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Society for Dance Documentation & History

pISSN: 2383-5214 /eISSN: 2733-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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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Development Process of Han Sung-jun’s Dance and Seoul Region Dance 한성준의 춤과 서울 지역 춤의 전개 과정 연구 190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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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 Dance Journal Vol.74 No. pp.29-65
DOI : https://doi.org/10.26861/sddh.2024.74.29

A Study on the Development Process of Han Sung-jun’s Dance and Seoul Region Dance

Kim Kyungeun*
*Lecturer, Arts Institute of Seokyeong University

+이 논문은 2024년 8월 2일, 서울돈 화문국악당에서 개최된 2024 서울 경기춤포럼에서 발제한 원고를 수 정‧보완한 것임.




++이 논문의 주제, 제목, 연구방향 및 연구방법 등을 무용인류학자 최 해리(사단법인 한국춤문화자료원 이사장) 박사와 논의하여 진행한 것임.




+++이 논문의 일부 오류에 대해 윤중강 공연평론가의 수정‧보완 의 견을 반영함.


* Kim Kyungeun beki0815@hotmail.com
July 15, 2024 August 18, 2024 September 27, 2024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lluminate the development and characteristics of dances in the area of Seoul based on achievements and significant contributions of Han Seong-jun, a master of Korean traditional dance. The study period spans from 1908, when Han Seong-jun settled in Seoul, to 1941, the year of his passing. Research methods involve literature related to Korean music and dance, as well as examining newspaper materials. The research focuses on Han Seong-jun’s dance lineage within traditional dance. The findings reveal that dance evolved through both theatrical and private arts organizations. In the early 1900s, Seoul-based dances, following Han Seong-jun’s legacy, were performed by artists associated with various private arts groups, gradually transitioning into commercialized, staged, and entertainment-oriented forms. From a traditional and creative perspective, dances are categorized into those transmitted and performed continuously and those that have disappeared and are now being revived. From today’s perspective, the approximately 72 works that Han Seong-jun staged, restructured, and created can be considered ‘Han Seong-jun style new tradition’. Most of the works have been destroyed, but there has been a movement to restore and reproduce them recently.



한성준의 춤과 서울 지역 춤의 전개 과정 연구
190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김경은*
*서경대학교 예술교육원 강사

초록


본 연구의 목적은 한국춤의 근본인 한성준의 업적과 주요한 발자취를 따라 그 시대 서울 지역의 춤의 전개 과정을 조명하는 것이다. 연구 기간은 한성준이 서울에서 안착한 1908년부터 생을 마감하는 1941년으로 정하였고, 연구방법은 국악 및 무용사와 관련된 문헌과 신문자료의 내용을 중심으로 춤의 생산·유통, 그리고 전통‧창작의 요소에 관해 논의하였다. 연구대상은 전통춤을 바탕으로 하는 한성준 계열의 춤으로 한정하였다. 연구결과 첫째, 생산‧유통의 관점에서 극장 소속의 예술단체와 민간 예술단체를 중심으 로 춤이 전개 되었다. 1902년 협률사를 포함한 서구식 극장에서 한성준의 춤과 그 계보를 잇는 서울춤은 극장 소속의 예술단체와 연구회의 특성을 지닌 여러 민간 예술단체 소속 의 예인들에 의해 공연되면서 점차 상업화, 무대화, 연예화, 극화되었다. 둘째, 전통‧창작 의 관점에서 전승‧연행되는 춤과 소멸‧재현되는 춤으로 구분된다. 한성준이 무대화‧재 구성‧창작한 약72개의 작품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한성준流 신전통’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소멸되었지만, 최근 복원‧재현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Ⅰ. 서 론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한국춤, 그리고 오늘날 무대에서 추어지는 대부분의 한국 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 한성준이 자리한다. 한국춤의 근본이자, 전통예술의 거장 한성준이 탄생한지 올해로 150년이다. 이에 그의 업적과 주요한 발자취를 따라 그 시대 서울 지역의 춤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조선 시대의 공연예술에 있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커다란 변화를 겪은 시기로, 근대식 극장으로 발전하기 위한 통로와도 같은 무동연희장이 서울을 중심으로 많이 세워졌다. 당 시 수도였던 서울(한성) 지역에 협률사를 시작으로 전기조명이 설치된 실내 극장들의 연이 은 개관은 안전한 공연장 확보와 동시에 관중의 확보를 이루었다(신근영 2012, 135-147; 165). 이러한 근대적 변화는 서울을 중심으로 춤 공연과 활동이 전개되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이에 본 연구는 서구식 극장이 설립되기 시작하며 근대화 움직임이 일어난 서울 지역에 주목하였고, 1908년 개관한 원각사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게 되면서 서울에 안착한 한성준의 활동에 주목하였다. 시대 구분은 한성준이 서울에서 안착한 1908년부터 생을 마 감하는 1941년을 기준으로 190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로 정하였고, 연구방법은 국악 및 무용사와 관련된 문헌(단행본, 논문)과 신문자료를 바탕으로 한성준의 춤과 서울 지역 춤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특징을 춤의 생산‧유통 그리고 전통‧창작의 관점에서 도출하였다. 연구대상은 전통춤을 바탕으로 하는 한성준 계열의 춤으로, 최승희, 배구자, 조택원 등의 신무용을 발전시킨 인물들의 춤은 배제하였다.

    한성준은 1874년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나 7살 때부터 춤과 북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의 춤과 장단에 대한 숙련도는 이미 20세에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된다. 한성준은 여러 마을 을 유랑하며 굿판과 놀이판을 다니다 1908년 개관한 원각사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게 되면 서 35세에 서울에 안착한다. 원각사 소속의 관기 및 기생들에게 승무를 비롯한 민속춤을 가르쳤고, 이때부터 그의 춤 전수활동은 시작되었다(오화진 1992, 17-19; 29). 한성준이 서울에서 활동한 시대는 조선의 근대화 움직임과 맞물렸고, 조선의 춤이 “오랫동안 발전되 지 못하고 자멸의 상태에 빠져 있는 위기 상황”(“묵은 조선의 새향기 가무편 A” 1938; ”고전무용대회 사장된 우리 문화유산 호세를 대중에 이바지” 1938)과 제대로 된 지도·연구 기관이 없었던 환경에서 그는 “조선예술계의 혜성적 존재”(“묵은 조선의 새향기 가무편 A” 1938)로 인식되었다.

    한성준은 명고수로 이름을 떨치며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 樂硏究會)의 임원이자 회원으로 활발한 예술 활동을 이어갔고, 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축적 된 경험을 바탕으로 1937년에 조선음악무용연구회(朝鮮音樂舞踊硏究會)를 설립했다. 조선 의 춤에 보다 집중하여 활동을 시작한지 채 4년도 되지 않아 한성준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의 서울‧경기춤의 맥은 손녀 한영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한성준이 1908년 서울로 상경한 이후부터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그를 중심으로 서울 지역을 중심으 로 한 춤은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되었는지 서구식 극장이 들어서면서 가속화된 근대화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한성준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인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생산·유통의 관점에서 서울 지역의 춤을 극장 소속의 예술단체와 민간 예술단체의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고, 둘째, 전통·창작의 관점에서 의 서울 지역의 춤을 전승·연행, 그리고 소멸·재현되는 작품의 범주로 나누어 논의하겠다.

    Ⅱ. 생산・유통의 관점에서 본 서울 지역의 춤

    1900년대 초 협률사를 위시하여 많은 서구식 극장들이 줄지어 개관하면서 서울지역의 근대 극장문화가 형성되었고, 극장에 소속된 민간예인들이 정기적으로 공연활동을 펼치면 서 이전과는 다른 춤문화가 형성되었다. 상업적인 공연기획과 홍보를 통해 전통춤이 점차 관객의 호응과 요구에 따라 개량되면서 관습적이고 반복적으로 연행된 작품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창작화 또는 극화된 것이다. 한성준은 1907년 동대문 광무대의 명창 송만갑을 따라 송만갑 협률사의 일원으로 들어가 고수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08년 원각사 개 관 이후 정기적으로 원각사 무대에 출연하게 되면서 그는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정기적인 공연과 함께 원각사의 관기와 기생, 그리고 민간예인들에게 춤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는데, 승무를 비롯한 각종 민속춤을 가르쳤다(오화진 1992, 20-22; 29). 관기제도 폐지로 인해 극장에 소속된 기생들의 궁중춤에 의해 그 또한 영향을 받으며 형성·발전된 춤은 무대라는 공간적인 요소와 극장이라는 상업·유통적 요소에 의해 점차 ‘보여 지는 춤’으로 창작화되고 무대화되었다. 이러한 전개 과정을 협률사, 관인구락부, 원각사, 광무대, 단성사, 연흥사, 경성부민관 극장과 소속예술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극장 소속 예술단체 중심

    1902년 개관한 협률사는 한국 근대춤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는 서구식 극장이다. 이후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극장이 줄지어 생겨났고, 1908년 관기제도의 폐지로 소속을 잃어버린 관기와 기생들, 그리고 민간예인들의 활로는 자본과 연결된 극장 무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전통 연희자들의 공연활동을 주선하고 기획과 영업을 주도 했던 극장들은 그 당시 예술의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는 문화산업의 구심점이 되었다. 극장 건설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대부분 토착 자본가들로 조선 후기부터 이어지는 전통연희의 기획·후원층이면서 협률사 시대부터 상등관객의 중심을 이룬 주요 소비자(백두산 2017, 199-200)이기도 했다.

    이러한 극장업자들의 조력으로 전통연희는 대중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대부분의 극장에 소속된 예인집단이 존재하였는데, 주로 창부(唱夫)와 악사 로 구성된 남성 예인들은 극장 소속이거나 이름을 내건 단체를 조직하면서 ‘-일행’ ‘-협률 사’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주기적인 지방순회공연을 통해 서울춤 을 대중들에게 소개하고 전파했다(백두산 2017, 354). 1900년대부터 1940년대 사이의 춤 과 관련된 주요 극장이었던 협률사, 광무대, 단성사, 연흥사, 경성부민관 등 서울에 위치한 5개 극장의 소속 예술단체와 주요 공연 및 특징은 <표 1>과 같다.

    표 1

    조선시대 5개 극장 소속 예술단체와 주요 공연 및 특징

    (Performing Arts Groupsm Major Performanc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Five Theaters in the Joseon Dynasty)

    극장명 개관- 폐관연도 소속 예인 공연 내용 특징
    협률사 (協律社) 1902 -1906
    • -민간예인 (기생,남사당패, 창부,광대)

    • -관청 소속의 전통예인이 협률사 소속으로 일원화(백두산 2017, 153)

    • -첫 공연 1902.12.4.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戲)는 창극의 형식으로 <춘향전>과 <심청전> 공연

    • -종합적 연행(전통연희물): 풍악을 바탕으로 (궁궐)기생의 춤, 광대의 판소리, 무동패의 무동놀이, 남사당패 땅재주, 공놀이, 쌍줄타기, 농악, 협률굿, 토막창극 등

    • -소춘대유희는 입장료를 받고 처음 올려진 공연

    • -설장구놀이, 무동놀이 등의 기예들이 레퍼토리에 포함

    • -연희활동을 독점중개하고 극장연희를 주관한 최초의 연희회사. 창부의 판소리와 관기의 가무를 중심으로 공연(백두산 2017, ii)

    관인 구락부 (官人 俱樂部) 연예장 (연극장) 1907 -1908
    • -민간예인들과 기생들

    • -항장무, 편사놀음 등

    • -항장무는 조선 후기 상연된 무극으 로, 중국 진나라의 홍문연(홍문에서 있었던 사건)이야기를 담음

    • -편사놀음은 화살이 과녁에 맞는 순 간 기생들이 가무를 즐기는 형식의 공연

    • -관인구락부의 항장무 공연에 대한 일본인 우스다 잔운(薄田斬雲)의 기 록이 있음

    원각사 (圓覺寺) 1908 -1909
    • -민간예인들과 기생들

    관기춤, 걸립, 판소리 등
    • -한성준이 원각사에서 정기적 공연 을 하면서 서울에 안착

    • -이 무대에서 관기들의 궁중무용을 구경한 것이 한성준 춤의 자산이 됨

    • -원각사에서 관기 및 기생들에게 승 무와 각종 민속춤을 가르침(오화진 1992, 15-23)

    광무대 (光武臺) 1907 -1930
    • -기생, 농악대, 무동,솟대쟁이패, 남사당패,창자(唱者)

    • -소속단체: 토월회 광월단

    전통연희, 창극, 연극, 가면극, 검무, 정재, 승무, 농악, 기악연주, 무동극, 재래구극, 단가, 선소리, 땅재주, 판소리, 재담, 씨름 등
    주요공연)
    • -기획공연.1908.5.

    • -광월단.1927.10.25-31. 춤, 연희, 기예, 판소리 등

    • -신연희와 구연희, 신연극과 구연극을 병행하는 운영전략, 1910년 후반에는 구극보다는 신극이 더욱 성행

    • -전통예술단체 ‘광월단’의 주무대, 광무대를 1928년 인수함(박주희 2022, 34)

    • -주로 전통연희가 공연됨

    단성사 (團成社) 1907- 1917 소속단체: 강선루 (1912년4월부터6월 까지 약 두 달간 연행) (백두산 2017, 356) 삼층무동, 연극, 영화, 가무, 곡예 등
    • -설립초기에는 전통연희 선보이고, 이후는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활용

    연흥사 (演興社) 1907 -1914 소속단체: 혁신단 (1911결성) 무동, 예기창, 평양패, 춘향가, 기예, 연극, 창극, 가무극 등
    • -혁신단은 조선 최초의 근대 극단으 로 주로 신파극 공연을 많이 함

    경성 부민관 1935 -1945
    • -소속예인 없음

    • -1935. ‘제1회 한성준 창작무용발표회’

    • -1937.10. 첫 ‘한영숙 무용발표회’

    • -1938.5.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의 <고전무ㄴ용대회>

    • -약 1,400석 1)규모의 최초의 대극장

    협률사의 첫 공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戲)’에서는 창극 춘향전심청전이 공연되 었고, 관객에게 입장료를 처음 받은 공연으로 그 의의가 크다. 협률사는 예인들의 연희활 동을 독점중개하고 극장연희를 주관한 최초의 “연희회사”(백두산 2017, ii)로 이해할 수 있다. 기생, 남사당패, 창부, 그리고 광대 등의 민간예인과 관청 소속의 전통예인이 협률사 의 소속으로 일원화되어 활동을 하였는데, 주로 종합적 연행을 선보였다. 공연내용으로는 궁궐의 기생춤, 광대의 판소리, 무동패의 무동놀이, 남사당패의 땅재주, 공놀이, 쌍줄타기, 농악, 협률굿, 토막창극 등이다.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부르다레(Emile Bourdaret)의 글을 통해 당시 궁중 춤을 추는 무용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에밀 부드다레의 원작 한국에서 (En Corée, 1904)에서 묘사된 협률사 공연 당시 기생의 모습을 김중현(2015)이 번역한 내용도 있는데, 정진국의 번역서(2009)와는 내용에 있어 차이를 보이지만, 김중현의 묘사 가 더욱 자세하다.

    드디어 작은 인형들이 나온다. 머리는 가발로 틀어올리고 발까지 닿는 가짜 소맷자락을 걸쳤는데, 적어도 색상만큼은 꽤 우아하다. …(중략)… 그녀들은 전혀 수줍음이 없는 어린 ‘기생’들이다(Bourdaret 2009, 259).

    열다섯에서 열여덟의 이 귀여운 여인들은 모두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중략)… 선명한 색상의 비단옷 속에 신데델라의 발이 삐죽이 예쁘게 드러나 보이 는, 짙게 분장한 그 작고 귀여운 인형들이 종종 걸음으로 조르르 돌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 기도 하면서 펼치는 춤사위는 눈을 아주 즐겁게 해주었다(김중현 2015, 84).

    도판 1

    관인구락부의 항장무 출연 기생들

    (Gisaeng Performers of the Hangjanmu at the Gwaningurakbu). 백두산, 2017.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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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률사가 폐관되고 원각사가 승인 받기 전까지 이곳에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가 설치 되었는데, 이곳에서 기생들이 춘 항장무에 대해 일본인 우스다 잔운(薄田斬雲)은 “몰상식” 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매우 낮은 수준의 무대 연출을 지적했다. 나쁜 무대 배치, 너무 많은 출연자들, 그리고 관객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고 표현했다. 이는 안무자 혹은 예술 감독이 프로시니엄 무대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들로 보인다.

    막이 열리면 무대는 기생들로 가득하다. …(중략)… 마치 파출소 앞에 모인 군중들 같다. …(중략)… 무대의 배치가 나쁘기 때문에 남의 집 좌식 연회를 울타리 밖에서 엿보는 것 같다. 우(초나라 인물)와 패공(한나라 인물)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중략)… 문을 상징하는 창을 든 기생 두 명 때문에 무대가 가득 찬 꼴이다.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배려가 없어 몰상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薄田斬雲 2016, 87-89).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극장 주도의 전통춤 공연은 지속되었고, 무대 위 근대 춤으로서의 성격과 면모를 서서히 갖추기 시작했다. 원각사 개관 이후 이곳에서 정기적인 공연을 하게 된 한성준은 서울로 상경하여 자리를 잡는다(오화진 1992, 20). 원 각사에 소속된 관기 및 기생들에게 승무와 각종 민속춤을 가르치면서 그는 동시에 관기들 의 궁중무용을 접하게 된다(오화진 1992, 21).

    극장들의 상업적 유통체계와 관객들의 호응에 따른 예인집단들의 창작 작업은 전통예술 의 무대화, 대중화, 극화, 연예화, 상품화로 이어졌다. 극장에 소속된 예인들은 극장이 원하 는 방향으로 공연을 만들어야 했고, 관객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작품을 연구하고 개발했다. 당시 극장연희 홍보는 신문매체를 이용한 광고가 주를 이루었는데, “동네를 돌며 공연을 홍보한다.”는 의미의 일본어 마찌마와리는 극장 홍보 문화로 1920년대까지 지속되었다(김 남석 2017, 55-80).

    토월회(1923-31)라는 극단은 광무대를 상설 전용극장으로 1년 정도 사용하였고(성명현 2016, 179-218), 이후 전통예술단체 광월단이 1928년에 광무대를 인수하여 주요 활동무 대로 사용되었다. 주로 전통연희가 공연되었던 광무대는 지금까지도 활발한 전통춤·음악의 인큐베이터이자 기획사로 그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 1908년 5월 27일(음력)의 기획공연에 서는 관기남무, 가인전목단, 검무, 이화무, 승무, 한량무, 성진무, 시사무, 무고, 전기광무, 지구무, 무동, 항장무 등을 선보였는데, 주목할 것은 이화무, 성진무, 시사무, 전기광무, 지 구무 등의 새로운 춤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여 만들어진 춤들이 다(김영희, 김채원, 김채현, 이종숙, 조경아 2014, 299-300).

    1907년 개관한 단성사의 경우, 설립초기에는 광무대와 같이 전통연희를 선보였으나 이 후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주로 활용되었다. 소속단체 강선루는 1912년 4월부터 6월까지 약 두 달간 공연을 연행하였다(백두산 2017, 356). 공연내용으로는 포구락, 무고, 승진무, 전 기무, 승무, 전기호접무, 검무 등이고(“연예계: 강선루, 혁신단” 1912.5.18.), 같은 해 개관 한 연흥사에는 혁신단이라는 극단이 결성되어 신파극 공연을 주로 하였다. 강선루의 작품 개량의 노력이 보인 작품은 연극적 요소가 짙은 무용극 항장무로, 음악적·연극적·청각적 요소가 강화되었다.

    1912년 공연활동 중 눈에 띄는 것은 전기호접무로, 전기조명을 이용한 것과 그해 6월 검무에서 색조명을 사용한 것인데,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극장 조명기술을 응용하여 나비 춤을 새롭게 전기호접무로 개량을 시도하였다(백두산 2017, 354-358). 이 작품은 나비가 날개를 활짝 핀 모양으로 팔을 옆으로 크게 벌려 추는데, 이 소매에 여러 가지 색의 조명을 비추어 시각적 효과를 보여준 춤이다. 극장의 흥행성을 높이기 위해 무대조명을 이용한 새로운 시각적 볼거리를 위해 만든 춤으로, 미국 무용가 로이 풀러(Loie Fuller)가 창안한 춤이 일본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와 전기춤으로 추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김영희, 김채원, 김채현, 이종숙, 조경아 2014, 322-323).

    1935년 개관한 경성부민관은 약 1,400석 짜리 규모의 최초의 대극장으로, 좌석배치도를 보면 1층 932석, 2층 427석으로, 총1,359석이다(이정희 2008: 143). 극장 소속의 예인들 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1938년 5월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주도한 고전무용대회를 개 최한 바 있다(“팔도백화가 경연할 여유명창경창대회 금야 삼,사 양일간 부민관대홀에서” 1938.5.3.). 이 대회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민간 예술단체 논의 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민간 예술단체 중심

    극장 무대에서 전통공연예술이 점차 사라져가던 1915년 3월, 판소리 명창들의 주도하에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이 결성되었고, 판소리와 창극 등이 공연되었다. 하지 만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서양문화와 신파극의 유행으로 단체는 해체하게 된다. 1920년부 터 일본의 문화통치(文化統治)가 시작되었고, 조선인의 언론과 집회가 허용되면서 전통예 술계는 새로운 전문단체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커져갔다. 조선음악에 대한 부흥의 물결 은 1930년대로 이어져 성악, 정악, 춤, 연희 등 다양한 장르에서 예술인 전문단체들이 조직 되었다(이형환 2022, 1-3).

    그 중 한성준에 의해 설립된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그동안의 성악과 연극 중심의 예술 단체에서 벗어나 조선의 춤과 음악이 처음으로 중심이 되는 단체라는 점에서 점차 소외되 던 전통춤 예술의 위상과 입지를 굳히는데 기여한 공이 매우 크다. 당시 신문 기사의 소개 글 중 “조선에서 처음으로 창립된 조선음악무용연구회”(“고전무용대회 조선특산품전람회 기념 전조선향토연운대회총관” 1938.4.23.)라는 문구에서 이 단체의 역사적 의의를 확인할 수 있고, 또한 창립총회의 광경을 전하며 “춤과 관련해서는 문헌이 전무하였던지라 연구문 의 발표와 기관 잡지를 발간하기로 된 것은 매우 의의 깊은 일”(“신춘을 맛는 조선악삼대 진영” 1938.1.6.)이라고 설명한 것에 따라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역할과 사회적 기대가 얼 마나 컸는지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의 기사에서 한성준이 생각하고 있던 연구회 설립의 필요성과 당위성, 그리고 조선춤을 대중화시키고자하는 그의 포부와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예술에 불타는 가슴은 쇠퇴하야가는 조선가무음악을 볼 때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드니 인생은 짧고 예술도 짧구나하며 장태식을 한다. …(중략)… 은근한 번민과 고통이 그를 소리업시 울리고 잇스니 그것은 최근 조선고전가무음악이 점점 침체령락하야가는 조선예술 게를 슯허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는 최근 이방면의 부흥에 발분망식하야 활약한 결과 상당 한 활기도 업지는 안흐나 이것으로는 도저히 락관할 수 업다하야 조선고전가무음악을 붓드러 일으키기 위하야 몃몃 동지들과 악수하야가지고 현대식연구기관을 건설하얏스니 그것이 곳 조선음악무용연구회다 …(중략)… 이것이 완성되는 날에는 조선가무음악을 희망자에게 연구 교수하는 동시에 매월 한번식 고전가무를 공연하야 대중화시켜서 장래의 빗나는 발전을 도모 하기로 되엇스니 이것이 예술조선의 통쾌한 새소식이 아니고 무엇이랴!(“묵은 조선의 새향기 가무편 B” 1938.1.7.)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설립되기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회 혹은 협회 의 성격을 지닌 예술단체(광월단, 조선고가무회, 조선음악협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 구회, 조선가무연구회)의 주요활동과 특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920년대는 주로 구극과 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성악 공연이 주를 이루었고, 춤의 비중 은 적었으며 공연의 일부로 소개되는 정도였다. 음악의 경우도 전통음악의 단독공연보다 는 서양의 예술장르와 혼재되는 공연의 경향을 보인다. 1930년대 설립된 단체의 경우, 한 성준의 활동이 나타나며 두 개의 예술단체를 거쳐 마지막으로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설립 된다. 1920년대 광월단, 조선고가무회, 조선음악협회가 설립되었고, 1930년대 조선음률협 회, 조선성악연구회,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설립되었다.

    1920년에 설립된 광월단은 1930년 화재로 광무대가 폐관하면서 활동을 중단하기 전까 지 총 69회의 공연활동을 하였다. 설립 이후 광무대를 주 무대로 활동하다가 1928년에 광무대를 인수하였고, 춤, 연희, 기예, 판소리, 창극, 가극, 재담 등을 공연했다. 광월단의 설립목적은 구극 배우들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는데,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신파극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구극보다 신파극이 훨씬 성행하던 시기에서 조선 구극 부흥을 위한 단 체였다(박주희 2022, 38). 당시 일반적으로 극장이 예술단체를 결성해서 그들의 활동내용 및 공연성격을 결정지은 것과 달리 광월단은 전통예술단체 최초로 전용 극장을 소유했다 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하다. 공연 중 춤과 관련한 부분은 1927년 10월 25-31일 열린 추기대연주회에서 “임명옥양의 형제댄스”(“구극광월단 광무대에서 개연” 1927.10.27.), 그리고 1927년 11월 열흘간 개최된 상설공연에서 “합창대의 댄스”(“광월단대만원 매야광 무대에” 1927.11.5.)인데, 춤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용어에서 볼 때 서양식의 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연희형식의 작품에 춤적인 요소가 포함되었을 거라 생각된다.

    1925년 설립된 조선고가무회는 조선구가무흥행부라는 명칭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단 체명에서 그 설립목적을 알 수 있다. 판소리 중심의 공연이 이루어졌지만, 가무와 기예도 포함되었다. 1927년 2월 14일부터 21일까지 열린 조선명창대회가 흥행을 이루면서 연 장공연을 하였고, 조선일보의 후원을 받았다(“조선가무대회” 1927.2.12.;“난재의 명창대 회 금십칠일부터 독자우대 사일간독자반액” 1927.2.18.). 1928년 조선음악 부활을 목적으 로 설립된 ‘조선음악협회’는 단독공연보다는 서양식 장르와 함께 연행되는 혼성공연형태를 보였고, 그 밖에 연극, 강연, 영화, 댄스, 마술 등의 장르도 공연되었다. 1928년 3월에 열린 제2회 남녀성악대회에서 승무, 명기댄스가 공연되었고, 신춘남녀명창대회에서 승무와 서양댄스가 공연되었으며, 같은 해 5월 석춘음악무도대회에서는 모스크바의 무용수들이 출연한 바 있다. 이렇게 동·서양을 아우르는 공연은 1920년대의 전형적인 전통예술 공연 형태였다(박주희 2022, 57-62).

    1930년 설립된 조선음률협회는 총무로 한성준이 선출되었고, 1,2,3회 공연에 출연하며 활동하다가 1932년에 조선악정회로 개칭될 때 발기인에 포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 만 비교적 한시적 활동으로 마무리되었다. 조선음률협회의 활동 중 두드러지는 점은 여류 명창 공연이 큰 인기를 끌었고, 창작판소리 작업도 활발히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남자 명 창들로만 구성된 조선악정회는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활동을 지속하지 못했다 (박주희 2022, 75-96). 이 단체에서 한성준은 고수로 활동하였다.

    1934년에 설립된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의 설립목적은 조선음률의 부흥, 조선 가무의 연구, 판소리 창자의 양성과 홍보이다. 이 연구회에서 한성준과 한영숙의 춤 활동 이 드러나는데, 제1회 조선음악전에서 한성준은 훈령무를 한영숙은 발나무를 추었다 (“향토음악의 정수모은 의의기푼 조선음악전” 1940.6.19.). 이 단체에서는 판소리, 잡가, 창 극, 산조, 병창, 무용 등 한국 전통공연예술 전반을 다루었는데, 판소리와 병창, 그리고 기 악 위주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주요부서로 성악연구부, 기악연주부, 교습부, 흥행부, 외 교부로 나누어져 비교적 조직적으로 구성되었고, 조선일보의 지속적인 후원과 조선성악연 구회 후원회가 1936년 5월 결성되면서 보다 활발한 실험적 무대를 시도하게 되었다(박주 희 2022, 97-161).

    도판 2

    조선성악연구회회원 일동

    (Members of Joseon Vocal Assocation) “조선성악연구회회원일동” 1936.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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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12월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설립되기 전, 두 번의 의미 있는 발표회가 열렸는데 1935년의 제1회 한성준 창작무용 발표회와 1937년 10월 첫 한영숙 무용발표회다. 이 두 발표가 열린 시기(연도)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명확히 짚고 넘어 가야 할 필요가 있다. 제1회 한성준 창작무용 발표회가 1935년 열렸다는 증거가 되는 참 고자료는 두 개다. 첫째, 한영숙의 고희를 기념하여, 한영숙의 직접 대담과 한영숙의 제자 들이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엮은 책 춤을 지키는 마음(문일지, 1989)이다. 42쪽부터 47 쪽까지 매우 상세하게 발표회를 준비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는데, 1935년 여름부터 발표 회를 시작하여 선선한 바람이 부는 시절을 지나 공연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민관의 개관 날짜가 1935년 12월 5일이기 때문에 부민관에서의 발표회는 이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증거자료는 한성준의 1937년 인터뷰 내용이다. 잡지 조광(1937, 134)에서 그는 “그런데 재작년 내가 부민관서 한 번 공연한 댐부터는 승려들이 항의를 하야 이제부 터는 당국서도 승무는 공연을 허가해 주지 않는데 예술로서 귀한 이 춤을 이해하지 못하는 승려들의 심리를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내용에 근거하여 제1회 한성준 창작무 용 발표회는 1935년에 열렸다는 것이 입증된다.

    이 공연에 대해 한영숙 또한 회상하였는데 “춤공연이 있은 며칠 후에 할아버지를 난처 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무용발표회 때 할아버지가 춘 승무가 그 사건의 원인이었다. 승무를 출 때 가사, 장삼, 고깔을 벗어던진 후 교태와 아양을 부렸다고 그 공연을 지켜 본 불교신도들이 승무를 신성하고 경건한 불교를 모독하고 불교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춤 이라고 당장 공연을 중지하라고 일어섰던 것이다.”(문일지 1989, 46). 이렇듯 제1회 한성 준 창작무용발표회는 1935년 이루어진 것으로 한성준과 한영숙의 이야기가 일치하고 있 다. 한영숙의 첫 무용발표회의 일시와 구체적인 내용이춤을 지키는 마음(문일지 1989, 47-51)에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한성준의 창작무용발표회 이후에 한영숙에게 첫 발 표회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기술되어 있고, 이 때 한영숙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한성준의 발표회에서는 승무(한성준), 검무(제자들), 태평무(정보없음), 한량무(정보없 음), 살풀이(한성준) 등의 작품이 공연되었고, 한영숙의 발표회에서는 학춤(한영숙), 검무 (동료들), 승무(한영숙), 태평무(동료), 살풀이춤(한영숙) 등이 공연되었는데, 그녀의 발표 회를 위해 한성준은 총기획과 안무를 담당하였다(문일지 1989, 47). 조선음악무용연구회 는 조선의 음악과 무용을 연구하고 보급시키기 위해 설립되었고, 음악부, 무용부, 가극부, 출판부의 4개로 구성되었다(“신춘을 맛는 조선악삼대진영” 1938). 다음의 신문기사에서 한성준이 조선춤의 교육과 보급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우리들이 첫째 알지 못하고 다음은 보지 못햇고 또는 추지도 안흐므로 우리의 자랑이며 또한 우리의 아까운 보물의 수효를 알 수 업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들이 너무나 우리들 의 고전을 경솔히 아는 조치 못한 경향이 잇지나 안흔가 하는 것입니다(“조선춤이야기 장단이 만키도 세계제일 ② 사공의 노래도 춤이 된다” 1939).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활동을 펼쳤는데, 1938년 5월 2일에 열 린 조선고전무용대회(朝鮮古典舞踊大會)에서 승무, 단가무, 검무, 한량무, 상좌무, 살풀 이춤, 사자무, 태평무, 학무, 급제무 등이 공연되었다. 조선고전무용대회는 ‘조선음악무 용연구회’의 처녀발표대회로,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조선특산품전람회 기념 향토연예대회 의 일부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고전무용이 “처음으로 사회에 소개”된다는 기사(“현황 찬란 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에서 이번 공연이 갖는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무용이 유행하고 조선춤의 존재가 희미해져가는 상황에서 오롯이 조선의 춤과 음악을 위한 공연이 대극장이었던 경성부민관에서 대중의 호응을 받 으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는 것은 실로 고무적인 일이다.

    또한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과거급제 하고 추는 급제무, 한량춤, 상좌춤이 공연된다는 내용이 조선일보에 소개되었는데, 출연진은 한성준과 한영숙을 비롯하여 이남호, 한입분, 이수송, 조연옥(조선일보(1938.5.3.)에 ‘조연왕(趙燕汪)’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조선일보 (1938.6.19.)에는 ‘조연옥(趙燕玉)’으로 표기되어있어 ‘玉’자를 ‘汪’으로 잘못 표기한 것으 로 보인다.), 최수성, 이화은, 조금향, 백만금, 방용현, 조효금(조선일보(1938.5.3.)에 ‘조 효전(趙孝全)’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조선일보(1938.6.19.)에는 ‘조효금(趙孝金)’으로 표 기되어있어 ‘金’자를 ‘全’자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김효정, 김덕진, 이경왕, 홍경 숙, 김명화, 박진홍, 김재분, 한연화, 이강화, 장홍심, 김문경, 김봉업, 김만삼, 김광채, 김청, 김세준 등이다. 공연된 작품은 승무, 단가무, 검무, 한량무, 상좌무, 살풀이춤, 사자무, 태평 무, 학무, 급제무 등으로 열두 가지의 춤들이 발표되었다(“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향 토연운대회” 1938). 다음의 사진(도판 3)과 두 기사문을 통해 그날공연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도판 3

    조선고전무용대회광고글(좌)과 공연현장(우). 동그라미 안 사진은 한량무(Joseon Classical Dance EventAdvertisement(Left) and Performance Venue(Right). The Picture of Hallyangmu Inside the Circle) “팔도백화가 경연할 여유명창경창대회 금야 삼,사 양일간 부민관대홀에서” 193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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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막은 동자춤으로 비로소 열리엇다. …(중략)… 관중의 갈채와 박수는 막을 열자 이밤의 잔치를 촉복하야주엇다 순서가 진행되며 발라무의 신명구진 춤이 명무히 이강선양 단독으로 추지자 음향과 육동은 공간 실로 변화무쌍한 무대를 보이엿스며 한성준, 이경옥, 한연화 등 남녀십여명이 출연한 선악은 상내를 고상하고 청아한 분위기를 담뿍 실어주엇다 다음 사자춤 의 강한 풍자는 순박하나마 고전무용이 가지고 잇는 도덕적 공리성을 보여주엇고, …(중략)… 학춤은 환상적 꿈의 나라로 관중을 이끄럿스며 의살 맞고 은설할 곱사춤 등의 전 푸로가 열시쯤 되어서 끗나자 관중은 그때야 비로소 도취에서 해방을 당할 수 잇섯다(“팔도백화가 경연할 여유명창경창대회 금야 삼,사 양일간 부민관대홀에서” 1938).

    이 고전무용은 처음으로 일반사회에 소개되자 당야는 초만원의 대성황을 이루엇을뿐만 아니라 회장관계로 입장 못한 이가 무려 사오백 명에 달하야 일대소란을 일으키게까지 일반 의대망과 기대가 컷섯다 실로 당야의 프로는 다시 업는 대호화판을 일우어 관중은 감탄, 감탄 하야 잠시 옛날 예향(藝香)의 삼매경에 잠기고 마럿섯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조선일보에서 연일 이 행사에 대한 광고를 하였고, 이에 따라 대중의 관심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400석 규모의 부민관 대강당은 그동안 춤꾼들이 섰던 극장과는 규모에서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준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대극 장 무대 공연을 위해서는 많은 연습을 통한 적응이 필요했을 텐데, 다음의 기사에서 처음 공연된 조선고전무용대회는 극장의 규모와 연습 부족으로 부족한 점이 많았던 공연이라 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는 장소관게 뿐 아니라 출연하는 이들이 모두가 처음으로 큰무대를 발벗고 또 시일관 계로 연습과 모든 준비가 미급한데가 한둘이 아니엿다 그래서 그후로 이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에서는 일야정려하야 만단의 준비와 연습에 전력해가지고 다시 이 찬란한 예술의 전당을 일반에게 공개하랴는 계획을 세워가지고 왓든터이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 현” 1938).

    이러한 문제점이 있었음에도 무용대회는 대중의 엄청난 호응을 받았고, 이에 힘입어 1938년 6월 23일 고전무용대회 앙콜 공연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공연된 작품은 <표 2>와 같다. 이 날의 공연의 특징은 현대적 감각이 더하여진 민속무용으로, 무대효과를 위 해 동작을 전폭적으로 확대하여 바라춤과 검무 등에 있어 그 특징이 두드러졌음이 기사에 서 확인된다(“문화유산의 재음미 전아한 선율의 입체화 동중정의 무아경지” 1938). 또한 이번 공연에서 농악과 군노사령무가 처음 소개되었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표 2

    고전무용대회 앙콜 공연내용

    (Encore performance of classical dance competition)

    번호 작품 출연자
    1 바라무(승무) 이선
    2 한량무 박진홍, 홍경숙, 이남호, 조효금
    3 검무 이선, 장홍심
    4 단가무 조연옥, 조금향
    5 신선악 이화은 김덕진, 방용현, 최수성, 이경옥, 김효정 외 수명
    6 상좌무 조효금, 김재분, 한입분
    7 살푸리춤 한영숙, 이춘경, 이선, 장홍심
    8 사자무 백만김, 한학심, 홍경숙, 한연화
    9 학무 한성준, 한입분, 조효금
    10 태평무 이선, 장홍심
    11 급제무 한성준, 이정업, 방응규 외 팔명
    12 농악 한영숙, 장홍심 외9명(김재선, 김광채, 이정업, 이재원, 이충선, 조연옥, 박진홍, 홍경숙, 조금향)
    13 소경춤 임천복, 이정업
    14 군노사령무 한영숙 외 3명 (조금향, 조연옥, 박농옥)

    1940년의 도동기념공연에서 한성준은 권오봉과 함께 신선무를 추었고(조선일보 1940.2.25. 기사에 실린 사진은 신선무라고 설명되어있지만, 머리에 관을 쓰고 활옷을 입 은 것으로 보아 태평무 사진이 잘못 실린 것으로 짐작된다.), 한영숙은 검무, 한량무, 단가 무, 조금향은 단가무를 추었다. 이번 공연에서 신선무가 처음 발표되면서 궁금증을 자아내 었는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보기 어려운 춤”이라고 소개되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한영숙과 조금향은 한성준의 “두 팔이나 다름없는 애제자”로 소개되었고, 특히 손녀로서 여러 해 동안 많은 춤을 배우고 연구를 이어온 한영숙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크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오늘밤! 춤의 무대는 열린다” 1940).

    도판 4

    신선무 복장을 입었다고 소개되는 한성준과 권오봉(Han sung-jun and Kwon Oh-bong Introduced in the Attire of Sinseonmu). “사진은 상(上) 한성준씨와 권오봉양의 신선무와 하(下) 전원의 농악무”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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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10월의 만주 공연을 마지막으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활동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1941년 9월 한성준의 죽음 이후 연구회의 활동도 중단되었다. 이제까지 살펴본 광월 단, 조선고가무회, 조선음악협회, 조선음률협회, 조선성악연구회, 조선가무연구회, 조선음 악무용연구회의 주요활동과 그 특징을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표 3

    조선시대 민간 예술단체의 활동 내용 및 특징

    (Activities and Characteristics of Civilian Art Organizations in the Joseon Dynasty)

    단체명 설립
    연도
    공연일시 및 장소 공연제목 및 내용 특징
    광월단 (光月團) 1920 1927.10.25-31. 광무대 추기대연주회
    춤, 연희, 기예, 판소리
    (춤, 잡가, 입창, 재담, 가야금, 줄타기, 노래 등)
    -1928년에 광무대를 인수 춤, 기예, 연희, 판소리(연극 혹은 창극), 가야금, 재담, 줄타기 등을 공연
    -1930년 화재로 광무대가 폐관하면서 활동 중단
    -1920년대 총69회의 공연활동
    1927.11. (10일간) 광무대 상설공연
    합창대의 춤, 춘향전, 심청가, 박타령, 장화홍련연극, 재담, 가극, 신파희극
    1927.12.1-31. (한달간) 광무대 상설공연
    신파 정희극
    1929.7.20.-8.2. 광무대 광무대 인수 1주년 기념공연
    남녀배우와 예기들이 출연함.
    이전과 같은 형태의 공연내용
    조선고 가무회 (朝鮮古 歌舞會) 1927 1927.2.14-21. (7일간) 우미관 조선명창대회
    판소리, 가무, 기예
    -조선구가무흥행부 에서 조선고가무회로 개칭
    - 명창대회의 흥행으로 공연연장
    - 조선일보 후원
    조선음악 협회 (朝鮮音樂 協會) 1928 1928.2.21. 종로청년회 제1회 공연
    -조선음악, 서양음악, 일본음악, 중국음악 혼용
    -댄스,연극,강연,영화,마술 등 다양한 장르
    -서양음악과 혼성공연의 형태를 보임
    1928.3.19-20. 우미관 제2회 공연: 남녀성악대회
    -판소리 중심 공연
    -승무,명기댄스,정악합주 등
    -
    1928.3.25-26. 우미관 신춘남녀명창대회
    -승무,서양댄스,정악합주,입창,단가, 신식창가,합창,가야금/해금연주 등
    -
    1928.5.4-5. 천도교기념관 석춘음악무도대회 권번의 기생들, 모스크바의 무용수도 출연
    1928.12.6-7. 단성사 조선고전정악가무대회
    조선고전 정악, 가무 등
    이외에도 설립 후 11회의 공연활동
    조선음률 협회 (朝鮮音律 協會) 1930 1930년대 대부분 명창대회
    -단가, 판소리, 창작판소리, 가야금병창 등
    -총무로 한성준 선출
    -한성준은 제1,2,3회 공연에 출연
    -조선음률협회는 재조직되어 1932년에 조선악정회로 개칭하고 발기인에 한성준 포함
    -조선악정회는 비교적 한시적 활동으로 마무리
    조선성악 연구회 (朝鮮聲樂 硏究會) 1934 1934년부터
    1940년까지 공회당, 우미관, 부민관, 동양극장, 제일극장 등
    수차례의 명창음악대회개최, 가극, 창극, 단가, 판소리 등

    주요공연:
    가극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 춘향전에서 한성준은 수형사 역할
    - 심청전에서는 선인(船人) 역할

    1940.6.19-20.
    제1회 조선음악전
    영산회상, 정악, 훈령무(한성준), 발나무(鉢羅舞)(한영숙), 창극, 단가, 가야금, 가곡 등
    -연구회의 창립총회에서 회계이사로 한성준 선출
    -6회정기총회에서는 한성준이 이사장으로 선출
    -남도소리 중심
    -주요부서는 성악연구부,기악연주부,교습부, 흥행부,외교부로 체계를 갖춤
    -기존의 판소리 이외에 창작판소리 연구·공연
    -단체의 명칭은 조선성악원에서 조선음악연구회로, 최종적으로는 조선성악연구회로 개칭됨
    -후원: 조선일보와 조선성악연구회 후원회(1936.5)
    -후원회조직 후 보다 활발한 실험적무대 시도함
    -110회의 공연횟수로 가장 활발한 활동전개
    조선음악 무용 연구회 (朝鮮音樂 舞踊 硏究會) 1937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부민관, 각 지방, 일본, 만주
    1938.5.2.
    조선고전무용대회
    승무,단가무,검무,한량무,상좌무,살
    풀이춤,사자무,태평무,학무,급제무
    외 음악연주

    1938.6.23.
    고전무용대회 앙콜공연 -고전무용의 밤
    발나무,한량무,검무,단가무,상좌무, 살풀이춤,사자무,학무,태평무,급제무, 농악,소경춤,군로사령무 외

    1938.8.31.-9.10.
    서선지역 순회공연
    동자무,검무,한량무,바라무,승도무, 단가무,태평무,학무,농악,급제무,노 승무,살풀이춤 외 판소리,잡가,단가,덕담 등

    1938.9.15-16.
    장전공연
    서선지역 순회공연과 동일

    1940.2.27.
    도동기념공연
    동자무,검무,단가무,한량무,고무,살 풀이춤,가야금병창,태평무,속곡,사공 무,아리랑무,도라지타령,발라무,학무, 신선무,급제무,농악무, 애국행진곡 등

    1940.2.21.-3.20.
    남선순업
    검무, 한량무, 살풀이춤, 급제무, 태평무, 신장무, 동자무, 노승무, 바라무, 농악무, 학무 외 판소리 등
    -연구회 설립 전, 1935년
    제1회 한성준 창작무용
    발표회가, 1937년 10월
    한영숙 무용발표회가 열림

    -판소리와 창극이 주를 이루는
    상황에서 전통춤의 명맥 잇기 위해 출범(한성준 설립)

    -고문에 최승희, 안막 외3명

    -여러 예술단체의 임원과 고수 경험이 바탕
    -무용부,음악부,가극부,출판부 4개의 부서로 구성

    -무용부(박농옥, 박진홍, 백만금, 방응규, 이선, 이춘경, 이남호, 장홍심, 조금향, 조연옥, 한연화, 한영숙, 한학심, 홍경숙)

    -날짜가 확인되지 않은 만주순회공연을 제외하고 총65회의 공연 횟수
    1940.7.10-30.
    한성준음악무용단 일본순회공연
    - 내용미상

    1940.10.20.-종료일자미상
    북선 만주 순회공연
    -한량무,신선무,바라무,승무,학춤,농 악무,단가,춘향가,심청가,잡가, 신파극 외

    Ⅲ. 전통‧창작의 관점에서 본 서울춤

    한성준은 자신의 첫 무용발표회(1935년), 한영숙 무용발표회(1937년 10월), 그리고 조 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개최한 여러 공연을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였는데, 이 과 정에서 많은 창작 작품을 남겼다. 창작 과정에서 그는 궁중무, 민속춤, 권번 춤의 모든 줄 기를 총괄적으로 재구성하였고, 다채롭게 변주된 장단을 가미하여 한국춤의 멋을 근대식 으로 무대화하여 독자적인 레퍼토리로 정립했다(김경애, 김채현, 이종호 1992, 39-41). 그 의 작품들은 조명, 무대장치, 안무 등의 외형적인 변화뿐이 아니라 본래 춤이 연행되었던 지역성에서 벗어난 탈지역성과 이전까지 전승되어 오던 맥락에서 벗어나 작품에 스토리와 테마가 개입되어 과거 작품의 본형과 다르게 탈맥락화된 특징을 지녔다(이정노 2018, 181-207). 또한 500여 년에 걸친 조선시대의 흐름 속에서 궁중과 교방, 중앙과 지방의 춤 들이 서로 넘나들며 상호·교섭하며 변화·계승되었기 때문에(박은영 2008, 44), 한성준이 만 든 작품에서도 이러한 궁중무, 민속춤, 교방춤의 특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성준의 작품을 본다면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몸짓을 재구성하고 집대성한 작품들이기 때문에, 이를 ‘새로운 전통춤’을 뜻하는 ‘신(新)전통’이라 부를 수 있 을 것이다. 최근 전통춤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어인 ‘신전통’은 1980-90년대 한국 창작 춤의 발전으로 춤꾼들의 안무력이 향상됨으로써 전통의 재구성적 전환이나 창작적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작가정신을 담은 외적·내적 측면의 변화를 담보한 새로운 전통춤 을 의미한다(김태원 2014, 194-198). 전통춤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시대적 요구에 따른 전 통춤의 변형과 재구성 작업은 ‘전통춤의 부활’로 이어졌고, 이는 ‘신전통무’라는 이름으로 춤계의 새로운 흐름을 나타내고 있다.

    ‘신전통’에 대한 현상의 특징들은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전통춤을 기반 하여 무용가의 창작적 요소나 능력에 의해 발전된 계승형태로 전통을 새롭게 구성하거나 새로운 형태로 재창작되어 존재하게 하는 작업이다. 둘째, 신전통춤의 원형은 보존되어있는 전통춤에 국 한된 것이 아니라 원형성을 가지는 전통의 형태나 전통춤의 형상도 포함된다. 셋째, 전통 춤, 신무용, 창작무용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전통춤을 기반으로 하여 신무용의 춤 무대화 과정작업과 창작무용의 작가적 표현욕구의 영향을 받아 전통춤을 현대의 미감에 맞게 무 대화하여 표현한 것이다(봉정민 2019, 63). 타고난 음악적 재질, 오랜 세월 유랑의 예술적 체험, 고수로서의 경험, 그리고 가무(歌舞)와 관련한 여러 연구회에서의 활동이 총체적으 로 모여 한성준만의 예술성으로 발현됨으로써 이전까지 없던 새로운 ‘한성준 류(流) 신전 통’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성준이 창작한 작품의 수는 100여종이라 알려지는데(“지원자엔 무제한교수 기관지발 행계획” 1938), 1차 신문자료, 무용사 서적 및 논문을 확인한 결과 그가 무대화‧재구성‧창 작한 작품은 약 72개로 정리되었다. 한성준의 작품에 대한 조선일보기사, 단행본(문일지 1989;오화진, 1992; 김영희, 김채원, 김채현, 이종숙, 조경아, 2014), 그리고 기타 출간물 (이병옥, 2019)을 참조하여 정리하였다. 그 작품명과 특징은 <표 4>와 같다. 여기에서 정 리된 작품 중 학춤, 하인춤, 팔대장삼춤, 상가승무노인곡, 파루춤에 대해서 윤중 강 공연평론가의 수정·보완 의견을 반영했다.

    표 4

    한성준이 무대화‧재구성‧창작한 작품명, 작품내용 및 특징

    (Titles,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Works Staged, Reconstructed, and Created by Han Sung-jun)

    번호 작품명 작품내용 및 특징
    1 승무(僧舞) 연화도량(蓮花道場)에 단을 만들고 제불 도승이 모여 불전에 공양할 때 나이 어린 상좌들이 팔폭 장삼에 가사를 메고 고깔을 쓰고 두 손에 북채를 들고 장단을 맞추어 추는 춤이다(“묵은 조선의 새향기 가무편 B” 1938.1.7.). 한성준에 의해 스토리화된 승무는 황진이가 만석중의 도를 깨뜨리 려고 유혹하는 춤이었다.
    다음은 한성준의 승무에 관한 이야기다. “이 승무는 혹 어떤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는데 자세히 는 모르겠습니다. 개성에 이정승, 황정승 양댁(兩宅)이 있는데 이정승 댁 아들이 죽었을 때 상여 가 황정승 댁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황정승 댁 처녀가 머리 꼭지를 풀어 던지니까 떨어 저 가기 때문에 그 때부터 그 따님이 생각한 것이 있어서 기생이 되어 황진이라고 이름 짓고 가무(歌舞)와 시문(詩文)을 잘하였는데 그 때에 유도처사(儒道處事)가 적(敵) 되는 불교도승(佛敎 道僧) 만석중의 도를 깨치면 천추(千秋)에 이름을 남기리라 하여 권하는 말을 듣고 따라 다니 며 도를 깨우치려고 하여 안 되던 것이 승무를 추어서 되었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이것은 속설 이고 과연 그런 기록이 있는 지는 의문이지요. 그렇게 무슨 음탕한 것은 아니인 줄 압니다. 그런 데 재작년 내가 부민관서 한 번 공연한 다음부터는 승려들이 항의를 해서 이제부터는 당국에서 도 승무는 공연을 허가해 주지 않는데, 예술로서 귀한 이 춤을 이해하지 못하는 승려들의 심리를 알 수 없습니다.”(한성준 1937, 134)
    2 살풀이춤 입춤, 즉흥춤, 수건춤 등으로 불리어 온 춤으로, 1935년 ‘제1회 한성준 창작무용발표회’에서 살 풀이춤으로 명명되었다. 한성준이 창작할 당시에는 처녀가 수건을 쓰고 흥에 겨워 추는 춤으로 스토리화 되었는데, 민간에서 전해온 춤으로 조선의 풍속을 바탕으로 하여 웃음과 해학, 그리고 통속미가 더해진 춤이다(“고전무용대회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향토연운대회총관” 1938.4.23.;“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3 태평무 (太平舞) 태평성대에 질탕한 음악에 맞추어 흥겨운 춤을 추어 일월성신과 더불어 평화를 노래하는 춤이다 (“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굿의 ‘왕꺼리’를 태평춤이라 이름 짓고 고 전적인 장단과 형식에 충실하게 만들었다. 두 어깨에 해와 달(日月)을 붙이고, 색색으로 만든 색 동소매가 있는 활옷을 입고 팔 하나 드는 것, 다리 하나 떼어 놓는 것 모두 점잖고 유유하게 추 는 춤이다(“조선춤이야기 고전예술의 일대정화” 1939).
    4 바라무 (鉢鑼舞) 불교의식 무용인 작법무(作法舞)의 하나로 승려가 양손에 바라를 들고 추는 춤으로, 한성준의 바라무는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동작을 전폭적으로 확대하고 음향과 공간적인 효과를 통해 변화무쌍한 특성을 지님. 또한 전신동작의 섬세하고 입체적인 선의 표현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 도록 만들었다(“팔도백화가 경연할 여유명창경창대회 금야 삼,사 양일간 부민관대홀에서” 1938;“문화유산의 재음미 전아한 선율의 입체화 동중정의 무아경지” 1938).
    5 학춤 (鶴舞) 고구려(高句麗) 평원왕(平原王) 시대에 정승 왕산악(王山岳)은 천재악성으로 진(晋)나라의 칠현 금(七絃琴)을 보고 거문고를 만들어서 백여곡을 작제하였는데 그 곡조가 매우 유량 청아하여 탈 때마다 학(鶴)이 그 곡조 소리를 듣고 날라와서 너울너울 춤을 춘 사실이 있었으므로 이것을 모 방하여 추는 춤이다(“묵은 조선의 새향기 가무편 B” 1938) 매우 고상한 춤으로, 연못가에서 흥 을 못이겨 너울너울 춤을 추던 학이 연꽃을 열으니 그 속에는 화정으로 선녀 같은 사람이 앉아 있는 작품이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6.19.). 조선춤 중에서 가장 신 성한 춤으로, 두 어린 소녀가 함께 나온다(“고전무용대회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향토연운 대회총관” 1938).
    6 검무 (劍舞) 검무 또한 한성준이 스토리화 하여 이순신 장군 투구를 쓰고 나와 한바탕 대결을 하다가 투구를 벗어버리고 추는 화려하게 현대화한 춤이다. 호사스럽고 엄장한 무관복을 입고 날낸 호랑이와 같이 뛰노는 춤으로 씩씩해 보이고 생기가 있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본래 검무는 조선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유명한 춤으로, 옛날 무사들이 웅장한 기개 로서 칼을 가지고 추던 오래 전하여 내려온 춤이다(“고전무용대회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 향토연운대회총관” 1938).
    7 한량무 (閑良舞) 한성준의 한량무는 별감(別監)이라는 지위에 있는 사람과 미천한 한량이 여자를 사이에 두고 사 랑의 가진 표정을 춤으로 나타낸 작품이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옛날 호걸들이 한바탕 주흥에 못이겨 기생으로 더불어 선선하고도 멋들어지게 춤을 춘다. 조선 의 옛날 춤 중에는 가장 인기가 있는 춤이다(“고전무용대회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향토연 운대회총관” 1938).
    8 신선무(神仙舞) 혹은 사호악유 (四皓樂遊) 상고시대에 사호(四皓)란 네 노인이 상산(商山)에 모여서 혹은 바둑을 두며 혹은 거문고를 타고 놀 때 학창의 에륜건 쓰고, 갈건에 도복입고 세무지음우의곡(世無知音羽衣曲)을 하며 우의등선 (羽衣登仙)하려할 제 추던 춤이다(“묵은 조선의 새향기 가무편 B” 1938). 상산사호(商山四皓)의 네 노인이 백운청산을 동무로 하야 바둑으로 더불어 이 세상 근심을 다 잊어버리고 즐거히 지내 는 광경을 춤과 음악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고전무용대회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향토연 운대회총관” 1938).
    9 상좌무(上佐舞) 민간에서 전해져 오는 종교적인 춤으로, 일곱 살 난 천진스러운 아가씨들이 나삼을 길게 입고 송낙을 깊이 쓰고 법고를 치며 추는 춤이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민간에서 전해오는 춤 중에서 가장 종교적 색채가 있으며, 발과 팔의 놀림이 기묘하다(“고전무 용대회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향토연운대회총관” 1938).
    10 단가무(短歌舞) 한성준이 단가를 부르며 춤을 추도록 새롭게 창작한 춤이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이전까지 단가는 가야금병창으로 해왔었는데, 이번 춤에 있어서는 단가를 부르 면서 춤을 추는 새로운 작품으로 창작되었다(“고전무용대회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향토 연운대회총관” 1938).
    11 사자무(獅子舞) 조선전래의 춤으로, 무대 위에서 사자들이 뛰며 춤추는 작품이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 대회 수재현” 1938) 이야기와 표현이 알아보기 쉽게 되어 있는데, 사자가 처음 조선에 오게 된 동기를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도승(道僧)을 꾀여낸 몰양배를 잡아먹는 것을 표현한 몰교의 정신을 가진 춤이다(“고전무용대회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향토연운대회총관” 1938).
    12 급제무(及第舞)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급제를 주제로 하여 성주푸리를 노래하면서 새로 급제한 사람의 축하연 이 벌어지는 것을 표현한 춤이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남자로서 출세하는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경하스러운 잔치가 베풀어지고 흥을 못 이기는 춤이 벌어지는 데, 많은 사람이 무대에 등장하는 가장 호화로운 춤이다(“고전무용대회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향토연운대회총관” 1938).
    13 농악(農樂) 조선민간의 독특한 음악과 춤으로, 한성준이 연구하고 연습하여 무대화한 작품이다. 질탕스러운 악무가 포함된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14 소경(小京)춤 본래 신라의 가무로 신문왕이 잔치를 베풀었을 때 춘 일곱 가지 춤 중의 하나로 알려지나, 한성 준은 장님의 재롱과 꼽추와의 여러 가지 동작을 가지고 포복절도할 신기한 춤으로 만들었다(“현 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15 군노사령무 (軍奴使令舞) 춘향전에서 군노사령이 춘향을 데리러 가면서 추는 능청맞은 춤으로 작품화 했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1938).
    16 사공무(沙工舞) 사공의 노 젓는 몸놀림이 춤으로 승화된 작품이다(문일지 1989, 47).
    17 하인무(下人舞) 양반들의 생활과 하인들의 생활을 풍자하는 작품이다(문일지 1989, 47). 하님춤과 동일.
    18 서울무당춤 무속을 바탕으로 창작된 춤으로, 각 지역에 맞는 무당의 춤을 특징으로 하여 만들어 졌을 것으로 보인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19 시골무당춤
    20 서울딱딱이춤
    21 영남무당춤
    22 전라도무당춤
    23 충청도무당춤
    24 취발이춤 풍자적인 내용을 묘사한 춤으로(문일지 1989, 54), 각각의 인물들에 맞게 춤동작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25 곱사춤
    26 생원(生員)춤
    27 왕의춤 전통사회 상류계층의 인물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각 인물의 특성을 살려서 작품을 만들었을 것 으로 짐작된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28 급제(及第)춤
    29 도령님춤
    30 진사춤
    31 영의정춤
    32 좌의정춤
    33 도승지춤
    34 샌님춤
    35 금의화동춤
    36 도사령춤
    37 훈령무
    38 금부나장무 (禁府羅將 )
    39 정승춤
    40 대전별감춤
    41 홍패사령춤
    42 쾌지나칭칭춤 경상도 민요 ‘쾌지나칭칭나네’에 맞추어 추는 춤일 것으로 짐작된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43 영남덧뵈기춤 영남 덧배기 춤을 바탕으로 창작된 춤으로 짐작된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44 염불춤 염불(念佛)에 맞추어 추는 작품으로 짐작된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45 타령춤 타령(打令)에 맞추어 추는 작품으로 짐작된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46 팔대장삼(八大 長衫)춤 ‘팔대장삼’으로 불리는 작법무 의복을 입고 추는 작품으로 짐작된다. 머리에 백의관음보살을 상 징하는 비로관을 쓰고, 동,서,남,북,중앙의 오방을 뜻하는 오방색 가사를 입는 것이 보통이다(구 체적 기록 못 찾음).
    47 남무(男舞) 조선 후기인 1844년에 정재의 한 종목으로 여타의 정재들과 함께 기생들에 의해 추어진 춤으로, 궁중은 물론 지방에서도 널리 연행되던 종목이다. 전국 교방 기녀들 사이에서 연행된 무용극 형 식의 작품이다(이종숙 2018a, 248).
    48 영산회상춤 조선시대 풍류 기악곡인 ‘영산회상’에 맞추어 춘 작품으로 짐작된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49 굿거리북춤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추는 북춤으로 짐작된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50 창부(唱夫)춤 무당의 남편인 창부를 작품의 인물로 삼아 만든 춤으로 짐작된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51 상쇠춤 농악에서 꾕가리를 들고 추는 춤을 상쇠춤이라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만든 춤으로 보인다(구체 적 기록 못 찾음).
    52 오신장무 오신장(午神將)은 여의주를 만드는 보살인 여의륜(如意輪) 보살의 화신으로 말(馬)의 모습을 하 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53 행장춤 행장(行狀) 차림으로 춤을 추는 작품으로 추측된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54 춘앵무 궁중무용 춘앵무를 바탕으로 한성준이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55 승전무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있었던 경상남도 통영 시에서 전승되고 있는 민속무용 무고 (舞鼓)를 말한다. 무고란 북을 위어 놓고 무원(舞員) 넷이 가끔 두드리며 추는 춤으로, 속칭 통영 북춤이라고도 한다. 삼도수군통제영 소속의 기녀들에 의해 연행되었는데, 궁중무용이던 무고가 점차 통영시의 민속무용으로 변모된 것이다. 무원은 활옷을 입되 사방색(四方色)에 따라 청(靑) 홍(紅)흑(黑)백(白)의 단삼(單衫)을 입고 협무는 하얀 바지를 입는다. 반주음악은 ‘도드리장단’과 ‘타령장단’이며, 악기는 피리2, 해금1, 장구1, 북1로 편성된다(김호은, 이애경 2005, 355). 한성 준은 충무공 이순신이 싸움터와 배위에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승전 후 축하를 하였던 집 단 퍼포먼스 형식의 승전무(김혜경 2019, v)를 재구성하여 작품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56 농부춤 농부의 특성을 살려 만든 춤으로 보인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농악에서 나오는 춤과 소리를 바탕으로 작품을 구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57 노처녀춤 노처녀를 주제로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58 선녀무 선녀를 주제로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아마도 선녀 의상과 부채를 사용하 고, 서사적 스토리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민간에서 내려온 설화인 ‘선녀와 나무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구체적인 기록을 찾지 못했다.
    59 항장무(項莊舞) 조선 후기 상연된 무극의 하나로, 향악정재 중 하나다. 항장을 비롯한 중국의 역사적 인물이 등 장한다. 이 춤의 연극적‧희곡적 구성은 네 단락으로 구성되는데, 첫째 단락은 항우가 등장하여 군례를 받는 장면이고, 둘째 단락은 항우와 패왕이 연회석상에서 대결하는 장면이고, 셋째 단락 은 두 기녀가 검무를 추는 창면이고, 넷째 단락은 파연(罷宴)하는 장면이다(박진태 2005, 128-130). 평안남도 선천 지방에서 연희되었던 항장무는 본래 지방관아 교방정재였는데, 고종 10년(1873)의 시기 처음 궁중으로 유입되어 이후 궁중정재로 자리 잡았다(박은영 2008, 54). 한 성준은 기생에 의해 추어진 항장무를 재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60 화장아(火場兒) 춤 하류계층의 신분인 아이의 춤으로, 그 특성을 살려 만들어졌을 것이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제 목으로 보아 화장터에서 누군가를 장사지내고 이와 관련한 슬픔을 표현한 춤으로 추측된다.
    61 화랑무 신라의 화랑을 주제로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62 토끼춤 토끼와 암사자를 특징으로 하여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63 암사자춤
    64 초립동춤 어린나이에 혼인하는 신랑이 쓰는 관을 초립동이라 하는데, 이를 주제로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 (구체적 기록 못 찾음). 최승희의 작품 중에도 초립동이 있다.
    65 황창무 신라인 황창랑(黃昌娘)이 어린 나이에 백제에 침투하여 그 왕을 검무로 시해한 고사(古事)를 기 초로 만든 검무의 한 종류이다. 죽은 황창을 기리기 위한 춤으로 경주를 대표하는 조선시대 향악 이었다. 조선시대 경부교방에서 면면히 연행되어 온 이춤은 일제강점기에 단절되었다(이종숙 2018b, 59-60).
    66 노장승춤 노승을 묘사하는 춤으로, 스토리를 담아 작품화한 것으로 보인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67 상가승무 노인곡 (喪歌僧舞 老人哭) “상주는 노래하고, 여승은 춤을 추고, 노인은 운다(탄식한다)”라는 서울지방의 대표적인 민담을 바탕으로 스토리화한 작품으로 보인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68 사고무(四鼓舞) 궁중무를 기본으로 하여 작품화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춤은 본래 1916년에 다동조합의 취체였던 하규일이 창작한 작품으로, 향악정재 무고를 변형하여 북 네 개를 중앙에 사방으로 세워놓고, 춤군들이 자기 방위의 북을 치다가 다른 방위의 북을 치며 회무하는 춤이다. 북 네 개를 중앙에 세워서 걸어놓고 춤 추므로 향악정재 무고보다 다채롭게 보였을 것이다. 사고무는 1930년대까 지 추어졌다(김영희, 김채원, 김채현, 이종숙, 조경아 2014, 322).
    69 아리랑무 각각 민요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에 맞추어 추는 춤으로 보인다(구체적 기록 못 찾음).
    70 도라지타령무
    71 배따라기춤 서도지역의 배따라기곡은 수로만리(水路萬里) 위험한 길을 떠나는 사행단 등을 전송할 때 불 렀던 노래다. 이 때 치르던 의식에서 추어진 춤으로 이것이 궁중으로 유입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곡조가 몹시 슬퍼 애끓는 듯하다. 자리 위에 채선(彩船)을 놓고 동기 한 쌍을 뽑아 소교(小敎)로 꾸미는데 붉은 옷을 입히고, 선립(先笠)과 패영(貝纓)을 착용하고 호수(虎鬚)와 백우전(白羽箭)을 꽂고, 왼손에는 활을 잡고 오른손에는 편초(鞭鞘)를 쥔다. 먼저 군례(軍禮)를 마치고 첫 곡조를 부르면 뜰 가운데에서 북과 나팔이 울린다. 배 좌우의 여러 기녀들이 채색비단에 수놓은 치마들 을 입고 일제히 어부사를 부르면 이에 따라 음악이 연주된다(박은영 2008, 51-52). 궁중무 선유락이 배따라기에서 비롯되어 형상화 되다가 궁중으로 유입되었다는 해석이 있는데, 한성 준은 기생을 통해 배운 선유락을 바탕으로 배따라기춤을 만들었을 것이다.
    72 파루춤 (罷漏舞) 조선 시대, 서울의 통행금지를 해제하기 위해 종각의 종을 서른 세 번 오경삼점(五更三點)에 쳤 다. 경복궁 타령 중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산천(雞鳴山川)이 밝아온다”는 구절이 있는 데, 이 구절에 맞추어 추었을 가능성도 있고, ‘경복궁(또는 남대문)이 열리면서 통행금지가 해제 되는 종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들리는 닭 울음소리(계명雞鳴)가 들리며 날이 밝는다.’는 스토리를 담았을 가능성도 있다.

    승무의 경우는 1930년경까지 20여 년 동안 산만하고 일정한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전승 되어 왔는데, 한성준의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설립 이후 정리되었다(오화진 1992, 43). 1935년 ‘제1회 한성준 창작무용발표회’에서 추어진 승무 때문에 문제가 생긴 사건에 대해 서 한영숙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춤공연이 있은 며칠 후에 할아버지를 난처하게 만드 는 일이 벌어졌다. 무용발표회 때 할아버지가 춘 승무가 그 사건의 원인이었다. 승무를 출 때 가사, 장삼 고깔을 벗어던진 후 교태와 아양을 부렸다고 그 공연을 지켜 본 불교신도들 이 승무를 신성하고 경건한 불교를 모독하고 불교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춤이라고 당장 공 연을 중지하라고 일어섰던 것이다. 불교신도들은 승무 공연을 금지시키라는 진정서를 조 선총독부 경무국에 제출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경무국은 승무의 공연을 금지시켰 으며 어떤 공연을 막론하고 승무가 끼어 있으면 공연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승무를 바라춤으로 고치고 승무의 중간에 법고 치는 장면 대신 바라 치는 장면으로 바꾸어 공연을 계속하였다(문일지 1989, 46).”

    1. 전승·연행되는 춤

    한성준이 무대화‧재구성‧창작한 약 72개의 작품 중에 현재까지 전승‧연행되는 작품들은 많지 않다. 승무는 오랜 세월 체계 없이 추어지다가, 한성준이 1937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 를 설립하면서 재구성되어 새로운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한성준의 문하생들로는 김보남, 김천흥, 이강선, 장홍심, 한영숙, 강선영 등으로, 한성준에게는 주로 승무와 살풀이를 배웠 다. 1969년 한영숙이 승무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이후 이애주(1996년), 정재만(2000년)으 로 승무의 맥이 이어졌으나 두 명 모두 타계하여 현재 한영숙류 승무의 보유자는 없는 상 황이다.

    1935년 부민관에 처음으로 올려진 승무 본래의 모습으로 재현하는 공연이 묵은 조선의 새향기(2024.6.11.)로 시도되었는데, 2000년 한성준선생 그 춤의 재현 공연의 승무 춤 사위를 중심으로, 강선영의 직계제자 김미란(서울경기춤연구회 이사장)의 고증과 당시 기 록된 영상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 경기대풍류 음악을 사용하였고, 장단은 염불풍류 中 염불-반염불-삼현타령-허튼타령-경기굿거리-자진굿거리-경기굿거리-북가락-경기굿 거리로 구성되었다. 복식은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의 강선영 편에서 전하는 내 용을 바탕으로 치마저고리에 흰색 장삼, 제비부리 형태의 붉은 가사, 그리고 고깔을 착용 하였다.

    살풀이춤은 한성준의 손녀 한영숙에게 이어졌고, 2015년에 이르러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이은주가 그 맥을 잇고 있다. 살풀이춤 수건의 길이는 예전이 더 짧았 고, 1970년대에 들어와 오늘날 살풀이 수건의 길이와 거의 동일해졌다. 한영숙이 흰색 의 생을 본격적으로 착용한 것은 1987년 무렵이다(한동엽 2020, 48-49). 이은주 살풀이춤은 흰 치마, 저고리에 흰 옷고름을 매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한영숙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 지 다양한 색상의 한복을 착용하였지만 이은주는 한영숙의 후기 살풀이춤을 근간으로 삼 아, 흰 한복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자주 옷고름이 아닌 흰 옷고름을 복식으로 하였다. 남성 의 복식은 복색(服色) 한복과 머리에 굴건(屈巾)을 쓴다(한동엽 2020, 60-63).

    태평무는 이동안류, 강선영류, 그리고 한영숙류가 있는데, 1988년에 강선영류 태평무가 문화재로 지정받았고, 2019년에는 박재희가 한영숙류 태평무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오랫 동안 지정되지 못했던 한영숙류 태평무가 국가무형유산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매우 고무 적인 일로 이로 인해 공연 현장에서 자주 볼 수 없었던 한영숙류 태평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공연 또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학춤은 한성준의 손녀 한영숙에게 전해졌고, 이후 이흥구에게 이어져 1971년에 연화대 무와 함께 학연화대합설무의 명칭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학 무와 한영숙의 학무는 다른 관점에서 시작되었는데, 한영숙의 학무는 민속춤의 요소가 강 하게 드러나는 쌍학의 단독 작품이지만, 학연화대합설무는 집단적 정재의 성격을 지닌다. 학무는 조선 성종 때 악학궤범에서 독자적 무보와 더불어 처용무와 연화대무의 합설로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말 철종‧고종 연대(1850-1890년)까지 궁중에서 전해 져 오던 학무는 고종 이후에 단절되었다(박은혜 2004, 22-23 재인용). 일제 강점기를 거치 며 학무의 전승 맥이 끊어진 후 한성준이 창작한 학무가 궁중의 학무로 지정되었기에 지금 의 학무와 악학궤범과 고종대의 정재무도홀기 내의 문헌상에 표기된 학무를 비교해보면 차이가 나타난다. 궁중 학무의 맥이 끊겨 한성준의 학무가 변형된 것이 무형유산으로 지정 되어 연희되고 있다. 현재의 학무가 조선의 궁중에서 추어진 학무를 정통으로 계승한 것은 아니지만, 본래 궁중의 학무가 학탈을 쓰고 한다는 점, 궁중춤의 연희시기와 가까운 때에 창작된 춤임을 감안하면, 한성준의 학무는 궁중춤의 특성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박은혜 2004, 23-24).

    한량무는 현재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5호로, 한성준-강선영류의 한량무가 조흥동과 고 선아에게 이어져 전승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부산 동래지역의 한량춤은 덧배기춤의 원형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것에 반해 한성준의 서울‧경기 한량무는 산대놀이와 봉산탈춤 의 노장 과장을 기초로 창작된 것이다. 교방가요에 전하는 진주 4인 한량무와 내용은 비슷 하지만 단순히 한량의 춤이 아니라 음악과 춤을 아는 풍류가인(風流家人)을 내세운 선비의 춤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한량, 각시, 먹중, 주모의 4인으로 구성된 무용극 형태로, 남녀의 삼각관계를 묘사하면서도 물질적으로 현혹당하는 여자의 심리와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 랑이라는 주제를 엮어내는 춤이다(배라영 2018, 67).

    승전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된 춤으로 보유자는 한정자와 엄옥자이다. 통영 북춤과 통영검무로 구분되어 있는데, 승전무의 북춤은 고려 충렬왕(忠烈王)때 무고(舞鼓) 로부터 발단하여 조선말엽까지 내려온 궁중 무고형의 전수와 전통을 이어받은 춤으로, 임 진왜란 기간 충무공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고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춤을 추었으며, 승리 후에는 승리를 축하하는 승전 축하무로 추었다는 데서 유래하여 승전무라 칭한 것이다(김 호은, 이애경 2005, 355-356). 한성준은 이러한 서사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승전무를 만들 었을 것이다.

    사자무는 궁중정재의 춤과 민속춤의 두 종류로 구분하여 논의할 수 있다. 고종대에 지방 에서 궁중으로 유입되어 정재무로 정착한 사자무는 유희적 특징이 두드러진 춤이기 때문 에 성천을 비롯해 교방에서도 인기 있는 종목이다(김영희, 김채원, 김채현, 이종숙, 조경아 2014, 231-232). 삼국시대 서역으로부터 들어온 평안남도 성천(城川) 지방의 잡극(雜劇) 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이후 궁중으로 들여와 청사자(靑獅子)와 황사자(黃獅子)로 구성되 어 연행되었다. 무동(舞童)이나 기녀들이 담당하는 여타의 정재들과 달리 재인청(才人廳) 소속의 재인(才人)들에 의해 공연된 종목이다(박은영 2008, 56-57). 근대시대 만들어진 한 성준의 사자무는 무용적 요소가 강화된 형태로 연행된 궁중정재의 사자무보다 지방 연희 의 극적인 요소가 많은 사자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조선일보의 기록 (1938.4.23.; 1938.6.19.)에서 한성준의 사자무에 대한 구체적인 스토리를 알 수 있다. 현 존하는 사자춤은 함경남도의 북청사자놀음, 황해도 봉산‧강령‧은률탈춤의 사자놀음, 경상 북도 하외별신굿의 사자춤, 경상남도의 통영오광대의 사자춤 등 4종류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훈령무는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의 모습을 춤사위로 만든 한성준의 춤으로, 정재만이 한 영숙류의 춤의 정립하기 위해 정리하였고, 이후 벽사춤의 제자들에게 맥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송준영은 한영숙의 고증을 거쳐 1978년 재현한 이후 지속적으로 계승‧발전에 힘써 왔다.

    2. 소멸·재현되는 춤

    한성준이 무대화‧재구성‧창작한 약 72개의 작품 중 대부분이 소멸되었다. 2021년에 설립 된 서울경기춤연구회는 서울‧경기권에서 파생‧발전된 전통춤을 계승하기 위해 결성된 예술 단체로, 잊혀져 가는 다양한 전통춤을 찾아 연구하고 활성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성준의 춤 재현 작업을 활발히 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의 한성준 작품의 재현 작업에 관한 논의에 서는 서울경기춤연구회에서의 공연 묵은 조선의 새향기(2024.6.11.)을 주로 참고하였다.

    항장무는 사자무와 함께 고종대에 궁중에 유입된 춤으로, 홍문연의 이야기를 무극화하 였기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김영희, 김채원, 김채현, 이종숙, 조경아 2014, 231-232). 항장 (項莊)이 춤을 춘 데서 이름 붙여진 이 춤은 내용이 칼춤 등의 무용과 대사, 동작표현 등으 로 구성되어진 대무용극이라 할 수 있다. 평안남도 선천(宣川) 지방의 이 무극(舞劇)은 고 종 계유년(癸酉年)(1873)에 처음 궁중으로 유입되어 연희되어졌다(김천흥 2005, 626). 국 립국악원의 레퍼토리 중 하나로 재현되어 수차례 공연된 바 있다.

    황창무는 신라인 황창랑(黃昌娘)이 어린 나이에 백제에 침투하여 그 왕을 검무로 시해한 고사(古事)를 기초로 만든 검무의 한 종류이다. 죽은 황창을 기리기 위한 춤으로 경주를 대표하는 조선시대 향악이었다. 조선시대 경부교방에서 면면히 연행되어 온 이춤은 일제 강점기에 단절되었는데, 오늘날의 춤으로 복원·재현하기 위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이 종숙 2018b, 59-60).

    신선무는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공연된 이후 점차 소멸되었다가 2000년 한성준선 생 그 춤의 재현 공연에서 재현되었다. 이때 신선과 학뿐만 아니라 동자를 등장시켜 무용 극 형식의 신선무로 구성하였으며, 2005년 강선영 불멸의 춤에서는 학이 모이를 주는 어린 선녀를 등장시켜 극적 연출을 강조했다. 묵은 조선의 새향기(2024.6.11.)에서는 선 녀를 등장시킴으로써 극적 효과를 주되, 전체가 극 형식으로 구성되지 않도록 춤사위 복원 에 집중하였다. 신선의 복식은 옛 학자의 평상복으로 깃과 소맷부리 등 옷의 가장자리에 검은 비단으로 선을 두른 심의(深衣)를 착용하고 복건(輻巾), 대대(大帶), 흑리(黑鯉)와 함 께 착용하였으며, 털이 달린 부채를 들었다. 두 마리의 학은 백색의 학 탈을 착용하였다. 음악의 구성은 보허사(步虛詞)를 주로 구성하였는데, 보허사는 ‘허공을 걷는다’는 내용의 시이면서, 신선의 이미지를 그린 음악이다. ‘신선이 거문고를 타고 논다’는 한성준의 대담 자료에 착안하여 작품 앞부분에 거문고 연주로 보허사의 변주곡인 계면가락도드리를 바탕 으로 구성하였다. 전체적인 음악 순서는 천년만세 中 계면가락도드리–염불풍류 中 경기굿 거리–천년만세 中 계면가락도드리로 구성되었다.

    바라춤은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된 불교 의식으로, 범패와 나비작법과 함께 영산재를 구성하는 춤이다. 한성준의 바라무는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동작을 전 폭적으로 확대하고 음향과 공간적인 효과를 통해 변화무쌍한 특성이 드러나도록 재구성하 였고, 또한 전신동작의 섬세하고 입체적인 선의 표현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팔도백화가 경연할 여유명창경창대회 금야 삼,사 양일간 부민관대홀에서” 1938; “문화 유산의 재음미 전아한 선율의 입체화 동중정의 무아경지” 1938). 또한 한성준의 바라무는 일제강점기 시대 승무 공연이 금지되자 법고를 치는 장면 대신 바라를 치는 장면으로 각색 되기도 하였는데, 승무와 혼재되어 추어지던 바라춤이 독자적 양식으로 레퍼토리화 되었 다. 묵은 조선의 새향기(2024.6.11.) 공연에서 재현된 바라무는 3인무로 재구성되었으며, 음악구성으로는 태평소 독주곡 中 반염불과 천수바라가 연주되었고, 복식은 가사 장삼과 고깔을 착용하고 25조 대가사를 모티브로 한 가사를 착용하여 현대적 복식으로 구현하고 자 하였다.

    군노사령무는 판소리 춘향가에서 변사또의 명령으로 군노와 사령들이 춘향을 잡으로 가 는 사건을 묘사한 ‘군노사령 대목’을 바탕으로 군노와 사령이 등장하여 선보이는 무용극 형태의 작품이다. 전승이 끊어진 이 춤을 묵은 조선의 새향기(2024.6.11.)에서 ‘기록을 기반한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였다. 사진과 영상자료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극적 요소에 초 점을 맞추어 군노복과 조선시대 하급관리들의 옷이었던 더그레를 착용한 남자 무용수들의 능청스럽고 에너지 있는 춤으로 안무되었고, 음악은 군노사령 대목의 설렁제를 주제로 처 음에 높은 소리로 호령하듯 질러대다가 차차 내려오는 가락과 씩씩하고 거드렁거리는 분 위기로 구성되었다. 장단은 점고-군노사령 대목-자진모리-휘모리로 이어졌다.

    한성준이 창작한 검무는 스토리가 들어가 극화되었는데, 장홍심의 증언(서대석, 손태도 2006) 중에 “이순신 장군 투구를 둘 다 쓰고 그러고 나와 가지고 한바탕 대결을 하다가 투구를 벗어버리고 그리고 화려하게 반짝반짝 현대화로 검무를 추고”(이정노 2018, 197-198에서 재인용) 라는 대목에서 한성준이 검무를 현대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에 언급한 황창무와도 내용면에서 연결된다. 한성준의 검무는 대륙적이며 호방한 기품이 서려 있는 이북지역의 검무 혹은 기방 예술적 기교가 강한 경남‧호남지역의 검무와 달리 서울춤의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대체로 평이해 보이지만 연풍대사위에 서려있는 활달한 기상과 강한 기질이 드러난다. 묵은 조선의 새향기(2024.6.11.) 공연은 신문자료에 기반 하여 두 명의 여성 무인으로 구성하여 춤사위는 한성준-강선영으로 이어진 강선영무용단 을 통해 전승된 검무의 원형적 몸짓에 집중하였다. 복식은 치마저고리에 전복과 전립을 착용하였고, 색감과 세부적인 형태는 현대적인 미감을 더했다. 음악은 염불풍류 中 늦은허 튼타령-중허튼타령-자진허튼타령-당악-긴염불로 구성되었다.

    서울무당춤은 무속춤에 기반을 둔 작품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이었는지 알 수 있는 내용과 사진은 전무하다. 하지만 서울무당춤 이외에 영남무당춤, 전라도무당춤, 충청도무 당춤 등 다양한 지역의 무당춤이 있었던 것을 바탕으로 공연에서 재현되었다. 서울지역의 굿의 특징인 엄숙하고 장중한 춤사위, 타악기 중심의 요란한 악기 반주에 맞추는 동적인 움직임, 각 거리에 따라 신복을 갈아입는 특징을 살렸다. 이번 공연에서는 ‘서울천신굿’ 中 천궁불사거리를 무대화하였는데, 천궁불사거리의 디딤사위와 춤사위를 활용하되 보다 극 적으로 표현하였다. 복식은 황색 철릭 위에 백색 장삼을 입고, 붉은 대를 착용하며 머리에 는 떨잠이 달린 큰 머리 위에 흰색 고깔을 썼다. 음악은 서울굿 연주 형태 중 부정거리무가 -만수받이-염불풍류 中 경기굿거리-자진굿거리-만수받이-염불풍류 中 당악 순으로 구성 하여 경기제 음악의 특성을 살렸다(“서울경기춤연구회” 2024).

    급제무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급제를 주제로 하여 성주푸리를 노래하면서 새로 급제 한 사람의 축하연이 벌어지는 것을 표현한 춤이다(“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 현” 1938). 남자로서 출세하는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경하스러운 잔치가 베풀어지고 흥을 못 이기는 춤이 벌어지는데, 많은 사람이 무대에 등장하는 가장 호화로운 춤이다(“고전무 용대회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향토연운대회총관” 1938). 삼일유가 장면을 담고 있 는 김홍도의 평생도응방식(應榜式)을 보면 붉은색 천으로 싼 합격 증서인 紅牌를 들고 가는 사람을 시작으로 붉은 소매의 녹색 옷을 입고 쥘부채를 든 광대, 어사화를 머리 에 꽂고 말을 타고 가고 있는 급제자,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 을 참고하여 재현되었는데, 광대는 초록색 몸판에 오방색 소매를 한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공작털이 달린 패랭이 모자를 썼으며 쥘부채를 들었다. 급제자는 복두(어사화)와 앵삼, 삼 급대를 착용하여 그 당시 급제자의 복식을 재현했다. 음악은 성주풀이로 하였고, 앞부분에 시나위 中 엇모리 장단을 추가하여 신명 나는 축제 분위기를 살렸다(“서울경기춤연구회” 2024).

    본고에서 정리한 한성준의 작품 목록(약 74개)에는 있지만 전승·연행 그리고 재현되는 작품으로 언급되지 않았던 많은 춤들은 모두 소멸되어버린 작품으로, 앞으로 재현되어 무 대 위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Ⅳ. 결 론

    이제까지 1900년대 초에서 1940년대 초의 한성준을 중심으로 한 서울 지역의 춤의 전 개 양상을 첫째, 생산·유통의 관점에서 극장 소속 예술단체와 민간 예술단체로 구분하여 논의하고, 둘째, 전통·창작의 관점에서 전승·연행되는 춤과 소멸·재현되는 춤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1902년 설립된 협률사를 포함한 여러 개의 서구식 극장에서 한성준의 춤과 그 시대 서 울 지역의 춤은 극장 소속의 예술단체에 의해, 그리고 연구회의 특성을 지닌 여러 민간 예술단체 소속의 민간예인들에 의해 공연되면서 점차 상업화, 무대화, 연예화, 극화되었다. 당시의 극장들은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는 기획사 역할을 하였고, 이로 인해 춤예술은 관객 의 호흥에 상응하며 전개·발전되었다. 1900년대 초부터 극장 상주 예술단체가 존재하였다 는 사실은 근대시기와 맞물려 현재와 같은 상업적인 공연예술의 기틀이 서서히 잡혀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단초가 된다. 그 과정에서 한성준은 춤이 전통적으로 전래되고 같은 방식으로 연희되는 반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전통예술의 기획과 유통에 관한 한발 앞선 사고를 바탕으로 한국 춤의 근대화를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1920년의 광월단을 시작으로 1927년 조선고가무회, 1928년 조선음악협회, 1930년 조선 음률협회,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 그리고 1937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설립되는 과정에 서 주로 성악과 연극이 중심이 되던 예술단체의 성격이 점차 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조선 음악무용연구회에 이르러 춤과 음악이 동등하게 중심이 되는 단체로서 그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성준의 역할은 매우 크다. 그가 가장 활발하게 춤 창작을 펼치던 시기 인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활동하던 1937년부터 1941년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약 72개에 달하는 작품을 무대화‧재구성‧창작했다는 사실이 그 반증이다.

    그동안 한성준이 만든 작품의 수는 100여종이라고 알려졌지만(“지원자엔 무제한교수 기 관지발행계획” 1938) 본 연구를 통해 살펴본 결과 약 72개의 작품이 무대화‧재구성‧창작되 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한국 전통춤을 대표하는 승무, 살풀이, 그리고 검무, 한량무 등은 그 당시 연행되었던 모습과 오늘날의 모습에서 차이를 보인다. 한성준은 서구식 극장 의 관객이었던 유료 티켓 구매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테마와 스토리텔링 형식을 중요하 게 여겼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품에서 서사적인 내용이 드러난다.

    한성준이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설립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매월 한번 씩 고전가무를 공연하여 대중화시켜서 장래의 빛나는 발전을 도무하기로 되었으니”로, 조선 춤의 대중화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성준은 예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감각의 전통춤으로의 시각적 전환과 기획을 작품에 적용시켰다. 오랜 기간 고수로서 발전시킨 음악성과 여러 연구회를 거치며 축적한 예술적인 감각이 조선 음악무용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조선춤의 무대화‧재구성‧창작화에 반영되었다.

    작품의 기획력과 대중성을 강조하며 만들어진 작품들을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전통을 재구성 혹은 재창조한 ‘신전통’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작품들 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작품들이 소 멸된 이유는 한성준에 의해 소개된 춤들이 관객의 입장에서 큰 반응을 얻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대중성 부족), 혹은 작품을 만든 안무가(한성준)의 입장에서 완성도 혹은 예술성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공연의 빈도를 점차 줄여나갔을 수도 있다.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과 음악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작품들에 대해서 많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고, 이는 한국전통춤의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나 소멸된 그의 작품들이 원형의 모습 혹은 재탄생의 형태로 오늘날 빛을 다시 볼 수 있도록 전통춤 연구자들의 노력이 요 구된다. 각 작품에 관련된 문헌연구, 관계자 인터뷰, 복식(의상) 연구 등이 함께 이루어져 야 할 것이며, 특히 춤뿐만이 아니라 당시 한성준 작품의 바탕이 되는 단가, 민요, 가곡, 판소리, 농악 등의 음악적 연구, 그리고 가극, 창극에 관한 연구가 병행됨으로써 보다 근거 있는 재현을 이루어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음악과 춤을 하나로 인식했던 한성준의 예술적 시각을 본받아 오늘날 춤 예술의 바람직한 발전을 위해 춤과 함께 음악적 전문성을 키워 나아가야 하겠다.

    저자소개

    김경은은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에서 “무용 전지구화와 한국춤 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 다. 현재 국가무형유산 승무 이수자로서 공연·전승활동과 함께 서경대학교 예술교육원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연구 관심사는 한국춤의 본성 및 정체성이며, 주요 연구로는 “이애주 바람맞이춤에 내재된 한국춤의 본성”, “미국 대학생들의 한국춤 경험에 관한 질적 연구”, “무용의 전지구화 과정에 대한 탐색” 등이 있다.

    Kim Kyungeun received her doctoral degree in “A Study on the Globalization of Dance and the Identity of Korean Dance” from the Department of Physical Education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Currently, she is an inheritor of Korea’s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in dance and is actively engaged in performances and transmission activities. She also serves as a lecturer at the Arts Education Institute of Seokyeong University. Her research interests lie in the essence and identity of Korean dance. Some of her key research topics include “The Essential Qualities of Korean Dance Inherent in Lee Ae-j00’s ‘Barammaji’ Dance,” “A Qualitative Study on American College Students’ Experiences with Korean Dance,” and “Exploring the Globalization Process of Dance.”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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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인구락부의 항장무 출연 기생들

    (Gisaeng Performers of the Hangjanmu at the Gwaningurakbu). 백두산, 2017.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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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성악연구회회원 일동

    (Members of Joseon Vocal Assocation) “조선성악연구회회원일동” 1936.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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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고전무용대회광고글(좌)과 공연현장(우). 동그라미 안 사진은 한량무(Joseon Classical Dance EventAdvertisement(Left) and Performance Venue(Right). The Picture of Hallyangmu Inside the Circle) “팔도백화가 경연할 여유명창경창대회 금야 삼,사 양일간 부민관대홀에서” 193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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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무 복장을 입었다고 소개되는 한성준과 권오봉(Han sung-jun and Kwon Oh-bong Introduced in the Attire of Sinseonmu). “사진은 상(上) 한성준씨와 권오봉양의 신선무와 하(下) 전원의 농악무” 1940.

    Table

    조선시대 5개 극장 소속 예술단체와 주요 공연 및 특징

    (Performing Arts Groupsm Major Performanc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Five Theaters in the Joseon Dynasty)

    고전무용대회 앙콜 공연내용

    (Encore performance of classical dance competition)

    조선시대 민간 예술단체의 활동 내용 및 특징

    (Activities and Characteristics of Civilian Art Organizations in the Joseon Dynasty)

    한성준이 무대화‧재구성‧창작한 작품명, 작품내용 및 특징

    (Titles, Contents, and Characteristics of Works Staged, Reconstructed, and Created by Han Sung-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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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연희: 구연희의 대연합, 혁신단 임성구 Yeonhui: guyeonhuiui daeyeonhap, hyeoksindan imseonggu” [Performing Arts: Grand Coalition of Old Performing Arts]. 1914. 『매일신보』[Maeil-sinbo], 1914.10.10. [검색일: 2024.7.20.], https://www.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3980460&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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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조선특산품전람회기념 전조선향토연운대회 Joseonteuksanpumjeollamhoeginyeom jeonjoseonhyangtoyeonundaehoe” [Commemoration for Exhibition of Special Products in Joseon, the Continuous Local Events in Whole Joseon]. 1938. 『조선일보』[Joseon-ilbo], 1938.4.25. [검색일: 2024.7.15.],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8042500239202009&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8-04-25&officeId=00023&pageNo=2&printNo=6090&publishType=00020.
    59. “지원자엔 무제한교수 기관지발행계획 Jiwonjaen mujehangyosu gigwanjibalhaenggyehoek” [Unlimited Teaching to Applicants Planing to Publish the Journals]. 1938. 『동아일보』 [Donga-ilbo], 1938.1.19. [검색일: 2024.7.16.],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8011900209105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8-01-19&officeId=00020&pageNo=5&printNo=5890&publishType=00010.
    60. “팔도백화가 경연할 여유명창경창대회 금야 삼,사 양일간 부민관대홀에서 Paldobaekwaga gyeongyeonhal yeoyum yeongchanggyeongchangdaehoe geumya sam,sa yangilgan bumingwandaehoreseo” [Women Master Singers Event, White Flowers Competed in Eight Provinces]. 1938. 『조선일보』[Joseon-ilbo], 1938.5.3. [검색일: 2024.7.17.],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8050300239102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8-05-03&officeId=00023&pageNo=2&printNo=6098&publishType=00010.
    61. “향토음악의 정수모은 의의기푼 조선음악전 Hyangtoeumagui jeongsumoeun uiuigipun joseoneumakjeon” [A Profound Exhibition of Joseon Music Gathering the Seensce of Local Music]. 1940. 『조선일보』 [Joseon-ilbo], 1940.6.19. [검색일: 2024.7.17.],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40061900239104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0-06-19&officeId=00023&pageNo=4&printNo=6870&publishType=00010.
    62. “현황 찬란한 무아경 고전무용대회 수재현 Hyeonhwang challanhan muagyeong gojeonmuyongdaehoe sujaehyeon” [Radiant Ecstasy Classical Dance Event, Sujaehyun]. 1938. 『조선일보』[Joseon-ilbo], 1938.6.19. [검색일: 2024.7.17.],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806190023910400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8-06-19&officeId=00023&pageNo=4&printNo=6145&publishType=00010.

    저자소개

    Footnote

    • 경성부민관 대강당의 좌석배치도를 보면 1층 932석, 2층 427석으로, 총1,359석이다(이정희 2008: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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