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1)
1962년 창단되어 1965년 미국공연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민간예술단으로 활약하고 있는 리틀엔젤스예술단(이하 리틀엔젤스)은 2022년 5월 창단 60주년을 맞았다. 리틀엔젤스의 60년은 국제정세와 한국 현대사의 시⋅공간이 그대로 담긴 타임캡슐이라 할 만큼 한국의 지정학적⋅역사적 시간을 관통해 왔다. 리틀엔젤스가 창단되어 해외공연을 펼치기 시작한 1960년대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이념 갈등, 민족 전쟁과 분단을 거쳐 국민국 가 수립을 이루기까지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다. 국립공연예술단체가 본격적인 틀을 갖추기 이전 리틀엔젤스는 해외활동을 주력으로 삼아 한국 춤과 음악을 소개하며 해외국가문화사절 단의 역할을 담당하고 한국인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킨 문화적 아이콘이었다.
리틀엔젤스 60년 활동의 학술적 고찰은 한국공연예술사 연구에 필요한 작업이었음에도 그간의 제한적 연구에 따라 한국공연예술사의 기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 없었다. 무엇보다 리틀엔젤스는 민간의 ‘어린이 단체’(김영희 외 2014, 394)로 ‘국위선양’과 ‘문화 외교사절’의 주체로서의 성과(정은숙 200; 김영희 외 2014, 394; 유진주 2016;고경희 2016, 137)가 강조되어 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리틀엔젤스 60년의 역사는 한국공연예 술문화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한 자산이다. 앞서 본 연구자는 이전의 연구를 통 해 리틀엔젤스의 의미와 역할을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김희선, 2019). 무 엇보다 당대의 춤과 음악 유산을 바탕으로 구성된 리틀엔젤스의 레퍼토리, 무대화, 양식화 는 한국공연예술의 현대적 전환기의 중요한 변곡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시기 특정한 방식 의 무대화와 레퍼토리의 리틀엔젤스의 실험적 실천은 이후 한국현대공연물의 구축에도 중 요한 기초를 제공했기에 이 과정을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리틀엔젤스는 ‘어린이 단 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대로서는 드문 ‘전문예술단’의 운영체계를 가지고 해외 전문매니 지먼트를 통해 장기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예술단체였다. 더 나아가 리틀엔젤스 를 당대 한국과 세계 공연계에 등장한 ‘어린이예술단’의 맥락 안에서 고찰하는 일도 필요 하다. 리틀엔젤스 해외공연의 초기 악사로 참여했던 예술인들은 훗날 국악계의 명인들로, 이들의 리틀엔젤스에서의 활동, 역할, 경험은 현대 이양기 국악 제도화의 단면을 포착할 여러 단서를 제공한다. 현재의 표준 레퍼토리의 반주음악이 국악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 성되었다는 점에서도 고찰의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한국공연예술계의 열악한 상황 속에 서 리틀엔젤스는 당대 전문예술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였다. 또한 리틀엔젤스를 통 한 해외공연의 경험은 훗날 전통예술의 해외 진출 방식, 레퍼토리 개발, 장르 발굴 등에도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또한 한국 춤과 음악뿐 아니라 리틀엔젤스의 합창 활동도 당대 세 계와 한국의 합창문화 이해에 중요한 사례가 된다. 무엇보다 리틀엔젤스는 국내에서 특권 과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어려서 전문적인 예술교육을 받고 세계적 무대에서 전문 공연 활동을 펼친 단원들의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으며 이들의 경험은 한국 전통공연예술계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리틀엔젤스의 존재는 어린이들의 예술계 유입에 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많은 단원들은 한국의 대표 예술가로 성장하였다. ‘8세에 서 13세의 소녀’단원을 중심으로 했던 리틀엔젤스는 한국에서 예술 조기교육 뿐 아니라 여성 예술가의 배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김희선 2019, 143-145).
앞서 한국문화재단은 두 차례에 걸쳐 리틀엔젤스 활동을 자료집(화보집)으로 출판하였 다(1990, 2002). 또한 리틀엔젤스는 한국무용과 공연을 통한 국위선양과 문화외교의 대표 적 성과로 기술되어 왔다(유미희 2001; 김영희 외 2014;유진주 2016). 리틀엔젤스에 대 한 학술연구는 두 편의 석사학위논문으로 시작되었다. 리틀엔젤스의 현황과 발전방안연구 (정은숙 2003)와 리틀엔젤스 40년사 연구(신은경 2004)는 리틀엔젤스 출신단원들의 석사 학위논문으로, 리틀엔젤스에서 출판한 선행자료와 웹사이트에 소개한 자료를 기반으로 재 정리한 연구물들로, ‘국위선양의 리틀엔젤스’ 서사를 재현한 연구물로 평가할 수 있다. 유 진주는 한국문화사절단으로 한국춤의 해외공연을 연구한 박사학위논문에서 리틀엔젤스의 초기 해외활동을 정리하였다(2016, 35~45). 리틀엔젤스의 단원으로 이후 가야금 교사로 활동했던 홍주희는 리틀엔젤스 가야금 교육(홍주희 2003)을 주제로 연구하였으며 리틀엔 젤스의 교육을 심정문화예술교육(정하연 2021)의 차원에서 해석하거나 영재로서 리틀엔젤 스 단원을 연구(이승연 2022)등 리틀엔젤스 교육 관련 연구도 진행되었다. 또한 세계평화 통일가정연합과 리틀엔젤스의 관계를 살핀 김인수(2022)는 리틀엔젤스 활동을 선행문헌을 통해 개괄적으로 정리하면서 “평화문화정신”과 연계하여 논의하였다.
앞서 본 연구자는 1965~76년까지 해외공연에 주력한 리틀엔젤스의 존재양상에 대한 질 문을 던지고 기존에 살펴본 바 없었던 다양한 1차 자료와 외교문서 등을 검토하여 1965~1976년 사이 활발했던 리틀엔젤스의 해외공연이 당대 글로벌 문화냉전과 국가주의 맥락에서 수행된 문화사절단 활동이었음을 고찰하였다. 이에 더해 리틀엔젤스 이해를 위 해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설립과정과 관여한 인물, 초기 춤과 합창 레퍼토리 구성과 특 징, 해외공연활동, 참여 악사도 살펴보았다(김희선 2019). 그러나 1965년~1976년 시기로 한정하여 살펴보았고 1차 자료가 빈약한 상황에서 1967년 이후의 활동, 예술단의 운영과 제도, 구체적 무용 레퍼토리의 변천, 무용과 반주음악의 관계, 참여 악사들의 구체적인 면 면, 리틀엔젤스 국내 활동 등의 고찰은 후속 연구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이 연구는 앞서 시도된 바 없는 리틀엔젤스 60년의 국내⋅외 활동을 한국과 세계 공연 예술사 안에서 재맥락화하는 입체적 고찰을 통해 의미를 논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앞서 연구들이 살핀 바 없는 다양한 공연 프로그램, 메모, 국내⋅외 신문, 영상, 음반 등의 1차 자료, 리틀엔젤스 관련 출판물, 선행연구, 인터넷 자료, 면담 등 다양하게 수집한 광범위한 자료를 살피는 실증적 연구로 리틀엔젤스 60년 활동의 실체에 근접해볼 것이다. 특히 이 연구는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앞서 구체화되지 않았던 시기별 활동과 특징, 리틀 엔젤스의 제도와 운영, 레퍼토리의 구성과 특징, 세계공연예술사적 의미를 논의하는 시론 적 연구이다. 앞서 60년사를 개괄적으로 살핀 I편과 연속성을 갖는 이번 II편에서는 리틀엔 젤스의 제도와 운영, 레퍼토리의 구성과 특징, 세계공연예술사적 의미를 차례로 고찰할 것 이다. 앞서 I편에서는 리틀엔젤스예술단 60년사를 시기별로 리틀엔젤스예술단 ‘리틀엔젤스 예술단 창단기’(1962~1964), ‘리틀엔젤스예술단 문화사절단 활동기’(1965~1976), ‘리틀엔 젤스예술단 민간예술단 전환기’(1977~1989), ‘리틀엔젤스예술단 평화사절단 활동 기’(1990~현재)로 구분하였다. 이 연구에서 등장하는 시기별 명칭은 앞의 연구를 따르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2)
Ⅱ. 리틀엔젤스예술단의 제도와 운영
리틀엔젤스는 한국공연예술계가 현대로 전환되던 1960년 초반 설립되었다. ‘창단기’ 리 틀엔젤스는 1962년 통일교회 어린이무용단으로 시작하여 1963년부터는 해외 활동을 목표 로 하는 어린이 민속예술단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전통예술의 국제적 소개라는 구체적 지 향을 구상하며 신입단원을 모집하였다. 1963년부터는 해외공연을 위한 준비3)로서 한국적 레퍼토리의 구성과 무대화에 주력하였고 1964년까지 교회, 미군 부대, 한국의 집 등 외국 인 대상 문화공연을 통해 단원들을 훈련시키고 레퍼토리를 정비하며 점차 예술단으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964년 3월 미국 워싱턴에 한미문화자유재단(Korean Cultural Freedom Foundation, KCFF)을 설립하고 첫 사업으로 시작한 리틀엔젤스의 해외공연은 1965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한미문화자유재단의 명예회장으로 위촉되었던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의 사저공연을 시작으로 약 100일간에 걸친 첫 장기순회공연을 무사히 마 치고 미국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한미문화재단의 운영, 홍보, 미국 내 기부금 모금활동, 국내 단원모집과 훈련, 악사선발 등의 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한다(김 희선 2019).
‘문화사절단 활동기’인 1960~70년대 일부 해외공연은 정부파견사절단으로 활약한 바 있었으나 리틀엔젤스는 특수법인 재단이 운영한 민간예술단이었다. 미국에서 설립된 법인 인 한미문화자유재단이 리틀엔젤스의 해외공연의 자금을 담당하고 해외투어를 기획했으며 이후 1969년 국내에 한국문화재단이 설립되고 교육기관으로 리틀엔젤스예술학교와 상주 공연장으로 리틀엔젤스예술회관이 설립되자 제도, 운영, 공연방식, 교육과정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민간예술단으로서 리틀엔젤스를 전문예술단체라 명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리틀엔젤스는 ‘창단기’와 ‘문화사절단기’에 해외공연에 앞서 매 해 새로운 단원과 악사를 선발해 운영했다. 또한 공연의 주체였던 예술가의 차원에서 본다 면 레퍼토리 교육과 훈련을 통해 참가한 어린이 무용단원, 어린이 단원이었지만 공연출연 료를 지급받았던 특기단원, 반주악사로 참여한 성인 예술가가 혼재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리틀엔젤스는 이후 설립되는 학교를 통해 예술교육기관의 성격도 겸하고 있었다고 보여지 기 때문이다. 리틀엔젤스는 이러한 차원에서 이 연구에서는 리틀엔젤스를 준 전문예술단 체라 파악하고 리틀엔젤스의 제도와 운영을 초기부터 현재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준 전문예술단체로서 리틀엔젤스예술단 제도
리틀엔젤스는 ‘창단기’인 1962년 통일교회 주일학교 무용교육으로 시작하여 1963년 무 용연구소를 개소하며 해외공연을 위한 무용단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1964년 국내에서는 한국소년소녀무용단, 해외에서는 The Little Angles 공식명칭으로 사용했으며 1965년 국내 에서는 선화어린이무용단을 정식명칭으로, 첫 해외공연에서부터 The Little Angles를 사용 했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시기에 따라 한국소년소녀무용단, 선화어린이무용단, 대한어린이 무용단, 리틀엔젤스 등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신문에서는 통일교회 어린이무용단, 선화 어린이무용단, 한국소년소녀무용단, 대한어린이무용단, 리틀엔젤스, 리틀-에인절스, 리틀 에인절스, 리틀엔젤스무용단, 리틀엔젤스합창단 등으로 명칭이 혼용되어 불리웠다(김희선 2022). 리틀엔젤스의 명칭은 교육과 연습을 위한 거점 공간 및 예술단의 조직 및 성격에 따라서도 변화되었는데 다음의 <표 1>은 리틀엔젤스예술단의 시기별 명칭과 거점공간을 정리한 것이다.
1차에서 4차 공연까지는 정규예술단의 제도를 완전히 갖추었다기보다 해외공연을 위한 단원모집공고와 오디션을 통해 단원을 선발하여 공연할 레퍼토리를 교육하여 해외공연을 진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선행연구에서도 언급한 듯 1962년 주일학교 어린이 17명을 대상 으로 안무가 신순심(1938~)이 아이들의 무용을 교육했고 1963년 7월 27일 낙원동 중앙문 화회관에 정식으로 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다. 무용연구소를 개소 이후 신문광고와 주변의 홍보를 통해 30여명에 이르는 단원을 모집하였다. 1963년 9월에는 ‘을지로 연습실’로 불리 는 중구 쌍림동 97번지로 이동하며 본격적으로 해외공연준비를 시작하게 되었고 어린이무 용과 무용반주의 대가 박성옥(1908~1983)이 합류한다.
1차 공연 프로그램북에서는 초기 공연 레퍼토리를 함께 구성한 박성옥과 신순심을 각각 디렉터(Director)와 안무자(Choreographer)로 표기하였으며 참가한 어린이 단원은 총 27 명으로 여자 어린이 26명과 특기단원인 남자어린이 이성진(1945~1995)5)을 포함하여 구 성되었다. 첫해는 박성옥 외 4인이 반주악사로 참가하였다(1차 프로그램북).6) 첫해의 악사 선발에 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불분명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1963년 리틀엔 젤스의 초빙으로 합류한 박성옥이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프로그램에 사진과 함께 디렉터 로 명기된 박성옥이 이후의 ‘단장’과 같은 역할인지 모호한 측면이 있으나, 프로그램에 의 거하여 박성옥을 1대 단장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1965년 선화어린이무용단과 Little Angels라는 정식명칭으로 첫 해외공연에 성공한 뒤 ‘용산우체국 옆 2층’, ‘용산 연습실’로 이주한다. 2대 단장으로 1966년 1월, 박봉애 (1908~1993)가 공식 임명됨으로서 1966년 2차 공연부터 예술단 제도가 점차 정비되기 시작한다. ‘용산 연습실’은 1967년까지 사용하고 이후 아현동으로 이주하는데 ‘아현동 연 습실’은 멕시코 올림픽 참가를 위한 연습을 했던 공간이다. 1969년 대한어린이무용단으로 개칭하며 삼청동 청와대 연무관으로 이동하면서 구매한 분홍색 버스를 단원들의 등⋅하원 에 사용했다.
리틀엔젤스는 초기부터 단장, 안무가, 무용지도, 합창지도, 의상 디자이너, 공연 스태프 들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1차 공연 프로그램에서는 박성옥 단장 겸 안무, 신순심 무용지도 및 독무(Principal Instructor and Solo Dancer), 미술 스태프(Artistic Staff)으로 조영숙 무 대감독(Stage Manager), 장혜숙 의상 디자이너(Costume Desiner), 차기봉 조명감독(Lighting and Stage Director), 악사로 박성옥, 한유성(한범수), 김은산, 이영숙이 소개되어 있다(1차 프로그램북). 초기에는 한국에서는 단장을 중심으로 소수의 스태프이 단원들의 교육, 훈련, 공연, 해외비자 등을 준비하고 미국에서는 한미문화자유재단이 행정을 준비했으며 소수의 기술 스태프가 해외공연기간 내내 참가하며 무대와 단원들의 생활을 지원하였다. 1981년 리틀엔젤스예술회관(현 유니버설 아트센터) 완공 후에는 한국문화재단 내 사무국에서 리 틀엔젤스예술단과 예술회관을 운영하며 무대기술팀이 정식으로 구성되었다.
1969년 설립된 한국문화재단은 2020년(1.20.) 효정한국문화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였 고 사무국, 예술단, 기술부를 두고 리틀엔젤스예술단과 공연의 기획과 공연장을 관리 운영 한다. 현재 효정한국문화재단은 이사장 1인, 상임이사 1인, 홍보이사 1인, 사무국장 1인으 로 구성되어 있고 하위단위로 예술단, 사무국, 기술부를 두고 있다. 예술단은 단장 이하 무용부와 음악부로 나뉘어 있으며 단장 1인, 무용부 팀장 2인, 무용교사 4인, 음악부 부장 1일, 합창지휘자 1인, 가야금 교사 1인, 합창 교사 2인, 사무 1인, 의상 1인 등 총 14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무국은 행정실로 국제부와 국내부로 나뉘어 공연, 행사일정, 홍보, 프로 그램 제작 등의 업무, 기술부는 공연활동에 필요한 무대 등을 관할하며 무대(무대진행, 관 리, 감독, 세트시설 관리), 조명실(조명 디자인, 조명 진행), 음향실(무용 음악 편집, 레코딩, 오더레이더), 제작실(셋트 제작, 배경막 제작 등 공연 무대디자인), 의상실(소품 제작 및 보수, 의상관리 및 보수, 슈즈관리)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리틀엔젤스예술단 웹사이 트).7)
다음의 <표 2>는 역대 단장, <표 3>은 역대 안무 및 무용지도, 합창지휘 및 음악지도, 행정 스태프, 기술 스태프를 정리한 것이다.
2. 리틀엔젤스예술단 단원제도
리틀엔젤스의 단원은 초기 공식적으로 “8세에서 13세의 소녀들”(미국 프로그램에는 14 세로 명시)로 구성하였는데 여자 어린이 단원들의 군무가 주요 레퍼토리였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듯 1963년 무용연구소의 설립과 해외공연이 가시화되며 추가단원을 모집하고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였다. 창단기에는 신문광고보다는 주로 어린이무용연구소에 다니며 이미 무용을 학습하던 어린이들이나 리틀엔젤스 무용연구소가 있던 지역의 어린이들이 ‘알음알음’ 참여하였다. 일례로 1차 공연에 참여한 이노연은 권려성 무용연구소8)에 다니며 무용을 배우고 있던 어린이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오디션에 참여했고, 청파동에 살았던 홍경희는 ‘오가다가’ 신순심 선생의 눈에 띄어 합류하게 되었다(심정민 외 2022, 6-9). 제 도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는 단원을 정례화하고 선발된 단원들은 교육과 훈련을 마친 후 해외공연에 참가할 수 있었다.
공연을 앞두고 일간지 등에 단원모집 광고를 개재하고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였다. 여러 증언에 의하면 무용 동작 시범을 따라하는 방식으로 유연성과 예술성의 기초를 살피고 간 단한 질문을 통해 단원을 선발(신순심 좌담, 월간 객석, 이노연 외)하였다고 하는데 무용기 초와 경험, 신체조건, 가정환경도 중요한 기준이었다. 리틀엔젤스의 첫 해외공연과 귀국공 연 이후 『대한뉴스』, TV, 신문기사 등에서 리틀엔젤스의 해외공연의 활약이 널리 알려져 리틀엔젤스를 입단하고자 하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많아 이후 단원모집은 큰 어려움없이 진행되었다. 단원 모집광고도 판매부수현황에 맞추어 매일 다른 일간지에 홍보한 문서로 보아 철저히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9) 단원 모집광고는 단원선발을 연령과 신체조건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어 초기 단원선발의 면면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리틀엔젤스 세계공연 참가단원모집」(『경향신문』, 1972.6.6.)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제7차 세계공연을 준비중에 있는 리틀엔젤스(대한어린이무용단)에서는 72년 및 73년 세계 공연 참가단원을 하기(下記) 요령에 의하여 모집함
-
1. 모집인원 및 자격
-
소녀무용단원 약간명(무용과 음악에 특기와 경륜을 겸비한 자)
-
소년무용단원 약간명(농악의 상모, 상쇠, 설장고, 12발, 상모 전문 특기소유자)
-
2. 구비조건
-
(가) 국민학교 3학년부터 5학년까지 소녀(신장 130cm 이하)
-
(나)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의 소녀(신장 150cm 이하)
-
(다) 소년단원은 학년에 관계없이 신장 155cm 이하
-
(라) 건강하고 용모단정한 자
그 외에도 다음의 기사(동아일보 1971.1.30.)를 통해서도 문화사절단 시기 리틀엔젤스 단원선발의 조건 및 면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노래하고 춤추는 꼬마사절 리틀엔젤스”
노래하고 춤추는 꼬마사절 리틀엔젤스 엄격한 규율 속 생활 삼년 강훈 뒤 해외에 입단자격 은 만8세돼야. 매년 어린이날을 전후하여 신문공고로 30명을 뽑는다. 무용하기에 적합한 체 격, 음악적인 감각, 건강 그리고 가정환경이 심사기준. 입단금 일반원에 월삼천원씩의 강습비 를 내면되고 해외공연도 자기부담이 아니다. 처음 이년간의 기본훈련과정, 다음 일년간의 작품연습이 끝나야 그러니까 만 십일세가 되는 해에 비로소 해외에 나가게 된다. 만 십오세가 되면 단복을 벗게된다. 리틀엔젤스는 단장이하 십명의 스태프가 지도한다. 일요일은 쉬고 평일은 학교가 끝난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4일간은 가야금 무용을 가르치고 2일간은 합창 연습, 발성에서부터 외국가, 민요까지 배워준다. 무용소엔 전용버스가 있어 데려오고 데려가 게 되어있지만 대개 가정이 부유하기 때문에 어머니나 식모언니의 손을 잡고 끝나면 먹을 간식까지 챙겨들고 자가용으로 실려 오기도 한다. 어머니들의 극성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는 신단장은 리틀엔젤스들에겐 엄격한 규율이 있다고 밝힌다. 그것은 단 한 시간을 먼저 났어 도 언니라고 부르고 깍듯이 대우하게 한다는 것. 가끔 저희들끼리의 반성회도 열고 있다....해 외공연은 하루 일회, 18가지의 민속춤과 수많은 노래를 가지고 있다. 공연외의 시간은 5명의 지도선생들이 각 학년별로 따로 나눠 미리 가져간...어느새 아리랑을 합창한다.
1973년도 리틀엔젤스 “대한어린이무용단 운영규칙”에 따르면 해외공연참가시 무대의상 제작비의 일부는 단원이 부담하며 여비 체재비 및 기타 일절의 경비는 재단(한국문화재단) 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1차 단원 12만원, 2차 단원 6만원, 3차 단원은 원래 3만 8천원으로 기록되었다가 추후 장학생 대우로 참가비 없음으로 수정표기 되어있다. 또한 이 문서에는 “1973년도를 위한 것이며 매년 사정에 따라 조정하여 결정함. 상기금액은 해 외공연팀의 여행 수속이 시작되기 전에 완납하여야 함”이라는 단서조항이 있어 매년 해외 공연의 상황에 맞도록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문서에 의하면 선발된 단원들은 본인의 경비 로 지정된 병원에서 종합신체검사를 받고 전문의의 여행허가를 받아야 했고 치과치료와 구충제거도 필요했다. 입단계약서는 보호자와 단원의 이름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또한 학 교관계는 개별단원이 승낙을 받고 단원의 훈련회비는 신입단원 정회비 7천원, 1차 참가자 는 6천원, 2차 참가자 5천원, 3차 참가자는 장학생 대우, 특수훈련으로 무용이외에 합창, 상모, 가야금, 설장고, 탈춤 등의 기능훈련이 있으며 이에 대한 경비는 무용단에서 부담한 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훈련과정에 필요한 연습복, 가죽신, 가야금, 장고는 본인이 준비하 도록 했으며 그 외 의상, 소도구 장치 등 공용용품은 무용단 제작, 단복, 파티복, 개인가방 등 여행용 개인용품의 준비는 자모회의에서 선출한 간사들이 책임지고 무용단에서 협력하 며 모든 경비는 단원이 부담하는 것으로, 또한 여행 수속에 필요한 수속, 자료사진 등은 단원들이 책임지고 모든 경비도 각자 부담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1975년 단원모집 서류에는 가족관계를 포함한 입단원서, 거주지 약도, 이력서(학력 및 경력사항)에 이어 설문이 포함되어 있다. 설문은 매우 상세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지원동기, 리틀엔젤스 단원모집을 어떻게 알았는지, 무용이나 음악 콩쿠르 대회 입상경력, 무용연구소 또는 음악단체 소속여부, 부모의 외국 여행 여부, 가족이나 친척의 해외거주여 부, 본인의 해외여행여부, 학업성적, 학교에서의 학생회 활동여부, 학교 및 기타 예체능 과 외 학습 여부, 가족 친척 중 리틀엔젤스 단원 여부, 형제관계, 병원입원 여부, 차멀미, 음식 선호, 성격, 엄마의 취미, 아빠의 상세 직업, 가정환경 상중하 중 택일, 장래 희망 등 20항 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같은 해 리틀엔젤스예술회관 강당 선화홀에서 치러진 신입 단원 모집 전형절차 및 계획문서를 보면 무용과 음악은 각각 달리 전형은 4월 19일에 진행 되었고 이어 20일에 IQ테스트와 면접이 별도로 진행되었다.10) 리틀엔젤스의 단원들은 비 교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상류층 자녀들이 많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단원선발과 활동의 조건을 보면 예술단으로서의 조건, 생활태도와 성격, 가정의 경제적 문화적 계층 등을 중요하게 고려하였음을 할 수 있다. 또한 1969년 이전한 삼청동 연습실 시기부터 운 영한 분홍색 버스는 당대 어린이들의 선망이었는데 버스노선도를 살펴보면 시내를 중심으 로 운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11)
리틀엔젤스의 공연은 작품간 휴지부가 없는 빠른 전환이 특징인데 이를 위해서 레퍼토 리를 큰반과 작은반으로 교차 배치하였다(김희선 2019). 이를 위해 나이가 다양한 단원을 선발하였는데 군무의 특성상 나이보다 체격이 중요했기 때문에 큰반(12세~15세)과 작은 반(8세~11세)은 나이와 체격을 동시에 고려하여 선발하였다. 면담에 의하면 단원에 따라 작은 반으로 입단하여 큰 반까지 계속 참여한 단원들도 있었고 큰 반으로 입단한 단원과 작은 반으로 입단하였으나 학업, 건강, 적성, 오디션 등 여러 이유에 의해 큰 반으로 올라 가지 않은 단원도 있었다.
리틀엔젤스 순회공연은 짧게는 3개월(1차, 3차 등)에서 길게는 5~6개월 (7차, 11차 등) 에 걸친 장기투어로 운영되었는데 적게는 75회(1차) 많게는 184회(12차)에 이르는 공연을 소화했다. 점차 해외공연의 지역이 확대되면서 년부터는 1진, 2진으로 나누어 지역에 따라 배치하였기 때문에 선발하는 단원의 수는 년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가장 공연이 많았던 1974년에는 3진까지 나누어 파견하였다. 초기에는 공연에 따라 매일 도시를 이동하여 새 로운 공연장에서 공연을 올리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들을 뒷바라지하는 스태프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또한 어린이 단원들이 부모를 떠나 장기간 단체생활을 해야하는 특성상 규율과 함께 아이들의 식사, 건강, 안전 등의 어려움이 있었음은 증언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이무경 면담). 특히 숙박은 큰반과 작은반 단원 5인을 한 방에 배정하여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돌봄, 협동, 협력, 예절, 가치 전수, 생활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체계를 갖추었 다(김혜선 외 2022, 47). 단원들은 좌담에서 이러한 리틀엔젤스 해외공연은 경험은 예술뿐 아니라 청소년기 인성의 형성에도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한다(심정민 외 2022, 23-26, 김혜선 외 2022, 49).
리틀엔젤스 단원제도는 1974년도 리틀엔젤스예술학교의 개교와 함께 변화를 맞게된다. 1977년부터 정례화한 예술단은 1년에 한번 단원선발을 진행하였고 년차에 따라 개나리반, 진달래반, 삼천리반, 무궁화반으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개나리반과 진달래반은 초급반, 삼 천리반은 공연훈련반, 무궁화반은 공연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각의 반 안에서 다시 큰 반과 작은 반으로 나누어 연습하였다. 한달에 한번 있던 오디션을 통과하면 초급-훈련-공 연반으로 승급하였다. 1년차 단원들은 기초반에서 한국무용의 기본동작과 합창의 발성법 과 장구 가야금 등 기악연주의 기초를 학습하고 이후에는 무용작품, 성악 발성과 합창, 장 구 및 가야금 등 실제 공연작품을 숙지하고 공연을 위한 훈련을 진행한다.
현재에는 매년 봄 오디션을 통해 단원을 선발하며 단원은 나이와 체격에 따라 최대 8년 까지 활동이 가능하다. 작은 반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5학년, 큰반은 초등학교 6학년~중 학교 3학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나리반은 무용, 합창 주 4회, 각 110분, 영어(선택), 주 2회 각 50분, 2년차 무궁화반은 공연작품, 민요합창 등을 연습하는데 무용과 합창을 주 5회 학습한다. 3년차 이상의 공연반은 무대공연 수업과 연습에 주력하는데 주 5회 참가한 다. 2000년대 이후 공연반은 청실반 큰반, 홍실반 큰반, 청실반 작은반, 홍실반 작은반으로 나뉘어 있으며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매일 방과 후 합창과 무용연습이 있으며 가야금 병 창은 주1회 연습한다(리틀엔젤스예술단 웹사이트). 다음의 <표 4>는 창단기부터 현재까지 리틀엔젤스 단원제도의 변화를 정리한 것이다.
3. 리틀엔젤스예술단 악사제도와 특기단원
문화사절단 시기(1965~1976, 1~16차)에는 무용반주를 현장반주로 연주하는 악사제도 를 운영하였다. 이들 악단을 프로그램 북에서는 Court Music Orchestra (궁중악단), AAK (아악)으로 표기하였고 국립국악원의 악사들로 소개했다(1~16차 프로그램북). 1966년 2차 공연에 참가했던 최충웅(1941~)은 오디션을 통해 참여하게 되었는데 당시 실제로 국립국 악원 악사였는데 국내공연도 많지 않던 시기 국립국악원은 단원의 해외공연 참가를 허가 해주었다(최충웅 면담). 첫 해 참가한 5인 이후에도 3~5인이 참가하였는데 당대 명인으로 구성된 연주단은 별도의 기악 레퍼토리를 무대에서 연주했고 단원들은 이를 무대뒤에서 보았던 기억도 있다고 언급한다. 2차부터는 악사선발이 별도로 진행되었는데 최충웅을 비 롯한 여러 연주자들은 당시 국립국악원과 시립국악관현악단의 단원도 있었다. 오디션에서 는 주로 민요, 무용반주 등을 요청했다고 하는데 해외공연에 참가하고 싶었던 국립국악원 단원 중 민요반주가 불가해서 오디션에 탈락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훗날 민속악 회 시나위, 국립국악원,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민속악 명인으로 활동한 예술가들이었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국악계의 열악한 상황에서 리틀엔젤스 악사참여는 연주자들에게 당장 의 경제적 보상과 함께 해외무대를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은 기회였다. 1976년 해 외공연이후에는 반주음악을 녹음하여 1977년 민간예술단 전환이후 공연에서는 녹음된 음 원으로 공연하였다. 현재에도 민속무용의 무대화에서 기준이 된 리틀엔젤스 반주음악의 고찰은 한국공연예술현대화 이행기의 이해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리틀엔젤스 단원제도에서 첫해부터 주요 레퍼토리였던 농악공연을 위해 특기단원을 별 도 선발하여 운영한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1974년 참가한 박은하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 단원을 선발하였다. 해외용 영어 프로그램 북에서 여자 어린이 단원들은 Dancers(무용단 원)로, 특기 단원들은 Actors(연행단원)로 표기하였는데, 이들의 선발, 역할은 일반 어린이 단원과 다르게 운영되었다. 여러 증언에 의하면 초기 이들 특기단원은 1960년에 개교한 국악예술학교를 통해 소개를 받거나 어려서부터 조기교육을 받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어린이들을 별도로 선발하였다(신순심 좌담, 김혜선 외 2022, 노다 고우지 면담).12) 특히 이들에게는 농악의 열두발 등 전문성을 요하는 역할을 주었는데 상 모돌리기, 장구 개인기, 탈춤의 사자탈 연행 외에도 일손이 부족한 공연장에서 소품 준비 를 돕는 등 스태프의 역할도 하며 숙식을 제공받거나 출연료를 별도로 지급받았다(김덕수, 최병삼, 최충웅 면담). 1차와 2차 공연(1965~1966)에는 이성진(토마스 박, Thomas Park 으로 명시) 1인이 참가하였으나 3차(1967)공연부터는 보통 3~4인이 참여하였고 김덕수 등은 이때 합류하였다. 여자어린이 중심의 단원들 사이에서 이들을 ‘오빠들’이라고 불렀다 는 증언도 있는데 현재에도 여자 단원 중심의 리틀엔젤스에 농악 특기단원은 남학생이 연 행하고 있다. 이후 이들은 김덕수 패 사물놀이, 국립국악원 사물놀이, 한국 연희의 대가등 으로 성장하였으며 특히 김덕수는 사물놀이의 세계화를 이룬 인물로, 청소년기 리틀엔젤 스 활동은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다음의 <표 5>는 국악연주단 및 특기단원을 정리한 것이다.13)
4. 리틀엔젤스예술단 해외공연의 운영
리틀엔젤스 공연은 가는 곳마다 성황을 이루었는데 “교포가 아니라 양복을 입은 백인 현지 미국인들이 가득 채웠”다는 증언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1960년대 한국의 열악했던 국제적 네트워크와 공연계의 상황에 비추어 이는 현지의 도움과 전문성적 기획자 없이 진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연구자는 여러 증언을 통해 CAMI 와의 계약에 대해 들었으며 추후 초기 프로그램북을 살펴 관련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1차 공연프로그램에는 케네스 알렌 부킹 에이전트(Kenneth Allen Booking Agent)가 등장 한다. 또한 케네스 알렌 부킹 에이전시 이름으로 발송된 현지 홍보물과 사전 공연협조공문 도 확인할 수 있었다. 케네스 알렌 에이전트가 어떻게 리틀엔젤스 공연을 맡게 되었는지의 과정은 알 수가 없었으나 미국에서 공연을 준비한 박보희는 순회공연을 위해 현지 공연전 문 매니지먼트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한미문화자유재단과 계약을 통해 진행했으리라 짐작 해 볼 수 있다. 박보희는 한미문화자유재단의 준비과정에서부터 현지의 협조 요청을 위해 매우 여러 곳에 상세한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1966년부터 10년간 유명한 미국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Readers Digest)의 기금후원을 통해 해외공연을 안정화할 수 있었으며 1969년부터는 미국의 초국적 공연기획사인 콜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CAMI, Columbia Artists Management Inc.)와 벤 아브 프로덕션(Ben Av Production)을 통해 미 국 및 유럽 장기투어를 진행했다. 일본에서는 ‘더 리틀엔젤스 후원회’와 ‘일본승공연합’의 주최로 장기순회공연을 진행했다. 1960년대 국내 공연계의 열악한 환경에서 매우 드물게 전문예술단체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국립국악원, 국립무용 단 등 전통예술을 견인하는 국립기관이 해외공연을 위한 정비가 부족한 상황14)에서 이러 한 리틀엔젤스의 제도와 운영은 1960~70년대 가장 많은 해외공연과 장기순회공연을 가능 케 한 동력이었다고 파악할 수 있다.
리틀엔젤스예술단의 해외공연 운영은 당대의 다른 민간예술단의 해외공연과는 차별화 되고 전문적인 방식이었다. 1차 미국투어부터 해외 현지 프로모터를 통해 공연장 섭외와 홍보 마케팅을 진행하여 일정에 맞추어 여러 지역의 공연장을 대관하고 현지의 시민관객 을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치러낼 수 있었다. 초기에는 호텔, 학교(대학교 및 고등학교) 강 당, 야외에서 열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현지 유명극장에서 공연15)했는데 이는 전문기획사 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 <도판 1>은 리틀엔젤스 공연의 현지 홍보물이다.
리틀엔젤스의 프로그램 북과 1차 자료에 의하면 1~2차 투어는 한미문화자유재단이 주 최로 진행하며 투어 프로모터로 뉴욕의 케네스 알렌 아티스트 매니지먼트(Director Mr. Hie Newson)16)가 참여했다. 2차 투어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공동회장인 릴라 애치슨 월래 스 회장(Lila Acheson Wallace, 1889~1994)17)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는데 1965년 공연 후 후원을 결정한 월래스 회장은 1966년부터 10년간 매년 2만 5천불씩 리틀엔젤스를 후원하 였다(박보희, 2000). 2차 공연에는 당시 홍종철 공보부 장관 개인의 후원도 있었다(2차 공 연 프로그램북). 4차 공연인 1969년부터 1976년까지는 미국의 주요 매니지먼트사인 콜럼 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사18)가 운영하였다. 당시 CAMI는 한국 연주자로 세계적 활동 을 하던 한동일, 정경화, 정명화의 매니지먼트를 맡기도 했고 소련 볼쇼이 발레단의 미국 공연, 미국 유수의 오케스트라의 투어를 담당했던 초국적 전문공연기획사였다.
1972년 7차 공연부터 1진과 2진으로 나뉘며 동시에 공연하게 되자 1진이 참여한 유럽 투어는 콜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의 기획자였던 다니엘 벤아브(Daniel Ben Av)의 벤 아브 프로덕션이 별도로 진행하였다. 전문적 현지 전문예술 매니지먼트의 역할로 공연장 대관 및 홍보뿐 아니라 주요 일간지와 잡지에 리뷰가 실리게 되어 리틀엔젤스의 국제적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리틀엔젤스의 일본공연은 미국 유럽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1차 미국공연 귀국 길에 경유하며 개최한 공연이 최초의 일본공연(1965. 12.10.~14.)은 리틀엔젤스 주최, 대 한민국주재 재일공보관과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 후원으로 개최되었다(김희선 2022). 1차 에 이어 4차(1969년)와 5차(1970~71년)에도 귀국 길에 일본공연을 진행했다. 특히 4차 공연은 일본에서의 최초 순회공연이었는데 공연의 주최와 초청으로 ‘더 리틀엔젤스 후원 회’이 등장하여 관심을 끈다.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리틀엔젤스 후원회’의 회장은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 1899~1995)로 일본재단회장을 역임했다. 명예회장인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 1896~1987)도 56~75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였다. 일본 문화청, 주일 한국대사관, 대한민국 주일 한국공보관, 재일 대한민국 거류민단 중앙본부(민단), ㈜롯데 후원이었다. 즉 일본과 한국의 정계와 기업, 재일교포 등이 공연의 주최와 후원으로 공연이 진행된 것 인데, 이는 앞서 미국 정⋅재계를 아우른 한미문화자유재단의 구성(김희선 2019)을 떠오 르게 한다. 5차 공연에서도 일본의 11개 주요도시 순회공연이 진행되었는데 ‘더 리틀엔젤 스 후원회’가 주최하여 초청한 것이다. 이후 8차 공연(1972.11.9.~1973.3.4.)의 주최는 ‘일 본승공연합’이었다. 13차 공연(1974.10.12.~2.14.)은 다시 ‘더 리틀엔젤스 후원회’의 주최 로 동경 니찌게끼(日劇)극장에서 40일 장기공연과 7개 주요 도시의 순회공연으로 진행되 었다(1차, 4차, 5차, 8차 공연 프로그램북, 한영혜 2019, 133).
어린이 단원들의 해외장기순회공연을 위해서는 이동, 식사, 안전, 건강 등의 생활관리도 중요했다. 리틀엔젤스의 운영진은 오랜 해외투어를 진행하며 단 한명도 아프거나 사고가 없었다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이무경 면담 2022)19). 단원들은 큰 반과 작은반 단원들 5인을 한 조로 편성하여 큰 언니를 반장으로 호텔 생활부터 식사까지 함께 하도록 관리하 였다. 미국 장기공연에는 버스가 이용되었는데 ‘디폴드 아저씨’로 알려진 현지의 운전기사 가 상시 이들과 함께했다. 또한 공연을 위한 소품, 의상, 악기 등을 운반해야 했기에 투어 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기 공연의 소품과 무대제작부터 시작하여 이후 단장까지 맡았던 이무경은 매일 무대와 버스로 소품, 악기, 의상을 싣고 내리는 일도 쉽지 않았으며 단원들 의 건강과 식사를 위해서도 각고의 노력을 통해 장기간 순회공연이 진행될 수 있었다고 전한다(이무경 면담). 이러한 어려움은 단장을 비롯한 스태프와 단원들의 헌신, 한국문화 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자부심, 애국심 등 없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민간예술단 전환기에는 앞서 1969년 설립된 한국문화재단이 리틀엔젤스의 운영과 공연 기획을 전담했으며 1981년 개관된 리틀엔젤스예술회관을 거점으로 외국인 관객을 대상으 로 하는 공연을 개최하였다. 그 외에도 한일문화교류재단, 방송국, 정부, 기업, 민간, 국제 이벤트 등 외부 기관 주최의 초청공연이 다수 진행되었다. 평화사절단 활동기에 해외공연 에 재개된 이후에도 문화사절단 활동기와 같은 ‘장기순회’공연은 할 수 없었는데, 단원들이 학생 신분이다보니 학기 중의 장기공연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평화사절단 활동기 이후 해외공연은 한국문화재단(현 효정한국문화재단)의 리틀엔젤스예술단 해외공 연사업부가 운영하고 있다.
Ⅲ. 리틀엔젤스예술단 레퍼토리 구성과 특징
1. 리틀엔젤스예술단 무용레퍼토리의 구성과 특징
리틀엔젤스 공연의 악·가·무 레퍼토리는 당대 전통예술계의 명인들이 참여함으로서 한 국전통공연예술의 근·현대 양식과 전통을 계승한 측면과 동시에 한국 작품의 해외용 무대 화 작품으로서의 개발 양상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한다.20) 또한 어린이무용단으로서의 특 징도 리틀엔젤스 레퍼토리에서 중요하게 고찰하여야 할 점이다. 그런 차원에서 리틀엔젤 스 레퍼토리 구성의 양상과 특징은 상세하게 고찰될 필요가 있다. 선행연구에서 리틀엔젤 스 무용의 특징이 다음과 같이 정리된 바 있는데, 3~5분 길이의 짧은 형식의 소품(小品), 화려하고 독특한 의상⋅소품⋅장신구, 민족적 이미지와 테마를 활용한 무용극, 시적이며 유미적 이미지, 한국인의 내재된 정서표출, 발레와 민속춤의 혼합, 창작 신무용 기본의 스 펙터클화의 강조이다(김희선 2019).
리틀엔젤스의 레퍼토리는 창단기에 구상되어 문화사절단 활동기에 무대화를 통해 표준 화되었다. 근대기 신무용과 해방 후 어린이 무용교육에 등장한 여러 춤이 리틀엔젤스를 통해 공연무대화가 되었다고 보여지는데, 리틀엔젤스의 레퍼토리 구상과정과 변화는 한국 춤의 근현대기 무대화 역사의 고찰 대상이 된다. 후에 상술하겠지만 리틀엔젤스의 다양한 레퍼토리는 해방 이전 신무용의 맥을 잇는 춤인데 특히 리틀엔젤스의 중요한 특징인 소품 화(小品化) 경향은 신무용의 특징이기도 하다. 최승희 이후 남한에서의 신무용은 1950년 대 김백봉, 김순성, 권려성, 김문숙, 김백초, 김진걸, 강선영 등 여러 신무용가들에 꾸준히 발표되었으며 설화나 전래동화 등을 바탕으로 한 무용극 중심으로 무용연구소학생들이 출 연하였다는 점(김영희 외 2014, 382-388)은 리틀엔젤스 춤 레퍼토리와의 사적(史的)관계 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해방직후부터 지속된 무용교육도 이러한 신무용 레퍼토리의 무용교육 작품으로의 유입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46년 창립된 조선교육무용 연구소의 활동을 통해 무용교육이 활성화되고 교육무용발표회가 개최되었다. 연구소에서 교육을 받은 연구생들은 각 학교에서 교육무용을 시작했으며 각종 강습회를 개최하고 아 동, 기독교 청년, 체육 행사 등 다양한 무용행사가 지속적으로 개최되었다(김운미 1998, 152-165). 특히 공적 무용교육기관이 부재한 가운데 민간 무용가들을 중심으로 생겨난 무 용연구소도 교육, 공연, 창작의 중심이 되었는데 1950년대 중반에는 대학에 무용전공 학위 과정이 개설되며 대학 무용과 주최의 전국중고등학생무용경연대회도 빈번히 개최되었다 (김영희 외 2014, 380-381). 이를 뒷받침하듯 1950년대의 여러 영상자료들을 살펴보면 일반 여자 중고등학교와 대학의 학생무용단, 민간 무용연구소 등에서 1950년대에 신무용 풍의 레퍼토리 공연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대한뉴스』 100호, 121호, 186호, 244호, 246 호, 252호)21). 이러한 무용 행사와 교육을 통해 신무용가들의 무용이 교육 레퍼토리로 활 용되었음은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리틀엔젤스의 레퍼토리는 특히 당대 어린이무용과 신 무용, 국극 반주의 전문가였던 박성옥이 참여함으로서 당대 무용연구소의 무용교육 레퍼 토리가 기반이 되었다. 특히 3~5분의 짧은 길이, 빠른 전환, 한국적 무용극 등 리틀엔젤스 의 특징을 담기 위해서는 발레를 전공하고 당대 명인들에게 한국춤을 학습한 신순심의 작 업이 주요했는데 어린이 단원의 군무를 위한 입체적 안무로 구성한 것이다.
신무용에서 어린이 무용 레퍼토리로, 리틀엔젤스 작품의 표준 레퍼토리화 과정, 해외공 연을 위한 무대화 과정에서의 변화, 리틀엔젤스 작품의 특징과 한국 전통춤 해외공연 레퍼 토리의 관계는 추후 더욱 상세히 연구될 필요가 있다. 또한 리틀엔젤스의 대표 레퍼토리인 「부채춤」, 「장고춤」, 「북춤」, 「강강수월래」 등은 1970년대 해외무대에서 주로 활동한 한국 민속예술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원 무용단 등의 국내외 무대에서도 꾸준히 무대에 올랐 고 현재에도 표준 레퍼토리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 단체의 레퍼토리와의 비교작업 도 필요하다. 이 연구에서는 리틀엔젤스 레퍼토리를 정리하고 특징을 간략히 기술하여 추 후 연구의 기초로 제공하고자 한다.
리틀엔젤스의 해외공연을 2년 앞둔 창단기인 1963년 박보희는 미국에서 한미문화자유 재단의 설립을 준비하는 한편 한국에서는 대학을 졸업하며 송범 무용연구소에 다니던 신 순심은 박성옥을 초빙하여 어린이 무용 레퍼토리 구상에 몰두했다. 박성옥은 최승희 (1911~1969), 조택원, 김백봉의 해외공연에서의 무용반주와 부산에서 어린이무용단을 이 끌며 신무용, 어린이 무용, 철 가야금과 개량아쟁을 활용한 무용반주에 있어 당대 최고의 전문가로 「승무」, 「즉흥무」, 「검무」, 「한량무」, 「태평무」, 「무당춤」, 「부채춤」을 전수했고 1958년 반공예술단 동남아시아 순회공연, 1960년 프랑스 파리의 제4회 국제민속예술제에 참가한 바 있다(이세기 2003; 이꽃별 2009; 성기숙 2011, 16)22). 이외에도 신순심은 무용 명인들의 공연을 찾아다니며 학습과 연구를 병행했는데 근현대기 한성준-한영숙, 김백봉 등을 통해 전승되고 발전된 전통무용에 송범, 강선영, 권려성, 정재만, 홍정희 등 당대 무용 가들의 춤도 연구하면서 자신의 전공인 발레의 군무를 접목했다(신순심 좌담), 리틀엔젤스 의 「부채춤」, 「장고춤」, 「농악」, 「강강수월래」, 「꼭두각시춤」, 「시집가는 날」, 「화랑도」, 「무 사놀이」, 「길쌈놀이」, 「선녀와 나무꾼」 등은 박성옥의 안무로 초기부터 준비되었다고 알려 져 있으나(정은숙 2003, 13; 신은경 2004, 6; 성기숙 2011:16~17; 최해리 2010, 108~109)23) 1965년의 1차 공연에는 「강강수월래」와 「꼭두각시춤」은 없었다. 그러나 여 러 증언에 의하면 공연을 위해 준비했던 작품은 실제 더 많았는데 「혹부리 영감」, 「신로심 불로」, 「창춤」, 「천안삼거리」, 「흥부와 놀부」, 「여명」, 「알쏭달쏭」 등이 준비되었으나 무대 에 올리지 않았던 작품이라고 전한다. 이 중 「신로심불로」는 1차 해외공연 후 귀국공연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1차 공연의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1부에 「탑(Pagoda)」, 「무사놀이(Warrior Dance)」, 「장 고춤(Hourglass Drum Dance)」, 「(미국)해병대(Toe the United States Marines」, 「쌍고춤 (Twin Drum Dance)」, 「부채춤(Fan Dance)」, 「북춤(The Pentinent Monk)」「농악(The Farm Dance)」2부에서는 「길쌈놀이(The Festival of the Weavers)」, 「밤길(Travel ny Night)」, 「검무(The Sword Dance)」, 「시집가는 날(The Wedding Day)」, 「한국의 선율 (Melody of Korea)」, 「탈춤(The Mask Dance)」, 「무녀무(The Dance of Sorceress)」, 그랜 드 피날레(Grand Finale)로 「미국은 아름다워(America the Beautiful) 친선무」가 공연되었 다.24) 1차 연주의 일본공연에서는 1부에서 「부채춤」, 「북춤」, 「장고무」, 「무사놀이」, 「아 악(연주)」, 「농악」이 2부에서 「길쌈놀이」, 「밤길」, 「검무」, 「시집가는 날」, 「탑」, 「무녀춤」 이 공연되었다. 한국에서 열린 귀국공연 <선화어린이무용단 귀국공연>에서는 1부에서 「부 채춤」, 「북춤」, 「장고무」, 「무사놀이」, 「신노심불로(Ageless Heart)」, 「해병대(Tribute to the United States Marines」, 「농악」이, 2부에서 「길쌈놀이」, 「초립동(Wedding Day)」, 「검 무」, 「밤길」, 「탑」, 「무녀」, 「친선무 America the Beautiful」이 공연되었다. 이 중 「시집가 는 날」과 「초립동」은 같은 작품이며, 「한국의 선율(Melody of Korea)」은 「처녀총각」과 같 은 작품이다. 「해병대(Tribute to the United States Marines」는 때로 「미국해병대」라는 작 품명으로도 쓰였는데 이후 「장난감 병정」으로 수정되었다. 「장남간 병정」은 리틀엔젤스예 술회관의 설립과 함께 무대에 설치한 특수 분수장비를 활용한 「춤추는 분수」와 함께 공연 되었다.
1966년 2차 공연에 「선녀춤(Dance of Angels)」이 추가되었고 「한국의 선율(Melody of Korea)」은 「처녀총각 Korean Date」으로 작품명이 변경되었으며 「친선무 America the Beautiful」를 대신해서 「강강수월래(Kang Kang Soo Wol Lae」가 피날레로 추가되었다. 1967년 3차 공연에서는 「꼭두각시(Doll Dance)」와 「가야금 병창(Folk Singing with Kayagum)」이 추가되었다. 3차 공연에서 「처녀총각」의 영문제목은 「Girls and Boys」로 한 번 더 수정되었고 「선녀춤(Dance of the Angels)」은 「천사춤(Chunsa Chum, Dance of the Angels)」으로 표기되었다. 리틀엔젤스가 작은 천사들이어서 일부러 천사춤으로 표기한 것 인지, 번역상 오기로 표기된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두 춤은 같은 춤이다. 또한 앞서 「무사놀이(Warrior’s Dance)」로 표기된 춤은 3차 공연에서 「화랑무(Harangmu, Warrior’s Dance)」로 수정되었다. 3차 공연부터는 「강강수월래」의 영문 작품명으로 Moon Light 로 수정하고 「농악」을 피날레 작품으로 수정했다. 4차 공연인 멕시코 올림픽에서 「춘향이와 이도령(사랑가)」이 추가되었다. 대략 3차(1967~1968)년의 미국⋅캐나다 공연과 4차 멕시 코 올림픽과 미국⋅일본 공연을 통해 리틀엔젤스의 레퍼토리가 표준화되면서 정리된 것으 로 볼 수 있다.
특히 3차 공연에서는 공연의 길이에 따라 2시간, 1시간 30분, 1시간 공연 프로그램으로 정례화하는데 가장 짧은 1시간 공연에서는 「부채춤」, 「처녀총각」, 「가야금병창」, 「북춤」, 「꼭두각시」, 「강강수월래」, 「시집가는 날」, 「농악」을, 1시간 30분 공연에서는 1부 「부채춤」, 「처녀총각」, 「장고춤」, 「시집가는 날」, 「가야금병창」, 「북춤」을 2부에서는 「길쌈놀이」, 「꼭 두각시」, 「선녀춤」, 「밤길」, 「농악」을 2시간 공연에서는 1부에 「해병대」를 2부에서는 「무 사놀이」를 추가하는 식으로 앞서 구상되었던 공연이 정례화되면서 공연의 길이에 따라 취 사선택한 것이다.
이후 13차(1974.10.20.~1975.11.24.) 일본 니찌게끼 극장에서의 40일 장기 공연에서 「여 명(Sound of Dawn)」, 「봄의 향연(Spring Time)」, 「태평천하(Peaceful World, 김삿갓 스토 리)」가 추가되었다. 그간 「북춤」으로 소개되었던 Pentinent Monk가 일본 공연에서는 「승 무」로 소개되었다. 이후 「해병대」는 「장난감 병정」으로 작품명이 수정되었고 초기의 대표 작품인 「길쌈놀이」는 문화사절단 시기에는 계속 연주되었음이 확인되었으나 1975년 14차 공연을 마지막으로 현재는 공연되지 않는다. 「춤추는 분수」는 2000년 평양 학생 소년예술 단의 서울 공연의 화답공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연하지 않는다. 1995년 세계순회공연 30주년 기념 공연에서는 「비단실」과 「사물놀이」가 특별 공연된 바 있으며, 1998년에는 「살풀이」가 소개되었고, 2000년 평양 학생 소년예술단의 서울 공연의 화답공연에선 「민족의 고동」이 공연되기도 했으나 이후 레퍼토리에 추가되지는 않았다. 2017년 박칼린 예술감독 을 초빙하여 안덕기 안무로 연출한 「꽃과 나비」, 「풍잠무」가 초연되었으나 이후 연주되지 는 않는다. 2018년 초빙된 배정혜 예술감독은 2019년 이후 새로운 작품 「궁」, 「바라다」, 「설날아침」, 「미얄」, 「진쇠놀이」, 「화검」 등 6작품을 새로 안무해 무대에 올렸다. 가야금 병창은 초기 「방아타령」, 「가야금 산조」, 「꽃타령」이 연주되었다가 「아리랑」, 「꽃타령」, 「군밤타령」 등으로 점차 레퍼토리를 늘려가 공연에 따라 작품을 선택적으로 올리고 있다. 「농악」은 소고무, 쌍고무, 상모돌리기, 열두 발 상모까지 구성하여 마지막 피날레의 화려한 퍼포먼스로 전원이 출연하는데 특히 리틀엔젤스의 「농악」은 농부들과 아낙들의 수고와 풍 년을 주제로 한 내러티브를 모티브로 구성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민족적 테마 를 살린 무용극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 리틀엔젤스 작품의 중요한 특징이다(김희선 2019, 153). 특히 작은 반의 춤인 「꼭두각시」, 「시집가는 날」은 이러한 특징을 더욱 극대화하여 귀여운 어린이들의 동심과 한국적 이야기를 잘 담아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리틀엔 젤스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큰반과 작은반을 교대로 출연시켜 휴지부가 없다는 점, 대략 3~5분 이내로 “지루할 틈이 없이” 속도감 있게 구성되는 점, 군무와 독무를 배치하는 점, 무대에 맞는 작화배경을 활용한 점25),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의상, 장신구, 소품의 활용(김 희선 2019, 153~154)은 모든 작품을 통해 잘 드러난다. 특히 리틀엔젤스의 「부채춤」에서 는 ‘찢어지지 않도록’ 한지대신 천 부채를 사용하는데 이 부채는 어린이와 해외공연을 위 해 특별히 고안한 것으로, 선생님들이 직접 시장에서 천을 떠다가 만든 것이었다. 또한 부 채에는 야광을 칠해 「부채춤」의 마지막 장면에서 단원들이 둥글게 무궁화꽃 대형을 만들 면서 조명이 소등될 때 부채가 빛을 발하는 효과를 내도록 고안했다. 또한 리틀엔젤스의 「북춤」은 여섯 개의 북을 달고 공연하는 육고무로, 타 무용단이 삼고무나 오고무와 구별되 는 리틀엔젤스만의 레퍼토리이다. 「길쌈놀이」는 1차부터 공연된 리틀엔젤스의 대표작품으 로 태극문양이 달린 긴 대를 무대 중앙에 놓고 「화관무」와 여러 다른 무용을 결합하여 주 위를 돌며 오색의 끈을 엮어나가는 춤으로 다른 예술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리틀엔젤스 만의 작품이다.
다음의 <표 6>은 리틀엔젤스에서 공연한 작품을 년도별로 정리한 것이며 <표 7>은 리틀 엔젤스의 악⋅가⋅무 레퍼토리를 장르별로 분류한 것이다.
2. 리틀엔젤스예술단 반주음악 및 국악 레퍼토리의 구성과 특징
리틀엔젤스의 무용 공연은 당대 명인들의 반주로 공연되었는데 특히 한국무용반주에 관 한 선행연구가 부족한 가운데 리틀엔젤스의 초기 무용반주음악을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 다.26) 박보희는 앞서 구술채록을 통해 “그때 그 일류 음악가들이, 국악 음악가들이 그냥 그냥 영감해서, 그냥 반주를”(최해리 2010, 109)라고 언급하였지만 반주음악은 대부분 박 성옥과 초기 악사들의 구상 이후 수정을 거듭하며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리틀엔젤스의 무용 반주에 활용된 악기는 음악에 따라, 공연에 따라 다채롭게 구성하였 는데 장구, 북, 가야금, 대금, 단소, 피리, 해금, 양금, 아쟁, 징, 바라, 박 등을 활용하였다. 또한 초기 해외공연에서 연주자들은 아악이라는 제목으로 별도의 기악곡 연주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는데 프로그램에서는 「Court Music」으로, 악사들을 국립국악원 단원들로 표 시하고 홍주의를 입고 연주하기도 했다. 공연에서는 수제천, 염불도드리, 타령, 대금독주, 중주, 민요, 시나위 등 정악부터 민속악까지 다양하게 연주했다(1~16차 프로그램북).
대표작품을 중심으로 반주음악을 살펴보면 민요를 메들리로 재구성하여 무용극과 내러 티브에 걸맞는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반주음악으로 재구성하거나 변주하는 방법, 해금이나 아쟁을 활용하여 효과음향으로 활용하는 방법, 다양한 악기의 조합으로 독주, 중주, 합주를 활용하는 방법과 최근 작품에서는 국악창작곡을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작은 반의 작품인 「처녀총각」에서는 도입부에 아쟁으로 소울음과 해금으로 염소울음소리를 효과음으 로 활용한 후 민요 「꽃이 피었네」(굿거리 장단)를 연주한 후 이어 「봄타령」(자진모리 장 단), 「종로 네거리」(자진모리 장단), 「봄타령」(자진모리 장단), 「종로 네거리」(자진모리 장 단)를 순서대로 연주한다.
「부채춤」은 총 8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도입부에 대금 독주(영산회상 변주) 이 후 「태평가」(굿거리 장단), 3번째 장면에서는 전주를 피리, 가야금, 아쟁으로 연주한 후 합주로 마무리하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장면에서는 전주를 해금으로 후렴은 합주한 후 여섯 번째 장면은 「태평가」를 변형한 곡을 연주하고 일곱 번째 장면에서는 가야금을 전주 로 후렴은 합주로, 여덟 번째 장면은 다시 「태평가」 변형곡을 연주하면서 마무리한다. 2022년 공연한 부채춤의 라이브 반주에서는 민요 「닐니리야」, 「군밤타령」(철 가야금), 「통 영개타령」, 「밀양아리랑」을 연주 후 「부채춤」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효과음으로 마무리하 였다.
「강강수월래」는 민요 「고사리 타령」을 당적으로 독주한 후 이어 가야금과 아쟁으로 이 어받는다. 이어 가야금 독주로 「긴 천안삼거리」를 연주한 후 「천안삼거리」를 아쟁과 피리 로 후렴울 합주한다. 다음 장면에서는 「뱃노래」를 아쟁으로 연주하고 이어 「뱃노래」 뱃노 래 끝부분을 피리 독주로 연주한 후 아쟁이 이어받는다. 이어서 「달아 달아」를 단소와 양 금으로 중주 연주 후 단소 독주로 마무리한다. 때로 단소와 아쟁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마 지막에는 강강수월래를 육성으로 부르는데 중모리 장단에서 자진모리 장단으로 몰아가며 마무리한다. 2022년 라이브 반주로 연주한 「강강수월래」는 장면에 따라 민요 「청춘가」, 「뱃노래」, 「새야 새야」(생황, 양금, 단소 연주)를 짧게 연주한 후 리틀엔젤스 단원 6명이 육성으로 「강강수월래」를 합창으로 노래하는 가운데 라이브 반주단이 반주음악을 연주하 였다.
「설날」(2018, 배정혜 안무)은 이준호 작곡의 「축제」를 MR로 반주하고 마지막은 태평소 능게가락으로 마무리한다.
「농악」에서는 농부들의 등장 장면에서는 「농부가」를, 아낙네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풍년가」를 반주한 뒤 상쇠를 앞장세우고 소고를 든 농악대가 단체로 무대에 오르면 라이 브로 타악과 태평소의 반주가 뒤따른다. 이어 작은 반 남자어린이 독무 상모와 자반뒤집기, 큰반 남자어린이 열두발 상모 순서로 공연을 마무리한다.
3. 리틀엔젤스예술단 합창 레퍼토리와 구성의 특징
리틀엔젤스는 1차 공연의 피날레 「친선무」에서 아리랑, 도라지 등 한국민요와 미국 노 래로 「America the Beautiful (미국은 아름다워) 친선무」를 부른 것을 계기로, 점차 합창 레퍼토리를 늘려나가다가 1970년 가을, 당시 KBS 어린이 합창단의 지휘자로 있던 유병무 (1938~2020, 6~9차 지휘자로 참여)를 초빙하여 6차인 1971년부터 합창을 정례화하였다. 그러나 자료와 면담을 통해 합창이 정례화되었음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공연 프로그램에 ‘합창’이 명시된 프로그램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그램에도 개별 합창곡으로 어떤 곡을 불렀는지 기록이 거의 없어 음반, 면담, 교육자료 등의 재정리를 통해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1970년경 일본과 미국의 라이브 공연을 녹음하고 1972년과 1973년 영 국, 호주, 미국, 호주, 일본, 한국에서 발매한 리틀엔젤스의 음반은 초기합창곡을 유추하기 에 유용한 자료이다.27)
합창은 피날레 공연인 「농악」이후 바로 연결하여 공연하는데 단원들이 백스테이지에 소 고 등 소품을 놓고 재등장하기 전 무대 중앙에 피아노가 준비된다. 지휘자는 피아노를 직 접 연주하며 지휘하는데 농악 복장을 입고 재등장한 단원들은 2열로 도열하여 짧은 합창 곡을 메들리로 노래한다. 해외공연의 성격에 맞추어 방문하는 국가의 민요와 동요를 그 나라의 언어로 노래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들 작품은 리틀엔젤스 고유의 합창 레퍼토리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러한 합창곡은 문화사절단으로서의 공공외교에 유용했음은 물론이 다. 일례로 1974년 미국 포드 대통령의 방한 시 청와대 초청공연에서 리틀엔젤스는 「꼭두 각시」와 「북춤」을 공연한 후 포드 대통령의 모교인 미시간 대학교 응원가를 합창하여 높 은 관심을 이끌어냈다(『매일경제』, 1974.11.23).
또한 리틀엔젤스의 「엔젤의 노래」와 「리틀엔젤스 단가」는 1972년 영국여왕 어전 공연 시 런던으로 가는 기내에서 창작된 곡이다(리틀엔젤스 내부자료집).28) 이후 「리틀엔젤스 단가」는 가사를 일부 수정하여 선화예술학교의 교가로 사용하고 있다29).
이 연구에서는 프로그램 북, 신문기사, 음반, 인터넷 자료, 웹사이트를 기반으로 리틀엔 젤스 합창 레퍼토리를 정리하여 분류하고자 한다.30) 다음의 <표 8>은 리틀엔젤스예술단의 합창 레퍼토리를 장르로 분류하여 정리한 것이다.31)
Ⅳ. 리틀엔젤스예술단 활동의 국제공연예술사적 맥락
1. 글로벌 어린이 예술단으로서의 리틀엔젤스
국제 공연예술계에 등장한 한국의 어린이예술단 리틀엔젤스는 당대 국제적으로 활동하 던 어린이예술단의 공연 맥락에서 파악해볼 수 있다. 우선 리틀엔젤스에 앞서 해외공연에 나섰던 한국어린이합창단으로 1947년 창단된 ‘서울방송전속 어린이노래회’(이후 1968년 ‘KBS 어린이합창단’ 개칭)와 ‘해군어린이정음악대’가 참여하여 1954년 구성된 ‘한국어린이 음악사절단’(지휘 안병원)과 1956년 월드비전선교단 밥 피어스(Bob Pierce)목사에 의해 창 단 후 1년 만에 해산했다가 1960년 재창단한 ‘선명회어린이합창단’(현재 ‘월드비전합창 단’)이 있었다.
한국어린이음악사절단(Korean Children’s Choir)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과 한미재단 (American Korean Foundation)의 지원으로, ‘미국의 참전과 원조에 대한 감사’와 ‘한국원 조를 위한 일천만불 구호기금 모금’을 위해 파견되었다.32) 한국어린이음악사절단은 3개월 (1954.4.8.~7.7.)간 미국의 48개 주를 순회하며 200여회의 공연을 진행하였는데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 주요 도시를 포함했다.33) 이중 뉴욕에서는 CBS TV에 출연하여 미 국민요, 한국민요, 기악연주, 무용 공연을 펼쳤다. 에드 설리번 쇼에도 출연하였으며 유라 니아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앨범을 출반하고 메이 데이 뉴욕 시가 행렬 참가, 워싱 턴 백악관 상원위원과 닉슨 대통령 방문, TBS 미국 최초 칼라 TV 출연 등의 활동을 벌인 후 귀국한 바 있다. 그런데 실제 단원들은 고아가 아니었음에도 미국에는 전쟁고아로 구성 된 한국어린이고아합창단으로 알려졌다(Woo, 2015, 김희선 2022b).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도 재창단한 1961년부터 1963년까지(1자, 1961.10~1962.2.; 2차 1962.10~1963.5.) 미국, 캐나다, 유럽, 아시아를 투어하고 귀국하였다. 그런데 선명회 어린 이 합창단은 전쟁고아로 구성된 합창단으로 미국에서 이들의 정식명칭은 Korean Orphan Choir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리틀엔젤스예술단도 미국 활동 시 한국고아예술단으로 오해 를 받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차원에서 리틀엔젤스 초기의 “전쟁과 고아의 나라 로 인식되는 한국을 문화국가로” 인식을 전환시키고자 하는 미션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어린이예술단의 국제활동은 당대 국제적으로는 활동하며 명성을 얻은 어린 이 예술단의 활동차원에서도 고찰이 가능하다. 특히 유럽의 소년합창단은 세계순회공연을 통해 널리 알려졌었는데 한국에도 알려졌던 비엔나 소년합창단(Wiener Sangerknaben Vienna Boy’s Choir)은 1926년부터 국제공연을 펼쳐왔다. 또한 파리 나무십자가 소년합창 단(Manecanterie des Petis Chanteurs a la croix debois)은 1931년 미국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투어를 진행하고 있었다. 비엔나 소년합창단은 1960년대에 4장의 앨범을 출반하였고 1962년에는 미국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Almost Angels(Born to Sing, Ein Grussaus Wein)』을 제작⋅보급하 여 국제적 인지도가 높았다. 리틀엔젤스는 활동을 시작하며 줄곧 비엔나 소년합창단에 비 견할 한국의 단체로 홍보했다. 리틀엔젤스는 1972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공연을 진행하며 빈 소년 합창단을 방문하여 단원들간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는데 이후 박보희는 빈 소년합창단 연습장소인 궁전을 보며 리틀엔젤스의 전용공간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여러 차례 회고한 바 있다.
근대에서 현대로 전환되던 시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념으로 대립되던 냉전이라는 국제정치, 식민지에서 벗어나 국민국가를 수립하던 당시 이러한 어린이 예술단의 국제적 활동은 당대 국제정치의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수행하며 동시에 국제평화를 염원하는 당대 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차원에서 자국의 전통예술을 무대 화하여 세계순회공연을 함으로서, ‘한국적’ 공연예술로 글로벌 공연예술계에서의 활약은 한국근·현대 공연예술사에서 더욱 중요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2. 리틀엔젤스예술단의 문화사절단 및 평화사절단으로서의 위상
1960년대 문화사절단 시기 리틀엔젤스의 사명은 세계 속 신생국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이념대립의 냉전체제 가운데 반공의 국가정체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초기 리틀엔 젤스의 사명이 한국을 알리는 일에 있었다는 것은 리틀엔젤스의 공연종목이 전통예술이었 다는 점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는 점이다. 특히 국제적으로 북한과의 경합 속에 한국전통예술을 통해 외교적 차원에서 공적인 국가사절단의 역할을 수행한 점은 당대의 맥락 속에 의미있는 행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리틀엔젤스의 활동을 국가 사절단의 활동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리틀엔젤스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매니지먼트인 콜럼비아 매니지먼트(CAMI)와의 협력을 통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수 의 공연장에서 공연, 홍보, 리뷰를 받는 일련의 활동을 통해 글로벌 공연예술계의 한복판 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리틀엔젤스를 당대 글로벌 공연예술계의 차원 에서 재평가할 중요한 명분이 된다. 또한 리틀엔젤스는 현재까지 총 8장의 음반을 출시했 는데 그 중 초기 음반은 해외에서 출반되어 특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2년에 출반한 첫 음반 The Little Angels는 초국적 음반사 필립스사에서 출반하였는데, 미국에서의 라이 브 공연과 일본에서의 스튜디오 녹음이 음반에 담겼다. 음반은 벤 아브 프로덕션의 기획으 로 필립스 음반사를 통해 영국과 호주에서 출반되었다. 한국 민간예술단의 음반이 녹음과 음반출시가 각각 미국, 일본, 영국을 통과해 초국적 음반사인 네덜란드의 필립스사를 통해 유통된 일은 당대 한국음반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이어 1973년 출반한 The Little Angles Smile도 미국 MGM사에서 출반한 음반이었는데 당대 한국공연예술단으로 드문 국제적 행보였다.
또한 1990년 이후 러시아-중국-북한으로 이어지는 민간예술단으로서 리틀엔젤스의 평 화사절단 수행은, 글로벌 차원에서 탈냉전기에 이루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 한공연은 남북관계의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시기 첫 민간예술단의 북한공연 이었다는 점에서 재평가할 수 있다. 남북분단이후 서로 적대시하던 남북이 처음으로 예술 교류를 시작한 시점은 1985년이었다. 1985년 년 이루어진 적십자회담을 계기로 제1차 상 호고향방문단의 상호교환제의가 시작되고 1985년 9월 20일 남북한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 연단의 서울 평양 동시교환이 실현되면서 공연단 50명이 각각 서울과 평양에서 공연을 진 행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게임 이후 10월 27일에는 ‘월북 음악인들의 분단 이전 행보 와 작품에 대한 해금조치’가 시행되었고 이어 1990년 2월에는 남북문화교류의 5가지 원칙 이 문화부와 통일부를 통해 마련되어 “남북교류협력추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올림픽 이 후 사회 각계에서 통일운동에 대한 열의가 높아지며 1990년 10월 제1회 범민족 통일음악 회가 10월 18~23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다. 이후 답방 형식으로 서울에서 송연통일음악회 가 개최되어 33인이 방남하였다. 1998년 남한에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북한은 고난의 행군시기를 마친 후 대북 대남 관계와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평화공존에 대한 노력으로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 남북음악연주회 이후 8년 만인 98년 5월 리틀엔젤스 평양공연은 첫 민간예술단의 방북공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공연 이후 1998년 11월부터 남북한은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개발 논의 등 경제협력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하는데 리틀엔젤스 공연은 남북교 류를 재개하는 역할을 했고 이후 2007년까지 남북문화교류가 지속되었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배인교 2018).
Ⅴ. 나가며
리틀엔젤스 60년사를 한국공연예술사 안으로 소환하고자 하는 이 연구는 I편에서 시기 별 주요 공연과 특징을 고찰한 데 이어 이번 II편에서 리틀엔젤스의 제도와 운영, 레퍼토리 의 구성과 특징, 글로벌 공연예술사적 의미를 고찰하였다.
리틀엔젤스는 문화사절단 활동기인 초기부터 연습실, 단장 및 공연스태프가 구성되어 있었으며 단원 모집, 교육, 특기단원 제도, 악사제도를 운영하여 해외공연에 적합한 예술단 으로서의 면모를 구비하였다. 초기 교회 주일학교 단원에 더해 모집을 통해 무용교육을 받고 있던 어린이들을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였다. 특기단원은 열두발 상모가 가능한 농악 특기의 단원으로 대부분 남자 어린이 단원을 특별영입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운영했다. 악 사는 초기 박성옥이 구성한 한범수 등 4인으로 운영하다가 해외공연을 앞두고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였고, 국립국악원이나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단원, 국악예술고등학교의 민 속악계 연주자들이 주로 참여하여 해외공연에 라이브 반주악단으로 운영하였다. 해외장기 순회공연을 위해 한미문화자유재단은 미국의 초국적 공연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현지 공연 장 대관과 홍보를 진행했다. 미국, 캐나다, 유럽공연은 케네스 알렌 매니지먼트, 콜럼비아 아츠 매니지먼트, 벤 아브 프로덕션이 진행했으며 일본공연은 더 리틀엔젤스 후원회와 일 본승공연합 등이 운영하였다. 이후 공연은 1969년 설립된 한국문화재단과 2020년 개칭한 효정한국문화재단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리틀엔젤스의 레퍼토리는 한국예술의 악·가·무와 합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단원들 의 군무로 구성된 무용 레퍼토리는 신무용전통에 기반하여 어린이 군무 소품으로 무대화 한 것으로 문화사절단 활동기에 박성옥과 신순심의 안무작품으로 확립된 것이다. 초기 해 외공연에서 무용반주는 현장의 라이브로 공연되었는데 참가한 명인 연주자들의 반주음악 은 현재까지도 표준화된 반주음악으로 활용되고 있다. 무용 레퍼토리는 큰 반과 작은 반이 번갈아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작품으로 1965~1968년 시기인 1~4차 공연을 통해 무대화와 표준 레퍼토리의 정비가 이루어졌으나 2018년 배정혜 예술감독의 영입 이전까지 새로운 작품은 구상되지 않고 공연의 길이에 따라 작품의 선정만 달리하는 방식으로 공연이 구성 되었다. 합창 레퍼토리는 한국민요, 한국가곡, 한국동요, 세계민요, 미국노래, 북한노래, 팝 송, 크리스마스 캐롤로 구성되어있는데 특히 세계민요는 각국 공연에서 방문국의 언어로 그 나라의 노래를 부름으로서 공공 외교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북한노래 는 최초 민간방북예술단으로서 리틀엔젤스의 평화예술단의 면모를 강조해준다.
국제적으로 활동하던 당대의 어린이민간예술단 차원에서도 합창단이 아닌 민속예술단 이었다는 점에서 리틀엔젤스의 활동은 독자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지 않던 시기에 초국적 기획사를 통한 공연과 음반 출시 등의 활동을 통 해 한국공연예술의 국제적 반경을 넓힌 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냉전기를 관통하며 문화냉전의 도구로 활용된 공연예술이 냉전종식과 함께 탈냉전기로 접어들자 국제평화의 상징으로 변화한 일은 매우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인데 이 시기 리틀엔젤스의 소련, 북한, 중국공연은 국제평화를 위한 평화예술단으로서의 행보로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연구는 글로벌과 한국의 현대사가 관통하는 교차지점에서 구성된 리틀엔젤스예술단 의 독특한 위치와 활동의 양상을 파악하여 그간 상세히 포착하지 못한 민간예술단을 살펴 한국현대공연예술사의 단면을 조망해 불 수 있었다. 리틀엔젤스의 60년은 한국과 글로벌 의 시공간이 함께 요동친 현대공연예술사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반세기가 넘는 공연사를 살피는 일은 짧은 두 편의 논문 안에 담기 불가능할 정도로 리틀엔젤스의 활동은 다양했고 살펴야 할 자료도 방대했다. 리틀엔젤스 연구는 이제 시작으로 이번 연구를 통해 새롭게 던지게 된 질문들은 추후 개별 연구를 통해 더욱 상세히 들여다볼 것이다. 향후 리틀엔젤 스 연구가 한국 레퍼토리 무대화 과정, 레퍼토리의 변천, 춤·반주음악·합창 레퍼토리의 계 보, 참여 예술가들의 계보, 무대 운영, 어린이예술단, 어린이예술교육, 국제교류와 공공외 교, 글로벌 냉전과 탈냉전 등 공연사의 다양한 연구주제로 확장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