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최승희의 친일 행적을 왜 연구해야 할까?
1938년의 일이다. 뉴욕에서 최승희(崔承喜, 1911~1969, 일본명 Sai Shoki)가 공연할 때, ‘최승희 배격’이라는 삐라가 공연장 입구와 길바닥에 뿌려지는 일이 생겼다. 최승희가 일본 문화를 선전하러 왔다는 이유였다(“미국통신” 1938.10. 59). 이와 비슷한 일이 2010년에도 일어났다.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홍천 2010 최승희춤축제 심포지엄’(9.13)을 할 때 였다. 광복회 할아버지들이 갑자기 들어와 ‘민족단체들의 입장’이라는 전단지를 돌리며 대 한민국을 두 번 배신(친일, 월북)한 최승희를 기념하는 일은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래는 전단지의 내용이다.
민족단체들의 입장: 우리는 최승희씨가 무용가로서 어떠한 명성이 있다 할지라도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죄를 생각할 때 기념사업 등 어떠한 미화 작업도 용납할 수 없다.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등 독립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자 하나뿐인 생명마저 초개와 같이 버릴 때 최승희는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붙어 자금을 바치던 민족 반역자이 다…(하략) -광복회 서울특별시 지부-
최승희는 조국과 민족을 배반했으며, 일제에 자금을 바치던 민족 반역자이므로 미화하 는 기념사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소란 이후에 학술대회는 제대로 이어질 수 없었다. 광복회 회원들이 학술대회를 난장판으로 만들 만큼 토로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학회장 의 소란을 겪으며, 근대 춤의 스타인 최승희 뒷편에 가려진 ‘친일’에 의문이 생겼다.
일제와 관련된 과거사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2018년에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나 일본 전범기업은 시행하지 않았고, 2021년에 전범기업 미쓰 비시 하버드 교수인 램지어는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전쟁범죄의 피해자인 위안부를 ‘계 약 매춘부’라 왜곡했으며, 2023년에 독립군을 토벌한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에게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문구는 대전현충원 사이트에서 슬그머니 삭제됐다. 이처럼 일본제 국주의와 전쟁범죄에 관한 과거를 왜곡ㆍ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일제와 관련된 무용계의 과거사인 친일 무용가를 논의하고자 한다. 이 연구 목적은 일제강점기 최승희의 친일 행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역사적 성찰을 해보려는 것 이다. 그렇다면 왜 최승희의 친일 행적이 규명되어야 하며, 왜 역사적 성찰이 필요한가?
첫째, 무용계에서 친일 과거사가 청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사 청산’이란 식민통치 등의 낡은 체제가 끝나고 새로운 체제가 들어선 뒤에, 지난 시기의 개인적ㆍ국가적 범죄행 위에 관한 정리작업이다. 국제적으로 과거사 청산은 다음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① 암울했 던 과거와 그 시기의 범죄행위에 대해 확실하게 진상을 규명한다. ② 가해자 혹은 책임자 를 처벌한다. ③ 피해자 혹은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보상)한다. ④ 과거가 반복되 지 않도록 기념사업 혹은 올바른 역사교육을 한다(이용우 2008, 5; 10).
한국예술학에서는 그간 친일 청산을 위해 노력했다. 임종국(1966)의 친일문학 연구를 필두로 하여, 음악(노동은 2017), 영화(강성률 2012), 미술(윤범모 1999), 연극(서연호 1997) 등 여러 분야에서 친일 과거사 청산 작업이 진행되었다. 반면에 무용계에서는 친일 과거사 청산에 관한 연구가 매우 미진한 편이다. 이를 근대춤역사 연구의 비어있는 부분으 로 문제 제기하며, 『친일인명사전』(2009)에 등재된 두 무용가 중 조택원의 친일을 다루었 고(조경아 2023), 이번에 최승희의 친일을 살펴보고자 한다. 최승희에 관한 무용계의 선행 연구는 근대적 성과에 치중된 경향을 보이며, 최승희의 과오인 친일은 부분적으로만 언급 되었으므로, 무용계의 친일 과거사 청산이라는 의미에서 본 연구는 필요하다. 과거사 청산 의 네 과정 중 최승희는 이미 고인이므로 진상규명과 올바른 역사교육이 필요한 부분이다.
둘째, 과거청산의 핵심은 진실 규명이므로, 최승희의 친일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과거청산의 궁극적인 목적은 역사적 ‘화해(reconciliation)’이다. 과거청산을 하려 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묻는 과정이 포함되는데, 해결의 실마리가 진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엘리자베스 콜 2010, 20). 펠트만은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픈 과거를 대면하 면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최성철 2020, 17). 일제강점기 최승희의 친 일이라는 아픈 과거와 ‘대면’하면서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해야 진정한 역사적 화해를 할 수 있다. 그동안 최승희의 친일을 부정하거나 옹호하는 입장에서 모두 사실 확인이 본격적 으로 진행되지 못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진실 규명을 위해 최승희의 친일 행적을 구체적 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셋째, 역사적 성찰은 과거 부정적인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 성찰은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살피는 것이며, 이는 미래를 위한 것이다. 한나 아렌트(2016)는 모든 사유는 뒤늦은 사유(afterthought)라 했다. 즉, 어떤 문제나 사건을 뒤늦게 멈춰 서서 숙고하는 것이다. 나치에 협력한 무용가인 라반(Rudolf von Laban, 1879-1958)과 뷔그만 (Mary Wigman, 1886-1973)에 관해서도 뒤늦게 논의되고 있다(조경아 2023, 136). 2002 년 8월 14일의 오마이뉴스 “제 아비를 고발하는 심정으로...”기사(김지은)에 따르면, 민족 문학작가회의 등의 문학인들은 ‘문학인선언’에서 “제 아비를 고발하는 심정으로 일제 식민 지 시대의 친일문학작품 목록을 공개하고 민족과 모국어 앞에 머리 숙여 사죄코자 한다”라 며 친일문인 42인을 발표했다. 앞 세대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인 친일을 사죄하는 것은 나 의 일로 받아들이는 문학계의 용기 있는 자기성찰의 결과이다. 무용계에서도 냉정한 자기 비판이 필요하며,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최승희의 ‘친일’이라 는 부정적 유산을 나의 일로 받아들이고, 부당한 권력에 순응하여 사적인 욕망을 채웠던 과거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반성적 역사 인식에서 본 연구가 필요하다.
연구시기는 일제강점기이며, 문헌연구방법으로 진행했다. 『친일인명사전』(2009) 및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작성하고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최승희 문서(D-무용 -00959)와 당시 신문자료를 주요하게 검토했다. 자료수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웹으로 구축된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집적된 한국 근현대잡지자료와 친일파관련문헌 등을 이용했다.
Ⅱ. 시민사회와 국가에서 작성한 친일 명단에 최승희 포함 여부
1. 최승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근거는 무엇인가?
시민사회의 열망을 담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2009)에 친일 인물 은 4,389명이 수록되었다. 무용가로는 최승희와 조택원이 포함되었다. 이들을 수록한 『친 일인명사전』의 ‘친일파’ 기준은 다음과 같다.
1905년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 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이다(민족문제연구소 2009, 18).
이러한 친일파 선정 기준에 따라 여섯 범주로 나뉜다. ① 일제의 국권침탈에 협력한 자 ②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에 참여한 자 ③ 항일운동을 방해한 자 ④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 한 자 ⑤ 지식인・종교인・문화예술인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 ⑥ 기 타 친일행위자.
최승희는 ④와 ⑤에 해당한다. 먼저 ④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의 범주에서 최승희 가 해당하는 세부 항목은 “침략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다액의 금품을 헌납한 자”이다. 『친 일인명사전』에서는 국방비 명목으로 1만 원(당시 화폐단위) 이상을 헌납한 자를 다액의 금품 헌납자로 보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9)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 1만 원은 대략 1억에 해당한다. 곧 1억 이상을 침략전쟁을 위한 국방비로 낸 것을 친일 행위로 여겼다. 다음으로, 최승희는 ⑤ 문화예술인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 력한 자라는 범주에 해당한다. 그 세부 항목으로는 “안무・공연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 전쟁에 협력한 자”에 해당한다.
즉, 『친일인명사전』의 기준에 따르면, 최승희의 친일 행위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는 국방비 명목으로 다액의 금품을 헌납하여 일제의 침략전쟁의 수행을 도왔고, 둘째는 안무와 공연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위한 최승희의 ‘헌납’과 ‘공연’은 Ⅲ장에서 자세히 논하겠다.
2. 최승희는 왜 친일반민족행위 대상자에서 마지막에 제외되었나?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1,006명이 었다. 4,389명을 선정한 『친일인명사전』에 비해 대상자가 4분의 1로 줄었으며, ‘친일반민 족행위’의 기준이 법령으로 정해졌다는 특징이 있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약칭: 「반민족규명법」, 시행 2012.10.22. 법률 제11494호)에서 규정한 친일 반민족행위는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 전쟁 개전 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행한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이며, 제20호로 친일반민족행위를 분류했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32).
최승희의 친일 행위가 해당되는 법조항은 제2조 제13호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32)”였 다. 무용가로는 최승희와 조택원이 조사대상자였으나, 최승희는 마지막에 기각되어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는 조택원만 유일하게 수록되었다.
왜 최승희의 친일반민족행위는 마지막 결정에서 제외되었을까? 어떤 근거로 내린 판단 이었을까? 과연 타당한 판정이었을까? 여기서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한다. 친일반민족행 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 사무처 조사4팀에서 작성했고, 국가기록원에서 영구 보존하는 최승희 문서(D-무용-00959)를 통해, 최승희가 결정 기각되는 과정을 살펴보기 로 한다.
표 1
날짜 | 절차 | 주체 |
---|---|---|
2008.11.24. |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 선정 의결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2009.03.26. |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 선정 이의신청 접수 | 최승희 동서 김○○(김백봉) |
2009.05.25 | 청구인(김백봉)의 이의신청 기각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2009.06.29 |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안 기각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첫째, 조사대상자 선정 단계이다. 2008년 11월 24일에 작성된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 상자 선정 의결서」에서 최승희는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를 의결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성대경을 위원장으로 하고, 10명의 위원이 있는 총 11명 의 기구였다.
둘째, 이의신청 단계이다. 최승희가 조사대상자로 선정된 지 세 달이 지난 2009년 3월 26일에 최승희의 동서 김○○(작성자 주:김백봉)은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 선정 이 의신청」을 접수했다. 2009년 제3기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로 선정된 최승희(D-무용 -00959)에 대하여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 선정을 취소하라는 것이었다.
셋째, 이의신청 기각 단계이다. 2009년 5월 25일에 「이의신청 심의ㆍ의결서」로 청구인 (작성자 주:김백봉)의 이의신청은 기각되었다.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최 승희의 친일반민족행위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넷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기각 단계이다. 2009년 6월 29일에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서」 에는 최승희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 기각되었다. 즉 최종적으로 최승희가 친일반민족행 위 명단에서 제외된 것이다. 이는 매우 뜻밖의 결과였다. 왜냐하면 불과 한 달 전에 이의신 청 사유가 조목조목 반박되면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한 달 만에 결정이 뒤바뀐 것이기 때문이다. 결정 기각으로 판단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조금 긴 내용이지만 『친일반 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보다 상세한 내용이고, 국가기록원에 요청하여 받을 수 있는 자료이므로 전문을 제시한다.
최승희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기각 이유서」: 판단
최승희는 1941년 오사카(大阪) 협화회 관계자들과 반도인 유력자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무용공연과 ‘내선일체’ 주제의 영화인 「기미토보쿠」의 일본 시연회 때 무용 공연을 펼쳤다. 1942년에는 조선군사보급협회 주최,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군 보도부, 기계화국방협회 조선 본부 후원으로 조선군사보급회의 운영 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한 무용공연을 펼쳤다. 이 공연 에서는 일본의 고전 가무인 노가쿠(能樂)와 부가쿠(舞樂)를 소재로 신작을 발표했다. 이때 발표했던 「무혼(武魂)」이라는 작품은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에서 ‘노(能)의 수법을 넣어 창작한 일본풍 무용으로 시국 하 건전성을 의식한 것’으로 제1회 문화표창 작품으로 선정되기 도 하였다. 이후 최승희는 전조선과 북지(北支), 중지(中支) 등을 순회하며 공연을 펼쳤다. 1943년에는 3개월에 걸쳐 만주, 북지, 중지 등의 장병을 위문하고 돌아왔으며, 1944년에는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에서 ‘전의앙양과 황군 위문’을 겸한 최승희 무용공연을 펼쳤고, 다시 화북과 남경 등지에서 ‘황군’ 위문공연을 펼쳤다.
그리고 최승희는 1937년 종로서에 100원을 기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국방헌금, 황군 위문 금, 독일 상이군인 위문금, 조선문인협회 기부금, 군사후원연맹 후원금, 조선군 및 해군 위문 금, 조선군사보급협회 사업기금, 문화장려비 등의 명목으로 1944년까지 총액 73,000원이 넘 는 금액을 일제에 헌납했다. 이러한 최승희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 “사회ㆍ문화기관이나 단체를 통한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 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된다.”(강조: 작성자)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최승희의 행위는 <특별법> 제2조 13호에서 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될 소지가 있으나 일제 강점기하에서 일정 부분 우리나라의 문화홍보에 기여한 측면이 있는 등의 정상을 참작하여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안을 기각한다.(강조: 작성자) 2009년 6월 29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 조사4팀, 2008년도 최승희/D-무용-00959(1), 92-93)
결정 기각의 사유는 “일제 강점기하에서 우리나라의 문화홍보에 기여한 측면”을 정상 참작한 것이었다. 이는 김백봉의 이의신청에서도 내세우지 않은 항목이었다. 물론 친일반 민족행위 결정 심의에서도 “대중예술이 갖는 대중적 영향력이나 파급력을 고려하여 더욱 엄정한 잣대로 판단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이 있었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222).”라고 제시했다.
왜 반민규명위에서는 이의신청인이 제시하지도 않은 이유로 최승희의 결정을 기각했을 까? 최승희의 결정 기각 이유에 관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조사4팀의 강태구 담당자 에게 질의했고, “담당자나 사무처 측에서는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최종 의결이 그렇게 나와서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나네요(2024.4.26. 강태구 인터뷰)”라는 답변을 받았다. 담 당자나 사무처에서도 최승희의 결정 기각에 납득되지 않는다는 내부 분위기가 있었다.
타 분야에서도 최승희의 사례를 들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의 불공평성 문제를 제기했 다. 황호택은 2009년 11월 29일 동아닷컴의 “최승희의 ‘춤추는 친일”이라는 칼럼에서, 일 제에 군용기 건조비로 3백 원을 낸 김성수는 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된 반면 7만 5천 원을 군에 헌납하고 친일 행적이 뚜렷한 최승희는 왜 공을 배려해 기각하는 편파적인 결정 을 했냐고 따졌다. 문학 분야에서 구광모(2011)는 최승희가 친일반민족행위자에서 기각 결 정되는 과정을 “불공평성과 파격성 및 재량적 적용”의 사례로 손꼽았다(131). 정치외교학 분야에서 이지윤(2018)도 최승희를 기각한 결정은 형평성을 훼손한 것이라 지적했다. 거액 의 국방헌금과 위문공연, 일제로부터 받은 표창까지 객관적으로 드러난 최승희의 행적은 다른 분야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된 인물에 못지않으며, 근본적인 문제는 친일반민족 행위를 판정하는 근거가 “그 행위의 친일성이 아니라 사회나 민족에 대한 기여도가 고려” 될 수 있다는 관점이라고 문제 제기했다. 조사 1팀의 이태규의 인터뷰에서 심의 과정에서 다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최승희의 기각 결정에 강하게 반대했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이처럼 최승희의 기각 결정은 다른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과 비교하여 불공평하다는 논란을 초래했다(154-155).
무용과 같은 범주에서 논의되었던 음악은 어떤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 기각되었 을까? 음악 분야는 결정 심의에서 4명이 기각되었다. 군국가요를 불렀던 가수 및 군국가요 를 작곡ㆍ편곡자의 친일 행위가 인정되지만, 당시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점 이 참고되어 기각되었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222). 기각의 기준이 ‘사회 적 위상이 낮았다’는 것이라면 최승희의 결정 기각이 더욱 납득되지 않는다. 최승희의 경 우는 이와 반대로 당시 예술계 최고 스타로서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 다. 같은 범주에 있는 음악, 무용의 친일반민족행위를 다루면서 반대의 근거를 내세워 기 각한 것은 형평성의 문제가 있다.
Ⅲ. 최승희의 친일 행위
최승희의 동서이자 제자였던 김백봉은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 선정 이의신청」 (2009.03.29.)에서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검증하면 결코 최승희는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라고 주장한다. 이 장에서는 최승희의 친일에 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 을 검증해 보기로 한다. 『친일인명사전』(2009)과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 선정 의결 서」(2008)에서 꼽은 최승희의 친일 행위는, 일제 침략전쟁에 국방헌금 및 친일 단체에 거 액을 기부한 행위, 다수의 황군 위문공연, 「무혼」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표창 수상 등 이며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일제 국방헌금 및 협력단체에 기금헌납: 1937-1944
『친일인명사전』에 최승희와 함께 선정된 조택원은 일제에 기금을 납부한 기록이 없다. 오히려 일제에게 수익을 넘겨받은 기록이 대부분이다(조경아 2023). 같은 시기에 활동한 조택원과 단순 비교해도 최승희가 일제에 기금을 헌납하는 것이 강제가 아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조택원과 달리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기금을 헌납한 최승희의 내역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김백봉은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 선정 이의신청」(2009.3.29.)에서 최승 희의 일제 국방헌금 및 일제협력단체 헌금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했다.
가. 첫째 최승희가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국방헌금 및 일제 협력단체에 대하여 헌금을 하였다면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어떤 방법으로 모금을 하였고 모금된 돈을 누가 누구에게 전달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적시되어야 합니다.
나. 둘째 최승희가 헌금을 하였다면 일군의 강요에 의하지 아니하고 본인의 자유 의사에 따라 헌금을 하여야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였다 할 것이므로 최승희 본인이 자유의사에 따라 헌금을 하였는지 입증되어야 합니다.
위의 이의신청은 헌금의 ‘구체성’과 ‘자발성’을 밝히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두 가지에 초 점을 맞추어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에 기금을 납부한 용어로는 ‘기부’, ‘기 탁’, ‘헌금’, ‘헌납’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1) 1937년 국방기금 헌납
(1) 1937년 2월: 경성부 방호단에 기부
최승희가 처음 국방기금을 기부한 시기는 1937년 2월 22일 이었다. 조선총독부 일어판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반도의 무 희 최승희씨가 2월 22일에 오후 종로서를 방문하여, 경성부 방 호단(京城府防護團)에 100원을 기부했다는 기사(도판 1)가 실 렸다(“최승희씨 기부” 1937, 7). 안세영(2019)에 따르면, 경성부 방호단은 군(軍)-관(官)-민(民) 사이에서 방공정책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주요임무는 방공훈련이었다. 이는 일본군의 위력을 과시하면서 조선인의 보호자로 자처하는 의도로 시행되었다. 경 성부 방호단은 1934년에 조직되고 1937년에 새롭게 편성되었는데(228-230; 252-253), 최승희는 1937년 경성부 방호단의 조직 개편에 맞추어 발빠르게 종로경찰서를 찾아가, 경 성부 방호단에 쓰이기를 원한다며 자발적으로 기부했고, 이후 종로경찰서는 경성부(현, 서 울시)에 전달했다.
(2) 1937년 10월: 국방헌금ㆍ황군위문금ㆍ조선방공기재헌금 기부
최승희는 1937년 12월에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일본 동경에서 고별 공연을 마친 뒤, 동경에 있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경성일보 동경지부를 찾아가 국방기금을 자발적으로 냈다. 고별 공연은 동경극장에서 9월 27-29일에 2회씩 총 6회 공연했고, 10월 1일에 수익 금을 헌금했다. 최승희는 공연 수익금을 세 곳으로 나누어 국방헌금에 1천 5백 원, 황군위 문금 백 원, 조선방공기재헌금(朝鮮防空器材獻金) 백 원을 냈다(“반도의 무희” 1937. 7). 조선방공기재헌금은 ‘방공(防空)’을 위해 군에 낸 돈인데 조선 주둔 일본군의 방공활동은 연합군 항공기의 공습을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인을 전시체제 아래 동원하고 통제했다 (조건 2011, 113).
2) 1941년 기금 헌납: “내선일체에 기여”
(1) 1941년 2월: 독일 나치군에 570마르크 헌금
최승희는 미국과 유럽 등으로 떠났다가 3년 만인 1940년 12월에 돌아온 직후 1941년 2월에 독일 나치군에 570마르크를 헌납했다. 최승희가 1939년에 독일 연극원과 40회의 공연을 계약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2회의 공연만 했는데, 잔금을 받아가라는 통 지가 왔고 최승희는 “그 돈은 조국을 위하여 피를 흘리는 독일의 전 상병들을 위해서 헌금 하겠다”고 하여 옷토 대사가 감격했다고 한다. 즉 최승희는 독일에서 지불받아야 할 570마 르크를 부상병 위문금 명목으로 독일 육군병원에 헌금했다(“최승희 독군에” 1941, 3).
(2) 1941년 4월: 군사령부ㆍ조선문인협회ㆍ조선군사후원연맹ㆍ국방자금 헌납
1941년 4월에 최승희는 세 차례에 걸쳐 기금을 헌납했다.
첫째로, 1941년 4월 2일에 군사령부에 2천 원을 헌금했다. 백의용사와 경찰관 가족을 초청하여 3일간 봉사공연을 했고, 그 공연 수익금을 헌납한 것이다(“백의용사 위문” 1941, 3). 제국주의 침략정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람을 관객으로 초대하고, 공연수익금을 군 기금으로 쓰도록 최승희가는 봉사공연을 마련했다.
둘째로, 1941년 4월 7일에 조선문인협회에 2천 원을 기부했다. 조선문인협회는 일제의 총동원체제 전략의 일환으로 1939년에 탄생한 최초의 본격 친일문인단체였다(이건제 2011, 45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국방헌금과 함께 일제협력단체에 대한 기금헌납도 친일반민족행위로 여긴다. 조선문인협회에 낸 기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최승 희는 귀국 후, 제1회 조선중앙공연을 1941년 4월 2-6일까지 했고, 공연 다음날인 7일에 조선문인협회 기금 2천 원을 협회 사무국장에게 직접 기탁했다(“최승희여사의 선물” 1941, 4). 조선문인협회에 2천 원을 기부하면서 최승희는 같은 예술 계통의 사람들이 조국 을 위해 일해주시는 것을 듣고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너무 감격스러웠다고 한다. 기부하는 돈이 적어서 어떤 일도 할 수 없겠습니다만 “내선일체에 기여해주고” 문화적인 방면에 사용해 주시면 하는 바람”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조선문인협회에 이천원” 1941, 3). 이 기사의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최승희 스스로 기부의 목적 을 밝히면서 ‘내선일체’를 명시했기 때문이다. 기부금의 사용 방 향을 적극적으로 제시한 자발성과 함께 일제 식민통치의 방향인 내선일체를 최승희가 내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로, 1941년 4월 26일에 군사후원연맹과 국방자금에 2천 원 을 헌금했다. 최승희는 4월 25-26일에 부산에서 공연하고, 26일 낮에 부산의 경상남도 도청을 방문했다. 최승희는 군사후원연맹에 1천 원, 국방자금에 1천 원을 헌납하여 도청 간부들을 감격하게 했다(“최승희여사 이천원” 1941, 3)고 한다. 최승희의 헌금은 중앙 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산 공연을 했을 때는 그 지역의 거점기관 인 경상남도 도청에 직접 찾아가 군사후원연맹과 국방자금이라는 용도를 지정하며 각각 1천 원씩 헌금할 정도로 자발적이고, 주도적 이었다. 최승희의 자발적인 행보는 신문기사에 “경상남도 도청 간 부들이 감격”했다는 표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3) 1941년 12월: 육군성 장병 휼병기금 헌금
1941년 12월 3일에 최승희는 일본 동경에서 육군성(陸軍省) 휼병부(恤兵部)를 찾아가 공연 수익금 6,396원을 헌금했다(도판 2). 육군성은 일본 제국 육군의 군정 기관이며, 휼병부는 육군 위 문을 담당하는 부서이다.
[동경전화(東京電話)] 반도 무용게의 자랑 최승희(崔承喜) 씨는 三일 육군성 휼병부(恤兵 部)를 차저와서 지난달 二十八일에 공연하엿든 가무기흥업(歌舞伎興業)에서 어든 순이익금 六천 三백 九十六원을 제一선 황군장병의 휼병기금으로 써달라고 헌금하엿다 그리고 기회를 보아서 대륙에서 지금 분투하고 잇는 장병의 위문을 꼭가기를 희망하고 잇다고 말하엿다(“최 승희여사 군에” 1941, 4).
인용문은 네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첫째, 헌납의 방식은 동경 육군성이라는 군정 기 관에 최승희가 12월 3일에 직접 찾아가 헌납했다는 점이다. 둘째, 헌납 기금 마련은 최승 희가 1941년 11월 28일에 동경 가무기흥업(歌舞伎興業)에서 공연했던 순수익금 6,396원 이었다는 점이다. 셋째, 기금의 목적을 일본군의 병사를 위로하는 기금으로 써달라고 최승 희가 명시한 점이다. 넷째, 기금 헌납에 그치지 않고, 미래에 대륙의 황군 위문공연을 가기 를 희망한다고 요청한 것이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기금을 헌납하는데 그치지 않고, 위문 공연까지 먼저 요청했던 최승희의 행보는 매우 적극적이고 주도적이었다.
3) 1942년 2월-4월: 누락된 군사보급협회 기금 헌납 금액은?
최승희는 군사보급협회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2년 2월, 3월, 4월에 장기간 공연을 펼쳤다. 기금 마련 공연이라는 목적이 분명했으므로 신문 기사에 공연 수익을 헌납 했다는 내용은 있으나 금액은 명시되지 않았다.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조사 대상자 선정 의결서」에도 1942년 2-4월의 공연 수익금 헌납 액수가 누락되었다. 누락된 최승희의 공연 헌납액을 추정해 보기로 한다.
첫째, 1942년 2월 16-20일에 최승희는 경성 부민관에서 무용공연을 했고, 수익금 전부 를 조선군사보급협회에 헌납했다. 기금 마련에 적극적이었던 최승희의 입장은 아래 기사 에서 확인된다.
반도가 나은 ‘세게의 무희’ 최승히(崔承喜) 여사가 대동아전쟁 총후로부터 제일선 황군장 병에게로 바치는 무용보국의 적성- 전첩 혁혁한 뒤에 숨은 황군의 눈물겨운 로고에 감격한 최여사는 보답이 될 수 잇다면 하고 무용공연을 하야 수익금 전부를 조선군사보급협회(朝鮮 軍事普及協會)의 자금으로 헌납하겟다고 당국에 말하여 왓스므로(강조: 작성자) 동 협회에서 는 즐겁게 이를 바더 조선군보도부, 국민총력조선련맹, 기게화국방협회조선본부의 공동후원 으로 오는 二월 十六일부터 五일간 경성부민관에서 무용공연회를 개최키로 된 것이다(“무용 으로 총후보국” 1942, 2).
1941년 말에 조선군사보급협회가 결성되고, 곧 1942년 1월부터 최승히(최승희)를 초빙 하여 기금을 마련하려는 기획이 이루어졌다(“최승희 무용공연” 1942, 2). 최승희는 황군의 눈물겨운 노고에 보답이 될 수 있다면 무용공연을 하여 수익금 전부를 조선군사보급협회 에 헌납하겠다고 했다. 이 공연은 기금 마련이 목적이었고, 공연 티켓 파워가 있었던 최승 희가 아니라면 성사되지 못할 기획이었다. 무용공연의 순이익금은 전부 조선군사보급협회 의 기금이 되었다.
둘째, 1942년 3월 14-31일에 군사보급협회 기금 마련을 위해 최승희는 전선을 순회 공 연했다. 14일: 강경, 15일: 군산, 16일: 이리, 17일: 전주, 18일: 순천, 19일: 여수, 21.22 일: 광주, 23일: 목포, 24일: 대전, 25일: 청주, 26일: 천안, 27일: 예산, 28일: 안성, 29일: 수원, 31일: 춘천 등에서 기금마련 공연을 했다(“최승희 신작무용” 1942, 2). 지역을 옮기 면서 16일간 했던 공연 수익을 헌납했을텐데, 헌납 액수는 명시되지 않았다.
셋째, 1942년 4월에도 최승희는 전선을 순회 공연하여 수익 금액 전부를 조선군사보급 협회의 기금으로 냈다. 4월 21일에 남양극장에서의 최승희 공연은 대만원을 이루어 하루 에만 4천 원의 수입이 있었으나(“최승희 전선공연” 1942, 2), 다른 지역의 수익금 내역은 알 수 없다.
최승희가 조선군사보급협회에 헌납하기 위해 1942년 2-4월의 전선 순회공연에벌어들 인 수익은 얼마일까? 남양극장에서 하루 수익이 4천 원이었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최승희는 2월에 경성 부민관에서 주야 5일간 공연했고, 3월에 전선 순회공연 에서 16일간 공연했다. 4월에 전선 순회공연에서 몇 일 공연했는가를 알 수 없으나, 3월보 다 조금 적은 9일이라 치면, 최승희가 2-4월에 공연한 날은 30일 정도로 추정된다. 하루 공연 수익이 4천 원이니, 30일만 공연해도 12만 원의 수익에 이른다. 그렇다면 1942년 최 승희가 조선군사보급회의 기금마련을 위해 헌납한 금액은 적게 잡아도 12만 원 정도가 된 다. 결론적으로, 기존에 알려진 최승희의 국방헌금 기금에, 기록되지 않은 헌납 기금 12만 원을 더해야 한다.
4) 1944년 헌금: “최승희 여사의 희생적 협력”
(1) 1944년 3월: 내선일체를 담당하는 동경 협화회에 기부
최승희는 북부지방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1944년 1월에 일본 동경에 들어와 제국극장에 서 신작무용회를 발표했다. 공연 이후 3월 12일에 최승희는 직접 동경 경시청 내선과(內鮮 課)를 찾아가 동경 협화회(協和會) 경비로 쓰도록 1천 원을 기부하여 관계자를 감격시켰다 고 한다(“최승희여사 천원기부” 1944, 3). 협화(協和)는 일본(和)에 사는 조선인을 일본의 협력자(協)로 만들려는 것이고, 그러한 일을 주도하는 기구가 협화회다. 즉 협화는 내선일 체와 같은 맥락이다. 최승희는 동경 공연을 마친 뒤, 내선일체를 위해 1천 원을 동경 협화 회에 기부한 것이다. 최승희의 기부는 관계자를 감격시킬 만큼, 관계자조차 예상하지 못한 자발적인 일이었다.
(2) 1944년 11월: 육해군에 휼병금 헌납
최승희는 1944년 11월에 육군과 해군을 위해 휼병금으로 5만원을 헌납했다.
대일본부인회(日婦) 조선본부에서는 제一선장병의 로고를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저 금년여 름부터 무용가 최승히(崔承喜)여사의 히생적 협력을 어더 경성을 비롯하야 전선 주요 도시에 서 ‘휼병금헌납무용공연회’를 열어왓섯는데(강조: 작성자) 二十일 구라시게(倉茂) 사무총장 과 최승히 여사가 경성지방해군인사부 밋 조선군애국부를 차저와 각 二만 五천원을 헌납하엿 다(“무용공연의 수익” 1944, 2).
친일협력단체인 대일본부인회 조선본부에서는 황군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휼병금헌납무용공연회’를 기획했다. 이 기획을 실행시키기 위한 파트너는 최승희였다. 기사처럼 공연 공간은 경성과 전선의 주요 도시였다. 공연을 마친 뒤, 1944년 11월 20일에 구라시게(倉茂) 사무총장과 최승희는 함께 경성 지방해군인사부와 조선군애국부를 직접 찾아가 “무용공연의 수익”(도판 3)을 2만 5천 원씩 총 5만 원을 군 기금으로 헌납 했다.
(3) 1944년 12월: 총독부 정보과 헌납
최승희는 11월 20일에 5만 원을 헌납하고, 뒤이어 12월 1일 에도 조선총독부 아베(阿部) 정보과장을 방문하여 문화장려비로 써달라고 1만 원을 기탁 했다. 최승희의 기탁에 감격한 아베 과장은 그 용도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조선총독부 의 정보과에 최승희가 기탁한 기금의 출처는 ‘휼병금헌납무용공연회’의 수익금이었다(“문 화장려비 만원을” 1944, 2). ‘문화장려비’라는 명목이 순수한 기금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 나, 이를 조선총독부라는 일본제국주의 기관에 헌납한 것 자체가 친일반민족적이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최승희가 국방헌금 및 일제협력단체에 헌납한 금액의 총액은 신문에 명시된 금액만 75,196원이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에 최승희의 국방헌금이 7만 5천원이라 했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제2조 14호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규 모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인데,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준금액은 10만 원(10억 추정)이 다. 최승희가 독일 나치군에 570마르크에 헌납을 제외하더라도, 기존에 밝혀진 최승희의 헌납액 75,196원과 기존에 누락된 1942년 전선 순회공연 헌납액으로 추정된 12만 원을 더하면, 적어도 기준액인 10만 원을 훌쩍 넘는다. 따라서 누락된 헌납액의 정황까지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파악했다면, 최승희는 특별법 제2조 13호와 14호 두 조항 에 해당되어 무거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김백봉이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 선정 이의신청」(2009.3.29.)에서 최승희의 일제 국방헌금 및 일제협력단체 헌금의 구체성을 밝히라는 이의제기와 “최승희 본인이 자유의 사에 따라 헌금을 하였는지 입증”하라는 요구대로 최승희의 국방헌금 및 일제협력단체에 기부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최승희가 국방헌금과 일제협력단체에 기금을 헌납하는 과정을 종합하면, 일정한 루틴이 파악된다. 첫째, 최승희는 공연을 마친 뒤에, 곧 공연 수익을 기금으로 헌납했다. 둘째, 최 승희는 공연했던 지역에서 공연수익금을 헌금했다. 예컨대, 경성에서의 수익금은 경성의 일제 친일 기관에 헌금하고, 부산에서의 공연수익금은 부산에 소재한 경상남도 도청의 친 일 기관, 일본 동경에서의 공연 수익은 동경의 친일 기관에 헌금했다. 셋째, 최승희가 기금 을 전하는 방식은 직접 친일 기관에 찾아가서 헌납하는 자발적, 직접적 방식이었다. 최승 희가 찾아간 기관은 서울의 조선총독부, 종로서, 경상남도 도청, 경성지방해군인사부, 조선 군애국부군사령부, 조선문인협회, 동경 경성일보, 동경 경시청, 동경 육군성 등이다. 이러 한 기관에 최승희가 직접 기금을 헌납했던 이유는 일본제국주의와 침략전쟁, 그리고 내선 일체에 자신이 적극 협력한다는 의지를 피력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넷째, 최승희는 헌납한 기금의 세부 사용처를 지정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최승희가 기금 사용처로 지정한 곳은 독일나치군을 비롯하여 경성부방호단·군사령부ㆍ조선문인협회ㆍ조선군사후원연맹ㆍ국방 자금·황군장병휼병기금·군사보급협회·동경협화회 등으로 일본제국주의와 침략전쟁에 밀접 한 기관이었다.
요컨대, 최승희의 국방헌금 및 일제 협력 단체헌금은 자발적, 지속적, 반복적, 적극적으 로 이루어졌다.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 행위를 판별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2.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돕는 공연
최승희는 무용가로서 조선에서 4년, 일본에서 14년, 세계 순회공연 3년, 북한에서 21년 동안 활동했다(김채원 2010, 213). 최승희는 3년간 북미, 유럽, 중남미를 돌며 공연을 하고 1940년 말에 돌아왔다. 최승희가 귀국해서 “군부 쪽에 인사를 하러 갔더니,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맘껏 하세요. 그것이 시국에 봉공하는 일”(“이렇게 익찬한다”(かうして翼賛 する) 1940, 3)이라 해서 감격했다고 했다. 안제승도 경시청에서 최승희에게 일본춤 추라 고 직접적으로 강요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정수웅 2001, 346). 김재용(2016)은 일제 말에 는 문학 작가들이 ‘내선일체’를 지지한다면, 내부의 다양한 양태는 적극적으로 허락했다고 했는데(239), 최승희도 마찬가지였다. 최승희 공연의 성격을 시기순으로 검토하겠다.
1) 1941년: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권에 협력하는 무용
최승희는 군인과 경찰 가족을 위문하는 무용공연을 했다. 조선에 돌아온 첫 공연으로 경성부민관에서 “최승희 귀조 제1회 무용공연”을 개최했다. 최승희는 4월 2-6일까지 5일 간의 공연에서 전쟁에서 몸이 다친 백의용사를 위문하는 목적으로 기획되었고, 관객은 군 인과 경찰가족 2천명이었다. 최승희는 공연 수익금 2천원을 ‘군사령부’에 헌납했다(“백의 용사 위문”(白衣の勇士慰問) 1941, 2). 즉 최승희가 조선의 첫 공연을 군인과 경찰을 대상 으로 했다는 것에서 이후 행보를 짐작케 한다.
최승희는 내선일체를 위해 노력하는 협화 사업 관련자를 위해서도 공연했다. 일본 오사 카(大阪) 조일회관(朝日會館)에서 1941년 10월 30일 낮과 밤 2회 공연으로, 오사카 협화회 관계자와 반도 유력자 5천명을 초대하여 협화사업의 노고를 위로하는 목적의 무용회를 열 었다. 성지참배 유림단도 함께 초대되었다(“최승희여사 대판서” 1941, 2). 협화(協和) 사업 이란 일본(和)에 사는 조선인을 일본의 협력자(協)로 만들어 일본화하는 것이다. 즉 협화 사업은 내선일체의 맥락과 같다. 최승희는 내선일체를 실행하는 협화 사업 일꾼들을 초대 하여 춤 공연으로서 그들을 지원했던 것이다.
최승희는 조선 청년 지원병 동원을 위한 영화 시사회에서 무용공연을 했다. 허영(許泳) 이 감독하고 조선군보도부에서 제작한 영화 「그대와 나(君と僕)」는 조선인으로서 최초로 전사한 지원병 이인석에게 모티프를 얻어, 내선일체의 황민화와 대동아공영권의 전쟁 동 원을 선전했다. 이 영화는 어린 학생들을 지원병으로 이끌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총독 부는 막대한 지원을 투입하여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이 영화를 보게 했다(강성률 2012, 188-192). ‘그대’는 일본인 즉 내지인의 총칭이고, ‘나’는 조선인의 총칭으로 “그대와 나는 굳게 손을 잡고 대동아공영권의 초석이 되자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원래 최승희도 체 조하는 음악학교의 강사역으로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했다(“「그대와 나」를” 1941, 113;116).
최승희는 영화에 출연하지 못한 대신 시사회에서 공연했다. 1941년 11월 12일 오후 12 시 30분에 일본 동경극장에서 열린 「그대와 나」의 시사회 사전공연에서 최승희는 수천 명 의 관객 앞에서 공연했다.“ 「화랑(花郞)의 춤」 외 다섯 가지의 조선무용으로 조선의 정서 를 마음껏 맛보게”했다고 소개되었다(“이왕비건공비전하태임 그대와 나” 1941, 2).
조선의 청년들은 일본 침략전쟁의 지원병으로 내모는 「그대와 나」 영화 시사회에서 ‘조 선의 정서’를 풍긴 최승희 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화랑의 춤」 등 조선 춤의 민족적 색채는 내선일체라는 반민족적 목적과 어떻게 결합했을까? 최승희가 「화랑의 춤」을 춘 것 은 조선의 청년들이 신라 화랑처럼 용감하게 황군의 지원병이 되어 싸우라는 권유로 읽힌 다. 최승희 춤의 외피는 식민지 ‘조선의 정서’를 담고 있으나, 춤의 목적은 일본제국의 내 선일체에 협력하여 조선 청년들을 황군 지원병으로 내모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이처럼 최승희의 「화랑의 춤」 내부에 친일적 요소가 없더라도, 춤의 외부에 있는 행사의 목적과 의도를 겹쳐보면 친일 춤이 되는 ‘이중적 모순’이 존재한다. 무용뿐만 아니라, 친일 문학에 서도 조선의 향토성을 적극 수용하여 내선일체에 협력한 작가들이 존재했다(김재용 2016, 237-238). 즉, 최승희 춤에 조선의 향토성이 있다고 해서 민족적 성격을 지녔다고 단순하 게 평가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2) 1942년: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는 신작 무용- 일본적인 동양무
최승희가 일본무용을 자신의 무용 언어로 적극 수용했던 분기점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이다. 최승희는 12월 28-30일에 일본 동경 보총(寶塚)극장에서 ‘신작무용발 표회’를 열었다(“최승희여사 일본고전과” 1941, 4). 이듬해인 1942년에 신작 무용은 국내 에서도 공연되었다. 국내에서 신작 공연을 하게 된 계기는 최승희가 영화 「그대와 나」에 출연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고 “자신의 예술로 봉공의 길은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조선 군사보급협회의 결성을 듣고 스스로 나아가 그 무용의 제공 방안을 동 협회에 신청”(“춤추 는 무희” 1942, 3)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조선군사보급협회 기금 마련을 위한 최승희의 신작 공연은 2월-4월까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먼저, 2월 경성 공연은 16-20일까지 5일간, 주야 2회로 경성부민관에서 시행되었다.
최승희가 일본풍으로 창작한 신작 무용에 친일적 요소는 없는 것일까? 최승희는 작품으 로 친일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타당한 것인가를 살펴보 겠다. 첫째, 최승희 신작무용의 방향은 “일본적인 동양 무로!”였다. 신작무용의 형식은 부가쿠(舞樂), 노가쿠(能 樂) 등의 일본 고전에서 가져왔다(“무용으로 총후보국” 1942, 2). 이는 최승희가 기존의 서양풍이나 혹은 향토 적인 춤을 활용했던 방향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순일 본고전(純日本古典)을 공부하고 창작에 활용한 것이다. 「칠석무」사진(도판 4)에 ‘신작 일본무용을 추는 최여사’ 라 소개됐다. 최승희의 춤은 새로운 일본무용의 양식을 세우려는 육체와 정신의 새로운 도약(“일본적인 동양무 로” 1942, 4)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일본무용’으로 인식되었다. 최승희 자신도 “가장 새로운 일본적인” 무 용을 나의 육체를 가지고 창조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나의 무용기” 1942, 11;13). 즉, 자신의 춤 정체성을 기존의 ‘조선적인 것’에서 ‘일본적인 것’으로 전향했다 는 점이 주목된다.
둘째, 신작 무용의 춤 언어는 일본의 것을 사용했다. 신작 무용 종목은 일본 의식무용의 장중한 형식미를 표현한 「신전의 무(神殿의 舞)」, 노가쿠(能樂) 형식으로 죽은 자식의 모양 을 추억하여 슬퍼하며 원통한 마음과 자태를 표현한 「추심(追心)」, 일본 칠석춤의 전형적 수법을 취하여 무용화한 「칠석무」, 일본 충령(忠靈)에게 바치는 춤으로 오랫동안 전해오는 무사의 혼을 표현한 「무혼(武魂)」 등이었다(“신면목이 약여한” 1942, 4). 방민호(2007)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로 문학 활동을 했다면 글에 직접적인 친일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일 제 협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문학 매체로서 일본어를 선택하는 것 자체가 당시에 는 명백한 체제 협력의 의미를 지녔다고 평가한다(방민호 2007, 244; 275).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춤 언어에서 일본의 고전을 적극 수용했던 최승희의 신작 무용 또한 일제에 협력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최승희 신작무용의 창작 동기는 “무용의 신체제를 솔선 구현”하자는 뜻(“최승희여 사 일본고전과” 1941, 4)이었다. 이는 당시 일제 군부가 강조하던 ‘신체제운동’의 일환이었 다. 신체제운동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제 침략전쟁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하는 정치운동으 로, 대정익찬회(1940.10)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최승희는 정당과 유사한 대정익찬회에 가입했으며(김찬정 2003, 243), 대정익찬회에서 추진했던 신체제운동을 실현하기 위해 신 작무용을 발표했던 것이다.
넷째, 신작무용은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는 무용”으로 평가되었다. 최승희가 1941년 동경에서 신작무용을 공연했을 때, 일본 비평가들과 대중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최승 희의 신작무용이 일본고전을 활용했고,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했다는 이유였다(“최승희여사 일본고전과” 1941, 4). 즉 일본 평단과 대중은 최승희의 일본풍 신작무용을 ‘대동아공영권’ 을 수행하는 하는 춤으로 인식했다. 최승희도 신작무용에서 취한 소재가 모두 일본고전과 동아공영권 내의 무용을 토대로 한 것임을 밝혀서, 대동아공영권을 자신의 창작에 내적 원리로 수용했음을 보여주었다.
다섯째, 신작무용의 국내 공연은 “무용으로 총후보국(銃後報國)”(도판 4)을 목적으로 했 다. 총후보국은 전쟁을 지원하는 후방의 삶으로서 조국(일본)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전시 체계였으므로 당시에 일종의 캠페인처럼 ‘총후보국’이 강조되었다. 즉, 최승희는 무용 활동 과 그 수익금으로 후방에서 침략주의 전쟁을 지원하며 일본에 보답하기 위해 신작무용을 펼쳤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승희의 신작 무용이 공연되었다. 성기숙(2011)은 “최승희의 경우 작 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포착되는 친일의 흔적은 뚜렷이 찾을 수 없다”(136)고 했으나, 신작 무용의 방향, 춤 언어, 창작 동기, 평가, 목적 등을 두루 살펴본 결과 친일의 흔적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으로 무용으로서 친일 활동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적인 동양무로 구성된 최 승희의 신작무용은 장기간에 걸쳐 유통되었다. 1941년 12월에 동경, 1942년 2월에 경성, 3월에 전국 15개 도시(도판 5), 4월에 조선 북 부와 중국으로 전선 순회공연으로 이어졌다. 최승희는 공연 수익금 을 조선군사보급협회로 바쳤다 (“최승희 전선공연” 1942, 2).
3) 1943-1944년, 전쟁 전선에서 황군 위문공연
1943년에 최승희는 장기간의 황군 위문공연을 했다. 1943년 8월 13일에 만주로 떠난 최승희 공연 일행은 육군의 지시대로 위문공연을 계속했다. 부산을 떠나 신경(新京), 봉천 (奉天)을 거쳐 9월 15일에 북지로 갔다. 만주, 북지, 중지에서 전쟁 중인 황군을 위해 8월 부터 10월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위문 공연을 했다(“전쟁 전선으로” 1943, 3).
황군 위문공연으로 상해, 남경을 거쳐 온 최승희 일행은 11월 23일부터 29일까지 북경 신신전원(新新戰院)에서 무용공연을 했다. 매일 초만원의 대성황을 이루었다(“최승희북경 공연 중국인 측에 대호평” 1943, 4). 북경의 영자 신문 『북경코로니클』지는 “세계적인 명 성을 유(有)하는 일본인 무용가 최승희 운운”이라며 최승희를 일본인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문화인의 감격과” 1943, 2).
최승희는 1944년에도 황군 위문공연을 지속했다. 1944년 5월 3-7일까지 경성 부민관에서 행한 최승희 공연의 목적은 군사위문, 전의양양, 휼병헌금이었고, 최승희를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무희라고 광고하기 도 했다(“광고: 최승희 예술무용공연” 1944, 2).
7월 중순까지 전선 각지에서 최승희 무용공연이 지 속되었고, 수익금은 황군 장병의 휼병금으로 헌납되었 다. 이 공연은 친일 단체인 대일본 부인회 조선본부에 서 주최했으며, 공연기획 단계에서 최승희를 초빙하면 서 “무용을 통하야 징병제의 취지를 철저히”한다는 목적과 황군을 격려하고 백의용사와 산업전사를 위문한다는 목적을 표방했다. 조선군보도부, 본부정보과, 국민총력조선연맹,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군인원호 무용회” 1944, 2).
12월에 최승희는 중국에서 황군 장병을 위문하는 공연을 지속했다. 최승희는 12월 6일 에 경성을 출발하여, 화북(華北), 몽장(蒙藏, 울란바토르) 등의 각 부대를 방문하여 위문 무용을 했고, 남경(南京)에서는 일본에 협력하여 일본 점령 지역에서 국민당 정부를 수립 했던 고 왕주석(왕징웨이 王景偉, 1883-1944) 영전에 바치는 무용공연을 했다(“현지각부 대위문” 1944, 2). 최승희는 해방 직전까지 중국 일대에서 위문 공연을 순회했다. 조택원 (1973) 자서전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조택원은 조선군사령부의 촉탁 으로, 최승희는 일본 육해공군사령부의 촉탁으로 북지 일대를 순회했다(208-209).
3. 일본풍 무용 「무혼」으로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표창
최승희의 「무혼(武魂)」(도판 7)은 제1회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표창에서 추천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조선총독부와 밀접한 단체로서, 내선일체를 이루고 국방 국가체계의 완성과 동아신질서 건설을 지향한 친일 단체 였으며,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전쟁 수행에 관 여했던 거대한 조직이었다(임종국 2013, 129). 일본이 태 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 말기는 군국주의가 정점에 다다 른 시기였다. 최승희는 일제 군국주의에 충실하게도 무사 (武)의 혼(魂)을 표현한 무용으로 조선총독부와 밀접한 단체에서 문화표창을 받은 것이다.
문화추천번호 제10호로 「무혼」이 추천된 사유는 “노 (能)의 수법을 넣어 창작한 일본풍 무용으로 시국하(時局 下) 건전(健全) 유(有) 의미(意義)한 것으로 인정”하기 때 문이었다(“문화표창과 소개” 1942, 4). 「무혼(武魂)」은 일 본의 충령(忠靈)에게 바치는 춤으로 오랫동안 전해왔던 일 본 무사의 혼을 표현한 (“신면목이 약여한” 1942, 4) 작품 이었다. ‘충령’은 충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영령을 말한다. 무사, 즉 황군의 군인이 되어 일본을 위해 생명을 바치라는 의미가 담긴 춤이기도 한 것이다. 춤의 형식은 일본의 고전인 노(能)를 차용했고, 춤의 내용은 전시하에서 일본을 위해 생명을 바친 영혼을 위로하는 내용 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군국주의라는 시국에서 건전함이 담긴 의미 있는 춤으로 일본 제국에게 평가되었고,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에서 표창을 내렸던 것이다.
최승희는 자신의 예술로 봉공의 길은 없을까를 모색하던 예술가였다. 최승희 스스로 무용 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려는 자의식을 강력하게 갖고 있었고, 조선군사보급협회 결성 소식을 듣고 무용을 제공하는 방안을 협회에 자발적으로 신청하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즉, 전시체제에서 일제 군국주의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 고자 했던 대동아공영권의 세계관과 최승희의 무용 세계관은 일치했다. 성기숙(2011)은 「무혼」이 ‘조선적인 것’에서 ‘동양적인 것’으로 확장되었을 뿐, 친일을 위해 창작된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136). 최승희가 표방한 동양주의는 친일의 내적 논리에 다름 아니다. 최승 희가 가장 일본적이고 가장 아세아적인 무용을 추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신문에 글을 썼던 시기에 발맞추어, 최승희는 무용공연에서도 순일본고전을 자신의 춤에 적극 활용하는 변 화를 꾀했다. 그 작품 중의 하나가 「무혼」이다. 「무혼」은 대동아공영권의 세계관이 전쟁 동원의 논리로 활용되었던 정치적 맥락에서 창작된 무용 작품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 치와 무관하게 진공 속에서 펼쳐지는 예술은 없다. 당시의 시대 상황과, 「무혼」 창작 당시 최승희의 발언과 당시 비평과 친일 단체에서의 수상 등을 종합하면, 「무혼」은 대동아공영 을 꿈꾸었던 일본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세계관을 내면화한 결과이므로, 최승희의 자발적인 친일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혼」이 단순히 일본 전통을 소재로서만 활용한 순수한 춤이 라 볼 수 없다. 최승희가 해방 이후에 중국과 인도의 춤은 소재로 수용하지만, 일본의 춤은 철저히 배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4. 친일 글과 일본식 이름
민족성 말살 목적으로 1940년부터 창씨개명이 시행 되었는데, 이미 그 전부터 최승희는 일본식 이름으로 일본과 해외에서 활동했다. 김종욱(1993)에 따르면,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직후 인 1926년 동경 공연에서 스스로 최승자(崔承子)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이를 일본식 발음대로 샤이 쇼코(Sai Sho Ko)라 했다고 한다.
이후 일본과 해외 공연에서는 (도판 8)처럼 최승희 의 일본식 발음표기인 샤이 쇼키(Sai Sho ki)라는 일 본식 이름으로 홍보했다. 즉 최승희는 창씨개명이 시 행되기 전, 일본 활동 초기부터 일본식 이름으로 활동 했는데, 김종욱은(1993a;b) 최승희는 욕망을 꿈구며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았다.
최승희의 시동생 안제승(1994)은 대담에서 최승희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안 했다며, 최 승희가 본명이자 예명이었다고 주장한다(정수웅 2004, 347). 최승희가 일본과 해외에서 샤 이 쇼키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활동했던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최승희의 글에서는 친일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것이 드러난다. 3년간 해외 공 연을 마치고 돌아오면서부터 동양 예술 발전에 힘을 보태야한다는 자의식이 뚜렷해졌다. 최승희는 글을 통해서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을 주장했다. 그의 춤 세계관을 여실히 보여 주는 글은 『매일신보』(1942.2.11;13, 4)에 수록된 “나의 무용기: 동양무용 수립을 위해 (상)·(하)”이다. 최승희는 우리 일본의 무용계로써 국제무용계의 중심적인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며 “가장 새로운 일본적인 또한 아세아적인 무용을 나의 육체를 가지고 창조하 여 그것을 세계에 진출”시키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역할이라고 주창한다. 무용예술가로서 최승희 자신은 “우리 일본예술문화에 영원히 전하여 갈 한 다발의 꽃”이 되고자 했다.
최승희가 강조한 동양무용은 일본을 중심으로 재편된 춤을 의미했다. 이병수(2018)는 이 시기 동양은 곧 일본이었다고 한다. 서구 근대에 맞선 동양을 내세웠지만, 결국 대동아 공영권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동양주의는 일본을 아시아의 중심으로 여겼고(16), 최승희는 “일본적인 또한 아세아적인 무용”을 주창하며 동양주의를 스스로 내면화했고, 이러한 사상 을 자신의 춤으로 구현하려고 했다. 식민주의 지배를 위해 강조했던 대동아공영권을 적극 적으로 내면화하고, 무용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최승희는 자발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 던 것이다.
Ⅳ. 최승희의 친일에 관한 역사적 평가
1. 해방 직후, 최승희의 친일에 관한 입장
1) 최승희, 자신의 친일을 부정-자백-변명
해방 직후 최승희는 자신의 친일 행적에 어떤 자의식을 갖고 있었을까? 이 항에서는 최승희 내부의 시선, 즉 스스로 자신의 친일에 관한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가를 당시의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기로 한다.
1945년 8월 15일에 최승희는 중국에서 황군 위군공연을 하던 중에 조국이 해방되었다 는 소식을 들었다(민족정경문화연구소 편 1948, 87). 최승희는 바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 하다가, 북경에서 귀국선을 타고 1946년 6월 3일에 인천항에 입항했다(“최승희씨 귀국” 1946, 2). 입항 2주 뒤인 6월 19일 『조선경제신보』에는 최승희가 자신의 친일을 부정하는 기사가 실렸다.
“북경(北京)으로부터 귀국(歸國)한 무용가(舞踊家) 최승희여사(崔承喜女史)는 대일(對日) 협력자(協力者)라는 일부(一部)의 비난(非難)을 사실무근(事實無根)의 허설(虛說)이라고 일 축(一蹴)하고(강조: 작성자) 조선(朝鮮)의 고전(古典)을 무용화(舞踊化)하야 해외(海外)로 진 출(進出)할 포부(抱負)를 피(披)력한 바 있었다” (“최승희여사 세계로” 1946, 2).
위의 기사처럼, 해방 후 남한에 돌아오자마자 최승희는 ‘대일 협력자’라는 비난을 받았 으나, 사실무근이라며 일본에 협력한 사실을 부정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틀 뒤 인 6월 21일의 기사에는 스스로 친일을 인정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동안에 일본에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친일을 했다는 것은 변명하지 않겠다.(강 조: 작성자) 그렇다면 나 최승희가 해방된 조국에 와서 속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코리안 발레’를 창건하는 것으로 이바지하겠다”
(『부산일보』 1946.6.21; 정병호 1995, 254 재인용)1)
최승희가 친일은 자백하는 『부산일보』(1946.6.21.)의 내용은 이후 안제승의 대담(정수 웅 2004, 363)에도 거의 동일하게 수록되었다. 1946년 6월 21일 『부산일보』의 기사는 세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첫째, 최승희가 스스로 친일을 ‘자백’했다는 점이다. 6월 19 일의 기사에서는 일본 협력자라는 비난은 허설이라고 부인했던 최승희가, 이틀 뒤인 21일 의 기사에서는 정반대로 자의든 타의든 친일을 했다는 사실을 변명하지 않겠다며, 친일 사실을 인정했다. 둘째, 최승희는 조국에 ‘속죄’하겠다고 했다. 속죄의 사전적 의미는 “지 은 죄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앰”이다. 최승희는 자신의 친일 행위는 조국에 ‘죄’를 지은 것임을 인식했다. 셋째, 최승희는 친일 속죄의 대안으로 코리아 발레를 창건하 겠다고 제안했다. 해방 후 조국에 자신이 어떻게 속죄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최승희는 코리 아 발레를 창건하는 것을 속죄의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최승희의 행보에 “코큰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이제는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발레를 하겠다”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안제승 1993). 최승희의 선택이 당시 대중들에게 친일 속죄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는가는 차치하고, 최승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친일이라는 속죄의 대안을 찾았다. 이처 럼, 1946년 6월 21일의 기사를 통해, 최승희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했던 자백-속죄- 대안의 과정이 주목된다.
친일의 속죄로서 코리아 발레를 만든다고 선포했기 때문인지, 최승희의 행보는 재빨랐 다. 6월 17일에 최승희는 미군정의 러-취 소장과 회담하여 군정청의 원조를 요청했고, 6월 20일에 문교부 교화국(敎化局) 예술과의 협조 아래 조선 발레를 창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최승희여사가 新바레” 1946, 2). 최승희는 권력을 잡은 미군정청에 찾아가 원조를 요청 하는 적극성을 보였고, 공적 부서의 협조를 받아 조선 발레를 만들어 가겠다고 공언했던 것이다.
최승희는 곧 7월 10일까지 동양발레단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신문에 냈다. 최승희가 내 세운 동양발레단의 방향은 조선적인 선과, 중국적인 색채와, 인도적인 율(律)을 종합하는 것이었다(“동양바레단 설립” 1946, 2). 최승희는 1937년 이후 ‘일본’을 중심의 동양무용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창하다가, 해방 이후 일본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조선ㆍ중국ㆍ인도의 요소를 종합한 동양발레를 만들기로 했다.
이후, 최승희는 다시 자신의 친일을 부정하고 변명했다. 『민주일보』 1946년 7월 21일 기사에는 최승희가 환국해서 ‘제일성(第一聲)’으로 내는 발언이 실렸는데, 일제강점기에 자 신은 민족의 정신을 담으려 노력했다는 항변이었다. 최승희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 및 민족어를 빼앗으려 했을 때, 자신은 우리 조선 의상을 입고, 조선 음악을 쓰고, 조선의 형과 선과 색을 창조해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 줄기 영광을 담으려 애써왔다고 강변했다. 이것이 국내나 해외에서 조선이 낳은 딸로서 자신이 걸어온 유일한 길이었다고 주장했다(“최승희여사 환국제일성” 1946, 4). 최승희의 말이 부분적으로, 그리고 일정 시 기에는 진실일 수 있다. 그러나 최승희가 “우리 일본예술문화에 영원히 전하여 갈 한 다발 의 꽃”(“나의 무용기” 1942, 4)이 되겠다며, 1937년 이후 한결같이 일본제국주의와 전쟁범 죄에 협력한 행보와는 상충되는 발언이다.
최승희가 조선의 의상을 입고 조선의 음악에 맞추어, 조선의 형ㆍ선ㆍ색을 춤으로 나타 냈다고 해서 민족을 위한 춤이었을까? 최승희의 춤이 표피적으로 형ㆍ선ㆍ색에 민족적 색 채를 담았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내선일체라는 민족을 말살하는 반민족적인 목적, 전쟁 범죄를 일으키는 일본제국주의의 목적에 부합하는 행사에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결국은 반민족적인 춤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예컨대, 현재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우기는 목적의 일본 행사에서, 우리 무용가가 민족적ㆍ민속적 색채의 춤을 아주 잘 표현하는 춤을 추었다 해서 민족의 영광을 드러낸 춤이라 할 수 있을까. 식민지라는 사회구조를 바탕으로, 제국 주의의 목적을 지닌 춤판을 그 위에 두고, 그러한 곳에서 추었던 춤을 중층적으로 판단해 야 한다. 춤이 민족적이냐 반민족적이냐, 친일이냐 친일이 아니냐는 중층적 판단 위에서만 가능하다.
최승희는 해방 이후 남한에 돌아온 뒤, 두 달이 되기 전에 월북했다. 1946년 7월에 평양 에 있던 남편 안막은 돌연히 밤에 최승희를 데리고 평양으로 갔다(“최승희 평양에” 1946, 2). 3개월이 안 된 아들 안병달(安丙達)은 일단 남쪽에 둔 채였다(“무희최승희 영구히” 1946, 2). 결국, 친일에 속죄하는 의미로 최승희가 만들고자 했던 코리안 발레는 남한에서 완성될 수 없었다. 최승희가 월북한 이유로 안막의 권유, 김일성의 예술가 우대정책 등도 고려되나(정병호 1995), 최승희가 월북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친일파’라는 비난을 견 디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정운현 2016, 60).
2) 최승희, 해방 정국에서 친일파 명단에 포함
해방 정국에서 작성된 친일파 명단에 무용가로는 최승희가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임 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던 김승학(金承學, 1881-1965)이 1948년에 육필로 쓴 친일파 명단 263명이 2001년에 발견되었다(이덕일 2001). 이 친일파 명단이 주목되는 이유는 ‘반민특 위’의 초안으로 보이며, 집필 당시 김승학의 지위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기에 ‘친일파 명단’이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의 판단이라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 친일파 명단은 1948년에 민족정경문화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파 군상』의 초고로 추정된다(이덕일 2001, 171).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김승학이 육필로 쓴 친일파 명단, 그리고 그 명단과 짝을 이루는 『친일파 군상』(1948)이라는 책에서 무용가로는 최승희가 유일하게 포함되었다. 이것이 말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해방 정국에서 최승희는 첫 번째로 손꼽히는 친일 무용가였다는 사실이다. 아래는 『친일파 군상』의 최승희 내용 일부이다.
최승희는 무용가로 유명할 뿐더러 친일파로서도 유명한 자의 1인이니 그가 석정 막(石井 漠)에 사사한 이래 한때 조선의 ‘로칼’을 주로 현대적인 서양 무용화시켜 독자적인 경지를 보이더니 전쟁을 계기로 소위 무용의 신체제라는 미명하에 일본의 고전을 중심한 괴이한 무용으로 돌변하고 나아가서는 무용총후보국이라 하여 위문 행각으로 남북이 좁다고 다닌 것은 세인주지(世人周知)의 사실이다.
이제 기중(其中) 중요한 것 몇 가지만 들어보기로 하자. 그는 ‘황군의 눈물겨운 노고에 감격’하여 1942년 2월 16일부터 5일간 경성 부민관에서 조선군보도부, 국민총력조선연맹, 기계화국방협회 조선본부의 공동후원으로 무용공연을 하여 그 수익금 전부를 조선군사보급 회 자금으로 헌납한 사실을 필두로 1944년 5월 이래 반년간 전선 각지를 순회하여 소위 ‘백의 용사’와 ‘산업전사’ 급(及) 유가족위문공연을 계속하여 당국의 절찬을 받는 한편 수익금의 육해군 헌납을 하고 동년 12월 6일 현지 ‘장병위문’ 행각의 여정에 올라 북경, 천진을 비롯하 여 중국 각지 부대를 수개월 계속 순강하였으며 남경에서는 중화대희원에서 주제넘게 ‘고왕 주석위령무용(故汪主席慰靈舞踊)’을 하는 등 해방 당시까지도 역시 ‘황군위문 무용’ 행각 중 이었는데 그는 문자 그대로 몸과 마음을 바쳐 무용을 통한 ‘보국협력’에 힘썼던 것이다(민족 정경문화연구소 편 1948, 87-88).
해방 정국에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계열의 핵심 인사가 최승희의 친일에 관해 매우 비판적인 인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최승희는 한 마디로 “몸과 마음을 바쳐 무용을 통해 일본제국주의 ‘보국협력’에 힘썼던” 인물로 평가되었다. 일본제국주의 군사기금으로 많은 금액을 헌납한 것과, 황군 위문공연 행적을 문제 삼았다. 최승희의 시동생 안제승(1994)의 대담에서도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최승희는 일본시대에는 일본춤을 추어서 일본놈들한테 아부를 하더니, 이제 코 큰 놈이 들어오니까 코 큰 놈의 춤을 춘다면서 기회 주의자, 자기의 죄과를 모르는 저런 여자는 단죄해야 한다는 기사가 몇 군데에 실렸다고 했다. 반민특위에 회부해서 최승희를 단죄해야 한다는 말도 돌았다고 한다(정수웅 2004, 364). 이처럼 최승희에 관한 해방 직후의 사회적 평가는 ‘친일 무용가’로 일관되었다.
2. 월북 이후, 최승희 친일에 관한 북한의 입장
1946년 7월 최승희는 남편 안막(安漠)을 따라 월북했다. 북한에서는 최승희의 친일 문 제를 어떻게 접근했을까? 2012년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북한에서 펴내고 배윤 희가 집필한 『태양의 품에서 영생하는 무용가』에는 최승희의 ‘친일’이 북한에서 어떻게 인 식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 책에 따르면, 해방된 조국(남한)으로 돌아온 최승희가 친일 파라는 소문은 “이승만 패거리들의 작간”이라고 했다. 미국 공연을 하던 최승희에게 이승 만은 한국독립당 강령을 낭독해달라 요청했고, 거부한 최승희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 였다는 것이다(배윤희 2012, 8-9).
최승희가 북한으로 간 이후에도 친일 논란이 있었다. 최승희는 가슴 속 깊이 남다른 고 충이 있었는데, 지난날 왜놈들 앞에서 춤을 춘 것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에 따른 것이라 했다. “가뜩이나 불미스러운 자신의 과거사를 놓고 번민에 싸여있던 최승희에게 있어서 들 려온 이러저러한 소리들은 그의 마음을 더욱 번거롭게”(배윤희 2012, 35)했다고 한다.
최승희의 친일 논란을 잠재운 것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최승희의 친일에 관한 견해 를 통일하자고 제안했고, 최승희의 친일 논란을 ‘잡소리’라고 일축했다. 잡소리를 하는 사 람들 말대로 하면 우리는 민족 문화도, 민족무용도 건설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김일성은 “최승희는 무용에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최승희를 도와주어 민족무용 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배윤희 2012, 36). 김일성의 지침은 해방 전 망국민의 예술 인으로서 우리 민족무용을 되살리고 그 우수성을 온 세상에 알려 온 최승희의 활동을 애국 적 소행으로 소중히 여긴 것이며, 이후 새 조선의 민족문화건설에 힘과 지혜와 열정을 다 바쳐나가도록 믿음을 안겨준 고무적 지침이라고 배윤희는 논평했다(배윤희 2012, 37). 김 일성은 일제강점기 최승희의 활동을 “조선 민족무용을 현대화” 한 것으로 요약했다. 최승 희가 현대 조선민족무용 발전의 기초에 기여한 점도 강조했다. 북한은 친일에 관해 국가권 력의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철저하게 숙청 사업을 진행한 반면에, 경제와 교육 등에서는 재교육을 통해 활용하는 정책을 펼쳤다(59). 북한의 친일 청산의 과정은 한편으로는 숙청, 다른 한편으로는 재교육이라는 두 갈래로 진행되었으며 최승희는 후자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월북 이후에도 최승희에게 ‘친일’의 굴레는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는 기제로 작용 했던 듯하다. 이진아는(2021) 최승희가 1950-60년대 북한에서 행했던 무용 활동을 “친일 이라는 식민주의 유산을 내재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으로 평가하며, “친일 행적을 항일무용 으로 전유한”(185; 203) 것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3.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최승희 친일에 관한 남한의 입장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에 월북 예술가들에 관한 해금(解禁) 조치가 이루어졌다. 해금 조치 이후, 남한에서 최승희의 ‘친일’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최승희의 첫 단행 본을 엮은 강이향(1989)은 친일 이력이 최승희 개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지난 일”이라고 변호하면서도 “민족적으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174). 김채 현(1992)도 최승희가 만주에서 황군 위문공연 한 것을 언급하며, 일제에 협력한 행위라고 평가했다(244).
1993년에 최승희의 친일을 비판하는 김종욱과 옹호하는 정병호의 논란이 있었다. 김종 욱(1993a;1993b)은 최승희가 스스로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어 활동했던 열성 친일파라 주장했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직후인 1926년 동경 공연부터 일본식 이름인 최승자(崔承子)로 바꾸어 샤이 쇼코(Sai Sho Ko)로 행사했다가, 다시 최승 희의 일본식 이름인 샤이 쇼키(Sai Sho Ki)로 바꾸었다고 비판했다. 또한 최승희 측근의 증언보다, 황군위문공연, 일본군에 헌금 납부 등에 관한 객관적 기록을 토대로 친일 행적 을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에 정병호(1993;1995)는 일본 체제에서는 모두 친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공범론’ 을 펼쳤다. 민족수난사적 입장에서 보면 최승희가 희생자라는 ‘희생론’도 주장했다. 정병호 는 “친일은 했지만, 친일파는 아니다”라며 최승희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했다. 최승희는 공 적이 과오를 덮을 만큼 크기 때문에, 일부 과오는 문제되지 않는다는 ‘공과론’도 펼친다. 정병호가 주장한 친일 ‘불가피론’, ‘공범론’, ‘희생론’ ‘공과론’은 일반적인 친일파의 변명과 정확히 일치한다(민족문제연구청년모임ㆍ정운현 2014, 80-83).
일제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모두 친일을 했다는 ‘친일 불가피론’은 사실일까? 김재용 (2004)은 문학계에서는 친일 협력을 한 문인보다 하지 않은 문인이 더 많으며, 침묵ㆍ망명 ㆍ우회적 글쓰기를 통해 저항하고 자기세계를 지킨 작가들이 존재했음을 밝히며, 친일 불 가피론이 허위라고 반박한다. 한나 아렌트(2016)는 전체주의적인 상황에서 무력 (powerlessness) 현상이 존재하지만, 절대적으로 무력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행동할 방법이 있다는 것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즉, “상황이 전체주의적이라는 것이 우리가 반드시 범죄자가 돼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라며 죄책감을 일반화하는 것을 경계 했다(96).
최승희의 친일 흔적 지우기는 기념사업이 시작되면서 더해졌다. 최승희의 출생지는 서 울이라는 의견(정병호 1995;배윤희 2012;김영희‧김채원. 2014)이 다수이나, 홍천이라는 이견(성기숙 2011)도 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최승희의 고향임을 내세워 강원도 홍 천군에서 최승희 춤축제가 진행되었고, (사)최승희기념사업회가 주도했다. 2008년에 최승 희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최승희 기념사업을 추진하던 홍천군은 곤란해졌고, 강원대 교수인 한경자는 『강원도민일보』(2008.8.5)의 “최승희 예술 세계엔 친일 행위가 없었다”(박지영)라는 인터뷰에서 최승희의 친일을 부인하며 『친일인 명사전』 등재에 반대했다. 한경자의 인터뷰(2008)와 성기숙(2011)의 논문에서 최승희의 예술세계에 친일 안무작이 없음을 강조했다.
예술가의 친일 여부는 창작한 작품으로만 평가할 수 있는가? 작품 외부에서 적극적 친 일 행위를 하더라도 친일로 인정되지 않는가? 방민호(2007)는 전체주의 체제인 일제 말기 의 예술작품과 작가는 직접적으로 정치적 의미를 구성하므로,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에 대한 고찰ㆍ분석ㆍ평가 없는 전체주의 시대의 예술사란 근본적으로는 빈곤과 허위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연구자들이 작품 ‘외부’에 관해 고찰하지 않고 서는 일제 말기 예술사를 총괄적으로 바라볼 수 없고, 균형 잡힌 시각을 얻을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235).
프리실라 헤이너(Priscilla B. Hayner)에 따르면, ‘아는 것(Knowledge)’과 ‘인정하는 것 (Acknowledgement)’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어서 사실이 있어도 인정하지 않으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취급된다고 했다(안병욱 2010, 50-51). 최승희 친일 부정론자는 최승희 가 ‘친일’을 한 사실이 있어도, ‘친일파’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배경에는 최승 희의 친일을 인정하면 근대춤 성과까지 부정하는 ‘자기 부정’의 결과로 이어질까 우려하는 (성기숙 2011) 마음이 보인다. 그러나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가 말한 “과거 의 범죄와 해악을 얼버무리려고 하거나 부정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범죄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베네딕트 앤더슨 저, 서지원 역 2018, 25)라는 지적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최해리 (2009)는 최승희의 ‘친일’ 문제에 관해서 과오를 인정하고 후세대 무용가들은 반면교사로 삼으면 된다는 진전된 시각을 제시했다. 『친일인명사전』의 등재로 최승희의 예술적 가치 가 하락하는 것이 아니므로, 친일 문제를 성찰적 태도로 받아들이고 구체적 연구가 필요함 을 강조했다.
한편, 최근 최승희 연구 동향은 친일 문제보다 무용 활동의 성과에 치중되었다. 최승희 를 페미니스트로서 조망하며 일본식 이름, 일본군 위문공연과 친일적 발언은 문제지만, 무 용사적 성과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유미희 2006, 113-114). 최승희가 신 무용을 도입했던 측면을 강조하고, 새로운 춤양식을 개척했던 선구자의 면모에 주목하기 도 했다(김채원 2008;김영희‧김채원 2014;이종숙 2018). 이진아(2021)는 내선일체의 아 이콘으로 최승희의 친일을 평가하면서도 국가, 민족과 젠더의 프레임이라는 새로운 시각 에서 최승희를 해석했다. 이혜진(2017)은 프로파간다로서 최고 지도자에 대한 찬양과 숭배 라는 관점에서 최승희를 다루기도 했다(이혜진 2017).
다른 한편으로, 최승희의 친일 행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연구도 있다. 최승희의 친일 이 자의 반 타의 반이라도 일제 군국주의에 노골적으로 부역한 활동과 순응한 행적은 친일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평가했다(김호연 2016;오세준 2015). 더 나아가 최승희의 친 일은 식민지라는 상황을 적극 활용해서 자신의 안위와 예술적 욕망을 채운 것으로 보았다 (김종욱 1993;이진아 2021). 이진아(2021)는 최승희가 ‘민족의 꽃’, ‘조선의 딸’이라는 정 체성과, 이와 정반대로 ‘대동아의 아이콘’, ‘친일무용가’로서 정체성을 중층적으로 가진 것 으로 해석했다(123).
과거의 역사에서 ‘친일’의 과오를 반성적으로 직면하는 것은, 근대춤 역사학이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친일 행위를 한 무용가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역사의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최승희가 이룬 근대춤의 성과를 강조 하기 위해 ‘공과론’을 내세워 친일을 은폐하거나 축소·왜곡하기보다는, 친일의 과오와 근대 춤의 성과를 균형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4.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본 최승희의 친일 행적
최승희의 친일 행위에 자발성이 있다고 보았으나, 자발성이 없는 친일 행위라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유용한 개념을 제시했다.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1906-1962)은 유대인 대량 학살의 실무책임자인 나치 공무원이었다. 아이히만 은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데 근면한 것을 빼고 나치 학살에 어떠한 동기가 없었으나,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 문제였고,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아 렌트는 통찰했다(한나 아렌트 2006, 391-392).
즉,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학살하려는 의도가 없더라도 ‘순전한 무사유’, 즉 ‘생각없음’으로 인해 큰 악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렸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도 없고, 악마적인 것도 하나도 없으나, 다만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 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라 했다. 악의 평범성은 “다른 모든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 멍청함이 악을 자행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는 개인이 ‘생각 없 이’ 안이하게 순응하는 생활에 던져진 강렬한 메시지였다(한나 아렌트 2016, 85-86). Ⅲ장 에서 최승희 친일 행위의 자발성을 밝히는데 주력했으나, 최승희에게 ‘의도’나 ‘자발성’이 없더라도, 무사유로 행한 친일 행위가 큰 ‘죄악’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통찰을 한나 아렌트 가 제공한다.
또한 아렌트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은 ‘존경할 만한’ 사람, 자신의 의무 를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무시무시한 행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 이었다. 이는 나치 관료뿐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나타나는 현상에 적용될 수 있음을 환기시켰다(리처드 J. 번스타인 저, 김선욱 역 2009, 13). 이를 최승희에게 적용 하면, 근대춤 역사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그 시대에 무용가로서 의무를 다하 여 탁월한 능력을 세계에서 발휘했던 최승희도 의도하지 않은 무시무시한 범죄를 행할 수 있고, 이를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거북해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이론을 해석한 소병철(2019)은 국가권력이나 사회 여론이 승인한 악을 사람들이 내면화하여 스스로 악의 공범자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의심이 생기지만, 의심의 대가가 힘겨운 걸 알면 의심을 스스로 차단하는 내면의 검열, 즉 ‘무사유’ 의 수용 기제를 가동하여 국가나 조직의 크고 작은 비리와 폭력을 묵인 또는 방조하며 안 락한 생존을 도모한다고 해석했다(159-169).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던 최승희는 독립이 되 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침략주의에 순응하고 ‘무사유’의 수용 기제를 작동시켜 스스로 악의 공범자가 되어 자신의 안위와 예술활동을 보장받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Ⅴ. 맺음말: 친일의 아픈 과거에서 무엇을 배울까
일제강점기 최승희의 친일 행적이라는 아픈 과거에서 오늘날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피터 세이샤스(Peter Seixas)는 역사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아픈 과거에 관해 질문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과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과거 사람들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해 야 하는가? 오늘날 직면하는 도덕적 이슈를 위해 과거의 갈등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이것이 교육에 해당하는 세 질문이다(엘리자베스 콜 2010, 56).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세 질문에 적용해 보겠다.
첫째, 최승희 친일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최승희의 친일 과오와 춤의 공적 을 함께 ‘기억’해야 해야 한다. 일제 침략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최승희의 친일 행위는 첫째 10만원 이상의 거액을 국방헌금 및 친일 단체에 자발적으로 기부한 것, 둘째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권에 협력하여 장기간의 황군 위문공연을 한 것, 셋째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일본풍 신작 무용을 창작했고, 「무혼」으로 국 민총력조선연맹이라는 친일 단체에서 문화표창을 받은 것이다. 최승희는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개인적 안위를 보장받았고, 세계적인 무용가라는 명예와, 막대한 공연 수익 을 갖게 되었다. 친일 협력의 대가는 오직 최승희 자신의 사적 이익으로 귀결되었음을 ‘기 억’해야 한다.
둘째, 최승희의 친일 행적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최승희의 친일은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는 ‘친일불가피론’은 정병호(1993) 이후 무용계에 대세를 이루고 있다. 즉, 자발 적인 친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자료를 검토한 결과, 최승희가 국방헌금을 기 부하는 과정이 상당히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혔다. 최승희가 국방헌금과 일제 협력 단체에 헌납하는 행위는 지속적, 반복적,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최승희는 공연을 마친 뒤에, 공연 지역에 곧장 공연 수익금을 헌납했고, 최승희가 직접 친일 기관에 찾아가서 헌 납하는 자발적, 직접적 방식이었으며, 헌납 기금의 사용처까지 명시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또한 최승희는 일본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주창했던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친일 의 논리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내면화하고, 그것을 무용 작품과 글로 표현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승희의 ‘공과론’도 경계해야 한다. 친일의 행적을 조심스럽게 접근할 때 등장하는 것 이 공과론이다. 공적을 고려하면 친일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대한민국의 발전에 공적이 있는 인물을 친일파로 규정하여 흠집을 내고 평가를 오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적이 있다 해서 그 과오를 다룰 수 없다는 논리는 납득하기 어렵다. 공은 이미 분에 넘치 게 인정되고 전파되어 왔으며, 심지어 왜곡된 형태로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강요한 것이 현실이라는(조세열 2010, 289-290) 통찰은 일종의 신화가 된 최승희에게도 적용된다.
셋째, 오늘날 직면하는 도덕적 이슈를 위해 과거 최승희의 친일 행적 논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한나 아렌트는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한나 아렌트 2016, 17)이라 한 다. 한나 아렌트가 통찰하였듯, ‘무사유’가 엄청난 악으로 귀결되는 현상은 과거의 나치나 최승희의 친일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고, 각자가 사유하는 주체로서 무용계에 존재하는 데 이 연구가 도움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