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본 논문은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新疆維吾爾族自治區)의 위구르족( ئۇيغۇر ,維吾爾族) 사발춤의 역사적 배경과 발전 과정에 대해 살펴본다. 또한, 각 시기 사발춤 문화특징과 그 시기의 문화가 어떻게 사발춤에서 체현되었는지를 고찰하여 역사적 변천 속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특징을 도출하는데 목적이 있다.
중국은 약 56개 민족이 함께 살고 있는 다민족 다문화 국가이다. 각 민족은 서로 다른 생태환경 및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위구르족은 중국의 56개 소수 민족 중 하나로 주로 중국 서북지역에 위치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거주하고 있다. 1955 년 중국 공산당은 이 지역에 신강 위구르 자치구를 설치함으로서 위구르족은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총면적은 1,664,897km²로 중국 육지 면적의 약 6분의 1을 차지한다. 신장은 몽골(Mongolia), 카자흐스탄(The Republic of Kazakhstan), 키르기스스탄(Kyrgyz Republic), 타지키스탄(The Republic of Tajikis tan), 러시아(Russian), 아프가니스탄(The Islamic Republic of Afghanistan), 파키스탄 (Islamic Republic of Pakistan), 인도(India)의 8개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신장 위구르 자치구 인민정부망 2023). 또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고대 실크로드(絲綢之路)의 중요한 통로였으며 기원전 202년부터 경제, 무역, 문화 분야에서 다른 나라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이처럼 신장의 특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신장에 거주하는 위구르족의 무용 예술은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지고 있다. 위구르족의 종교적 영향은 샤머니즘(shamanism), 마니교 (Manichaeism), 배화교(Zoroastrianism), 경교(Nestorianism), 불교(Buddhism) 등 다양한 분야의 종교 확산이 이루어져 왔다. 신장지역의 특수한 지리적 위치와 위구르족들의 다양 한 종교 분야 확산은 다양한 사회적 기능과 퍼포먼스 형식을 지닌 사발춤의 형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본 장에서 설명할 사발춤은 위구르족의 대표적 춤이며, 이 춤의 특징 역시 위구르족들의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구르족 사발춤은 서기 3세기 구자국(龜茲國 기원전 176년-서기 1001년) 키질석굴(克 孜尔石窟)1)에 그려진 정완무 벽화(壁畫)2)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자국은 현재의 신장 쿠처 시(庫車市)에 위치하며 고대 실크로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나라이다. 중국, 인도, 페 르시아, 그리스의 4개 문화 시스템이 이곳에서 합류하게 되는데(아이누르·카스무 2011, 14), 이들 각국의 문화와 예술의 교류를 통해 구자국은 당시의 음악예술과 무용예술의 중 심이 되었다. 이곳에서 생겨난 구자악무(龜茲樂舞)3) 문화는 위구르족 무용 발전사, 심지어 중국 고대 악무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가지고 있을 만큼 의미 있다.
위구르족 사발춤의 역사적 변천 맥락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위구르족 사발춤을 최초 로 구자(龜茲)지역 키질석굴 벽화에 비친 사발춤의 기록부터 시간 맥락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신중국(新中國)4) 건국 전 신장 위구르족 사발춤은 어떤 문화적 배경을 지니며 변화 하였고, 신중국 건국 후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의 문화예술 보호를 위해 위구르족 사발춤을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위구르족 사발춤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양적으로 많지 않은 상태에서 위구 르족 사발춤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내용 및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사발춤의 향후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따라서 위구르족 사발춤의 역사적 변천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구르 족 사발춤이 가지고 있는 역사 문화적 특징, 사회적 기능, 그리고 사발춤이 지닌 독특한 특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관련 이론적 연구 역시 진행되어야 함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중국 위구르족 사발춤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바탕으로 역사 발전 과정에서 위구르족 사발춤의 역사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위구르족 사발춤의 역사적 변화를 중심 으로 각 시기의 문화 및 민속 요소와 더불어 기예 요소를 점진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중국 위구르족의 대표적인 무용 장르 중 하나인 사발춤이 시기마다 어떠한 사회적 기능과 변화를 보였는지 또는 현재의 사발춤 작품을 통해 역사적 흔적과 혁신의 내용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이는 중국 위구르족 문화예술의 계승 및 발전을 위해 사발춤에 관한 이론적인 연구가 축적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작금의 상황에 중요한 작업이라 여겨진다.
본 연구의 심층적 측면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 및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선행연구를 분석하는 장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기존에 이루어진 사발춤 연구의 경 우 일부 특정 시기만을 추려내어 살펴본 연구만이 존재할 뿐 역사적 발전 맥락에 따른 사 발춤 관련 연구는 부족한 상황이다. 또한 사발춤 전승체계 정립과 형식의 보존에 관한 분 석에 있어 본 연구가 의미 있을 뿐 아니라 시의적절한 연구가 된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의의를 피력하고자 한다. 그리고 위구르족 사발춤 전승연구를 통해 과거 위구르족 신장 지역의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무용 역사의 기록을 추적할 수 있다는 점 에서 본 연구의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2. 연구의 방법
본 연구의 주된 내용은 사발춤의 역사 고찰을 통한 역사적 변천을 파악하는 것이다. 연 구내용은 중국 신장지역 위구르족 사발춤의 역사적 전개를 통해 본 사발춤의 기원과 의의, 고대 신장지역 실크로드의 각 문화 교류와 문화융합 현상이 사발춤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신중국 건국 후까지 사발춤의 재창작과 현재 위구르족 무용 대표 작으로서의 형식에 대한 분석으로, 특히 사발춤의 발전과 역사에 관한 변천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목적을 기반으로 본 논문은 위구르족 사발춤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키질 석굴의 벽화, 고대 문헌에 기록된 내용, 그리고 위구르족 차 문화 등 위구르족 사발춤에 관한 내용을 고찰한다. 사발춤 발생과정의 연구는 고대 위구르족 선민(先民)들이 살았던 구자지역에 현존하는 구자악무 벽화에 대한 역사 탐구에 기반하여 관련 선행연구와 문헌 자료의 다각적 분석을 통해 진행하고자 한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장 위구르족에 대한 다양한 문화 교류역사 입증과 사발춤의 전승 탐색은 구자지 역 벽화와 역사 문헌 고찰로 그 범위를 집중하였다. 구자국 유적, 키질 석굴에 있는 사발춤 형상 벽화 사진과 모사화(臨摹畫)5)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역사 문헌 『중국석굴 키질석굴 제1권(中國石窟克孜爾石窟第一卷. 1981)』, 『중국 음악 무용 사료 대전(中國樂舞史料大典. 2015)』, 『키질석굴 벽화 속 음악과 춤의 형상(克孜爾石窟壁畫中的樂舞形象, 1995)』 등 결 합해 분석하였다.
둘째 ‘사발춤’, ‘위구르족 무용사’, ‘위구르족 사발춤’ 등의 핵심키워드를 중심으로 관련 자료들을 탐색하고 수집하였다. 더불어 시대별 문화예술 관련 고서 문헌 『중국곡예사(中國 雜技史. 2004)』, 『진서(晉書)』, 『중앙아시아 탐험(中亞探險, 1915)』, 『패나아무(牛孛拏兒 舞)』 조사를 근거로 사발춤의 전승 배경과 역사변천을 고찰하고 형성 요인의 특성을 분석 하였다.
셋째, 이를 바탕으로 사발춤의 형성 배경과 춤 양식을 위구르족의 이슬람교 신앙 이후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전통 차 문화6)의 역사성 규명에 연계하였다.
한편, 세계 각 민족 중 일부 민족에게서 사발춤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지만 본 논문은 중국 신장지역 위구르족의 사발춤으로 그 연구대상을 한정하였다.
3. 선행연구 분석
위구르족 사발춤의 역사는 구자국 시대에 불교 배경부터 시작된다. 위구르족 사발춤 역 사가 이어진 오늘날까지 괄목할 만한 성적을 이루었다. 위구르족 사발춤의 형성 과정과 역사적 발전 특성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위구르족 무용이 어떠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발전되어 왔는지 그 형성과 발전 과정을 밝히는 선행연구는 다음과 같다.
우소선(2017), 장밍(2018)은 위구르족 사발춤의 역사적 흐름에 대해 고찰한 후 구자시 대의 위구르족 사발춤의 특성을 도출하였는데, 구자시대의 위구르족 사발춤의 발전에 대 해서 포괄적으로 언급하여 각 지역의 발전에 대한 내용은 모호하게 나타났다. 또한 작품이 창작된 지역에 대해서는 논문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상조수(2021), 아이누르·카스무(2011), 왕극분(2011), 요세홍(2009), 위링(2002)은 구자 문화권에서 위구르족 문화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위구르족 사발춤의 문화 사적 흐름을 통시적, 공시적으로 연구하였는데, 위구르족의 특정 지역에서 생성된 무용을 언급하면서 위구르족 무용이 중국에 정착한 후의 전반적인 발전양상에 대해 고찰하였다. 하지만 위구르족이 거주하고 있는 어느 한 지역의 위구르족 무용 발전양상에 대해서는 구 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장밍(2018)은 중국 위구르족 무용의 형성 및 발전과정과 신중 국 건국 전, 후의 무용 작품을 연구하였는데, 각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위구르족 무용 작품 보다는 위구르족의 창작 작품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 원가(2018)는 위구르족 사발춤의 문화사적 변모양상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신장의 위구르족 무용의 사발춤 작품을 위주로 분석하여 창작적 특징을 고찰하였다. 왕이한(2021)은 중국 위구르족 사발춤의 공연 사적 변모양상에 대해 연구하였는데, 신장예술대학과 신장의 예술단체 공연을 중점적으로 논하였다. 곽몽요(2021)는 위구르족 사발춤의 시대적 변천과정에 대해 연구하였는데 지역 별 위구르족 무용의 변천 보다는 각 시기별 대표 무용수, 무용 단체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여 특징을 도출하였다.
오늘날 중국 신장지역 위구르족 사발춤의 사적 흐름과 변천 과정에 대한 연구는 이전보 다 이루어지고 있어 이 분야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접근방식을 모색하고 세부적인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낀다. 일 부 위구르족 사발춤에 관한 연구에서는 지역에 대한 정보가 모호한 현상이 존재하며, 중국 신장지역에 대한 연구는 무용전공분야의 발전양상에 국한되어있거나 민간예술 분야에 치 중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위 논문들을 기반으로 중국 신장지역에 초점을 두 어 신장 위구르족 자치구 내에서 형성 및 계승되고 있는 위구르족 사발춤을 세 방면으로 나누어 포괄적으로 고찰 및 재정립하고자 한다. 신장지역의 위구르족 사발춤 민간에서 전 파되고 형성과정을 통해 춤 문화 원형의 위구르족 무용의 요소 및 특성으로 그 과정을 살 펴보고자 한다.
Ⅱ. 위구르족 사발춤의 역사적 배경
1. 건국 전 사발춤의 유래 및 역사적 흐름
본 논문은 신중국 건국 전과 신중국 건국 후를 경계로 살펴보고자 한다. 신중국 건국 전에는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였지만 건국 후에는 신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국 가의 상황은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며 문화예술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18세기 전반, 천 년 만에 다시 발견된 키질석굴은 고고학계의 국내외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키질석굴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다시 시작되었다. 키질석굴에 있는 벽화는 당시 구자국의 국력과 불교가 성행했던 역사를 알 수 있으며, 벽화의 내용은 지금까지 사발춤의 내용을 볼 수 있는 최초의 자료로 볼 수 있다. 키질 석굴은 건축, 조각, 벽화를 포함하는 불교 예술의 복합체인데, 당시 사발춤을 주 내용으로 한 불교 이야기가 담긴 벽화가 존재 하였다고 한다(모니제·모태리프 2018, 169). 이에 본 장에서는 사발춤의 역사기록 현황에 따라 건국 전의 사발춤 역사를 벽화, 고대 문헌, 차 문화 등 세 가지 각도로 나누어 고찰하 고자 한다.
1) 벽화
중국 신장 위구르족의 사발춤은 서기 3세기 구자국 키질석굴의 벽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신 2022, 105). 구자시기에 위구르족 선민들이 불교를 받아들여, 석굴 벽화에는 불교적 구자악무 이미지 벽화가 많이 남아 있다. 구자악무 벽화 중에는 소품춤 이미지가 많은데, 이를 통해 위구르족 사발춤의 최초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키질석굴에 있는 불교적 벽화는 위구르족 사발춤의 최초 예술기록으로 여겨진다.
구자국은 고대 서역(西域)7) 36국 중 하나였으며(우소선 2017, 126), 현재 신장 쿠처지 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실크로드의 핵심구간이기도 하다. 키질석굴은 중국에 현존하는 최 초이자 동굴 유형이 가장 완전하며 가장 큰 구자 불교 석굴군이기도 하다. 그중 벽화는 불교문화가 신장지역에 있어 중요하게 존재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구자 악무는 동서양의 음악 무용 교류와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오늘날 무형문화유산 인 위구르족 ‘목가모(木卡姆)’8)는 고대 ‘구자악(龜茲樂)’에서 유래한다.
특히 구자국은 그 지리적 위치의 편리로 인하여 경제 문화 교류 발전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보니 무역경제가 발달하여 당시 각국에서 온 상인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모니제·모태리프 2018, 169). 이들의 생활방식, 종교 신앙, 풍속 습관이 다양했기에 구자 특색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양한(兩漢) 9)시대에 불교는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서 구자국으로 전래되었다.
키질석굴 중의 악무 벽화의 내용은 주로 불교문화를 위주로 한다. 키질석굴은 건축물, 조각품 및 벽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공과 자연에 의해 파괴되어 현재는 80여 개의 석굴만 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한 키질석굴 벽화의 주제는 주로 불교 이야기이며, 이는 그 당시 불교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증명이기도 하다.
키질석굴에 있는 벽화의 면적은 약 1만 평방미터이며, 대부분의 벽화 내용은 세상 사람 들이 더 많은 선행을 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석굴군은 비교적 밀집되어 있고 벽화의 내용 이 풍부하여 불교의 ‘본생(佛生)10)이야기’, ‘불전(佛传)11)이야기’, ‘인연(因缘)12)이야기’ 등 벽화뿐 아니라 세속적인 생활상을 표현한 벽화가 많이 있다. 이 벽화들은 중국 한문화의 영향뿐만 아니라 외래문화와 예술의 융합도 가지고 있다. 키질석굴은 건축물, 조각품 및 벽화로 이루어져 있어 인공과 자연에 의해 파괴된 후 현재는 약 80여 개의 석굴만이 온전 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한 석굴에는 사람들이 사발을 들고 있거나 머리 위에 사발을 올려 놓은 형상화들이 많이 있는데, 모두 부처님께 공양하는 불교적인 내용들로 위구르족 선조 들이 벽화를 그린 방식인 당시 오신(娱神)13)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2) 고대 문헌
서진시대(西晉時期)-청나라(清朝, 382-1616)까지 약 천 년간의 고대 문헌 기록에서 사 발춤의 기교성은 난이도가 높은 방향으로 끊임없이 발전하기 때문에 관상성도 높아지며 사회적 기능이 구자국 시기의 오신에서 오인(娱人)14)으로 바뀌었다.
「중국곡예사」는 “한나라(漢代)시기 실크로드가 성립된 이후 서역 곡예, 무용 및 환술은 민간에 널리 전해져 현지의 전통 예술 형식 안에 융합되었다(부기봉, 부등룡 2004)”고 기 술하고 있다. 중원(中原)지역 허난성 남양한묘(漢墓)15) 화상 비석에는 ‘춤병잡기도(舞瓶雜 耍圖)’가 그려져 있다. 그림 중 무용수는 차완을 머리에 받치고 한 손에는 병을 세우고, 다른 손에는 다른 소품을 들고 있다(손상 2019). 이 그림은 중원 지역에 일찍이 ‘사발을 받치기’라는 퍼포먼스 형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실크로드 호황기 당시 서역 지역의 문화예술을 중원으로 도입하였는데, 이런 퍼포먼스 형식은 중원 지역의 민간 예술인의 기 술을 현지의 예술 형식 안에 융합시켰다.
수천 년의 끊임없는 발전에 따라 현재 위구르족의 사발춤 변화는 민족융합, 종교적 신 념, 생활 습관, 지리적 관계 및 사회 경제에서 볼 수 있다. 위의 사발춤에 대한 문헌 기록에 따르면 사발춤은 중국에서 비교적 오랜 발전의 역사와 깊은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그다음 고서 『진서(晉書)』, 고서 『패나아무(牛孛拏兒舞)』에 따른 내용을 살펴보면, 중국 신장지역에 나타난 사발춤의 유형 중 사발을 비롯한 소품에서도 어느 정도의 형태 변화가 확인되었다. 사발춤은 ‘구자악’을 활용하여 반주를 내며 다양한 춤을 표현하는 형태인데 그중 소품을 들고 추는 형태로 변이되었다고 한다. 사발춤 기예가 발전에 따라 제자리에서 춤을 추는 것에서 춤 스텝을 발전시키고, 돌기 동작도 많이 개발된 것이다. 이후 사발춤은 춤 동작의 난이도가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소품을 뒤집기, 왜자보(矮子步), 돌기 등 기교적 인 동작들이 많이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사발춤은 시기별로 명칭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진시대에는 당 나라와 청나라 때 사발춤을 소품의 차이 때문에 ‘사발접시춤(頂碗小碟舞)’, ‘진세녕(晋世 宁)’, ‘등불춤(頂油燈舞)’이라고 불렀다. 소품은 단일한 사발에서 서진시대 ‘사발접시춤’에 서는 무용수가 사발을 받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손에 접시를 들고 있고 춤을 췄다. 당나라 의 ‘녕진’은 춤뿐만 아니라 무용수들은 노래도 부르고 소품도 컵과 접시로 바꿨다. 청나라 의 등불춤에서 무용수는 머리에 등불을 받치고 공연 전에 현장의 불빛을 끄고 머리에 등불 을 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췄다.
3) 차 문화
실크로드의 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위구르족 사람들의 생활양식에는 도자기 및 차 등이 유입되었다. 이때 위구르족의 생활 풍습과 문화적인 요소인 사발춤을 고찰하자면 위구르 족의 ‘차 문화’가 그 중요한 단서가 된다. 위구르족 이슬람교를 신앙 이후 차 문화의 특징 은 바로 이 당시의 위구르족의 생활양식과도 연결되는데, 이슬람교에서 물은 정화와 경건 함을 상징한다. 즉, 물로 만든 차는 알라(Allah)가 무슬림에게 주는 가장 고상한 음료라는 것이다(장휘 2010, 31). 위구르족 사람들은 차를 손님에게 대접하고, 차로 친구를 사귀고, 차로 선물을 하고, 차를 마시며 건강을 챙긴다. 여기서 위구르족이 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금주’ 때문이다. ‘금주’는 이슬람교의 중요한 계명 중 하나이며 무슬림 생활 방식 의 큰 특징이다. 노래와 춤에 능한 위구르족 사람들은 회식이나 결혼식 분위기가 절정에 달할 때 민족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곤 한다. 이러한 모임 분위기에서는 누군가 사발을 머리에 이고 접시를 손에 들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자신의 기쁨을 표현 하기도 하였다.
2. 건국 후 사발춤의 발굴 및 발전 현황
1) 벽화
1949년 중국 건국 후에 정부는 소수민족 무형 문화유산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민간에 산재한 민족 문화 예술을 발굴하고, 민족 예술 전승과 교육을 중시했다.
1953년 북서행정위원회 문화국이 구자에 키질석굴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하였으며, 키질 석굴은 현재 236개의 공식 석굴이 있다. 이어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한 사발춤 형상의 벽화 는 벽화 17호, 135호, 175호 석굴에 있다고 한다(진가가 2018, 6).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7호 석굴, 135호 석굴, 175호 석굴에 사발춤 벽화가 사용된 소품은 모양이 비슷하고 모두 흰색 원형의 사발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유일한 차이점은 17굴 벽화의 경우 사발 안에 초가 꽂혀 있다는 점인데, 이는 정확하게는 오늘날 정무(燈舞) 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상조수 2021, 11).
자세가 어떻게 변하든 사발은 손에 평평하게 들고 항상 평온하게 사발을 유지한 이미지 로 한다. 사발춤은 주로 소녀의 착한, 순진한,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하는데, 이런 사발춤 이미지는 구자 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무 벽화이다. 그러므로 당시 구자 지역에서 사발춤이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알 수 있다.
현재 잘 보존된 석굴 중 17호 석굴에는 단발머리와 수수한 의상을 입은 한 무용수의 벽화가 있다. 머리, 어깨, 손에는 촛불을 켜놓은 등을 받치고 있는 벽화도 있는데, 촛불이 꽂힌 차완을 항상 머리 위에 받치거나 어깨나 손 위에 놓는다. 무릎을 꿇는 무용 자세도 있으며, 서 있는 무용 자세도 있는 걸로 보아 춤의 형식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시기부터 무용의 기교적 동작은 이미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135호 석굴에는 사발춤 이미지 벽화가 총 8개 있었다. 석굴 벽화의 사발춤 이미지는 전형적인 여성 이미지로 오른손으로 차완을 받친 채 상체 의상을 벗고 하체 치마바지를 입고 있다. 또한, 머리에 보석 장식을 쓰면서 양발을 양탄자 위에 서고 몸을 기울여 눈은 왼쪽 아래를 주시하고 왼손은 차완 위를 덮고 있다(요세홍 2009, 119). 다른 한 벽화에서 보살은 한 손으로 차완을 받치고 있고, 한 손으로는 병을 들고 있다. 그리고 175호 석굴의 오른쪽 능형 벽화에는 머리 위에 사발을 받치고 손에 사발을 들고 춤을 추고 있는 사발춤 이미지 가 그려져 있다(손상 2019, 17).
구자에 키질석굴 벽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위구르족 사발춤의 기원 그리고 현존하는 최 초의 사발춤 그림 자료를 연구할 수 있다. 구자악무는 다원적 문화 개념 및 고대 서역악무 예술의 무용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당시 구자 지역에서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현지 민속 예술이 불교문화와 빠르게 결합하였으며, 현지 민족 미학과 민족 스타일이 키질석굴 벽화 그래픽 예술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에 원래 불교문화의 직관적인 산물이며 벽화 사발춤 이 미지의 탄생도 불교 예술 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2) 고대 문헌
1995년 이후 신장예술대학 무용학과 학과장 왕영격(王咏舸 1963- ) 교수는 구자지역 키질석 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키질석굴에 관한 연구 중 위구르족의 사발춤에 관한 다수의 작품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기원 후 3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무대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작품 요소이기도 하며, 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연구가 되고 있다. 이 당시의 연구에서는 위구르족의 선민들이 종교적인 신앙 변화와 관계없이 여전히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 여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많은 역사 문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기 382년 서진시대(西晉時期)에 이미 구자 악무가 성행하였는데, 특히 사발춤은 기교성(技 巧性)과 관상성(觀賞性)이 매우 높기 때문에 황실 귀족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아 황실을 위한 추는 춤이 되었다(위링 2002, 93). 중국 위구르족 사발춤 발전을 탐색하기 위해 고서 기록을 통해 중국 위구르족 사발춤의 시대적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발춤은 고대에는 사발소반 무(頂碗小碟舞) 또는 반자무(盤子舞)라고도 불렸다. 「진서(晉書)」권 23에 의하면:
조심스럽게 잔과 접시를 들고 뒤집었는데 한나라 때는 반무만 추다가 진나라 때는 잔과 접시를 모두 뒤집을 수 있었다(矜手以按杯, 反覆之, 此則漢世惟有盤舞, 而晉加之以杯柈反覆 之也)(곽무청 2015, 37).
사발춤은 이 시기에 접시이나 차완을 머리에 받치고 있지 않은 채 주로 손에 들고, 손에 서 반복하며 뒤집어서 퍼포먼스를 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진 태강년간(西晉泰康年间)에는 전국적으로 「진세녕(晋世宁)」춤이 유행했는데, 이 춤 에서는 사발과 접시 기능에 대한 가사 특징을 들 수 있다. 가사 내용 중 “나풀나풀(翩翩)” 은 움직임이 자유롭고 새가 가볍게 날고 있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것은 무용수들의 춤사위가 경쾌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형용하는 것이다. 퍼포먼스 시 좌중이 모두 사발을 들고 축사를 반복하며 진무제(晋武帝)의 천하통일의 공덕을 칭송하였다(정영락 2004, 56). 또한 「진세녕(晋世宁)」공연은 전문 공연과 자가 오락 공연으로 나눌 수 있다. 「진세녕(晋世 宁)」은 곡예가 포함된 공연으로 사발과 접시를 뒤집는 기술이 어려우며, 이는 숙련된 무용 수가 수행해야 한다(원가 2018). 이때 오락 공연 연회의 분위기를 위해 손님들이 공연자를 모방해서 자신의 사발이나 접시를 잡고 춤을 추며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이 「진세녕(晋世宁)」은 서진시대 궁중에서 유행하는 악무이자 관상성 및 기교성 또한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자기 오락성의 특징도 생기기 시작했 으며, 당시 이 무용의 사회적 기능은 관상성 뿐만 아니라 이미 사교 기능을 하고 있었다.
당나라(唐代) 시인 장호(張祜)의 시 「牛孛拏兒舞」는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있다: 보나아 (牛孛拏兒)는 서역에서 유명한 무용수였다. 그는 춤을 출 때 사발은 변화된 자세 속에서 항상 평온하게 유지하며 이런 고난도의 기교 춤을 관람하던 중에 중원 황제는 감탄했다(春 風南內百花時, 道唱梁州急遍吹。揭手便拈金碗舞, 上皇驚笑牛孛拏兒.이 시에서 당시 황실 의 사발춤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다.
청나라(清朝) 말기에 신장 일부 지역에서는 ‘정유등무(頂油燈舞)’가 유행했으며 특히 신 장 허톈(和田)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일본 서본원사파(西本願寺派) 소속 승려 다치바 나 즈이초의 「중앙아시아 탐험」에는 1911년 신장 허톈 지방에서 본 정유등무의 공연 장면 을 묘사하며 “해가 진 후 무용수들은 등잔 안에 있는 등심에 불을 붙인 다음 음악에 맞춰 춤을 춰서, 왜자보(矮子步), 돌기 등 동작을 했는데, 유등(油燈)을 머리에 받치거나 어깨와 손에 놓았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등잔불이 꺼지지 않고 등유가 넘치지 않는다. 이 문헌에 는 신장 허톈지역에서 성행한 ‘정유등무’가 키질석굴 17호 석굴의 형식적으로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때 소품에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 외에도, 무용수는 소품을 다시 머리에 받칠 뿐만 아니라 어깨와 손에도 올려놓는다. 등불은 불교 예술에서 어둠을 타파하고 광명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발춤의 문화적 유변학적 관점에서 볼 때, 유등을 소품로 사용하는 이러한 퍼포먼스는 불교문화의 교리에 더 가깝고 ‘불’과 ‘광명’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민간에서 이를 관습으로 보존하게 되었다. 동시에 배화교(Zoroastrianism)의 종교적인 신앙을 계승하여 후에야 점차 사람들의 세속적인 오락인 노래와 춤 공연의 형태로 발전했다. 위의 연구를 통해 벽화 중의 사발춤과 고대 문헌 중의 사발춤은 연관성과 구별이 있으며 불교문화, 배 화교문화 그리고 구자지역의 토착문화가 결합된 문화적 유변으로 인해 당시 사발춤은 서 로 다른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화했다.
고대 문헌에서 사발춤의 그림자를 발굴하는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비록 많은 고대 서적이 이미 발견되지 않았거나 파손되어 참고할 수 없지만, 기존의 고대 문헌에 대 한 연구를 통해 수천 년 동안 사발춤의 대략적인 발전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석굴암 벽화에 의한 사발춤의 기록이든 고대 문헌에 있는 사발춤의 기록이든 상대적인 조건하에 서 객관적으로 볼 때, 사발춤은 발전과정에서 왕영격 교수의 불교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객관적인 논점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3) 차 문화
신장 마이가이티현(麥蓋提縣)의 전통무용에서도 사발춤와 비슷한 「경차무(敬茶舞)」가 있다(손상 2019, 20). 경차무는 손님들에게 차를 들린 무용이며, 무용수가 물을 담은 그릇 을 손에 받치고, 무용수의 팔과 손목을 움직이거나 휘감는 동작을 하며, 구르고 돌리는 동 작을 하기도 한다. 동작은 계속 이어지지만 차완의 찻물은 계속 쏟아지지 않는다. 이런 연 기는 어느 정도 기교성이 필요하다.
이리하여 접시, 사발은 주인과 손님의 연결고리가 되었고, 사람들이 모여 접시, 사발을 들고 즉흥적으로 추는 춤은 지금의 일상생활에서의 사발춤이 되었다. <서역도지>라는 책 에는 ‘신장은 곡예예술이 고도로 발전한 지역이었고, 사발춤와 사마왈(samawer)은 비슷하 며, 사마왈은 사발춤을 바탕으로 곡예예술을 춤에 융합 즉, 곡예와 춤을 결합한 무용이’라 고 기록되어 있다(유통훈, 1909, 53).
한편, 위구르족의 차 문화를 통해, 또 새로운 무용 형식이 파생되었는데, 이는 사마왈이 라는 사발춤의 변형을 들 수 있다. 사마왈은 위구르어 음역(音译)이며, 찻주전자를 의미한 다. 사마왈은 남성무용이다. 찻주전자를 지름 40cm 정도의 원반 가운데에 놓고 주전자를 둘러싸고 8개의 차완을 얹은 뒤 이 원반을 머리에 받치고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다. 사마 왈을 출 때 머리 위의 소품은 무게가 10kg 가까이 나가기 때문에 난이도가 높고 남성만이 무용수가 된다(손상 2019, 21). 사마왈은 위구르족 다방에서 손님을 끌기 위한 퍼포먼스로, 키질석굴 38호굴에는 사마왈과 매우 유사한 벽화 이미지가 있다.
현재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사마왈 무용수는 쿠처 민간 예술가 투아디·아부도라이무(吐 尔地·阿卜杜热依木, 1959- )다. 그는 사마왈 제1대 무용수다.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 찻집 과 레스토랑에서 사마왈을 공연하며 손님들을 끌어모았다. 1950년대 신장 무용가 아지·라 합만(阿吉·热合曼, 1932- ) 쿠처에 가서 배우면서 다시 정리하고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는 데, 사마왈이라는 민속 예술이 전승되고 보존된 것이다(손상 2016, 23).
4) 무대 작품
신중국 건국 후 전국 각지에서 무용교육을 실시하게 됨에 따라, 위구르족 무용가 강바이 한·에메티(康巴爾汗·艾買提, 1922-1994)는 신중국 건국 이후의 위구르족 1세대 무용가이 자 위구르족 무용 전공교육의 창시자다. 1951년 서북예술대학 예술학과는 강바이한·에메 티를 학과장으로 초빙했지만, 무용 과정은 새로운 학과로 크게는 교육 시스템, 작게는 무 용 교재군이 공백이어서 아무도 개발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잘 아는 위구르족 무용, 발레 등을 강의 요강에 넣어 정규로 진행함과 동시에 엄격한 프로이를 목표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강바이한·에메티는 민간 사발춤 중에서 전통 위구르족 무용 동작 요소를 발굴,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사발춤 작품 내에서의 위구르족 무용 동작을 정리, 체계화시키는 작업에 도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초보적이지만 비교적 완전한 중국 위구르족 사발춤 체계를 정리함으로써 중국 위구르족 무용 발전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제자들에게 이를 정리하는 방법과 변화, 발전시키는 방법을 전수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가르침의 효과는 1980년대 이후 중국위구르족 무용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제자 재나보·사비티(再娜甫·沙比提, 1940- )와 해리청무·사적극(海麗倩姆· 斯迪克,1946- ) 두 사람이 사발춤 이후 발전과 교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사발춤을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강바이한·에메티는 사발춤 같은 위구르족 민간 무용 자료를 수집함으로써 현재의 위구 르족 무용의 교육체계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쿠차 지역의 위구르족 민속예술가인 이리(伊犁)지역의 위구르족 민속예술가에게 접시춤을 배웠다. 그다음 두 가지 춤의 장점을 흡수해 사발춤을 새롭게 통합하기 시작했다. 강바이한은 사발춤의 소품 선택에 있어 생활 용품을 사용했는데, 예를 들면 머리 위에는 차완을 네 개, 각 손에는 도자기 접시를 하나씩 들고, 검지, 중지, 약지 사이에는 젓가락을 끼우고 음악의 리듬에 맞춰 도자기 접시를 통해 표현한다. 민간의 기교와 동작을 개량 및 규범화하고, 사발춤에 제자리 돌기와 사선으로 돌아나가기를 포함해 춤의 기술성과 표현력을 높였다(모니제·모태리프 2018, 169). 결국 1950년 강바이한은 마오쩌둥과 같은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 사발춤을 공연하며 접견을 받 는 등(곽몽요 2021, 14) 현대사회에서 처음으로 사발춤을 무대에 올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장밍 2018, 76). 또한 강바이한·에메티는 발레의 형상과 위구르족 무용 동작의 인소를 결 합하여 ‘학원파’라는 새로운 위구르족무용의 장르를 창조하였다. 이외에도 강바이한·에메 티의 제자 중에서 배출한 수많은 무용 인재들은 이후 중국무용계를 주도하는 중추적인 역 할을 하는 핵심 인물들로 성장하였으니 이는 모두 오늘날 중국 민족 무용계에 한 획을 긋 는 매우 중요하고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20세기 초, 강바이한은 발레와 러시아 민속 무용을 교육받았고, 위구르족 무용의 여성 무용수들의 상체에 함축된 춤사위 방식을 유럽 무용 교육 시스템을 통해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우소선 2015, 36). 이러한 방식이 위구 르족 여성 무용의 장력과 표현력을 제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강바이한은 무용 수가 앞으로 살짝 숙이고 자태를 직립 자태로 바꾸면서 시각적으로 무용수의 체형을 어느 정도 드러내게 한다. 이러한 자태는 우아한 위구르족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직립 자태는 심지어 사발을 받치기에도 더 유리했다.
1955년 강바이한의 1세대 학생인 재나보·사비티(再娜甫·沙比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5회 세계청년학생친목회에 참석해 사발춤을 공연하였다. 위구르족 사발춤을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선보인 것이다. 당시의 공연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84년 신장 가무 단 안무가 왕소운(王小雲)과 확욱(霍旭)이 대형 고전악무 「무악구자정(舞樂龜茲情)」에서 새로운 위구르족 사발춤 작품을 선보였다. 구자 벽화와 관련 자료를 꼼꼼히 연구하고 쿠차 현지의 위구르족 민속무용을 깊이 공부하여 구자 악무의 특징을 곰곰이 따져본 이들은 벽 화에 그려진 사발춤의 이미지를 민간 사발춤과 결합해 새로운 「사발춤」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여러 무용가의 노력으로 무용교육 분야에서 위구르족 사발춤의 보호와 전승을 수 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대예술의 실천 분야에서의 위구르족 사발춤에 대한 혁신적 발전을 이뤄오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대가로는 강바이한의 3대 학생이자 신장 민족 무용가, 중국 국가 1급 배우 인 해리청무·사적극(海麗倩姆·斯迪克)를 들 수 있다. 위구르족 군무인 「사발춤」은 1982년 안무가 해리청무가 추었던 독무인 「사발춤」를 기반으로 하는데, 1997년 제7회 전국 소수 민족 무용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3인무로 개편됐다. 이후 군무(群舞)로 개편해 만든 사발 춤은 전통무용 문화의 당시 무대의 표현 방식이 되었다. 작품은 깊은 예술적 표현 없이 위구르족 민속무용의 전통 형식을 극한으로 미화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무대 위에 표현되 었다. 안무가 해리청무는 「사발춤」에 대한 탐색을 하던 과정 중에 무대 구도의 각도를 시 각적 단일화에서 다양화로 발전시켰다.
「사발춤」은 독무 단일의 ‘점(點)’에서 3인무로 구성된 최소 기반인 ‘면(面)’, 군무의 ‘진(陣)’ 에 이르기까지 된 과정을 볼 수 있다. 작품은 기세를 올려 대칭적이고 정연한 무대 구도를 바탕으로 무용수의 동작 속도, 동작 폭, 춤사위의 정확도, 표정까지 고도의 통일화를 요구한 다. 군무수로서 획일적인 동작 외에도 차완을 받치는 기술 및 돌기 기술에 대한 파악 정도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위구르족 전통무용 사발춤을 민간예술에서 현대무대 무용예술로 승화시켜 차완을 받치는 기술적 표현력을 강화하고, 더욱 난이도가 높은 제자리 돌기, 여섯 명이 동시에 원 돌기와 같은 기술동작을 추가했다. 해리청무가 안무한 작품 「사발 춤」는 북한 평양에서 열린 청년무용대회에서도 창작과 퍼포먼스 부문 금상을 받았다. 중국무 용가협회는 20세기 중국 민속무용의 고전적 작품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앞서 말한 내용을 종합하면 고대 벽화, 고서의 기록과 묘사를 통해, 사발춤이 고대 서역 에서 유행했던 무용이었음을 대략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사발춤이 처음에는 부처를 공양 하고 궁궐에 들어 황실을 위해 공연하다가 나중에는 세속사회 오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 상세계와 현실 세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발춤은 오늘날까 지 이어질 수 있었으며, 위구족의 대표적인 무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신장 무용수 들이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신중국 건국 후 전국 각지에서 무용교육을 실시하게 됨에 따라, 강바이한은 처음으로 서북예술대학 예술과 학과장으로 초빙되었다. 그녀도 신분을 바꾸어 무용수가 아닌 무용 교육자가 되었으며, 서북지역의 많은 무용인재들은 길러내었다. 1954년, 그녀는 신장 예술 학교에 가서 무용 교습을 계속하였다.
Ⅲ. 역사적 배경 속 위구르족 사발춤의 변천 요소 고찰
위구르족의 춤이 지닌 강력한 전통문화의 생명력은 다년간의 발전 과정에서 전승되는 힘이 되었다. 위구르족 사발춤은 고대사회의 사회종교 숭배, 봉건사회의 궁중무용, 근대사 회의 사교무용에서 오늘날 무대극장무용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의 과정 속에서 대대로 위구르족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창조하여 축적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따라서 위구르족 사 발춤의 수년간 발전은 다양한 혁신을 가져왔고, 다양한 사회문화 환경에서 사발춤의 변화 도 많은 복잡한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요소는 위구르족 사발춤의 종교, 민속 및 기예적 요소에 반영되었다.
1. 종교적 요소
위구르족 무용은 종교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종교문화에 따라 위구르족 사발춤의 퍼포먼스 형태와 사회적 기능에 다른 영향을 미친다. 위구르족 사람들은 현재 보편적으로 이슬람교를 신앙하고 있다. 위구르족이 샤머니즘, 마니교, 배화교, 경교를 신앙했지만, 이 종교들은 위구르족의 사발춤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종교는 불교 및 이슬람교를 들 수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가장 먼저 궁중 황실 귀족들 사이에 전파되었고, 상층 계급의 많은 의식 행사에서 사발춤은 인기 있는 공연 중 하나가 되었다. 구자 지역에 불교가 전래 된 후 민족 토착 문화와 융합하여 구자 지역에 전해진 민간 무용의 상당 부분이 불교문화 에 의해 물들어 있다.
키질 석굴벽화의 사발춤 이미지로 볼 때 벽화의 내용은 대부분 불교이야기를 위주로 하 며 벽화 속 인물의 의상과 장신구는 불교색이 뚜렷하고 인물 조형은 경건하며 태도가 침착 하고 내성적이며 불교문화에서 평온하고 자유로운 정신 이념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한 편으로는 천지만물에 대한 숭경과 신앙을 표현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무용수들이 사발 을 유등으로 바꿀 때 불과 빛에 대한 애정과 추구를 표현하였다. 오늘날에도 위구르족의 사발춤은 여유롭고 차분하며 내성적인 기질을 바탕으로 창작되고 있으며 불교문화의 그림 자를 띠고 있다. 소품 사용에 있어서 어떤 때는 음식 담은 사발이고, 어떤 때는 유등이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붓다를 공양하고 예찬한다는 뜻이다. 소품을 머리에 이고 팔꿈치에 얹 거나 손에 받쳐 드는 것은 부처에 대한 경외뿐 아니라 존경과 경건함을 더 많이 표현한 것이다.
10세기 말, 카라한 왕조(840∼1212)는 이슬람교를 신봉하기 시작했다. 서기 15세기에 이르러 이슬람은 현재 신장 지역에서 점차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전 국민이 신앙한 종교가 되었다.
840년 이후 이슬람교는 위구르족의 선민의 삶을 차지하게 되었고, 위구르족의 선민이 점차 이슬람교를 신앙하게 되었다. 이후 사발춤에도 점차 이슬람의 요소가 가미됐다. 예를 들면 무용수들은 공연할 때 머리에 몇 개의 사발을 넣어서 공연에 앞서 마지막 사발에 물 을 붓고, 춤이 끝나갈 무렵에 머리 위의 사발을 하나씩 떼어내고, 마지막 사발의 물을 이전 에 떼어낸 사발에 부어 물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한다. 코란(古兰经)의 많은 부분에서 빗물, 강, 바다와 샘물에 대해 언급이 된다. 알라(安拉)는 인간에게 물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고 알라에게 감사와 경외를 표하였다. 알라께서 주신 물은 대지를 부활시키고 생명을 왕성하 게 한다. 무슬림은 반드시 어느 곳의 물을 소중히 여기고, 오염으로부터 수원을 보호하며, 물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위구르족의 사발춤은 불교의 차분하고 단아한 춤사위와 이슬람의 물에 대한 존경심을 결합한 문화적 요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위구르족의 대표적인 전통무용으로 자리 잡고 있다.
2. 민속적 요소
위구르족의 사발춤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위구르족의 정신적 전통과 인문적 성격을 만 들어낸 것은 바로 농후한 민속 문화다.
위구르족 사발춤의 민속적 요소 전승성은 전승과정에서 전통문화를 사회와 시대의 갱신 에 지속적으로 적응시키고 새로운 시대환경에서 보다 광범위한 존재와 계승 가치를 태동 시킬 뿐만 아니라 시대 미적 요구에 따라 다양한 민족과 지역문화의 영향을 올바르게 보고 유익한 외래문화를 수용하고 참고하며 다양한 예술적 정수를 융합하여 전승과정에서 완전 한 전승과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위구르족 사발춤은 역사, 예술, 사회 등 다방 면의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 독특성과 대체할 수 없다. 위구르족 사발춤의 안정성은 춤의 연속 과정으로 반영되며 위구르족 춤 문화의 시대에서 오래되고 실제로 존 재하였다. 위구르족 사발춤의 초월성은 사회 환경과 같은 많은 요인의 변화에 따라 춤의 지속적인 발전과 혁신을 의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예술과 창작 주제의 관계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위구르족 사발춤이 한 역사적 단계에 서도 다른 역사적 단계로 넘어갈 때 필연적으로 많은 과거 문화의 소멸과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동반하였다. 위구르족 사발춤 어느 단계에서나 변하고 계속 확장되며 모든 시대에 는 새로운 요소가 있다.
위구르족 사발춤의 민속적 요소는 전승성과 안정성 및 폭넓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위구 르족 사발춤의 민속은 또 변이성이 있다. 민속은 생활문화이지 정적 문화가 아니며 고대 문헌은 일종의 기록매체일 뿐 주로 귀동냥과 언어 전신의 방법으로 인간과 세대 간에 전승 되고 있다. 변화무쌍한 생활 속에서 사발춤의 각 방면에 적절한 순응이 반드시 필요했고, 사발춤의 민속적 요소도 곧 변화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개인의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직업군, 지역군, 계급군을 포함한 집단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이는 민속의 지역성, 계급성을 나타낸다. 한 세대는 이전의 민속들을 계승하고 변화시키고 혁신할 수 있다. 위구르족 사 발춤은 이런 시간대의 변화 속에서 각 시기의 민속 시대성에 가지고 있다.
신중국 건국 이후 민족민간무용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무용가들의 지도적 방침 이 되었고, 원래의 민속무용을 바탕으로 각색한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정교 한 작품들은 50년대 중국 민족민간무용 창작은 복제하기 어려운 발전성을 다졌다. 이 시기 는 위구르족 무용, 심지어 중국 민족민속무용에 속에서 중대한 전환이며, 이는 전통 민족 무용이 어느 정도 민간 문화의 차원을 벗어나 정치적 사명을 담은 전문 문예 종사자가 장 악하는 새로운 형태의 춤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위구르족의 사발춤 창작은 1950년대에 이 미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격상되었다. 예술가의 창작기반은 민족민간무용 자체를 배우 는 데 그치지 않고 민족민간무용 전반의 생존환경으로 확대됐다. 강바이한·에메티와 그의 제자들은 민족민간무용 자체만을 개조하지 않고 더 넓은 민간생활에 깊숙이 들어가 예술 가의 눈으로 생활 속에서 무용화할 수 있는 요소를 추출하고 전통무용과 융합했다. 단순한 민간무용의 대물림을 넘어 창작의 영역으로 진입한 것이 분명하다.
3. 기예적 요소
사발춤은 위구르족의 거대한 춤 시스템의 지류로서 사람들의 삶과 감각 세계를 크고 풍 요롭게 했다. 위구르족 사발춤에 사용되는 사발은 도자기 사방으로 표면이 매우 매끄럽기 때문에 무용수들은 항상 평형을 유지해야 한다. 도자기 사발이기 때문에 여러 사발을 함께 놓으면 서로 부딪히고, 그릇끼리 부딪힐 때 나는 소리도 무용수들의 심리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한편으로 연습이든 공연이든 위구르족 춤을 출 때 여성 무용수는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는 점이 사발춤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공연할 때 위구르족 전통 편발 헤어스 타일로 머리를 다듬어야 하는데, 돌기 동작할 때 이 헤어스타일과 치맛자락은 관성을 형성 하고 무용수의 신체 통제력을 시련을 주다.
사발춤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기별로 소품이 조금씩 바뀌기는 하겠지만, 이를 머리에 받치고 춤을 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머리와 손에 있는 소품이 떨어지지 않도록 안무 자체를 완성하면서 돌기 기교 동작을 접목시켜야 한다. 사발, 유등, 병, 접시는 모두 위구르 족 사람들의 가장 일상적인 생활용품이다. 깨지기 쉬운 소품들을 머리에 이고 춤을 추는 것은 쉽지 않다. 위구르족의 사발춤 기예 요소의 미학적 형태는 기본적으로 ‘스릴러’, ‘우아 함’, ‘고난도’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러한 요소들은 사발춤에 어느 정도 곡예의 문화적 속 성을 갖게 한다. ‘기예성’은 사발춤 퍼포먼스의 본질적인 어휘로, 기술기교를 통해 관객에 게 춤의 본질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사발춤의 기술적 기교는 전체 무용 종류 중 독특한 퍼포먼스 방식이며, 그 특징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첫째, 사발춤은 기예성을 핵심으로 하는 춤이다. 무용수들은 퍼포먼스 과정에서 약간 민 족 풍격 된 춤 동작을 가지고 있으며, 민족 무용에서 필수적인 풍격의 특징을 반영한다(부 기봉, 부등룡 2004, 21). 하지만 위구르족 사발춤의 형식을 보면 춤 동작과 기예가 잘 융합 돼 있다.
둘째, 키질석굴 벽화에는 이미 무릎을 꿇은 자세, 서 있는 자세, 머리 위로 사발을 이고 어깨로 사발을 받치고 팔꿈치로 사발을 받치는 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고대 문헌에도 사발춤의 후속 발전에서 걸음에 대한 기록이 있고 나중에 돌기 기술형 동작이 개발되었다. 수년 동안 위구르족의 사발춤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발춤의 어려움도 점차 증가하고 있 으며, 이는 무용수들의 전문 기술과 심리적 자질에 대한 큰 시험이기도 하다(우소선 2017, 125).
셋째, 건국 이후 강바이한·에메티의 사발춤 재창작에 ‘뻗기’ 동작을 추가했는데, 강바이 한·에메티는 발레 교육을 받은 만큼 위구르족 사발춤에 발레의 ‘뻗기’를 넣어 춤사위를 길 고 우아하게 만들었지만, 이 역시 어느새 사발춤 퍼포먼스에 어려움을 더했다(우소선 2015, 18).
위구르족 사발춤의 기예적 요소는 기술성과 예술성이 어우러지는 일종의 상태다. 기술 적 특징만 가지고는 무용예술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기술성과 예술성이 고도로 융합된 위구르족 사발춤은 중국 민족 민속 무용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손상 2019, 22). 사발춤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기예 요소 중의 균형, 기술과 춤의 결합은 오랜 훈련이 있어야만 연기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위구르족 사발춤은 ‘예술성’과 ‘기술성’을 아우르는 고난도 춤이다.
Ⅳ. 결론
본 논문에서는 중국 신장지역 위구르족 사발춤의 형성 과정으로 본 춤 문화 원형의 요소 와 특성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위구르족 사발춤은 기교성이 높은 춤으로 오랜 연습이 필요하고 무용수에 대한 요구도 높아 비교적 누구나 할 수 있는 대중적인 춤이 아니다. 그러나 수천 년에 위구르족 사발춤 은 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사적 시기에 문화, 종교, 사회생활의 영향을 받아 예 술성과 기예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고난도 춤 퍼포먼스 형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계속 발전하고 있다. 벽화 속 사발춤은 정적이긴 하지만, 그 시기의 사발춤은 불교문화의 영향 을 받아 불교 신자들의 경건한 모습을 보여줬다. 고대 문헌에는 그림에 대한 기록이 없지 만, 위구르족의 사발춤은 공연 형식, 사용된 소품, 사발춤을 공연할 때의 현장 분위기, 심지 어 관객들의 사발춤을 본 후에 느낌까지 글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종교성, 민속성, 기교 성, 관상성이 모두 융합 있는 사발춤도 궁중 가무 공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이후 이슬람교를 신앙 된 위구르족 사람들은 사발춤 속에서 이슬람교 교리 내용 순결한 물과 무슬림의 차 문화를 융합하면서 사마왈과 오늘날까지 공연되고 있는 사발춤 작품을 발전시켰다.
최초의 위구르족 사발춤의 발생과 형성은 일상생활, 종교 신앙으로부터 형성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발전 과정에서는 서로 다른 문화적, 경제적, 생활방식의 차이로 위구르족 사발 춤 또한 이러한 배경이 바탕이 되어 각 시기 변천 과정의 표현 형태나 표현 특징에서도 공통점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위구르족 사발춤에서 사용되는 소품은 일상생활 용품에서 나온다. 초기 사발춤은 불교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지금도 위구르족의 사발춤은 불 교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발춤은 감상성이 높아 고난도의 춤이지만 수년간 발전·전승 해 왔다. 사발춤은 오신(娱神), 오인(娱人), 자오(自娱) 즉, 스스로 오락을 찾고 즐기는 등의 사회적 기능의 변화는 당시의 사회 환경에 의해 변화되었다.
신 중국 성립 이후의 위구르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합류되었으며, 위구르족 사발춤 이 전통문화가 바탕이 되어 민간무용들을 형성하였다. 무용에 내재 된 문화적 특징을 살펴 본 결과 위구르족 사발춤은 그 민족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형성된 생활의 일 부가 민간무용으로 발전이 되었으며, 역사적으로는 주변국가의 영향도 받게 되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발춤의 내용, 형식, 품격 모두 그 민족만의 특유의 형태로 이루어지게 되었 다. 뿐만 아니라 신 중국 성립 이후에는 국가의 정책과 제도에 따라 위구르족 사발춤이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고 대중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사발춤은 현대적인 무대화를 이루었고 무용교육이 진행된 것으로 보아 계승 및 발전이 된 것을 확인할 수 있 었다.
본 연구는 신장지역 위구르족 사발춤의 형성을 이해하고 역사적 변천에 관한 과정을 살 펴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재 중국에서는 전국적으로 위구르족 사발춤을 중점적으로 전파 및 교육하고 있기에 향후 중국에서의 민족민간무용의 발전은 지속적으로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는 긍정적인 추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연구가 중국의 타 소수 민족뿐만 아니라 타 국가의 민족민간무용의 보존과 발전 연구에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 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