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스페인 춤’ 전문가로 알려진 주리(본명: 주애선 朱愛善, 1927-2019)는 국립무용단의 첫 여성 안무가로 “한국에는 한국의 발레가 있어야 한다”(국립무용단 정기공연 프로그램 1964)고 주장한 인물이다. ‘한국적 발레’ 작품의 주제는 한국적 소재와 한국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한국적’으로 표현한다. 더불어 작품에 내재된 한국적 특성을 통해 한국의 정서와 문화를 들여다 볼 수 있다.
한국적 소재의 발레 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정옥희(2005)는 ‘한국적 발레’의 특성을 민족 적 정체성의 맥락에서 논의하고, 김경희(2008), 김지연, 제임스전(2014)의 연구에서는 국 립발레단에서 공연되어진 ‘한국적 발레’ 작품들에 나타난 한국적 특성 및 세계화 과정의 흐름을 고찰한다. 제임스전, 양승화(2012)는 1980년대 문화정책을 중심으로 한국적 발레 작품을 분석한다. 주리에 대한 연구는 김윤선(2009)과 김지연(2009)의 연구에서 주리의 구 술/채록을 통해 주리의 생애와 작품 세계관을 탐구한다. 본 연구의 시기적 범위는 1955-70년대이고, 춤의 장르 중 한국 발레사의 흐름으로 제한한다. 이 시기는 주리가 1955년 11월 시공관에서 제 1회 주리 무용 발표회를 시작으로 1970년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의 국내 활동 기간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한국전쟁 이후 혼란한 사회 정치속에서 각 장르의 춤들이 전문성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때로 이 당시 안무된 발레 작품 에 한국적 소재를 내포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주리의 「푸른 도포」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안무가들의 작품에 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한국적 발레의 특성을 사회적 맥락에서 탐구하고, 주리가 「푸른 도 포」에서 투영하고자 한 한국적 특성을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제기한다.
첫째, 그 당시의 안무가들은 왜 ‘한국적인 것’을 강조하였는가
둘째, 주리는 서양의 소재인 「푸른 도포」 작품에 ‘한국적인 것’을 어떻게 융합시켰는가 본 연구를 하기 위하여 관련된 서적들과 프로그램, 주리의 인터뷰 기사 자료 등을 중심 으로 문헌 연구를 하였으며, 추가로 호세리와의 면담을 진행하였다. 호세리는 주리의 남편 으로 그와의 면담은 7월 24일 11시-13시 호세리가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진행되었다. 본 연구가 한국적 발레의 사례 연구로써 의미를 갖고 이를 토대로 다각적인 연구가 이루어 지기를 기대한다.
Ⅱ. 한국적 발레의 발생 배경
본 장에서는 주리가 활동하던 1955-70년대의 발레 작품에 나타나는 한국적 특성을 고 찰하기 위해 한국에서 한국적 발레가 등장한 1920년대부터 주리가 1970년 스페인으로 유 학을 떠나기 전까지의 한국적 발레의 전개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최초의 ‘한국적 발레’의 시도는 1928년 ‘배구자 고별 음악 무도회’에서 발표되었던 창작 무용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초보적인 발레의 기법과 한국 춤사위를 섞어서 애국적인 또는 한국적인 발레를 지향한 작품으로 최초의 ‘한국적 발레’ 작품으로 간주된다(김경희 2008, 4). 이후 조택원은 「학」, 「부여회상곡」을 통해 ‘그랜드 발레’라는 명칭으로 발레를 한국적 소재에 접목하였다(김호연 2016, 234). 이렇게 시작된 한국에서의 발레는 진수방을 비롯하여 일본에서 수학한 무용가들의 공연 활동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 조택원의 제자인 진수방은 유학 이후 국내에서 독창적인 작품을 발표하였고, 이후 정지수가 귀국하여 조선 악극단의 상임 안무가로서 조선악극단의 일원이었던 주리에게 발레를 사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통해 본격적인 발레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진수방, 정지수, 한 동인은 합동공연으로 1946년 3월 23-24일에 국제극장에서 해방 이후 첫 발레 공연으로 무용계의 주목을 끌었다. 이후 ‘조선무용예술협회’의 창립공연으로 1946년 8월 5일부터 3 일간 국도극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공연에서 한동인은 「비단거미」, 정지수는 「화랑」 그 리고 「원무곡」을, 진수방이 「아리랑 회상곡」을 발표하였다(김경희 2008, 5;김호연 2016, 236). 이들 작품 내용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제목으로 미루어보아 한국적 정서를 표현 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49년 한동인이 ‘서울발레단’ 4회 공연에서 안무한 「꿩」 을 한국 최초의 발레극으로 평가된다. 「꿩」은 한국 전설을 바탕으로 성두영이 작곡하고, 허집이 연출을, 한동인이 안무한 한국 최초의 발레극으로 소품이 아닌 전막에서 한국적 발레 작품을 시도하고자 했던 첫 작품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김경희 2008, 5).
195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및 군사정부 등 사회정치적 혼란 속에서 1960년대 부터 박정희 정부에 의해 근대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이 시작되었고, 이는 학자들에 의해 한국문화, 한국인의 주체성 찾기가 제기되었다(김영희, 김채원, 김채현, 이종숙, 조경 아 2014, 393). 국가의 문화정책은 좁은 의미에서 예술정책으로, 이 시기에 제정된 공연법 (1961년), 문화재보호법 (1962년)등의 문화예술관계 법률 중, 문화예술진흥법(1972년)은 예술 분야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점에서 제정되었다 (오명석 1998, 131-133). 한국전쟁 이후 많은 무용인들이 월북 및 행방불명되는 등 혼돈 의 시기였지만 남아있는 무용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생적 노력으로 바쁘게 활동하기 시작 했다(김호연 2016, 246).
전쟁 시에도 피난지인 부산에서 송범, 이인범, 주리가 주축이 되어 「왕자와 백조」를 발 표하였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이인범이 ‘서울발레단’을 재건하고 1954년 진수방의 한국 발레예술 무용단, 1955년에는 이인범의 서울발레단, 1956년에 임성남의 임성남 발레단, 1959년에는 조광의 아카데미발레단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임성남, 송범, 주 리의 한국발레단이 조직되어(김영희, 김채원, 김채현, 이종숙, 조경아 2014, 391) 활동하다 가 1962년 국립무용단이 창단되면서 이에 대부분 흡수되거나 해산되었다. 문화적 통합을 위하여 1962년 2월 6일 국립무용단이 창단되고,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결단식에서 초대단장으로 임성남 부단장으로 김백봉, 송범 단원으로 강선영, 김문숙, 이월영, 이인범, 정인방, 주리, 진수방 등의 총 13인으로 출범했다(김태훈 2000, 482). 하지만 1966년 12월 에 개편된 국립무용단은 단장 임성남을 포함하여 단원 송범, 김진걸, 강선영, 김문숙, 주리 등 6명으로 감원되었다(김경희 2012, 35). 이후 1973년 국립무용단에서 국립발레단이 독 립해나갔다.
국립무용단은 1970년까지 12회의 정기공연에서 매회 작품을 2-3개씩 발표하였고, 민족 형식에 대한 ‘코리언 발레’의 고민이 지속되었다(김영희, 김채원, 김채현, 이종숙, 조경아 2014, 397). 국립무용단에서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고자 창작된 ‘한국적 발레’는 1962년 송범이 「영(靈)은 살아있다」를 발표하면서 “민속 바레”라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김경희 2008, 7). 1964년 「푸른 도포」의 대본을 쓴 황휘와 안무를 맡은 주리는 “코리언 발레”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며 “발레, 클래식의 기교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민속적인 소 재에 의한 한국적인 발레”라고 소개하였다(국립무용단 정기공연 프로그램, 1964). 「허도령 」의 대본 작가 이두현과 안무를 맡은 임성남 역시 “한국무용과 발레의 융합에서 만들어지 는 새로운 기교의 창조”라는 의미에서 “민족 발레”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국립무용단 정기공연 프로그램, 1964). 1965년 제 6회 정기공연에서 발표된 송범의 「멍든 山花」는 최 창권 음악으로 산속 우물가 풍경에서 벌어지는 소박한 시골 남녀와 서울 양반, 그리고 그 가 데리고 온 기생 사이에 얽히는 애정 문제를 주제로, 우리나라 정서가 가득한 코리언 발레를 수립하고자 하였다(김경희 2008, 11). 1966년 제 7회 정기공연에서 발표된 「아! 1919」는 한국무용과 외국무용이 혼합된 작품이었다(김경희 1999, 18). 1967년 제 9회 정 기공연에서 임성남과 송범은 한국 창작 발레 작품인 「까치의 죽음」과 「종송(鍾誦)」을 각각 안무하였는데 “고유한 우리 전래의 고전적인 소재”를 주제로 “민족색 짙은 우리만의 한국 적인 새 발레를 창조하고자”하였다(김경희 2008, 11). 임성남은 공연 프로그램을 통해서 민족 발레 대신 “한국적 창작 발레”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민족 발레”에서 “한국적 창작 발레”로 용어를 바꾸어 사용하였다(국립무용단 정기공연 프로그램, 1967). 정리해보 면, ‘한국적 발레’라는 용어는 “민속 바레”, 코리안 발레”, “민족 발레”, “한국적 창작 발레” 순으로 명칭이 변화하며 ‘한국적 발레’를 구축하고자 (김경희 2012, 32) 진지하게 논의된 결과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 정착되었다. 한국적 소재로 발레와 한국무용의 융합에서 만들 어지는 새로운 움직임을 창조하여 민족적 바탕과 배경을 강조하여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 여 우리만의 발레를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한국문화를 소개하려는 의식적인 노력 의 결과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주리의 「푸른 도포」에 나타나는 한국적 발레의 특성에 대해서 논의하고 자 한다.
Ⅲ. 「푸른 도포」에 나타난 한국적 발레
1. 주리의 예술 활동
주리의 본명은 주애선으로, 주리는 스승인 진수방(陳壽芳, 1921-1995)이 붉은 꽃이라는 의미로 지어준 예명이다(홍지승 2021). 주리는 ‘최승희처럼 되어라’는 아빠의 권유에 혼자 일본으로 건너가 최승희 무용학원에 갔으나 그 당시 세계공연 중이던 최승희를 만나지 못 했다. 이에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한국인으로 알려진 마스다 다까시의 발레 연구소에 서 6개월 정도 발레를 배웠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동인, 정지수가 개설한 발레연구소 밖에 없었기 때문에, 주리는 일본의 마스다 다까시 발레 연구소에서 정지수를 마주쳤던 인연으 로 정지수의 발레연구소를 찾아가 발레 수업을 계속 이어갔다(김윤선, 김경희 2011, 30-31). 그러던 중에 미국에서 발레를 배우고 귀환한 진수방을 알게 되었고, 진수방의 첫 제자가 되었다. 그녀는 진수방의 조교를 하면서 클래식 발레를 배울 수 있었다. 이후 진수 방은 도미하고, 1953년 ‘주리 발레 연구소’를 개설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진수방은 일본의 가와까미 스즈코와 스페인무용의 권위자로 러시아인 크리아스 노바에 게서 스페인 무용을 배웠기 때문에(김윤선 2008, 18; 진수인 1999) 주리에게 발레뿐만 스 페인 춤도 가르쳤다. 하지만 발레에 빠져있던 주리는 스페인 춤 수업시간에 피아노 반주자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훗날 주리는 “선생님 걸 좀 잘 배워놀걸..” 이라 회고하였다(문애령 2007, 51). 이후 진수방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주리는 송범을 만나 주리가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까지 송범· 주리무용 연구소를 운영하며 주리는 발레, 송범 은 한국무용을 가르쳤다(이찬주, 황희정 2017, 82).
송범은 공연 때마다 주리에게 스페인 무용을 꼭 하라고 제의하였고 주리는 진수방에게 배운 작품들 중 「카르멘」을 재안무하여 관객의 큰 호응을 받게 되었다. 1969년 12월 23일 명동 시공관에서 한국무용협회 주최로 열리는 공연에서 주리가 안무한 「아모르」라는 작품 으로 공연하게 되는데, 이때 관람한 스페인영사 부인의 권유로 스페인 유학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김윤선 2008, 23). 그리고 다음 해인 1970년 한국인 처음으로 스페인 마드리드 왕 립무용학교에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하게 되었다. 마드리드에서 주리는 ‘스페인 음악무용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스페인 학생들을 지도하며 많은 공연을 하였다(호세리 2009). 주리 는 스페인에서 공연할 때 스페인 무용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정서에 알맞게 재구성하여 보급하였다. 주리의 남편인 호세리에 의하면 스페인에서 활동 당시 우리나라 아리랑 음악을 전주에 넣고 발레를 응용한 스페인 무용을 안무하여 공연하였다고 한다(호 세리 면담 2023, 7월). 주리의 한국적 정체성이 담긴 춤에 대한 애정은 국내를 떠난 스페인 에서도 나타났다. 스페인에서 활동 당시 한국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아 국내에서도 공연을 하였다. 주리는 여러 차례의 국내 공연에서 한국 관객들의 열정적인 반응을 느끼게 되어 30여 년간의 스페인 생활을 접고 1999년 귀국하여 ‘스페인 음악 무용 아카데미’를 창설하 여 운영하였다.
주리는 1955년부터 1970년 스페인 유학 전까지 4회의 개인발표회를 비롯하여 총 14편 의 한국적 소재를 담은 작품을 안무하였다. 주리가 한국적 소재로 창작 발레를 의도했던 이유는 전통 클래식 발레는 영원불변한 것으로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한국 창작 발레들 은 그 당시 사회, 문화적인 것을 대변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떄문이다 (주리 인터뷰 재인용 김지연 2009, 42). 주리는 1963년까지 총 4회의 걸친 무용 발표회를 개최하면서 「가야금과 민요를 위한 바리아숑」, 「로맨틱 조곡」 등 총 11편의 작품을 안무하 였다. 제4회 무용 발표회에서 선보인 「가야금과 민요를 위한 바리아숑」 작품은 한국적인 발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주리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가야금 변주곡을 바탕으로 클래식 발레의 테크닉과 한국적 움직임을 혼합하여 안무한 작품이다. 의상은 반팔 저고리와 클래 식 튜튜를 입었으며, 발레슈즈는 발가락 부분을 위로 올라가게 변형하여 코슈즈처럼 만든 슈즈를 신고 춤을 추었다(김윤선 2009, 37). 1960년 주리는 임성남, 송범 등과 함께 한국 발레단을 창단하였으나, 창단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산되었다. 그 후 주리는 1962년 2월 각 무용 분야에서 제각기 창작 활동을 해오던 무용가들과 함께 중앙 공보관에서 열린 ‘국립무 용단’ 창단에 참여하였다(김지연 2006, 43). 국립무용단의 제 1회 공연은 총 3부로 구성되 어 있었으며, 이때, 주리는 송범의 안무 작품인 제 2부 「영은 살아있다」에 출연하였다(김경 희 1999, 53).
주리가 국립무용단에서 활동 당시 안무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푸른 도포」(1964), 「무희 타이스」(1965), 「론도 · 카프리치오」(1966) 그리고 「스위트 에스판요라」(1966)가 있다(이 찬주, 황희정 2017, 82). 「푸른 도포」는 제 4회 국립무용단 정기공연 작품이었고, 「무희 타이스」는 제 6회 국립무용단 정기공연 작품으로 아나톨 프랑스의 원작 「무희 타이스」를 무용화했다(김경희 2012, 32). 제 8회 국립무용단 정기공연 작품이었던 「스위트 에스판요 라」에서 “정열적인 스페니쉬 선율에 클래식 발레의 기교를 갖추어 미를 형성”하고자 했다 (김경희 2012, 34; 김윤선 2008, 22). 주리는 움직임도 서양의 발레 테크닉에 우리춤의 전통 춤사위를 함께 적용했다. 예를 들어 손가락을 위로 올려 팔꿈치를 들어 올리는 동작 과 저고리 고름을 잡는 손가락의 움직임, 발끝이 아닌 발뒤꿈치로 시작하는 동작, 그리고 발레의 테크닉 위에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무거운 하체의 움직임 등과 같이 우리 전통춤에 나타나는 춤사위를 삽입시켰다(김윤선 2008, 42). 이처럼 주리는 서양의 발레테크닉 위에 우리의 전통 춤사위를 함께 접목하였다.
2. 「푸른 도포」에 나타난 한국적 특성
1964년 국립무용단 제 4회 공연은 주리 안무의 「푸른 도포」와 임성남 안무의 「허도령」 이 발표되었다. 「푸른 도포」는 황휘의 대본과 최창권의 음악으로 주리가 안무하고, 박용구 가 연출을 맡았다(제 4회 정기공연 팜플렛, 1964). 「푸른 도포」는 「허도령」과 같이 우리나 라에서 발표된 무용 작품들 중 처음으로 연출이라는 역할이 주어졌던 작품이다(이찬주, 황 희정 2017, 82-86). 「푸른 도포」는 스페인의 설화 「삼각모자」에서 영감을 얻어 안무한 한 국 창작 발레이다. 「삼각모자」는 1960년 진수방 발레연구소에서 스페인 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일본 서적에서 「삼각모자」를 발견하고, 황휘 선생에게 번역과 대본을 의뢰하 여 안무를 하게 된 작품이다(고석림 1999). 주리는 「삼각모자」가 서양에서는 권위의 상징 이지만 한국적 정서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양반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푸른 도포」라는 제목으로 한국화를 시도하였다(주리 인터뷰 재인용 김지연 2008, 50; 고석림 1999). 이를 통해, 제목에 당시 일반 평민들은 흰색 옷을, 양반들은 푸른색 도포를 입은 시대상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연구자는 처음 작품명을 접했을 때, 「푸른 도포」로의 의역은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이 우리나라 전통 의상인 도포를 입은 모습을 묘 사하기 위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푸른 도포」는 총 4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물레방아간 아내는 마을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으로 호색가인 원님은 아름다운 물레방아간 아내를 온갖 수단으 로 농락할 기회와 구실만을 찾는다. 그러다가 몰래 방앗간 주인에게 누명을 씌워서 하옥을 시키지만 아내는 번번이 구애를 거절한다. 원님은 아내를 강가로 유인하여 겁탈하려 하지 만 아내가 원님을 뿌리치고 밀치다 강가에 빠뜨리고 만다. 봉변을 면한 아내는 집으로 도망 쳐가고 원님은 물에 젖은 푸른 도포를 말리려고 나무 위에 걸쳐두고 잠이 들게 된다. 거의 같은 시간 물레방아간 주인은 옥에서 탈출하여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오다 나뭇가지에 걸 려있는 푸른 도포를 발견하고 몰래 입고 마을로 돌아온다. 잠에서 깨어난 원님은 자신의 푸른 도포가 없어지고 그 옆에 버려진 옷 하나를 주워입고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 사람들은 평민복을 입은 원님을 탈옥한 죄수로 착각하여 옥으로 끌고 간다. 물레방아간 주인과 아내 는 다시 만나 평화로운 옛 모습으로 돌아간다(국립극장 1964; 고석림 1999). 주리는 팜플 렛에서 “발레 기교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민속적인 소재에 의한 코리언 발레를 시도하고자” 하였다고 밝히며, 이는 한국적 발레를 구축하고자 하는 안무 의도가 전해진다.
「푸른 도포」에 관련된 사진은 국립극장 공연자료실 내에서만 열람이 가능했으나 실상 「푸른 도포」가 아닌 「허도령」의 공연 사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푸른 도포」에 관한 기사와 연구논문을 토대로 「허도령」이 아닌 「푸른 도포」의 사진임을 확인할 수 있었 고 사진 속 의상을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마을 사람들로 출연한 남성 무용수들의 의상은 하의로 타이즈를 입히고 상의에는 반소 매 고름 저고리를 입었다. 여성 무용수들의 의상은 가벼운 천을 소재로 한 긴 치마와 고름 같이 긴 리본이 달리 상의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서양무용에서 한복의 무대 의상화를 이 룬 노력이 보인다(고석림 1999). 특이한 점은 토슈즈가 아닌 버선 모양의 슈즈를 신고 있 었다. 문헌을 확인해보니 여성 무용수들의 의상은 흰색 치마와 팔이 없는 흰색 저고리에 하얀 고름을 달아 한국적 느낌을 나게 하였고, 흰색 코슈즈와 검정색 코슈즈를 신어 흰색 고무신과 검정 고무신을 연상케 하였다(주리 인터뷰 재인용 김윤선 2009, 43).
「푸른 도포」의 무대 배경은 무대 뒤로 강이 흐르고 무대 왼쪽에는 초가집이 있으며, 무 대 중앙에는 물레방아가 세워져 있다(김윤선 2009, 44). 이러한 무대 미술은 그 당시 우리 민족의 소탈한 생활, 삶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 음악은 최창권에게 작곡을 맡겼는데 주리는 최창권의 음악으로 인해 작품의 극적 감동을 더 해주었다는 증언을 했다(고석림 1999). 최창권은 1963년 국립무용단의 제3회 공연에서 민속무를 현대화시켜 양악과 국악 의 조화를 살린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전민성,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는 것으로 보아 다 음 해인 1964년 제4회 공연 「푸른 도포」에서도 서양음악과 한국음악을 접목하여 작곡하지 않았을까 사료된다.
「푸른 도포」는 서양 문학을 각색하여 한국적 소재와 분위기 연출이라는 당시로서는 획 기적인 시도였으나 단 1회의 공연으로 단절된 것이 아쉽다. 고석림(1999)은 당시의 공연평 이나 공연에 관한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논하는 것은 어렵다고 평한다. 주리의 「푸른 도포」에 나타나는 ‘한국적인 것’, ‘한국적인 특성’은 한국적인 소재, 전형적인 시골 마을 배경, 한복 의상등을 통해 한국적 정서와 감정을 구현한다.
Ⅳ. 결론
본 연구는 주리의 「푸른 도포」가 안무된 1964년 전후인 1955-70년까지로 제한하고, 그 시기에 활동하던 안무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한국적 발레의 특성’을 사회적 맥락에서 탐구하였다. 이를 통해 주리가 「푸른 도포」에서 투영하고자 한 한국적 특성을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1955-70년은 한국전쟁과 군사정권의 영향으로 사회 정치적 혼란 속에 한국문화 와 한국인의 주체성 찾기가 안무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 에 소재, 의상, 움직임뿐 아니라 사상이나 감정에서 의도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요소로 두 고 안무했을 것이다. 또한 국립무용단은 정부의 지원을 받는 유일한 ‘국립’ 단체였기 때문 에, 안무가들이 정부의 문화개혁을 내면화하면서 우리나라 전통에 대한 이미지를 각인한 것이 작품에 투영되었을 것이라 사료된다.
둘째, 주리가 스페인 설화 「삼각모자」를 각색하여 만든 「푸른 도포」는 한국의 설화, 시, 민화, 전설 등의 바탕이 되는 민속적인 소재와 한복과 발레 타이즈의 조합을 이룬 의상, 한국적인 주제에 따른 한국 음악과 서양 음악 사용 그리고 한국 춤과 서양의 움직임이 접 목된 형태 즉, 한국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 융합된 형태로 한국적 특성을 드러낸다. 원작인 「삼각모자」를 직역하면 ‘갓’일 테지만 주리는 제목에서도 한국적 정서를 생각한 것이다. 의상과 움직임 역시 버선 모양의 슈즈 및 한복 모양의 상의와 뒤꿈치부터 내딪는 발디딤 등 한국적인 것을 반영하고자 하는 주리의 세심한 노력이 엿보인다. 이는 주리가 “발레 기교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민속적인 소재에 의한 코리언 발레를 시도하고자”한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주리가 「푸른 도포」를 안무하던 당시의 작품 제작은 안무와 연출을 동시에 겸하는 경우 가 대부분이었으나, 주리는 대본, 음악, 연출을 전문가에게 의뢰하였다는 점에서 본인은 안무에만 집중하는 전문성을 나타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만약 송범, 임성남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주리가 스페인으로 유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 무용 역사는 어떻게 기 록되었을까? 주리가 국립무용단의 첫 여성 안무가이자 창단 단원으로서 서양의 주제에 한 국적 특징을 가미하여 동서양을 무용의 영역에서 융합한 것의 재조명은 현대 예술사적으 로 의의가 있다. 특히 본 연구는 무용사의 시대 구분에 대한 표면적인 담론보다는 동시대 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고민을 통해 현재 구축된 무용사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