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Society for Dance Documentation & History

pISSN: 2383-5214 /eISSN: 2733-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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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reliminary Study on Wage Structure and Dispute of Gisaeng in Japanese Colonial Era 일제강점기 기생의 임금 구조와 분쟁에 대한 시론적 고찰 : 1920-30년대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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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 Dance Journal Vol.63 No. pp.103-125
DOI : https://doi.org/10.26861/sddh.2021.63.103

A Preliminary Study on Wage Structure and Dispute of Gisaeng in Japanese Colonial Era

Lee, Jung Min*, Kim, Young Hee**
*Visiting professor, Suwon University
**Director, KYH Dance Institute
*

aquamin0207@gmail.com



**

sogochumm@hanmail.net


Nov. 01, 2021 Nov. 27, 2021 Dec. 29, 2021

Abstract


Through newspaper articles from the 1920s and 30s,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labor and wages of Gisaeng, a group of performers as a modern professional dancer and examines the cases of disputes and struggles facing changes in wage structure and tax system. The wage structure, income change and tax system of Gisaeng were defined, and the conflicts between Gisaeng and restaurants and between Gisaeng and call-offices were examined by region. The main reason of the wage disputes came from the disagreement between Gisaeng and restaurants regarding increase the rate of commission. Wage disputes between Gisaeng and call-offices were because of the unpaid wages by the call-offices. Gisaeng was a subgroup placed in the pyramid structure of labor organization - labor space - labor manager. Their income was distributed through three steps of deduction which are commission paid for restaurants and Gisaeng union as well as tax. However, facing unreasonable commission increase and overdue wages, they allied themselves through demonstrations and strikes to win their own rights and interests. This article broadens the base of research on modern professionals and makes a starting point of modern historical documentation and discussion on the rights, fair treatment, and working conditions of professional dancers.



일제강점기 기생의 임금 구조와 분쟁에 대한 시론적 고찰
: 1920-30년대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이정민*, 김영희**
*주저자 수원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객원교수
**교신저자 김영희춤연구소 소장

초록


이 연구는 근대 직업 무용가로서 예인의 한 군상인 기생의 노동과 임금에 주목하였고, 1920-30년대 신문 기사를 통해 기생의 임금 구조와 세금 체계,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된 변화의 흐름에 대처하기 위한 기생들의 분쟁과 분투의 사례를 고찰하였다. 연구 과정에 서 기생의 임금 구조와 수입 추이, 세금 체계를 밝혔고, 기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 기생과 권번간의 임금 분쟁을 지역별로 살펴보았다. 기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은 경성, 평양, 진남포, 안악, 진주, 인천, 수원 등지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주된 원인은 요리점에서 징수하는 수수료 인상에 대한 기생측과 요리점측의 이견(異見)이었다. 기생 과 권번 간의 임금 분쟁은 대구, 정읍, 신의주 등지에서 일어났고, 주된 원인은 권번측의 임금 미지급이었다.



예술 노동자로서 기생은 노동조직-노동공간-노동관리자의 피라미드 구조 속 하위 집단 으로, 이들의 수입은 요리점과 기생조합에 지불하는 수수료와 기생세 등에 따라 세 차례의 차감을 거쳐 배분되었다. 그러나 불합리한 수수료 인상, 임금 체불의 문제가 발생하면 이들은 동맹하여 분쟁, 시위, 파업의 방식으로 대응하였고 스스로의 권익을 쟁취하고자 투쟁하였다. 이 연구가 근대 직업 무용가로서 예인 연구의 저변을 확장하고, 직업 무용가의 권익과 대우, 노동 환경에 대한 근대사적 기록과 학문적 논의에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Ⅰ. 서 론

    무용가는 춤과 관련된 직무와 공연, 교육, 연구 등의 각종 활동을 수행한다. 고용노동부 워크넷(www.work.go.kr)의 “한국직업사전”에 따르면, 무용가의 직무를 “청중의 공연을 위해 혼자 또는 단체로 무용을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제도권에서 무용가는 직업으로서의 무용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지칭한다(박은혜, 유화정 2021, 60). 사회적으 로 ‘무용가’의 용어가 쓰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의 일이다. 1925년 러시아 와 일본의 무용가, 그리고 최승희 등 한국 신무용가에 대한 언급이 매일신보 등에 등장하 기 시작한 것이다. 즉, 무용가는 극장 무대를 위한 무용 작품을 안무, 공연하는 직업인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인식되며, 무용이 예술이자 학문으로 자리 잡은 오늘에 이른다.

    그렇다면, 무용가라는 직업군이 형성되면서 무용가들은 어떠한 직무를 수행하여 수입을 확보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을까. 무용가의 작품에 대한 논의와 별개로 직업인, 노 동자로서 근대 무용가들의 예술 환경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였으며, 관련 자료 또한 미비 하다. 다행히, 같은 시대 춤과 음악을 연마하고 공연하며 예술가로 살고자 한 여성들을 통 해 직업 무용가의 환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들은 기생이다. 무용가라는 직업군으로 불 리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의 기생에게 “가무 그것은 예술(유옥향 1927)”이었으며, 한국의 고전 가무(歌舞)을 계승하고 있는 스스로를 예술가로 여겼다. 또한 사회에 공헌하고 평등 사회 구현에 일조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신분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 굴하지 않고 가무를 갈고 닦는 예기의 본분을 다해야 함을 기생잡지 장한을 통해 공론화하고자 하였다.

    일제강점기 기생의 가무는 크게 두 영역에서 연행되었다. 요리점이나 잔치에서 하는 놀 음으로서 가무가 있고, 극장이나 공공 행사에서 행해진 공연이 있었다. 극장이나 공공 행 사에서의 공연 개런티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리점에서의 가무 활동, 즉 놀음 에 대한 수입은 사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기생은 기생세(妓生稅)로 불리는 일종의 세금을 내고 등록한 기업(妓業), 즉 독립된 업종으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기생을 통해 직업 무용가의 임금에 대한 근대사적 접근이 가능하다.

    기생의 임금에 대한 기록은 요리점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요리점은 기생 의 “전통가무 및 서양무 공연 무대를 제공하는 문화 공간(서지영 2009, 172)”으로 작은 공연장으로 기능하였다. 요리점에서의 연행은 놀음이라 칭했고, 놀음에 대한 수입은 시간 대, 시간채, 기생채 등으로 불렀다. 놀음을 하고 유흥자로부터 받는 시간채는 기생 노동에 대한 대가였으나, 기생에게 바로 지불되지 않았다. 일차적으로, 기생이 활동한 공간, 즉 요 리점이 수입의 일부를 수수료로 차감하였고, 요리점과 기생을 연결해주었던 기생조합이나 권번이 이차적으로 수수료를 차감하였다. 이렇게 기생의 놀음은 기생조합이나 권번과 요 리점, 즉 노동자-노동조직-노동공간의 연결 체제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노동의 가치를 오 롯이 지급받지 못하는 구조였다. 또한 기생은 ‘기생단속령’이라는 명명하에 경시청의 관리 감독하에서 1908년부터 기생세를 납부해야만 했다. 즉 예술 노동의 대가로 벌어들이는 기 생의 수입에 관련하여, 기생조합이나 권번, 요리점, 경찰의 이권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1920년 지역별로 기생이 제공하는 유흥에 대하여 조흥세(助興稅)를 징수함으로써, 세금 부담이 더욱 커지고 기생과 요리점, 권번 간 임금 인상 및 수수료 분쟁 이 불거지게 된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무용 분야에서 일제강점기(1910-1945) 기생의 극장 공연 활동과 공 연된 무용 작품 양상은 김영희(2004, 2016)강인숙・오정임(2010)의 연구를 통해 발표 된 바 있다. 또한 허현희(2014), 이정노(2015, 2020)의 연구를 통해 요리점에서의 기생 공 연 활동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기생의 노동 환경 및 임금 구조, 조직 갈등, 처우 문제 등 직업인으로서의 기생을 조명한 연구는 미약한 실정이다. 임금의 경우, 1910년 일본 연 극장에 단기간 고용된 진주 기생의 월 급여가 150원이었음이 양지선・강인숙(2013)의 연 구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48). 전통춤을 이어가는 동시에 새로운 연행 환경 및 서구식 무대에 우리춤을 접목하여 무대화한 근대 무용가 기생, 그리고 2021년 오늘을 무용 가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세기를 거쳐 무용가라는 공동의 직업군에 대한 사회적 인식 과 지위는 변화하였고, 직무 또한 다양해졌다. 반면 생계와 임금의 측면에서 ‘직업’ 무용가 의 활동을 살펴보자면, 오늘날 무엇이 변화되었고, 개선되었는지 밝히기 어렵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신문 기사를 통해 기생의 수입과 임금의 지급 구조, 임금 을 둘러싼 갈등과 가시화된 사건을 고찰하고자 한다. 즉 이 논문의 목적은 일제강점기 기 생과 요리점, 권번과의 관계 속에서 임금 구조의 변화에 기생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문헌 연구를 통해 고찰하는 것이다. 시기적 범주는 기생 분쟁의 발단 중 하나였던 조흥세 (助興稅)가 신설된 1920년부터 1930년대까지이다.

    연구를 위해 첫째, 1920-30년대 기생의 수입 추이와 세금 체계를 고찰하였다. 둘째, 기 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 파업의 기록을 수집, 분석하였다. 셋째, 기생과 권번간의 임금 분쟁, 파업의 기록을 수집,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1920-30년대 기생의 노동에 따른 임금 구조와 분쟁의 흐름, 갈등의 양상을 도출하였다. 참고 자료는 당시 주요 언론 매체인 매일 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신문 기사, 조선총독부 세금 자료 및 관련 문헌자료이 다. 신문 자료의 경우, 필요에 따라 기사의 내용을 본문에 간접 인용하거나 부분 인용하였 다. 이렇게 직업 무용가로서 생계유지 수단인 임금에 대한 논의를 기생의 노동 환경에서부 터 시작함으로써, 근대 무용가의 노동 환경을 이해하고 더불어 기생의 삶과 예술에 대한 다층적 이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Ⅱ. 1920-1930년대 기생의 임금과 세금 체계

    1. 기생의 임금 체계

    일제강점기 기생은 오로지 자신의 예술 활동에 대한 대가로 수입을 삼았으며, 이 임금 산정의 기준은 기생조합이 만들어지고, 활동하면서 정해졌다. 1914년에 기생화대가 개정 되었을 때를 살펴보면, “1시간 일환오각. 2시간 이환오각. 3시간 삼환. 그 외에 1시간을 가하면 오각식 추가함. 인력거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음. 광교기생조합소 고백”이라 했 다(“기생화대 중 개정하였기로 광고함” 1914, 3면). 즉 1시간, 2시간, 3시간, 추가시간에 따라 사례비 곧 임금이 정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1920년대 기생채 산정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금일부터 실행. 경성 시내의 한성 대정 한남 경화 대동의 다섯 기생 권번에서는 종래 기생 의 시간놀음채를 첫 시간에 1원 50전, 둘째 시간에 1원, 셋째 시간부터 70전 씩 되었었고, 기생의 래왕 인력거 삯은 따로 계산하게 되었었는데 이번에 다섯 조합은 공동하여 기생의 시간놀음채를 1시간에 균일히 1원 30전 씩 개정하여 받기로 제삼부에 청원하였던바 지난 7일날 그것이 허가되어 금 9일부터 일제히 시행한다더라.(“화채 일원삼십전 균일제” 1920. 3면)

    기사에 따르면, 기생의 시간당 수입을 시간 추가에 따라 배정하지 않고 1시간에 1원 30 전으로 균일하게 정했다고 했다. 2시간이면 2원 60전, 3시간이면 3원 90전 인 것이다.1) 이는 기생 개인이 아닌 경성의 다섯 권번에서 신청한 사항이었고, 당국, 즉 경시청에서 심 의하여 허가하였다(“기생의 지킬 바 기생의 본분 조합의 세 가지 조건” 1920, 3면).

    그리고 경시청은 기생 시간채 인상을 허가하며 권번이 기생을 감독, 지도할 것, 훈령 위반 시 권번의 역원 교체 혹은 시간채 인상을 취소한다는 엄포를 놓았다(“기생에게 엄명” 1920, 3면). 경시청의 의견이 권번 운영에 속속들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균일제가 계속 시행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1925년 10월 기준, 경성의 조선 요리집에서 유흥을 한 기생들의 평균 수입은 한달에 30원 25전 가량이었고, 이는 요리집에 일할오부(15%), 소속 권번에 일할(10%), 총 25%를 감하고 받는 금액이었다(“십월중 기생수입 일인전삼십오원” 1925, 5면).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26년 4월 기준, 경성에서 감찰을 가진 260명의 조선 기생이 평균 40시간 유흥을 하여 대략 월 40원 내외의 수입을 벌었다. 그러나 이 금액은 “생활을 하여 나갈 수 없는” 금액이었고, 한 달에 한 번도 불리지 않는 기생도 많았다(“세월없는 기생 월수평 균 사십원” 1926. 2면).

    당시의 물가를 살펴보면, 기생들의 수입이 부양가족의 생계유지에 얼마나 부합하지 못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1920년 시내 소재의 온돌 한 칸 월세를 살펴보면, 종로가 3-8원 가량, 동대문과 서대문이 2-8원 가량, 개성이 4원 가량, 인천이 70전-4원가량이었다(“매 간팔원의 월세” 1922. 3면). 공설시장 물가는 조선쌀 상등미 1말이 4원 65전, 좁쌀 1말이 2원 50전, 호염 140근이 2원 50전이었다. (“공설시장물가” 1920. 3면) 1921년 백미 상품 1말이 2원 35전, 계란 10개가 35전, 소고기 1근이 40-45전이었다(“공설시장물가” 1921, 3면). 이후 1925년 공설시장 물가에 따르면, 소고기 1근이 50전, 계란 10개가 47전이었다 (“음력설준비와 물가” 1925, 3면). 기생 월평균 수입 30-40원으로 부양가족의 생계와 의 식주를 해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27년 경성 시내 각 권번의 시간비 총합은 한성권번(103명)이 72,180여원, 조선권번 (60명)이 47,260여원, 한남권번(28명)이 8,940여원, 대동권번(37명)이 17,110여원이었다. 이는 총 228명이 벌어들인 것으로, 기생의 일년 평균 수입은 650원 정도였다(“작년 유흥비 십사만육천원” 1928, 2면). 대략 월 54원의 수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경성 기생의 수입은 증가하게 된다. 1929년, 경성의 한성권번, 조선권번, 한남권번, 대동권번, 경성권번의 기생 수가 약 800여명이었고, 그 중 한성권번 (134명)의 총 수입이 149,542원 90전으로 일 년에 인당 평균 1,116원, 즉 월 93원 가량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인기가 높았던 한성권번 기생 김모씨의 경우, 일년 수입이 5,723원 으로 조선인 도지사 일년치 봉급과 유사하였다고 한다(“기생의 수입이 도지사와 상등” 1929, 5면). 기생 수입이 증가한 이유는 별도의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밝힐 필요가 있으나, 당시 정치, 경제 실태와 유흥을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 후 1930년대 후반, 기생업의 불황이 이를 대변한다.

    1937년, 경성부 집계에 따르면, 예기의 수는 1,451명(2월 1일 기준, 이 중 일본 기생 447명)이었고, 이 중 기생은 1,004명으로 15세 이상이 965명이었다. 15세 이상 예기로부 터 매월 세금 5원, 15세 미만은 2원 50전을 떼는데, 기생 인력의 증가로 연간 거둬들인 세금만 해도 무려 74,495원이었다(“기생, 예자 범람시대” 1937, 3면). 그러나, 1938년, 전 시의 상황에 영향을 받아 요리점의 영업시간이 단축되고, 경성의 한성권번, 종로권번, 조선 권번의 기생들 또한 수입이 평균 3-4할(30-40%) 정도 줄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기생들 간에는 전업을 고려하거나, 시골로 낙향하려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었다(“기생 낙향자도 속 출” 1938, 3면).

    한편, 기생 수입이 전부 기생에게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기생에게서 징수하는 기생세 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생 세금과 조흥세의 부담에 대응하여, 기생의 임금 구조, 즉 요리 점과의 분배율이 변화하게 되고 더불어 기생들의 임금 인상이 추진된다. 조흥세 때문에 요리점에 배분하는 수수료가 할증되며 시간대를 올리지 않으면, 기생의 수입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에 봉착했던 것이다.

    2. 기생의 세금 체계

    1920년대는 일제강점기 식민통치 제2기(1920-1930)로 이전의 무단 통치를 문화정치로 대체한 식민 지배 체제였다. 조선총독부의 모든 시책이 변화의 흐름을 맞게 되고 재정적으 로 ‘팽창-긴축-팽창’의 정책이 교차 실시되었다(이재은 2015, 87). 기생의 노동은 사회적 으로 하나의 업종으로 여겨지고 세금 납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노동 환경 또 한 이러한 재정 정책 변화의 흐름에 영향을 받게 된다. 바로 조흥세의 신설이다.

    한편, 조흥세 이전에도 기생은 기업(妓業)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부과한 일종의 영업세 (營業稅)인 기생세를 납부하고 있었다. 1929년 동아일보 기사(“기생세금 연이만칠천원” 1929, 3면)에 따르면, 예기 혹은 기생이 경성부(京城府)에 납부하는 영업세는 한달에 5원 이었다. 기생의 입장에서 다달이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부가된 조 흥세로 인해 부담은 가중되었다. 근거는 1930년 기사로 드러난 기생세 체납 실태이다. 경 성부 각 권번 기생의 70%가 세금을 체납하여 영업정지를 당하거나, 세무과에 의해 강제 경매집행 처분을 받았다(“기생도 죽을 지경 세금체납칠할” 1930, 2면). 기생세는 5원에서 1930년대 3원으로 인하되었으나, 진남포 삼화권번 등 일부 지역에서는 이마저도 납부에 어려움을 겪고 삭감 청원을 넣기도 하였다(“기생세 감하진정” 1932, 6면; “기생세 개정” 1933, 2면).

    1920년 신설된 조흥세는 유흥을 하러 온 손님이 아닌, 흥을 돋우는 사람, 즉 연희자에게 받는 세금으로서 기생세와 그 성격이 별반 다름없으므로 기생의 입장에서는 이중과세나 다름없었다. 다만 조흥세의 납부 주체는 요리점이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조흥 세를 내기 위해 요리점에서 기생의 수입에서 차감하는 수수료를 인상하였으니, 결국 세금 의 실 납부자는 기생이었던 셈이다.

    세금이 신설된 첫해 조흥세는 시간당 8전으로 책정되어 당시 요리점에서 기생 수입에서 거두는 수수료보다도 높은 금액이었다. 1920년 6월 초 기준, 경성부 기생의 시간당 요리점 수수료는 7전으로, 요리점의 입장에서는 수수료만으로 세금을 부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성부의 신재원” 1920, 3면). 이 세금의 부담을 기생, 요리점 중 어느 측에 전가하느냐 의 문제로 불거진 갈등은 기생이 요리점에 시간비의 이할, 즉 20%를 수수료로 내고, 요리 점에서 경성부(京城府)에 시간당 8전의 조흥세를 알아서 부담하기로 협의하며 무마되었다 (“요리옥 양보로 기생도 화응” 1920, 3면).

    조흥세의 관리는 납세를 담당하는 재무행정 업무로 경찰의 소관이 아니었고, 경성부에 서 관리하였다(“조흥세와 경찰” 1920, 3면). 경성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책정된 조흥세 는 각 지방 부(府)의 세목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지방재정요람(1931)에 따르면 식민통지 2기 지방세수 중 조흥세는 1920년 4만8천원으로 시작해 1930년 6만2천원이 세수(稅收)로 납부되었고(이재은 2015, 133에서 재인용), 1930년대까지 꾸준히 납세 되다가 1940년에 단행된 세제 정리를 통해 폐지되었다. 세제상 불공평을 완화하면서 세수를 증대하기 위한 명목으로 시행되었으나 변화의 흐름에 비로소 폐지의 대상이 된 것이다(이재은 2015, 173).

    1920-30년대 기생의 수입을 둘러싸고 요리집과 권번, 기생 간의 분쟁은 빈번하였고, 조 흥세 납부로 세금 부담이 더해지며, 임금 갈등은 전국적으로 심화되었다. 언론을 통해 가 시화된 임금 문제는 임금의 수급자 선정, 요리점의 수수료 인상 요구, 권번의 임금 차감 혹은 체불, 임금 관련 처우 개선 등의 문제에 따른 것이었다. 분쟁이 발생할 때면, 기생들 은 동맹을 결속하여 함께 투쟁하였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쟁취하고자 분투하였다. 다음 장을 통해 지역별 임금 갈등의 동기와 전말을 살펴보고자 한다.

    Ⅲ. 1920-1930년대 기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

    1920년대 기생과 요리점간의 수수료 문제는 증감, 증액을 거듭하며 분쟁의 요인으로 자 리 잡았다. 분쟁은 경성, 평양, 진남포, 안악, 인천, 수원, 진주 등 전국적으로 발생했는데, 협의에 이르는 수수료 비율은 시기별, 지역별로 상이하였다. 기생들은 서로 동맹하여 의견 을 제시하거나, 조합을 앞세워 요리점에 대항하였다.

    1. 경성 기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

    경성은 1920년 기생업에 대한 조흥세가 처음으로 신설된 지역으로 한남권번, 한성권번, 대정권번, 경화권번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흥세가 시행되자 경성의 요리점들이 기생 수 수료의 인상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야 어제부터 요리집에 기생이 간다. 오래 걸리어 해결치 못하고 요리집은 요리집대 로 기생은 기생대로가 되여 극히 쓸쓸하고 재미없는 ΟΟ 일구던 기생권번과 요리집에 대한 시간비 할인 문제는 이십사일 네 권번 대표와 요리집 대표자 사이에 타협한 결과 기생의 놀음채 일할삼부 곧 한시간 십칠전의 할인을 요리집에 주기로 하고 무사히 타결되어 ⋯ (“기 생·요리점간 분두해결 할인십칠전에 요리집에 기생이 간다” 1920, 3면)

    위 기사에서 “할인”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할인이란 수수료를 말한다. 평양 기성권번 기 사 중 1921년 5월 12일자 매일신보 3면에 “자기네 요리점에 대하야 기생들이 주는 할인 (구전)으로 말하여도 요리점에서는 객으로부터 현금이나 외상을 물론하고 책임적으로 몇 날에 한번씩 권번에 화대를 청산(淸算)하니”라 했다. 여기에서 할인을 구전이라고 했는데, 구전은 거래의 중간에서 흥정을 붙이거나 조건을 맞추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수수료를 말 한다. 그러므로 할인은 요리점이 기생으로부터 받는 수수료인 것이다. 당시의 분쟁은 장기 간 지속되어왔던 문제였고, 경성의 권번들은 기생의 시간비에 따른 요리점의 배분 금액을 시간당 17전으로 타결했다.

    2. 진남포 기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

    같은 해, 평안남도 진남포 삼화권번(鎭南浦 三和券番)의 기생 일동과 요리점 사이에 수 수료로 인한 분쟁이 발생했다. 삼화권번의 기생들은 1920-1930년대 요리점과 대립하거나 권번 내부 갈등을 겪는 등 잦은 분규로 신문 지면에 오르내렸다.

    진남포 각 요리점에서는 ⋯ 회집하여 무슨 언론이 분분하더니 한 조건을 결의하였는데 그 결의사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즉 진남포 기생 단체되는 비석리 삼화권번 三和券番에게 통지서를 보내되 기생 한명 화채에 대하야 요리집에서 일할을 제감하고 매삭 이 회를 지불하 였으나 자금부터는 그리 할 수가 업고 기생화채로 말하면 일개월에 일회식 지불하기로 하고 화채 화리로 말하면 이활식을 하기로 결의 하였은 즉 그 조건에 대하여 승낙하기를 요구하며 당시 삼화권번 조합장 김옥엽 金玉葉은 기생 일동을 회집한 후 임시총회를 연후에 요리점 결의문을 낭독한즉 일반 기생은 모두다 응하지 않기로 일동이 가결되자 요리집에 불리지 않기로 가결한 결과에 ⋯ (진남포) (“진남포기생과 요리점간 분쟁” 1920, 3면)

    진남포의 요리점은 삼화권번에 다음의 두 가지 요구를 했다. 첫째는 매월 2회씩 기생대 를 지불했으나, 앞으로 매월 1회 지불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기생대의 수수료를 그동안 일 할(10%)씩 차감하였으나, 앞으로 이할(20%)씩 차감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삼화권번 은 조합장 김옥엽을 필두로 임시총회를 열었고, 요리점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향후 요리 점에 가지 않겠다고 결의하였다. 이후 분쟁의 결말은 알 수 없다.

    3. 평양 기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

    평양의 기성권번(箕城券番)은 조선 화류계에서 이름이 높은 곳이자, 동시에 한 달에도 몇 번씩 분쟁과 파업이 끊이지 않아 문제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문제많은 기성권번” 1932, 3면). 1920-30년대 기생과 요리점간의 분쟁 또한 있었다. 특히 기생과 요리점 간의 수수료 협상과 그에 따른 갈등은 반복을 거듭한, 고착된 문제였다.

    자기네 요리점에 대하야 기생들이 주는 할인(구전)으로 말하여도 요리점에서는 객으로부 터 현금이나 외상을 물론하고 책임적으로 몇날에 한번씩 권번에 화대를 청산(淸算)하니 그 책임이 매우 중대하고 금전상 실패가 많이 있는데 지금 그와 같은 중임에 대하여 수수료로 받는 것이 겨우 기생의 화대에 백분지 오밖에 불과하니 이것만 받아가지고는 그 책임을 감당 하는 보수가 부족한즉 이제부터는 오할을 증가하여 기생화대에서 백분지이십을 주지 아니하 면 절대적 자기 요리점조합에서는 기성권번 기생을 초빙할 수 없다하여 요리점 조합에서도 역시 동맹휴업하야 ⋯ 기생측에서는 조금도 양보치 아니하고 오히려 그 대응책으로 새 조건 을 만드는 중인바 박영월 외 여덟명의 기생이 발기하여 기성권번 내에 기성조합을 설치하여 기성권번은 요리점까지 요리점 조합은 기성권번까지 겸하여 영업키로 되어 ⋯ 요리점에 대한 수수료는 재래규정한바 백분지십오와 요리점의 청구 백분지이십에 대하여 그 양방의 가운데를 취하여 백분지십칠분오호(즉 일할칠부오호)로 결정하고 ⋯ (평양) (“기생과 요리점 간에 분쟁, 평양화류계에 대풍운, 요리점도 동맹휴업하고 기생들도 모두 요리점에 가지 않기 로 동맹을 했다” 1921, 3면)

    1921년 평양의 요리점 조합은 기생에게 수입의 20%를 수수료로 요구하여 갈등을 빚게 되고, 요리점 조합과 기생들이 속한 기성권번이 동맹휴업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권번이 요리점을 만들어 겸하고, 요리점은 새로이 권번을 만들어 운영한다고 반목하기에 이르렀 으나, 결국 기성권번과 요리점 조합은 수수료를 17.5%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17.5%로 정해진 수수료는 이후 15%로 인하되었고 요리점이 20%로 인상을 요 구하면서 기성권번 기생과 요리점 조합의 수수료 문제는 해결될 수 없는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종래 기생화대 중에서 수수료로 일할 오부를 제하든 것을 이할로 한다는 통지서를 기성권 번에 했음으로 동 권번에서는 즉시 평위원회를 열고 결의한 결과, 요리점측의 통지대로 응할 수 없으니 단연코 거절하기로 동맹하고 각 기생에게 통지하여 ⋯ (“권번대요정 대분규, 기생 과 인연 끊긴 평양의 요리점들” 1927, 2면)

    평양경찰서에서는 묵인할 수 없어서 좌등(佐滕)서장은 지난 28일 오후 1시에 요리점 측과 기생 평의원 등 10여명을 호출하여 쌍방의 양보를 권유하여 일할오분을 이할로 요구한 중 반분하여 일할 칠분 오리로 하여 상방의 화해를 부치었다는데 요리점 측에서는 응낙하나 기생 측에서는 태도가 강경하여 절대로 일전(一錢)도 양보치 아니하여 ⋯ (평양) (“기생대요 옥 분규불식 경찰간섭도 무효” 1927, 4면)

    1927년, 평양 기성권번과 요리점의 수수료 갈등은 기생의 동맹파업으로 격화된다. 위 첫 번째 기사에서 1921년에 수수료를 17.5%로 결정했으나, 그 사이에 다시 15%로 수행됐 음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 양측 간에 분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평양요리점들이 다시 20%로 인상한다 했고, 기생들은 이에 대해 다시 파업을 동맹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 생들은 분쟁 해결을 위해 경찰부 보안과를 방문하여 탄원하였고, 경찰측에서 예방책을 제 시하게 될 것이라 언급하여 분쟁의 중재자로 경찰서가 깊이 개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또한 경찰이 제안한 17.5%에 요리점 조합은 동의하였으나, 기생들은 강경하게 거부하 였다는 점에서, 임금에서 차감되는 수수료가 부당하다고 여겼던 기생들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4. 진주・인천 기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

    1925년 진주, 그리고 1927년 인천에서 시간대 문제로 기생과 요리점간의 분쟁이 발생한 다. 기존의 수수료 분쟁과는 달리, 시간대 수합과 정산의 책임을 요리점들이 지고 싶지 않 아 발생한 갈등이었다. 분쟁은 기생 개인을 넘어 기생조합, 권번과 요리점간의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진주에서는 팔월초순부터 시내 각 요리점과 기생조합 사이에 기생노름채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 십여개되는 요리점이 동맹하고 기생을 안 부르기로 동맹하였다는데 ⋯ 기생시간대를 기생조합에서 직접 받게하라는 요구를 제출한즉 기생조합은 듣지 아니함으로 그대신 종전 일할 먹든 기생시간대를 이할로 하여달라 요구하였으나 ⋯ (진주) (“기생불매동맹 진주료리 업자들이” 1925, 2면)

    진주의 요리점들은 동맹을 맺고 기생의 시간대를 기생조합에서 직접 받으라고 요구하였 다. 그러나 기생조합이 요구에 불응하자, 요리점에서는 종전의 일할(10%) 대신 시간대의 이할(20%)을 수수료로 분배해달라고 재차 요구한다. 요리점과 조합 모두 기생의 시간대 수합을 기피하는 모습에서, 당시 손님에게 비용을 받아내는 일이 녹록지 않았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인천에서도 기생과 요리점 간의 분쟁이 있었다.

    요정은 화대 책임 안 지겠다고 권번은 기생 안 보낸다고 결의. 인천화류계불상사. 인천부내 에 영업소를 둔 일월관, 용금루, 문향정, 삼성관, 네 요리점은 서로 결속하고 종래 요리점에서 책임을 지고 객(客)으로부터 기생 화대를 받아서 기생권번에 지출하던 것을 지난 일일부터 그 책임을 지지 않기로 하야 ⋯ 그 자세한 내용을 듣건대 요리점에서는 일반 경제의 피폐로 그러함인지 대개 손님의 외상이 많아서 요리업을 계속 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기생 화대는 요리점에서 그 일할을 먹고 그 나머지는 반드시 ΟΟΟΟ룡리권번에 지불하여왔으나 이로부터는 요리업의 유지키 어려운 현상으로 보아 권번에서 직접 책임을 지도록 그와 같이 결속한 것이라는바 ⋯(인천) (“기생화대문제로 권번요정간에 반목” 1927, 2면)

    인천에서 이주일 동안이나 기생의 화대에 대한 문제로 인해 쌍방이 강경한 태도로 끌어내 려오는 분쟁 사건은 ⋯ 기생에게는 가뜩이나 생활의 곤란을 받던 터에 이주일 동안이나 놀게 되어 더욱 날로 핍박을 다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요리집으로서도 종래에 기생화대로 인해 손해 당하고 있음이 사실임으로 모든 사정과 환경 하에 어찌할 수 없이 기생측의 양보로 종래의 일할을 이할로 하여 요리영업자에게 주기로 하고 원만히 해결을 지었다더라.(인천) (“인천기 생분규, 화대이할로 해결” 1927, 3면)

    앞서 살펴본 진주와 유사한 분쟁이 인천에서 벌어진다. 당시 인천의 요리점은 손님에게 기생 보수를 받아 일할(10%)을 수수료로 차감하고 나머지 수입을 권번에 제공하고 있었 다. 그런데 외상이 늘어 정산이 어려워지자 이제 그 책임을 권번에 지라는 요구였다. 권번 은 그에 맞서 기생을 보내지 않는 방식으로 항의하였고, 결국 기생이 수수료로 20%를 요 리점에 지불하기로 하고 분쟁을 해결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요리점-권번을 거쳐 모든 수 수료를 차감하고 남은 금액이 기생에게 지급되는 임금 구조에 따라, 권번과 요리점의 분쟁 에 결국 기생이 희생하게 되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5. 안악 기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

    황해도 안악 기생은 1927년, 1930년 동맹파업을 단행한다. 요리점과의 분쟁이 원인이었다.

    황해도 안악 육십여명의 기생들은 지난 이일부터 돌연히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는데 그 내용을 들으면 전부터 요리집에서는 화대 한 시간에 대하야 일할밖에 안제하든 것을 이할을 제하겠다고 각 기생에게 통지서를 발부하였음으로 기생측에서는 잠시 동안 모이어 결의한바 우리들은 늙은 부모들도 있거니와 객지에서 집세가 일개월에 사오원이 될뿐더러 여러 가지를 다 사먹는 처지에 전의 일할제할 때에도 생활이 부족하야 곤난이 막심하든 처지에 도리여 이활을 요구하니 우리는 그에 응할수 없다 하여 전기와 같이 동맹파업을 하였다는데 ⋯ (“안 악기생 맹파단행” 1927, 5면)

    1927년 이전, 안악 요리점의 기생 수수료는 일할(10%)이었다. 타지에서 건너와 생활하 며 가족을 부양하는 터에 수입이 넉넉지 않았던 처지가 반영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요리점이 수수료를 10%에서 20%로 증액하기를 요구하자, 기생들은 이 를 거부하고 동맹파업을 단행한다. 파업이 어떻게 종결되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 후의 기사를 통해 요리점의 수수료가 일할오부(15%)로 인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황해도 안악읍내기생 일동은 지난 구일부터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일체 요리집 출입을 거 절하는 동시 요리집에 묵고 있던 기생들까지 셋집 혹은 여관으로 나와 있으면서 맹렬한 기세 를 보이고 있는데 그날그날 벌어 생활을 유지하는 그들로서 이와 같이 맹파를 하게된 원인은 종래로 시간내의 일할오분을 떼여먹고 이에 대한 전책임을 지든 요리집에서 금후로는 단결을 하고 시간대의 책임을 아니지기로 결정하였음으로 기생의 면목으로서는 시간대의 계산서를 일일이 꾸미어 손님 앞에 내놀수도 없는 사정이며 또는 외상에 대하야 알지도 못하는 손님에 게 뒤를 따러다니면서 조르기도 어려운 사정인즉 이것은 요리집에서 기생영업을 못하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하여 기생들은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요리집에 가는 기생에게는 벌금으로 일회에 십원씩 받을 것, 매일 당번을 정하야 맹원의 행동을 조사할 것 등을 결의한 후 그와 같이 파업을 단행하고 요리집 주인들과 항쟁하는 것이라고 한다(안악) (“안악읍 기생들 맹파” 1930, 6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본래 기생의 임금 구조에서 요리점은 기생의 노동 공간이자 손님으 로부터 기생의 시간대를 대신 받아주고 수수료를 벌어 조흥세를 내는 임금 창구, 납세 창 구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각 지역의 요리점에서 기생의 시간대 정산을 책임지 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진주, 인천, 안악 지역의 사례가 신문 기사로 가시화된 것을 볼 때,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이었을 것으로 본다. 급여의 개념으로 돈을 받던 기생들 에게 노동에 대한 비용을 손님에게 직접 요구하고 받아내라는 것은 영업을 하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기생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요리점에 출입하지 않고 동맹 파업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6. 수원 기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

    1929년, 수원 권역의 요리점과 화성권번간의 분쟁이 발생한다. 갈등의 원인은 역시 수수 료였고, 앞서 인천에서의 분쟁과 마찬가지로 기생은 분쟁의 주체이기보다는 사회적 약자 의 위치에 놓여있었음이 기사에 드러난다.

    수원에 있는 십여처의 각 요리점에서는 지난 육일부터 돌연히 동맹을 하고 기생을 부르지 않기로 단결한 결과 사십여명의 기생들은 하품만하다가 밤이 들어 무엇인지 회의를 한후 힘없이들 돌아갔다는데 듣는바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이십여일전에 수원 각 요리점 주인들 이 요리점조합인 신풍리 부사정(富士亭)에 모이어 기생시간비 중에서 재래 십전의 할인을 밧든 것을 이십전으로 인상키로 한후 이 뜻을 가지고 대표자 몇 사람이 화성권번에 가서 교섭하였던바 권번에서는 그러면 시간비를 십전씩 올리어(손님이 부담키로) 받아서 오전씩 요리점과 권번이 각각 분식하는 것이 좋을터인데 ⋯ 요리점측에서 긴급회의를 한 결과 기생 을 전부 아니 부르기로 가결한 것이라는데 권번에서도 어디까지 강경히 대항해 나가게 되어 ⋯ (“요리옥과 기생 시간대로 분쟁” 1929, 5면)

    수원요리옥 대 기생권번의 분쟁사건은 서장의 중재로 겨우 해결을 보게 되어 시골로 보따 리들을 싸든 기생들도 도로 취업한다고 (“지방잡신” 1929, 6면)

    당시 요리점 주인들은 기생의 시간비에서 10전의 수수료를 받고 있었는데 이를 20전으 로 인상하기로 결정하고 화성권번과 교섭을 추진하였다. 권번에서는 시간비를 10전씩 올 려받아 손님이 비용을 지불하는 방안을 제시하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요리 점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기생을 전부 부르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권번에서도 강경하 게 대항하였다. “사십 여명의 기생들이 힘없이 돌아갔다”는 언급과 “서장의 중재로 해결을 보게 되었다”는 언급에 따라, 당시 화성 권번의 기생들이 주도권을 획득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Ⅳ. 1920-30년대 기생과 권번간의 임금 분쟁

    1920-30년대 기생은 요리점과의 분쟁과 더불어, 권번 내부와의 임금 분쟁에도 대항해 야 했다. 요리점과의 갈등이 수수료의 문제였다면, 권번 내부와의 갈등은 임금 미지급이었 다. 권번의 반복적인 임금 체불에 맞선 대구 기생의 결속과 파업의 모습에서 당시 기생과 권번 간 분쟁의 구체적인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1. 대구 기생과 권번간의 임금 분쟁

    1924년, 대구 기생들은 요리점이 손님들의 외상이 늘어남에 따라 놀음을 청하고서도 비 용을 지급하지 않는 상황에서 조합에서 기생의 보수를 받아주기는커녕 세금만 받아 챙기 는 행태에 반기를 들게 된다.

    대구에는 기생의 수효가 수백 명이나 되는데 놀음에 불리는 것은 여전하나 너무도 외상이 많아서 종종 놀음채를 받지 못하고 요리집에 대하여 속히 내라고 독촉을 하면 외상돈이 들어 오지 아니 하였다였다 하며 도무지 ΟΟ하여 주지 아니하고 또한 기생조합에서는 기생세금만 받으며 그 놀음채는 받아주지 아니하고 너무도 태만하다하여 지난 오월 일일에 기생들이 한가지 결속하여 가지고 기생조합 역원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금후로는 조합의 명령을 복종치 않기로 협의하였다는데 ⋯ (“대구기생들은 조합역원을 불신임” 1924, 3면)

    대구 기생들은 결속하여 기생조합 임원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조합의 명령에 따르 지 않기로 뜻을 모은다. 이러한 기생들과 권번, 요리점의 분쟁에 중재자는 대구경찰서였다.

    대구경찰서에서 극력으로 중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붙여 원만히 해결되었 다더라(대구) 하나, 요리점에서는 오늘까지 지불하지 않은 화대는 약속수형(約束手形) 진출해 서 기생에게 교부할 것, 둘, 기생조합 간부 중에 일부를 해고할 것, 셋, 이후부터는 요리점은 매월 일회, 혹은 이회씩 화대를 계산하여 현금으로 기생에게 지불할 것. (“대구 기생 분규 해결, 세 가지 조건을 붙여 기생과 조합 즉시 화해” 1924, 3면)

    경찰측은 요리점이 미지급된 임금을 지급하고 앞으로 규칙적으로 임금을 지급할 것, 기생 조합의 간부 일부를 해고하는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였고 이들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분쟁은 무마된 듯하였으나, 1928년, 유사한 문제로 달성권번의 기생들이 동맹파업을 예고한다.

    권번에서 화대를 계산 안해준다고. 대구서의 조사개시. 대구기생조합은 작년부터 달성권번 (達城券番)으로 개칭하고 종래 기생조합에 예속한 기생전부를 권번의 소관에 넘긴 이래 ⋯ 최근에 이르러 권번에서는 요리점에서 화대를 지불치 않는다는 것을 구실삼아 매월 십일일 이십륙일 이회로 분하여 계산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몇 달을 주지않고 끌어나감으로 기생 측에서는 ⋯ 일제히 결속하여 동맹파업을 단행하겠다는 의론이 있음으로 대구경찰서 인사상 담소(人事相談所)에서는 비밀리에 기생을 한사람씩 불러 화대에 대한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 라더라.(대구) (“달성기생동요” 1928, 5면)

    대구 달성권번(達城券番)에서 지난십오일에 화대를 지불한다함으로 이날까지 기다리든 기 생들은 또다시 십육일로 연기함으로 오십여명의 기생들 중 이십삼명은 동맹파업을 하고 나머 지 이십여명의 기생들은 십육일까지 기다려 보도록 하였다더라.(대구) (“대구기생 일부맹파” 1928, 5면)

    대구 기생들은 권번이 여전히 임금을 체불하는 행태에 분노하여 동맹파업을 논의한다. 이전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대구경찰서 보안과에서 기생과 권번의 갈등을 중재하고 미불 된 임금 전부를 권번이 속히 지불할 것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권번은 약속한 날짜에 임금 을 지불하지 않았고, 일부 기생들은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2. 정읍・신의주 기생과 권번간의 임금 분쟁

    전라북도 정읍과 평안북도 신의주의 기생들은 권번 내부의 불합리한 임금 구조에 항의 하기 위해 동맹파업을 시행한다. 자신들의 노동 대가를 착취하는 권번의 불합리한 행태가 파업의 원인이었다.

    지난 13일 전북정읍 예기조합기생일동은 돌연히 총무 리창선(李昌善)과 취체 신송죽(申松 竹) 두 사람의 비행을 들어 장시간 언쟁한 후 즉시 전부가 조합에서 나와 한 곳에 모여 파업을 단행하여 우리의 고혈을 착취하는 간부 몇 사람을 전출케하자는 결의를 하는 동시에 결의문 과 이유서를 작성하여 아래와 같은 요구 조건을 들어 파업단 대표 김련화(金蓮花)와 옥순애 (玉順愛)로 하여금 조합에 제출케하고 파업 중의 주의사항을 말한 후 필승을 기하고 파업을 단행하였다 한다.(정읍) ◇ 요구조건 일, 시간비 문제. (가)부자에게 적체된 시간비는 일개월 내로 징수지불할 일. (나)이후로 유흥비는 일주일 내로 징수지지할 일. 단 시간비 정산의 불량 한 객에게는 정산한 후에라야 파견할 일. (다)총무를 개선할 일. (라)취체역을 폐염할 일. (마)강제적 파견 반대. (바)조합 임원은 공선(公選)할 일. (사)체면(體面)오손(汚損)의 임원은 일반 기생이 차(此)를 경질케 할 일. (아)이상 회답을 사일 내로 할 일. (“정읍예기맹파” 1930, 6면)

    1930년, 정읍의 예기조합 소속 기생 일동은 파업을 단행하며 권번에 시간비를 제때 지 급할 것, 시간채는 일주일 내에 지불할 것, 정산하지 않는 손님에게는 정산 이후 파견할 것, 요리점이나 놀음에 강제로 파견하지 않을 것을 요구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신의주 기 생들과 기생조합의 임금 관련한 갈등은 다음 기사에서 알 수 있다.

    신의주 기생조합의 소속기생 육십여명은 동조합장인 길경련(吉景璉)씨를 배척하여 수일전 부터 총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그들의 파업 이유는 종래 기생들의 화대로부터 일할은 조합 비라고 하여 징수하여 왔는데 그들은 이것이 부당타고 하여 조합측에 그 폐지를 요구하였나 조합장이 용인치 않는다는 것이 배척의 동기로 그들의 결속은 자못 강경하야 당국에서도 사태를 중대시하고 있다 한다.(“중간착취 배격에서 조합장 배척으로 신의주기생 총파업” 1935, 5면)

    1935년, 신의주 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 권번의 조합비 징수에 이의를 제기하고 동맹파 업을 단행하였다. 권번이 수입의 일할(10%)를 떼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후 의 합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기생들이 조직적 부당함에 대응하기 위해 한 목소리를 냈다 는 점에서 단체 행동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 권익 보호를 요구하고 이를 쟁취하고자 분투 한 기생들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Ⅴ. 결론

    지금까지 일제강점기 기생의 임금 구조와 세금 체계,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된 변화의 흐름에 대처하기 위한 기생들의 분쟁과 분투의 모습을 1920-1930년대 신문 기사에 근거 하여 고찰하였다. 첫째, 기생의 임금 구조와 수입 추이, 세금 체계를 살펴보았다. 둘째, 기 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과 그로 인해 야기된 파업의 사례를 지역별로 살펴보았다. 셋째, 기생과 권번간의 임금 분쟁과 그로 인한 파업의 사례를 지역별로 살펴보았다.

    이상의 연구 과정은 일제강점기 기생의 노동이 세금을 납부하는 하나의 독립된 업종(妓 業)으로 규정되었기에, 근대 직업 무용가의 한 표상으로서 기생의 노동 환경과 임금 구조 를 시론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직업 무용가에 대한 근대사적 접근과 고찰이 라는 학문적 가치를 가지며, 예술노동자로서 기생의 삶과 예술에 대한 다층적 이해를 가능 케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20년 기생의 시간당 임금을 1원 30전으로 균일화하자는 시도가 권번과 경시청 에 의해 추진되었으나, 전국적으로 적용되지 못하였다. 경성을 기준으로, 기생의 월간 평균 수입은 1925년 대략 30원 25전, 1927년 대략 54원, 1929년 대략 93원이었다. 기생의 임금 은 일제강점기의 정치, 경제 실태와 유흥을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시기적으 로 증가, 혹은 증감하였고 대체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에 넉넉한 수입은 아니었다.

    수입에 따른 세금의 경우, 기생은 1920년대 기생세로 불리는 영업세를 월 5원 납부하였 고, 경기 불황으로 인해 1930년대 초반 3원으로 인하되었으나, 이마저도 체납된 기생들이 다수였다. 특히 기생세에 더해 1920년 시간당 8전으로 책정된 조흥세가 요리점에 부가되 면서, 요리점에 분배하는 수수료 할증을 둘러싼 기생과 요리점간의 분쟁이 전국적으로 발 생하게 되었다. 조흥세는 1940년, 기생세는 1946년 폐지되었다.

    둘째, 기생의 임금에 대한 요리점과의 분쟁은 노동자인 기생과 노동공간을 제공하는 요 리점의 이해관계를 보여준다. 1920-1930년대 기생과 요리점간의 임금 분쟁은 경성, 평양, 진남포, 안악, 진주, 인천, 수원 등지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임금 분쟁의 주요 원인은 요리점에서 징수하는 수수료 인상에 대한 기생측과 요리점측의 이견(異見)이었다. 요리점 은 20%의 수수료를 요구하였고, 분쟁 끝에 합의된 수수료는 지역별, 시기별로 13%, 15%, 17.5%, 20%로 상이하였다. 또한 시간대 비용의 정산을 담당했던 요리점이 그 책임을 기피 함으로써 기생과 요리점간의 분쟁이 발생하였다. 권번 또한 비용 정산의 임무를 거부하였 기 때문에, 기생은 노동을 거부하는 것으로 요리점에 시위하였다.

    셋째, 기생의 임금에 대한 권번과의 분쟁은 노동자인 기생과 노동자집단을 대변하며 임 금을 지급했던 권번의 이해관계를 보여준다. 기생과 권번 간의 임금 분쟁은 대구, 정읍, 신의주 등지에서 일어났고, 그 원인은 임금의 미지급이었다. 권번이 기생의 수입에 수수료 를 배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생의 시간대를 요리점에서 받아주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제때 임금을 지불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권번의 임금 체불과 착취에 기생들은 단체로 항의 하고 개선책을 요구하였고,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되기까지 동맹파업을 불사하였다.

    일제강점기 기생의 임금 책정은 권번과 경시청의 논의를 거쳤고, 경시청의 허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렇게 책정된 임금, 즉 노동에 따라 유흥자에게 받는 수입은 오롯이 기생의 것이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기생이 활동한 공간, 즉 요리점이 수입의 일부를 수수료로 차 감하였는데, 1920년 조흥세의 신설에 따라 수수료가 인상되어 기생과 요리점간 분쟁의 발 단이 되었다. 그리고 요리점과 기생을 연결해주었던 기생조합이나 권번이 이차적으로 수 수료를 차감하였다. 이렇게 두 단계의 차감을 거쳐 지불된 임금에서 다시 기생은 세금, 즉 기생세를 납부했다. 기생세를 납부하지 못하면 세무과에서 기생들에게 영업정지나 강제 경매집행 처분을 부과하였으니, 기생은 노동자로서 노동조직-노동공간-노동관리자의 피 라미드 구조 속 하위 집단, 사회적 약자로서 경제적 삼중고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들은 사회적 구조에 굴하지 않았고 불합리한 수수료의 요구, 시 간대 체불 등의 임금 갈등이 생길 때마다 스스로의 권익 보호를 위해 단체 시위단을 결속 하고 요리점, 권번 등과 투쟁하였으며, 긴 분쟁 끝에 주도적으로 사회적 관심과 합의를 쟁 취하였다. 오늘의 고찰이 직업인으로서 자각했던 기생의 노동 환경을 이해하고, 근대 직업 무용가로서 조명 가능한 예인(藝人) 연구의 저변을 확장하는데 한 발자국이라도 기여하기 를 바란다. 더불어 직업 무용가의 권익과 대우, 노동 환경에 대한 근대사적 기록과 학문적 논의에 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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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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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소개

    이정민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예술학협동과정에서 “무용학의 지적 구조 분석 연구-텍스트 마이닝 기반의 빅데이터 분석을 중심으로”로 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수원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근현대 한국춤 생태계, 춤추는 몸의 움직임 분석 연구에 관심이 있다. 주요 연구로는 “LMA 이론을 통한 무형유산 태평무의 움직임 분석,” “언택트 시대 가상공간에서의 움직임과 소통” 등이 있다.
    김영희는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전통춤의 움직임에 드러난 風의 양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김영희춤연구소 소장이며,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원이다. 근현대 한국춤의 역사를 연구하며, 『고창농악 고깔소고춤』, 『개화기 대중예술의 꽃, 기생』, 『전통춤평론집 춤풍경』, 『한국춤통사』(공저), 『검무 연구』(김영희춤연구소 편) 등을 발간했다. ‘검무전(劍舞展)’ 시리즈 I~IV(2012~2017)를 기획했고, ‘소고小鼓 놀음’ 시리즈(2020~2021)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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