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Society for Dance Documentation & History

pISSN: 2383-5214 /eISSN: 2733-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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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rmulation of Modern Dance in Busan During the Liberation Period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의 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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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 Dance Journal Vol.74 No. pp.141-164
DOI : https://doi.org/10.26861/sddh.2024.74.141

The Formulation of Modern Dance in Busan During the Liberation Period

Chang Chungyoon*
*Honorary Professor, Dong A University
* Chang Chungyoon cychang@dau.ac.kr
July 9, 2024 August 11, 2024 September 25, 2024

Abstract


This study discusses the early modern dance formation in Busan during the liberation period 1945-1950. The study discusses its historical significance and aesthetic value from a contemporary perspective. For this study, a literature review on previous research and newspaper articles was used as a research method in order to examine modern dancers’ works and their educational activities during the liberation period. Modern dances in Busan that supported a new way of creating stage performances were influenced by western cultures and “New Dance.” During the liberation period, modern dancers in Busan expressed national identity and individuality through dance while promoting dance education as the human experience. Park Yongho and Park Yirang held dance concerts to show their own creative dance pieces, which were different from previous dance performances displayed in Busan. The liberation period was important for dance history in Busan as it was the beginning of establishing modern dance in that area. Also, modern dances during that time were historically significant as they fostered nationalism and suggested a new dance aesthetic. Modern dance in Busan during the liberation period set a foundation for modern dance activities that focused on creativity and education after the Korean War.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의 형성

장정윤*
*동아대학교 무용학과 명예교수

초록


본 연구는 부산 근현대 현대무용사적 관점에서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의 형성을 밝히고 그 역사적 의미와 미적가치를 논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방법으로는 정기간행물과 신문의 기사 내용, 교재, 선행연구 등의 문헌자료를 분석하여 해방기 무용가 들의 작품공연, 교육활동 등을 고찰하였다. 미적 가치의 논의를 위해서는 관련기사, 광고자료를 분석 고찰하였다. 부산지역 현대무용은 근대와 계몽기로부터 서양 문명과 신무용의 영향으로 새로운 무용의 창작과 무대활동을 구축해왔다. 해방기에 부산지역 현대무용은 민족주의 정신에 입각한 무용창작, 자유로운 개인 순수작품활동, 인간교육으 로서의 무용교육의 실제 등을 실천하였다. 무용교육은 무용연구소와 학교, 무용강습회에 서 실천되었다. 해방기 부산에서 개인무용회를 개최하고 순수창작활동을 추구한 사람은 박용호, 박이랑 등의 현대무용가들이었으며, 이들은 기존의 부산무용과는 차별화된 현대 적 양상을 보였다. 해방기는 부산지역의 현대무용이 형성되는 태동기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 유입되어 지속적으로 활동한 현대무용가들과 더불어 민족주의 정신의 건설에 앞장서고 민족무용 문화와 새로운 무용의 미학을 제시한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민족주의 정신을 내포한 작품에서 숭고의 미적가치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은 6·25전쟁 이후 창작과 교육을 주도하는 무용의 역할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Ⅰ. 들어가면서

    근대계몽기 이후 무용에 대한 인식은 일반대중에게 서서히 형성되어 해방기(1945-1950 년) 현대무용의 발단과 성장을 구축하게 되었다.

    본 연구는 현대무용의 탄생과 역사를 토대로 하여 국내에 독일의 표현주의 현대무용의 유입과 함께 부산지역 현대무용에 대해 접근한다.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살펴보면, 본 논문에서 해방기는 서양 문명의 영향으로 현대무용의 본질과 방법에 대한 국내의 관심이 비롯되는 시기이다. 이전 에 석정막과 최승희, 조택원 등의 활동으로 신흥무용에 대한 관심은 존재했지만, 해방기의 관심은 석정막의 영향을 입은 최승희, 조택원의 신무용이 아닌 독일 표현주의 현대무용과 서양무용에 대한 관심을 말한다. 여기에는 근대무용1)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이사도라 던 컨(Isadora Duncan)의 무용과 노이에 탄츠(Neue Tanz)를 일으킨 마리 뷔그만(Mary Wigman)의 절대무용이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방법론과 체계 그리고 그런 다양함 속에 마리 뷔그만의 현대무용의 방법과 원리는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체계화되는데 새로운 기법 체계와 스타일 등이 간접적으로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해방기에 부산에서는 주로 무용연구소에서 현대무용을 교육하고 공연하기도 하였다.

    해방기 무용에는 근대성과 현대성의 요인이 내포되어 있다. 예술에서의 근대성은 서양 의 근대적 형식을 수용하면서 자생적으로 문화 전체의 구조 속에 제도화될 수 있는 근대문 화를 형성한다. 근대성을 무용에서 논의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 의식의 고취, 체험적 의식 의 고취, 미적 가치판단 등의 핵심 요지를 다룰 필요가 있다. 즉 서양의 근대적 형식을 수용하면서 형성하게 된 문화 내면에서의 고유의 의식과 가치판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변화양상으로서 자아의 각성, 사상적 미적 고취 등이 해방기 현대무용의 형성을 위해 작용한다고 생각된다.

    6·25전쟁과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상황을 볼 때 해방기는 혼란했던 시기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부산지역에 현대무용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태동기이다. 이 시기 를 태동기로 보는 이유는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피난기의 무용이 전개되기 직전의 현대무 용 공연무대와 교육 연구소가 처음 등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기는 부산지역 현대무용 형성토대의 시점으로 부산 근현대무용사에 있어 중요하다. 그러나 선행연구에서 는 부산지역 현대무용에 국한하지 않고 해방기의 무용에 관해 전반적으로 논의하였다. 한 국춤통사(2014)에서는 한국춤을 역사적 시대구분에 따라 고찰하였다. 김호연의전통춤의 변용과 근대무용의 탄생(2021)에서는 근대 이후 무용의 발전사를 지역의 구분 없이 포괄 적으로 고찰하였다. 김해성의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 춤계의 지형과 변화”(2023)에서 는 피란기 국내 무용의 현황을 부산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이들 선행연구들은 국내 무용 계 전반을 시대별로 나누어 면밀히 다루거나 부산을 다루더라도 해방 이후를 다루고 있으 나 본 연구는 해방기의 부산지역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해방기의 시대적 변화와 함께 부산 근현대무용사에 있어 현대무 용이 어떻게 형성되어 변화 발전되었는지에 집중해서 현대무용가들, 무용조직단체, 그리고 교육 등을 고찰하고 그 역사적 의미와 미적가치를 논의하려는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신문 매체 등을 통해 해방기 현대무용 관련 공연 활동과 교육활동의 기 록 등을 고찰하였다. 그 밖에 한국무용협회 부산지부와 부산 예총 등 공공기관에서 발행된 기록물, 선행연구논문, 정기간행물, 교재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 고찰하는 문헌연구방 법에 의존하였다. 국내 현대무용의 양상과 해방 이후 부산지역 현대무용 태동 사이의 상관 관계를 선행연구와 신문기사를 근거로 고찰하였다.

    서구의 초기 현대무용에서 근대성과 현대성은 각각 이사도라 던컨과 마리 뷔그만의 무 용에서 구별지어 찾아볼 수 있다. 이사도라 던컨 무용의 근대성은 몸과 그 움직임 요소에 서 찾아볼 수 있다. 음악의 충동에 따라 일어나는 무용수의 자발적인 움직임에서 자연주의 적 성향을 발견할 수 있다. 배구자의 근대춤에서 민요를 반주로 하는 무용, 무용시 등이 이사도라 던컨의 자유무용, 해방 등과 상통한다. 마리 뷔그만의 표현주의 현대무용은 간접 적으로 일본의 신무용을 경유해서 도입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현대무용의 수용과 발전에 서는 서구의 초기 현대무용의 근대성과 현대성의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마리 뷔그만의 절대무용(노이에 탄츠)에서는 표현주의의 현대성을 내포한다. 즉 무용수의 표현 욕구를 표 출하는 무용의 기능을 살펴볼 수 있는데 상상력을 발휘하고, 끊임없이 무용의 욕구에 집중 하면서 풍부한 긴장 상태의 움직임으로 그 욕구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무용수의 기술은 단련되고 발전되며 점점 확대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표현 욕구는 타 장르의 무용과는 차별화되는 현대무용의 동력이면서도 긴장 상태라 는 움직임의 특질을 갖는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려는 욕구는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 무용가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연구는 지금 시점에서 부산지역 현대무용의 형성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부산지역 현대무용 형성을 해방기의 활동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연구자의 분석적 관점에 서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이 추구하는 미적가치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려고 한다. 부산 지역 현대무용의 역사적 의미와 고유의 미적가치에 대한 규명은 국내 현대무용 역사 연구 에 대한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Ⅱ. 현대무용의 선구자들

    무용이 해방 후 민족적인 문화와 연관된 초기 현대무용은 계승된 뚜렷한 서양무용의 전 통기법이나 표현체계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새로운 무용의 수용과 건설에 대한 작업 의지 는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산지역에는 해방 전부터 교육무용강습회(함기봉)(강이문 1963, 1135) 이외에 석정막의 신무용, 최승희 조택원의 신무용, 배구자와 길목성홍 등의 신흥무용 공연들이 지역의 무용에 영향을 미쳤다. 신흥무용의 일반적인 개념은 새로운 무 용이며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창작된 예술무용 또는 순수하게 외국무용형태를 말한다. 일 본의 무용이나 한국춤을 모티프로 창작한 신무용이 아닌 서양의 모던댄스를 뜻한다. 1940 년대-1950년대 사용된 ‘신흥무용’이라는 용어는 일제 기간에 수입된 모던댄스, 발레, 신무 용, 캐릭터댄스(남방무용 등)를 지칭하며 순수한 전통춤을 제외하고 사용한 명칭이다. 해 방 후에 고전무용, 신무용, 모던댄스, 인도춤, 남방춤 등이 따로 공연되기도 했지만 한 공연 에 함께 올려지거나 혼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946년 조선무용예술협회 창립자축공 연에서 신흥무용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정지수, 한동인의 원무곡, 이석예의 마음, 함귀 봉, 김용화의산의 즐거움, 장추화의화랑, 김미화의 지젤, 정지수의 화랑, 진수방의 아리랑회상곡, 그리고 김막인의 실험무용작품들이다. 비슷한 예로 1949년 12월 시공관 에서 열린 신흥무용가 합동공연인데, 김막인과 문철민의 영원한 조국을 무대에 올렸을 때 서울발레단, 최가야무용단, 장추화무용연구소, 김막인무용그룹, 박용호, 정인방, 박나비 등이 함께 참여하였던 무용이다. 신문화의 영향을 받아 신흥무용을 일으킨 사람들로서 배 구자, 함귀봉, 현철, 김해랑 등이 있었다. 그 중 김해랑은 1939년에 “마산에서 ‘송건무용연 구소’를 개설하고 일찌기 무용활동을 전개했다” 고 알려져있다(부산시사편찬위원회 1991, 338).

    일제강점기 동안 민족의 정서와 예술표현 행위는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1930년대 전후 선구자들의 부산공연은 현대무용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에서 살 펴볼 선구자 무용가들의 부산지역 현대무용 활동을 통해 그 영향을 파악할 수 있다.

    1. 배구자

    강이문에 따르면 배구자는 경남 김해 출신으로 우리나라 “외무(外舞) 유입의 효시”이다 (강이문 1963, 1133). 삼천리에 실린 1929년 9월 기사에 따르면 배구자는 ‘천승의 단’을 따라 미국 뉴욕에 갔을 때 석 달간 전문무용을 배우고 일본에서는 석정막의 무용보다는 좀 자유스러운 고전아부(高田雅夫)의 무용을 배웠다고 하였다(김영식 1995, 99-101). 아리랑은 조선무용을 무대화한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배구자의 최초 현대무용은 유모레스크(1928)였다(김영희 외 2014, 349).

    경남출신 배구자는 부산에서 무용발표회(“귀자의 무용” 1936)를 통해 부산지역 무용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 부산극장에서의 배구자 일행의 무용발표회 기사에 아동들의 서양 창작무용으로 보이는 사진이 첨부되어있다.

    배구자는 서양의 무용을 국내에 처음 도입하여 창작하고 발표회(“배구자의 음악무용을 보고” 1928) 무대를 열었던 한국현대무용의 효시로서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대중무용, 서 양무용 전문가로서 무용연구소를 통해 무용수를 배출하였다. 특히 가무극 형식은 무용과 연극과 민요의 결합형태의 극으로 배구자 특유의 창작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2. 최승희

    최승희 무용연구소 제1회 창작 무용공연(1930. 2. 1)을 시작으로 창작무용의 정착과 현 대무용의 토대로서 역할을 했다. 석정막의 신무용공연에 출연했고 최승희 무용연구소 개 설(1930년) 이후 현대무용작품의 발표(“광고, 최승희양 신작무용공연회” 1931; “최씨신작 발표회” 1932)는 근대의식의 작용으로 볼 수 있는 현대무용이다. 최승희의 신무용 유입은 근대적 사상으로서 해방기 이전의 현대무용의 인식과 가치관에 영향을 주었다. 1930년대 와 1940년대에는 한국적 소재의 창작공연의 비중이 높아졌는데 즉 한국전통적 색채, 독일 현대적 분위기, 현대무용 요소의 특징들이 작품 제목이나 사진에서 파악된다. 결과적으로 독일 표현주의 현대무용의 표현형식을 수용한 작품들이었다고 판단된다. 최승희의 제자들 예를 들어 김민자, 김막인, 장추화 등은 순회공연이나 연수를 통해 부산지역의 무용에 영 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다음 절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1940년대 동양 무용과 관련해서 최승희의 1940년대 무용은 황국신민화의 매체 또는 동양무용이라는 큰 범주에서 언급할 수 있다(김호연 2015, 76).

    현대무용의 경우 자연의 몸동작에서 재료를 가져오는 것을 비롯해서 민속무용의 재료도 많이 응용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한국무용이라고 분류하지는 않는다. 응용할 수 있는 장점 을 현대무용이 지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단지 최승희 무용에는 뷔그만이나 그레이엄의 초기 현대무용에서 필요로 하여 체계화했던 기법의 체계가 나와 있지 않다. 교육방법에서 도 어떤 현대무용의 체계(예를 들어 형식과 내용, 동작의 구성, 구조 등)를 논한 부분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국내 현대무용에 있어서 박영인의 신흥무용이나 최승희의 신무용을 통해 현대무용의 표현적 본질을 수용하였고 현대무용의 개념을 인식하게 된 것은 1940년 대 이후이다. 동작, 음악면에서 현대무용창작법에 근접한 것으로 습작이 있다.

    3. 조택원

    한국 고유의 춤을 현대무용화하여 무용극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내선일체를 구현한 것 은 부여회상곡(1949)이다(김호연 2015, 76). 조택원의 해방 후 무용극 창작은 부여회상 곡 이외에도 신로불심로(1949, 뉴욕 자연과학박물관 극장)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영남 지역의 무용극 형식의 작품으로 마왕의 꿈이 있었는데, “동여사(김선화)는 일즉이 석정 막씨와 최승희 여사의 사사를 받은 노련된 수법으로써 금반 발표회 작품중 일막오장(1막5 장)의 마왕의 꿈에는 여자 주인공인 ‘미카엘’로 분하여 여사의 독특한 연기를 보여주리 라 한다”(“추석선물무용극, 옥파일, 김선화 합동으로” 1949)라는 기사로 미루어 조택원의 무용극은 영남지역의 1960년대 무용극에도 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4. 박영인과 1940년대 무용가들

    1930년대 박영인은 부산지역에서 무용을 처음 접했다. 국내에서 공연활동은 없었지만 부산중학교 재학시 선교사로부터 무용을 배웠다는 기록 및 신문기사를 통해 자신의 무용 은 서양 양무용(西洋洋舞踊)이라 하였다(박영인 1937). 1930년대 선교사로부터 서양의 무 용을 배웠다는 사실은, 석정막의 신무용이나 일본무용과는 다른 내용과 유입의 경로를 보 여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1940년대 신무용가들로서 일본과 유럽에서 서양의 새로운 무용을 접했던 모던댄스 2세 대들로서는, 김민자(최승희 제자, 석정막에 사사), 진수방(조택원 제자, 발레 연구소), 박외 선(일본에서 1회 개인무용발표회), 박영인(1908년부터 석정막에 사사, 독일에서 활동) 그 리고 함귀봉(교육무용가, 일본수학) 등이 있다.

    해방 전의 무용공연과 교육에 있어서는 경남출신의 무용인으로서 부산중학교에서 무용 을 배운 박영인과 함귀봉이 무용의 근대화의 핵심 인물이다. 대동아전쟁(1941년) 후, 1942 년 개최된 ‘국민무용율동강습’은 대동아문화건설에 도움이 된다는 의도로, 또는 지속적인 내선일체 방법론으로 볼 수 있는 강습이다(김호연 2021, 118). 국민무용율동(1941-1942 년)이 전시체제 총후 국민생활에서 정서적으로 힘든 현실이기에 그것을 타개할 수 있는 명랑하고 윤택한 삶을 위해 정서교육에 이바지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방 전과는 다르게 해방 후 부산지역에는 무용연구소와 무용작품발표회가 많아졌고, 신인무용가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6.25 전쟁을 지나고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하고 활동한 무용인들도 있지만 1947년부터 현대무용의 박용호, 발레를 하던 김향촌이 ‘합동연구소’를 개설하였고 박이랑, 옥파일, 조말선 등이 ‘교육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아동무용에 전념하 였고 1949년 이인범이 발레연구소를 개설한 바 있으며 1950년 박용호와 옥파일이 각각 부산에서 처음으로 발레발표회(부산공회당)를 가진바 있다(강이문 1963, 1135). 박용호와 김향촌은 함께 부산에 무용연구소를 개설(1948년)하고 현대무용발표회(1950년)를 하였다. 김해성에 따르면 “이 시기에 부산에서 최초로 발레를 춘 남성무용가로는 김향촌(1926- 1978)이 있다. 그는 1946년 해방기에 설립된 ‘조선무용예술가협회’의 발레부 수석위원을 지낸 정지수의 문하에서 처음 발레를 접하였으며, 국내에서는 최승희에게, 러시아에서는 니진스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김해성 2016, 74).

    Ⅲ.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

    1. 형성토대

    현재 국내 무용 장르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해방기 현대무용의 장르를 구분할 수는 없다. 본 연구에서 다루는 서양의 새로운 무용은 신흥무용, 석정막의 일본식 현대무용은 신무용 그리고 해방기의 현대무용은 민족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현대무용이라고 개념을 정할 수 있다. 여기서 ‘현대무용’은 양식이나 기법 면에서 독일 초기 표현주의 현대무용의 그것 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1) 현대무용가들의 활동

    부산 공회당에서 길목성홍(吉木星虹)의 현대무용 공연(“새무용 신무용신작발표회” 1934) 과 여월사의 아동교육무용발표와 관련된 무용시 공연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女月社 무용 시 童踊발표회 부산 여월사 1주년기념” 1934). 그 밖에 우리나라 예기의 공연, 일본인의 예기, 동요무용공연 개최의 기록이 신문기사(“하동무용발표회”1934; “동래온천 예기의 무용 계고” 1929)에 있는데 반드시 부산 출신의 무용가 활동은 아니더라도 외부로부터 공연이나 연구소 개소, 강습회 개최는 부산의 무용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방기 부산무용 에 영향을 미친 무용가들은 김동민, 박용호, 박이랑, 김향촌, 옥파일, 조말선, 이인범, 함귀봉, 조용자, 김막인, 김미화, 김혜성 등이다. 현대무용은 1947년에서부터 박용호 박이랑이 부산 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박용호 김향촌이 처음으로 합동연구소를 개설(1947년)했으며, 박이 랑 옥파일 등도 주로 학교를 대상으로 무용교육을 전개하였다. 기간 부산극장을 비롯한 경여고 부여고 강당 등에서의 박용호 무용발표회를 필두로 경남부인회예술제(1947년 10월 김혜성 등 재부 무용인 참가, 부산극장), 옥파일 무용발표회(1950년 부산공회당) 등이 있었다 (강이문 1963, 1137).

    박용호, 박이랑, 조말선은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의 형성과 발전의 주요 인물들이다. 이들은 개인무용회를 통한 공연활동, 부산지역 내 무용연구소의 개설, 교육무용강습회 개 최 등에 의한 교육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박이랑, 옥파일, 조말선 등은 “‘교육무용연구소’ 를 개설하고 아동무용에 전념하였다”(김영환 1963, 1135). 더 나아가 해방기에 비롯된 조 선교육무용연구소 또는 지역 군인위안공연 등도 이보다 앞서 발전된 신무용, 무용극, 실험 적인 전위무용 등 부산지역 현대무용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이보다 앞서 발전된 신무용, 무용극, 실험적인 전위무용 등 또한 부산지역 현대무용에 영향이 있다. 무용교육연구소(문 교부)를 비롯한 교육무용강습회와 활발했던 개인작품발표 후로는 피란기에 부산을 다녀가 거나 남아서 활동한 무용가들의 공연과 무용연구소가 있었다. 또는 부산에 남거나 월북한 현대무용가들도 있었고, 순회공연을 위해 부산을 방문하는 등 다양한 경우가 있었다.

    이사도라 던컨의 자연주의 사상은 우리나라 초기 현대무용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살펴 보기는 어려우나 배구자의 민요무용의 경우 음악으로부터의 충동이 춤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 것을 볼 때 이사도라 던컨의 음악적 충동에 따른 자발적 자연적 움직임의 발로와 그 맥을 함께 한다고 생각된다. 마리 뷔그만의 노이에 탄츠는 박영인 최승희 조택원 석정막의 초기 현대무용에 이어서 신흥무용 또는 신무용에 직접 혹은 간접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해방 후 무용단체조직이 결성되고 다수 무용가들의 현대무용 발표회를 비롯하여 교육무 용강습회와 무용연구소를 통해 부산지역 무용발전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최승희 조택 원 같은 신무용가의 무용을 답습하는 데서 벗어나 새로운 무용 형태를 시도한다. 예를 들 어 “1946년 2월에 조선무용예술협회 현대무용 소속의 조용자가 국도극장에서 발표회를 가 졌으며, 3월에는 정지수의 신춘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에서 그리고 5월에는 장추화의 제1 회 무용발표회 개최”(양정수 1999, 110-111)가 그것이다. 조용자는 석정막의, 장추화는 최승희의 사사를 받았지만 각자 개인무대를 통한 개인의 작품공연이라는 측면은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부산 경남지역에서 무용공연을 개최했던 현대무용가의 작품발표와 연구소 교육 등 해방 기에 일어난 활동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박용호

    국도극장에서 열린 조선무용예술협회 창립자축공연(“무용예술협회 창립공연” 1946)에 서 프로그램 중에 박용호의 해방을 발표하였고 이 작품은 부산에서 1950년 박용호 현대 무용발표회에서도 공연된 바 있다(강이문 1963, 1135). 박용호는 1948년에 부산에서 대중 무용연구소 제1회 공연에서 신작공연(“박용호무용, 대중무용연구소 제1회공연” 1948)을 부산극장에서 26일 밤 1회 한 바 있다.

    부산에서의 현대무용활동은 1947년부터 활발해졌다. 박용호와 김향촌의 합동연구소의 개설(1947년)에 이어서, 박용호의 현대무용 연구소 개설(1950년)이 있었다. 무용연구소를 통해 무용교육이 이루어졌고, 1950년 부산극장에서의 ‘제1회 박용호 현대무용발표회’는 부산지역 최초의 현대무용 개인작품 발표회였다.

    그는 ‘수해동포구제무용음악회’(“수해동포구제무용음악회今明양일YMCA에서” 1946)에 출연하여 사회봉사활동을 하였다.

    (2) 박이랑

    1950년 3월 초 시내 부산극장에서 연구발표회(“박이랑 무용회” 1950)를 개최한 바 있 다. 부산에 무용연구소를 개설(“예술무용의 권위자인 박이랑씨는 대청동에다 예술무용연 구소를 설치...” 1950)하여 예술무용, 교육무용, 아동무용, 조선고전무용 등 민족예술무용 의 발전을 위한 의지를 보였다. 시, 무용, 연극, 음악의 합동축제인 제1회 국민예술제전 (“제1회 국민예술제전 무용아 조국아박이랑무용단”. 1950)에서 박이랑의 아 조국아라 는 작품을 박이랑무용단이 부림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광고되었다.

    (3) 함귀봉

    문교부 예술위원회의 함귀봉은 이사도라 던컨과 마리 뷔그만의 현대무용을 기초로 한 교육무용의 정착과 전파에 힘썼다. 그는 1947년 부림극장에서 열린 제1회 무용발표회(“제 1회 국민예술제전 무용아 조국아박이랑무용단” 1950)와 관련해서 현대무용의 역학적 구 성원리와 현대무용그룹의 독창적 무용제를 알렸다. 또한 문교부 조선교육무용연구소에서 5, 6 양일간 국제극장에서 제1회발표회(“교육무용연구소 제1회발표회” 1947)를 개최한다 는 기사에서 교육무용과 예술무용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였다.

    담당 강습회 중에는 해방 후에 체육무용강습회(“체육무용강습회” 1946)가 열렸는데, 부 산에서는 1950년에 체육 보건 무용강습회(“동기 체육 보건 무용강습회 개최” 1950)가 있 었다. 그는 무용예술의 확립과 새로운 민족문화의 일환으로서의 무용건설을 위해민국일 보에 실린 “무용예술의 확립 교육무용과 예술무용-함귀봉-”(1948)에서 교육으로서의 무 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었다.

    교육무용연구소 신설(“교육무용연구소 신설 초중등교원에게 교육무용실시” 1946)과 “국민교육건설중”(1948)라는 현대일보관련 기사에 따르면 해방 후 교육무용 강화에 대 한 신념을 알 수 있다.

    (4) 장추화

    1944년 북경 부근의 ‘동방무용연구소’에서 최승희 제자들을 지도했다. 1945년 최승희를 대신하여 공연단을 이끌고 서울에 공연와서 해방을 맞았다. 최승희도 곧 서울로 들어 왔으 나 다시 북한으로 넘어가고, 장추화는 서울에 남아서 공연활동을 주도했다. ‘장추화무용연 구소’를 통해 송범, 황무봉 등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장추화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예술인 선전선동대로 편성되어 한동인, 함귀봉, 최가야, 박이랑, 박용호 등과 함께 9월 24일경 북 쪽으로 소환되었다.

    1946년부터 1948년 사이 국도극장, 국제극장 등에서 최승희무용을 답습하는 무용공연 (“장추화무용회” 1946)을 주로 올렸는데, 최승희의 수제자로서 신진무용가로 활약하여 신 작무용회(“장추화무용, 제1회예술무용공연은 지난 10일 국제극장”.자유신문, 1946. 5. 12. 2면. “광고, 장추화무용발표회, 국제극장”. 중앙신문, 1946. 5. 10 2면) 이후에도 신 작무용회(“문화단신, 장추화신작무용회” 1948;“장추화신작무용발표회 제2회. 16일부터 3 일간 시공관” 1948).

    (5) 김막인

    해방기에 민족정신과 인간의 내면을 몸으로 표현하려는 의욕이 강했던 김막인의 무용은 해방기 부산지역의 현대무용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예술무용협회에 지역 무용인들의 왕래가 늘어나면서 상호작용하고 있을 때 김막인 은 창작활동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이시이미도리무용연구소에서 모던댄스를 수 학하고 해방 후 서울에서 전위무용으로는 처음 활동한 신흥무용가로 본명은 김해성(金海 星)이다. 귀국 후 악극단에 관계하고 쑈의 안무도 했다. 당시로는 드물게 전위무용을 하였 다. 1946년 설립된 조선무용예술협회 현대무용부의 임원 및 수차례의 발표회를 개최했다. 작품발표회 전에 칼멘다방에서 작품 검토회를 열기도 했다. 작품의 주제는 현실적 과제나 문명의 폐해, 죽음, 운명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었고, 전위적이며 즉흥적 작품을 공연했다. 법을 굴리는 자는 공연 전 막 뒤에서 춤의 작의(作意)와 내용을 문학적으로 설명한 다음, 무대 하수 쪽에서 판토마임의 동작을 하다가 무대 하수로 퇴장하는 춤이다. 인간이 법을 만들고 그 법에 속박되어 고민하고 뉘우치고 자기분열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또전투의 죽음,나는 죽음의 소리를 들었다에서 팔을 교대로 요동치거나 자루 속에서 꿈틀대는 무기교적 움직임들과 선을 그어놓고 왕래하며 참담한 심정을 표현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1947년과 1948년 현대무용작품 발표에서 개성적 안무를 보였다(“조선현대무용계의 이 채 김막인 무용작품발표회 시공관” 1948; “창작무용작품발표회” 1948; “시공관에서 제2 회김막인무용발표회” 1948; “김막인무용발표회 5/7-8 시공관에서 송범 조용왕(汪) 김일 영 외 16명 찬조출연” 1948;“김막인무용회 7, 8일 시공관에서 개최” 1948). 특히 제2회 김막인 무용발표회(“김막인 무용발표회” 1948)를 3회에 걸쳐 시공관에서 개최했다. 현대 무용에 있어 다각적인 신작을 들고 신진무용가 20여명의 찬조출연으로 집단적인 힘찬 군 무를 펼쳤다고 한다.

    창작무용 그리고 실험적인 전위무용으로 알려진 김막인은 작품성에 있어서 우리나라 현대 무용의 효시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첫째, 무용의 소재가 실험적이다. 둘째, 군무 집단표현 을 한다. 셋째, 이시 미도리의 무용기법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서 무용의 소재면, 구성면, 기법면에서 현대무용의 원리에 접근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40년대 유럽과 미국의 현대무용은 모더니즘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는데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의 고유성과 중요성, 주관적인 개성의 표현성 극대화, 무용소재의 발굴, 체계적인 무용동작기법, 작품구성법과 안무법의 개발 등이 현대무용의 절정을 이루었다. 김막인은 무용 소재면, 군무 표현의 구성면 그리고 무용 기법면에서 현대무용의 동시대적 흐름과 함께 했다고 볼 수 있다.

    (6) 조용자

    1948년 부산에서 조용자는 무용작품발표회(“조용자무용가 2일간 공연” 1948)를 개최했 다. 이 공연에서는 석불, 북장,탈춤취발이,춘향의 일편단심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제목에서 한국과 한국무용에서 소재를 찾아 창작한 작품임을 느낄 수 있다. 타지에서 1944 년, 1945년에 2회의 무용발표회를 하고, 그 후에도 다양한 지역에서 무용작품발표회(광고, “조용자무용공연회 국제극장” 1946)를 했다. 특히 1946년의 신작발표에서는 ‘해방의 새봄 을 찬미하는 새조선 예술계는 활발한 전진을 전개하고 있는데 세 작품으로 조선의 향토시 와 고전물에서 취제를 주로 하고 특히 해방된 조선의 웅장한 전진을 상징한 1)봉선화 2)봄 노래 3)해방전과후 4)애국가 5)강찬무’ 등이였다. 공연프로그램은 박용호와 박이랑과는 다 르게 한국소재와 고전물에서 작품이 개발된 것을 알 수 있다.

    부산출신 조용자는 1957년까지 부산에서 공연하였다. 부산 피란때 무용연구소를 개설했 다. 발표 작품들은 현대무용을 응용한 한국창작무용으로 생각되고 교육무용과 창작무용은 현대무용의 본질인 표현성과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부산공연을 계기로 부산에서 고전무 용과 교육무용 연구생 모집(“조용자무용대” 1948)하여 교육하였다.

    그 외 지역의 공연을 보면, 조용자 무용공연(“조용자무용공연” 1946)이 6월 7, 8일 양일 간 대구 키네마에서 개최되었고 이 공연에는 특히 미군인도 초대한다고 하였다. “조용자무 용발표”(“조용자무용발표” 1946)에서는 신작을 모아 오는 2월 11일부터 3일간 주야3회로 映都문화사 주최와 건국부녀 동맹 후원 아래 국제극장에서 신춘발표회를 갖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시민관에서의 신작발표는화랑,산조등의 솔로와 산적,언덕 위에서,우정 등의 듀엣 그리고 여명,카시몬도의 비극등의 군무가 있었고 (무용극)등의 다채로 운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밖에 그는 무용교육활동(“중초등여교원에게 교육무용강습회” 1947)에서 교육무용부문 강사를 맡았다.

    (7) 그 밖의 무용가

    “일본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1944년 서울 부민관에서의 첫공연으로 인기를 끌든 김미화 는 고향 전주에서 꾸준히 연구를 거듭하는 중 제2차 공연을 19일 20일 양일간 서울시공관 에서 연다”(“김미화여사 무용회개최” 1948)고 하였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동여사는 일본 서 6년간 석정막 수렵궁춘문하에 무용을 전공한 후 지열을 추어 무용계의 이채를 보여 주었다고 하였다.

    “조택원무용연구소에서 서양무용을 연구하든 정인방씨는 11, 12양일간 서울극장에서 제2회신작발표를 하였다(“정인방무용회”1946). 군무공연으로 “김미화무용회 군극”(1948)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군산신문에 실렸다.

    “무용예술협회에서는 조선의 무용가의 총동원장 약0백명에 달하는 조선무용계 초유의 역사적 대공연의 공연이익금은 장차 설립할 무용예술학교의 기금에 충당하리라하였다” (“무용예협대공연” 1946).

    진수방의 제1회무용발표회는 경성 부민관에서 있었고(“진수방무용발표회” 1945), 또 조 용자의 공연이 있었다(“조용자 래구 무용회 개최” 1946)가 있었다. 또한 임경희의 공연 (“광고 임경희예술무용공연” 1945) 알림이 있었고, 귀국 제1회공연(“임경희양 무용회” 1946)을 알렸다. 최승희 문하생일동찬조출연이 있었고 동양 창작 춤추는 심청전으로 인 기를 모았다 했다. 대구에서 이규석과 김상규의 무용발표회가 영남일보를 통해 홍보되 었다(“이규석 무용발표회” 1946;“김상규무용발표회” 1949).

    2) 무용조직단체

    (1) 조선무용건설본부

    조선무용건설본부가 1945년 9월 3일 조직되었다. 역경 속에서도 무용가들의 사회적 과 제에의 관심으로 처음 무용인에 의한 협동체가 조직된 것이다. 무용건설본부의 결성은 대 중성 확보에도 영향이 있었다.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무용건설본부 조직에 따라 11월 초순에 국제극장에서 3일간의 합동공연과 약 1개월 반에 걸친 회원들의 지방순연을 가졌 다(강이문 1963, 1136). 특기할만한 사항은 지방순회공연 등으로 무용의 대중적 접근을 넓혀간 점에 놓여있었다.

    (2) 1946년 6월 조선무용예술협회 결성

    1946년 6월 8일 결성된 조선무용예술협회는 한 두 차례 공연 후 별다른 시도는 없었지 만, 현대무용부의 최승희 조용자 김막인 박용호 김혜성 등이 현대무용을 건설해 나아가려 는 움직임을 엿보게 한다. 현대무용부 위원 박용호는 부산에서 현대무용작품발표와 연구 소 운영을 하였다. 특히 창립자축공연은 모던댄스, 발레, 캐릭터댄스를 모두 포함시켰다 (김영희 외 2014, 369-370). 이 조직(조택원 함귀봉 등 한국민속무용가를 제외한 무용가 들로 이루어짐)은 무용공동체, 무용협동조직체, 민중과 대중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획 이외 에도 서양무용의 도입이 직접 이루어질 수 있는 시기를 맞게 된다. 조선무용예술협회는 현대무용을 분류해서 최승희를 위원장으로, 위원들로서는 김민자 진수방 조용자 김미화 장추화 이석예 박용호 김해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위원들 대부분의 활동이 현대무용, 신무 용, 교육무용 등의 명칭으로 부산에서도 행하여져 왔음을 미루어볼 때 해방후 부산에서의 공연과 교육활동을 통해 부산 현대무용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무용해부학, 무용미 학 등의 지식과 새로운 기법을 수용하면서 무용가들은 협력과 교류로서 발전해갔다.

    이 기간 조선민속무용의 건설은 조선적 색채가 있는 향토적 무용의 발전과 관련 있다. 예를 들어 민족성을 내포한 조선적 분위기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조선무용예술협회 교육무용부 함귀봉의 조선교육무용연구소

    교육무용의 목적은 창의성 개발 및 전인의 완성에 있다. 심미적 소통을 위한 공연예술로 서의 창작의 목적이 교육무용의 목적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문교부 산하의 조선교육무용연 구소를 중심으로 무용교육론과 실기강습회에서 다루어진 표현으로서의 무용을 지향하는 교과과정의 목표나 과목내용을 미루어볼 때 교육무용과 현대무용은 모두 표현, 창의, 제작 등의 측면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동질의 공통요소들을 내포한다.

    조선무용건설본부, 조선무용예술협회의 결성으로 해방 후 무용단체활동이 비롯되었고 함귀봉이 세운 조선교육무용연구소는 현대무용과 교육무용의 역할을 하면서 1950년대 무 용계에 영향을 미쳤다. 강이문은 특히 인격의 완성을 위한 전인교육으로서의 무용교육에 관해 표명하였다(민족미학연구소 엮음 2001, 278).

    1946년 12월 19일 경향신문에 쓴 함귀봉의 글에 의하면, “현대무용의 길은 그대로 교육 의 길이요 학교무용의 길이다”고 하였으니 1940년대 조용자, 김민자, 함귀봉 등에 의한 무용강습회가 초중고등학교 교사 등을 대상으로 꾸준히 개최된 것으로 부산 해방공간에서 의 현대무용의 존재를 충분히 밝힐 수 있다(김호연 2021, 220).

    1949년의 현대무용집단 소속 조용자의 공연, 함귀봉의 강습, 김막인의 공연 등은 현대무 용을 전개해 가고 무용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 밖에 한성준이 설립(1937 년)한 조선음악무용연구회도 있었다(김영희 외 2014, 355).

    1945년에 부산지역 토성동에 김동민은 강태홍과 더불어 ‘경남국악원’을 개설하고 민속 무용발표 공연을 가진바 있다. 외국무용에서는 김향촌이 ‘합동연구소’를 개설하였고 박이 랑, 옥파일, 조말선 등이 ‘교육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아동무용에 전념하였고 1949년 이 인범이 발레연구소를 개설한 바 있으며 1950년 박용호와 옥파일이 각각 부산에서 처음으 로 발레발표회(부산공회당)를 가진바 있다(강이문 1963. 1135). 이 무렵 각자의 대표작품 은 박용호의 ‘해방(현대무용)’. 옥파일의 ‘산적’(‘세라자드’, ‘백조의 호수중에서’), 박이랑의 ‘정렬(현대무용)’등이다(부산시사 제4권 1991, 338). 여기서 부산 현대무용교육의 주요 인물은 박용호, 박이랑, 교육무용에 박이랑, 옥파일, 조말선, 조용자라고 볼 수 있다. 1945 년부터 부산지역 현대무용은 박용호 현대무용연구소(대중무용연구소) 김향촌과 합동연구 소(대신동), 조말선 교육무용연구소(동대신동), 박이랑의 무용연구소 등에서 교육되었다. 박이랑 무용연구소는 약 50명에 달하는 입소생을 받았다(“박이랑 무용연구소 입소식 거 행” 1950).

    2. 역사적 의미와 미적숭고

    1) 역사적 의미

    한국 근현대무용사에서 1945년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대까지는 정치 적 상황에 부딪혀 혼돈기와 공백의 시기가 이어졌다. “당시, 부산은 해방이 되자 중국, 일 본 등지에서 활동하던 무용가들이 귀국하여 정착하고, 한국전쟁 때 피난 온 무용인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는 등 그동안 향토무용 일색이었던 춤계가 활기를 띠었으며, 신 흥무용의 붐이 일기 시작하였다”(김해성 2017, 24.)고 하였다. 신흥무용은 현대무용을 포 함한 외국의 무용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고 있어 무용의 범위가 넓은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해방기에는 현대무용 작품발표라는 주제로 무대가 열렸다.

    무엇보다도 1945년과 1950년 사이 우리나라 무용가들은 민족문화의 건설에 대한 시대 적 과제를 깊이 인식했다. 작품의 모티프를 우리 민족의 무용에서 찾고, 민족무용 문화에 대한 의지로 합동공연을 추진했다. 1949년 12월 시공관에서 현대무용가 김막인 작, 연출 영원한 조국에는 부산지역 박용호를 비롯하여 참가한 단체들은 서울발레단(한동인, 정 지수, 장추화), 최가야무용단, 장추화 무용연구소, 김막인 무용그룹, 박용호, 정인방, 박나 비 등이었다.

    부산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한 현대무용가들 대부분은 타지에서 유입되어 교육, 공연, 사 회활동 등을 펴나갔다. 아울러 부산지역에 현대무용의 뿌리를 내리면서 견고한 예술적 형 성과 발전에 필요한 문화적 기반을 다른 지역의 무용가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폭넓게 확보 하기도 하였다. 과거의 서정성을 추구하는 작품들과는 다르게 해방기 현대무용은 작품 제 목에서 민족주의 정신에 따른 현실성, 도덕성, 그리고 미적 숭고 등의 가치를 인식하게 함 으로써 해방기 이후의 부산지역 무용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해방기 부산지역은 다른 지역에서 유입되어 지속적으로 활동한 현대무용가들과 더 불어 민족주의 정신의 건설에 앞장서는가 하면 민족무용 문화와 새로운 무용의 미학을 제 시한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2) 미적 숭고

    부산지역 현대무용의 형성을 논의하기 위해서 그 역사적 의미 이외에도 고유의 미적 가 치에 대한 해명이 수반되어야 한다.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의 새로운 미적 양태로서의 미적 숭고에 대해 다음에서 고찰한다.

    미학에서 숭고란 위대함을 나타내는 용어로, 물리적, 도덕적, 지적, 형이상학적, 미적, 정신적, 또는 예술적인 것을 포함한다. 이 용어는 특히 계산, 측정 또는 모방의 가능성을 넘는 위대함을 나타낸다. 구체적으로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작품의 내용이 이상을 지향할 때 현실과 이상이 조화를 이루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대립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집트 미 술이나 석고상에서 느낄 수 있다. 숭고미는 인간의 보통 이해력으로는 알 수 없는 경이 또는 위대함 등의 느낌을 주는 미적 범주로 볼 수 있다.

    근대 철학에서 아름다움과 구별되는 자연의 미적 특성으로서의 숭고한 개념의 발전은 18세기에 비롯되어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에 의해 숭고의 개념이 발전되었다. 버 크는 숭고와 미가 상호 배타적이라고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아름다움으로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냄으로써 고고한 정신적 경지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미의식이다.

    칸트(Immanuel Kant)는 관찰 대상의 정신 상태에 대한 그의 생각을 기록하려고 시도했 다. 그는 숭고한 것이 고귀한 것, 훌륭함, 무서운 것의 세 가지 종류라고 주장했다. 숭고함 이란 외부 사물의 사안이 아니며, 자연현상들의 위력과 크기에 굴복하거나 강요받지 않고 오히려 고양되어 스스로의 독립성을 확인하는, 그러한 이성의 사안이라고 하였다. 그러듯 이 대상과 관련한 일이 아닌 오직 자기감정에 국한된다(Scheer 2016, 128-129)고 하였다. 작품 제목 -해방,아 조국아,애국가,영원한 조국,해방의 종소리- 등은 이성적 사 유를 통함으로써 자기감정을 살피고 주도적으로 작품에 대한 미적 파악을 가능하게 한다. 현대무용이 내포하는 근대성과 현대성의 측면에 비추어 볼 때 해방기의 갈등이나 대립, 분열 등의 시대적 긴장 상태는 해방기 현대무용 작품에 대한 본질적 미적 상태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해방기 현대무용은 그 시대와 사람들의 진실에 대한 인식이 담겨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숭고함은, “육체에 대한 정신의 지배, 감성에 대한 이성의 지배, 혼란에 대한 질서의 지배, 감성에 대한 이성의 지배를 지향하는 이념인것이다”(김수용 2009, 35) 라고 하였듯이 해방기 현대무용 작품의 제목이 추구하는 이념의 세계와 지향성에서 숭고 함을 파악할 수 있다. 숭고함의 이념은 해방기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숭고함의 궁극적 근원은 도덕적 이성이며(김수용 2009, 219) 숭고는 인간의 이성 으로서 그 느낌을 파악할 수 있는 감정이다.

    무용에서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의 주관적인 감정과 다르게, 숭고에 대해서는 감상자의 이성의 자기감정이 중요하다. 즉 숭고함을 다루는 국면에 있어서 “칸트는 이성의 자기감정 에 전례 없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Scheer 2016, 130)고 한다.

    해방기 부산의 문화는 도덕적 올바름과 善을 상징하는 미(김수용 2009, 35)에 대한 개념 을 함축했을 뿐만 아니라 감상자가 이성의 자율성에 따라 미를 판단하도록 하였다.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 그만큼 전제된다는 것이다.

    해방기 현대무용 작품을 암시하는 제목에서 미적 숭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숭고함에 대한 표상을 통해 주관이 스스로 얻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숭고한 것을 바라보는 주관 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느끼는지가 중요하다”(Scheer 2016, 131)고 하였다.

    현대무용 작품제목-이석예의 마음, 김해성의 탕자의 골맥, 구연묵의 고苦, 박용 호의 해방과 박이랑무용단의 아 조국아, 조택원의 애국가, 김막인과 문철민의 영원 한 조국그리고 해방의 종소리-등에서 시대적 현실적 감각을 연상할 수 있고 작품의 현시를 상상해보는 사유의 확장을 경험시키고 또한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국가의 숭고함, 국민이 처한 해방의 숭고함의 체험을 가져온다. 즉 무용의 새로운 미적 양태로서 미적 숭고를 파악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미적 숭고는 관람자의 무용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태도를 유도하는데, “미적 숭고는 숭고한 대상의 면모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관람자 자신을 도덕적 존재로 정립하거나 재정립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을 일깨운다는 점에 있다. 한마디로 숭고한 예술은 인간의 도덕적 성찰 능력을 일깨운다. 그러므로 미적 숭고는 미학과 윤리학이 유의미한 방식으로 어울려 개인들을 인지적 도덕 적 정치적으로 고양 시키는 문화적 형식이다”(Burke 2010, 290)고 하였다. 또한 삶에 대한 엄숙함, 의지, 경건함 등 현실을 넘어서려는 극복의지의 주제의식을 접하게 되고 경이로운 감정을 가진다.

    기존의 신무용 작품의 미의 양태와는 다르게 현대무용에 있어서는 도덕성의 측면과 관 람자의 미적 태도의 차이가 발견된다. 숭고의 요소들-대상의 무한성, 힘, 무한, 공포, 공허, 암흑, 고독, 침묵, 장려-은 해방기 현대무용 이외에도 마리 뷔그만의 마녀의 춤(1913)에 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이다. 미는 마음의 정념에 영향력을 미치고 숭고는 사고에 의해 매개된다.

    시공관에서 열린 “김막인 무용작품발표회, 제2회”의 기사가 독립신문 1948년 5월 6일 자에 실렸는데, 그 가운데 “이상을 찾으려..” “밤과 싸워본 자여 고독한 자여! 이상을 향하 여 고민하는 자여! 오라 같이 우러보자 말하여보자! 김막인 백”의 글에서 숭고를 읽을 수 있다.

    한편 조선민족무용의 건설에 대해서, “해방기 동안 재부 무용인들은 조선민족무용건설 에 역점을 두고 문총협 주최의 ‘종합예술제’에 합류하여 춤 공연을 펼쳤다.”(김해성 2016. 93)고 하였듯이 조선민족무용은 해방의 공간에서 무용가들의 원하던 무용작품성을 내포한 다. 그들이 작품에서 추구하던 민족성은 미적 숭고의 대상으로 해방기 무용가들의 민족주 의 정신을 바탕으로 전개된 작품활동에서 특히 드러나는 미적 태도의 결과이다.

    이 시기에 무용연구소는 무용공연과 교육의 구심적 역할을 하며, 교육으로서의 무용의 바탕에는 도덕성과 결부되는 미적 태도로서의 미적 숭고의 개념이 또한 작용한다.

    Ⅳ. 나오면서

    1920년대부터 외국의 현대무용이 우리나라에 수용되는 과정에 관해서는 독일의 근대무 용 또는 ‘노이에 탄츠(Neue Tanz)’, 신흥무용, 신무용 등에 관련된 배구자, 최승희, 조택원 등 현대무용 선구자들의 활동을 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해방기 부산지역 초기 현대무용 가들의 활동에 대해 분석 고찰하였다.

    독일의 노이에 탄츠는 이사도라 던컨과 관계성 없이 독일의 무용가 마리 뷔그만이 그의 스승 루돌프 본 라반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무용으로 탄생시킨 독일의 초기 표현주의 현대 무용이다. 어떤 무용이나 무용가들로부터 관계성을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양태의 무용으로 등장하였다. 그 후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의 무용에 유입된 것은 박영인, 최승희, 조택원을 통해 신흥무용, 모던댄스, 신무용 등의 명칭으로 알려질 때부터였다.

    우리나라에서 현대무용을 언급한 것은 1940년 김관에 의해 신문기사 내용에 ‘현대무용’ 이라는 장르를 지칭될 때였다. 현대무용이라는 명칭으로 작품발표회가 등장한 것은 해방 후다. 1950년 제1회 박용호 현대무용발표회와 박이랑무용회(“박이랑 무용회” 1950)에 현 대무용이 표기되었고, 1947년에 이어 1948년 조선중앙일보(유해붕) 1948년 5월 6일자 에 실린 김막인 현대무용발표회 기사에는 “‘창작무용작품발표회’ 2회(5월 7-8일 시공관 김막인 백)”라고 하여 공연제목에 창작무용 표기가 처음으로 나온다(“창작무용작품발표 회” 1948). 김막인은 실험적인 전위무용을 창작한 현대무용 무대를 열어 보임으로써 다른 장르의 무용과 현대무용 사이의 차별화를 이루었다.

    부산 근현대무용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해방기는 무용연구소와 교육무용강습회를 통해 무 용을 보급하고 신무용가들은 무용극의 제작과 공연활동을 전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일 본 식민지 문화로서의 신무용의 잔재 위에 부산지역 고유의 무용을 위한 기초 작업과정이 없이 민족주의 정신과 민족문화의 건설을 의도하는 무용공연이 성행하는 가운데 개인 작 품발표의 현대무용공연이 등장한 시기이다. 전국적으로 신무용의 답습을 탈피하는 추세 가운데 해방기의 부산에서 박용호, 박이랑의 현대무용은 개인 창작발표라는 점에서 그 예 술적 독창성과 현대무용 본질에의 독자적 접근성을 인정할 수 있다. 현대무용 장르는 한국 무용이나 발레의 동작 어휘와 무관하게 new dance 스타일의 동작이나 순수한 몸짓에서 창작된 무용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은 부산지역에서의 길목성홍, 박영인, 박용호, 박이랑 등의 무용 활동 관련 기사를 통해서였다.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의 형성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우선 근대성의 요인으로서의 발전과 변화의 차원에서 언급할 수 있는데, 이전까지의 신무용과의 차별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사도라 던컨의 무용에 보이는 근대성의 요인과 상통하는 것으로, 기존의 신무용의 기법이나 답습에서 벗어나 재현이 아닌 새로운 시도의 무용으로 활기를 보였다. 또한 합동공연보다는 개인 작품발표 무대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미적 숭고라는 미학적 관 점을 드러내는 진보적 성향은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에 있어서 현대성의 요인을 드러 낸다. 해방 후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기법을 수용한 것 이외에도 미적 숭고라는 미적 관점 의 현대화를 지향한 것이다. 특히 해방에 따라 민족주의 정신의 독자성을 찾으려는 작품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방기 부산지역은 다른 지역에서 유입되어 지속적으로 활동한 현대무용가들과 더불어 민족주의 정신의 건설에 앞장서는가 하면 민족무용 문화와 새로운 무용의 미학을 제시한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의 중심 역할을 한 박용호와 박이랑은 미적 숭고의 가치와 더 불어 민족무용문화의 건설에 대한 생각을 부산무용계에 뿌려주었다. 기성세대인 현대무용 선구자들의 영향 아래 박용호 박이랑 조말선, 옥파일, 조용자 등의 창작발표와 교육활동은 해방기 부산지역 현대무용의 미적가치와 예술적 표현 의지를 실천함으로써 부산무용계와 무용조직사회의 발전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였다.

    저자소개

    장정윤은 UCLA 무용학과에서 안무전공으로 석사학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무용수의 신체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동아대학교 무용학과에서 1984년부터 재직, 현재 명예교수이다. 연구 관심 분야는 무용미학이며 주요연구로는 “니체의 무용관”, “머스 커닝햄의 무용기법에 관한 연구”등이 있다.

    Chang Chungyoon is honorary professor of Dong A University, where she taught graduate and undergraduate course in aesthetic of dance, modern dance technique. Professor Chang currently serves as the editor for the Southeast Korea Dance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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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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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김막인무용회 7, 8일 시공관에서 개최 Gim Makin muyonghoe 7,8il sigonggwaneseo gaechoe” [Gim Makin Dance Performance held on 7th, 8th, at Sigonggwan Theatre]. 1948. 『독립신보』[Dongnip Sinbo], 1948. 5. 5.
    58. “김막인 무용작품발표회, 제2회 Gim Makin muyong jakpum balpyojoe je2hoe ” [The 2nd Gim Makin Dance Performance]. 1948. 『독립신문』[Dongnip Sinmun], 1948. 5. 6.
    59. “조용자무용공연회 국제극장 Jo Yongja muyong gong-yeonhoe gukje geukjang” [Jo Yongja Dance Performance at Gukje Theatre]. 1946. 『중앙신문』[Jungang Sinmun], 1946. 2. 8.
    60. “조용자무용가 2일간 공연 Jo Yongja muyongga 2ilgan gong-yeon” [Jo Yongja 2 day Dance Performance]. 『부산신문』[Busan Sinmun], 1948. 3. 30.
    61. “조용자무용대 Jo Yongja muyongdae” [Jo Yongja Dance Company]. 1948. 『부산신문』[Busan Sinmun], 1948. 3. 31.
    62. “조용자무용공연 Jo Yongja muyong gong-yeon” [Jo Yongja Dance Performance]. 1946. 『대구시보』[Daegu Sibo], 1946. 6. 6.
    63. “조용자무용발표 Jo Yongja muyong balpyo” [Jo Yongja Dance Performance]. 1946. 『자유신문』[Jayu Sinmun], 1946. 5. 14.
    64. “김미화여사 무용회개최 Gim Mihwa yeosa muyonghoe gaechoe” [Gim Miwha Dance Performance held]. 1948. 『한성일보』[Hanseong Ilbo], 1948. 6. 19.
    65. “정인방무용회 Jeong Inbang muyonghoe” [Jeong Inbang Dance Performance]. 1946. 『중앙신문』[Jungang Sinmun], 1946. 2. 11.
    66. “김미화무용회 군극 Gim Mihwa muyonghoe gun-geuk” [Gim Miwha Group Dance Drama]. 1948. 『군산신문』 [Gunsan Sinmun], 1948. 8. 19.
    67. “무용예협대공연 Muyong yehyeop dae gong-yeon” [Dance Art Association Dance Festival]. 1946. 『영남일보』 [Yeongnam Ilbo], 1946. 8. 10.
    68. “진수방무용발표회 Jin Subang muyong balpyohoe” [Jin Subang Dance Performance]. 1945. 『경성일보』 [Gyeongseong Ilbo], 1945. 3. 25.
    69. “임경희예술무용공연 Im Gyeonghui yesul muyong gongyeon’ [Im Gyeonghui Dance Performance]. 1945. 『영남일보』 [Yeongnam Ilbo], 1945. 10. 23.
    70. “이규석 무용발표회 Yi Gyuseok muyong balpyohoe” [Yi Gyuseok Dance Performance]. 1946. 『영남일보』[Yeongnam Ilbo], 1946. 7. 25.
    71. “김상규무용발표회 Gim Sanggyu muyong balpyohoe” [Gim Sanggyu Dance Performance]. 1949. 『영남일보』 [Yeongnam Ilbo], 1949. 9. 1.
    72. “중초등여교원에게 교육무용강습회 Jungchodeung yeogyowonege gyoyuk muyong gangseuphoe” [Educational Dance Class for female elementary, and middle school teachers]. 1947. 『영남일보』[Yeongnam Ilbo], 1947. 12. 28.
    73. “박용호무용 신작발표 대중무용연구소 제1회 공연 부산극장 Bak Yongho muyong sinjakbalpyo daejung muyong yeon-guso je1hoe gongyeon Busan geukjang” [The first performance of the Popular Dance Research Institute presenting a new work by Bak Yongho at Busan Theater.]. 1948. 『부산신문』[Busan Sinmun], 1948. 11. 2. 6.
    74. “박이랑 무용연구소 입소식 거행 Bak Irang muyong yeon-guso ipsosik geohaeng” [Bak Irang Dance Laboratory Admission Ceremony held]. 1950. 『부산일보』[Busan Ilbo], 1950. 3. 23.

    저자소개

    Footnote

    • 부산 근대무용(1918-1942년)은 부산무용의 근대사 즉 연대기적으로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해방 전까지이다. 연대기로 본 근대 현대무용은 일제강점기의 1920-1940년대로 볼 수 있다. 부산 근대무용은 방법 면에서 체계 화되지 않고 구체적인 설명도 미약하지만 신흥무용이라든가 신무용의 유입 이외에도 한국무용의 소재나 무용기 법의 방법과 실기동작면에서 응용을 하거나 적용한 예가 소수 작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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