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1962년 창단되어 1965년 미국공연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민간예술단으 로 활약하고 있는 리틀엔젤스예술단(이하 리틀엔젤스)은 2022년 5월 창단 60주년을 맞았 다. 리틀엔젤스의 60년은 국제정세와 한국 현대사의 시·공간이 그대로 담긴 타임캡슐이라 할 만큼 한국의 지정학적·역사적 시간을 관통해 왔다. 리틀엔젤스가 창단되어 해외공연을 펼치기 시작한 1960년대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이념 갈등, 민족 전쟁과 분단을 거쳐 국 민국가 수립을 이루기까지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다. 국립공연예술단체가 본격적인 틀을 갖추기 이전 리틀엔젤스는 해외활동을 주력으로 삼아 한국 춤과 음악을 소개하며 해외국 가문화사절단의 역할을 담당하고 한국인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킨 문화적 아이콘이었다.
리틀엔젤스 60년 활동의 학술적 고찰은 한국공연예술사 연구에 필요한 작업이었음에도 그간의 제한적 연구에 따라 한국공연예술사의 기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 없었다. 무엇보다 리틀엔젤스는 민간의 ‘어린이 단체’(김영희 외 2014, 394)로 ‘국위선양’과 ‘문화 외교사절’의 주체로서의 성과(정은숙 2003;김영희 외 2014, 394; 유진주 2016;고경희 2016, 137)가 강조되어 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리틀엔젤스 60년의 역사는 한국공연예 술문화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한 자산이다. 앞서 본 연구자는 이전의 연구를 통 해 리틀엔젤스의 의미와 역할을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김희선, 2019). 무 엇보다 당대의 춤과 음악 유산을 바탕으로 구성된 리틀엔젤스의 레퍼토리, 무대화, 양식화 는 한국공연예술의 현대적 전환기의 중요한 변곡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시기 특정한 방식 의 무대화와 레퍼토리의 리틀엔젤스의 실험적 실천은 이후 한국현대공연물의 구축에도 중 요한 기초를 제공했기에 이 과정을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리틀엔젤스는 ‘어린이 단 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대로서는 드문 ‘전문예술단’의 운영체계를 가지고 해외 전문매니 지먼트를 통해 장기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예술단체였다. 더 나아가 리틀엔젤스를 당대 한국과 세계 공연계에 등장한 ‘어린이예술단’의 맥락 안에서 고찰하는 일도 필요하다. 리틀엔젤스 해외공연의 초기 악사로 참여했던 예술인들은 훗날 국악계의 명인들로, 이들 의 리틀엔젤스에서의 활동, 역할, 경험은 현대 이양기 국악 제도화의 단면을 포착할 여러 단서를 제공한다. 현재의 표준 레퍼토리의 반주음악이 국악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 었다는 점에서도 고찰의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한국공연예술계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리 틀엔젤스는 당대 전문예술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였다. 또한 리틀엔젤스를 통한 해 외공연의 경험은 훗날 전통예술의 해외 진출 방식, 레퍼토리 개발, 장르 발굴 등에도 중요 한 자산이 되었다. 또한 한국 춤과 음악뿐 아니라 리틀엔젤스의 합창 활동도 당대 세계와 한국의 합창문화 이해에 중요한 사례가 된다. 무엇보다 리틀엔젤스는 국내에서 특권과 선 망의 대상이었으며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어려서 전문적인 예술교육을 받고 세계적 무대 에서 전문 공연 활동을 펼친 단원들의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으며 이들의 경험은 한국 전통 공연예술계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리틀엔젤스의 존재는 어린이들의 예술계 유입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많은 단원들은 한국의 대표 예술가로 성장하였다. ‘8세에서 13세의 소녀’ 단원을 중심으로 했던 리틀엔젤스는 한국에서 예술 조기교육 뿐 아니라 여성 예술가의 배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김희선 2019, 143-145).
앞서 한국문화재단은 두 차례에 걸쳐 리틀엔젤스 활동을 자료집(화보집)으로 출판하였 다(1990, 2002). 또한 리틀엔젤스는 한국무용과 공연을 통한 국위선양과 문화외교의 대표 적 성과로 기술되어 왔다(유미희 2001; 김영희 2014;유진주 2016). 리틀엔젤스에 대한 학술연구는 두 편의 석사학위논문으로 시작되었다. 리틀엔젤스의 현황과 발전방안연구(정 은숙 2003)와 리틀엔젤스 40년사 연구(신은경 2004)는 리틀엔젤스 출신단원들의 석사학 위논문으로, 리틀엔젤스에서 출판한 선행자료와 웹사이트에 소개한 자료를 기반으로 재정 리한 연구물들로, ‘국위선양의 리틀엔젤스’ 서사를 재현한 연구물로 평가할 수 있다. 유진 주는 한국문화사절단으로 한국춤의 해외공연을 연구한 박사학위논문에서 리틀엔젤스의 초 기 해외활동을 정리하였다(2016, 35~45). 리틀엔젤스의 단원으로 이후 가야금 교사로 활 동했던 홍주희는 리틀엔젤스 가야금 교육(홍주희 2003)을 주제로 연구하였으며 리틀엔젤 스의 교육을 심정문화예술교육(정하연 2021)의 차원에서 해석하거나 영재로서 리틀엔젤스 단원을 연구(이승연 외 2022)하는 등 리틀엔젤스 교육 관련 연구도 진행되었다. 또한 세계 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와 리틀엔젤스의 관계를 살핀 김인수(2022)는 리틀엔젤스 활동 을 선행문헌을 통해 개괄적으로 정리하면서 “평화문화정신”과 연계하여 논의하였다.
앞서 본 연구자는 1965~76년까지 해외공연에 주력한 리틀엔젤스의 존재양상에 대한 질 문을 던지고 기존에 살펴본 바 없었던 다양한 1차 자료와 외교문서 등을 검토하여 1965~1976년 사이 활발했던 리틀엔젤스의 해외공연이 당대 글로벌 문화냉전과 국가주의 맥락에서 수행된 문화사절단 활동이었음을 고찰하였다. 이에 더해 리틀엔젤스 이해를 위 해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설립과정과 관여한 인물, 초기 춤과 합창 레퍼토리 구성과 특 징, 해외공연활동, 참여 악사도 살펴보았다(김희선 2019). 그러나 1965년~1976년 시기로 한정하여 살펴보았고 1차 자료가 빈약한 상황에서 1967년 이후의 활동, 예술단의 운영과 제도, 구체적 무용 레퍼토리의 변천, 무용과 반주음악의 관계, 참여 악사들의 구체적인 면 면, 리틀엔젤스 국내 활동 등의 고찰은 후속 연구로 남길 수 밖에 없었다.1)
이 연구는 앞서 시도된 바 없는 리틀엔젤스 60년의 국내·외 활동을 한국과 세계 공연예 술사 안에서 재맥락화하는 입체적 고찰을 통해 의미를 논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앞서 연구들이 살핀 바 없는 다양한 공연 프로그램, 국내·외 신문, 영상, 음반 등의 1차 자료, 리틀엔젤스 관련 출판물, 선행연구, 인터넷 자료, 증언 등 다양하게 수집한 광범위한 자료를 살피는 실증적 연구로 리틀엔젤스 60년 활동의 실체에 근접해볼 것이다. 특히 이 연구는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앞서 구체화되지 않았던 시기별 활동과 특징, 리틀엔젤스의 제도와 운영, 레퍼토리의 구성과 특징, 세계공연예술사적 의미를 논의하는 시론적 연구이 다. 특히 선행연구에서 밝혀진 바 없었던 1962~1965년의 활동, 1965~1976년의 국내 활 동과 실증적으로 확인된 바 없었던 1976년 이후 현재까지의 활동을 포괄하여 논의하는 첫 번째 연구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연구는 대한뉴스와 리버티 뉴스에 보도된 총괄 목록, 국내외 영상 및 영화목록, 1차부터 84차까지의 해외공연과 최근 개최된 60주년 기념공연 까지, 현재까지 파악된 자료를 종합적으로 소개하여 추후 지속될 리틀엔젤스 연구에 기초 자료로도 활용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60년의 역사를 한 편의 논문에서 고찰할 수도 없 을 뿐만 아니라 지면의 제약 상 모든 자료를 제시하는 일도 불가능하다.2) 따라서 리틀엔젤 스예술단 60년의 공연예술사적 의미를 두 편으로 나누어 살피고자 하는데 I편인 이 연구에 서는 리틀엔젤스 활동의 시기별 활동과 특징을, 연속성을 갖는 II편에서는 리틀엔젤스의 제도와 운영, 레퍼토리의 구성과 특징, 세계공연예술사적 의미를 차례로 고찰할 것이다.
이 연구는 선행연구와 문헌연구, 리틀엔젤스가 보유하고 있던 각종 공연 프로그램, 연구 자가 수집한 신문기사 및 영상 등의 1차 자료, 리틀엔젤스 단원 및 운영진들과의 공식, 비공식 면담을 토대로 60년사를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앞서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 연구 에서는 어린이무용단으로 구성된 1962년부터 해외활동을 시작하기 이전까지를 ‘리틀엔젤 스예술단 창단기’(1962~1964), 1965년 해외활동 시작부터 중단된 1976년까지를 ‘리틀엔 젤스예술단 문화사절단 활동기’(1965~1976), 이후 해외공연보다 국내공연에 주력한 시기 를 ‘리틀엔젤스예술단 민간예술단 전환기’(1977~1989), 그리고 해외공연이 재개된 1990 년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리틀엔젤스예술단 평화사절단 활동기’(1990~현재)로 명명하고자 한다. 다음에서는 각 시기별 활동을 중심으로 특징을 살펴보고 의미를 논할 것이다.
Ⅱ. 리틀엔젤스예술단의 시기별 활동과 특징
1. 리틀엔젤스예술단 창단기(1962~1964)
이 시기는 무용단3)의 설립과 단체로서 레퍼토리 및 체제를 준비하던 시기이다. 창단부 터 1965년 이전의 활동은 선행연구(신은경 2004;유진주 2016;김희선 2019)에서도 간략 히 언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채 기술된 부분이 많아 이 연구에서는 1차 자 료와 면담을 통해 확인한 창단기 활동을 세밀히 기술할 것이다.
리틀엔젤스의 창단일은 1962년 5월 5일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시자인 문선명 (1920~2012)의 뜻에 따라 창단되었다고 명문화되어 있다(한국문화재단 1990, 2002; 문선 명 2009, 176~177; 박보희 2000, 342). 그런데 여러 자료에 창단년도가 1962년과 1963년 으로 혼재되어 있어 이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내부자들과의 비공식 면담과 자료에 의하 면 통일교회에서 교인 자녀 소수로 주일학교에서 무용교육을 시작한 시기가 1962년이며, 이후 교인 자녀 17명4)을 단원으로 1963년 7월 27일, 낙원동 중앙문화회관 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다(리틀엔젤스 60년사 자료집 1부; 박봉애 년도미상; 박보희 2000). 무용연구소 의 개소가 1963년이었으나 이들의 무용교육이 1962년 시작되었으므로 이후 1962년 5월 5일을 공식창단일로 명문화한 것이다.
무용단은 초기부터 해외공연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문선명은 자서전(2009, 176~177)에 서 전쟁과 빈곤으로 기억되는 대한민국을 ‘문화민족’으로 ‘해외’에 내보이기 위함이라 기록 하였다.5) 40년간 리틀엔젤스를 운영해 온 박보희(1930~2019)도 자서전과 증언집에서 주 미대사관 시절 문선명에게 해외에 한국예술을 알릴 민속무용단을 만들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을 전했고 이에 대해 “세계를 무대로 할 것”이며 “세계공연의 기틀을 미국에서 만들라 는 말씀”의 서신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면담에서는 전쟁, 빈곤, 고아로 알려진 한국 의 “낙후된” 이미지를 한국전통예술을 통해 선보임으로서 “문명국”으로 알리고자 함이라 언급한 바 있다(최해리 2010). 종합해보면 당시 미국에서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하며 국제감 각과 영어가 능통했던 박보희가 한국예술을 널리 알리기 위한 전통춤과 전통음악을 중심 의 ‘민속예술단’을 먼저 구상하고 문선명이 동의하며 시작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 다면 민속예술단을 ‘어린이무용단’으로 구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박보희는 면담(최해리 2010)에서 처음 성인 민속예술단으로 구상했으나 문선명 총재의 의견에 따라 “평화의 상 징”인 어린이예술단으로 구성하게 된 것이라 밝혔다. 자서전에서는 “왜 어린이무용단이어 야 합니까? 그 코 찔찔 흘리는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세계무대로 끌고 다닌단 말입니까”라 물었던 자신에게 문선명은 “어린이는 평화의 상징”이며 “천국의 상징”이며 “한국의 평화애 호의 정신을 우리 어린이들 이상 잘 표현할 사람이 없다”라 서신을 전했다고 언급한다(박 보희 2000, 343).
이러한 초기 계획은 1962년 교회의 주일학교 무용교육으로 실행되기 시작했는데 1963 년 종로구 낙원동에 무용연구소를 개소하며 ‘통일교회 어린이무용단’으로 연결되었다. 어 린이무용단의 교육을 담당한 신순심6)(1938년생)7)은 무용가 송범의 제자로 이화여자대학 교 무용과를 졸업한 젊은 무용학도였다(신순심 좌담). 정식 어린이무용단으로 정비 후 같 은 해 중구 쌍림동으로 이전하며 단원모집을 시작했다. 단원은 신문지상을 통한 단원모집 홍보와 주변의 소개를 통해 모인 어린이들을 간단한 오디션을 거쳐 선발하였다. 이때 참여 하게 된 단원들은 당시 무용을 학습하고 있었거나 무용단 주변에 거주하며 오가던 어린이 들이었다(신순심 좌담, 이노연 외 면담).8) 이후 무용 기초 훈련과 함께 공연 레퍼토리 구상 이 본격화되었다. 박보희에 의하면 전통춤 레퍼토리 개발과 음악 반주를 위해 신순심은 국악 명인 박성옥(1908~1983)을 초빙했다.9) 또한 당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송범의 무용 연구소에 다니고 있었던 신순심은 어린이 무용에 적합한 레퍼토리 개발을 위해 무용 명인 들의 공연을 찾아다니고 학습과 연구를 병행하였다(신순심 좌담, 유진주 2016, 35). 식민 지 시기 최승희가 창작한 신무용 외에도 근현대기 한성준-한영숙, 김백봉 등을 통해 전승 되고 발전된 전통무용과 송범, 강선영, 권려성, 정재만, 홍정희 등 당대 무용가들의 춤도 연구하면서 발레에서 착안한 어린이용 군무를 개발하는데 신순심의 역할은 컸다. 박성옥 은 철가야금을 이용한 반주음악 창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신순심 좌담).
무용단의 첫 공연은 1963년 12월 31일 용산구 청파동의 본부교회에서 진행되었는데 이 때의 공연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공연의 레퍼토리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박성옥과 신순심 안무의 소품 레퍼토리가 중심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1964년에는 교도소, 군대, 미군기지 등의 위문공연과 방송과 교회공연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초기 단원들과의 면 담에 의하면 이 시기 여러 공연무대를 거치며 레퍼토리가 점차 정비되었다(이노연 외 면 담). 1964년에 가진 공연 중 오산의 미 공군 위문공연은 『리버티 뉴스(Liberty News)』에 보도되었는데 해당 영상은 현재까지 발견된 리틀엔젤스의 최초 영상이다. 이 영상의 나레 이션에 의하면 「장고춤」, 「부채춤」, 「탈춤」이 공연되었다고 보도되었는데 해외공연을 준비 하던 ‘창단기’의 단면을 짧게나마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10) 이후 외교부 초 청으로 ‘한국의 집’에서 한국유엔대표부 공연을 진행하였다.
1964년 10월 미국에서 귀국한 박보희는 육군 중령으로 명예퇴역(박보희 2000, 368)하 고 리틀엔젤스에 합류하였다. 박보희의 합류로 무용단의 미국공연 계획이 구체화되었는데 박보희는 앞서 1964년 3월 미국 워싱턴에서 전 주미한국대사 양유찬(1897~1975)11)의 도 움을 받아 한미문화자유재단(The Korean Cultural and Freedom Foundation Inc. KCFF) 을 설립하였다. 한미문화자유재단은 “한국의 문화와 자유정신의 선양”을 목적으로 설립되 었고 기금모금 사업계획으로 “문화사업으로 리틀엔젤스(‘한국소년소녀무용단’) 해외공연” 과 “자유정신 선양사업”으로 ‘자유아시아방송(Radio of Free Asia, ROFA)(1966년)’을 시 작하였다(박보희 2000, 341).12) 박보희는 1964년 12월 통일교회의 동부지역 최초의 선교 사13)로 정식 파견되어 1965년 1월 도미하였다. 다음 <표 1>은 리틀엔젤스예술단 창단기 (1962~1964)의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1962~1964년은 리틀엔젤스예술단 창단기로 창단부터 해외공연을 위한 단원 모집, 교 육, 훈련, 레퍼토리 구상, 시범운영을 진행하였고 이 시기 무용단의 명칭은 ‘통일교회 어린 이무용단’, ‘한국소년소녀무용단’, ‘The Little Angles’ 등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이 시기 무용단의 설립, 설립목적, 운영, 무용지도, 안무에서 문선명, 박보희, 신순심, 박성옥, 통일 교회, 한미자유문화재단의 역할은 중요했다.
2. 리틀엔젤스예술단 문화사절단 활동기(1965~1976)
리틀엔젤스의 첫 해외순회공연은 미국공연으로 시작했다. 워싱턴에서 시작하여 약 100 일에 걸쳐 미국 전역에서 총 75회의 공연을 진행하고 귀국길에는 나흘간의 일본공연을 진 행했다. 이후 1976년까지 12년간 캐나다, 호주, 일본, 유럽, 동남아, 남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돌며 장기순회공연을 진행했다. 리틀엔젤스는 해외공연에서 각국의 정상을 만나고 각종 국제행사 등에 초청받았으며 특히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 문화사절단으로 참 여한 이후에는 ‘정부사절단’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여기서는 리틀엔젤스의 가장 중요한 활동시기이자 해외공연에 주력한 ‘문화사절단 활동기’의 특징을 살피기 위해 해외공연과 국내활동으로 나누어 고찰할 것이다.
첫 해외공연에서 ‘The Little Angels’를, 국내에서는 1965년 ‘선화어린이무용단’14)을 정 식명칭으로 사용하였다. 1969년 종로구 삼청동 청와대 연무관으로 거점 공간을 이동하며 ‘대한어린이무용단’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15) 다음 <표 2>는 리틀엔젤스예술단 문화사절 단 활동기의 국내·외 주요활동을 정리한 것이다.16)
1) 문화사절단으로서의 해외공연
리틀엔젤스의 첫 해외공연은 1965년 9월 20일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의 사저 공원 에서의 비공식 공연이었다. 앞서 언급한 듯 아이젠하워는 1964년 설립한 한미문화자유재 단의 명예총재였으며17) 이 공연은 박보희의 요청에 의해이루어 진 것으로 게티스버그 관 저 정원에 무대를 급조하여 진행되었으며 당시 주미 대사 김현철이 동행하였다(박보희 1997). 이 공연은 『시카고 썬 타임즈(Chicago Sun Times)』, 『더 이브닝 스타(The Evening Star)』 등에 보도되었고18) 다음 날인 9월 21일 워싱턴 힐튼 호텔 대강당에서 재단의 이사 들과 미국의 정·재계 인사 300명의 관객으로 미국공연을 시작하였다(리틀엔젤스 60년사 자료집 1, 21). ‘The Little Angels: Brilliant Children’s Folk Dancing Group of Korea을 공연명으로 진행한 첫 해외공연에는 박성옥을 단장으로 하여 무용지도 및 독무 신순심, 무대감독 조영숙, 의상 디자이너 장혜숙, 조명 무대감독 차기봉, 5인의 악사 박성옥(아쟁), 한상묵(한유성, 장구), 한범수(대금, 해금), 김은산(피리, 호적), 이영숙(가야금), 그리고 27 명의 단원들19)이 참가했다. 첫 공연부터 3개월 100여일 간의 장기공연으로 미국 전역 25 개 주 70개 도시를 순회하며 학교, 호텔, 공연장 등에서 75회의 공연을 하였다. 레퍼토리는 1부에서 「파고다(Pagoda)」, 「무사놀이(Warrior Dance)」, 「장고춤(Hourglass Drum Dance)」, 「해병대(To the United States Marines)」, 「쌍고춤(Twin Dance Drum)」, 「부채춤(Fan Dance)」, 「북춤(The Pentinent Monk)」, 「농악(The Farm Dance)」을, 2부(Part II)에서는 「길쌈놀이(The Festival of the Weavers)」, 「밤길(Travel by Night)」, 「검무(The Sword Dance)」, 「시집가는 날(The Wedding Day)」, 「한국의 선율(Melody of Korea)」, 「탈춤 (The Mask Dance)」, 「무녀(The Dance of Sorceress)」과 마지막 작품(프로그램북에 Grand Finale로 표기)으로 합창 「미국은 아름다워(America the Beautiful)」로 한 시간 반 정도의 공연이 진행되었다(1차 프로그램 북). 단원들의 무용은 박성옥 단장과 악사들의 라 이브 반주로 진행되었다. 레퍼토리 ‘한국의 선율’은 연주자들의 음악공연이었던 것으로 파 악된다. 프로그램북에는 「The Court Dance」, 「The Sword Dance」, 「The Drum Dance」, 「Provincial Dance」, 「Interpretive Dance」가 소개되어 있는데 당시를 기억하는 단원과 참 가 악사들은 극장, 공연장의 상황, 관객, 공연의 길이에 따라 프로그램이 달리 공연되었다 고 증언한다(이노연 외 2019, 최충웅 면담 2019).
또한 미국의 CBS TV의 간판 프로그램이었던 「더 에드 설리번 쇼(The Ed Sullivan Show)」에도 출연(11월 28일)하게 되는데 에드 설리번(Ed Sullivan)도 리틀엔젤스의 자문 위원이었다. 이후 2차와 3차 공연에서도 같은 쇼에 출연하였다. 아이젠하워 사저 공연, 방 송 출연, 미국 전역의 순회공연은 미국 공연계에 리틀엔젤스가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귀국 길에는 일본을 경유(12.10~14)하여 동경의 요미우리(読売)홀에서 나흘간의 공연을 진행하였다. 이 공연은 대한민국주재 재일공보관과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 후원으로 “한국 새싹들이 베푸는 한국고전무용의 잔치, 일한친선사절 한국소녀민속무용단(日韓親善使節 韓國少女民俗舞踊團 더 리틀엔젤스 ザ·リトルエンゼルズ”로 소개되었다(프로그램 북).20)
2차, 3차, 4차 공연도 미국 순회공연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는데 특히 3차 공연은 미국의 대표적 공연장인 링컨센터의 최초 외국인 공연과 백악관 초청공연이 포함되어 이후 리틀 엔젤스의 국내·외 명성을 견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차 공연의 프로그램북부터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에드 설리번 쇼」 출연 장면이 사진으로 실리기 시작했다. 3차 공연에 서는 캐나다 순회공연도 진행하고 귀국하였다.21)
이어 4차(1969년), 5차(1970년 12월 25일~71년 1월 20일)에도 1차에 이어 귀국 길에 일본에 들러 공연을 했다. 최초 일본 순회공연인 4차 공연에서는 일본 측 초청자로 ‘더 리틀엔젤스 후원회’22)가 등장하는데 중요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연은 일본 문화청, 주일 한국대사관, 대한민국 주일 한국공보관, 재일 대한민국 거류민단 중앙본부(민단), ㈜ 롯데의 후원을 받았다. 약 한 달에 걸쳐(1969.1.7.~2.2.) 4개 도시에서 순회공연하였고, 5 차에서는 11개 도시 순회공연23)을 진행하였다(일본 프로그램북). 이 공연은 『마이니치 신 문(毎日新聞)』, 『요미우리 신문(讀賣新聞)』에 보도되고 리틀엔젤스는 NHK와 간사이 TV (関西テレビ) 등에도 출연하였다(한영혜 2019, 130). 1970년~1971년의 5차 공연은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수상을 방문하고 황태자 부처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수상이 관 람하며 큰 화제를 모았고 『한국신문(韓國新聞)』24)에 상세히 보도되었다. 2진 단독공연으 로 진행된 8차 공연(1972.11.9.~1973.3.4.)은 일본승공연합주최로 일본 단독공연으로 진행되었는데 도쿄 니찌게끼 극장(日劇劇場)의 200회 장기공연과 이후 오사카를 비롯 한 5개 지역25) 순회공연, 일본 적십자사 주최 베트남 전쟁복구기금 모집을 위한 특별 공연(1972.3.2.)이 진행되었다(프로그램 북). 일본 공연으로 이루어졌던 13차 공연 (1974.10.12.~2.14.)도 역시 ‘더 리틀엔젤스 후원회’ 주최로 니찌게끼 극장에서 진행된 40 일간 장기공연을 비롯하여 동경 등 7개 도시에서 184회의 공연을 하였다(일본공연 프로그 램북, 한영혜 2019, 133).26) 리틀엔젤스의 일본공연은 다음 항에서 다루게 될 ‘민간예술 전환기’에 일본 관람객의 리틀엔젤스회관 공연 관람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이는데 리틀엔 젤스의 일본공연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4차 공연은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19회 하계올림픽)의 민속예술제에 ‘한국민속예 술단 Grupo De Arts Folokirco Coreano, Korean Folk Arts Group’의 일원으로 파견되었 는데 본격적으로 정부사절단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민속예술단은 김백봉, 전 황, 김문숙 등 당대 무용계의 명인들과 리틀엔젤스로 구성되어 있었다.27) 멕시코 올림픽 이후 9차, 11차, 12차, 14차 공연도 정부사절단으로 파견되었으며 국가수교, 국제 스포츠 행사, 엑스포 등 외교행사와 국제적 관제행사에 파견되었다. 정부사절단 공연은 민간예술 단이었던 리틀엔젤스를 국가적 위상으로 승격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와대에서 직접 대 통령 내외를 만나 귀국보고회를 하고 다과회에 참석하는 등 국가대표 예술단으로 활동하 기 시작한다.
6차 공연에서 리틀엔젤스는 유럽으로 활동 지역을 넓히기 시작했는데 영국의 엘리자베 스 여왕의 어전 공연은 리틀엔젤스 공연에서 특히 중요한 공연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공 연은 9월 런던 공연 후 미국 순회공연 도중 영국 왕실로부터 특별초청을 받아 일부 미국공 연을 취소하고 공연에 참석한 후 다시 미국공연에 합류하였다. 영국여왕의 어전공연과 단 원 전원의 여왕 접견(1971년 11월 15일, 런던 팔라디움 극장)은 『대한뉴스』28)를 비롯한 방송과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리틀엔젤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리틀엔 젤스의 공연을 통한 각국 정상들과의 만남은 국가문화외교사절단의 역할을 한 셈이었다. 1971년 공연부터는 유병무(1938~2020)가 합류하며 합창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리틀엔젤스 단가」와 「엔젤의 노래」도 어전공연 후 기내에서 만들어졌다.
1971년 6차 영국 어전 공연 이후 1975년 15차 공연까지는 리틀엔젤스의 전성기였다. 7차 공연부터는 1진과 2진(8차)으로 나뉘어 각각 유럽과 일본으로 순회공연을 진행하였으 며 9차와 10차 공연(1973.7.6.~1973.12.31.)은 실제로 8차의 1진, 2진으로 각각 유럽, 미 국 및 캐나다로 순회공연을 진행했다. 11차, 12차, 13차 공연(1974.5.28.~1975.2.14.)은 9 차의 1진, 2진, 3진으로 각각 미국 및 캐나다, 동남아 및 유럽, 일본 순회공연을 진행했다. 14차와 15차 공연(1975.5.30.~1976.2.13.)은 10차의 1진과 2진으로 각각 미국-캐나다-남 미, 미국-캐나다-유럽 순회공연을 진행했다. 지역적으로 미국, 유럽, 일본을 제외한 지역 의 공연은 대부분 정부사절단이었는데 1974년 12차 공연의 동남아시아-중동-아프리카와 1975년 14차의 남미 지역 공연을 포함한다. 1976년 15차(10차 2진) 공연 이후 서울에서는 공연에서 실연으로 연주했던 음악을 스튜디오 녹음(지한영 직원 담당, 녹음장소 서울 레코 드)을 진행하는데 이후 공연에서 이 녹음 반주를 사용하게 된다(리틀엔젤스 60년사 자료집 1, 371).29) 1975년까지 전성기 이후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특별 축하공연과 캐나다 공연을 진행한 16차를 마지막으로 리틀엔젤스는 12년간의 해외 장기순회공연을 마무리한 다(김희선 2019).30) 선행연구에서 1960년대 당시 척박했던 한국예술계의 환경 속에서 리 틀엔젤스의 해외공연은 전무후무한 기록이었음을 강조한 바 있다(유진주 2016, 33~34). 1960~70년대 한국예술을 세계에 알렸던 민간 문화사절단으로서 리틀엔젤스의 역할은 중 요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다.
2) 문화아이콘 리틀엔젤스예술단 국내활동
문화사절단으로 해외에 한국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활약한 리틀엔젤스는 국내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통해 당대 한국의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리틀엔젤스의 첫 미국공연은 『대한뉴스』, 신문, 잡지, TV 프로그램 등의 매체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으며31)귀국 직후인 1966년 2월 서울, 부산, 대구에서 귀국 공연도 진행되었다(프로그램 북). 문화적 인프라가 풍부하지 않고 식민통치를 겪으며 자국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낮았던 시기, 리틀엔젤스는 전통예술과 한국문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리틀엔젤스의 귀국 공연은 1~2차 해외공연 이후에만 진행되었으나 이후의 해외공연도 꾸준히 국내 매체 를 통해 보도되었다.32) 또한 정부사절단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1968년 이후에는 국내 개최 주요 국제행사와 외국 대통령 방한 시 특별공연은 리틀엔젤스의 주요무대였는데, 1969년 니제르 공화국 대통령 방한, 1974년 미국 포드 대통령 방한, 1975년 가봉 봉고 대통령 방한 특별공연 등이다. 1975년에는 국내에서 리틀엔젤스 세계공연 10주년 기념공 연이 개최되며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리틀엔젤스의 국내 활동은 공연뿐 아니라 영화, 음반, 합창 활동으로 확장되었다. 리틀 엔젤스의 활동은 『대한뉴스』33)와 『리버티 뉴스』34)의 단골 소재였다. 다음 <표 3>은 리틀 엔젤스의 활동을 보도한 『대한뉴스』와 『리버티 뉴스』를 정리한 것이다.
문화사절단 활동기 리틀엔젤스의 해외활동은 다양한 신문보도를 통해 국내에 알려졌다. 연구를 위해 수집한 해당 시기 신문보도가 133건35)에 이를 정도로 국내에서 리틀엔젤스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았다. 1966년 조선일보는 “불과 2년 만에 세계연예계에서 고유한 위 치를 차지하는 총아가 되었으며 빈 소년 합창단처럼 많은 미국 사람들에 의하여 해마다 손꼽아 기다려지게 되었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1966.12.4. “리틀에인절스 무용단 인 기”)라고 소개하였는데 리틀엔젤스와 관련한 기사들은 대개 유사한 어조로 소개되었다. 이 를 통해 당대 리틀엔젤스에 대한 관심과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기사뿐 아니라 어린이 잡지를 통해서도 상세히 소개되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36)
1973년 개봉한 영화 「천사의 메아리」는 리틀엔젤스가 당대 문화 아이콘이었음을 잘 보 여준다. 이 영화는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활동하는 불치병 어린이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설정하였는데 실제 단원인 채한나가 주인공을 맡고 신순심(안무), 유병무(합창지휘), 국악 반주단이 함께 참여하였다.37)
리틀엔젤스 해외공연의 실황 녹화물이 해외에서 수상하기도 하고 『대한뉴스』, 『리버티 뉴스』, 각종 기사, TV 등을 통해 리틀엔젤스의 활동은 다시 국내·외로 소개되었다. 리틀엔 젤스의 활약은 한국의 높아지는 국제적 위상과 냉전 시기, 반공과 평화의 아이콘으로 상징 되었다(김희선 2019). 다음의 <표 4>는 리틀엔젤스가 출연한 국내·외 방송영상 및 영화 (1965~1980) 정리한 것이다.38)
1974년에는 리틀엔젤스 단원들의 교육을 위해 리틀엔젤스예술학교가 국가의 전폭적 지 원으로 설립·개교되었는데 이후 1976년 시행된 국어순화 사업에 따라 리틀엔젤스예술학교 는 선화예술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문화사절단 활동기의 초기는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창단기에 구축한 공연레퍼토리 를 재정비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후 점차 일본, 캐나다, 유럽, 동남아, 남미 등의 공연을 진행하며 레퍼토리를 고정화하였고 국내에서는 귀국 공연, 해외 대통령 방한 특별공연, 국 내 개최 국제 이벤트 참여 등 국가사절단 행사 외에도 음반, 공연, 영화 등을 통해 소개되 며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 1965년부터 시작된 민간 어린이예술단 리틀엔 젤스의 16차 해외공연과 국가문화사절단 활동으로 이어졌고 국내적으로는 문화아이콘으 로 인식되는 중요한 시기였으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리틀엔젤스의 명성은 이 시기의 활동 에 기반한다. 1977년 리틀엔젤스 예술학교 1기 졸업생이 배출됨과 동시에 민간예술단으로 전환되는 다음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3. 리틀엔젤스예술단 민간예술단 전환기(1977~1989)
1976년까지 문화사절단으로 세계무대에서 활약을 이어온 리틀엔젤스는 1976년 미국공 연 이후 해외공연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해외활동을 중심으로 살핀 신은경(2004:16) 의 선행연구에서는 이 시기(1981~1990)를 ‘침체기’로 파악했으나 이 연구에서는 리틀엔젤 스 활동 60년사에서 이 시기의 특징을 드러낼 수 있도록 ‘민간예술단 전환기’로 명명하고 해외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한 선-후 시기로부터 구분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궁금한 것은 이 시기에 리틀엔젤스는 어떠한 이유로 해외공연을 지속할 수 없었을까의 질문이다. 김희 선(2019)은 선행연구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역사적 조건이 배태한 국제정치적 상황으로 해석했는데 이번 연구를 통해 관련 자료를 확보하여 확인하였다.
또한 민간예술단 전환기 국내 예술계의 변화라는 맥락 안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 국제 적으로 1976년은 한-미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고, 국내적으로는 반공과 조국 근 대화를 기치로 했던 박정희(1917~1979) 정권(1963~1979)이 1979년 막을 내림으로써 새 로운 시대에 대한 요청이 팽배했던 시기였다. 1972년에는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며 ‘세계 속의 한국’을 모토로 전통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해외홍보전략이 수립되었으며 이는 또한 국제무대에서 북한과의 경쟁을 의식한 것이기도 하였다(김희선 2021). 이를 배경으로 국립공연단체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며 해외공연이 빈번해졌다. 1962년 설립된 국립무용 단이 1973년 본격적으로 국립발레단과 국립무용단으로 분리되며 전문화를 이루어가기 시 작했고 1976년부터는 해외 순회공연이 증가했다(심정민 2020, 278. 293). 1971년 무용단 을 신설한 국립국악원도 1970년대에 해외공연이 급증(김현철 2021, 347)39) 했다. 이렇듯 문화사절단의 역할을 국가예술기관이 주도하자 태생적으로 민간단체이자 어린이예술단인 리틀엔젤스에게 허락된 ‘국가대표’ 문화사절단의 역할은 지속하기 어려웠음도 짐직할 수 있다. 예술학교의 설립으로 학생 신분인 단원들의 해외공연으로 인한 장기결석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요한 요인이었다.
이 시기에는 1985년 「쓰꾸바 세계박람회 한국의 날」 특별공연에 참가한 일본공연(17차, 총 4회 공연)이 유일한 리틀엔젤스의 해외공연이었다. 55명의 단원이 출연한 이 공연은 1976년 이후 9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는데 1주일 가량의 기간동안 총 4회의 공연을 진행 한 후 귀국하였다. 1부에서는 「화관무」, 「처녀총각」, 「부채춤」, 「천사춤」, 「시집가는 날」, 「북춤」을, 2부에서는 「장고춤」, 「꼭두각시」, 「강강수월래」, 「가야금 병창」, 「농악」이 공연 되었다(프로그램 북). 창단기와 문화사절단 활동기에 정립된 레퍼토리가 큰 변화없이 그대 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간예술단 전환기의 리틀엔젤스는 국내에서 개최된 다양한 예술제, TV 출연, 주한외국 인 행사, 엑스포, 서울올림픽, 서울장애자올림픽 등 국제 메가 이벤트에 참가하고 어린이 관련 행사, 합창 행사, 크리스마스 콘서트 등을 개최하며 국내 활동에 집중했다. 서울올림 픽의 개회식에서 리틀엔젤스 48명의 단원들이 「북춤」을 선보여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로 부터 공로패를 수여받기도 했다. 서울장애자올림픽에서는 「북의 제전」에 국립무용단 55명 과 리틀엔젤스 48명이 함께 북춤을 공연했다(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자료집 1988).
1981년 리틀엔젤스예술회관이 준공되자 리틀엔젤스는 민간예술단으로서 안정된 거점을 확보하여 공연과 교육기관의 역할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례로 ‘88 서울올림픽 이후 ‘서울올림픽 경축 리틀엔젤스 특별공연’이 9월 28~30일, 리틀엔젤스예술회관에서 개 최되었고 국내 개최 국제행사에 참석은 민간예술단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 다. 앞서 정은숙(2003, 85-94)도 연구부록에 ‘행사공연’, ‘순수공연’, ‘종교공연’으로 구분 한 바 있다. 이어 신은경(2004, 23-25) ‘기획공연’, ‘만찬공연’, ‘호텔공연’, ‘야외공연’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다. 또한 과거 단원들과의 비공식 면담에 의하면 리틀엔젤스예술회 관에서도 상설공연형태의 공연이 수시로 있었으며 일본에서 온 단체관람객이 참관하였다 고 전한다. 특히 리틀엔젤스예술회관은 당시 디너가 가능한 형태의 극장무대로 디너를 겸 한 공연도 개최되기도 했다(코지 노다 면담). 그러나 이 시기 공연은 프로그램 등 1차 자료 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신문기사(55건)를 통해 민간예술단 리틀엔젤스의 활동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40) 다음 <표 5>는 리틀엔젤스예술단 민간예술단 전환기의 대표공연 및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1977년 새롭게 명칭이 변경된 선화예술학교의 출범과 함께 ‘대한어린이무용단’이 진행 한 단막극 「백의민족」, 1978년 시민위안공연(어린이대공원), 1979년 6개 어린이 합창단 공연, 주한 외국인 한국민속의 밤(중앙국립극장), 국군용사위문대공연(세종문화회관), 1980년 참전용사 위안의 밤, 1981년 특집쇼 「풍년이 왔네」 출연, 1982년 주한외국인 대상 공연, 1982년 예술회관 준공 기념 공연, 1983년 세종문화회관 공연, 1984년 어린이날 특 집프로그램 출연, 리틀엔젤스 크리스마스 페스티벌, 1985년 일본 「쓰꾸바 세계박람회 한 국의 날」 행사 공연, 1986년 어린이잔치 롯데제과 주최 리틀엔젤스 공연, 1987년 리틀엔 젤스 세계애창곡집(CD) 출반, 1988년 청소년의 달 리틀엔젤스 공연, 서울올림픽 공연, 서 울올림픽 경축 특별공연, 1989년 리틀엔젤스 산하 가족극단 뮤지컬 단원 모집 등이 프로그 램과 신문기사 등을 통해 확인한 주요 공연들이다. 1989년의 마지막 기사는 “리틀엔젤스 소련공연 주선”41)으로 1990년 이후 리틀엔젤스의 평화사절단 활동기로 이어지게 된다.
4. 리틀엔젤스예술단 평화사절단 활동기(1990년~현재)
민간예술단으로 전환을 마친 리틀엔젤스는 1990년 일본 베아트(BEART) 음악협회 초청 일본 전국 순회공연을 시작으로 해외공연을 재개한다. 1부에서는 「화관무」, 「처녀총각」, 「부채춤」, 「선녀춤」, 「검무」, 「북춤」을, 2부에서는 「장고춤」, 「꼭두각시」, 「강강수월래」, 「탈춤」, 「가야금병창」, 「시집가는 날」, 「농악」이 공연되었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 탈냉전 시기로 접어들면서 소련, 북한, 중국, UN 참전용사 공연 등을 진행하였는데 1990년부터 2022년 초 84차 해외공연까지를 포함하여 정리하고자 한 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공연은 ‘리틀엔젤스, 철의 장막을 뚫다’, ‘이데올로기 의 장벽을 넘나드는 자유의 천사들’(프로그램북)로 홍보된 1990년 당시 소련의 모스크바 에서 진행된 공연이다. 1990년 공연은 리틀엔젤스의 재도약을 선포하는 공연이자 평화사 절단으로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공연은 1990년 문선명 총재와 고르바초프 대 통령의 크렘린 궁 회담(1990.4.11.)에 리틀엔젤스가 민간예술단으로 함께 참여한 공연이었 다. 이 공연에는 영부인 라이사 여사가 참석하였고, 이후 1994년 3월 고르바초프와 라이자 여사의 서울 방문시 리틀엔젤스 공연에 참석했다(박보희 2021). 1990년 모스크바에서 귀 국 후 ‘소련 모스크바 공연기념 리틀엔젤스 특별대공연’(5.24.~5.25.)이 세계일보 주최, MBC 후원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개최되었다(프로그램 북).
1990년 모스크바 공연 이후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지구적 냉전 종식 이후 리틀엔젤스 의 활동은 전환을 맞게 된다. 소련(1990) 공연에 이어 소련이 해체되자 러시아(1991), 이 스라엘(1996), 북한(1998), 중국(2001), UN 참전 16개국 순회공연(2010~2012), 6.25 전 쟁 UN 의료지원국 순회감사공연(2011), 한국전쟁 휴전 기념공연(2012) 유엔군 참전·정전 협정 60주년 공연(2013), 광복 70주년 기념 유럽 특별 순회공연(2015) 등의 공연을 진행하 였다. 앞서 국제적으로 냉전 시기이던 문화사절단 활동기, 반공을 명분으로 미국, 유럽, 반 공 아시아와 남미 지역에 ‘파견’되었다면 탈냉전기의 맥락이 평화사절단 활동의 배경이 된 것이다.
1991년 러시아 공연(21차)은 냉전 종식 이후 첫 러시아 공연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서 세계 100여 개국에 방영된 24시간 생방송 인터네셔널 텔레톤 행사에 참석하고 키로프 마린스키 극장 무대공연을 5회 진행하였다. 바로 이어 1992년에는 미국 뉴욕 등 10개 도 시 순회공연으로 진행(22차)되었는데 1976년 공연 이후 16년 만의 미국공연이었다.
평화사절단 시기 가장 중요한 공연은 1998년 성사된 민간 최초의 북한공연인 평양공 연42)이다. 5월 1일에서 12일에 걸쳐 총 38명 단원이 방문하고 평화봉화예술극장(5월 4~5 일)과 만수대 학생소년궁전(5월 7일)에서 공연이 올려졌다. 구 소련, 북한의 공연은 앞서 냉전시기 미국중심의 해외공연과의 관련성에서 파악했던 김희선의 연구(2019)와 관련지어 본다면 탈냉전의 맥락에서 재해석이 필요한 지점이 될 수 있다.43) 평양공연은 1부에서 「화관무」, 「처녀총각」, 「부채춤」, 「시집가는 날」, 「가야금 병창」, 「밤길」, 「북춤」을 2부에 서 「장고춤」, 「꼭두각시」, 「강강수월래」, 「탈춤」, 「농악」, 「합창」을 연주하였다. 그런데 이 들의 방북 일정은 공연뿐 아니라 주요기념지 방문, 만찬, 관광, 북측 공연 관람 등이 포함 되었으며 북한의 어린이들과의 친교 등 ‘민간’과 ‘어린이’를 키워드로 하는 평화 이벤트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리틀엔젤스의 평양공연은 한국문화재재단 제작 「리틀엔젤스 예술단 평양공연」(1998) 영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44)
이 평양공연은 이후 민간 남북교류로 이어졌는데, 2000년 5월 24일~30일, 평양학생소 년예술단 서울공연이 답방으로 초청된 것이다.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서울공연의 레퍼토 리는 「반갑습니다」(노래와 춤), 「백두의 말발굽 소리」(경음악), 「통일 무지개」(4중창), 「꽃 놀이」(무용), 「제일 고운 옷」(인형춤), 「모란봉」(장새납 독주), 「제일 좋은 내 나라」(민요독 창), 「통일렬차 달린다」(손풍금 중주), 「꼭꼭 숨어라」(민속무용), 「고향의 봄」(녀독창), 「김 치깍두기 노래」(녀독창), 「명절의 아침」(무용), 「옹헤야」(가야금 3중주), 「모자놀이」(민속 놀이), 「유격대 말파리」(목금을 위한 경음악), 「승전고 울려라」(장고 재주), 「욕심이 하늘 갈래요」(남독창), 「다시 만납시다」(독창과 방창)로 구성되었다. 이 공연은 “남북정상회담 을 축하하고 남북화해와 협력 사업의 일환으로 주식회사 평화자동차가 초청하고 재단법인 한국문화재단이 주관하는 ‘평양 학생 소년예술단’의 서울공연을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 복하고 국민적 화합을 도모”하고자 지휘 및 지원 24명, 단원 76명으로 총인원 100명이 초청되었다.45) 공연은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총 5회 진행되었으며 KBS TV로 중계 방송되었다. 이들의 환영 만찬은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진행(9.24.)되었는데 리틀엔젤 스는 「민족의 고동」, 「처녀총각」, 「부채춤」, 「꼭두각시」, 「가야금 병창」, 「춤추는 분수」, 「장난감 병정」, 「합창」을 공연하였다.46) 분단 이후 최초의 공적인 남북한 예술교류는 1985년 ‘남북한 고향방문단 및 예술 공연단 서울·평양 동시교환’이었다. 이후 1990년 10월 에는 제1회 「범민족 통일음악회」와 「‘90년 송년통일음악제」가 개최되고 1998년부터 10년 간 남북예술교류가 지속되었는데 리틀엔젤스의 공연은 남북예술교류를 시작한 공연이었다 (배인교 2018).
이 시기에는 리틀엔젤스 세계순회공연 30년 기념 특별공연 「태극기를 세계로」(1995), 리틀엔젤스예술단 창단 40주년 축하공연(2002), 리틀엔젤스예술단 창단 50주년 축하공연 (2012), 리틀엔젤스 예술단 60주년 축하공연(2022)을 통해 리틀엔젤스의 역사를 회고하는 공연을 진행하였다. 또한 2003년(45차) 리틀엔젤스는 한-중 수교 10주년을 기념하는 「한 -중 우호 중국북경 왕부징 국제예술제」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5회의 공연을 진행하고 만 리장성에서 중국 CCTV47) 특별촬영도 진행하였는데 이 공연은 리틀엔젤스의 최초의 중국 공연이었다. 이어 2009년 5월 UN군 한국전쟁 참전 60주년 기념사업회가 발족되고 2010 년 6월부터 2011년까지, 총 4차(58차, 59차, 60차, 62차)에 걸쳐 총 16개국 순회공연을 진행하였다. UN군 관련 16개국 순회공연은 2012년 MBC TV 프라임 다큐멘터리 「천사들 의 또 다른 50년」으로 방영되었다. 이어 UN군 5개국 의무지원국 순회공연(65차)도 진행 되었다(리틀엔젤스 60년사 자료집 2부). 소련, 북한, 중국, 한국전 참전 UN군 16개국 순회 공연 등 이 시기 리틀엔젤스의 공연은 이념으로 양분화되었던 냉전을 넘어 평화사절단으 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행보라 할 수 있다.
이 순회공연을 제외하고 이 시기 대부분 공연은 단기적 일회성 공연으로 진행하였다. 1990년 18차 해외공연으로 시작으로 2019년 83차 해외공연까지 마치고 이후 코로나 팬데 믹으로 인해 해외공연을 중단하였다가 2022년 1월 두바이 EXPO 공연으로 84차 공연까지 진행하였다. 2022년에는 60주년 기념공연이 5월과 12월 두 차례 진행된다. 5월 28일 유니 버설아트센터에서 진행된 공연 「리틀엔젤스예술단 창단 60주년 천사들의 비상 예술로 세 계로 미래로」에서는 1부에서 「궁」, 「처녀총각」, 「부채춤」, 「시집가는 날」, 「강강수월래」, 「가야금 병창」, 「북춤」, 2부에서는 「장고놀이」, 「꼭두각시」, 「바라다」, 「설날」, 「화검」, 「탈 춤」, 「농악」, 「합창」이 공연되었다. 배정혜(1944년생)48) 예술감독의 취임 이후 새로 구성 한 「궁」, 「바라다」, 「화검」 세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또한 단원 출신으로 현재 리틀엔젤스 예술단 동문회장인 김덕수(1952년생)와 ‘앙상블 시나위’의 라이브 반주로 진행되어 문화사 절단 시기의 정취를 담아 리틀엔젤스의 역사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다음의 <표 6>은 리틀 엔젤스예술단 평화사절단 활동기의 해외 및 국내 주요공연을 정리한 것이다.
Ⅲ. 나가며
리틀엔젤스 60년사를 한국공연예술사 안으로 소환하고자 하는 이 연구는 1962년부터 2022년까지 리틀엔젤스의 활동을 창단기, 문화사절단 활동기, 민간예술단 전환기, 평화사 절단 활동기로 나누어, 시기별 주요 공연과 특징을 살펴보았다. 리틀엔젤스예술단은 ‘창단 기’에 단원, 운영, 레퍼토리 등을 정비하였다. 국제정치적으로 냉전기이자 국가주의와 민족 주의가 중요했던 ‘문화사절단 활동기’에는 미국, 유럽, 아시아, 남미 등 ‘자유세계’에 파견 되는 민간예술단과 국가문화사절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민간예술단이었지만 준비가 부족했던 국가예술단을 대신하여 국가대표 문화사절단으로 활동하였다는 점에 중요한 의 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한편 통일교의 해외선교와의 관련성(박보희 2000;양편승 2008; 김 병년 2014; 김희선 2019)과 이후 당대 북한과의 국제적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유국으 로서의 국가정체성 확보라는 국가주의적 차원의 효용(김희선 2019, 2021)에서 리틀엔젤스 해외공연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민간예술단 전환기’인 1980년대에는 해외보다 국내의 다양한 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서 울올림픽 등의 주요 행사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며 한국의 대표 민간예술단의 역할을 이어 나갔다. 또한 선화예술학교의 설립을 통해 한국의 전문예술교육에 기여했으며 민간극장인 유니버설아트센터를 설립하여 어린이 공연과 크리스마스 등 계기성 공연을 확장해나가며 민간예술단으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1991년 이후 리틀엔젤스는 해외공연을 재개하는데 소련, 북한, 중국, UN, 한국전쟁참가 국 순회공연 등을 통해 ‘평화사절단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리틀엔젤스의 평화사절단 전환 은 국제정세적으로 탈냉전기적 행보로, ‘세계평화’를 키워드로 하는 다양한 해외공연은 한 국공연예술이 세계예술 문화다양성 기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연구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우선 리틀엔젤스 60년사를 기술하기 위해 다양하게 자료 의 발굴과 수집으로 리틀엔젤스 실체에 더욱 근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양한 후속연구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다양한 자료의 교차 점검을 통해 선행연구에서 세밀히 살피 지 못했던 리틀엔젤스 초기의 명칭, 설립년도 등을 확인하여 후속 연구에 정확한 자료로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는 영상 및 방송, 신문, 음반자료 등을 목록화하여 정리하 고 최초 영상자료(1964)를 발굴함으로서 그간 궁금했던 ‘창단기’의 활동을 구체화할 수 있 었으며 이를 통해 본격 해외활동기의 최초 해외자료(1966)와 비교고찰도 가능하게 되었다. 네 번째는 해외에 존재하는 리틀엔젤스 관련 자료의 존재를 확인한 점이다. 이번 연구에서 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지역의 자료만 확인한 셈인데 추후 일본, 동남아, 남미지역의 방송, 영상, 신문, 잡지 자료도 확보하여 연구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리틀엔젤스 의 60년사를 거시적 관점에서 살펴 한국현대공연사에서 놓친 중요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 었다.
리틀엔젤스는 ‘고유의 전통예술을 가진 문명국’으로 국제적으로 홍보하는 일에 공헌하 였다. 특히 냉전의 맥락에서 공연예술을 통한 남북의 국제경합에서도 리틀엔젤스의 해외 공연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김희선 2021). 무엇보다 식민지 단절의 역사를 관통하여 현대 전환기에 접어들며 제도화를 모색하던 전통예술계에, 해외공연을 통한 리틀엔젤스의 국위 선양은 전통예술이 국가적·사회적 효용을 확인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리틀엔젤스 의 다양한 역할과 공헌에도 불구하고 리틀엔젤스예술단은 종교단체에서 시작한 어린이예 술단이었다는 점, 당대 전문예술가들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동이나 역량이 예술계안으로 수렴되지 못한 점 등은 리틀엔젤스의 활동이 현대공연예술사 안에서 역할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라 할 수 있다. 또한 변화하는 세계와 한국의 공연시장에서 리 틀엔젤스에 대한 관심은 예전과 같지 않다는 점에서 미래를 위한 변화의 고민은 필요하다. 리틀엔젤스의 표준 레퍼토리는 근대에서 현대로 전환기의 일면을 그리게 해 준다. 리틀엔 젤스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세대 관객이 있고 한국적 특수성을 담은 독특한 레퍼토리와 구성, 60년의 역사를 가진 유일한 어린이예술단으로서 국내·외 공연시장에서 리틀엔젤스 의 희소성과 가치는 높다. 그러나 여전히 잔재하는 ‘반공-국가주의 문화사절단’ 의 내러티 브는 리틀엔젤스를 특정한 시·공간에 머무르게 한다. 문명국으로서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 리려는 문화사절단, 이분화된 세계의 평화사절단의 역할을 극복하고 환경과 불평등 같은 동시대 전지구적 아젠다에 주목하는 미래세대 주역이 되는 어린이예술단으로의 변화를 제 언해보고자 한다.
이 연구는 세계와 한국의 현대사가 관통하는 교차지점에 구성된 리틀엔젤스예술단의 독 특한 위치와 활동 양상의 파악을 통해 한국현대공연예술사의 단면을 조망해 볼 수 있었다. 리틀엔젤스의 60년은 시·공간이 함께 요동친 현대공연예술사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반세 기가 넘는 공연사를 한 편의 논문 안에서 살피는 일은 불가능하도록 리틀엔젤스의 활동은 다양했고 앞으로도 살펴야 할 자료는 매우 방대하다. II편에서는 리틀엔젤스의 제도와 운 영, 레퍼토리의 구성과 특징, 세계공연예술사적 의미를 고찰할 것이다. 리틀엔젤스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로 이번 연구를 통해 새롭게 던지게 된 질문들은 추후 개별 연구를 통해 상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향후 리틀엔젤스 연구가 한국 춤과 춤반주의 무대화 과정, 레 퍼토리 변천, 참여 예술가들과 근현대 예술가들과의 관계와 계보, 무대 운영, 국제교류, 냉 전과 탈냉전 등 공연사의 다양한 연구주제로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현대기에 활동한 리틀 엔젤스 연구를 통해 공연예술사 연구에서 1차 자료와 당대 기록의 소중함을 절감하였다. 민간예술단의 당대사가 한국공연예술연구의 중요한 연구대상이자 미래의 중요한 연구과제 가 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추후 이와 관련한 후속연구를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