 명시된 기록화가 연구대상이었다. ‘개인공간’의 춤 그림 은 실존 인물을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림은 배제하고, 1·2 단계와 같은 기준으로 실존 인물이 등장하여 기록화의 특성을 보이는 등장하는 춤 그림만 연구대상으 로 포함한다. 조선시대 개인공간에서 춤추는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찾기 위해 각종 박물관 과 미술관의 도록을 탐색했고 선행 연구성과를 검토했다(고려대학교박물관 2018; 국립문 화재연구소 2011; 국립국악원 2001, 2002, 2003; 박정혜, 이예성, 양보경 2005). 이 주제 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선행연구는 없었으나, 미술사 연구의 그림 자체에 대한 논의도 참 고했다.
그림을 수집하고 분류한 뒤에 이 글의 연구내용을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개인적 인 친목 공간에서 추었던 춤 그림을 대상에 따라 노인 친목 모임, 과거 동기 모임, 중인 친목 모임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둘째, 개인 단위에서 부모님의 장수를 축하하는 헌수공간 에서 추었던 춤이 나타나는 그림을 살펴본다. 셋째, 풍속 공간에서 실명이 등장하는 춤 그 림을 탐색한다.
1·2단계와 마찬가지로 개별 춤 그림에서 읽어야 할 세부사항은 여섯 가지로 설정했다. 첫째, 누가 공연자와 관객인가. 둘째, 언제 어떤 시기에 추었던 춤인가. 셋째, 어디서 춤을 추는가. 넷째, 무엇을 춤추고 있는가. 다섯째, 어떻게 춤추는 모습이 그려졌는가. 여섯째, 왜 춤을 추고 춤 그림으로 남겼는가. 각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춤역사에서 의미 있게 볼만한 그림의 특징은 좀더 심층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II. 친목 공간의 춤 그림
1. 노인 친목 모임의 춤
조선시대 양반 노인은 친목 모임에서 춤을 즐겼을까? 조선전기 노인의 친목 모임을 그 린 「십로계축(十老契軸)」 은 그 단서를 제공한다. 이 그림은 1499년(연산군 5)에 신말주(申 末舟, 1429~1505)가 전라도 순천에서 결성한 양반 노인 10명의 친목 모임을 그린 것이다. 한 면에 한 명씩 인물을 그리고, 위에 사언절구의 시를 덧붙였다. 삼성미술관 소장본을 1499년 당시의 그림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윤진영 2003, 68-69) 오민주(2009)는 원본 「십로계축 」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하며, 6종의 후모본이 있다고 한다(26-29).
친목 모임의 결성과 방식은 신말주가 쓴 「십로계첩」 서문에 담겼다. 이에 따르면, 신말 주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순천에 왔을 때 이윤철이 찾아왔다. 나이가 70세가 넘어 살 날이 많지 않으니, ‘좋은 날에 태평시대를 보내는 일’을 함께 모색했다. 당나라 백거이(白居 易, 771-846)의 고향 모임인 향산 구로회(九老會)와 송나라 문언박(文彦博)의 낙양 기영회 (耆英會)를 본떠, 고향에서 70세가 넘은 노인 10명을 친목계원으로 삼았다. 신말주와 이윤 철을 비롯하여 고을 동쪽에 김박·한승유, 남쪽에 안정·오유경·설산옥·설존의·장조 평, 서쪽에 조윤옥이었다. 계원인 노인들은 출생 순서대로 잔치를 주관하고, 예와 음식을 간소하게 하기로 했다. 모임이 잦아도 번거롭지 않도록 반찬 한두 가지와 집에 있는 술 정도만 준비하기로 했다. 구두로 약속하면 오래가지 않으므로 그림을 그리고 칠언시를 썼 다고 했다(임재완, 2006, 12). 즉 모임의 지속성과 기록성을 염두에 두고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또한 후손들에게까지 아름다운 풍속이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춤의 관점에서 「십로계첩」 은 주목된다. 10명의 인물을 각각 그린 그림에서 2명이 춤추 는 모습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밖에 7명은 앉은 모습, 1명은 누운 모습이었다. 10명 중에 춤추는 모습으로 표현된 인물은 김박(金博)과 오유경(吳惟敬)이었다.
김박은 앉아서 춤추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오른팔을 접어 올리고, 왼팔을 옆으로 편 모 습인데, 두 손의 검지를 펴고 나머지 손가락을 접은 형상이었다. 앉은 자세는 오른 무릎만 세워 앉은 모습이었다. 그림 위의 글에는, 김박이 관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아내가 애석 히 여겨 관 속에 넣지 못하게 했는데 잠시 후에 김박이 깨어났던 일화가 써 있다(임재완 2006, 16). 김박이 앉아서 춤추는 모습은 깊은 병이 들어 움직임에 제약이 있었으나, 맘은 춤추고 싶었기에 앉아서 춤추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 아닌가 한다.
오유경은 일어나 춤추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서서 오른팔은 어깨에 메고, 왼팔은 옆으로 편 채, 오른 무릎을 굽혀 들고 덩실덩실 춤춘다. 특 히 양 소매 끝에 달린 짧은 한삼은 팔사위의 움 직임을 확장시킨다. 오유경은 10명의 노인 중에 가장 역동적으로 그려졌다. 오유경의 사언절구 는 이렇다. “타고난 성품이 자연적으로 공손해/ 비록 어린이와 대면하여도 역시 예의 바른 모습 이네/ 다만 마음을 열고 즐겁게 웃을 일이 있으 면/ 노래 한 곡조에 술이 천사발이라(吳惟敬: 平生天性自爲恭, 雖對微童亦禮容, 只有開懷懽笑 處, 淸歌一曲酒千鐘)” (임재완 2006, 20). 오유 경을 떠올리면 흥이 많은 모습이 연상되어 춤추 는 모습으로 그렸을 수도 있겠다.
춤 역사에서 「십로계첩」 이 주목되는 지점은, 양반 노인의 생애를 한 장으로 압축한 장면 이 춤추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10명의 노인 중 2명이 춤추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 시사하 는 것은 무엇일까. 조선전기 양반 남성이 일상에서 춤을 가까이 접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한다. 일상에서 춤추며 살았기 때문에 생의 말년에 춤추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자연스 러웠을 것이다. 춤은 그처럼 일상에 가까이 있었다. 또한 생의 말년을 즐기는데 춤이 필요 하다는 인식도 존재했다. 「십로계첩」 에 담긴 김박과 오유경이 춤추는 그림은, 조선전기 양 반 문화에 춤이 가까이 존재했으며, 향촌 양반이 춤추며 노년을 즐겼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겠다. ‘춤추지 않고서 어찌 인생을 즐기랴’라고 말하는 듯하다.
2. 사마시 동기 모임의 춤
과거 합격 동기의 친목 모임에도 춤이 존재했다. 과거는 본 시험인 문과(文科)와 예비시 험인 소과(小科)로 나뉘는데, 소과는 사마시(司馬試)로도 불렸다. 예비시험인 사마시 동기 생은 평생토록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사마시가 관료로 진출하는 첫 관문이었고, 젊은 시절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윤진영 2015, 53). 사마시 동기 친목회에서 춤이 등장하 는 두 그림을 살펴보겠다.
「기축사마동방록(己丑司馬同榜錄)」 (1602)은 「용만가회사마동방록(龍灣佳會司馬同榜錄)」 이라고도 하는데, 기축년(1589, 선조 22) 사마시의 합격 동기인 ‘동방(同榜)’ 모임을 기록 한 그림과 글이다. 모임의 참석자였던 류시회(柳詩會, 1562-1635) 고택인 안산 경성당(竟 成堂)에서 소장했다가 2003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했다. 모임의 시기는 사 마시에 합격하고 13년이 지난 1602년(선조 35)이었다. 모임 공간은 평안북도 의주(義州) 용만(龍灣, 龍川)의 객관인 청심당(淸心堂)이었다(박정혜 2002, 302, 320).
<도판 3>에서 모임의 주인공이자, 춤의 관객은 5명이었다. 화면 오른편에 4명과 왼편에 1명으로, 모두 분홍 도포를 입고 있다. 좌목(座目)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현직 관료였다. 3명은 평안도 관리로서 용천군수 류시회, 의주부 판관 홍유의(洪有義, 1557-?), 평안도 도 사 이호의(李好義, 1560-?)였다. 2명은 한양에서 파견된 관리로, 세자시강원 보덕 홍경신 (洪慶臣, 1557-?)은 평안도 어사로 왔으며, 병조정랑 윤안국(尹安國, 1569-1630)은 서장 관으로 중국 사행을 가던 중에 의주에 머물렀다(박정혜 2002, 320). 사마시 합격 동기생이 평안도 지역의 공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의주에서 만나 모임을 열었던 것이다.
5명의 사마시 합격 동기생을 관객으로 하여 무동이 춤추는 모습은 <도판 3>에서 보인 다. 청심당 가운데에 무동 2명은 오른팔을 접어 올리고, 왼팔을 사선 아래로 뻗어 춤춘다. 하체는 선 자세로 고정된 채, 긴 소매 상의를 입은 팔의 움직임만 강조되어 그려졌다. 두 무동의 얼굴은 눈코입이 생략되고 윤곽선만 간략하다. 무동의 왼편과 아래편에 있는 기녀 10명도 잔치에서 춤추고 노래를 불렀으리라 예상되지만, 그림으로는 무동의 춤만 그려졌 다. 청심당 앞에는 6명의 악사가 앉아있는데 삼현육각의 반주음악을 연주했을 듯하다.
이 그림에서 두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왜 공적 존재인 무동이 ‘의주’에서 그리고 ‘사적 인’ 잔치에서 춤을 추었을까 라는 의문이다. 먼저 의주라는 지역적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조선시대에 의주는 중국으로 오가는 사신의 주요 길목 중 하나로, 사신을 위한 의례가 행 해지던 곳이었다. 『통문관지(通文館志)』(1720) ‘용만(龍灣, 의주) 연향’에 따르면, 중국 사 신을 위한 의례에서 무동이 춤을 추었던 기록이 등장한다. 그리고 용만에서 했던 의례를 여섯 곳의 연향에서도 동일하게 행한다(龍灣儀註, 六處宴享儀同)”라고 덧붙였다. 이는 의 주에 무동의 춤이 존재했다는 중요한 기록이다.
「기축사마동방록」 (1602)과 120년의 시차가 존재하지만, 의주가 주요한 사신 의례의 길 목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선조대에도 의주에서 무동이 공연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그림으로 확인된다. 19세기 의주 읍주인 『용만지(龍灣誌)』(1849) 「관해(官廨)」 의 ‘교방(敎 坊)’ 항목에 “교방은 기녀가 악을 배우는 곳이다. 악공으로 북 1, 적 1, 해금 1, 부 1, 필률 2” 라고 기록되었다. 무동의 존재는 언급이 없어, 『용만지』가 편찬될 당시에만 무동이 없 었던 것인지, 일시적으로 선조대에만 무동이 있었던 것인지는 단정짓기 어렵다.
의주 관아에 소속된 무동이, 사마시 동기 모임이라는 개인적인 모임에서 춤을 추었다는 사실은 의아하지만, 모임 당시에 동기 5명은 모두 현직 관료였고, 3명은 평안도의 주요 관리였으므로 개인적인 모임에 관아 소속 공연자들을 동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기축사마동방록」 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첫째는 공연자의 측면에서, 무 동이 선조대에 의주에 존재했다는 점이다. 의주는 중국과 조선을 오가는 사신의 관문이자, 주요 접객지라는 지역적 특수성이 반영되었다. 둘째는 공연공간의 측면에서. 개인적인 차 원의 관료 모임에서 무동이 춤 공연을 했다는 점이다. 관아에 소속된 무동은 공적인 존재 인데, 이들이 공적인 행사뿐만 아니라 지역 관료의 사적인 행사에서도 공연활동을 했다는 당시의 정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그림을 살펴보겠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60년이 지나면 ‘회방(回榜)’이라고 한다. 회방 잔치의 춤은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만력기유사마방회도첩(萬曆己酉司馬榜回 圖帖)」 이 유일하다. 1609년(기유, 광해군 1)의 사마시에 합격하고 만 60년이 지난 1669년 (현종 10) 회방연이 담겼다(윤진영 2015, 53).
회방연의 공간은 사마시 장원이었던 이민구(李敏求, 1589~1670)의 집이었다. 『현종실 록』 22권의 1670년 이민구의 사후에 평가한 기록에 따르면, 이수광(李睟光, 1563~1629) 의 아들 이민구는 재주가 뛰어나 사마시와 문과에 모두 장원을 했던 인물이다. 이민구의 집 마당 위족에 차일을 설치하고, 뒤쪽에 병풍을 세워, 바닥에 돗자리를 깔아 잔치 공간을 만들었다. <도판 4>에서 회방연 잔치의 주인공은 3명이다. 북벽에 분홍 도포를 입은 81세 이민구, 91세 윤정지(尹挺之, 1579~?), 85세 홍헌(洪憲, 1585~1672)이며, 이들이 춤의 주 요 관객이었다. 그림 속에는 초대된 손님 5명도 그려졌다(박정혜 2002, 322-323).
회방연에서 무동이 춤을 추었 다. 잔치 공간의 한 가운데에서 무 동은 서로를 마주하여 춤춘다. 각 기 두 팔을 펼쳐 들고, 오른 무릎 을 들어 올린 율동감 있는 모습으 로 그려졌다. 무동은 부용관을 쓰 고, 각각 긴 소매의 녹색과 적색 의상을 입었다. 무동의 왼편에는 연주하는 기녀 5명이, 오른편에는 연주하는 악공 4명이 있어, 남녀 춤 반주자로 혼합 편성되었다.
개인의 집에서 무동이 춤을 추 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첫째는, 회방연 때에 임금이 악을 내려주는 ‘사악(賜樂)’으로 무동의 춤과 악공이 제공되었다는 가설이다. 처용무가 없었으니, 1등 사악은 아니었을 것 이다. 그러나 남녀 9명의 연주자가 제공된 만큼 사악의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민구와 관련된 사악 자료를 증빙할 수 없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둘째는, 무동을 사가에서 불러 공 연했다는 가설이다. 공적 존재였던 무동을 어떻게 사가의 개인잔치에서 불러서 춤추게 했 는가도 의문이다. 궁중과 지방관아에서도 무동을 운용하기 어려웠던 시기인데, 사적으로 유용할 무동 인력이 있었을까 의문이다. 현재로서는 두 가설 모두 증빙 사료를 찾을 수 없어 추후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3. 중인 친목 모임의 춤
양반의 친목 모임뿐만 아니라, 중인(中人)의 친목 모임에도 춤이 있었다. 한영우(2004) 에 따르면, 17세기 이후로 전문기술직이 세습되면서 ‘중인’이라는 특수계급 집단이 형성되 었다. 중인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 부류로서 전문기술직에 종사하는 하급 관료와 시골의 교생(校生)·군교(軍校)·향리가 중인에 해당된다(411). 중인의 모임에서 춤이 등장하는 그림 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본관 7882) 「수갑계첩(壽甲稧帖)」 (도판 5)이다. 1758년(영조 34)에 태어난 동갑의 중인들이 1814년 윤2월에 개최한 친목모임을 담은 그림이다.
그림 속 춤의 공간은 제용감(濟用監) 서리인 정윤상(丁允祥)의 집으로, 한성 중부에 위 치했다(마대진 2019, 32). 그림에서 초가 켜졌으니 밤의 연회였다. 탕건을 쓰고 도포차림 을 한 22명은 대청마루에 둘러앉았다(윤진영 2003, 306). 「수갑계첩」 에 기록된 모임의 풍 경은 다음과 같다.
어떤 점은 다르고, 어떤 점은 같은 22인이 무인(1758년) 동갑계를 이루니 곧 순조 갑술년 (1814) 2월 9일, 20일이다. 윤달 22일 밤에 술단지·현악기·관악기를 들고 곧 중부 약석방 정군유의 집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서로 돌아보니 백발이다. 느릅나무 경치가 푸릇푸릇한데, 이 연회를 얻었으니 태평한 세상에 진실로 기이한 일이다. 무릇 각자 시를 지어서 마음 속의 감회를 펼친다(이수미 1999, 61). 某異某共二十二人成戊寅甲. 卽上之十四年甲戌, 二月九·二 十日也. 於閏月二十二日夜, 携樽酒絲管, 就中部藥石坊, 丁君裕宅, 作第一會. 相顧素髮, 楡景 蒼蒼. 得此燕嬉, 於升平之世者, 固希異也. 蓋名賦詩, 以伸雅裏(이조원 1814).
춤의 관객은 1814년(순조 14)에 57세가 된 22명의 동갑내기였다. 「수갑계첩」서문에 문인 이조원(李肇原, 1758~1832)은 “위항(委巷)의 무인인(戊寅人) 여러 사람이 모여 수계 (修稧)를 결성하니”라고 했다. ‘위항’은 신분적으로 중인을 말하며, 무인인은 1758년 무인 년 출생을 말한다(이수미 1999, 60). 이들은 중앙관청의 말단직에서 일하는 경아전(京衙 前)의 서리들이었다. 조선후기에 경제력을 지녔던 중인은 집단별로 관계를 공고히 하는 모 임을 가졌고 그것을 계회도로 남겼다. 이 행사가 있었던 1814년 『일성록』의 내용을 토대 로 이 모임의 성격이 단순한 동갑계가 아니라, 대대적인 비리를 저지르기 전 모의를 위한 모임이었으리라 추정하기도 한다(마대진 2019, 27, 32, 93).
<도판 5>에서 대청마루 중앙에 앉아 갓을 쓰고 연주하는 악사가 보인다. 악사는 가야금, 대금, 피리2, 해금, 장구를 연주하며, 그 옆으로 남녀 소리꾼이 앉아 있다(국립국악원 2003, 223).
가장 궁금한 인물은 악사 아래의 두 인물이다. 이 그림을 언급한 미술분야의 선행연구에 서 대청 아래의 두 인물인 무동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처음엔 그림 속의 두 무동이 춤을 추는 것인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인지 변별하기 어려웠다. 보통의 경우라면, 춤추는 모습 은 화폭의 중앙에 그려지고 관객의 시선이 춤꾼을 향해 있는데, 이 그림은 춤꾼이 변방에 작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인물은 첫째 반주 악사와 밀접히 있고, 둘째 어떤 특정 한 일을 하는 실용적 목적을 가진 동작으로 보기 어려우며, 셋째 두 인물이 짝을 이뤄 동일 한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측면에서, 무동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윤진영(2003)에 따르 면, 이 그림이 전형에 구애받지 않는 시점과 구도로 그려졌다고 한다(307). 따라서 중인이 주인공인 이 그림은 전형적인 그림들과 달리 악사가 화폭의 중앙을 차지하고, 춤꾼이 변방 에 그려지는 독특한 방식으로 그려졌다고 유추할 수 있다.
<도판 5>에서 춤을 추는 무동은 대청마루 아래쪽에 위치했다. 두 무동은 몸 방향을 오른 쪽으로 돌리고, 두 팔을 어깨 높이로 펴들고 두 손을 모은 채, 오른발을 앞으로 살짝 내민 모습이다. 마치 강남스타일 노래의 ‘말춤’을 연상케 한다. 무동 복식은 무명의 민복으로 보 이며,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춤 의상이 손을 덮는 긴 소매 옷을 입는 것에 비해 손이 드러나 는 손목 길이의 상의를 입었다.
두 무동의 존재를 어떻게 해석할까? 왜 중인의 사적인 모임에서 무동이 춤을 추었을까? 전문직이었던 중인은 양반과 짝을 이루어 일하는 사람들이고, 이들에게 익숙한 문화는 양 반의 문화였다. 따라서 신분적으로 양반은 아니지만, 재력을 가지고 있는 중인들이 양반 문화를 모방하여, 마치 양반이 잔치에서 연주와 춤을 즐기듯이 자신들도 무동을 초대하여 춤을 즐기려고 했을 것이다.
중인 신분인 개성상인의 모임에서 무동이 춤추는 장면은 「기로세련계도(耆老世聯稧圖)」 에도 등장한다. 그림의 제목은 세대를 이은 노인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 그림은 1804년 9월에 개성 노인들이 약 이백 년 전에 있었던 조상의 옛 일을 본받아 송악 산 기슭의 옛 왕궁터 만월대(滿月臺)에서 가졌던 계회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 위쪽 홍의 영(洪儀泳, 1750~1815)의 글에 “이미 계회의 행사가 끝나게 됨에 드디어 단원 김홍도로 하여금 그 광경을 그려내도록 하고, 나에게는 기(記)를 써달라고 부탁했다”라고 하여 김홍 도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고, 행사 후에 주문을 받아 그린 그림임을 밝히고 있다(오주석 1998, 218).
잔치의 공간이자 춤의 공간은 고려의 법궁 터인 개성의 ‘만월대’였다. 조선시대의 잔치 가 주로 일상의 공간을 다시 꾸며 치러진 것과 달리, 허허벌판인 만월대를 잔치 공간으로 활용했다. 「기로세련계도」 에서는 잔치 공간에 높은 차일을 치고, 세 면에 병풍을 두르고, 바닥에 돗자리를 깔아 객석과 무대 공간을 동일한 층위로 만들었다. 차일의 폭과 너비는 매우 커서, 객석 전체를 덮을 만한 크기였다. 만월대 터는 무대와 객석으로 변화되었다.
잔치의 주인공이자, 춤 관객은 그림의 좌목에 쓰여진 64명의 개성 노인이었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에게 그림을 주문할 만큼 재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모임을 주창한 이는 장후은(張後殷)으로 결성 장씨인 일가가 주도했으며, 참석한 개성 노인들은 대개 상인층으로 구성된 지역 유지였다(조규희 2019, 136). 개성상인이 주도한 계회가 1607년에 있었는데, 이를 계승하여 1804년에도 대규모의 계회가 개최된 것이다. 마대진 (2019)에 따르면, 「기로세련계도」 의 제작 목적은 이전 1607년 계회처럼 개성상인들 전체 를 아우르는 모임을 통해 공동체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었다(89). 이 잔치의 춤꾼은 무 동이었다. 홍의영이 쓴 그림의 발문에 잔치의 풍경이 담겨있다. 장막은 구름 같이 드리워 지고, 병풍은 안개같이 둘러쳐 있으며, 그러한 만월대에 64명이 가득 모였다. 잔치자리를 장식할 금항아리와 색깔 꽃이 즐비하고, “악공들과 무동들은 이제 막 번갈아가며 재주를 자랑한다”(조규희 2019, 130).
「기로세련계도」 에서는 재주를 자랑하며 춤추는 무동이 등장한다. <도판 6>에서 마주하 여 춤추는 무동은 두 명이 춤출 때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긴 소매 웃옷을 입고, 한 명은 두 팔을 수평으로 벌린 모습으로, 다른 한 명은 두 팔을 사선으로 벌린 채 한 팔은 어깨에 맨 모습으로 그려졌다. 김홍도는 현장에서 춤을 보지 못한 채 그렸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일까. 김홍도는 궁중화원이었으며, 정조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그 림에 참여했던 이력이 있었으니 궁중 정재의 전형적인 방식과 유사하게 그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 「기로세련계도」 에 기록된 악사들은 왼쪽부터 대금·해금·피리2 장구·북을 연 주하고 있다. 이 그림으로 무동의 활동 반경이 왕실과 관아뿐만 아니라, 개성상인의 잔치 까지 확장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홍도는 주변 노인들이 흥에 겨워 춤추는 모습도 그렸다. 김준현에 따르면, 김홍도는 흥미로운 삶의 단면들을 삽입했다. 거지가 동냥을 구하자 거절하는 장면, 초동이 지게를 내려놓고 황급히 잔치에 달려가는 장면,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장면 등이다(국립 국악원 2003, 222). 그 중에 흥을 이기지 못하고 춤추는 노인 두 명이 주목된다. 둘은 두 팔을 벌리고 서로 마주하여 춤추는 모습이다. 즉흥적으로 일어나 함께 춤을 추는 듯 보인 다. 김홍도는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으므로, 노인이 춤추는 장면도 실제 현장이라기보다는, 잔치 자리에 있을법한 장면을 반영했다. 사실은 아니지만 당대의 진실을 그린 것이다.
요컨대, 「수갑계첩」 과 「기로세련계도」 는 중인이 향유한 예술에 위항 문학·음악뿐만 아 니라, 춤도 포함되었음을 시사한다. 문학분야에서 중인은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최상위의 문학인 한시 창작에서 사대부 못지않은 실력을 가졌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음악분야에서 위항인인 가객(歌客)은 가단(歌壇)을 만들어 가곡을 발전시키기도 했다(조동일 2005, 173-175, 188).
춤역사에서, 두 그림은 중인의 잔치에 무동이 춤을 추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말해주는 자료로 가치가 크다. 한영우(2004)에 따르면, 중인은 19세기에 경제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양반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성장했다고 한다(453). 양반 문화에서 즐겼던 문학과 음악을 중인이 즐겼으니, 춤을 즐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겠으나, 그간 중인의 춤향유에 관해서는 학문적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두 그림을 단초로 하여, 이후 중인들이 즐겼던 춤문화에 관해 후속연구가 필요하다.
III. 헌수 공간의 춤 그림
현재도 연로한 부모님을 위해 회갑·칠순·팔순 잔치를 하며,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 춤판 이 벌어지기도 한다. 부모님을 위한 잔치의 바탕에는 ‘효’가 깔려 있다. 『중종실록』 1509년 7월 1일 기사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으로 ‘효’를 장려하여 임금이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면 천하가 화평하여 재변이 발생하지 않고 화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세 종실록』 1432년 8월 17일에 세종은 “양로(養老)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니 비록 지극히 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양로연 에 참여하게 하라”고 했다. 세종의 명에 따라 매년 가을에는 궁중에서 열리는 양로연에 천민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초대되었다. 지방 관아에서도 마을 노인을 위한 양로연을 베풀 었고, 함께 춤추는 장면이 그림으로 남겨지기도 했다. 양로연에서 추는 춤은 태평한 시대 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겼다(조경아 2020). 이 장에서는 개인 단위에서 부모님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에 춤이 나타나는 세 그림을 살펴보겠다.
1. 채씨 부인 102세 잔치의 춤
대표적인 헌수(獻壽, 장수를 비는 뜻으로 술잔을 올림) 공간의 춤이 담긴 그림이자,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림은 「선묘조 제재 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이다. 이 그림은 1605년 4월에 열린 경수연을 다섯 장면에 그린 것이다.(박정혜, 이예성, 양보경 2005, 129) 제작 시기가 다른 5종의 소장본이 전하는데, ①서울역사박물관(1605년) ②홍익대학교박물관 (1655년경) ③고려대학교박물관(18세기) ④국립문화재연구소(19세기) ⑤서울대학교 중앙 도서관 소장본이다. 소장본에 따라 그림의 색상과 형태에 일부 차이가 있다.
선조는 이 잔치에 은택을 내려주었다. 1605년 4월 9일의 『선조실록』에 따르면, 잔치를 준비하는 자제들은 102세인 채씨 대부인(大夫人)을 비롯한 노모 10명에게 헌수할 때 ‘자식 이 어버이를 위하는 정성에 섭섭함이 없도록’ 악(樂)을 허용해 달라고 조정에 요청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국가에서 풍악을 금지했기 때문인데, 헌수는 예외였기에 선조는 악 (樂)의 사용을 허락했고, 비용을 보태주었으며 사악(賜樂)도 내려주었다. 선조는 2년 전 채 씨 대부인이 100세(1603년)가 되었을 때도 귀한 일이라며 잔치 비용과 사악을 보내준 적 이 있었다.
1605년 4월에 70세 이상의 노모(대부인)를 모시던 13명이 계모임을 만들고, 계원들은 장흥동의 한 저택에서 10명의 노모를 위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잔치의 공간은 그간 알려 진 삼청동 공해(국립국악원 2001, 220-222)가 아니라 잔치에 참여했던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쓴 「백세채부인경수연도서」 에 언급된 장흥동 갑제(長興洞 甲第)였다(조규 희 2006, 120). 일상 공간인 개인 집 마당에 차일을 치고 병풍을 둘러 잔치 공간으로 마련 하였다. 1605년 4월에 열린 이 행사의 절차는 그림에 덧붙여진 「경수연 절목」 에 자세하다.
경수연 절목(慶壽宴節目)
⊙을사(1605, 선조 38) 4월 일. ⊙연회날 진시(辰時, 오전7-9시)에 모두 모일 것.⊙ 계원들은 수레에 태워 모시고 올 것. ⊙여러 자제들은 새벽에 모임.⊙ 여러 대부인들이 상견례하는 모습. ⊙좌상행례(좌석에서 행하는 예). ⊙여러 대부인들이 참석해서 절을 하며 예를 나타내는 모습. ⊙여러 대부인들이 좌정한 후에는, 순서대로 서 있으면서 한 번 절을 올림. ⊙계원과 여러 자제들이 참석하여 절을 하며 예를 나타내는 모습. ⊙먼저 축하의 말을 한 후에 마루에 올라 두 번 절을 올리고 축수의 잔을 올리며, 계원에 한하여 축수의 잔을 모두 올린 후에는 2명씩 짝을 지어서 춤을 추기 시작함. ⊙여러 부인들이 축수의 잔을 올리는 여부는 그날의 형편을 보아 그때그때 논의하여 처리함. ⊙예절과 치사(致辭)는 모두 나이가 든 의녀(醫女)가 주관을 함. ⊙각 집안의 시비(侍婢)들은 옆에서 시중을 들되 2명을 넘지 않을 것(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30).
이 잔치의 주인공인 10명의 노모 중에 이거(李蘧, 1532-1608)의 어머니 채씨 대부인은 102세로 가장 연장자였고, 진흥군 강신의 어머니 정경부인 윤씨는 품계가 가장 높았다. 흑색 의상을 입고 북쪽 벽에 자리한 두 인물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29). 주인공의 이름과 자제의 이름 및 관직이 좌목에 수록되었다.
<도판 7>에서 잔치의 주인공인 흑색 옷을 입은 대부인 10명이 세 면에 앉아있고, 뒷줄 에 부인이 자리했다. 화면의 중앙에는 분홍 관복을 입은 자제 두 명이 마주하여 한쪽 팔을 펴고, 한쪽 팔은 접어든 채 춤을 추고 있다. 그 왼쪽에는 궁중에서 사악(賜樂)으로 파견된 악공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여성 주인공과 남성인 악공을 분별하기 위해 낮은 장막 이 쳐졌다.
이 그림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춤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첫째로, 여성이 잔치의 주인공 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왕실 잔치에서도 임금의 어머니가 잔치의 주인공인 병풍 그림이 있으나, 여성 주인공의 모습은 생략된 채 빈 자리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대부인 과 부인의 모습을 분명히 그려, 이 잔치의 주인공이 여성이며 어머니라는 존재가 뚜렷이 부각되었다.
둘째로, 양반 관료인 자제가 어머니를 위해 춤을 추었다는 점이다. 위의 경수연 절목에 서 밑줄로 강조한 부분을 보면, 자제들은 잔치의 주인공인 어머니께 축하의 말을 하고, 두 번 절을 올리고, 축수의 잔을 올리고, 두 명씩 짝을 지어 춤을 추었다(升堂再拜上壽, 限禊 員畢上壽後, 每以二員爲耦入舞). 즉, 말-절-술잔-춤의 순서로 축하의 절차가 진행되었던 것인데, 가장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역시 춤이었다. 그 장면이 <도판 7>이다. 2년 전에 있었던 채씨 부인의 100세 잔치를 기록한 이경석의 「백헌집(白軒集)」「백세채부인경수연 도서(百世蔡夫人慶壽宴圖序)」 에서도 “음악이 일제히 연주되자 여러 재신들은 돌아가면서 앞으로 나아가 축수의 잔을 올리고, 차례로 일어나 춤을 추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36)라고 하여 자제들의 춤 릴레이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계원만 춤을 추었는데, 계원의 어머니는 70세 이상이었고 102세인 채씨 부인도 있으니, 조선시대의 이른 출산을 생각하 면 춤을 추었던 자제 13명의 나이는 중년에서 노년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춤은 ‘효’를 표현 하는 방식이자, 부모의 장수를 기뻐하는 방식으로 조선시대 양반의 삶에 깊숙이, 친숙하게 들어와 있었다.
이 잔치에는 선조가 내려준 무동과 악공들도 사악(賜樂)의 형태로 참여했다. 1605년의 행사를 이후 1655년경에 다시 그 린 <도판 8>에서 궁중에서 파견된 무동 2명이 마주하여 춤을 추고 있다. 소매 밑으로 길게 늘어진 매 듭으로 보아 향발 정재로 추정된다.
「백세채부인경수연도서(百世蔡 夫人慶壽宴圖序)」 에 따르면, 이 행사가 있기 2년 전인 1603년, 채 씨 부인의 100세 잔치에도 참여했 던 이경석은 당시의 일을 그린 그림이 전쟁통에 분실되었고, 잔치에 참석한 자제 중에 자 신만 생존해 있기에 1655년에 화사(畫師)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 겼다고 했다. 조선시대에 효를 강조했던 시대적 이념이 있었고, 조규희(2006)가 언급했듯 이 행사를 기념한 그림을 제작하여 후대에 전할 경사로 남기고자 하는 가문의 욕구가 있었 으며(122), 어머니가 장수하는 기쁜 마음을 춤으로 표출하고자 하는 중층적인 목적으로 「선묘조 제재 경수연도」 의 춤 그림은 탄생했다.
2. 일곱 어머니를 위한 잔치의 춤
어머니들을 위한 잔치 그림의 춤은 「칠태부인경수연도(七太夫人慶壽宴圖)」 에서도 등장 한다. 이 그림은 1691년(숙종 17)년 8월에 삼청동 관아에서 열린 일곱 부인을 위한 잔치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것이다. 두 소장본이 전하는데 ‘여주군경수연도’(경기도 유형문화재 145호)라고 불리는 개인소장본은 병풍 형태이며 부산박물관은 두루마리 형태이다. 연회 장면, 참석자 좌목, 숙종의 하사 음식에 대한 감사, 자제 중 한 명인 권해가 쓴 ‘경수연도 서’로 구성되었다. 이 잔치는 1691년 8월에 숙종이 신하 중에 모친의 나이가 칠십 이상인 자에게 쌀과 비단을 보내주었는데, 이에 감사하며 자제 7명이 잔치를 마련한 것이다. 숙종 은 다시 음식과 악(樂)을 하사하였다(국립국악원 2002, 222).
그림의 공간은 개인 집이 아닌 삼청동 관아였고, 차일을 치고 병풍을 둘러 잔치 공간을 마련했다. 이 그림의 특징은 잔치의 주인공인 일곱 대부인이 빈 자리로 그려진 것이다. 앞 선 「선묘조 제재 경수연도」 (1605)에서는 잔치의 주인공인 어머니들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뒷 시기 작품인 「칠태부인경수연도」 (1691)에서는 북벽에 자리한 일곱 부인들의 모습이 그 려지지 않고 빈자리만 보일 뿐이었다. 장악원의 악공들은 건물의 왼쪽 밖에서 시야가 완전 히 차단된 공간에서 연주했다. 그림에서 선조대보다 숙종대의 경수연이 좀 더 남녀의 분별 이 강화된 보수적인 사회라는 느낌을 준다. 분홍 관복을 입은 두 명의 자제가 짝을 지어 춤추는 모습은 이전과 같다. 주인공인 일곱 부인이 71세에서 80세까지이니, 춤추는 자제 또한 장년의 나이였다.
3. 8남매의 장수를 축하하는 춤
앞의 두 그림은 여러 가문의 자제들이 계모임으로 잔치를 준비했다면, 한 집안 사람들이 가족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에서 춤 그림이 나타나기도 했다. 「담락연도(湛樂宴圖)」 는 1724 년 삼월 그믐에 월성 이씨 이종애(李鐘厓)의 8남매(3남 5녀)가 모두 건강하게 생존한 것을 축하하며 이종애의 집에서 가족들이 이틀간 베푼 잔치를 담은 그림이다. 남매 중 한 명만 먼저 소천했다. 이종애 아들인 이용하(李龍河)가 쓴 「담락연사실(湛樂宴事實)」 에 따르면, 이때 모인 일가 친척이 백 수십명에 달했고, 이런 기쁜 일은 그림으로 남겨 후세까지 전해 야 한다는 생각에 자제가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국립국악원 2002, 224-225).
「담락연도」 에서 춤이 등장하는 두 그림을 살펴보기로 한다. <도판 10-1>은 잔치를 즐기 는 가족들의 자리가 실내에 마련되었다. 독특한 점은 자리배치이다. 다른 잔치에서 남성과 여성이 구별된 공간에서 잔치를 즐겼던데 반해, 「담락연도」 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실 내에서 마주보는 형태로 자리가 배치되었다.
마당에서는 춤판이 벌어졌다. 천막으 로 공연공간을 구분짓고, 바닥에는 큰 자리를 깔아 무대로 만들었다. 무동 네 명은 짝을 이루고 마주하여 춤춘다. 춤 추는 소매 밑으로 긴 매듭 끈이 달려있 어 향발무를 추는 듯하다. 처용탈을 쓴 오방 처용은 처용무를 신나게 추는 모 습이다. 두 춤을 동시에 공연하지 않았 지만, 제한된 화면에 담기 위해 동시에 그려졌을 것이다. 춤꾼의 오른 편에는 악공들이 배치되었다. 조선후기 『육전 조례』(1866) 권5의 ‘사악(賜樂)’에 따르 면, 처용무는 1등 사악에만 내려주던 춤 이었다. 전문 악사와 향발 무동, 처용무 의 춤 그림은 이 잔치 때 숙종이 1등 사 악을 내려주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도판 10-2>는 잔치에 참여한 자제 들의 춤으로 보인다. 「선묘조 제재 경 수연도」 와 「칠태부인경수연도 」에서 자 제들이 두 명씩 짝을 이루어 춤을 추었 다면, 「담락연도」 에서는 짝을 이루어 춤추는 자제가 세 쌍으로 그려졌다. 가 족 간의 행사이니 좀 더 형식을 유연하 게 하여 세 쌍의 자제가 동시에 춤을 추는 장면을 그린 듯하다. 횃불을 들고 있는 자들이 있으니, 시간적 배경은 저 녁이다. 횃불을 밝히고 춤을 추어 잔치 의 흥겨움을 더했던 장면이다. 이 춤을 보는 관객석은 조금 떨어진 실내 공간 이다. 높은 단 위에 세워진 건물 안에서 주렴을 드리우고 여성들이 잔치의 춤판 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다.
IV. 풍속 공간의 춤 그림
조선시대 풍속 공간의 춤 그림 중에 주인공이 분명한 그림만을 대상으로 하여, 회혼례와 평생도에 나타난 춤 그림을 살펴보겠다.
1. 회혼례의 춤
회혼(回婚)은 혼례를 치르고 60년이 지난 해로, 회근(回巹)이라 했다. 대신의 회혼례 때 에 임금이 악을 내려주어 축하하는 경우도 있었다(조경아 2016, 91). 회혼을 맞이하려면 부부 모두 장수해야 하므로, 평균수명이 짧았던 조선시대에 회혼례로서 드물고 귀한 경사 를 기념했다. 홍익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회혼례도(回婚禮圖)」 는 1857년 회혼례 주인공 의 자식인 여흥 민씨가 제작한 8폭 병풍으로(국립국악원 2002, 227) 춤이 등장한다.
그림의 서문에는 정사년(1856)에 부모가 각각 76세, 78세로 회혼을 맞아 친척들을 초대 하여 축하연을 베풀었는데, 이 드문 경사를 평생토록 감상하고 후손들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채색 병풍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부모님의 회혼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화원 을 불러 8폭 병풍을 제작할 정도의 재력과 벼슬을 가진 자였다(박정혜 1992, 140-141).
회혼례의 잔치 공간은 개인 집 마당에 이단 덧마루를 깔아 공간을 확장하여 마련했다. 하늘 높이 차일을 드리우고, 뒤쪽에 병풍을 설치하여 일상 공간을 잔치공간으로 변화시켰 다. <도판 11> 병풍 앞쪽에 잔치의 주인공인 부부가 자리했다. 부부 앞에는 푸짐한 잔칫상 이 각각 놓여졌다. 중앙에서 아들 내외가 머리에 꽃을 꼽고 술잔을 올리는 장면이 보인다.
덧마루 끝에는 1명이 춤추고 있는데, 모습이 매우 독특하다. 마치 광대처럼 상의는 알록 달록한 옷을 입고 하의는 누런 바지를 입었는데, 벌린 두 팔의 오른손 위에 새가 앉아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알록달록한 채의를 입고 춤추는 이 사람은 잔치 주인공의 아들이며, 중국 고사 속의 ‘노래자(老萊子)’처럼 꾸민 것이다. 노래자는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효자 로 중국 24효자 중의 한 사람이다. 『소학(小學)』「계고(稽古)」 제4편 14장에 노래의 효성 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노래자는 두 어버이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그는 나이 칠십에 아이들의 장난을 하여 몸에 오색 무늬의 옷을 입었으며, 일찍이 물을 떠가지고 당에 오르다가 거짓으로 넘어져 땅에 엎어 져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냈으며, 새 새끼를 부모 곁에서 희롱하여, 부모를 기쁘게 하고자 하였다(성백효 역주, 1993, 222). 老萊子孝奉二親, 行年七十, 作嬰兒戱, 身著五色斑斕之衣, 嘗取水上堂, 詐跌仆臥地, 爲小兒啼, 弄雛於親側, 欲親之喜. (『小學』「 稽古」14장).
칠십에도 늘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여 부모님의 기쁘게 해드리려 했던 초나라 노래자의 고사는 이야기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도판 11>처럼 춤으로 형상화되었다. 박정혜 (1992)에 따르면, 이 장면은 노래자가 칠십 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위해 색동 저고리를 입고 까치 새끼를 가슴에 안은 채 부모 앞에서 비틀비틀 걷다가 새를 안은 채 엎어져서 우는 시늉을 하여 웃음을 잃은 부모를 웃게 만들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141). 노래자가 입은 옷을 ‘노래의(老萊衣)’, 혹은 ‘채의(綵衣)’라 했고, 노래자의 춤과 재롱은 ‘노래지희(老萊之戱)’라고 하여 모두 ‘효자’를 지칭하는 말로 조선시대에 통용되었 다. <도판 11>에서 홀로 춤추는 아들은 ‘노래자’가 되어, 회혼례의 주인공인 부모님께 춤과 재주로서 기쁨을 드리고자 했던 것이다. 앞의 그림에서 부모에게 올리는 헌수 잔치 때 자 제들이 짝을 지어 춤추는 경우도 노래자의 고사와 무관하지 않은데, 이처럼 ‘채의’라는 의 상과 ‘새’라는 소품까지 갖추어 노래자 고사를 본격적으로 재현한 것이 매우 이채롭게 느 껴진다.
자식으로서 노래자처럼 되려는 것은 왕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축)진찬의궤』에 기록 된 1827년 순조의 40세 생신 때 효명세자가 지은 장생보연지무의 창사에도 “세 번째 소원 은 천상의 음악에 노래의(老萊衣) 입고”(송방송, 조경아, 이재옥, 송상혁 2007, 149)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홍재전서』 권28 ‘윤음(綸音) 3’에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 때 정조가 ‘노래의장(老萊衣章)’을 노래하고 만수를 기원하는 술잔을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2. 삼일유가(三日遊街)의 춤
평생도(平生圖)는 개인의 일생에서 큰 의미를 지닌 몇 가지를 병풍에 그린 그림인데, 과 거합격 후 거리를 행진하는 삼일유가의 장면에 춤이 그려졌다. <도판 12>는 담와(淡窩) 홍계희(洪啟禧, 1703-1771)의 일생을 6폭 화폭에 담은 「담와홍계희평생도 」이며, 18세기 에 김홍도가 그린 작품이다. 이 병풍에는 영조가 봉조하 홍계희에게 하사했다는 별지가 붙어있었다. 원래 8폭이었으나, 현재는 6폭만 전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1폭 삼일유가, 2폭 수찬행렬, 3폭 평양감사 부임, 4폭 좌의정 행차, 5폭 치사, 6폭 회혼례가 그려졌으며, 돌잔치와 혼인을 그린 부분이 소실되었다(국립국악원 2002, 229).
<도판 13>는 1781년에 김홍도가 모당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의 일생을 8폭 병풍 에 그린 「모당홍이상평생도 」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제3폭에 삼일유가의 춤 이 있다(국립국악원 2009, 229-230).
<도판 12>와 <도판 13>은 모두 김홍도가 그린 삼일유가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도판 12>는 거리 행진을 마치고 건물 마당에 도착한 장면이라면, <도판 13>는 거리를 한창 행진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두 그림에서 급제자의 모자에 긴 어사화를 꽂은 자가 삼 일유가의 주인공이다. 급제자 앞에 공작 깃털과 채화를 꽂은 두 명의 광대가 서 있는데, <도판 13>에서 부채를 펼쳐들고 춤을 추는 모습이다. 그 곁에 길게 머리를 땋아 내린 광대 가 보인다. 구경꾼도 가득했다.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경도잡지(京都雜誌)』「풍 속」 ‘유가(遊街)’ 조에서 조선후기 삼일유가의 풍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소과나 대과의 합격자가 나오면 거리 행진을 하는데, 세악수(細樂手)·광대(廣大)·재인(才 人)을 딸린다. 광대란 창우(倡優)를 말한다. 비단 옷에 누런 초립(草笠)을 쓰고 채화(彩花)와 공작 깃털을 꽂고 현란하게 춤추며 재담을 늘어놓는다. 재인은 줄을 타고 재주를 넘는 등 온갖 유희를 벌인다(국립민속박물관 2021, 46). 進士及第放榜遊街, 帶細樂手·廣大·才人. 廣 大者, 倡優也. 錦衣·黃草笠·揷綵花孔雀羽, 亂舞詼調. 才人作踏索筋斗諸戱(유득공 연대미상, 유가).
『경도잡지』에 소개된 삼일유가에서 ‘비단 옷에 초립을 쓰고 채화를 꽂고 공작 깃털을 들고 현란하게 춤추며 재담을 늘어놓는 모습이 <도판 12>와 <도판 13>의 장면이다. 개인 의 일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의 하나인 과거 합격의 기쁨을 만끽하며, 널리 알리는데 춤이 함께했다. 조선 사람들의 풍속에는 한 개인으로서 가장 행복한 때에 춤으로 기쁨을 더했고, 그 장면을 그림에 담아 오래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했다.
V. 맺음말
이 글의 연구목적은 조선시대 개인공간의 춤 문화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읽고자 하는 것이다. 연구내용은 세 가지였다.
첫째, 개인적인 친목 공간에서 추었던 춤 그림을 대상에 따라 노인 친목 모임, 과거 동기 모임, 중인 친목 모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조선시대에는 공동체를 견고히 하는 친목 모임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전문 춤꾼인 무동의 춤을 향유하기도 했다. 지역 양반 노인의 친목모임이 담긴 「십로계축」 에서 자신의 일생을 한 장으로 압축하여 그릴 때, 춤추는 모습 으로 그려진 경우가 있었으므로 양반의 일상에서 친숙하게 춤을 즐겼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간 춤역사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중인의 춤 향유에 관해서는 「수갑계첩」 과 「기로세련계 도」 를 통해 세력과 재력이 있는 중인들이 양반처럼 춤을 향유했음을 이 글에서 부각시키고 자 했다. 춤 공연자로서 무동은 사적공간에서도 공연했고, 지역적 활동 범위는 의주와 개 성 등으로 확장된 것이 그림에서 나타났다. 무동이 지역에서 했던 공연활동도 앞으로 연구 할 과제로 도출되었다.
둘째, 개인 단위에서 부모님의 장수를 축하하는 헌수 공간에서 추었던 춤이 나타나는 그림을 살펴보았다. 헌수 공간에서 잔치의 주인공이자 춤의 관객으로 어머니가 중요했다. 자식들이 계모임을 결성하여 10명의 어머니께 헌수를 올린 「경수연도첩」 에서는 잔치의 주 인공인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졌으며, 「담락연도」 에서도 여성이 남성과 함께 잔치에서 춤 을 즐기는 관객이 되어, 조선시대에 양반 여성도 춤을 향유했던 단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효’를 강조한 시대적 관념이 ‘자제의 춤’으로 외형화 되어 중·장년의 자식이 노모를 위해 짝지어 춤추는 모습도 「칠태부인경수연도」 와 「경수연도」 에서 확인하였다. 양반 남성은 스 스로 춤을 추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셋째, 풍속 공간에서 실명이 등장하는 춤 그림을 탐색했다. 부모님의 회혼례 때 자식이 ‘노래자’처럼 모습을 갖추어 춤을 추었고, 삼일유가에서 광대가 춤으로 영광의 기쁨을 더하 는 것도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춤 그림을 통해 조선시대의 춤 문화를 살펴본 결과, 조선시대에 양반과 중인의 개인적이 고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 춤 문화가 매우 깊숙이 내면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춤이 담긴 그림이 더 많이 있었으나, 구체적인 실명을 알 수 있는 그림만 이 글에 담았다. 실명을 모르지만 당대의 춤을 담은 더 많은 그림들은 추후 별도로 논의하기로 한다. 앞으로도 좀 더 풍부한 삶의 이야기가 담긴 춤 자료를 찾아, 우리 춤 역사를 풍성하게 서술하는데 보탬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