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1)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제프 바이어(Josef Bayer)의 발레 「한국의 신부(新婦)」는 1897년 5월 22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K. k. 궁정오페라극장(Kaiserlich-königlich Hof-Operntheater, 이하 궁정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발레는 청일전쟁(1894/95)을2) 배경으로 한 한 국왕자와 그의 신부 다이샤의 사랑 이야기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허구 적인 이야기이다.3) 여자 주인공 다이샤는 사랑하는 왕자를 쫓아 소년선원 옷을 입고 변장 하여 전쟁에 따라 나선다. 그녀는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왕자를 구출하기 위해서, 일본 장교와 군인들의 괴롭힘도 견딘다. 그들은 여러 가지 위기에 직면하지만 이겨낸다. 결국 이 둘은 서울에 있는 한국왕자의 정원으로 돌아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며 해피 엔딩으로 막이 내린다. 「한국의 신부」는 당시 음악, 연출, 안무 등 모든 분야에서 비엔나 언론의 극 찬을 받았다. 그러나 1901년 5월 2일 38번째 공연을 마지막으로 「한국의 신부」는 비엔나 궁정오페라극장의 발레 공연목록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 세기동안 잊혔던 이 발레는 2003년 동아일보 유윤종 기자로부터 국내에 소개되었고, 2012년 당시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에 재직했던 박희석 박사가 로버트 리나우 (Robert Linau) 출판사 문서고에 보관되었던 오케스트라 육필총보(수기로 작성된 오케스 트라 악보)를 발견하면서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4) 2013년 2월 당시 국립 발레단 최태지 단장은 「한국의 신부」 공연 복원 제작계획을 발표했으나(신정선 2013), 이 듬해 강수진 단장이 취임하면서 공연이 무산되었다(연승 2016). 이와 관련하여 국내 언론 과 학자들은 의구심을 제기했다. 자세한 내막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필자는 그 까닭이 ‘자 료 부족’에 있었다고 본다. 「한국의 신부」의 무보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안 무를 완전히 새로 창작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요구된다. 대본과 악보의 일치작업이 완료되 어야 극의 흐름을 파악하기 용이하다. 박희석이 발굴한 육필총보는 작곡가의 흩날리는 필 기체(옛 독일 법원 기록소에도 사용됐던 쥐테를린 필기체)로 기록되었고, <도판 1>에서 볼 수 있듯이 개별악기를 위한 파트보도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 지휘자와 연주자가 읽기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공연 복원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악보의 현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만 하 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2020년 로버트 리나우 출판사5)는 주오스트리아 한국대사관 문화홍보관과 대한민국 문 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오케스트라 악보의 복원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21년 봄 출판사 쇼트 뮤직(Schott Music)에서 필립 크뤨(Philipp Kröll)의 책임 편집으로 현대판 오케스트 라 총보와, 다리우스 하이제-크리츠톤(Darius Heise-Krzyszton)의 편곡으로 피아노 판이 출판되었다. 크뤨(2021)에 따르면 이번 출간의 목적은 「한국의 신부」를 가능한 작곡가와 저자의 의도에 맞게 완전하고 원형 그대로 복원하며, 총보를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이 다. 그는 출간된 대본 텍스트와 육필총보를 세밀하게 비교하여 등장인물의 행위, 인물 배 치, 조명 색상에 대한 안내까지 현대판 총보에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이것은 한 세기동안 잊혔던 발레 「한국의 신부」가 온전한 공연으로 복원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발레 「한국의 신부」의 공연 복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현재까지의 자료와 더불어 그간 새로 발견된 사료들을 해제하고 그 의미를 고찰하는데 있다. 연구의 내용은 역사적 개괄, 작품의 구성, 작품의 특징, 발레 중단의 원인 네 부분으로 나뉜다. 이 연구에 언급된 오스트리아 옛 신문기사는 모두 오스트리아 국립박물관 디지털 자료실 에서 수집하였고, 필자가 한국어로 번역 했으며, 해당 원문을 각주에 첨부하였다. 등장인물 사진은 오스트리아 극장박물관 홈페이지에 공개된 자료를 갈무리했다. 연구에 참조한 현 대판 악보와 육필총보 악보 예는 각각 비엔나 한국대사관 문화홍보관과 쇼트 뮤직의 허가 를 받아 사용되었다.
Ⅱ. 역사적 개괄
1. 제작자들
「한국의 신부」는 당시 비엔나 궁정오페라극장 발레 단장이자 상임지휘자(Kapellmeister) 이었던 요제프 바이어(Josef Bayer, 1852-1913년)가 작곡하고, 대본은 극작가 하인리히 레 겔 (Heinrich Regel, 1869?-1934년)과 무용 단장이자 안무가였던 요제프 하쓰라이터(Josef Haßreiter, 1845-1940년)가 함께 작성하였다. 의상 감독은 프란츠 자버 가울(Franz Xaver Gaul, 1837–1906년)이, 무대 감독은 안톤 브리오쉬(Anton Brioschi, 1855-1920 년)가 맡았다. 이들은 비엔나 궁정오페라단에서 「한국의 신부」 뿐 아니라 「인형요정」 (Puppenfee)과 같은 여러 발레들을 공동 제작하며 명성을 날렸다. 1897년 5월 26일 『세계 일보』(Welt Blatt)에 따르면 바이어, 레겔, 하쓰라이터는 당시 비엔나 궁정오페라 발레단의 “발레트리오”라고 불리곤 했다.
작곡가 바이어는 궁정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음악 경력을 시작 했다. 그는 1883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우스 암 링(Haus am Ring)의 발레 지휘자 로 일했다. 바이어는 1880년대 초에 오페레타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나, 발레 음악 작곡가로서 더 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인형요정」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Oberzaucher and Janick 2021).
극작가 레겔은 1895년 베를린 음악출판사 중 하나였던 슐레징어 (Schlesinger)에서 「한 국의 신부」 대본을 먼저 출판했다. 이를 미루어보아 레겔은 언론을 통해 한국에서 일어나 는 전쟁 소식을 접하면서, 동시에 대본을 썼다고 짐작된다. 레겔이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 는 다른 자료는 오스트리아 여행가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Ernst von Hesse-Wartegg, 1851-1918년)이 1894에 저술한 한국 여행기 『한국,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떠나는 여름 여행』 (Korea. Eine Sommerreise nach dem Lande der Morgenruhe)이다.6) 헤세-바르텍 의 여행기에서 자세히 묘사되었던 제물포, 아편굴, 해녀, 신관(神官)7), 활쏘기, 부채 등이 발레의 한국적 배경을 구성한다.
대본과 안무를 맡은 무용 단장 하쓰라이터는 구스타브 카레이(Gustave Carey)와 지오반 니 고리넬리(Giovanni Golinelli)와 함께 비엔나에서 공부한 후 독일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에서 수석 무용수로 활동했다. 그는 1870년 비엔나 궁정오페라극장 발레단에서 수석 무용 수로, 1889년부터 1919년까지 무용 단장으로 재직하며 안무가로서 기여했다. 하쓰라이터 가 대본가로서 공식적인 데뷔를 한 작품은 1888년 바이어가 작곡한 발레 「인형요정」이었 다. 그는「인형요정」의 대본을 미술 감독 가울과 함께 작성했는데, 이 작품의 성공으로 인 해 이들은 지속적인 공동작업을 할 수 있었다(Oberzaucher 1987).
2. 성공적인 첫 시즌과 시암 왕의 발레 관람
「한국의 신부」초연 3개월에 앞서 비엔나 언론들은 공연 준비 상황과 리허설 일정, 출연 진을 상세하게 보도했다.8) 1897년 2월 13일 일간지 『신비엔나일보』(Neues Wiener Tagblatt) 4쪽에서 「한국의 신부」가 새 시즌 공연으로 소개된 것을 시작으로, 1897년 5월 21일 초연 전날까지 총 57개의 기사에서 다뤄졌다. 1897년 5월 9일 격주지 『비엔나살롱신 문』(Wiener Salonblatt) 19쪽에서는 전체 출연진의 역할과 이름을 공개하며 공연을 크게 홍보했다. 1897년 5월 22일에 초연된 발레 「한국의 신부」는 첫 1897년 6월 12일 시즌이 끝날 때까지 10회 반복되었다.
1897년 6월 19일 일간지 『신자유언론』(Neue Freie Presse)에 수록된 기사에 따르면 원 래 6월 19일에 첫 시즌의 갈라 공연이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연에 참석하기로 했던 시암(태국의 옛 이름)의 왕이 6월 23일에야 도착하는 바람에 발레에 고용된 모든 예 술 및 기술 스태프들이 11일 동안 비엔나에 더 머물러야만 했다고 알려진다(Regel 1933). 당시 시암 왕이었던 쭐랄롱꼰(Chulalonkorn, 1853-1910년)은 1897년 4월 초부터 1897년 12월 16일 까지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했고 로마에서 비엔나를 거쳐 부다페스트로 가는 일정에 있었다(Regel 1933). 아시아에서 온 국빈(國賓)에게 자국(自國)이 제작한 ‘아 시아적 공연’을 선보인다는 것은 외교적으로나 공연 역사적으로나 의미가 컸다. 비엔나 궁 정 관계자들은 그들이 ‘아시아 문화’에 갖는 관심과 존중을 공연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이는 오늘날 외교 사절단에게 자국이 가진 상대국의 예술 작품을 보여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필자는 「한국의 신부」의 제작자들이 쭐랄롱꼰의 방문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 다고 생각한다. 이에 공식적인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발레에 포함된 ‘시암 춤’이 그 흔적에 해당한다고 본다. 발레의 8장과 9장 “서울, 한국 왕자의 차 정원에서” 왕자와 다이 샤가 결혼식을 올리는데, 이 때 부채춤(Fächerspiel)과 신부의 춤(Brauttanz) 사이에 ‘시암 춤(Siamesischer Tanz), 일본 춤(Japanischer Tanz), 자바 춤(Javanischer Tanz)’이 등장한 다. 이 부분은 총보에서 소제목이 없이 I, II, III 이라는 기호로만 표시되고, 이 세 개별무용 은 악보에서 건너뛰는 음의 시작과 끝을 표기하는 vi-de를 추가하여 경우에 따라 부채춤에 서 신부의 춤으로 바로 넘어갈 수 있도록 했다. 결혼식 하객으로 등장하는 여러 나라의 춤은, 주요 등장인물인 한국인들과 몇몇 일본군, 중국군으로 구성되는 극의 줄거리와 크게 개연성이 없다. 게다가 이 부분을 생략 가능하도록 묶고, 총보에 이 세 나라를 일컫는 무용 제목이 따로 언급되지 않는 것을 미루어보아 시암 춤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하객 장면은 작품의 1차 제작이 끝난 후 추가로 첨부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암 춤이 쭐랄롱꼰 방문의 예우(禮遇)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사실인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3. 의상
레겔은 시암 왕이 공연 관람 후 군복과 장비, 민간인들이 입는 의상의 고유성(Echtheit) 에 거듭 놀라움과 감탄을 표했다고 회고한다(Regel 1933).9) 발레 제작자들은 일본과 중국 의 군무관들에게 극에 사용될 군사 무기와 제복 분장에 조언을 구했고, 의상은 차(茶) 상인 이 그들의 고향에서 직접 가져와서 배달해 주었으며, 그 의상들이 매우 화려했음에도 불구 하고 터무니없이 저렴한 가격에 얻을 수 있었다고 기록된다(Regel 1933).10) 당대 여러 신 문 기사에서 언급되었듯이 「한국의 신부」는 의상과 장식에서 많은 관객들에게 이국적인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것들은 그들이 단순히 상상만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의 신부」 제작자들은 발레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의 등장인물의 의상을 최대한 그 나라의 원형 에 가까운 것으로 구현하려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자료<도판 2>는 지관(地官, Haus-Geoskop 하우스 게오스코프, 뜻: 집-땅점을 치 는 사람), 한국의 신부(다이샤)와 한국의 왕자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이 의상이 정확히 한 국에서 온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건너온 것을 변형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여주인공 다이샤가 든 접이식 부채와 같은 소품이 4막의 단체 무용 부채 춤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앞의 두 사진<도판 3>은 한국의 신부 다이샤역을 맡은 여주인공 이레네 시로니(Irene Sironi)의 공연 프로필이다. 왼쪽 의상은 제 1막 1장에서 다이샤가 그녀의 아버지이자 왕자 의 신하인 리타미를 따라 왕자에게 인사하는 장면, 즉 왕자를 따라 전쟁에 나서기 전의 모습이고, 극중 일상복을 착용한 모습이라 생각된다.11) 오른쪽 의상은 마지막장의 결혼식 장면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두 의상엔 한국적인 흔적이 거의 없다. 왼쪽의 경우 머리 위에 작은 부채 장식을 달고 우산을 들게 하여 아시아적인 분위기를 주었으나, 신부 복장 의 다이샤는 전혀 한국적이지 않다. 이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두 가지 원인은 다음과 같다. 여주인공을 무엇보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굳이 한국 복장을 구현하지 않았거 나, 또는 제작자들이 한국에 대한 자료와 정보 부족했던 경우이다. 필자는 뒤의 가설에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엔 다음 두 이유가 따른다.
첫째, 「한국의 신부」의상을 담당했던 가울은 앞서 바이어의 다른 발레 「인형요정」 (1888) 에서 대본과 의상디자인으로 참여했다. 가울의 「인형요정」 복장 스케치에 등장하 는 중국인형과 일본인형은 서로 옷, 머리장식, 부채와 소품 모양에서 명확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가진다.12) 이 두 나라 뿐 아니라 다른 민족의 의상들도 그들의 전통을 따라, 모두 다르게 디자인했다. 이는 의상의 고유성과 원본재현의 완성도 여부를 떠나, 각 민족 복장 의 다양성을 표현하려 했던 가울의 의도를 보여준다. 가울은 의상감독으로서 이국적인 분 위기를 띄는 복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각국의 전통과 가까운 복장을 재현했다. 둘째, 이런 맥락에서 아래 사진에 나타는 왕자, 일본장교, 신부의 복장은 의상을 디자인했 던 가울이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참고자료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는 추론을 뒷받침 한다. 이 장면에서 왼쪽에 무릎을 꿇은 왕자는 일본장교에게 포로로 끌려간 상황인데, 중국 분위 기의 옷을 입고 있다. 이를 못마땅하게 보는 다이샤는 왕자를 구하기 위해 직접 일본군 진영으로 들어간 일본 여성으로 변장한 종군 상인 역할이다. 전작 「인형요정」에서 관찰된 가울의 의상 제작 스타일을 미루어보아, 「한국의 신부」에 전통적인 한복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4. 공연 중단 이후에도 계속된 인기
「한국의 신부」는 1897년에만 총 27번 공연되며 성공적으로 두 시즌을 보내고 이듬해 1898년에는 6회 재연되었다. 1899년 1월 1일 함부르크에서 독일 초연이 이뤄졌고, 총 14 번 공연되었다. 1899년 비엔나에서 3월 8일과 8월 8일에 재 공연되었으며, 1901년 3월 15일, 4월 14일, 5월 2일을 끝으로 총 38회 비엔나 궁정오페라극장 발레 레퍼토리에 더 이상 기록되지 않는다. 공연이 중단된 이유를 밝히는 것에 앞서, 「한국의 신부」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필자가 오스트리아 국립박물관 고 신문 자료보관소에서 검색한 결과로는 1897년 2월부 터 1943년 3월 11일까지 신문 1134건, 잡지 21건에서 「한국의 신부」가 언급되었다(2021 년 10월 30일 기준). 공연 기간이었던 1897년과 1901년 사이에 1017건의 기사가 집중된 다. 그 이후 시기의 기사들은 제작자와 발레단의 역사 관련 기사, 음악회의 연주곡목, 라디 오방송 음악목록 세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특히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 빈’(Radio Wien) 의 방송예고(Programmvorschau)에 소개된 「한국의 신부」 단편들(Fragmente aus dem Ballett Die Braut von Korea)을 비롯한 발레의 다양한 개별 곡목 연주기록들이 눈에 띈 다.13) 이는 마지막 공연 이후 「한국의 신부」가 비엔나 무대에서 어떤 방식으로 지속되었는 지에 대해 다음 두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비록 「한국의 신부」의 발레공연은 중단 되었지만, 기악 연주로 여전히 무대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둘째, 악곡의 단편이 라디오방송 에 송출되었다는 것은 이 연주의 녹음기록이 오스트리아에 남아있을 가능성을 뜻한다.
이에 더불어 박희석(2014)의 연구 부록에서 언급된 과거 출판된 「한국의 신부」악보집들 은 이 작품과 음악이 대중에게 큰 관심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피아노 솔로 버전으로 편곡 된 8곡14)의 난이도는 비교적 쉬운 편인데, 전문 연주자가 아닌 취미 연주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박희석(2014)의 연구에 따르면 당대 작곡가 바우어(Bauer)의 편 곡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 2주중 4곡15),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플룻, 트럼펫, 클라리넷 앙상블 편곡으로 3곡16)이 출판되었다.
Ⅲ. 작품의 구조
「한국의 신부」는 4막 9장 구성으로,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편성되었다. 비엔나 극장 공연 기록보관소에 따르면 초연 당시 주요 역할을 맡은 무용수는 30명 이상이었다. 바이어의 육필총보는 543쪽이고, 공연시간은 약 2시간 반 이었다. 새로 복원된 오케스트라 총보는 353쪽으로 구성되었고 총 1178마디이다.
총보에 기록된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Shott 2021). 한국의 왕자(Der Prinz von Korea), 왕가의 오랜 신하 리타미(Ri-ta-mi, ein alter Diener des fürstlichen Hauses), 리타미의 딸 다이샤(Daisha, seine Tochter), 아편굴의 남자 종업원(Ein Diener in der Opiumhöhle), 아편 굴의 여자 주인(Die Prima der Opiumhöhle), 지관(地官, Der Haus-Geoskop), 사랑의 여신(Die Göttin der Liebe), 한국 왕자의 대조 형체(Contrafigur des Prinzen von Korea), 신문팔이 소년(Ein Zeitungsjunge), 러시아 종군 여기자(Die russische Kriegsberichterstatterin), 청나라군 장군 태이턍(Der chinesische General Tei-Tyang), 독일 지휘부 출신의 하사관(Ein Unteroffizier von der deutschen Instructionsabteilung), 일본군 보병 장교(Ein japanischer Infanterie-Offizier), 보초(Ein Wachposten), 일본 장군(Der japanische General), 아편굴의 손님들(Gäste der Opiumhöhle), 7명의 무용수들(7 Tänzerinnen), 16명의 붉은 사랑의 여신들 (16 rothe Liebesgöttinen), 연꽃의 형상을 한 12명의 아이들(12 Kinder als Lotusblumen), 한국 백성들(Koreanisches Volk), 진주잡이 해녀들(Perlmuttertaucherinnen), 한국 청년들 (Junge Koreaner), 태이턍 장군의 측근들(Gefolge des General Tei-Tyang), 일본 군인들 (Japanische Soldaten), 한국 군인들(Koreanische Soldaten), 타타르인들(Tartaren)[sic]17), 중국 친위대들(Chinesische Garde), 첨탑들(Pagoden).
각 장면의 제목과 주요 무용은 아래 표와 같다.
Ⅳ. 작품의 특징
1. 낯선 나라 한국의 당대에 주목
레겔과 바이어가 그들 입장에서 낯선 나라 한국을 주제로, 그것도 최근 사건을 자신들의 관점으로 다뤘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1890년대 발레 작품에서 이러한 시도는 쉽지 않았 을 것이다. 아마도 극작가, 작곡, 감독, 무용가 모두가 많은 상상력과 노력, 연구가 필요했 으리라 생각된다. 발레 「한국의 신부」를 통해 비엔나 관객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로맨틱한 이야기와 현시대의 실제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다(Neues Wiener Tagblatt 1897). 제작자 들이 어떤 이유와 경로로 한국을 접하게 되었는지 당대 상황과 주변 관찰이 더 요구된다.
2. 자기주도적 여성상의 제시
여주인공 다이샤의 긍정적이고 자기주도적인 태도가 눈에 띈다. 그녀는 연인(왕자)을 마 냥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여성이 아니었다. 다이샤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함께 전쟁에 나설 용기도 있었다. 그녀는 일본 진영에서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장교와 군인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포로로 잡힌 왕자를 구하기 위 한 다이샤의 신중한 태도였다. 「한국의 신부」에 나타난 다이샤는 매우 진취적이고 지혜로 운 여성으로 그려졌다. 특히 여주인공의 남장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독일어권의 연극과 오페라에서 유행하던 소재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18)
3. 풍성한 다문화적 볼거리
이 발레는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볼 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발레에는 중국 춤, 옛 일본 전쟁 춤, 시암(태국의 옛 이름) 춤, 자바 춤과 같이 소제목에 국가이름이 언급된 개별무용이 등장한다. ‘한국 춤’이라는 이름을 가진 춤은 없지만, 제 4막 ‘서울, 한국 왕자의 차 정원’에서 왕자와 다이샤가 추는 춤을 한국의 것으로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추측된 다. 여러 나라, 먼 나라의 춤과 의상들은 비엔나 청중들에게 큰 흥미를 주었을 것이다.19)
4. 한국적인 요소의 이해와 한계
「한국의 신부」는 당시 비엔나 사람들이 한국과 한국적인 요소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를 사용하여 공연예술로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여준다. 제 4장 ‘제물포항에서’는 조선 후기에 개항했고, 현재는 인천으로 불리는 제물포, 즉 실제 지명을 배경으로 한다. 제 2장 ‘아편굴 에서’ 등장하는 남자 ‘하우스-게오스코프’는 풍수(지리)나 천문학적 배경으로 궁궐에서 점 성술을 행했던 지관이라고 생각되며, 서양의 점성술인 호로스코프(Horoskop)와 대비된다. 이 발레는 왕자와 신하들의 궁중의상 뿐 아니라, 한국의 평민 의상, 군복 등 한국과 동아 시아 나라들(중국과 일본)의 다양한 의상을 선보였다. 1897년 공연 당시에는 총 300개 이 상의 의상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로부터 발레의 화려하고 성대한 규모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언론』(Neue Freie Presse) 11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이 의상들은 단지 “일본과 중국의 의상”(das japanisch-chinesische Kostüm)이라고 소개되었다. 여기에 예상되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제작팀이 한국의 실제 전통의상을 구하거나 재현할 수 없 었거나, 1890년대 후반 비엔나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다.
이 발레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잘못 해석된 부분들이 나온다. 제 1장의 “중국 교외의 서울”이라는 표현과 “한국군을 이끄는 중국 장군” 같은 장면 묘사는 레겔이 한국을 중국에 속한 나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또한 제 2장 ‘아편굴에서’ 등장하는 ‘아편 굴의 프리마’는 당시 프로그램북에 “가이샤”(Gaisha)라고 언급되는데, 이는 일본 기생인 게이샤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등장인물 중 ‘리타미’, ‘다이샤’, ‘태이턍’만 명확한 이름이 제시되었다. 이 중 리타미와 다이샤는 한국인이지만 한국 이름이 아니다. 제작자들은 이국 적이면서 아시아적으로 들리는 이름으로 지었다고 생각된다.
바이어의 음악에는 한국(또는 동아시아적인) 악기가 편성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통리 듬(장단)이나 전통음계 등 세부적인 한국 음악적 요소도 거의 찾을 수 없다. 바이어는 전쟁 장면을 반복되는 트럼펫의 전쟁신호, 4분의 2박자의 전쟁 춤, 어두운 단조 분위기의 연결 구 등으로 묘사했다. 바이어의 다른 발레 작품들과 비교하여 추측하건데, 「한국의 신부」에 있는 몇몇 멜로디는 당시 비엔나 청중들의 귀에 ‘이국적’으로 들릴 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제 1막 왕의 신하인 리타미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먼저 완전5도 도약 이후, 단2 도, 증2도, 단2도로 하행하는 당김음의 다소 이국적인 선율이 연주된다(A, e, d#, c, b). 이에 뒤따르는 왕자의 등장에서는 장3화음 2분음표가 리타미의 선율 아래에 추가된다. 이 것은 마치 왕자의 품위 있는 느린 발걸음을 연상시킨다. 제 3막 ‘일본군 진영’과 ‘전투 장 면’에서는 4분의 2박자의 라단조와 다단조 음악이 울리며 어둡고 경직된 분위기가 가득한 전쟁 분위기를 만든다. 사랑이나 기쁨을 그리는 다른 부분은 귀엽고 부드러운 선율에 우아 한 반주가 흐르는 전형적인 비엔나 왈츠 풍으로 구성된다.
Ⅴ. 공연 중단의 원인: 정치적 ‘총격’
비엔나 궁정오페라극장은 1901년 5월 2일 공연을 끝으로 「한국의 신부」를 더 이상 무대 에 올리지 않았다. 이 사건의 원인을 둘러싼 전문가들의 다양한 추측이 있었다. 그 중 지금 까지 가장 유력했던 의견 중 하나는 박희석이 2014년 출간한 독일어 자료집 『한국의 신부』 (Die Braut von Korea)에 제시한, 1900년 말 비엔나 궁정오페라극장의 피아노 반주자였던 루베존(Rubesohn) 자매가 출판사와 작곡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걸었던 사건 이다. 박희석은 발레 음악의 개별 작품의 법률적 권리 다툼 때문에 발레 공연이 계속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유추했다. 그러나 이 소송은 「한국의 신부」 중단의 충분한 근거가 되기 어렵다. 1901년 이후 궁정오페라극장에서 「한국의 신부」의 발레 공연이 없었던 것은 사실 이나,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음악만 연주된 기록이 1937년까지 다수 남아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20년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이 디지털 자료로 소장하고 있는 19세기 신문과 잡지들에서 공연과 관련된 중요한 기사를 갈무리하고 분석하는 도중 「한국의 신부」 공연 의 갑작스런 중단을 뒷받침하는 사료들을 발견했다. 그 까닭은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아게 노르 마리아 아담 고우춉스키 백작 (Agenor Maria Adam Gołuchowski, 1849-1921년) 의 명령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인다. 이에 해당하는 3 가지 사료는 다음과 같다.20)
1. 1933년 잡지『무대』(Die Bühne)에 수록된 레겔의 회고문
「한국의 신부」의 대본을 작성한 극작가 레겔은 1933년에 오스트리아 공연예술 잡지 『무 대』(Die Bühne)에 “비엔나 발레의 전성기에서”(Aus der Glanzzeit des Wiener Balletts)라 는 4회의 기획기사를 연재했다. 레겔은 제 4편 위대한 시대(IV. Die große Ära)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국의 신부」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는 「한국의 신부」의 재정, 줄거리, 의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이어 글의 마지막 문단에서 발레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래 와 같이 밝혔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01년 4월 14일 독일 왕세자를 위한 테아트레 파레(Théatre paré)[일 반 대중에게도 열려있는 ‘갈라’ 또는 ‘축제행사’]에서 「한국의 신부」 가 공연되었다. 이 공연에 는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고우춉스키 백작도 참여했다. 그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발칸반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동시 개입으로부터 러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유명한 뮤르츠슈테그 우호 동맹을 체결했다. 장관은 발레의 일본 승리축제가 동쪽 이웃과[러시아] 간헐적인 동맹국들에 시위를 쉽게 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일본 승리축제 장면은 그가 높은 직위에서 발레 제거를 요구하도록 촉발시켰다. 그래서 이 외교관 이 예외적으로 - 대부분 외교관들은 발레에 적대적이지 않으나 - 발레의 명맥을 끊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Regel 1933, 54).21)
1901년 4월 14일, 독일의 왕세자를 기리는 축하행사에서 「한국의 신부」의 주요 장면과 오페레타 「시바의 여왕」(Die Königin von Saba)의 제 1악장이 함께 공연되었다. 이 날은 「한국의 신부」의 37번째 공연이자, 전체 38번 공연 중 유일하게 다른 작품과 혼합편성인 날 이었다. 문제가 됐던 ‘일본 승리축제’ 장면은 어떤 배경에서 고우춉스키가 오스트리아 와 러시아 양국 관계를 우려하게 만들었는가?
발레 제거를 명령했던 고우춉스키 백작은 1895년에서 1906년 사이에 오스트리아-헝가 리 제국의 외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러시아의 정책과 활동이 발칸 반도, 특히 불가리아로 확대 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는데, 러시아가 발칸반도를 석권하게 된다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이익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Gottas 2021).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진격에 반대하기로 결정한 고우춉스키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협력만이 발칸반도의 현 상 유지와 안정을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았다(Walters 1953/54). 그 결과 양국은 1903년 발칸반도에서 양국이 공동자치를 이루는 조건으로 뮈르츠슈테그 우호동맹(Mürzsteger Freundschaftsbündnis)을 협약하게 된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Kaiser Franz Josefs I.)와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우스 2세(Zar Nikolaus II.)가 사냥터 뮈르 츠슈테그에서 그들의 외무장관을 동행하고 나눈 대화로, 결의안의 이점은 주로 러시아 쪽 에 있었다. 고우춉스키는 본질적으로 현재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이 협약을 추진한 것이었 다. 그는 집권 당시 긴장 상태에 있었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관계를 완화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Walters 1953/54).
고우춉스키는 발레의 ‘일본 승리축제’ 장면이 그가 외교적 우호 관계를 추진하고 있었던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고 보았다. 발레의 배경이 된 제1차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했고, 이에 러시아는 일본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였다. 고우춉스키는 발레 안에서 일본 이 좋게 비쳐지는 장면을 우려한 나머지 발레를 제거하면서까지 외교에 힘썼으나 결과적 으로 러일전쟁(1904/05)에서 러시아는 일본에 패배했다. 1933년, 고우춉스키가 죽고 12년 후에서야 레겔은 이 사건을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22)
2. 1943년 4월 11일 일간지 『시대』(Die Stunde)의 기사
레겔은 그로부터 9년 후, 1943년 4월 10일에 사망했다. 다음 날 『시대』는 그의 부고를 알리는 기사에서 레겔이 비엔나 궁정음악을 위해 만들었던 작품들을 상세히 다루었다. 이 기사의 「한국의 신부」 공연 중단과 관련해 서술된 부분은, 앞선 레겔의 회고문을 쉬운 말 로 재편집 한 것으로 보인다.
몇 년 후 「한국의 신부」 는 [독일 왕세자의] 대관 기념식을 기회로 공연되었다. 공연에는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고우춉스키 백작도 참여했는데, 발레의 일본 승리축제 장면을 보면, 당시 일본과 갈등에 놓여있던 러시아에 대항한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 다. 이런 우려로 인해 고우춉스키는 ‘높은 자리’에서 발레를 제거하도록 시켰다. 사실「 한국의 신부」 는 단 한 번의 공연이 더 있은 후 레퍼토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결국, 발레에 적대적이 지 않은 구성원[발레에 호의적이라는 뜻]이었던 한 외교관이, 예외적으로 발레의 명맥을 자르 는 일이 벌어졌다(Die Stunde 1943).23)
위의 두 기사를 통해 고우춉스키는 ‘일본 승리축제’ 장면을 발레 전체 줄거리의 전후맥 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표면적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발레에서 ‘일본 승리축제’는 단지 지나가는 장면 중 하나일 뿐이다. 제3막 5장 ‘일본군 진영’에서 일본군들은 전쟁 영웅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왕자와 신부를 위험에 빠뜨리는 악당처럼 표현되었다.
3. 1943년 3월 11일 일간지 『신비엔나일보』(Neues Wiener Tagblatt)의 인터뷰
로즈 푸르-리마(Rose Poor-Lima)는 바이어 사후 30주년 기념으로 바이어의 딸과 인터 뷰를 진행했는데, 여기에 발레 중단과 관련된 또 다른 정보가 언급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신부”는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당시 상임지휘자는 현대해전[청일전 쟁]을 배경으로 하던 이 장비발레[화려한 시설이 사용된 발레]를 갑작스럽게 제거했다. 왜냐 하면 그는 총격이 너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Poor-Lima 1943, 3).24)
위의 내용에서 언급된 “총격(Schießerei)”라는 단어는 다소 은유적인 표현이라 생각된 다. 왜냐하면 「한국의 신부」가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발레이긴 하지만, 실제 음악에서 총 격장면이나 총소리를 묘사하는 부분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배경으로 당시 상황을 추론하기 위해서는 먼저 궁정 오페라극장의 책임자들의 관계를 관찰해야 한다.
1881년 1월 1일부터 「한국의 신부」의 제작 당시까지 궁정오페라 감독이었던 빌헬름 얀 (Wilhelm Jahn, 1835-1900년)은 「한국의 신부」를 마지막으로 1897년 10월 14일에 자리 에서 물러났다, 얀의 후임으로는 1897년 10월 15일에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년)가 취임했다. 「한국의 신부」 공연기간 동안 총 세 명의 상임지휘자(궁정오페 라 감독 아래의 지위)가 있었다.25) 위 기사에서 언급된 이는 말러의 조수였던 브루노 발터 (Bruno Walter, 1876-1962년)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모든 상황이 신경 쓰였을 것이다.26) 이 발레를 둘러싼 복잡한 정치 외교적 상황과 상부의 명령 때문에 발터 는 당연히 발레를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소 과장된 해석일지 모르나, 앞서 살펴본 레겔의 증언과 고우춉스키의 명령이 모두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높은 자리에서 일어난 정치적 ‘총격’으로 인해 발레가 제거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Ⅵ. 결론
「한국의 신부」는 19세기 말 비엔나 궁정오페라극장의 수많은 인기 발레를 제작해냈던 바이어, 레겔, 하쓰라이터의 작품으로, 당대 공연예술 중에서는 매우 드물게 전쟁과 한국을 소재로 한다. 이 작품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역사극’으로 이해된다. 등 장인물에 한국어 이름이 없는 것과 줄거리에 한국에 대해 잘못 묘사된 부분들은 제작자의 정보 부족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극에서 역사는 배경일 뿐 허구로 만들어진 예 술작품임을 상기해야 한다. 당시 한국은 유럽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음을 감안하 면 1897년에 한국을 제목에 내세우고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매우 독특하다 볼 수 있다. 특히 여주인공의 자기주도적인 태도는 당시 유럽 사람들이 생각했던 전형적인 아시아 여성상에서 보기 드문 캐릭터라 여겨진다.
본 연구는 「한국의 신부」 제반 사료 고찰을 통해 당대 비엔나 무대에서 작품의 위상과 갑작스런 중단 원인을 밝혔다. 이 작품은 제작 이전부터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아시아의 의상과 장식이 비엔나 관객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 의상과 소품들은 중국 과 일본의 차 상인들을 통해 직접 공수된 것으로 밝혀졌다. 본 연구에서는 대부분의 공연 소품을 사진으로만 관찰 할 수 있었으나, 당시 외국에서 수입된 진귀한 소품임을 고려하면 현재까지 비엔나 극장 자료보관함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된 다. 1901년 「한국의 신부」 공연 중단 이후에도 그 음악이 비엔나 라디오방송에서 송출된 기록과, 미국 빅터 레코드사에서 녹음된 사실, 다양한 편성의 편곡 악보가 출판된 것은 이 작품의 인기를 증명한다. 음반의 존재 여부가 추적되어야 할 것이며, 어떻게 이 작품이 미 국에 진출할 수 있었는지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발레의 중단 원인은 당시 외무장관이었 던 고우춉스키의 명령으로 밝혀졌다. 1900년 전후의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역사적 관점에서 심도 있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특히 인기 있던 발레의 명맥이 한 정치인의 명령으로 단번에 끊어지고 말았던 배경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특정한 정책이 더 있었는지는 구체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또한 비엔나 궁정오페라극장 감 독이 빌헬름 얀에서 구스타프 말러로 세대가 교체되는 과정에 또 다른 사건이 숨어있는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한다.
필자는 2013년 한국에서 계획된 공연 복원이 무산된 까닭을 자료 부족과 관계가 있다고 여겼고, 2021년 새로 복원된 현대판 오케스트라 총보가 공연 복원의 첫 단계라 보았다. 현재로선 무보가 남아있지 않기에 이 발레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복원된 오케스트라 총보에 등장인물의 동선과 조명, 감정선을 포함한 극의 내용이 매우 자세히 서술되었기에, 「한국의 신부」의 음악 재현을 넘어 무용의 현대적인 새로운 연출을 기대해 본다. 본고를 통해 검토된 사료가 공연 복원의 진척에 주춧돌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