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본 연구는 20세기 초 한국 근대무용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배구자에 관한 역사 연구 이다. 특히, 배구자의 몸에 집중하고 초기 발레 작품으로 간주되는 「사(死)의 백조」1)를 재 구성하여 배구자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본 연구의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촉접(觸椄)이 라는 연구 방법을 사용하여 배구자의 몸과 춤, 「사(死)의 백조」를 분석·이해하였다.
배구자는 한국 근대무용사에 남긴 업적에 비해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동시대 무용가들에 비해 배구자에 관한 역사 자료는 많지 않으며, 작품 영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구자가 한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할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주체적인 문화 풍토가 조성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이것이 그녀가 당대에 크게 평가 받지 못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녀에 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그녀를 재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한계로 작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역사 기술 방법을 통해서 배구자의 삶과 그녀의 무용세계를 재조명 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며, 따라서 기존의 연대기적 역사 기술과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다. 본 연구자는 20세기 후반에 대두 된 역사 다시쓰기와 무용학 분야에서 주목받았던 몸을 통한 역사 기술 방법론에 주목했다.
역사 다시쓰기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역사를 추구하던 전통적인 역사 기술에서 탈피하여 역사가의 주관성과 해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론으로 현상학 내지는 해석학적 사고체 계와 유사성을 지니며,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의 ‘추체험’ 개념과도 연관을 가진다.
20세기 후반 몸 담론의 새로운 경향이 시작되면서 무용사 연구에 있어 연구자의 몸이 적극 반영되기 시작했다. 그 사례가 수잔 리 포스터(Susan Leigh Foster)의 ‘몸으로 글쓰기 (Bodily Writing)’와 앤 쿠퍼 알브라이트(Ann Cooper Albright)의 ‘체화 연구(Embodied Approach)’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무용사 기술에서 탈피하여 몸을 중심 개념으로 하는 자 신들의 역사 연구 방법론을 전개했는데 이 또한 현상학적 색채가 짙게 깔려있는 방법론들 이다.
이러한 이론들을 토대로 본 연구자는 역사 다시쓰기 방법론을 정립하고 배구자의 「사 (死)의 백조」를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촉접’이라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 였는데, 그것은 몸을 통해 역사를 기술하기 위한 전략이다. 본 연구의 핵심 용어인 ‘촉접’ 이란 용어는 본 연구자가 본 논문에서 최초로 시도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수잔 리 포스터 의 ‘몸으로 글쓰기’와 앤 쿠퍼 알브라이트의 ‘체화 연구’를 통해서 새롭게 생성한 것이다.
특히 앤 쿠퍼 알브라이트는 자신의 방법론을 로이 풀러(Loie Fuller) 연구에 적용하였다. 그녀는 로이 풀러가 무용사상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평가에 있어 그녀의 움직임보 다는 기술적 요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며 로이 풀러만의 독특한 움직임 미학을 재조명하였다. 그녀는 로이 풀러의 작품을 경험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이른바 ‘접촉 듀엣(Contact Duet)’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접촉(接觸, Contact)’ 의 사전적 의미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교섭한다는 의미임은 주지의 사실이 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2009, 89).
한편, 접촉은 일상적으로 사람과 사물 사이,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만남의 상황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어휘이며 보다 즉물적인 차원에서의 조건을 상정한다는 인상 을 준다.
본 연구에서 접촉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배구자에 관한 실제 영상이 단 하나 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의미에 다소의 괴리가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반면, 본 연구자가 개념화한 촉접이라는 용어는 그 한자어에 있어서는 접촉과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으나 보다 공감각적이고 촉지(觸知)적인 성격을 강조하며, 물리적인 만남보다는 몸을 통한 느낌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의 몸과 조우하고자 하는 본 연구의 의도를 고려하면 보다 그 어감에 있어 적합한 용어가 될 거라 사료된다.
이처럼 사전적 정의를 고려했을 때 접촉과 촉접의 기본의미는 비슷하거나 같지만 접촉 이 보다 넓은 범위에서의 용법을 지니고 다소 일상적 뉘앙스를 띄는 반면, 촉접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맞닿는다는 이미지를 넘어서 보다 형이상학적이고 공감각적인 차원 의 만남을 강조하는 개념을 갖는다고 하겠다. 즉, 연구자가 「사(死)의 백조」를 재구성하면 서 과거 배구자의 몸에 다가가고 그녀에 대한 교감을 시도하는 한편, 당시 배구자의 체험 과 내면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통해 역사를 기술하려는 것이다. 이는 연구자 자신이 적 극적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 인물과 조우하고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 기술을 통해 본 연구자는 20세기 초반에 한국 신무용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으나 그 평가가 현저하게 부족했던 배구자를 재조명하고 한국의 무용 사 기술에 대한 성찰과 함께 새로운 역사 방법론을 모색하고자 했다. 한국무용사 연구에서 처음 시도된 촉접 방법론이 향후 20세기 역사 다시쓰기 연구와 춤 역사 연구 발전에 기여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본 연구의 방법과 절차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방법론 고찰을 위한 문헌연구이다. 이를 위해 관련된 국내ㆍ외의 문헌 자료와 석 ㆍ박사 학위 논문, 학술지와 인터넷 자료를 참고하여 연구했다. 문헌 연구에서는 역사학에 서의 딜타이의 ‘추체험’ 개념, 포스터의 새로운 역사 기술 방법론, 알브라이트의 ‘체화 연 구’를 통해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본 연구자는 이들이 제시하는 개념과 방법들을 토대 로 배구자의 누락된 역사 부분에 관하여 주관성을 적극 개입시켜서 재구성했다.
둘째, 배구자에 관한 자료 수집과 정리, 분석이다. 배구자와 관련한 신문 기사, 인터뷰 자료, 기록 사진 등을 토대로 입체적인 분석을 통해 배구자의 삶과 「사(死)의 백조」를 재구 성했으며 과거의 배구자와 만나고 역사적 맥락 안에서 그녀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시도 했다.
셋째, 「사(死)의 백조」의 재구성을 통한 촉접이다. 본 연구자는 안나 파블로바 (Anna Pavlova)의 공연 영상과 이전 단계의 자료 수집 및 분석을 바탕으로 배구자의 「사(死)의 백조」를 재구성하고 여기에 대한 촉접 내용을 기록했다. 특히 파블로바의 「빈사의 백조 (The Dying Swan)」공연 영상을 참조하고 본 연구자가 직접 당시의 배구자가 연기한 춤을 안무하고 연기하면서 과거 배구자의 춤추는 몸과 조우하고자 시도했다.
마지막으로 「사(死)의 백조」 다시쓰기이다. 본 연구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지금까지 의 단편적인 문헌 연구나 각종 평론에서 다루거나 언급하지 않았던 그녀의 무용세계를 보 다 심도 있고 생생하게 기술하고자 했다.
Ⅱ. 춤 역사 다시쓰기 연구 방법론 고찰
20세기 중반 이후 새로운 역사쓰기와 관련한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역사학 분야 에서 주목받은 논의 중 하나는 딜타이의 ‘추체험’ 개념이었다. 해석학적 맥락에서 ‘설명’은 대화나 텍스트 상에서 무언가를 형성하는 기능, 즉, 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반면, ‘이해’ 는 말해진 것을 이해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부연하면, ‘설명’이 창작의 과정이라면 ‘이해’는 이에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운동이며, ‘이해’의 기술은 창작자의 원래의 정신적(심리적) 과정을 ‘재체험’ 또는 ‘추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석학의 주요 관심은 ‘이해’에 관한 것 이며, 객관적 ‘이해’의 방법론을 정초하는 것이 주요 목표 중 하나이다. 한편, 딜타이 (1958/2008)는 추체험에 대해 “이를 통해 타인의 삶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해석의 대상에 대해서도, 해석자가 어떠한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해석의 내용이나 결과가 달라진다고 한다. 즉, ‘추체험’에 따른 해석의 재구성을 통해 타자에 대한 이해 방 식도 달라지게 된다(원인선 2017, 56).
한편, 새로운 역사 기술 방법론과 관련하여 무용학 분야에서도 2000년대 이후 무용사 기술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하면서 보다 활기 있고 건설적인 논의들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라 카터(Alexandra Carter)는 『역사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Dance Histor y)』에서 당시 무용학계에서 나타난 변화와 새로운 접근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역사가는 사건의 중립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태도를 지닌 주체”라고 주장하였다(Carter 2004, 5). 이 러한 역사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는 무용사 연구에 있어 보다 생생한 과거를 재현하기 위한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포스터는 기존 연구 관점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이슈들 을 제기하였다. 그는 안무의 개념을 확장시켜 역사를 안무하고, 몸이 적극적으로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이론을 제시해 학계의 이목을 모았다.
포스터의 이론에 따르면, 무용 작품의 안무가는 ‘몸 글쓰기(body writing)’이자 ‘몸으로 글쓰기(bodily writing)’를 다루는 주체이다. 무엇을 보거나 소리를 듣고, 앉거나 서고, 이 동하는 모든 몸의 움직임에 있어 인간은 그 마음 뿐 아니라 몸 자체도 깊이 관여되어 있다. 즉, 인간의 몸은 모두가 몸 글, 몸의 글쓰기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터는 “몸을 통해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형태적인 의미를 형성하는 문화적인 실천”이라고 설명하였다(Foster 1995, 20).
알브라이트는 새로운 무용사 기술을 위한 실천적 가이드를 제공하였다. 그는 포스터의 ‘몸으로 글쓰기’를 더욱 구체화하여 현장에 적용하였다. 알브라이트의 연구 또한 체화의 방법론을 역사 연구에 접목한 사례이다. 특히 알브라이트가 정리한 ‘몸으로 역사를 쓰는 방식’은 로이 풀러(Loie Fuller)의 작품에 대한 구체적 탐구를 통해 이뤄졌다. 관련 연구를 통해 알브라이트는 “무용의 역사란 아카이브 자료가 아닌 신체적 움직임을 경험함으로써 기술될 수 있는 것”이라 설명하였다. 2007년의 『빛의 흔적: 로이 풀러 작품에 나타난 부 재와 존재(Traces of Light: Absence and Presence in the Work of Loie Fuller)』등 여러 저서와 연구를 통해 실제 실기기반적 이론을 정리하였고, 이를 통해 체화 연구의 방법론을 실증하였다. 그는 이러한 발전적 탐구를 통해 실제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풀러의 춤을 재현하였고 근감각적(Kinaesthetic)인 방식으로 과거의 풀러와 교감했다. 이를 통해 “춤은 연구자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과거 움직임의 진동들 속에서 역사를 쓸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Albright 2007, 33)”는 자신의 이론을 실존적으로 구현하였다.
이러한 몸에 집중하는 최근의 경향은 몸이 정신과 대비되는 열등하고 불순한 것이라는 관념에 대한 저항이자 몸과 정신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에 대한 거부라 할 수 있다. 몸은 단지 살덩어리가 아니며, 정신에 종속되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물도 아니다. 몸은 말 그대로 우리 자신이고 우리는 우리의 몸이다.
과거의 몸들은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몸이다. 역사는 이러한 과거의 몸들의 행위 에 다름 아니다. 과거의 몸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과거의 몸들과 직접 만나 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몸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통해야만 한다.
본 연구자가 과거의 몸들과 만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제시한 촉접의 개념과 특징은 다 음과 같다.
촉접은 우리의 의식에 의한 인식 이전의 감각적 인식을 지향한다. 우리의 몸은 특정한 상황이나 조건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의식에 앞서 반응한다. 몸은 정신, 또는 의식이 인 식하거나 지각하기 이전에 이미 저절로 사태를 느낀다. 몸은 우리가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우리가 모르는 심연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몸들과 만났을 때 우리 몸이 스스로 감각하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기술하는 것이 본 연구에서 의도한 몸 적 글쓰기이다.
촉접은 연구 대상, 즉 과거의 인물을 추적하기 위한 실질적이고 실천적인 과정이다. 딜 타이의 추체험이 객관적 해석의 기술론을 정초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라면 촉접은 객관성 보다는 오히려 주관성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촉접은 정제된 이론이기 보다는 하나의 실 천이자 과정이며 주체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다.
촉접을 위한 작품 재현은 이전 작품의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물을 재구성 하는 작업 이다. 작품의 재구성은 과거의 몸과 촉접하기 위한 과정이며 오히려 나의 몸이 이끄는 대 로 안무해 나가는 작업에 가깝다.
본 연구자가 제시하는 촉접의 단계적 실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본격적인 촉접을 위해서 대상 인물의 몸을 통해 객관적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해석한다. 예를 들어 배구자가 자신의 창작 작품을 안무하기 이전에 어떤 훈련을 받아 왔 는지, 또는 어떤 공연을 했는지, 신체적 측면(몸의 포스처, 얼굴 표정, 외향) 등을 분석하고 그 당시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한다. 또한, 연구자 스스로가 과거의 인물이 되어서 구체적 상황을 상상해 보고 인물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두 번째, 인물의 작품과 관련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이해한다. 본 연구의 경우, 배구자의 춤(창작 작품)을 통해 몸 움직임의 측면(동작, 몸 방향, 신체 부위 부각, 얼굴 표 정, 의상, 머리 장식) 등을 분석하고 이를 다양한 관점과 상황에 관련지어 해석한다.
세 번째, 첫 번째와 두 번째 분석 및 이해를 기반으로 구체적 작품이나 행적에 관해 준비 하여 본격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때, 연구자가 최적의 환경에서 촉접 과정에 몰입할 수 있 도록 준비해야 한다. 배구자의 경우 작품의 기획 의도, 컨셉, 무대, 음악, 의상, 장식 등의 세팅 방식에 대해 고찰한다. 이후 작품 재구성을 통해 연구자의 몸으로 촉접한다. 눈을 감 고 오랫동안 집중하며 몸이 이끄는 움직임 구성들에 대해 영상 촬영에 들어간다.
네 번째, 연구자의 촉접을 ‘몸적 글쓰기’ 방식으로 텍스트화 한다. 텍스트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그대로 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으나 이러한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움직이는 글쓰기는 점차 완성적인 형태가 된다. 촉접 묘사 시 글의 형식에는 구애 받지 않으며, 연구자의 자율성을 높인다. 무엇보다 몸으로 느껴지는 반응 그대로 서술해 나감으 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움직임을 상상하게 하는 또 다른 과정을 유도할 수 있다.
Ⅲ. 촉접연구에 기반한 배구자의 춤추는 몸
무용수에게 몸이란 작품을 구성하는 가장 직접적인 텍스트이자 핵심적 도구라 할 수 있 다. 모든 표현이 신체를 이용한 언어를 통해 구현된다. 따라서 배구자의 작품 세계를 들여 다보기 위해 먼저 그의 직접적 텍스트이자 도구라 할 ‘몸’을 관찰하고 분석하였다. 이 장에 서는 촉접의 첫 번째 접근 방식으로서 객관적 시각에서 배구자의 몸을 관찰, 분석, 이해하 였다. 사용한 자료는 배구자의 활동 기간 중 발표된 신문, 잡지 등 그의 신체가 나타난 사진들을 집중적으로 활용하였다. 사진 속에 나타난 몸의 포스처, 얼굴 표정, 전신의 외향 등을 통해 배구자와 그녀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았다.
배구자는 1926년 돌연히 덴카츠 예술단을 탈출하여 고향 김해로 낙향했다. 그로부터 2 년 여간 운둔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다 악극(뮤지컬과 유사)의 개척자로 알려진 이철의 끈 덕진 회유와 설득으로 1928년 다시 무대에 올랐다. 장곡천 공회당에서 백장미사 주최로 열린 이 공연에서 배구자는 독무 형태의 창작무용을 발표했다. 선보인 작품은 「유모레스크」, 「인형」, 「빈사의 백조」등으로 이때 무용수는 토슈즈를 신고 공연한 것으로 전해진다(김경 희 1999, 73). 이를 보아 발레와 비슷한 형식의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사(死)의 백조」는 실제로 배구자가 안나 파블로바로부터 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 진 작품이다(케인 2003, 92).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상연된 초창기 발레 공연으로 추정된다. 1928년 즈음의 작품들, 즉 배구자의 초기 작품들은 아직까지 배구자 본인의 개성적 안무 색채가 드러나기보다는 무용단에서의 공연 활동이 확장된 것에 가깝다. 고별음악무용회가 큰 반항을 일으키자 배구자는 미국 유학을 접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자신의 무용연 구소를 열어 어린 제자를 양성하되, 덴카츠나 앞선 개인 공연과는 다른 새로운 방법을 적 용한다는 것이었다. 우선적으로 그는 기예를 배제하고, 무용과 음악에 집중하였다(김호연 2019, 77).
1928년에 초연된 창작무 중 「아리랑」은 매년 빠지지 않고 공연되는 배구자의 주요 레퍼 토리였다. 주제의 상징성에서 알 수 있듯이 배구자는 적극적으로 한국적인 정서를 작품에 도입하였다. 1929년에는 주로 서양춤 형태의 창작 무용들을 공연하였고, 관련 기록의 부재 로 정확한 개별 작품명은 파악되지 않았다. 당시 신문자료에는 별다른 작품명의 언급없이 ‘∼외 20종’으로만 명시되어 있다. 비록 모든 작품의 종류와 성격을 확인하긴 어렵지만, 상당한 수의 공연 작품을 발표한 것은 분명하다(김효진 2016, 84).
<도판.1> 기사에서는 배구자의 외모를 묘사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는 조선의 전통 치마 저고리를 입은 모습으로 촬영되었다. 의상의 색깔은 남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입은 것으로 나와 있다. “일본의 어여쁜 조선 딸”과 같은 표현이나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조 명되었다. 배구자 자신이 실제로 10년 전과 전연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 영향이다. 기사에 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님을 애닯게 부르고 있는 풍부한 조선 정서”를 담았다. 작 품의 소재와 주제, 무대, 의상, 상징 등 전적으로 한국의 전통과 정서를 그려낸 것으로 보 인다. 기사 또한 작품의 성격과 이에 깃든 민족성을 극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시기 배구자의 민족성 짙은 작품과 공연이 신문 지상에 당당히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19년 3.1운동을 기폭제로 이후 항일운동 은 점점 더 거세게 번지며 확산되었다. 1920년대도 이 같은 저항정신이 퍼져나가던 시기였 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특히 경제와 물자수탈의 형태로 강화되었다. 이러한 민족적 저 항이 힘을 얻는 가운데 이 같은 공연과 보도도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에서 보이듯 공연장의 객석 또한 만석을 이루었다. 공연에 대한 높은 호응과 열기 또한 당시 험난한 여건을 헤치는 데 적지않은 지지력이 되었을 것이다.
<도판. 2>는 「오리엔탈」이라는 작품의 사진이다. 세 명의 무용수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문 기사에는 작품 제목만 나와 있다. <도판. 3>의 사진은 배구자이다. 빛바랜 사진 속에 서 배구자는 왼손으로 치마를 잡고 오른팔은 뒤로 꺾인 허리에 저항하듯 앞으로 뻗어 포즈 를 취하고 있다. 시선은 카메라를 향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머리 모양과 의상은 서구적 인 느낌을 준다.
두 사진은 별도의 내용 없이 사진만 실려 있어 자세한 배경을 알기 어려우나, 분명 움직 임과 의상에서 보이는 분위기는 상당히 과감하고 서구적이다. <도판 3>에서는 무용수들이 바닥에 엎드려 상체는 세우고 다리는 하늘 위로 들어 올리는 포즈를 취하였다. 사진이 다 소 흐릿하지만 중앙의 무용수는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닥에 두 무릎을 대고 지지한 상태라 볼 때) 최소한 130도 이상 허리를 뒤로 젖혔다. ‘젖혔다’는 표현보다는 ‘꺾었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매우 과감하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아도 거의 기예에 가깝고, 이를 위해 매우 긴 시간 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두 장의 사진은 미국의 안무가 루스 세인트 데니스(Ruth St. Denis)의 「라다(Radha)」 (1906)를 연상케 하였다. 「라다」는 오감의 춤,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의 네 가지 괴로움, 감각적 쾌락이 이끄는 막다른 길 등을 표현(Banes, 1998/2012)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특 히, 동양의 종교적 의미를 담아낸 새로운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으로 높이 평가받았 다.
<도판 2>, <도판 3> 속 배구자의 모습은 「라다」에 등장하는 여성의 포즈와 매우 유사하 다. 특히, 배구자는 이 작품에 「오리엔탈」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것은 20세기 초반 미 국에서 유행한 오리엔탈리즘과도 관련한 것으로 보인다. 즉, 동양적 신비를 주제로 한 무 용 작품이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도판 4>는 「레뷰(Revue)」 춤인데 작품 제목은 알려지지 않는다. 소녀들이 나란히 서서 동일한 포즈를 취한 군무 동작인데, 레뷰 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출이다. 배구자무용단은 1929년 설립되었고 당시 무용수들의 수련기간이 삼개월로 짧았다고 전해지나, 당시 인터뷰 에서 무용수들의 기량을 걱정하는 대목들이 있다. 1929년 공연 사진을 보면 다양한 연령대가 무용수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18명의 무용수들의 같은 의상과 신발을 신고 발레의 팟세 (Padsé)동작과 유사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머리는 다 같이 오른쪽 어깨에 기울어져 있다. 의상 뿐 아니라 표정에서도 귀여운 느낌이 든다. 특히 양쪽 끝 무용수들은 한쪽 손으로 치마를 살짝 들어 올렸는데 이러한 것들이 밝고 경쾌한 느낌의 인상을 남긴다.
<도판 5>는 1936년 중앙일보에 실린 사진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바로 발레 동작 중 아라베스크와 유사하다. 의상 또한 프랑스의 발레 작품 「라 바야데르(La Bayadere)」에 사 용된 의상과 비슷하다. 「라 바야데르」는 4막 7장으로 구성된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의 작품이다. 1877년 러시아에서 초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목에 나오는 ‘라바야데르’란 사원의 무희를 말한다. 무희는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춤을 추기도 한다. 이 작품은 서양의 고전 발레 명작 중 하나이다.
사진 속 배구자의 의상이나 분위기도 실제로 춤추는 사원의 무희의 인상을 자아 내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놓인 피사체 또한 항아리의 형태로 짐작된다. 역시 서양 무용을 상당 히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구자의 무용과 창작 기저에는 여전히 발레 의 뿌리가 공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의 창작물이 가진 대표적인 형식은 탈장르적 레뷰라 할 수 있다. 배구자는 독립적으 로 활동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레뷰 형식에 주목하며 실제 공연으로 선보였다. 이후 전통과 의 접목, 탈장르적 요소 등을 활용한 다양한 창작이 진행되었다. 다양한 레뷰 형식 가운데 승무, 검무 등 민속적이고 감성적인 모티브를 지닌 작품은 관객과의 소통에도 큰 역할을 했다.
위와 같이 사진과 기사 등 관련 보도 자료를 통해 배구자의 몸과 춤을 살펴보았다. 배구 자의 작품에 대한 시각과 평가는 현재도 매우 다양하다. 김남석(2015)은 배구자의 작품을 ‘조선 춤의 혼재’라 표현하기도 했다. 이는 배구자의 자유로운 창작 정신과 탈장르적 안무 경향을 일컫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다양성’의 측면에서만 평가하는 것은 오해 라 볼 수 있다. 공연의 양상이나 외형은 비록 ‘조선 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혼합된 것’으로 나타났더라도 그 중심에는 초지일관 시대의 고난을 극복하려는 민족의식과 실험정신이 항 상 기저에 존재하고 있었다. 한국 근대무용사에 있어 그녀가 개성적인 자취를 남겼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Ⅳ. 촉접연구를 통한 배구자의「사(死)의 백조」다시쓰기
1. 「사(死)의 백조」 에 대한 사적 고찰
배구자의 「사(死)의 백조」는 미하일 포킨(Michel Fokin)이 안나 파블로바를 위해 안무 한 「빈사의 백조( The Dying Swan)」를 원작으로 한 창작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배구자는 덴카츠 예술단 퇴단 이후 1928년 배구자 고별음악무용회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갖게 되는 데,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레파토리가 바로 「사(死)의 백조」였다. 이 공연은 동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발레 레파토리를 한국에서 처음 선보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띤다. 해당 공연은 배구자가 도미를 결심한 후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이었기에 제목에서 부터 ‘고별’이라는 어휘가 사용되었다. 이 공연 프로그램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이 바로 「사(死)의 백조」인 것인데, 10여 년의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심경의 변화로 미국행을 결심 한 그녀가 피날레를 위해 선택한 작품은 제목부터가 비상하다. 일찍이 어린 나이에 주목받 기 시작한 배구자였지만 그만큼 내면의 고뇌와 고국에 대한 향수가 없지 않았다. 어린 시 절의 꿈이던 무용수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작을 앞둔 그녀는 죽어가는 백조의 이미지 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삶에 있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작품 이라는 사실에서 죽음의 의미가 새삼 다가온다. 더구나 그것은 당대 최고의 안무가가 만들 고 최고의 무용수가 연기했던 역사적 작품이었기에 더욱 비장하다.
「사(死)의 백조」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공연에 관한 내용들을 가정해야 한다. 먼 저, 「사(死)의 백조」는 그녀에게 있어 예술적 동경이자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거울이다. 따라서 배구자의 「사(死)의 백조」는 원작의 비장함과 비애감을 잃지 않으면서 배구자 자신 의 내면적 표현에 최대한 충실하도록 기획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死)의 백조」는 원작 만큼이나 어둡고 슬픈 분위기로 연출되었을 것이다.
둘째, 작품의 구체적인 구성과 동작들에 관한 것이다. 배구자의「사(死)의 백조」에 대해 문학가 심훈은 “빈사의 백조는 조그만 동무새들을 모아 죽지 떨어진 날개를 펴보려고 무진 애를 썼고 그 가느다란 다리를 일어설 수 있게 무대를 만든 것이 배구자”(심훈 1929, 43) 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추측하면 배구자는 날개를 펴 보려고 하는 모습이나 주저앉았 다 일어서는 장면을 넣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원작에서 안나 파블로바가 관객을 향해 손을 뻗어 살려달라고 하는 듯 호소하는 장면과 유사한 느낌의 동작으로 구성했을 거라 추측했다. 또한, 안나 파블로바는 허리를 뒤로 젖혀 죽어가는 백조를 연기했는데, 배 구자 역시 허리의 유연성과 근력이 좋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충분히 연기할 수 있었을 것 이다. 배구자의 이전의 창작 작품들을 살펴보면 유독 허리를 뒤로 꺾어 포즈를 취하는 장 면들이 많았다. 또한, 배구자는 발레 동작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업(Toe up)’을 하 더라도 제자리에서 서있는 정도였을 것이며, 주로 팔을 사용하거나 죽어가는 백조의 느낌 위주로 안무를 구성했을 것이다.
셋째, 배구자의 여타 작품들의 경우 원작의 의상 느낌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배구 자의 「사(死)의 백조」에서는 원작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의상과 작품의 구성만큼은 유사하게 따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대 세트는 원작에서도 특별한 것이 없 는데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스팟 조명만이 배구자를 비췄을 것이다. 의상은 배구자의 창작 작품들을 살펴보면 때로는 한국 전통 의상인 한복을 입고 민족의 감정을 대변하기도 하지 만 대부분의 창작 작품에서는 레뷰 요소를 접목한 의상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반영했다. 배구자는 당시 사회 환경이나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이런 의상을 구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특이하고 다채로운 의상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원작과 완전히 동일한 의상은 아니 더라도 백조를 형상화 하는 유사한 느낌의 의상을 만들어 입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음악 역시 원작과 마찬가지로 카미유 생상(Camille Saint-Saëns)의 음악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 정했는데, 당시 음악 출판사가 공연을 주최했기 때문에 음악에도 상당히 신경을 썼을 거라 짐작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배구자가 최대한 몸을 움츠린 채 죽음을 맞이하며 조명이 꺼지도록 연출했다.
2. 「사(死)의 백조」 다시쓰기
본 장에서는 연구자가「사(死)의 백조」를 재현하면서 배구자의 ‘과거의 몸’과 촉접을 시 도했다. 「사(死)의 백조」는 안나 파블로바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배구자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자 기획되었고, 안무의 방향도 그와 같이 설정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사(死)의 백조」의 영상은 존재하지 않는 탓에 이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을 문헌으로 남겨진 1, 2차 자료들을 기반으로 추론, 파악하였다. 특히, 작품 자체의 춤과 무대 연출은 원작인 안나 파블로바의 영상 자료2)를 참고하여 분석하였다. 본 연구자는 앞선 배구자의 삶과 작 품에 관한 객관적인 분석을 기반으로 촉접을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
본 연구자가 촉접을 통해 기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00’ 00”~00’ 20”s
나는 배구자가 되어 무대 하수 뒤에서 등장했다. 나는 공연 시작 조명이 켜졌을 때에는 무대 한 가운데에 대각선 방향으로 토슈즈를 신고 올라서 있었다. 양손은 포개서 아래로 향해져 있으며, 발은 잘게잘게 제자리에서 움직였다. 계속해서 몸의 방향과 시선은 대각선 을 향해 있고, 양손을 포개 가슴 아래에서 위 아래로 움직였다. 나는 배구자가 토슈즈에 익숙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겨우 올라서서 거의 제자리에서 움직였을 것으 로 생각했다. 그러나 백조의 날개짓은 이 작품의 주요 움직임이기 때문에 나는 날개짓을 하듯 손을 포개어 팔꿈치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는 주저 앉았다. 오른다리는 반 무릎상태였고 머리를 아래로 숙였다 이어서 팔과 머리 는 뒤로 한 번에 ‘훅’ 젖혔다. 안나 파블로바 역시 비슷한 동작을 했는데, 이 작품에서 2회정 도 반복되기 때문에 인상적인 장면일 수 있을 것이다.
•00’ 25”~00’ 45”
나는 일어나서 아까와는 다른 반대쪽 대각선 방향으로 올라서서 양다리를 붙이고 있으며 무릎 아래로 발은 잘게잘게, 제자리에서 수없이 움직인다. 이때 각각의 걸음에 신경 써야 했다. 이때 팔은 튜튜(tutu)를 아래를 잡거나 또는 양손을 크로스해서 어깨를 잡고 움츠린다. 나는 배구자의 죽어가는 백조를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괴로웠다. 신체적으로도 발가락이 아파오는 고통이 있었으며, 감정적으로 죽어가는 백조는 몸을 움츠릴 수 밖에 없었다. 배구 자를 예술가가 아니고 인기만을 쫓는 예능인으로 바라보았던 평론가들이 서툴렀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더욱 몰입했다. 나는 철퍼덕 한 다리를 땅에 꿇었다. 백조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 이었다.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표현이 맞을까, 제대로 아름답게 목을 가눌 수가 없다. 모가지 가 축 늘어지고 양쪽 팔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호흡을 편안하게 유지할 수 없어 짧고 바쁘 게 내뱉는다. 짧고 규칙적이지 않은 호흡을 연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 몸 안에서는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죽어가는 새였다. 슬픔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이 었다. 이런 생각을 갖지 않고서는 『사(死)의 백조』 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장면을 위해 수백 번의 반복 연습을 해야 했다. 그러자 백조의 움직임이 내 안에서부터 생겨나고 내 몸은 답했으며, 배구자의 실제 움직임 증거를 넘어서 그것의 원천을 알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가르쳤다. 놀랍게도 배구자가 표현한 소멸된 백조의 움직임들이 나로 하여 금 다시 탄생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00’ 50”~00’ 57”
나는 배구자가 하루 정도 발레를 배웠을 것으로 가정해서 하루 만에 배울 수 있는 발레동 작을 생각했다. 발레 동작 중에 에이샤빼(echappé)가 기본동작이기 때문에 「사(死)의 백조」 중간에 반복적으로 넣었다. 백조다리의 유일한 테크닉 동작으로 사용했다. 단순한 동작으로 볼 수 있지만 「사(死)의 백조」 안에서는 호흡과 함께 더욱 더 극에 달하는 모습처럼 연출했 다. 이 장면에서는 발끝으로 오랫동안 서 있기 때문에 중심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시선은 동작방향의 대각선 바라보고 있다. 나는 죽어가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백조의 감정을 유지하였다.
•00’ 60”~01’ 05”
나는 무대 뒤를 향해 서있었다. 「빈사의 백조」 의 클라이막스(climax)라고 할까, 빈사의 백조라 하면 누구나 연상하는 동작일 것이다. 신체는 무대를 정면으로 향해 있으며 양팔은 길게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 때 두 다리를 모은 채 역시 발끝으로 서서 스텝을 잘게잘게 쪼개고 있다. 이 장면에서의 특징적인 점은 목을 뒤로 훅 젖힌다는 것이다. 정면에 서 보면 안나 파블로바의 얼굴이 보일 정도 이다. 그녀의 놀라운 상체 유연성과 신체 균형을 알 수 있었다. 배구자는 과연 이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을까. 분명 이 장면을 차용했을거라 예상해 본다. 이 장면에서 5초 이상 같은 동작을 넣었기에 주요 동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면 연출을 위해 오랜 시간 머리를 뒤로 젖히려고 시도했으나 쉽게 되지 않았다. 양팔은 옆으로 향한 채 머리를 뒤로 젖힌다는 것이 생소하고 어려웠다. 이 동작을 연습하고 촬영하기 위해 나는 신체적 불편함과 고통을 느꼈다. 원작도 아마도 백조의 슬픔과 고통을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 이토록 어려운 테크닉을 넣지 않았을까 생각한 다. 나는 그 움직임의 느낌을 바로 표현하기 위해 그 날에 움직임을 텍스트로 옮겼는데 이 날 움직임 이후 극심한 목의 근육통을 느꼈고 며칠 동안이나 나는 목 근육통에 시달렸다. 배구자라면 지금의 나보다는 나이가 훨씬 어렸고, 육체적으로 훈련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이러한 어려움은 없었을 거라는 재밌는 상상을 해본다. 배구자의 과거 작품 사진들을 보면 배구자는 “아크로바틱”이라는 기예적인 작품을 공연할 정도로 유연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 이러한 동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거라 예상한다.
•01’ 12”~01’ 28”
이 부분은 더욱 강렬하게 몸으로 표현 될 수 있었다. 나는 주저앉아 한쪽 무릎은 바닥에, 다른 한쪽은 반 무릎으로 포지션을 잡는다. 상체는 관객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팔은 앞으로 내밀며 살려 달라 애원하는 감정으로 표현했다.
상체는 바닥 쪽으로 숙인다. 머리 역시 바닥으로 꽂히는 느낌이다. 나는 죽은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살고 싶어 날개 짓을 하지만 그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머리에 서 돌고 있는 피가 바닥으로 몰린다. 이 고통 안에서 머리를 들어 손을 뻗어 무언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까지도 해본다.
원작 「빈사의 백조」 는 그 표현에 있어 매우 극적이다. 「빈사의 백조」 에서 테크닉이란 단지 턴(turn)과 점프(jump)와 같은 요소가 아니다. 이미 원작부터 무용수는 죽은 백조를 표현하기 위해 백조가 되어야 하는 작품이었다. 죽어가는 백조를 무용수 자신 안으로 받아 들이고 다시금 밖으로 표출하여 움직이는 작품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중요 한 작품인 것이다.
연이어 다시금 일어나 날개를 퍼덕여보지만 나는 다시금 주저앉는다. 나는 날개를 살포 시 포개어 바닥에 주저앉은 다리에 얹어 놓는다. 나의 호흡은 편안해진다. 나의 머리는 나의 날개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조명은 꺼진다. 이제 작품의 모든 것이 마무리 된 것이다.
본 연구자는 배구자의 「사(死)의 백조」를 재현하면서 다양한 세팅을 시도했다. 그 결과 의상과 조명의 변화에 따른 감정 변화가 있었다. 몇 차례 환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었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고 이후 다시 조명을 어둡게 한 채 암흑 속에서 하나의 조명만을 비 추고 춤을 췄다. 그러자 백조의 죽음에 더 가까이 간 듯한 슬픔이 느껴졌고 당시 배구자가 연기한 그 백조를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한편, 「사(死)의 백조」는 턴 아웃(turn-out) 을 하고 발끝을 포인(ponint)하는 디테일한 동작보다는 죽어가는 백조와 일체가 되어 자신 의 감정을 표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사(死)의 백조」의 기록 영상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촉접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사(死)의 백조」를 촉접하기 위해서는 배구자의 삶 전체를 이해해야 하고, 당시 배구자 의 감정을 공감해야 한다. 그런 이후에야 배구자를 몸과 춤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고 비로소 살아 있는 생생한 역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Ⅴ. 결론
먼저 본 연구자는 촉접의 첫 번째 단계로서 배구자가 덴카츠 예술단에 입단하면서부터 퇴단하기까지의 시기에 어떠한 교육을 받고, 어떤 종류의 공연을 했는지를 기존 문헌 자료들 을 기반으로 몸에 집중하여 파악하는 작업을 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배구자의 춤과 관련한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역시 촉접을 통해서 배구자의 무용세계를 심도 있게 이해하고자 했다. 세 번째 단계는, 이전 단계의 분석 및 이해를 기반으로 배구자의 「사(死)의 백조」에 관해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이었다. 촉접의 실천적 작업을 통해서 「사(死)의 백조」를 재구성하여 몸소 경험하고 이를 통해 몸에서 경험하는 내적 체험을 잡아내고자 했다. 이것은 당시의 배구자가 「사(死)의 백조」를 연기하면서 가졌을 내면적 체험, 신체적 경험 등과 통하 는 것이다. 즉, 본 연구자의 몸을 통해 과거 배구자의 몸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연구자의 촉접 내용을 ‘몸적 글쓰기’ 방식으로 텍스트화 했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기존의 역사가 언급하지 않았던 배구자와 관련 한 내용이나 새로운 정보를 얻고 그것을 기록하고 싶었다. 이 모든 과정의 목적은 배구자 를 보다 잘 이해하고 정당하게 평가하며, 그러한 기록을 통해 후학들에게 유용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연구의 보편적 목적이기도 하다.
역사 연구가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것이라면 역사 기술에 관한 연구는 그 이해에 보다 충실하고자 하는 방법의 모색이다. 보다 바람직한 역사는 당시를 살았던 인물을 보다 입체적이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나아가 공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가 스스로가 적극적인 행동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기술해야 한다. 이것이 몸 으로 역사를 기술해야 하는 이유이다.
무용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 연구자 자신의 몸을 통하는 방식은 자료를 정리하고 나열하 는 방식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체험을 유도한다. 그것은 내가 직접 과거의 인물이 되어 느끼면서 그 인물과의 공감으로부터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다.
촉접 연구 방법을 통해서 배구자에 대해 본 연구자가 이해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배구자 역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무용수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 다는 점이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춤을 추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자아와 인생에 관해 번민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불완전 한 존재였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타국에서 활동하며 겪었을 수많은 고충을 누구나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배구자의 행적과 작품, 공연 등에 관해 논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내적 측면을 배제한다면 배구자에 관한 역사는 온전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배구자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매우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신여성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 걸고 무용 단체를 운영하면서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은 지금의 기준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여성으로서 극장 설립에도 참여하고 서양의 무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국내에 선보였다는 점에서 20세기 초반 한국무용사에 특기할 만한 행적을 남겼다.
한편, 배구자의 내면에는 항상 서양에 대한 동경과 함께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이 공존 하는 복잡한 양상이 존재했다. 성장기에 일찍이 해외 경험을 두루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자양을 흡수했고 이것이 그녀의 예술세계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반면, 고국에 대한 향 수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목마름은 한국적 정서에 대한 자부심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혼종적이면서 이율배반적인 특성이 배구자만의 독특한 무용을 형성했던 것이다.
「사(死)의 백조」와 관련해서 배구자는 자기 자신을 작중에 투영하고자 했으며 죽어가는 백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고별 무대로 기획된 공연의 피날레 작품을 통해 그녀는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국을 떠나 또다시 미국행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내면의 고뇌와 그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작품, 극한의 표현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의 구성 등은 맥락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작품, 「사(死)의 백조」가 배구자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주목해야 할 문제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死)의 백조」를 재구성하면서 파악된 부수적인 내용은 배구자가 탁월한 유연성과 근 력, 기예에 가까운 테크닉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러 사진에 등장하는 배구자의 모 습, 「사(死)의 백조」에 나타나는 관련 동작들은 그녀의 놀라운 유연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술적인 면모는 물론 어린 시절 덴카츠 예술단에서 습득한 것이라 추측된다.
한편, 배구자는 정식으로 발레를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토슈즈에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며, 발끝으로 서는 동작과 같은 본격적인 발레 동작을 수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 라서 「사(死)의 백조」는 동작을 위주로 한 작품이 아니라 정적인 측면이 강하고 극도로 감정의 표현에 치중된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다섯 번째에 제시한 「사(死)의 백조」관련 내용과도 상통하는 측면이다.
내 몸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내 마음과 내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유기적이 고 일체적인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몸으로 역사를 쓰는 새로운 담론은 시작 된다. 가장 직접적이고 원초적으로 몸을 사용하여 표현하는 무용예술은 더욱 몸에 집중해 야 할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역사 역시도 몸에서부터 시작해서 몸으로 쓰여 져야 할 당위성을 지니는 것이다. 본 연구자는 이러한 변화가 한국의 무용사 기술 방법에 있어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바라며 더 다양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바이다. 이에 연구가 향후 관련 연구에 있어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