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미학사상은 예술적 경험과 감정, 예술작품의 가치, 아름다움과 형태에 대한 이론, 생활 체험과 예술을 결부한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동시에 예술의 의미와 역할, 예술적 표현과 창작에 대한 문제 등을 다룬다. 조선족무용의 선구자이자 혁명가, 교육가인 조득현(赵得贤, 1913-2002년)1)이 정신적인 미와 육체적인 미를 연결 지은 무용예술에 내재된 표현방법론 을 다루고 그 관점으로부터 무용창작과 표현, 무용교육에 관한 내용을 연구하였다.
현재 중국조선족 무용연구에 관한 연구들은 주로 역사학적인 관점, 작품특성, 교육적 관 점 등 여러 측면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본 연구의 기초적 작업에 필요한 이론 적 토대가 된다. 하지만 조선족무용에 관한 핵심인물의 사상을 다룬 연구는 미흡한 바, 본 연구는 조득현의 무용예술 생애와 그의 연구특점들을 분석하고 그의 미학사상을 도출하는 데서 무용예술의 발전양상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연구의의 가 있다.
조득현의 미학사상은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맥락, 예술가의 사상 등을 둘러싼 복잡한 요인들 속에서 형성되었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와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 속에서 수용과 배척, 융합과 창의를 넘나들면서 신체적, 정신적 자아를 알아가는 과정은 예술인의 생애에 함축된 예술적 철학사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조득현의 표현방법론, 무용창작, 무용교육 세 가지 측면에서 내용을 분석하고 그의 미학사상을 해석하려 한다. 조득현의 미학사상 연구는 조선족무용 사상철학의 깊은 의미와 인간의 삶을 다룬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 과 이해를 돕고 그의 예술인생에 내재 된 미학사상을 고찰하여 그의 가치를 재조명하는데 목적을 둔다.
본 연구는 조득현의 예술생애와 그의 표현방법론을 통해 조득현의 미학사상을 탐구한 다. 조득현은 생리학 및 심리학을 기반으로 무용수의 무대표현법을 연구함으로써 이론과 실천을 병행하여 교육방법을 개발하였으며 이는 조선족무용의 무대표현뿐만 아니라 교육 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예술생애와 방법론을 결부하여 살펴본 조득현 의 미학사상에 관한 연구는 향후 조선족무용의 연구에 다양한 연구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무용교육 및 조선족무용표현의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조득현의 저서, 논문 자료수집, 문헌연구 진행을 통해 조득현의 표현방법 론과 신체적과 정신적 측면의 미학사상을 도출하였다. 문헌자료뿐만 아니라 조득현의 미 학사상을 도출하기 위하여 조득현의 평소 측근과 연구자들에 대하여 심층 면담을 진행하 였다. 면담대상은 4명이며 조득현의 제자 혹은 예술적 영향을 받은 가족구성원이다. 첫 번 째 면담자는 조득현의 장녀이자 제자인 조인혜(赵仁惠)를 2022년 3월 5일, 2022년 5월 15일 두 번 직접 방문 면담하고 매번 두 시간 정도 면담하였다. 두 번째 면담자는 조득현 의 맏사위이자 제자인 한세호(韩世浩, 1939-2023)를 2022년 5월 20일에 면담하였고, 세 번째 면담자는 조득현의 셋째 사위이며 연변대학교 교수 및 출판사 작가인 채영춘(蔡永春) 을 2023년 3월 20일, 한 시간 반 정도 면담하였다. 마지막으로 연변대학교 예술학원 교수 한룡길(韩龙吉)을 2023년 3월 26일 한 시간의 면담을 통하여 조득현의 미학사상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고 분석하였다.
Ⅱ. 조득현의 성장배경 및 예술 활동
1. 조득현의 성장배경
조득현은 1913년 9월 29일 조선 평양 신양리의 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평양에 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조인혜, 개인 면담, 2023년 3월 5일). 부친은 미국 선교사와 함께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세우신 아주 엄격한 분이었다. 그 시절 숭실전문학교에는 동관 악대 의 연주가 자주 있었는데 조득현은 창문턱에 웅크리고 앉아 감상하면서 부모님의 뜻과는 다른 예술가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나이 다섯 살에 벌써 성경을 외우고 찬송가를 곧잘 불러 교회에서 상을 탄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유난히 과외활동 시간과 음악 시 간을 좋아했고 타고난 기억력과 예민한 감정선은 조득현의 예술적 재능이 유년 시절에 이 미 싹트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는 14살 때 처음으로 무성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그 감정을 즉흥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 뒤로 기회만 되면 영화감상을 하고 그 감정을 즉흥 표현하는 놀이에 빠졌다. 아마 그때부터 조득현은 배역의 감정을 몸소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그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탐색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제강점기 조선 예술가들의 사회적 위치는 매우 낮았다. 예술은 기생집의 오락에 지나지 않았고 교육가이 신 조득현의 부모님은 예술가의 꿈에 대한 지지는커녕 아예 접하게도 못하게 하였다. 조득 현의 부모님은 일체 예술서적을 보지 못하게 하고 더 이상은 영화관에도 가지 못하게 헛간 에 가둬두기도 하였지만 그는 예술에 대한 갈망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1930년 8월에 숭인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성인이 된 조득현은 본격적으로 예술인의 길로 발전하려고 결심했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 온 이시이바꾸 무용단의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공연을 보면서 조득현은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시바꾸가 양복을 입고 서양인 역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 전혀 무용수의 역할에 몰입하지 못하고 흉내만 내는 기분이 들어 서 공연에 만족을 못 하였다. 하지만 그 공연은 조득현이 무용에 발을 내디딘 중요한 계기 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공연을 보면서 조득현은 “민족은 자기만의 무용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족의 무용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생각과 의문을 가졌다. 이 런 생각이 싹을 틔워 그는 무용에 관심을 갖고 무용을 배우고자 하였고 모든 무용에는 기 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무용이라 일컫는 발레를 배워야겠다 고 결심한다(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외 2013, 340-344). 발레의 접촉이 어려운 시기라 어 디서 어떻게 배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을 때 마침 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중국 하얼빈(哈 尔滨)에 러시아예술인들이 운영하는 전문 발레무용학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 게 조득현은 무작정 배움의 길을 택하였다.
1937년 조득현은 모친의 지지 하에 홀로 기차를 타고 중국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그의 생활은 너무 빈곤하였지만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이겨내고 버텨야만 하였다. 낯선 곳에서 능숙한 일어로 발레학교 상황을 파악하고 구야트고우쓰까야 발레무용연구소 (古娅道斯嘎亚 芭蕾研究所)2)에 입학하였다. 그는 바가노바 발레 체계에 따른 발레 기본을 충실하게 배웠다.
1942년에 조득현은 리미건(李美健, 1922-2014) 여사와 가정을 이루고 하얼빈에서 신혼 살림을 차리고 첫 딸을 보게 된다. 자녀의 면담에 의하면 그 시절 예술인의 넉넉지 못한 삶에 아기가 태어난 뒤 가정의 모든 무거운 짐은 리미건 여사의 가녀린 어깨에 지워졌고 아버지는 이렇게 생활난으로 허덕이면서도 무용에 대한 배움을 꾸준히 탐구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믿음과 지지가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조인혜, 개인 면담, 2022년 3월 5일).
1947년 조득현은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 주장인 주덕해(朱德海)의 부름으로 중 국인민해방군 하얼빈 위수구사령부 제3지대 선전대에서 활동하면서 하얼빈의 종합적인 예 술단체인 민족사무처문공단 무용교원 겸 안무가로 활동하게 되고 1948년에 연변문공단 부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연변문공단은 추후 연변가무단으로 변경되었다.
2. 조득현의 예술 활동
조득현은 조선족무용의 선구자이자 혁명가로 불린다. 그는 하얼빈의 구야트고우쓰까야 발레무용연구소를 졸업한 뒤 하얼빈에서 이름 있는 하얼빈교향악단 발레단에 시험을 보고 입단하면서부터 그의 예술생애는 시작된다(조인혜, 개인 면담, 2023년 3월 5일). 『조득현 표현방법론』(2003)에 의하면 그 시절 하얼빈교향악단 발레단 단원들은 전부 러시아 사람 들이었으며 조득현 혼자 외국인이었다. 그는 발레단에서 각종 무대공연을 하면서 풍부한 무대 경험을 쌓고 1945년 8.153) 해방을 맞아 하얼빈의 교향악단과 발레단들이 해체되면 서 조득현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 주장인 주덕해의 부름으로 중국 연변에 오게 되면서 또 다른 새로운 예술생애를 맞이하게 된다.
1939년 하얼빈교향악단에서 발레의 기본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고 대형발레무 극에서 역할을 맡아 공연에 참여하였고 많은 관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조득현은 그 외 러 시아 무용조곡, 우크라이나 무곡, 뽈스까시리즈무용, 찰다스집시무용, 해군무용, 중국 소수 민족무용 등 수많은 공연을 하면서 무대 표현기법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게 되었다. 조득현은 그는 무대공연과 학습에서 매 종목의 성격, 창작, 율동의 관계, 표현법 등을 연구 하기 위하여 여러 발레 연구소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교수방법, 표현 등을 배웠고 무용에 대한 깊은 탐구를 진행하였다. 조득현의 탄탄한 발레기초와 풍부한 경험은 그의 무용가 예술인생에서 무용연구의 실천과 이론의 연구 기반이 되어주었다.
1947년, 조득현은 중국해방군 혁명문예전사로 임명되었을 때 어린 군인들을 선발하여 무용단을 조직하여 발레기본을 배워주면서 작품창작을 하였다. 조선족군인들이 감정에 심취 되어서 추는 풍부하고 열정적이면서 소박한 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춤에 대한 기본이나 지식이 전혀 없이 놀이에 그치는 춤가락에 아쉬움이 많았고 이는 전에 배웠던 발레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꼈다. 발레작품에 관하여 러시아무용, 우크라이나 무용 등 서방민간무용들을 많이 배웠지만 조선족무용의 계승과 창작을 중심으로 시대적 정신을 부여한 작품이야말로 광범한 전사들의 환호와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조선족무용의 중요성을 재검토하였다(허휘훈 2021, 163). 오랜 기간 일제의 식민지통 치하에 살아오면서 간도에 이주해온 중국의 조선족은 자신의 무용을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조선족무용의 명맥을 이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조득현은 지금까지 배웠던 지식에 대하여 체계적인 사고를 진행해야 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조득현은 그때부터 무용예 술은 대중을 위해 창작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여 발레로 무용 예술인생을 시작하였지 만 조선족무용 예술발전을 위하여 발레에만 국한하지 않고 하태일을 비롯한 민간(民间)예인 들을 찾아다니면서 민간장단과 민속무용을 익혔다. 하태일(河兌镒, 1906-1975)4)은 조득현 과 함께 「농악무」(1951)를 창작한 최초 민간예인이다. 조득현은 민간예인들과 함께 배우는 과정에서 조선족무용에 크나큰 흥취를 가지게 되었고 피나는 노력과 연구 끝에 발레를 기초 로 하는 조선족무용 작품을 창작하는 데 성공하였다.
예술의 창작아이디어를 현실 생활 속에 반영하고 그 속에서 소재를 얻어 대중들이 추구 하는 작품들을 창작하는 이념을 안고 조득현은 조선족무용을 비약적으로 한 단계 승화시 킬 아이디어를 구상할 수 있었다(한룡길, 개인 면담, 2023년 3월 26일). 그는 민간생활을 소재로 「참군」(1948), 「노동자의 승리」(1947), 「홍기하강반에 붉은기 날린다」(1962), 「옥 중전가」(1963), 「선종과 추수」(1963), 「풍수무」(1963)등 현실 내용을 담은 민족무용을 창 작하여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과 인정을 받았다. 1948년 공연된 소형무용극 「참군」(1948) 은 건국 전 중국의 첫 번째 무용극으로서 조선족무용극 발전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남겼 고 또 1951년에는 「농악무」(1951), 「분노의 화살」(1951)등을 창작하였다.
이어서 1952년 중국이 해방한 후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공식화되면서 연변조 선족자치주를 설립하고 조선족의 문화를 전파 양성해갔다. 1953년 7월에 연변문학예술계 련합회가 성립되면서 조득현은 부주석으로 당선되고 9월에 중국문학예술연합회 전국위원 으로 당선되었다. 1954년에 북경무용학교 교육 훈련 반에서 발레를 가르치고 10월에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2기 전국위원으로 당선되었다. 이어서 1955년에는 중국 무용가협회 연변분회 주석으로 당선되었으며 1956년에 연변가무단 부단장으로 당선되었다. 그해 여름 조득현은 중국무용가협회 러시아무용 고찰단(考察团) 성원으로 모스크바(Moscow), 레닌 그라드(Leningrad), 끼예브(Kiev), 트빌니스(Tbilisi) 등 지역에 가서 창작경험, 민간무용 발 굴 현황, 무용학교의 인재양성 방안 등을 고찰하였다. 조득현은 조선족예술의 장기적인 발 전을 위하여 정규화된 무용예술학교가 있어야 된다는 뜻을 연변자치주 주장인 주덕해와 상의하고 중국정치협상회의에서 제기하여 수많은 노력 끝에 연변예술학교를 설립하였고 부교장으로 부임되었다(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외 2013, 420). 연변예술학교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건립된 조선족전문예술학교이다. 조득현은 학교에서 재직하면서 조선족무용을 위해 노력하고 국제 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였다. 그는 조선족 예술인재를 양성 할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최승희 문하에 있었던 박용원(朴容媛, 1930-1992)을 무용 학과장으로 임 명하였다. 박용원은 조득현과 함께 교수진에 합류하고 조선족무용예술 발전과 교육에 기 반이 되어 주었다. 조득현은 발레 교수법을 체계적으로 학습하였고 중국에서 유일하게 발 레와 조선족무용을 동시에 전수 할 수 있는 교원이었기에 이론과 창작, 교육에 몰두하여 연변조선족의 발레 기초는 중국에서 전국적으로 앞서게 되었고 수많은 재능 있는 무용교 원과 무용수들을 양성해냈다.
조득현은 중국무용가협회 상무이사, 중국무용가협회 연변분회 주석, 중국무용가협회 길 림분회 주석이자 고문, 중국무용이론연구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수차례 전국정치협 상위원회의 상무위원과 제7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83년까지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에서 무용이론과 실천을 가르쳤다. 사회적 배경의 영향 을 받아 학습과 실천 속에서 무용기본을 연구하였고 무용이론 연구방법을 찾고자 노력하 였다. 또한 무용 표현에서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과 이론을 결합하여 체계화하고 무대화하 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득현은 조선족무용 이론적체계의 발굴과 수집, 정리를 아주 중요시하였다. 1956년 6월 에 부단장직을 맡고 있을 때 그는 민간민속무용을 발굴, 정리할 것을 적극 주장하고 민간예인 들을 초청하여 민속무용을 전수받으면서 무용수들과 민간예인들에게 아주 보귀한 무용소재 를 얻었다. 그 소재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농악무」(1951) 무용작품을 여러 차례 재창작하 였고 1981년 『농악무』 책도 출판하였다. 1984년에 무용편집위원회 위원으로 초빙되어 『중국 예술가사전(中国艺术家辞典』(1981), 『중국대백과전서中国大百科全书』(1995)의 조선족무 용부분을 집필하였다. 1983년에 무용작품들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기록한 『무용론총(舞蹈论丛』(1983)에 “조선민족무용특점에 대한 초보적인 탐색” 이라는 논 문도 발표하였으며 또 『무용기정(舞蹈记程』(1985)에 한편의 무용창작기화형식탐구에 관한 논문 “공간, 시간, 주제 동작”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수많은 논문과 평론들을 발표하면서 그해 조득현은 정년퇴직을 하였고 그 후에도 평생 분투해 온 남다른 애착과 극성 그리고 한 예술가의 숭고한 품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후, 1991년 일본 도쿄 인지학회 요청으로 세미나에 참석하여 “생리학을 기초로 한 무용배우의 표현법”을 발표하고 중앙대학교 학술세 미나에서 “배우의 표현법”을 발표하였으며 1992년에는 한국미래춤학회 국제심포지엄에서 “생리학에서 본 배우의 표현법”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미국, 일본, 한국, 북한 등 나라들을 방문하면서 국제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였고 조선족무용예술 발전에 평생을 이바지하였다(채 영춘, 개인 면담, 2023년 3월 20일).
Ⅲ. 조득현의 무용예술에 내재된 미학사상 고찰
조득현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조득현과 그의 무용예술-조득현선생 탄신 100돐을 기념하여」저서에서 조득현은 “무용은 인간을 탐구하 는 예술로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연변문학예술련합회 외 2013, 389). 그는 인간을 연구 하는 것은 새롭고 참된 인간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것으로 예술은 지구상에서 인간이 발전 을 가져온 전반 역사적 행적에 따라 시대발전과 함께 새로운 인간을 부각, 창조할 수 있다 고 제시하였다. 그는 무용의 진수는 예술성과 정신력에 있다고 정의하고 무용의 예술적 가치는 예술적 감각과 정신적 집중력, 그리고 신체조절 능력이 필수이기에 육체와 정신을 통일체하고 이어주는 방법론에 대해 깊게 연구하였다.
1. 생리학을 기초로 한 무용수의 표현법
조득현은 인체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흐름을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하고 이러한 에너지 의 흐름이 정서와 감성을 표현하는 예술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육체와 정신을 통일시키는 무용표현방법론을 제시하고 이를 '흐름(流)'이라고 하였다(조득현 2003, 13). 조득현은 무용의 동작과 운동에 있어서 에너지의 흐름을 중요시하는 동시에 육체와 정신 이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시도하였다. 그는 이러한 생리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무용의 동작을 개발하고 무용훈련방법에 대하여 생리학적인 측면을 고려하였다. 난이도가 높은 무용동작을 통해 육체의 기능을 개선하고 에너지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근육운동과 호 흡조절을 중요시하였다. 이를 기초로 육체와 정신을 통일시킬 수 있다는 생각과 경험으로 학술적인 탐구 끝에 그의 가장 대표적인 무용이론 『조득현 표현방법론』(2003)저서가 세상 에 나오게 되었고 수많은 연구 이론에서 제일 대표적인 논저라고 볼 수 있다. 조득현은 생리학을 기초로 한 표현방법연구를 위해 의학적 시각에서 인체의 생리적인 기능과 예술 을 융합시켰다. 그는 오전에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병원에 방문하여 직접 의료진과 환자 들을 조사 면담하고 1차 자료를 수집해 의학과 예술을 접목시킨 융합 연구를 진행하였다 (조인혜, 개인 면담, 2023년 3월 5일). 그는 생리적 조건과 표현법, 심리적 측면과 표현법, 기본동작과 실기를 논했다. 『조득현 표현방법론』(2003)책이 출판되기 전까지는 무용표현 에 신체를 의식하여 표현한다는 논증은 없었다. 이 책이 출판되면서 무용수의 무대표현 연구방법과 연구체계가 구축되었고 조선족무용이 무대화되고 예술로 되는 전환점이 되었 으며 또한 오늘날 교육에 기초적인 지식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임범송 1991, 168-169). 『조득현 표현방법론』(2003)은 주로 생리적인 조건과 심리적인 측면으로 분석하고 이를 통 일하여 표현하는 방법을 다루었으며 그 표현의 기본적인 기능훈련에 관하여 제시하였다. 본 장에서는 주로 조득현의 연구한 표현방법론의 생리학 및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무대표 현법을 분석하고 표현의 실기적인 기능훈련에 대하여 제시하고 또한 조득현의 작품창작과 이론과 실기를 병행하는 교육방법 개발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미학사상에 관하여 고찰한다. 아래 표현방법론의 생리학과 심리학 그리고 기본동작과 실기에 관하여 제시한다.
1) 생리적 조건과 표현법
조득현은 “무용수의 무대표현은 조건반사로 되는 행동과 표현인데 이것은 인체의 생리 적 조건에서 반사되는 자연적 현상이다”(조득현 2003, 20)라고 제시하였다. 이 자연현상에 관하여 인위적으로 그 기능을 파악하게 되면 무대표현을 자연스러운 인간의 표현으로 되 게 할 수 있고 이로써 무용수가 보다 더 창조적 표현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무대에서 구사되는 사건들은 허구이기 때문에 이 허구를 생리적 현상에서 육체적 현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만 살아있는 인간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무대 위에서 무용수는 생리적 인 접근으로부터 출발하였을 때 성격을 육체적으로 형성시키며 사고(思考)와 행동을 심리 학과 결부시켜야만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으며 또한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할 수 있으며 표현으로서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무용수는 다양한 성격과 형상을 인체의 생리적 조건하에 체험할 줄 알아야 능숙한 기능자가 되기에 이들은 반드시 무대에서 진실감 넘치는 인간으로 표현되어야만 객관사물의 움직임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한룡길 개인 면담, 2023년 3월 26일). 때문에 생리적인 표현에서 가장 핵심은 대뇌피질의 중추신경의 그 작용이라 할 수 있는데, 생리적으로 육체가 재조직되어 감각을 느끼며 움직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무용수가 성격을 창조함에 있어서 심 리적으로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면 실제로는 극중 인물을 신체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이론 적으로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면 기계적인 표현으로 보일 것이다. 내면과 표현의 통일 이라는 견해는 많은 주장이 있었지만 신체생리변화로써 성격을 창조한다는 주장은 없었으 며 무대에서 배우가 극중 인물을 기능적으로 즉 생리적으로 변화시키고 성격화하고 상상 력을 발동한다면 그 형상화하려는 인물에 접근할 수 있고 그 표현이 몰입된 표현으로서 관중들에게 전달이 된다고 제시하였다.
조득현은 생리적 요소와 표현법은 무용수가 맡은 역할을 이해하고 습득하고 표현하는 과정에 일어난 생리적인 반응과 그 경로를 분석했다. 우선, 맡은 역할을 이해하는 과정은 대뇌피질에서 주는 배역에 관한 메시지를 중추신경에 보내고 중추신경에 전달되는 흥분은 조건반사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배우는 무대 위에서 맡은 역할에 대하여 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역할의 이해로부터 표현까지 체계적인 단계를 생리적으로 일어나는 양상에 대해 알고 의식적으로 체험해야 만이 상상으로 이어지는 역할에 대해서도 그 표현이 더 진실되 게 관중들에게 전달될 뿐만 아니라 배우도 창의적인 표현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예 술 분야를 뛰어넘어 생리적으로 접근하여 무용수의 표현을 분석한데 있다.
2) 심리적 측면과 표현법
조득현은 무용수의 무대표현에 있어서 감정을 표현할 때 생리적으로 전달되는 감정의 경로를 파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감정이 생겨나는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형성과정도 파악 해야 한다고 밝혔다. 무대에서 무용수의 표현문제는 성격창조에서 체현되는데 표현의 진 실성과 인물창조 문제는 생리학적으로 탐구된 대뇌피질과 중추신경의 역할 가운데서 반사 되는 표현의 기본적 문제, 그리고 생리적 조건에서 성격문제와 표현문제를 어떻게 구체화 할 것인가는 문제가 있다고 하였으며 이는 우선 생리학과 심리학의 형성이 표현과 어떤 관계와 영향이 있는지부터 짚어보아야 한다고 제시하고 설명하였다. 심리학은 경험주의적 인 기술로서 생긴 몇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제반 사실에 대한 관찰에 의해 쌓아진 경험 으로 미루어 판단해 낸 다수의 경우로 일어난 하나의 사실이며 단순한 우연성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형상에 대한 학설이다(조득현 2003, 22). 인간은 세포의 생성과 진화로 한 사람 의 생명과 개성, 성격이 형성됨과 동시에 심리상태를 기반으로 하여 움직임이 있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사람의 성격을 몇 개의 예를 통해 생리학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하였 다. 또한 성격과 행동이 있게 되는 자연법칙을 응용하여 성격을 창조할 수 있는 기능을 소유해야 한다는 문제를 고안하고 표현과 생리학, 심리학 그리고 표현의 관계를 입증할 수 있다. 우선 생물학적 특성에서 인간의 몸을 분석하다보면 네 개의 인체기관 중 신경, 근육 기관은 운동에 관여되고 복부기관은 영향에 관여되며 흉부기관은 활력에 관여할 수 있으며 뇌, 척수기관은 흥분에 관여되는 것으로 분류된다(조득현 2003, 18). 이 체계적인 조직의 구조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표현형태의 양상이 달라지는데 흥분성, 활력성의 협동 작용과 그것의 자극량 및 정도의 상호관계 세포의 변화는 그 생물체의 세포가 구성된 내장 기관 또는 기관에 영향을 준다고 하였다.
『조득현 표현방법론』(2003)에서 무용수는 극 중 배역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 성격을 내 면화하고 동태적인 안무에서 곡선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데, 심리적으로 극 중 역 할과 정형에 빠져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심리적으로 내면화해야 하는 포인트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기에는 극 중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내면화하여야 하는 것에 특히 강조하였다(한세호, 개인 면담, 2023년 5월 20일). 극 중 역할의 인물 해독에는 인물 자체 성격뿐만 아니라 그 정형에서 아울러 표현해야 하는 부분이 있으며 표현 자체는 상대방한 테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겉으로 전달하는 방식이 있고 감정 전달에는 인지하고 있는 감정을 내면화하여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전달하는 것과 표면적으로 의식화하여 전달하는 방식이 있다고 하였다. 내면화하여 전달되는 감정은 깊은 감정 전달로서 무의식과 의식이 따르는데 이런 감정표현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감정을 그대로 전달받아 감동하게 한다. 표 면적 감정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감정을 전달받되 감동하기까지 한끝의 차이를 받게 된다 (조득현 2003, 25). 그는 무대에서 표현된 숙련함을 기능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아 표현뿐만 아니라 추상화된 인물 성격에 대한 표현도 구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무대에서의 숙련된 기능이란 내적으로 느끼는 것과 외부적으로 표현되는 것의 통 일문제인데 이는 또 기술로서의 방법론으로 제기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해부학적으로) 성격을 창조해야만 진실하고 완전한 성격 창조가 이루어지며 이로써 건강하고 완벽한 동 작이 있게 되는 것이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완벽한 통일을 이루어야만 생동감 있는 무용수표현이 가능하게 된다고 강조하였다(조득현 2003, 18).
특히 생리적, 심리적 측면이 표현과의 관계로부터 출발해보면 세포의 변화는 세포로 구 성된 내장, 기관에 영향을 주어 성격과 개성을 형성하는 동시에 행동을 부여하게 되며 이 법칙에 근거하여야만 무대 위 무용수는 육체적인 성격 창조를 통해 생동감 있는 인간의 행동이 있게 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무대에서의 성격 창조 문제는 개념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기에 반드시 과학적인 생리 조건으로부터 연구되어야 하고 구체적인 문제해결을 시 도해야 한다. 사람의 형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어떤 개성적 특징에서 참답고 진실된 표 현이 있게 되는지, 그 자연법칙은 어떠한지를 알아내야 하며 이를 통해 이 법칙을 활용할 수 있는 기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런 생리적 관계로부터 성격 창조 과제 가 새롭게 제기되기에는 무대예술을 새 단계로 발전시킬 전환점이 필요하며 생리적으로 분류되는 기타 성격의 생리적 조건은 어떻게 형성되는지와 어떤 자연적인 행동이 표현되 는지, 정신적 육체적 관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는지와 표현을 통한 진실성 문제를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해 탐구하여야 한다고 조득현은 강조하였다(조득현 2003, 45). 무용수는 자 기가 맡은 배역을 기능적, 육체적으로 창조해내고 그 인물을 형상화해낸다면 그들을 형상 화한 인물의 감정과 감각은 무용수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똑같이 되어 느껴질 것이며 나아 가 자신이 맡은 인물 성격에 한층 더 가까이 접근되게 할 것이며 성격 창조 중 내적인 것과의 유기적 통일체로써 표현될 것이며 조득현은 심리적인 측면에 주는 무용수의 표현 법에 관한 영향이 크다고 밝혔으며 이를 의식화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조득현 2003, 152).
3) 기본동작과 실기
조득현은 무용수의 표현 방법에 대하여 생리학과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였지만 궁극적으 로 무용수는 무대 위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본적인 문제와 실제적으로 기능을 장악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기에 마지막으로 무용수의 표현하는 실기방법에 대해 제시하 였다. 실기에 앞서 무용표현의 주체인 무용수를 알아가려 인간을 탐구한 생리학적인 표현 법과 심리학적인 표현법에 관하여 소개하였는데 결국 인간의 성격을 파악하고 분석하여 자신과의 성격과 동일체를 이루도록 역할을 표현하려 하는 데 있다. 조선의 의학자 이제마 (李济马, 1837-1900)는 『동의수세보원(东医寿世保元)』에서 사람의 성격을 연구함에 있어 서 사람은 사상방(四相方)체질로 분류하고 태양인(太阳人), 소양인(小阳人), 태응인(太阴 人), 소음인(小阴人) 네 가지 체질로 나누어 그 체질에 따라 성격 창조에 유리한 조건을 분석하고 내외적으로 통일된 자신만의 방법을 알아간다고 제시하였다. 사상방의 가장 큰 특징은 심신(心身)을 일체로 보는 심신의학(心身医学)이라는 점이다. 마음 따로, 몸 따로가 아니라 마음은 신체적 특징에 관련이 깊다고 한다(조득현 2003, 52-56). 체질에 따라 체형 이 달라지는 것만큼 심신도 차이가 나며 이 차이는 여러 측면에서 나타나는데 성질재능(性 质才干: 재능, 소질, 장점), 항심(恒心: 항상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 심욕(心欲: 심성 을 다스리지 못해 너무 과분할 때 드러나는 욕심) 등에서 차이가 난다. 조득현은 실기훈련 에 앞서 인간을 사상방으로 나뉘어 체질적인 특성을 분석하여 훈련을 진행하여야 한다고 제시하였다(조득현 2003, 53).
조득현의 연구에 의하면 태양인은 체격에서 가슴 윗부분이 발달 된 체형이고 목덜미가 굵고 실하며 머리가 크고 허리통이 가늘며 허리의 아랫부분이 약한 편이고 엉덩이가 작고 다리가 위축되어서 있는 자세가 안정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체가 약한 편으로서 주로 오래 걷거나 서 있기에 힘이 들며 용모가 뚜렷하고 살찌지 않는 체질이며 폐가 크고 간이 작고 다른 사람과 사교하는데 막힘이 없이 잘 통하는 등 장점이 있고 결단성이 있다 고 하였다. 성격 특징은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고 물러서려 하지 않고 결단성이 강하고 마음먹은 일을 굽히지 못하기에 이와 같이 태양인은 과단성이 있는 지도자형이고 남성적 인 성격으로서 적극성, 진취성, 결단성이 있으며 계획성이 적고 치밀하지 못한 약점이 있 다고 한다(조득현 2003, 56-65). 소양인은 굳세고 날랜 장점이 있으며 일을 꾸미고 추진하 는 재간이 있다. 강인하고 적극성도 있어서 어떤 일에 착수하든지 어려워하지 않고 쉽게 일을 꾸미는 반면 두려워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으며 항상 일을 만들고 뒤처리에는 깔끔하지 못한 편으로 밖에 나다니기를 좋아하고 사사로운 정에 치우치는 마음이 크다. 소양인은 적극성과 민첩함을 함께 가지고 있으므로 사무에 능하며 솔직하고 담백한 성격 으로 봉사 정신이 강하지만 외부의 일에 분주하여 자신이나 가정에 소홀하고 매사에 시작 은 잘하나 마무리가 부족하고 싫증을 잘 느끼고 단념하는 등 성격 특징이 있다고 한다.
태음인은 허리부위의 형세가 성장하여 서 있는 자세가 곧다. 성격 특징은 무슨 일이든 맡은 일은 이루어 성취하는 장점이 있으며 어느 곳에나 뿌리를 잘 내리고 쉽게 적응하고 능란하다. 지구력이 있어서 다소의 어려움이 있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조심성이 많고 얼굴 모양, 말솜씨, 몸가짐이 위풍이 있고 무슨 일에도 잘 가다듬으며 공명정대하게 보인 다. 하지만 겁심이 많고 둔하고 게으른 단점이 있기에 예로부터 영웅과 열사가 태음인이 많으나 반대로 마음과 뜻이 약하고 식견이 좁은 데다가 태만하고 우둔하여 말할 가치조차 없는 자도 역시 태음이 많다고 한다(조득현 2003, 67).
소음인은 엉덩이가 크고 앉은 자세가 온건하고 가슴둘레를 싸고 있는 자세가 외롭게 보 이고 약하다. 보통 키가 작고 상체보다 하체가 균형 있게 발달 되고 상체에 비해 하체가 건실하나 전체적으로 체격이 작고 마르고 약한 체형이다. 이런 소음인은 내성적이고 소극 적인 성격이 지나치게 되면 안일에 빠져버리기 쉽고 밀고 나가면 크게 성취할 수 있는 경 우도 있으며 성격이 유순하고 침착하며 사교적이고 판단이 바르고 생각이 치밀하며 조직 적이고 질투심이나 시기심이 많아 한번 감정이 상하면 오래도록 두고 있는 편향이 있다고 한다(조득현 2003, 65).
이렇듯 사상방으로 사람의 체질과 성격을 분석한데 의하면 평소 쉽게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은 체질을 판단하기 어렵지만 반대로 후천적인 교육이나 생활환경 등에 따라 어떤 성격은 변화 발전하여 판단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조득현은 사상방으로 인물의 본능적인 성격 특징을 파악하고 그 특징을 이용하여 무용 수의 감정표현 훈련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용수는 인간의 생리 조건을 알고 생체 각 기관의 작용을 통해 집중적으로 여러 감각을 느끼는 동시에 행동표현에서 기능을 능숙 하게 파악하고 보다 진실성 있게 수단을 활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방법론의 필요도 동시 에 제기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무용수는 성격을 창조하여 표현한다. 무용수 감정을 소화하고 느끼면서 표현하는지 아니면 느끼지 못하고 표현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성격 창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용수의 표현에 있어서 내면화된 무대 배역의 감정은 신체를 의식하는 데로부터 작용한다. 감정을 몸으로 잘 표현하기 위하여 내면화된 감정은 신체적 의식이 필요하다. 신체를 의식하는 방법인 손과 팔다리 운동이 있으며 그 외 신체 의식과 감각을 느끼는 단계, 의지력 훈련 등 율동적인 훈련 방법이 있으 며 이런 훈련 방법의 근본은 신체의 메커니즘 활동이 우선이고 다음으로 대뇌의 자극을 통한 대뇌 피질로 신체를 통제하고 이는 신체의 각 부위, 안면 근육 등에 대한 조직과 훈련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면 무용수훈련에 있어서 오감의 감각이 중요한데 그 훈련 방법은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에 대한 감각 훈련으로 그 감각을 직접적으로 표현 하는 훈련 방법이 있다고 제시하였다(조득현 2003, 77-85).
무용의 움직임과 호흡, 의식적인 마음의 조절을 통해 육체와 정신을 조화롭게 이어지도 록 하는 '신체-정신-호흡 연동법'은 무용의 움직임과 호흡, 마음의 조절을 일체화시켜서 육체와 정신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조득현 2003, 104). 예술가들은 이 를 참고하여 자신의 예술 분야에서 육체와 정신을 통일시키는 방법을 터득하였고 이는 인 간의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육체적인 움직임과 내면적인 감정과 정서를 조화롭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 소 중 하나이기에 조득현의 생리학을 기반으로 한 표현방법론은 예술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어서 무용수가 무대예술에서 표현방법 실기의 핵심부분은 근육훈련을 제 시하였다. 근육훈련은 근육을 리셋 하는 훈련이 기초이다. 이때, 엄청난 주의력과 집중력으 로 대뇌피질과 중추신경의 작용으로 반사훈련을 실시하여 온몸의 근육을 풀어주는 운동, 리셋 하는 느낌을 장악해야 하며 다음으로 신체를 교정하는 자세의 기법, 체형과 운동에서 감각을 느끼기 위한 단계, 팔과 손의 운동, 손과 팔을 좌우로 돌려 치는 운동, 팔을 우로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꽂는 운동, 두 어깨와 흉부를 우로 올려 느껴지는 감각운동, 신체의 식을 가지는 단계 운동, 신체의식의 감각을 느끼는 단계 운동, 좌우목덜미에서 흉부 아래 로 가늘고 길게 의식한 감각 운동, 의지력훈련, 조선족무용의 율동성 훈련, 활성전위에 의 해 여러 가지 형태를 조성하는 단계 훈련, 또한 머리에서 정력을 집중하고 감각을 느끼는 단계에 대한 분석 등에 대한 생리학적 각도에서 분석하고 심리적으로 내면화된 경로를 파 악하고 무용수의 성격창조와 표현법에 관하여 체계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조득현 2003, 152-180).
조득현의 생리학적인 이론은 중국무용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에도 중국 무용연 구의 기초이론 중 하나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이론은 무용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응용하고 있으며 인체의 생리학적 특성을 고려한 예술 연구의 창의적이 고 체계적인 과학적 방법론에 관하여 긍정하고 있다. 조득현은 무용예술을 통해 육체와 정신을 통일시키는 표현방법론을 주장하고, 무용을 단순히 신체적인 움직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움직임과 함께 내면적인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시하였다(연변문학예술련합회 외 2013, 372). 이를 위해서 육체적인 움직임과 내면적인 감정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함을 중요시해야만 하며 생리적 조건과 심리적 측면으로부터 이론을 펼쳤고 구체적인 표현 기능을 연구하여 이런 기능은 육체적인 움직임을 조절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것에도 큰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2. 삶과 경험을 내포한 미학사상
1949년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조선족의 생활에서 일어난 획기적인 변화에 조득현은 새로 운 창작 의욕을 불태웠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조선족무용가들은 민족주체의식과 민족무 용발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자각을 높이고 무용 발전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 시기 조선족무용 발전의 뚜렷한 특징은 예술무용 창작이 활발해지면서 전반 조선족무용의 발전 을 이룬 것이다. 조득현은 이 시기 선구자 역할을 하면서 그 시절 시대적 양상을 표현하는 대표작들을 창작했다. 무용은 인간의 정서와 내면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춤의 구성 요소인 운동, 구도, 자세 등을 도식화(圖式化)하여 규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이런 도식화 된 구성요소들은 무용의 예술적 언어로서의 역할을 하며, 이를 조합 하여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때문에 무용의 예술적 표현방 법에는 발상이 핵심이고 표현체계에 대한 깊은 연구, 그리고 그의 무용정신과 예술성을 함축한 창작을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고 하였다(조인혜, 개인 면담, 2023년 5월 15일).
중국 건국 초기의 예술 무용창작은 완정한 예술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그 내용과 형식도 단순하였다. 이 시기 무용들은 해방의 감격과 경제복구건설, 전선지원에 일떠선 인민들의 들끓는 감정을 민족생활의 자연율동을 통해 반영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한세호, 개인 면 담, 2023년 5월 20일).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물동이 춤」 (1953)의 대표 율동으로 구현되고, 밭갈이를 하는 농민들의 땅을 파러 호미를 내리꽂는 동작에서 비롯된 「농악무」(1951)의 무용동작을 통해 구현 된 것이다. 또한 이런 무용 작품 들은 사회정세(政世)와 혁명임무에 침투되어 창작되고 이런 작품들은 인민들의 애국열정 과 혁명투쟁정신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무용들은 그 무용언어가 간 결소박하고 호탕하며 낙천적인 정서를 직관적으로 안겨줄 수 있으며 조선족인민들의 인간 미가 짙게 표현되는 것이 특징적이다(한룡길, 개인 면담, 2023년 3월 26일).
1959년 9월 20일, 새 중국 창건 10주년을 맞아 연변문공단 일행 43명은 처음으로 북경 에 가서 국경절 경축활동 문예공연에 참가하였다. 이때 연변문공단은 모택동 주석을 비롯 한 중국의 지도자들 앞에서 무용 「농악무」(1951)를 무대에 올려 절찬을 받았으며 이때에 도출한 표현으로 연변 문공단의 명성은 중국 전반에 알려졌고 조선족의 무용예술은 중국 에서 특색을 띄며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오상준 2007, 212). 그 후 예술단체가 재정돈되 고 전공무용 교수진이 확장되면서 더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게 되었고 예술무용 창작은 뚜 렷한 질적 제고를 가져왔다. 그 후로부터 무용가들은 높은 자각과 열정으로 생활에 결부시 켜 무용창작의 고조를 일으켰는데 이때부터 무용창작은 이야기성과 정서를 강조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조득현은 높은 문화자각을 안고 조선족 인민들의 높은 애국주의와 국제주의 정신을 격조 높이 만든 무용극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1951)를 창작하였고 이 무용극의 내용은 해방 이후, 조선족의 생활을 소재로 항미 원조(抗美援朝)에 맞서는 국제주의 애국정신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조선족무용사 뿐만 아니라 중국 무용사에서도 인민의 생활에 대한 감정을 반영한 첫 번째 무용극이다. 따라서 조득현은 조선족무용을 무대창작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무용극 발전사 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하였다(朴永光 1997, 260). 또 하나는 조득현은 조선족의 민속놀이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전통농악을 예술무용의 차원에로 끌어올려 무대 화 시키고 신형의 연변농악을 발전시키면서 「농악무」(1951)를 창작하였다(조득현 1981, 42). 이는 최초 조선족무용을 예술적으로 체현시킨 무극과 민간민속무용을 무대화한데 대 한 가치성이 있으며 조선족무용에서의 획기적인 의의를 띈다(한룡길, 개인 면담, 2023년 3월 26일).
무용은 생활을 관찰하고 사상과 감정을 반영하는 데로부터 착수하여 인간은 어떻게 살아 가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 해석하고 이런 사상적 경지의 높이와 다양한 기교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무용가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조인혜, 개인 면담, 2023년 5월 15일). 그는 이런 사명감으로부터 출발하여 무용창작에 있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견해를 주장했다.
첫째, 무용은 동태적인 공간개념을 수립해야 한다. 우선 먼저 파악해야 할 문제는 무용 의 본질적 문제와 기본문제라 볼 수 있는 공간개념의 수립이라고 하였다. 무용은 공간과 시간이 결부된 예술형태이기 때문에 이는 공간예술에 속한다고 하지만 공간예술과는 크게 다른 점을 갖고 있으며 눈으로 보고 감상하는 예술형태이기에 그 아름다움은 공간에서 신 체운동의 방법으로 조각해낸 형상의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였다. 무용에서 공간 개념은 아주 중요하며 오직 공간개념을 확립해야만 무용창작의 방법론을 토대를 이미지를 구상해낼 수 있으며 신체운동을 활용해 무대공간에서 여러 가지 형상을 창조해낼 수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둘째, 무용은 삶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를 전달하여야 한다고 제시했다. 창작자가 표현 하려는 작품의 주제는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게 된다. 사람의 경험은 그가 내재하고 있 는 지식에 따라 많은 여러 가지 상이한 단계를 거치게 된다. 좋은 주제를 선택하는 데는 숭고한 사상을 기본 조건으로 요구하고 동기를 유발해내고 그다음 그 동기를 동작묶음(动 作群)으로 바꾸어 놓고 또 이를 작품으로 발전시켜야하며 이런 과정에서 창작자는 전체 작품의 흐름을 결정하게 되는바 적당한 무대 공간 구성과 형태를 발견함과 아울러 율동의 미학적 법칙을 활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셋째, 무용창작은 반드시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다채롭고 풍부한 동작에 대해 세심히 관찰해야 하며 인류 활동에 대한 자신의 지식 범위를 최대한 확장해야 한다고 하였다. 무 용의 표현 기술은 이성과 창작 능력이 서로 결부된 산물이며 이 점에서 무용교육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다. 조득현은 무용창작이란 창작자의 자아변화 과정이고, 이 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활과 시각적 관점에 따라 이해가 다르기 마련이라고 지적하였다 (한세호, 개인 면담, 2022년 6월 20일). 또한 어떤 목적에서 창작하느냐 하는 데는 바로 창작자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문제가 연관되어 있기에 미학적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려 면 응당 미학적인 방식에 따라 자기를 변화해야 하며 사람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사상을 해방할 때에만 새로운 창의적인 아름다움을 창조 해낼 수 있다고 하였다. 낡은 사상과 낡 은 형식의 속박에서는 절대 새로운 것을 창조 해낼 수 없으며 이런 점에서 말미암아 무용 은 인류의 지식발전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반영한 한 가지 예술형태임을 강력히 주장하 였다.
마지막으로 무용창작 가운데는 수많은 지적활동이 포함되는바 영감(inspiration) 하나로 만으로 절대 만들 수 없으므로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냉철한 계통적인 사고를 갖고 임해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무대구성 가운데의 대부분 기능 동작은 모두 짙은 지적색채를 띠고 있는데 좋은 작품을 써내려면 감각 문제를 홀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감각에만 의지하고 지적 방면에서 피타는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면 그 표현은 두말 할 것 없이 의미 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 존재물의 재현'에 불과할 것이기에 아동에게 무용창작 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일정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였 다. 아동의 창작활동은 고급적이라는 느낌은 받기 어렵지만 무용창작을 예술교육의 한 개 경험으로 간주한다면 이것도 마땅히 중시해야 할 일이기에 아동에 대한 무용지식교육을 절대로 홀시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조화롭게 외부와 적응되는 행동을 자기 생명선으 로 간주하는 무용예술은 교육사업 가운데서도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 반 학교에서도 음악, 미술학과와 마찬가지로 무용교육과를 개설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무용형상화 전의 정신적 과정과 외재적인 형상화 실현과정에서 무용창작은 예술창작 활 동 가운데의 심리적인 측면에서 일반 예술창작 활동과 구분되는 다른 점이 있다. 또한 다 루는 소재와 형식상 자신의 독특한 예술형식을 가진 것이 무용창작이다. 창작 요구에 따라 주제를 정한 다음 거기로부터 동작의 이미지를 구상하고 내용에 근거해서 동기를 유추하 고 내용표현에 적합한 형식을 발견해내어 작품의 구성을 실행하게 되는데 이때 창작활동 의 핵심은 무용창작자가 지닌 고유의 이미지가 관련되며 이런 이미지는 무용창작의 전반 기술이 집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였다. 조득현은 무용창작에는 두 가지 과정이 포함되는데 하나는 형상화되기 이전 드러나지 않는 정신적인 과정이고 다른 하나 는 동작을 구상하고 표현 동작을 확정 짓고 공간구성과 시간 구성에 대해 고심하면서 작품 의 외재적인 형상화를 실현하는 과정이 있으며 여기서 전자는 무용창작의 기초 작업이라 고 하였다.
조득현의 창작 작품은 「집단 농악무」(1949), 「노동자의 승리」(1949), 「병사의 춤」(1949), 「농악무」(1951), 무극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1951), 쌍무「활춤」(1952), 「장고춤」 (1955), 「옥중전가」(1963), 「선종과 추수」(1963) 등 수십 개의 창작 작품이 있다. 그 중, 「농악무」(1951)는 조득현이 1951년에 창작하여 1952년에 길림성 문예 합동공연에서 1등상을 받고 전국에서부터 외국까지 널리 소개된 조선족의 대표적인 민족무용이다. 「농악무」(1951)는 전통농악의 이른바 '매귀(매굿)', '지신밝기(마당밟기)'의 미신적이고 소극적인 요소들은 제거하 고 나라의 주인이 된 신형의 농민들의 행복한 생활 모습을 잘 그려냈다(조득현 1988, 38-40). 그는 낙천적인 감정세계를 표현하면서 아울러 내용면에서 혁신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과거 전통농악이 남성들만 행한다는 틀을 버리고 여성 무용수들도 등장시켜 남성들의 용맹한 춤가락과 여성들의 부드럽고 흥겨운 춤가락을 서로 조화시켜 농악의 분위기를 변화시켜 무대 화폭을 보다 아름답게 장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모를 재치 있게 돌리며 뛰고 도는 남성 기교동작과 팔자 형을 그리면서 선풍같이 돌아가는 여성 돌기를 결합시키는 등 다채로운 기교동작들을 창작 승화시킴으로서 전통 농악의 기교 표현성에 짙은 지식을 겸하여 연변농악을 새로운 영역과 차원으로 발전시켰다(천수산 2010, 102-103).
조득현은 무용창작에서 현실을 반영하는 예술의 의미를 부여하고 직접 농사에 참여하였 다. 농민들의 농사과정을 자세히 관찰하고 진실된 표현과 느낌을 표현하는 영감을 실제 생활에서 끌어내기에 노력하였다. 그의 수많은 작품은 실제 생활에서 이어져 나온 예술작 품들이기에 더욱이 많은 시대적인 공감과 역사적 정서를 반영하여 그 빛을 발휘한다. 조득 현은 「농악무」(1951)에 대한 명확한 작품구상과 탄탄한 기능으로 작품을 아름다운 공간, 시간적 예술로 창작하고 세상에 알려지게 하였다(조인혜, 개인 면담, 2023년 3월 5일). 이 로써 조득현은 실전에서 받은 감정을 내면화하여 표현하는 방법을 창작에 응용하고 창의 적인 구상으로 작품을 창작하였다.
「농악무」(1951)의 창작에 힘입은 무용가들은 대중들 속에 들어가거나 민간 예인들을 요청 하는 방법으로 민간 민속 무용을 발굴하고 정리하였다. 또한 가공, 개편하여 예술을 무용화하 는 새로운 고조를 일으켰다(이애순 외 1994, 279). 이때 정부에서도 민간 민속 무용의 발굴사 업을 중시하면서 「농악무」(1951) 창작의 뒤를 이어 「칼춤」(1950), 「활춤」(1952), 「탈춤」 (1956)등 20여 종에 달하는 춤들이 창작되고 무대에 섰다. 따라서 조득현은 무용 작품의 창작과정에서 조선족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해내면서 따라 민족무용발굴의 선두자로 거듭났다(채영춘, 개인 면담, 2023년 3월 20일).
3. 이론과 실천을 결부시킨 교육방법
조득현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무용교육 방법을 개발하고 기존의 무용교육 방식과는 다르게 학생들이 몸소 감각을 느끼면서 무용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 특 징이다. 이를 위해 무용학생들이 주로 실내에서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실외 다양한 자연환 경에서 무용을 훈련하도록 하는 등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했다(한룡길, 개인 면담, 2023년 3월 26일). 그의 교육방식은 조득현의 미학사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며 후대양성과 배 양 교육체계와 교육방식에도 체현된다. 조득현은 발레를 기초로 조선족무용을 무대화시킨 선구자이며 민간예술에 그치지 않았던 조선족 생활을 무대화로 창작하고 체현시켰다. 그 는 무용예술 창작에는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무용예술을 창작하는 미학사상이 있고 무대 위의 표현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통일시켜 내면화된 감정을 체현하려는 방법이 있다. 이런 미학사상과 시대적 배경에서 조선족무용의 발전과 교육체계가 형성되었다. 조선족무용은 조선반도에서 중국 땅으로 이주하면서 옮겨온 조선전통무용을 기초로 하고 조선반도의 근 현대예술발전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중국의 자연환경과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발전하 면서 전통무용의 전승과 발전뿐만 아니라 새로운 현대적 무용으로도 창조되었다(한동국, 1989, 95). 즉 중화 민족성과 조선 민족성 그리고 지정학적 다각성으로 구성된 조선족무용 의 기초체계에 조득현의 미학사상은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고 탄탄한 기초를 닦아주었다.
첫째는 무용예술의 기본기를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기본기는 무용을 배우는 학생들이 무용의 본질과 기술을 습득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발레를 기초로 신 체적인 기능을 향상시키고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교학연구를 만들 수 있다. 이는 학생들에 게 무용예술의 기본기교육을 강조하여 전문적인 기술을 습득하는데 있어서 좋은 기반을 마련하여주었다.
둘째는 무용을 통해 학생들이 창의성과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무용공연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자신만의 움직임을 통해 공연에서 선보일 수 있도록 하고 어떠한 상황설정을 하여 학생들에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켰다. 이는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마 련해주면서 창의적인 무용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무용예술을 배우는 학생들 이 무용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와 수양을 내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 서 무용예술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자부심, 자신감, 인내심 등을 키우는 교육을 강화시키고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이 무용예술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 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한룡길, 개인 면담, 2023년 3월 26일).
셋째는 무용교육에 대하여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여 무대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며 따 라서 현장실습을 확대하고 이론과 실천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 고 강조하였다. 또한 탄탄한 발레 기본과 풍부한 경험으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 들의 발레 실력을 전국적으로 앞서게 하였으며 발레의 기본훈련을 통해 조선족 무용인재 를 양성함에 있어서 신체적 소질과 무용기능을 제고 시키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고 과 학적인 교수체계는 새로운 무용교수체계를 건립하는데 중요한 역할과 시사를 제시하였다.
연변예술학교 건립초기에 조득현의 지도하에 무용교원들도 발레훈련을 매일같이 진행 하였다. 조득현은 학교뿐만 아니라 각 현과 시문공단 창작 일군 강습반을 꾸리고 20여명이 나 되는 학생을 양성하였다. 무용을 통해 민족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을 중요한 사명 으로 여긴 그는 무용교육을 통해 미래 중심적이고 창의적인 민족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탐구와 혁신을 중심으로 하는 다차원적 인 고찰과 유물론적, 문헌학적, 민속학적인 다양한 시각에서 무용이론 등에 대해 접근하였 다. 이에 조선족무용 연구에서 획기적인 연구가 자리매김하였는데, 이는 미시적인 조선민 족무용 연구차원에서는 기원론과 특징연구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거시적인 무용예술 연구 차원에서는 지금까지 공백이었던 창조적인 표현방법론이 기초를 하고 있다.
Ⅳ. 결 론
본 연구는 조선족무용 선구자인 조득현의 무용생애와 표현방법론에 대해 분석하고 그의 미학사상을 도출하였다. 조득현은 육체와 정신을 통일시켜 표현하는 방법론과 생활을 무 대예술화로 체현하는 창작방법론을 제시하였고 그의 표현방법론은 조선족무용의 교육과 이론체계를 구축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현재까지 심화 연구되고 있다.
조득현은 발레체계를 중국에 전파한 세 원로 가운데의 한 분으로서 중국 조선족 예술터전 에 러시아 고전발레의 씨앗을 뿌려놓은 최초 무용가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족무용을 체계적 으로 무대화하고, 혁신적인 표현방법이론으로 작품을 창작하고 교육에 침투시킨 선구자이자 혁명가이자 교육가이다(허휘훈 2021, 170). 조득현의 무용예술에 대한 미학사상과 그 속에 내포된 정신은 그의 예술인생에 깃든 철학적 함의와 그 가치를 재조명하는 데 있다.
조득현은 무용의 기본기에 대해 강조하고 정신과 육체의 통일을 요구했다. 작품의 역할 에 대한 깊은 이해는 내면화되어 신체적 흐름을 타고 안면 부, 손끝 등 동작 하나하나에서 그 표현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 함을 요구했다. 그의 무용창작은 주로 조선족의 생활과 삶에서 영감을 얻고 동작을 체계화하여 무대화하였다. 비록 발레로 예술 인생을 시작했지 만 그 예술 행위의 시각적 관점, 귀착점을 조선족무용에 두었다. 그는 늘 “민간무용은 자연 적으로 변화발전 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 생명의 움직임을 느끼게 되며, 민간무용에는 선조 들이 몇천 년을 두고 쌓아놓은 전통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또한 인민의 생활 습관과 삶 중 에서 형성된 많은 일들이 반영되고 있고 이를 뿌리로 발전해야 한다”고 하였다(조득현, 1986, 63). 따라서 무용창작에서 무용의 과학적인 탐구를 기본으로 늘 민족성을 잃지 않고 그 발상과 영감을 민간에 귀속시켰다.
무용교육에서 조득현은 전수와 육성을 중심으로 무용교육을 예술탐구의 중요한 실천의 하나로 보았고 서방문화의 엄격한 특징들을 받아들여 분공이 미비했던 전공교수들의 직책 을 세분화, 체계화하였다. 또한 분담교수를 더욱 고심이 연찬하게 함으로써 무용예술교육 의 전문화를 추진하였다. “무용예술은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무용교육은 과학이다”라고 주장하시면서 교육의 과학적인 체계를 다루는데 힘을 썼다(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외 2013, 391). 또한 학생들에게 내면화된 표현을 중요시하고 이는 실천을 통하여 자유롭게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무용 교학의 경험과 자신의 무용 지식에 탐구를 기반으로 수십 편의 논문과 책을 집필하면서 무용 이론에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이는 조선족무용 이론의 기초이고 무용교육 전파에서의 핵심 교육내용이다. 전반적으로 조득현은 무용은 인류의 지식발전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반영하고 무용에 대하여 과학적인 분석방법과 철학사상의 가치를 결합시킨 혁신적인 미학사상을 제시한 것이 분명하다. 조득현의 미학 사상은 형태화된 무용예술의 표현으로 내면화된 무용수의 깊은 사상과 감정을 구현하고 그의 정신성과 민족성을 반영하는데 있다고 본다.
본 연구는 조득현의 무용예술의 전 생애를 돌아보고 그가 이룬 업적에 관하여 예술적, 철학적, 역사적 즉 그의 미학사상을 연구하여 조선족무용을 한층 깊이 이해하고 발전해 나가는 토대를 마련하게 될 것에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