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19세기 이후 전통음악 분야에서 기악 독주곡으로 가장 먼저 꽃 피운 것을 꼽는다면 산 조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전남 영암 출신인 김창조(金昌祖, 1865-1919)에 의해 만들어 진 가야금산조를 시작으로 각 악기마다 명인들에 의해 여러 갈래의 허튼가락이 만들어졌 고, 다양한 연주 활동 속에서 그 개념과 구조가 다각적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아 쟁 산조는 다른 악기보다 늦게 생겼으나 산조아쟁이라는 악기 개량을 통해 장르와 기능이 확대되고 전문화 되었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 의미가 깊다. 게다가 무용음악과 여러 음 악적 장르의 확장을 위해 산조아쟁이 개량되고, 이에 다양한 표현을 위해 철아쟁이 고안된 점은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따른 전통음악의 확장 가능성으로서 연구 가치가 있다.
산조는 근대 이후 여러 장르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예술적 성장을 거듭하였다. 이는 가무악의 총체적 결합 속에서 다양한 주법과 선율, 장단 등 공통된 음악 어법이 보편화되 면서 활발하게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1960년대 이후 대학에서 국악과가 생기고 전공 혹은 입시를 위한 교육 경향이 생겨나면 서 산조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여러 장단점이 발생하였지만 그중 자유로운 즉흥성과 개성 이 돋보여야 할 산조 장르의 특성이 정형화되고 악보화되어 연주자들의 기량과 음악성이 획일화된 면모가 하나의 문제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한국 전통음악어법이나 음 악 창작의 원리를 서양식 음악 교육의 관점으로 풀어내었다는 점에서도 답습의 원인을 찾 을 수 있다. 이러한 쟁점은 전통 계승과 창작 방법에서 원형의 가치를 다시금 돌아보고 그 본질에 대한 심층적 가치를 살펴야 한다는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아쟁 연주는 아직 즉흥 가락이 자료로 남아있고 악기 특성상 아쟁과 가야금의 특징을 모두 포괄한다는 점에서 산조에 대한 전승과 동시대적 생산성을 위한 논 의로 가치가 높다. 먼저 한국 전통 악기 중 근대에 개발한 산조아쟁은 무용음악을 다양하 게 만들었던 박성옥(朴成玉, 1908-1983)에 의해 고안되었다. 이후 다각적인 실연을 통해 무대화되었고, 이후로도 다양한 류파의 아쟁산조가 형성되면서 활발하게 전승되며 독주악 기로서 자리 잡았다. 반면 철아쟁은 극이나 무용음악에서 즉흥 연주로 많이 쓰였으나 산조 아쟁 만큼 전승이 많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철아쟁은 가야금에서 아쟁으로 개량된 것에 서 역으로 아쟁에 철줄을 얹고 다시 가야금 주법화한 개량 악기로 가야금과 아쟁의 주법이 나 음악 어법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어 당대 최고 명인들이 다루었던 악기이다. 이는 아쟁 의 선도자였던 윤윤석(尹允錫, 1939-2006)이 개발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소장한 악기와 아 쟁산조 음반을 첫 기록물로 살필 수 있다(이기선 2021, 68). 이후 철아쟁은 악기 제작이 평준화되지 않았다는 점과 주법의 특징상 다루는 연주자들이 많지 않아 전승이 지속적으 로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운 실정이다.
철아쟁에 대한 그동안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이혜진(2010)은 철가야금이 생겨난 배경과 연주된 기록과 자료들을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가야금과 다른 철가야금의 무용음악에서의 효과적인 사용의 흔적을 밝혔다. 그 중 윤윤석이 연주한 기록 중에 철가야금 외에도 철아 쟁을 고안한 기록이 있는데 피아노 줄을 얹어 98년 KBS 한국의 명인 방송에서 연주한 것 을 밝혔다. 윤서경(2020)은 윤윤석의 활동 및 이력의 자료를 정리하고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윤윤석이 만든 철아쟁의 구조 및 제작 과정, 그리고 현재 제작되고 있는 악기와의 차이점 등을 밝히고 명인의 예술성과 철아쟁산조 가락을 분석하였다. 이기선(2021)은 윤윤 석의 인물 연구 및 음악활동, 악기(철아쟁) 제작 등을 소장 자료 및 주변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매우 상세하게 밝혔다. 윤윤석의 기록과 예술성이 공인된 자료보다도 구전 구승 된 사례가 많은 만큼 정확한 사실들을 객관적 기록을 통해 밝히는 중요한 자료들이 많다. 여 기에 아쟁 산조 특징 외에도 철아쟁산조의 특징을 가야금과 아쟁 산조의 선율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분석하였다.
이렇게 선행 연구에서 알 수 있듯 철아쟁에 대한 연구는 주된 연구로서 본격화 되기보다 는 가락 분석이나 짧은 소개 등 지엽적인 연구에 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철아쟁은 전통의 창조적 계승의 의미가 있고 긴 여음과 화려한 가락을 통해 무용이나 창극의 반주로 도 가치 있음에도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윤윤석을 통해 이루어진 철아쟁의 생성과 그 확산 양상을 살피고, 철아쟁의 연구 및 전승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윤윤석의 철아쟁 연주 기록 (신현식 직접 채록 및 소장, 1996-1998)과 이를 계승한 윤윤석제 신현식류 철아쟁산조 ‘시 우’ 연주 자료를 분석하여 본질과 변용의 가치를 찾아볼 것이다.
이처럼 철아쟁의 온전한 계승과 독자적인 철아쟁산조 완성에 대한 당위성을 밝히고 전 통을 동시대적 담론을 담아 어떻게 창조적 계승을 하는지 실제적 양상 속에서 전통계승의 전범(典範)으로 의미를 찾고자 한다.
Ⅱ. 산조아쟁과 철아쟁의 탄생과 전승
1. 무용과 음악의 영향관계
철아쟁 탄생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아쟁의 탄생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아쟁은 다른 전통악기들에 비해 역사가 짧고, 개량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 은 소아쟁의 탄생과 무용음악의 창작 과정이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소아쟁을 창시한 인물은 박성옥이란 인물로 음악 창작은 물론 안무 능력도 뛰어나 전통음악의 창조적 계승 과 무대 공연을 위한 춤과 음악 작품 등 다양한 레파토리 개발에 힘썼다. 널리 알려진 무용 꼭두각시 같은 경우 박성옥이 리틀엔젤스 어린이 무용단 초기에 안무한 작품이다. 그는 전남 목포 출생으로 원래 서양음악을 공부하였으나, 전통음악인 ‘산조’에 매료되어 전통음 악에 입문하였고 여러 악기를 잘 다루었는데 그 중 가야금을 특히 잘하였다. 박성옥은 1960년대 문화사절단으로 세계무대로 활약하던 리틀엔젤스 어린이예술단의 초기 레퍼토 리 작품(부채춤, 장구춤, 농악, 강강수월래, 꼭두각시, 시집가는 날, 무사놀이 등)들을 만들 고, 신무용의 창시자 최승희, 김백봉, 강선영, 조택원 등 여러 무용가의 음악을 맡으며 작 곡, 연주, 음악 감독, 악기개량, 안무지도 등 다방면으로 출중한 실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먼저 신무용에 앞장선 최승희(崔承喜, 1911-1969) 무용단의 악사로 활동하면서 무용음악에 새로운 음향효과를 주기 위해 여러 전통악기를 개량해서 사용했는데(이혜진 2010), 1942년 무용음악의 효과음을 위해 산조아쟁을 만들고 음향적 효과를 위해 가야금 몸통에 명주실 대신 철줄을 얹어 철가야금을 제작하였다. 그 외에도 양금에 페달을 제작하 거나 가야금 줄 수를 늘려 14현으로 개량하는 등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하였다. 그는 비록 서양음악전공이었으나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공연 다니면서 한국 전통예술의 정체성이 드 러나는 작품들을 만들어냈고 음악에서도 전통음악의 색깔을 더 돋보이게 하는 형태의 전 통악기 개량을 추구하였다. 본인이 직접 안무와 음악 창작을 두루 다 할 줄 알기 때문에 어떤 음색과 효과가 적절할지를 잘 알았던 예술가이다. 그 과정에 관해 궁중무용의 명인으 로 알려진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성옥이 아쟁을 개량하게 된 동기도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아쟁은 원래 찰현 악기로 궁중 악 계통에서만 전용했고 민간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을 아악부 연주에서 본 그가 아쟁의 특성과 장단점을 파악해 두었음인지 최승희와 만나게 되면서 반주악에 필요한 악기를 연구하다가 아쟁 개량을 생각해낸 것이다. 박성옥은 그 고달프고 바쁜 객지생활 속에서도 손수 아쟁을 대·소형으로 개조해서 소리가 잘 나도록 했고 현을 늘려 음역을 넓혔다. 또한 이조(移調)하는데도 간편하게 했으며 줄을 문지르는 활도 나무와 말총을 겸용케하여 발음의 강유(剛柔)를 자유롭게했다....(중략) 박성옥이 귀국한 이후 악기 제작인들이 너도 다투어 모 방해서 산조아쟁을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김천흥 1995, 89-90).
이러한 면모는 무용가 최승희의 작품세계와 박성옥의 다양한 음악 창작의 시도가 서로 영향을 주며 새로운 소리와 표현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 속에 산조아쟁(소아쟁)이 탄생했다 는 점을 알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과정이다. 궁중악 계통에서만 쓰였던 찰현악기 아쟁을 반주악에 필요한 악기를 연구하다가 개량했다는 사실은 아쟁 탄생에 있어 무용과 음악의 유기적인 관계와 무대양식화에 따른 음색의 다양성 및 음량의 확장 등에 대한 모색이 영향 을 끼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리틀엔젤스 무용단의 경우 초기 음악들을 라이브 연주로 하여 악사 비중이 높기로 잘 알려져 있는데 ‘시집가는 날’ 작품의 경우 도입부분에 소울음 소리 등의 효과음을 내는데에 저음역대 연주가 가능한 아쟁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탄생된 산조아쟁은 무용이나 창극, 시나위 합주 등 다방면으로 근대 음악사에 큰 영향을 끼쳐왔고 독주악기로도 전승되면서 전통음악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 한 과정은 전통음악사에 있어서 끊임없이 창조적 계승이 이루어져왔다는 전범이자 철아쟁 의 탄생과 발전 가치를 연구하여 다양한 활용을 모색하는데에 있어 중요한 근거 자료이다.
2. 아쟁산조의 전승
소아쟁(산조아쟁)이 널리 전파되어 연주되던 가운데, 기존 아쟁의 크기와 개나리 활대는 각 연주자들의 부분적 개량과 용도에 따라 변화되었다. 그리고 창극의 반주로서 쓰이던 소아쟁은 점차 독자적인 악기로 기능이 확대되어 독주 악기로 발전한다. 전통음악에서 유 일한 저음부인 아쟁은 저음부의 찰현 음색과 표현력으로 그 시대의 암울했던 시대상을 대 변하였다. 또한 아쟁의 표현력이란 타 전통악기와 달리 거친 개나리 나무의 찰현 소리와 판소리에서 쉰 듯한 목소리의 성음 표현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아쟁만의 음악적 음색을 바탕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를 풍미했던 창극의 중요한 전통악기로 자리매김한 것이다(김 용호 2010).
판소리 명고수이자 아쟁, 호적 산조의 명인으로 알려진 한일섭(韓一燮, 1929-1973)은 판소리 허튼가락을 인용하여 소아쟁의 가락을 더욱 풍성하게 하였고 이는 아쟁산조의 시 초가 된다. 그 이후 아쟁산조는 박종선, 박대성, 윤윤석 등의 명인들에 의해 각기 다른 유 파를 형성하며 전승되기 시작했다.
그 중 즉흥 연주에 뛰어났던 아쟁의 명인 윤윤석은 독자적인 가락으로 윤윤석류 아쟁산 조를 창시하고 뛰어난 음악적 기량으로 아쟁이라는 악기 특유의 지속가능한 저음부와 다 양한 주법의 효과적 활용을 극대화하여 무용과 창극의 반주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 을 담당하였다. 효과음 혹은 저음 위주의 역할을 담당하던 아쟁이 명인들에 의해 산조의 여러 류파로 발전하고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독자적인 전공 분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3. 윤윤석 명인의 예술세계
명인 윤윤석이라는 천재 음악가의 이름이 국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 반부터이다. 그 후 1982-1983년에 독창적인 가락으로 아쟁산조의 한 틀을 구성하여 ‘윤윤 석류’라는 아쟁산조의 한 갈래(유파)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산조로 1984년 <전주대 사습대회>, 1990년 <신라문화제>에서 각각 장원과 대상을 수상하여 음악적 기량을 뽐냈다 (신현식 2011, 3). 안숙선의 지음(知音) 음반(1994)에서 연주로 뛰어난 음악성을 재평가 받으며 즉흥 음악의 명인으로 그의 가치를 자리매김하였다. 독창적인 자신만의 색깔을 추 구했던 그는 음악을 할 때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꼼꼼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어떤 연주자 에게도 지지 않는 뛰어난 즉흥 가락과 사람의 목소리와도 같은 호소력 짙은 아쟁연주를 남겼다.
이렇게 많은 이에게 주목받은 윤윤석은 아쟁의 독보적 인물이면서 당시 예술가들 사이 에서는 음악의 완성도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연주기 록은 많지 않기에 그가 즉흥으로 연주했던 일화들만 전설로 남아있다. 윤윤석은 국극단 악사로 활동할 당시 실력과 명성은 자자했어도 자신의 이름을 내걸은 독주회 하나 열지 않아 ‘얼굴 없는 연주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는 어릴 적 판소리를 했기에 가능했던 소릿길 안에서 깊은 농현을 구사하는 힘과 박력 있고 섬세한 표현, 그리고 속주 및 뜯는 주법까지 매우 넓은 음악적 기량을 지닌 연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평탄치 않은 인생을 살 았다. 오로지 음악으로만 독자적인 예술세계와 연주 스타일을 확실히 다져가던 중 2006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그의 연주를 더 많이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깝다. 다행히 1995 년-1998년 윤윤석이 학생들 수업에서 즉흥으로 연주된 현장의 녹음 자료(신현식 소장 레 슨 녹음 자료)가 남아 있어, 명인의 가락들을 계승하고 새로운 산조를 창조하면서 윤윤석 예술세계의 계보를 이어가고자 가락들을 연구하고 있다.
4. 철아쟁산조의 탄생
윤윤석은 가야금, 거문고, 아쟁 등 현악기뿐만 아니라 판소리, 장단에도 능하였기 때문 에 가락을 구성하고 성음을 표현하는데 뛰어났다. 특히 가야금처럼 아쟁을 뜯어 연주하기 도 하였는데 철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철아쟁에 대한 고안을 자연스럽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90년 철아쟁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가야금과 아쟁을 개량하여 만든 악기로 창극을 반주하거나 독주곡 연주하는데 쓰였다(윤서경 2020, 12). 철아쟁은 색다른 음향적 효과를 위해 아쟁에 피아노 건반 철사줄을 얹어 고안되었으며, 이는 손으로 뜯으면 철가야 금 소리가 나고 활로 켜면 아쟁 소리가 났다는 점에서 양가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기존의 부들 위치인 미단에는 기타의 줄감개를 달아 조율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조율은 기존의 소아쟁과 같고 명주실보다 철줄의 탄성이 좋아서 소아쟁처럼 줄을 완전 5도까지 역안하는 것이 가능하고 튕김 주법으로 연주하면 여음이 가야금보다 더 길다는 특색이 있다.
윤윤석이 철아쟁으로 연주한 음악은 1988년 녹음 및 촬영으로 KBS 위성 2TV ‘한국의 명인’에서 방송되었다. 이 방송에서 연주된 ‘철아쟁산조’는 장덕화의 장구반주로 휘모리와 동살풀이 장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녹음 시간은 약 6분 정도이다. 철아쟁은 8줄로 되 어 12줄로 되어 있는 가야금보다 음을 더 많이 만들어 소리를 내기 때문에 왼손이 더 많이 쓰인다. 선율 진행과 악기 소리는 다른 철가야금 산조와 유사하다.
윤윤석은 방송에서 철아쟁은 남자로, 철가야금은 여자로 비유하였다(이혜진 2010, 21). 그러나 당시 아쟁 연주자가 많지 않았고 가야금 주법과 아쟁 주법을 동시에 구사해야 하는 능력이라던가, 체계적인 교육이 가능한 학교에도 아쟁 전공이 따로 없었기에 철아쟁 연주 가 체계적으로 전승되지는 못하였다.
철아쟁은 윤윤석에 의해 최초로 제작되었으나 연주나 보급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지지 못 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윤윤석의 연주 녹음자료는 모범이며 최고의 연주로 남아있다. 이 산조는 제대로 따라 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철아쟁 악기가 보급되지 못한 점 등으로 전승이 잘 안되었으나, 그가 생전에 소수의 제자들에게 지범질(엄지로 윗줄을 지렛대 삼아 아랫줄을 뜯는 주법) 위주의 가락을 가르치면서 명맥을 잇는 바탕이 되었다.
윤윤석은 평소 김영철의 철현금 녹음 음반을 즐겨들었으며, 그 음반 위에 본인이 직접 철아쟁산조를 덧입히면서 2중주 연습을 하여 영향 관계에 놓인다. 그렇지만 김영철의 철현 금산조 도입부 역시 기존의 가야금 선율을 활용하여 구성한 것이어서, 윤윤석 또한 철현금 산조 선율만의 영향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가야금 연주로 체득 되어 있던 선율들과 명인이 평소 좋아하던 철현금 산조 선율의 요소들이 서로 복합적으로 윤윤석류 철현금산조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이기선 2021, 36).
윤윤석은 철아쟁을 연주할 때 활대보다도 가야금처럼 뜯어서 연주했는데 개인 레슨 중 에도 즉흥적으로 즐겨 연주하였기에 수업자료에 많은 가락이 녹음되어 있다. 윤윤석은 자 택에서 철아쟁 연주를 들려주며 ‘합주할 때 철줄에서 나는 여운이 다른 거문고나 가야금에 비해 여운이 길고 음색이 독특하다. 창극이나 민요, 무용 반주같은 음악에서도 찰현악기의 지속음과 발현악기의 짧은 여운을 보완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고 언급하였다(신현식, 효자 동 자택 레슨, 1996). 윤윤석은 1993년 철아쟁산조를 음반 『윤윤석 아쟁산조』에서 Track 02 「철아쟁산조」로 기록하게 되는데 이로써 철아쟁산조의 공식 첫 기록이 탄생하게 된다.
Ⅲ. 철아쟁산조의 계승
1. 철아쟁 복원
철아쟁은 보급되거나 보편화된 악기가 아니므로 철아쟁산조 창작을 위해서는 우선 악기 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실정이다. 윤윤석이 사용하던 철아쟁은 직접 고안하고 제작한 악기 로 몸통이 현재 쓰이는 산조아쟁보다는 작은 편이다. 이러한 면모는 현재 아들 윤서경이 소장하고 있고 논문을 통해 상세한 악기 사진과 설명을 밝힌 바 있다(윤서경 2020, 15).
철아쟁연주의 복원과 창작을 위해 새로 제작해야 하는 철아쟁을 위해 기존 산조아쟁의 몸통에 철줄을 올려 장력 및 음역을 비교해보며 악기를 완성하였는데 줄은 탄성이 좋은 중국의 고쟁(古爭)줄에서 산조아쟁의 음역대에 맞는 저음줄 위주로 골라서 사용하였다. 줄 간격은 산조아쟁과 같아 윤윤석이 사용하던 철아쟁 보다는 손으로 뜯는 지범질 연주하기 에 다소 넓은 편이다.
이렇게 윤윤석제 신현식류 철아쟁산조 연주에 사용된 철아쟁에는 돌괘 대신 기타에 사 용되는 줄감개를 달아서 철줄의 힘을 고정하였다. 철줄을 올렸을 때 철아쟁 특유의 음색이 나 음역대를 찾는 과정에서 줄의 굵기, 탄성, 내구성 등이 미세한 장력의 변화에 따라 큰 차이가 생기게 되는데 철줄을 사용하면 수시로 줄이 잘 늘어난다는 점은 보완될 필요가 있다. 연주할 때 가야금 보다는 잔향이 길다는 장점도 있는 반면 템포가 빨라지는 동살풀 이 휘모리에서는 줄의 간격이 넓어 민첩한 연주가 어려운 편인데 추후에 연주곡과 연주법 에 따른 악기통의 크기나 줄 간격, 줄 성분에 대한 섬세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철아쟁의 안족이나 현침도 철줄의 장력에 의해서 기존 명주실에 쓰이던 것보다 더 강한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고정을 위해서 줄이 닿는 부분에 홈을 만들어주는데, 줄의 흔들림에 의해 울림통과의 접촉 부분이 닳지 않도록 보다 정교한 홈 규격 연구가 필 요하다.
본 논문에서는 철아쟁산조 연주를 위한 악기 제작의 과정은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도록 하지만 철아쟁이 더욱 널리 활용되기 위해서는 추후에 악기 제작과 보편화를 위한 연구가 심도 있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2. 철아쟁산조의 계승 양상
철아쟁 연주는 윤윤석 실연 이후 몇몇 연주자들이 악기를 만들어 연주한 기록이 존재하 지만 연주 시간이 길지 않고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는 다른 악기들과 함께 연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음 표는 현재까지 기록된 철아쟁 연주의 목록이다.
<표 1>에서와 같이 1993년 윤윤석의 첫 <윤윤석 아쟁산조> 음반 기록을 시작으로 2000 년에야 두 번째 음원이 나왔다. 윤윤석의 타계 이후로는 꾸준히 연주된 것이 아니라 2017 년 윤서경에 의한 복원 연주(윤윤석 추모음악회 – 국립국악원)가 이루어졌지만 확장적 양 상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아직까지 철아쟁 악기의 보급화가 본격적으로 이 루어지지 않았고, 악기 주법 또한 아쟁과 가야금을 모두 다룰 수 있어야 하는 기법적 측면 의 어려움으로 인해 소수에 의해 전승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에서 철아 쟁산조 복원 및 긴산조 구성을 통해 철아쟁의 계승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이유도 이러한 희소성과 발전 가능성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표 1
철아쟁 연주기록 | 년도 | 연주자 | 제목 | 비고 |
---|---|---|---|---|
음반 | 1993 | 윤윤석 | 윤윤석 아쟁산조 - 철아쟁산조 | 신나라뮤직 |
음반 | 2000 | 윤윤석 | 비상 - 철아쟁시나위 | 웅진미디어 |
공연실황 | 2017 | 윤서경 | 철아쟁산조와 시나위 | 윤윤석 추모음악회. 국립국악원 |
공연실황 | 2018 | 윤서경 | 윤윤석류 짧은산조 병주 | 한옥콘서트 산조. 남산골한옥마을 |
음반 | 2018 | 윤서경 | 4인놀이 - 에코 | 고금 |
공연실황 | 2019 | 이태백 | 철아쟁과 퉁소 이중주 ‘푸리’ | 뉴힐하우스콘서트. 명지병원 |
공연실황 | 2020 | 김선제 | 철아쟁을 위한 즉흥 헛튼산조 | 목요열린국악한마당. 빛고을전수관 |
음반 | 2021 | 신현식 | 윤윤석제 신현식류 철아쟁산조 | 씨앤엘뮤직 |
3. 철아쟁산조의 구성
공식적으로 음반에 기록된 철아쟁산조는 1993년 신나라뮤직에서 발행된 <윤윤석 아쟁 산조> 음반에 수록된 2번 트랙 <철아쟁산조> 음원과 2021년 씨앤엘뮤직에서 발행한 신현 식 철아쟁산조 음반 <시우>가 있다. 이 두 음원에서는 지범질로만 연주하였으며, 총 연주 시간은 윤윤석의 산조가 17분 48초이고 신현식의 철아쟁산조는 총 38분 12초이다. 신현식 은 윤윤석 생전에 수업 받을 당시 스승의 가락들을 녹음자료로 소장하고 있기도 하고 철아 쟁의 뜯는 주법을 직접 배우기도 했는데 이러한 가락들을 복원하고 윤윤석의 예술세계를 계승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윤윤석의 산조는 다스름 – 진양 – 중모리 – 중중모리 – 자진모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현식의 산조는 다스름 – 진양 – 중모리 – 중중모리 – 봉등채 – 엇모리 – 자진모리 – 동살풀이/휘모리로 구성하였다. 이는 윤윤석의 산조에 녹음 자료에 기록된 즉흥 가락과 새롭게 창작한 가락들을 추가 하여 신현식류의 철아쟁 긴 산조로 창조적 계승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봉등채 장단은 산조에서는 처음 차용하였는데 경기도당굿의 5박 장단으로 무 용 반주에서 영향을 받았다. 산조아쟁이나 철아쟁이 무용반주에 많이 쓰이기 때문에 음악 과 춤이 창작에 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동살풀이 휘모리 연주는 윤윤 석이 생전에 무대위에서 즉흥적으로 연주하였으나 음반으로 남기지는 않았기에 가락을 복 원하여 산조를 완성하였다. 동살풀이 휘모리는 활대연주로는 거의 불가능한 가야금의 빠 른 연주와 거의 흡사하여 철아쟁만의 독특한 매력을 가장 잘 구현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존 산조의 형식에 장단을 다양하게 응용하는 방법으로 구성을 확대하였으 며 이를 통해 악기의 특성을 살린 산조의 계승과 창작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였다.
표 2
구성 | 장단수 | 연주시간 | 단락 | |||
---|---|---|---|---|---|---|
(윤) | (신) | (윤) | (신) | (윤) | (신) | |
다스름 | 무장단 | 0‘20“ | 0‘58“ | 2 | 1 | |
진양 | 21 | 58 | 4‘52“ | 12‘02“ | 3 | 8 |
중모리 | 23 | 200 | 4‘10“ | 8‘45“ | 3 | 14 |
중중모리 | 35 | 98 | 2‘34“ | 7‘56“ | 5 | 7 |
봉등채 | x | 16 | x | 1‘01“ | x | 1 |
엇모리 | x | 20 | x | 1‘02“ | x | 1 |
자진모리 | 123 | 121 | 4‘22“ | 5‘07“ | 9 | 7 |
동살풀이/휘모리 | x | 77 | x | 2‘41“ | x | 2 |
4. 철아쟁산조 가락 분석
철아쟁은 산조아쟁 몸통 위에 철줄을 올렸기 때문에 산조아쟁과 동일하게 8줄로 되어있 고 조현법 역시 같다. 녹음 자료의 실음을 바탕으로 하면 <예보 1>과 같이 G본청길로 표 기할 수 있다.
윤윤석제 신현식류 철아쟁산조 가락에는 중모리, 중중모리와 같이 도입부가 비슷하게 시작하여 가락들을 추가한 경우도 있고 봉등채, 엇모리와 같이 새로운 가락을 작곡한 경우 도 있다. <표 3>과 같이 중모리 도입을 비교해 보면 김영철 철현금 연주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윤윤석이 생전에 즐겨듣던 김영철 철현금 연주의 녹음 음원(김영철 철현금 현장녹음 음원, 윤윤석 소장, 1970년대 말 추정)을 채보하여 비교해 보았다.
먼저 <표 4>와 같이 윤윤석류 철아쟁산조의 중중모리 부분과 신현식이 연주한 중중모리 부분의 가락을 비교해보면 윤윤석의 가락에 신현식이 구성한 가락을 더하여 완성하였기 때문에, 유사점과 차이점이 드러나게 된다. 중모리 도입은 김영철 철현금 가락과 거의 같 고 중중모리 도입을 살펴보면 윤윤석의 연주에 잔가락이 좀더 많은 편임을 알 수 있다. 윤윤석류 철아쟁산조에서 나타나는 네 번째 장단이 신현식의 연주 세 번째 가락과 비슷하 고 신현식은 세 번째 장단을 한번 더 풀면서 그 이후로 변청을 사용하는 다른 형태의 가락 으로 전개해 나간다. 선율의 뼈대는 윤윤석이 연주했던 선율에 근거하지만 순간 출연하는 꾸밈음과 주법은 신현식의 연주법으로 연주되어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이처럼 산조의 계승에 있어 기존 가락의 독창성과 음악적 구조에 좀 더 확장된 가락을 더하여 음악의 맥을 긴 호흡으로 완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표 5>에서와 같이 신현식류 철아쟁산조 중중모리 9번째 장단부터는 윤윤석류 철아쟁 산조 공식 녹음자료는 아니지만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레슨 녹음을 기초로 윤윤석의 즉흥 가락을 복원,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윤윤석이 즉흥 연주할 때 잘 나타나는 리듬 변형 활용인 2분박 연주가 나온다. 현을 가야금처럼 눌렀다가 여운을 막아 소리를 잡는 효과를 많이 주고 있다. 특히 상청에서 이러한 주법을 내면 철아쟁 특유의 긴 여음과 맑고 옹골진 소리가 나기 때문에 많이 쓰인다. 이러한 형태의 리듬꼴은 윤윤석의 연주 9-10 장단에도 상청에서 표현된 것으로 나타난다.
윤윤석은 즉흥 연주 특성상 이 가락 후에 연주를 마무리 짓지 않고 즉흥으로 옥타브 음을 반복해서 뜯는 것으로 끝냈기에 필자는 이 가락 후에 봉등채, 엇모리, 자진모리, 동살 풀이, 휘모리로 연결하여 긴산조를 완성하였다. 명인의 가락은 장단을 세밀하게 분할하며 분박을 넘나드는 연주를 보여주는데 그러한 즉흥성은 악보로 채보해서 분석해보면 박자와 음정이 분명하고 정확하여 다양한 가락을 채집할 수 있다. 산조의 가락 구성은 장단의 흐 름을 기본으로 하여 악기의 주법이 소릿길에 의해 구현되는데 철아쟁산조는 산조아쟁과 철현금, 가야금의 특징을 다 지니고 있어 좀더 다양한 음악 표현이 가능하며 새로운 산조 의 계승 이외에도 더욱 많은 음악에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철아쟁은 가야금과 같은 주법으로 활대로 켜는 아쟁 연주보다 더 가락이 화려하고 독특 한 음색을 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동살풀이 휘모리 연주는 가야금의 휘모리 연주처럼 빠르게 가능하여 음을 분할하며 몰아가는 박진감 있는 표현이 가능하다. 철아쟁이 내는 음의 잔향도 명주실보다 길고 음량도 커서 합주나 독주에서 고유의 소리를 들려주기에 좋 다. 앞서 언급한 산조아쟁이 시대적 변화에 따라 극적 효과를 위해 태어났다면 철아쟁은 가야금, 아쟁, 철현금의 장점을 모두 구현할 수 있는 악기로 발전 가능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철아쟁산조의 확장과 기록을 통해서 독주악기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이 기록을 발 판으로 삼아 많은 연주자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철아쟁을 연구하고 활용할 수 있다면 아쟁 의 또 다른 음악적 영역이 확대될 것으로 본다.
Ⅳ. 결 론
전통음악은 시대적 상황과 문화를 반영하며 계승되어 왔다. 전통 악기 중에 역사가 오래 되지 않은 산조아쟁의 탄생 배경에는 보다 더 다양한 음악을 모색했던 예인들의 열정과 무대 양식화되는 시대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었다. 새로운 시대에 전통예술은 대중들에게 더 감각적으로 접근하였고 많은 작품을 통해 무용과 소리, 기악이 서로 유기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를 통해 기존의 양식을 확장하거나 변화를 주게 되는데 그 중 박성옥은 무용음악 을 위해 산조아쟁을 탄생시켰으며 이 산조아쟁은 점차 여러 명인들에 의해 독주악기로서 의 기능이 확대되었다. 아쟁의 개량은 무용이나 창극의 무대 양식화를 위해 다양한 가능성 을 모색하는 과정속에서 태어나게 된 새로운 전통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철아쟁은 아쟁의 명인 윤윤석에 의해 고안되고 연주되던 악기로 독창적인 음색을 내기 위해 개량된 악기인데 가야금 주법과 비슷하지만 음량이 더 크고 음의 잔향이 길어 보다 적극적인 음의 표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철아쟁은 아쟁보다 전통 가야금의 주법에 가까워서 손으로 뜯거나 튕기면서 연주하고 왼손으로 농현을 하며 음을 만들어낸다. 다른 개량 악기들처럼 음역대를 넓히기보다 음의 잔향을 살려 음의 표현을 극대화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철아쟁은 음악적으로 많은 발전 가능성이 있으나 즉흥적인 면이 강했던 연주 방법과 악기 제작의 한계로 전승이 어려워 안타까운 실정이다.
본 연구에서는 윤윤석의 즉흥 가락을 토대로 다양한 조와 장단을 더하여 철아쟁 긴산조 로 구성하는 과정을 밝히고, 명인의 음악 세계와 철아쟁의 가치에 주목하였다. 이렇게 완 성한 윤윤석제 신현식류 철아쟁산조를 통해 전통의 계승 방법과 철아쟁의 가능성을 모색 하고자 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철아쟁이라는 악기가 재조명되고 새로운 산조 형성을 위한 작곡기법이나 연주법이 더 심도있게 연구되기를 바란다. 또한 철아쟁의 창조적 계승을 통 해 전통음악의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고 많은 연주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