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1. 연구 목적 및 필요성
본 연구는 수잔 리 포스터(Susan Leigh Foster)의 『역사 안무하기(Choreographing History)』(1995)를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그가 제시하는 몸 개념의 가능성 을 모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 포스터는 새로운 시도와 연구로 무용학 분야의 지평을 넓힌 학자로 평가되며, 드 라 토레 부에노 상(De La Torre Bueno Prize)을 두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1986년의 문제작 『춤 읽기: 현대 미국 무용에서의 몸들과 주체들(Reading Dancing: Bodies and Subjects in Contemporary American Dance)』(1986)는 포스트구조주의적 사 유를 무용학 연구에 적용한 선구적 시도로 알려져 있다. 또한, 20세기 후반부터는 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통해서 무용 안무나 역사 기술과 관련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포스터의 역사연구는 다양한 연구에서 다루어졌으나, 그의 저작이나 연구물 에 대한 정밀한 분석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우선, 그가 사용하는 주된 사상적 방법론인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유의 방대함과 난해함을 이유로 들 수 있을 것 이다. 포스트구조주의를 하나의 일관된 철학 사조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현실에서 관련 계열로 분류되는 사상가들의 저작들은 해독이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기존 체제를 전복하고 해체를 시도하는 이들의 글은 그 형식에 있어서 사유가 담고 있는 전위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고 은유적인 표현이나 중의적인 어휘가 빈번하 게 사용되기 때문에 전문가들조차 번역과 연구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있다.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유에서 접근하는 『역사 안무하기』에도 다양한 형식적 시도, 서사, 문체가 어우러져 나타난다. 물론, 난해하다는 것이 바로 포스트구조주의적 텍스트의 속성 에 충실하다는 의미라 한다면 그 난해함이야말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것이라 할 수도 있 겠다. 요컨대 이러한 불친절하고 은유적이며, 때로는 문학적이고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글 들을 성실하게 해석하는 것이 우선은 까다롭고, 바로 이러한 점은 관련 연구에 대한 접근 자체를 어렵게 한다.
관련해서 포스터의 사유가 담지하고 있는 다양한 철학적 함의 역시도 그에 관한 연구를 용이치 않게 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안무하기』의 경우만 하더라도 현대철 학의 다양한 테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글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에게 서는 텍스트, 글쓰기와 저자에 관한 내용을,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게서는 권력과 지식의 관계, 몸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관념들에 관한 내용을,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나 질 들뢰즈(Gilles Deleuze)에게서는 탈중심적인 담론과 새로운 물질성에 대한 논의를 차용한다. 구조주의와 기호학적 담론들, 포스트구조주의적 내용들, 유물론적 사유 들이 곳곳에 묻어나고 있기에 이러한 배경을 근거로 할 때 비로소 온전한 접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연구나 작업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분명 존재한 다. 포스터의 논의와 연결된 들뢰즈, 푸코, 데리다의 담론들을 위시한 20세기의 포스트구 조주의적 사유는 여전히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들뢰즈를 계승하는 후학들 은 이미 신유물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주제화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이 말하는 신유물론은 생기론을 바탕으로 한 21세기의 새로운 유물론을 표방한다(Dolphijn 2021, 270-279). 신유물론적 사유에서 몸은 하나의 객체이자 물질로서, 외부에 의해 규정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형, 연결, 결합되는 특성을 지닌다. 포스터는 『역사 안무하기』 에서 주체성을 지닌 몸, 전적으로 이끌리지 않는 몸을 말한다. 포스터는 고대로부터 핍박 받아온 몸을 해방하고자 한다. 그의 새로운 몸 개념은 새로운 유물론의 성격을 지니기에 분명 시대적 흐름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으며 연구적 잠재력 또한 지니고 있다.
포스트구조주의가 구조주의의 폐쇄성과 초월성을 극복하고자 하듯이 포스터의 역사 기 술론은 전통적 역사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전통적인 역사관은 특정 계층을 위한 역사이고 다양성과 차이를 무시하는 역사이기에 이데올로기적이고 폐쇄적이다. 그렇기에 몸 개념을 매개로 역사를 안무한다는 그의 역사 기술론은 기존의 지배적 체계에 대한 지성 적 저항으로서의 의미도 지니게 된다.
2. 선행연구 분석
국내 무용학 분야에서 본 연구와 관련이 있는 연구 사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김현정은 “수잔 리 포스터를 중심으로 시작된 일련의 무용 문화연구 경향 연구”에서 20세 기 후반 시작된 무용학 분야의 새로운 연구 경향을 소개하면서 대표적인 학자 중 하나로 포스터를 다루고 있다. 해당 연구에서 그는 포스터의 『춤 읽기: 현대 미국 무용에서의 몸 들과 주체들』을 언급하면서 그의 연구 성격을 포스트구조주의로의 진보로 묘사했으며 그 이론적인 배경인 바르트와 푸코의 역사 인식 및 텍스트 개념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다. 또 한, 포스터가 주장하는 새로운 몸과 안무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이러한 개념들이 갖는 학문적 의미와 가능성에 대해 개괄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이미 문화비평의 관점에서 포스터의 연구를 조망하고 이를 학계에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의미가 있다.
한편, 해당 연구의 초점이 무용학 전반에 걸친 새로운 경향에 대한 것이기에 포스터의 연구에 대한 내용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았고, 그것의 포스트구조주의적 성격에 대한 상세한 분석보다는 문화비평의 관점에서 핵심적 내용에 대한 요약을 통해 해당 연구 의 논지가 전개되었다. 따라서 포스터의 『역사 안무하기』에 잠재하는 다양한 포스트구조 주의적 사유의 틀을 철학적 맥락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본 연구와는 연구의 초점 이나 관련 내용의 심도에 있어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김현정이 2009년 발표한 “한국무용 의 정체성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적 접근”은 무용학 연구 중에서는 흔치 않게 포스트구조 주의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본 연구와 관련을 지닌다고 하겠다. 해당 연구에 서는 포스트구조주의라고 하는 사조와 담론분석에 대해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이를 한국무용과 관련하여 논의했다.
양은정, 정의숙은 “포스트구조주의 논의롤 통해 본 한국 대중춤의 사회문화적 의미”에 서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을 차용하여 한국 대중춤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이때 연구 의 모범적 사례로 포스터의 『역사 안무하기』를 언급하고 있다. 해당 연구는 앞서 언급한 김현정의 관련 연구들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으며, 『역사 안무하기』를 부분적으로 발 췌하여 몸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보여준다.
양영은은 “춤과 ‘움직이는 몸들’을 통해 형성되는 사고, 지식, 그리고 지혜: 자넷 렌즈데 일, 수잔 리 포스터 그리고 Body-Mind Centering 사이를 읽기(Shaping Thought, Knowledge and Wisdom through Dance and Moving Bodies Reading between Janet Lansdale, Susan Leigh Foster and Body-Mind Centering)”에서 문화연구 분야와 관련된 무용학계의 학문적 경향과 몇 가지 담론을 논하면서 포스터의 주체성을 지닌 몸 개념에 대해 논의한다.
이렇듯 몇몇 연구에서 포스터와 관련한 담론을 통해 무용학 분야에서의 학문적 가능성 을 가늠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특히 텍스트로서의 역사나 새로운 몸에 대한 담론들은 대체로 공통으로 언급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포스터에 관한 연구와 그가 토대로 삼고 있는 이론적 배경을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고찰하고 그 개념의 연관성을 다루는 연구는 여전 히 부족하다. 본 연구는 포스터의 『역사 안무하기』가 담지하고 있는 인문학의 역사 속에서 의 개념적 근거들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보다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 포스트구조주의와 역사연구의 다면적인 측면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본 론
1.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유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몇 페이지의 글로 개괄한다면 내용이 지나치게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자칫 오해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본 연구와 관련된 내용과 구조 주의, 텍스트, 유물론과 연관된 몸 개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적 사유가 대체로 인정하는 실체로서의 구조를 부정하 는 경향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분명 구조주의적인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마단 사럽(Madan Sarup)은 그의 저작에서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공통점을 정리하고 있다. 인간 주체 비판, 역사주의 비판, 의미에 대한 비판, 철학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2005, 11-16). 즉, 포스트구조주의는 탈(脫)구조주의적인 동시에 구조주의적인 전제를 함의하고 있다. 구조주의적 성격을 지닌 사상, 담론, 이론 등의 공통분모를 찾는다 면 그들이 대체로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학적 사유를 따른다. 소쉬르적 언어관은 언어를 일정 질서를 갖는 체계, 즉 구조로 바라본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 구조 안에서 언어는 발화된 것(음성 언어)과 그 개념으로 구성된 일종의 요소 항 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쉬르의 언어학은 동시에 기호학으로 볼 수 있는데 기호는 해당 구조 내에서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 항이다. 전체를 하나의 구조로 보게 되면 그 안에 속한 개개의 항은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질서와 관계의 부 산물 내지는 효과에 불과하고, 개별 항 보다는 전체적인 체계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Saussure 2012, 135-160). 이러한 사유 방식은 비단 언어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학문 및 인간 문화 전반의 각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무의식 역시 언어의 지배를 받아 발생한, 어떤 구조적 질서를 지니는 것으로 전제되기에 가능하다.
포스터의 몸 글, 몸적 글쓰기라는 개념을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우선, 글을 쓴다는 것이 전형적인 기호작용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글쓰기를 몸에 대입하여 몸의 글, 몸적 글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몸과 몸의 움직임, 몸의 활동 등 몸이 행하는 모든 것들을 기호작용으로 본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몸의 움직임이 하나의 기호라면 움직임 그 자체는 그것이 속한 사회문화적 구조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역사 안무하기』는 그러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의식이 특정 개념, 즉 기의에 기표를 부여한다는 고전적인 통념은 구조주의적 사유에 의해 전복된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개별 기호현상은 시간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우발성을 지닌다. 반면 기호 체계는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성격을 띤다. 따라서 개별적인 몸짓이나 몸의 현상들은 그 자체로 상응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며, 다른 몸들과의 관계 속에서 차이에 의해 그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한편 기호체계와 구조는 개별 기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잠재적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인식될 수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개별 기호작용들을 통해서만 접근될 수 있다. 이로써 구조주의 사유의 목적을 추론할 수 있는데 구조주의자들은 현실에 서의 개별적 기호작용을 통해서 심층에 있는 구조의 작동 원리를 파악하고자 하며, 이러한 점에서 그 계기에 있어 공통점을 지닌다고 할 수 있지만 일체의 원리나 법칙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담론과는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다.
그런데 구조주의적 사유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면서도 구조라고 하는 또 다른 초월성을 극복하고 내재적인 사유로 진보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 포스트구조주의 사유의 속성이다. 구조주의적 사유와 같이 구조 자체를 실체화할 경우 인간의 삶은 코드화 되고 구조 안에 갇히게 된다. 그 구조는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을 제한하는 구조이며 구조 자체가 초월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는, 즉 전통적인 로고스중심적인 서양철학의 양태를 지니게 된다.
포스터의 『역사 안무하기』에는 텍스트와 관련한 담론이나 저자의 죽음이라는 바르트의 테제는 포스터의 글에서 주요한 이론적 틀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월적 지위의 저 자와 저자에 의한 작품을 텍스트와 그것을 해석하는 독자가 대체한다면 권위로서의 역사 가와 불변의 역사는 역사가의 몸과 그가 만나는 과거의 텍스트를 통해 대체되며 이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적 텍스트가 창조된다.
우선 포스트구조주의적 맥락에서의 텍스트라는 개념은 기표들의 텍스처(texture)이자 전 통적 의미에서의 작품 개념을 대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텍스트는 ‘얽힘과 꼬임’을 의미하는 그 어원에서와 같이 수많은 경우의 수로 연결, 결합되면서 의미를 생성할 수 있 다. 작품이 최종적인 기의로 수렴하는 중심 지향적인 체계인 반면 텍스트는 열린 구조를 지향하는 끝없는 의미의 지연이자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작품이 저자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이 텍스트는 저자 를 배제하고 독자를 탄생시킨다. 이러한 텍스트 담론을 참조하면 『역사 안무하기』에서 나 타나는 과거와 현재의 몸들끼리의 연계는 역사라는 또 다른 텍스트를 구성하기 위한 과거 와 현재의 텍스트들의 연결과 얽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유에서 물질은 독특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상당수의 포스트 구조주의 사상가들을 우리가 유물론자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물질을 바라보는 관 점에 있다. 들뢰즈나 데리다의 사유에서 드러나는 물질성은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죽 은 것으로서의 물질과는 다른 것으로 읽힌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이미 그의 저작에서 포스트구조주의에서의 텍스트 개념이 신유물론자들의 물질 개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데리다를 비롯한 사상가들이 ‘텍스트’라고 말할 때, 신유물론자들은 ‘물질’이라고 말 한다. 그밖에는 큰 차이가 없다”(Eagleton 2018, 24). 물론, 그가 그러한 물질성에 대해 비 판하고 있지만 그 논조를 논외로 하고, 바로 이러한 물질성에 대한 개념은 포스터가 말하 는 몸에 대한 시사점을 던진다. 글쓰는 몸, 주체성을 지니는 몸, 실천적 몸의 개념은 급진 적이며, 신유물론자들이 말하는 생기론적 유물론과 유사한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유물론적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몸에 대한 개념을 통해 포스터는 『역사 안무하기』에서 인간 스스로에 더 높은 존엄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로 운 역사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2. 역사 안무하기(Choreographing History)
역사를 안무한다는 것은 시적이면서 한편 매우 도발적인 표현이다. 통념상 역사는 주어 진 사실인 반면 안무는 창조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포스터는 나 자신이 몸 글, 혹은 몸적 글쓰기라고 말한다. 나아가 역사의 기술은 반드시 몸으로 글을 쓰는 행위여야 한다고 주장 한다(Foster 1995, 9). 몸의 움직임과 글쓰기라는 행위 사이에는 어떤 공통의 것이 잠재하 고 있으며 몸 글, 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역사와 어떤 관계를 지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면 역사를 안무한다는 것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언어적 기호를 통해서 의미를 표현하는 거라면 몸, 그리고 몸의 행위 는 움직임을 통해서 의미를 표현한다. 포스터는 더 나아가 몸이 스스로 의미를 생산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Foster 1995, 9). 글 쓰는 몸은 주체성을 지닌 몸이며 그러한 몸은 의식의 타자인 셈이고 그렇기에 기존의 의식적 관념으로는 알기 어려운 미지의 존재이다.
나는 몸(에 대한) 글쓰기이다. 나는 몸적(몸의) 글쓰기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섭취하는 카페인이 몸이 분비하는 생각의 산으로 변화하고, 그로써 페이지 전체에 걸쳐 생각을 깎아 낸다는 것을 안다(Foster 1995, 9).
기호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과 상반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몸이 하는 모든 행위, 몸짓 등은 일종의 기호적 활동이다. 따라서 몸은 그것이 지시하는 일련의 지시대상을 추적하는 기호작용에 참여한다. 이는 기호들의 집합체인 텍스트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기표의 의미는 몸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속한 사회문화적 체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에 몸적 기표와 의미로서의 기의의 관계는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 고, 임의적이며 늘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다(Saussure 2012, 135-160).
기호는 상징체계이다. 글이 언어적 상징이라면 움직임은 몸적 상징이다. 언어적 상징이 수사적 비유 즉, 은유이듯 몸적 상징 역시 일종의 은유를 통해 실체와 의미에 다가간다. 겉으로 드러나는 몸과 움직임, 몸의 활동은 기호로서의 은유이다. 마찬가지로 변화무쌍한 몸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은유의 방법만이 유일하다. 합리적인 방식의 접근으로는 몸짓과 춤이 지니는 은유적 특성과 주체성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통제하려는 체계는 모든 미묘한 차이를 무시하는 근대적 폭 력성을 지닌다. 이러한 분석과 통제는 기계적 매커니즘으로서의 몸을 대하는 근대적 태도 이다. 그러나 몸은 때때로 그러한 분석과 통제를 벗어나는 돌발적인 양태를 드러냄으로써 통제의 시도를 무력화시킨다. 어떤 경향 가운데 나타나는 우연적 사건들은 들뢰즈의 우발 성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우발성조차도 몸의 글쓰기, 즉 몸적 기호관계를 벗 어나는 것은 아니며, 기호적 의미 작용을 유지하고 있음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포스터가 궁극적으로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몸의 글쓰기, 즉, 몸적 기호작용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몸적 글쓰기의 역사인가. 그가 서두에 밝힌 바와 같 이 인간 자신이 몸적 글쓰기라고 하는 테제를 상기한다면, 몸은 경험의 매개이자 세계를 구성하는 근간이다. 포스터에게 역사란 결국 과거를 살아간 수많은 몸과 몸짓의 역사이다. 또한 몸은 고정된 의미로 포획되지 않는 존재이기에 무수한 몸적 의미를 배제하고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결국 변화 생성하는 역사를 고정불변의 것으로 화석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포스트구조주의적 강령에 충실하게 역사를 텍스트로 인식하고 열린 공간으로서의 역사를 전제할 때 정전적(canonic)이거나 소수를 배제해온 역사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은 특정 계층을 위한 역사, 권력에 종속하던 역사를 새롭게 다시 쓰는 것이기도 하다. 물 론, 그 과정이 용이치 않겠지만 역사가는 그렇게 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포스터는 역사 기술을 위해 우리가 다가가야 하는 과거의 몸에 관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 면 중요한 것은 몸들의 일상적인 활동, 습관, 하찮은 몸짓이며, 그것은 주어진 체계 안에서 학습하고 의미를 만들어 낸다(Foster 1995, 10). 이와 관련해서, 샹탈 자케(Chantal Jaquet) 의 글을 인용하면 자연적으로 보이는 태도나 운동도 실제로는 학습된 것이거나 전승된 것이 며 이러한 몸과 몸짓들이 다시금 사회적 의미를 생산한다(Jaquet 2021, 299-300).
한편, 몸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기호작용은 의미의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 으며, 그것은 각각의 몸짓에 차이를 부여한다. 이와 관련해서 포스터는 기입(inscription)이 라는 어휘를 사용하는데 이는 데리다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기입이란 텍스트는 내부가 아 닌 외부의 개입을 통해 의미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것이 차이를 만들어 내는 형식적 조건이라 밝히면서 전통적인 로고스중심주의를 비판했다. 또한, 디페랑스 (Differance), 즉, 차연(差延) 내지는 차이(差移) 개념을 통해서 말하기를 통해 구분할 수 없는 의미적 차이에 대해 묘사하기도 했다(Derrida 2001, 315). 또한, 몸들이 나타내는 동 일한 몸짓에 대해서도 상황과 맥락에 따른 의미와 해석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컨텍스트, 즉 맥락이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텍스트의 경우처럼 해석이 필요한 기호들의 관 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미하일 바흐틴(Mikhail Bakhtin)의 텍스트론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연구와 성찰의 대상으로서) 텍스트와, 그 텍스트를 틀짓는 것으로 창조되고 그 속에서 학자의 인식적이고 가치평가적인 사고가 실현되는 컨텍스트(질문하고 반박하는 컨텍스트) 간의 복잡한 상호관계. 두 텍스트, 즉 주어져 있는 기성(旣成)의 텍스트와 그것에 대한 반응으 로서 창조되는 텍스트의 만남은 결국 두 주체, 두 작가의 만남이다(Bakhtin 2006, 406).
과거의 몸들이 만들어 내는 움직임의 의미 체계에 다가가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것은 과거의 기록들이다. 몸과 관련한 과거의 사회문화적 체계 안에서 기록된 다양한 형식의 기록들은 그 안에서 살았던 몸들에 관해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한 기록들은 몸들과 사회체 계 간의 관계를 담은 텍스트이다. 그 기록의 더미에는 그러한 몸들의 기호작용에 관한 내 용이 파편적으로 나타나며 역사가는 이러한 흔적들, 혹은 기호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데, 중요한 것은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가 역시도 그 자신의 몸, 몸적 글쓰기이며 역사 기술의 과정에 역사가 자신의 몸이 개입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가의 몸은 과거의 기록들을 취사선택하면서 보다 심층적인 의미를 찾아 침잠해 들 어간다. 여기서도 상징적 질서는 어김없이 작동한다. 역사가의 몸은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구분하고 포함과 배제의 논리에 따라 스스로의 선택의 틀을 구축한다. 과거의 몸들이 지니는 체험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역사가 자신의 몸이며, 이러한 역사가의 몸들 역시도 다양한 조건을 지닌 물리적 실체이기에 이러한 과정은 물리적인 실천이자 육체적 인 노동과 다름없다. 또한, 서로 다른 역사가들의 몸이 이 과정을 수행하는 만큼 각각의 추적 양상은 상이하다. 각 역사가들이 각각의 몸들을 통해서 과거의 기록에 접근하기에 그들이 재현·구성해 내는 역사적인 몸들 역시도 그만큼 다양하다. 그것은 의식적이기 보다 는 무의식적 체계에 따른 결과 내지는 효과에 가깝다. 포스터에게 있어 역사는 고정된 것 이기보다는 서로 다른 접속에 의해 변화되고 생산되는 텍스트인 것이다. 과거의 몸들과 스스로의 몸을 비교하면서 역사가는 오늘날의 문화적 의미와 관련한 해석을 부여하게 된 다. 몸과 움직임에 대한 이러한 문화적 의미는 다중적이다. 하나는 과거의 몸이 살아 있을 때 지녔던 구조적 체계 안의 가치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기록될 때 부여되는 가치와 의미이다.
한편, 역사가들은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들을 학습했고, 그것과 관련하여 훈련되었으며,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역사 기술의 형식적인 규율들을 체화했다. 그러한 태도는 주관적 주체를 배제한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주체로서의 거듭남이다.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임으 로써 역사가는 전지전능하고 침묵하는 보편적인 주체로의 전환을 성취하게 된다. 이렇듯 과거의 몸들이 역사가의 몸적이고 문화적인 내용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면 과거의 몸들은 과거의 역사적 규율로부터 특정 형태를 갖추게 된다.
하지만 과거의 몸은 현재의 몸과 운동감각적(kinesthetic) 공감을 통해 연결되면서 고정 된 역사적 규율로부터 벗어난다. 운동감각은 보고, 듣고, 만지는 등의 외부로부터의 감각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이 차단된 상태에서도 자신의 몸이 어떤 방향이나 자세로 움직이는지 를 감지할 수 있는 내적인 감각이다. 실제로 소매틱스(Somatics)에서는 이러한 감각을 중 시하며 특정한 테크닉과 운동성의 발현을 위한 근대와는 다른 방식의 훈련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감을 바탕으로 과거의 몸들은 현재와 연결되면서 일종의 동요를 일으킨다. 이를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접속이며, 그것의 결과는 영토화일 것이다. 이러한 몸들의 연계는 객관주의적인 무차별적 통일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해석학적 주관성을 전 제하면서도 생동적이고 과거의 몸들에 대한 관심을 포함한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간의 생생한 대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몸들의 연결, 접속에 따른 의미의 발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서 포스터 가 제시하는 몸적 이론(theoric)의 개념이 등장한다. 그에 따르면 몸적 이론은 육체적인 의 미를 구축하는 관계의 골격이다. 그는 그것이 어떤 역사가의 몸도 이미 친숙한 물리적인 실천에 내재해 있으며, 이전의 어느 역사적 순간에도 존재했던 것이라고 말한다(Foster 1995, 14).
다시 말해 의미를 구축하는 이론(theoric)은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내 에 내재적으로 존재한다. 구조나 관계 밖에서 부동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구조에 내재하며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실천적 원리가 몸적 이론인 것이다. 초월적인 원리, 이론을 상정할 경우 인간의 삶과 문화는 주어진 틀에 갇히게 되고 자유와 창조의 가능성은 퇴색한다. 따 라서 그러한 초월성을 극복하는 것은 변화 생성하는 이 세계의 풍요와 다채로움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론들은 역사적 기록들 사이의 비교나 과거와 현재의 비교 행위로 부터 추론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비교에 의해 강화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체계 내의 개별항은 필연성이 전제되지 않기에 의미의 구축은 차 이를 통해서 발생한다. 그러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관계의 골격 역시 구조에 다름 아니다. 들뢰즈에게 있어 차이는 욕망을 원인으로 추동된다. 그에게 세계는 무의식이며, 무의식으 로서의 세계는 스스로 생산하고 분배하며 소비한다. 이렇게 볼 때, 포스터가 의미를 생산 하는 틀로서 제시하는 몸적 이론(theoric)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낸다. 역사가 는 과거의 몸들과의 운동감각적 공감을 하고, 그 과정에서 몸적 이론을 통해 의미를 생산 한다.
몸적 이론(theoric)이란 기표를 기의에 대응시키는 일종의 관계의 틀로 볼 수 있으며, 다시 말해 상징계를 조직하고 구성하는 관계의 구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구조는 고정불변의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몸들의 만남을 통해 생성되고 변 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몸을 통해 전해지는 과거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기술하는 방법은 무 엇인가. 포스터에 의하면 움직여질 수 있는 것과 쓰일 수 있는 것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역사가의 몸적 참여가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언어적 담론이 몸적 담론과의 ‘대화’ 속으 로 들어가야 한다(Foster 1995, 15). 요컨대 육체적인 글쓰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육체적 글쓰기란 움직여진 담론, 즉 몸적 텍스트를 해석하고 다시 써서 쓰인 텍스트로 만 드는 과정이다. 이 둘 간의 필연적 불일치는 실재와 상징의 불일치, 혹은 자아와 무의식간 의 불일치로도 읽힌다.
과거의 몸과 나의 몸이 만나서 서로 춤을 출 때, 특히, 어떤 특정 조건의 춤을 출 때 포스터는 나 자신이 이끌거나 이끌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주체적 의식이 우위에 있 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몸이 스스로를 장악하는 상황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Foster 1995, 16). 이끌거나 이끌리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가 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대상이 외부의 객체로 존재할 때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이다. 과거의 몸과 현재 의 몸이 우열 없이 조화되어 춤을 출 때, 그 춤은 스스로를 안무하는 춤이 된다. 주체가 주도하는 글쓰기가 초월적이라면 몸에 지배되는 것은 단순한 빙의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즉흥을 하듯이 특정 시대의 정전으로 통제되고 구속되는 것으로부터 해방된 역사의 주체 가 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몸적 담론과 언어적 담론간의 간극을 극복하는 구체적 실천 방법으로 포스터가 제안하 는 것은 글쓰기 자체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비유적 표현과 구문 형태, 문장 구성 을 통해 몸적 담론은 언어적 담론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Foster 1995, 15). 포스터 의 제안은 글쓰기의 형식적 측면을 언급하고 있다. 바르트(Brathes)는 글쓰기의 3가지 요 소인 랑그(langue), 스틸(style), 에크리튀르(ecriture)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랑 그(langue)와 스틸(style)은 작가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인데 반해 에크리튀르(ecriture)는 집 단적이며 형식과 관계하는 것으로서 유일하게 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요소이다. 이러한 형식적 시도를 통해서 생생한 존재를 상기시키는 글쓰기가 성취된다.
역사적인 몸들의 글쓰기가 쓰인 글이 되면, 다시 말해 몸의 글쓰기를 텍스트화하게 되면 역사적인 몸들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글을 쓰는 것은 저자, 즉 초월적 주체성이라 여겨왔던 전통적인 관념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저자의 죽음으로 대체된다. 저 자는 텍스트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물론 글에 있어 저자의 상실이 곧 객관성의 확보를 뜻 하는 것은 아니다. 몸으로 글을 쓰는 것은 역사적인 주체를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 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포스터는 이러한 방식의 역사 연구와 역사 기술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안무적 과정 으로 묘사한다. 역사가들이 몸적 이론(theoric)을 바탕으로 과거의 몸들을 이해하고 이야기 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른 형태의 서사이자 역사 기술의 방법론을 보여 준다.
과거와 현재의 몸들은 상호적으로 구성된 기호관계(semiosis)를 통과한다. 그들은 함께, 몸들이 다른 몸들과 함께 표현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코드의 전통과 몸적 기호작 용의 관습을 구성한다. 역사가의 몸뿐 아니라 역사적인 몸, 역사의 몸도 이 안무적 과정에 서 고정되지 않는다. 그들의 경계는 굳어지지 않는다
결국 포스터가 역사 연구를 안무의 과정에 비유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로서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과거의 존재들, 즉 과거의 텍스트이며 더 나아가 그러한 존재들의 구체적 몸, 몸적 현상임을 인지하고 역사가는 자신의 몸을 통해 보다 온전한 텍 스트로서의 역사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역사 기술에 있어 몸적 텍스트를 언어적 텍스트로 이동시키는 기술을 통해 분라쿠 인형극이 구현하는 것처럼 섬세함, 분별, 화려함, 특별한 뉘앙스를 지닌 글쓰기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Ⅲ. 결 론
라캉의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지식은 망상적이다. 이는 우리 모두의 인식 자 체가 망상적이기 때문이다(김석 2010, 124-125).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보편적이고 객 관적인 주체로서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전통적인 입장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다.
본 연구에서 다루었던 포스터의 저서 ‘역사를 안무한다’가 지시하는 것은 역사를 오염될 수 없는 완결된 진리가 아닌, 텍스트, 즉 새로운 관계들과의 접속을 통해 지속적으로 의미 를 생성하고 구축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살아간 몸들의 의미작용과 오늘을 살아가는 역사가의 몸의 의미작용이 만나서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생산해 내는 것 이 역사이며 이러한 역사는, 언젠가 다른 역사가의 몸이 동일한 과거의 몸의 의미작용과 접속했을 때 또 다른 새로운 역사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무한 역동적인 역사 이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텍스트로서의 역사이다.
메타언어로 명확하게 포획되지 않는 텍스트라는 개념은 실상 세계 내 어느 곳에도 적용 가능하다. 단적으로는 우리 자신도 분명 텍스트로서 존재한다. 나의 존재는 생물학적으로 부모 세대, 조부모 세대, 그 이전으로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며, 사회문화적으로도 무한 확 장 연결되고 있다. 이러한 텍스트로서의 내가 과거의 텍스트로서의 몸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 포스터가 역설하는 텍스트로서의 역사라 할 것이다. 문학 이론에서의 저자가 텍스트 를 구성함으로써 조작자 또는 필사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역사 기술에 있어서의 역사가 는 안무가의 역할을 수행한다.
역사를 텍스트로 인식하고 텍스트로서 서술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종류의 독단으로부 터도 보다 자유로워지고 세계를 겸손하게 바라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계를 온전한 것으 로 인식하게 되며, 보다 온전한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인류 역사를 관통해온 공통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와 어떤 종류의 독단과 독선도 극복하고자 하는 평등에 의 의지라 할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방식의 역사 기술은 역사의 진보와도 호응 한다.
『역사 안무하기』에 나타나는 새로운 몸 개념은 무용학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 닌다. 모든 예술을 통틀어 가장 몸과 가까운 장르인 무용을 연구하는 분야라면 거기에는 응당 몸 담론이 수반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몸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는 필연 적으로 무용 혹은 안무 방법론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다. 몸을 죽어있는 것, 종속적인 것, 생명이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무용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한 모순을 내포한다. 그 러한 관점에서의 무용은 몸이 하는 것이기보다는 몸을 초월하는 주체에 의한 물리적 재현 이며, 이때 무용수들은 안무자의 꼭두각시이자 포스터가 인용하고 있는, 바르트의 글에 나 오는 서양 인형극의 인형으로 전락한다(Foster 1995, 17).
생명 현상의 근간으로서 주체성을 지닌 몸을 긍정하고 더 이상 몸을 억압하거나 환원하 지 않을 때 우리의 몸은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보다 창조적이고 풍부한 의 미로서의 무용을 성취할 수 있다. 모든 제약으로부터의 자유가 예술의 기본적 전제라면 자유로운 몸은 무용이 진정한 예술로 탄생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몸의 개념을 통한 역사 기술의 방법론을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 끌어 갈 수 있을 것인가. 포스터가 언급하는 운동감각적 공감(kinesthetic empathy)을 위해 서는 먼저 우리의 몸에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즉, 외부로부터의 자극만을 인식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눈을 감고 명상하면 서, 혹은, 일상의 움직임 안에서나 춤을 출 때 기존의 관성을 버리고 스스로에 집중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이것은 내가 나의 몸이라는 자각이며 나의 몸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것들, 즉, 주체적인 몸, 실천적인 몸의 참모습을 느끼게 되며 역사는 몸이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또한, 역사적인 사건이나 과거의 기록, 혹은 각종 자료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체화한 생각들 이 사실상 대부분 타인의 것이라는 인식이 중요하다. 바르트의 신화론이 지적하듯이 겉으 로 보여지는 것의 이면에 숨겨진 구조적인 틀을 간파하고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전적인 역사 역시도 일종의 신화적인 것이고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인식, 더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개념 자체도 그러하다는 인식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에 다가갈 수 있다. 심지어 일상의 ‘몸 테크닉’조차 본래 주어진 것이 아닌 문화적 산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Jaquet 2021, 299). 철학을 한다는 것, 예술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 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사유하고 개념을 만들어 내고 이를 목소리 내는 것은 많은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하는 걸 눈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철학하는 태도로서 현상을 바라본다면 지금까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역사에 관해 새로운 인 식을 가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용사와 무용가들에 관한 역사 기록을 쓰인 그대로 정확히 이해하려 애쓰 기보다 능동적인 자세로 창조적 읽기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창조는 파괴를 전제로 등장 하고 진보는 기존 질서의 변화를 통해서 성취된다. 투명성이 지배하는 곳, 다시 말해 순응 하고 순종하는 곳에서는 어떤 창조도 일어나기 어렵다. 기존 질서에 대한 창조적 전복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에서 시작한다. 나의 몸을 통해서 기존의 것들을 삐딱하게 보는 가 운데 투명성의 장벽 뒤에 가려진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게 되며 그러한 경험은 특별한 희열 을 선사할 것이다.
통상 역사를 연구하는 주된 목적의 하나는 역사를 통해 진보의 방향을 설정하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다시 말해 미래에 대한 지향을 위해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로 눈 을 돌린다.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창조했을 때 그 역사에 기반하는 미래 역시 새로운 것일 수 있다. 포스터가 제안하는 역사 기술의 패러다임을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개방 적이고 평등한 역사에 다가갈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서 동시대의 가치에 부합하는 미래 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터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유와 새로운 몸 개념을 엮어 자신의 역사 기술 방법론 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포스터의 『역사 안무하기』를 통해 우리는 시대를 관통하는 다양한 담론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역사 기술론 자체도 하나의 훌륭한 텍스트로 읽힌다.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용어들은 몸에 관한 그만의 용어로 대체된다. 구조나 체계와 관련해 서 골격, 복장뼈 등으로, 역사적 텍스트를 생산해 내는 것을 안무로, 상호텍스트적인 내용 은 대화나 만남 등으로 묘사하며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또한, 들뢰즈의 글쓰기 방식 처럼 안무하기, 글쓰기라는 진행형의 어휘를 사용하여 생성, 변화에 관한 뉘앙스를 보여주 기도 한다. 이러한 텍스트와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포스터의 글을 어찌 하나 의 단일한 의미와 해석으로 수렴시킬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포스트구조 주의적 태도와 실천을 호소하는 글에 대한 올바른 태도도 아닐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그 안에 담긴 담론들에 대해서 우리는 나름의 해석을 하게 되며 각자의 의미를 구축할 수도 있다.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영원한 진리란 있을 수 없다. 현재의 진리는 진행일 뿐이고 역설적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파기되어야 할 것들이다. 『역사 안무하기』가 제안하는 역사 기술과 몸 담론 역시도 그러하다. 분명한 것은 포스터가 제시하는 텍스트가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고 문제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를 위한 재료이다. 그 재료를 토대로 스 스로 창조적인 텍스트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의 즐거움’이며 또 다른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