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urnal of Society for Dance Documentation & History

pISSN: 2383-5214 /eISSN: 2733-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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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Dance Culture of Colonial Modernity in the 1920s through Newspaper Photographs 1920년대 근대신문 사진으로 읽는 식민지 근대의 춤 문화 : 매일신보동아일보조선일보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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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 Dance Journal Vol.80 No. pp.189-221
DOI : https://doi.org/10.26861/sddh.2026.80.189

Reading Dance Culture of Colonial Modernity in the 1920s through Newspaper Photographs

Kyunga Cho*
*Research Professor, Korean National Research Center for the Arts,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이 논문은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수행된 것임. (NRF-2023S1A5B5A16082685).


* Cho Kyunga choom71@hanmail.net
January 31, 2026 March 23, 2026 March 30, 2026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evolution of modern dance culture amidst the historical tribulations of the colonial era by analyzing dance photographs published in 1920s newspapers. Utilizing a literature review methodology, the research analyzes 317 photographs from Maeil Sinbo (154), Joseon Ilbo [Chosun Ilbo] (93), and Dong-a Ilbo (70). The analysis revealed three key findings. First, the photographs visually corroborate the heteronomous nature of dance culture under colonial rule. Second, they demonstrate the systematic assimilation of Japanese dance into colonial Korea. These images expose an imperialist agenda designed to manage and mobilize the colonized population under the pretext of artistic exchange. Third, despite such oppression, the photographs capture the emergence of a modern and subjective dance culture. This study holds significant value by providing a comprehensive pictorial understanding of the performing arts landscap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through the lens of newspaper photography. By re-evaluating these visual archives, the research illuminates the complex interplay between colonial hegemony and the pursuit of modern cultural identity in 1920s Korea.



1920년대 근대신문 사진으로 읽는 식민지 근대의 춤 문화
: 매일신보동아일보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조경아*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초록


이 연구의 목적은 1920년대 근대신문에 수록된 ‘춤 사진’을 통해 식민지 근대의 춤 문화를 살펴보는 것이다. 문헌 연구 방법으로 진행했으며, 연구 대상은 근대신문의 춤 사진 317건으로 매일신보 154건, 조선일보 93건, 동아일보 70건이었다. 연구 결과 첫째, 식민지의 타율적인 춤 문화를 사진으로 확인했다. 둘째,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의 춤이 수용되는 양상을 사진으로 증명하였다. 여기에는 예술 교류라는 형식을 빌려 식민지 조선을 동화시키고 관리하려 했던 제국주의적 기획이 담겨 있다. 셋째, 억압 속에서도 발현된 근대의 주체적 춤 문화를 사진으로 확인했다. 이 연구의 의의는 근대신문의 춤 사진이라는 자료를 통해 1920년대 춤의 현장을 조망했다는 것이다.



    Ⅰ. 머리말

    이 연구의 목적은 1920년대 근대신문에 수록된 ‘춤 사진’을 통해, 식민지라는 역사의 질곡 속에서 근대적 춤 문화가 전개되는 구체적인 모습을 고찰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춤 문화의 변천 과정을 총 5단계로 나누어 연구하는 중이며, 1단계인 1910년대 연구는 학술지에 게재했고(조경아 2024) 이 연구는 2단계에 해당한다.

    1920년대는 일제가 소위 ‘문화정치’라는 새로운 지배 정책을 시행하던 시기로, 조선인에 대한 다양한 동화정책을 추진하였다(조성운 2007, 239). 주지하듯 일제는 겉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동화정책을 표방했으나, 실제는 ‘차별화’ 정책을 펼치는 이중성을 수행했다. 동화정책은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규정하여 일본화하려는 일제의 핵심 지배 전략으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식민 지배 담론을 생산·유포했으며, 수록된 문예물 또한 식민지 담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이희정 2011, 353; 373). 따라서 가장 많은 춤 사진이 수록된 매일신보에 춤 관련 사진이 선별 및 게재되는 과정에 일제의 동화정책과 문화정치의 논리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일제의 검열을 거쳐야 했던 동아일보조선일보도 식민 담론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이 글에서 다룰 근대신문은 매일신보』·동아일보』·조선일보이다. 1920년대 신문 매체의 성격을 알아보면, 우선 매일신보는 1910년에 창간된 조선총독부 기관지로서,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를 자매지로 두었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민간 신문의 발행을 허가함에 따라,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에,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에 각각 창간되었다(신용하 2020, 101-104). 일제는 민간지 발간을 허용하면서도, 조선인의 정신적 소멸을 위해 민간지 조차 검열을 강화하는 모순적 상황을 연출했다(박헌호 2005, 254). 1920년대 한국인의 문맹률은 80-90% 였다(노영택 1994, 128). 따라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독자의 최대치는 10-20% 였으며, 그중 신문을 구독할 수 있는 경제력까지 갖춘 독자의 비율을 더욱 낮았을 것이다. 따라서 신문 속 춤 사진을 보고, 춤 관련 정보를 얻고 영향을 받은 사람은 소수의 지식인층이었으리라 예상된다.

    연구 대상은 1920년대 신문 속의 ‘춤 사진’이다. 근대신문의 춤 사진은 관련 기사가 병행되므로 춤 사진에 담긴 텍스트(Text)와 맥락(Context)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엽서 사진보다 다채로운 광경을 담고 있어 춤추는 주체와 움직임, 관객, 의상, 무대, 공연 목적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사진의 이미지는 ‘자연적’ 복제가 아니라 일종의 권력관계 속에서 역사적·문화적으로 부호화되는 기호적 구성물이다"(최현식 2016, 10)라는 관점에서 춤 사진을 읽을 필요가 있다. 즉 춤 사진에 표상된 이미지는 일차적으로 사진작가, 이차적으로 신문 편집진, 그리고 최종적으로 편집진에게 영향을 미치는 권력이 나타내려는 ‘의도’가 중첩되어 수록된 결과물이다.

    본 연구는 문헌 연구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1920년대 근대신문의 ‘춤 사진’은 별도의 자료집이 없고, 검색이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도 구축되지 않은 실정이다. 1920년대 신문 자료는 이미지 형태로 제공되는데, 매일신보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매일신보 영인본(경인문화사 1984-1985)과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사이트에 구축된 이미지 DB 자료를 활용하였다. 동아일보조선일보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의 이미지 DB 자료를 사용하였다. 조사 대상인 1920년대 세 신문의 분량은 약 3-4만 면이다.

    1920년대 신문에서 춤을 지칭하는 용어는 춤, 딴스, 무도, 무용, 유희, 여흥, 체육, 체조 등 다양하게 혼용되었다. 따라서 자료 수집 과정에서 이러한 명칭의 다양성을 고려하여, 춤과 관련되었거나 유의미한 움직임이 나타나는 사진을 포괄적으로 포함하였다. 향후 5단계까지의 연구를 마치면, 수집된 근대신문 춤 사진을 정리하여 자료집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1920년대 세 신문에서 수집한 춤 관련 사진 자료는 총 317건이다. 춤 사진이 가장 많이 수록된 신문은 매일신보로 154건이 게재되었으며, 뒤를 이어 조선일보 93건, 동아일보 70건 순이었다. 1910년대 매일신보에 춤 사진에 비해 대략 9배 정도 확산된 양이었다. 이는 신문 매체의 증가와 더불어 춤에 관한 관심이 1920년대에 크게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수집된 317건의 춤 관련 사진을 크게 식민지의 타율적인 춤 문화와 근대의 주체적 춤 문화에 해당하는 사진으로 분류하였으나, 일제강점기의 식민성과 근대성이 춤 사진에서 항상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학계에 축적된 ‘식민지 근대’ 담론을 참고하더라도 이를 춤 사진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춤 사진에는 일제가 강요한 ‘타율적 질서’와 조선인의 ‘자생적 근대’가 모순적으로 얽혀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그러한 모호성과 복합성을 인지하면서도, 큰 틀에서 춤 문화에 담긴 식민성과 근대성을 구분하여 흐름을 살펴보고자 했다.

    그간 일제강점기의 춤을 고찰할 때, ‘식민지’라는 시대적 특수성과 한계를 간과한 채 현재와 유사한 조건 속에 춤이 존재했던 것으로 상정해 왔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조선총독부는 예술을 통제하며 권력의 정당화와 국민 동원에 이용하였기에, 일제강점기는 예술적 작동이 제약되고 자율성이 위협받는 상황이었다(한준 2024, 294-297). 식민지라는 특수 상황에서 경제가 자율적이고 균형적으로 작동하는 시장경제로 간주 되는 것이 부당하듯(윤해동 2008, 40), 식민지 시기의 춤계가 현재와 같이 주체적·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 실체와 거리가 있다. 그간 무용학계가 춤의 근대성에 치중하여, 그 이면의 식민성에 대해서는 학술적으로 심도 있게 고찰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다.

    “식민 통치라는 억압적인 근대 역사가 남긴 유산은 독립한 이후에도 계속 남아 훨씬 더 교묘하고 복잡한 형태로 파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동시에 탈식민화는 식민 지배의 기억을 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잔재를 철저히 탐색해서 그것 들의 정체를 밝혀내고 그것들에 대항함으로써만 출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하였다”(송명희 2003, 43).

    위의 인용문처럼 식민 지배의 ‘잔재를 철저히 탐색’하고 그 정체를 밝혀내어 대항함으로써 출구를 찾는 방식은 무용학계에서도 유효하다. 일찍이 역사학계에서는 ‘과거’와 직접 대면하고 이를 역사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을 시도하여 새로운 역사학적 내용을 획득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허영란 2009, 66).

    무용사도 역사학의 한 갈래이므로, 생생한 과거의 실체와 직접 마주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 ‘신문 속 춤 사진’을 주요 자료로 활용한 것은 이러한 시도의 하나이다. 춤 사진이라는 시각 매체를 통해 1920년대 춤의 구체적인 현장을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연구의 의의는 신문의 춤 사진이라는 사료를 발굴하여, 일제강점기 춤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조망했다는 점이다.

    이 연구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첫째, 사진으로 1920년대 춤의 풍경을 개괄적으로 그려낸 초기 연구로서, 현상의 전모를 깊이 파악하지 못했다. 둘째, 수집된 317건의 춤 사진 중 일부만 분석 대상으로 삼았기에, 소개하지 못한 사진들에 대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이다. 셋째,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진 해외 춤 사진의 경우,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본 논문에서는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하였다. 향후 단행본 형태의 연구서 발간 때 보완하고자 한다.

    Ⅱ. 식민지, 타율적인 춤 문화

    1. 조선과 일본의 합동 춤: 춤으로 동화정책

    1) 조선신궁 천녀(天女) 춤: 일본 천황을 위한 제사 춤

    일본 제국주의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동화정책은 춤으로도 표방되었을까? <도판 1의 인물은 조선신궁(朝鮮神宮)에서 춤을 출 천녀(天女)로 선발된 조선인과 일본인 소녀다. 두 소녀의 춤은 조선신궁 건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신궁은 조선총독부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는 동화정책으로 1925년 10월 서울 남산에 건립되었다(김철수 2010, 155). 여의도 면적의 두 배 크기로 조성된 조선신궁은 국가신도(國家神道)로서 국가 제사와 신사참배가 이루어진 대표적 공간이었다. 이곳에 봉안된 주요 신은 일본 황실의 시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천조대신)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52-1912)으로, 조선신궁은 조선인에게 일본의 신을 섬기도록 강요한 황국신민화의 거점이었다(문혜진 2013, 385).

    조선신궁의 완공에 맞춰 조선총독부는 조선신궁의 핵심 건물인 어신전(御神殿)에서 천녀(天女)의 춤을 출 소녀들을 선발했다. 예비 선발된 인원은 조선인 12명과 일본인 10명을 포함한 총 22명이었다. 예비 선발의 기준은 첫째 11-14세의 소녀일 것, 둘째 학업 성적이 우수할 것, 셋째 품행이 방정할 것, 넷째 용모(容姿)가 단정할 것, 다섯째 신체가 강건할 것이었다. 천녀로 예비 선발된 22명의 명단과 사진은 매일신보에 게재되었으며, 예비 선발만 되었어도 평생 영예가 된다는 첨언도 이어졌다(영예에 빛나는 1925, 2).

    <도판 1>은 일종의 오디션에 해당하는 몇 차례 연습을 거쳐 최종 선발된 두 소녀이다. 오른쪽은 14세의 조선인 장동윤으로 어의동 공립보통학교 6학년이다. 왼쪽은 13세의 일본인 마츠데라후미코(松寺文子)로 남대문 소학교 6학년이다. 사진 속 두 소녀는 조선신궁의 일본식 제례에서 춤을 출 의상을 입고 있다. 이 의상은 총독부에서 주관하여 제작했으며, 능라(綾羅)라는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 한 벌에 칠백여 원(현재 약 칠백만 원)이었다.

    <도판 1>의 사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첫째, 조선과 일본의 동화정책을 춤으로 시각화했다는 점이다. 조선신궁의 신사(神祀) 의례에서 조선과 일본 소녀에게 같은 일본 제례 의상을 입혀, 천녀(天女)라 치켜세우면서 춤추게 하고, 그 사진을 전시한 것은 일본과 조선이 모두 천황의 신민이라는 동화정책을 춤으로 표상하는 것이었다. 둘째, 차세대인 조선의 소녀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소녀가 춤을 춘 것은 제례의 정결함을 상징하기 위한 설정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고의 무용수를 선발 하는 것이 아니라, 춤에 미숙한 조선 소녀를 등장시켜 일본의 옷을 입히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 천황의 제례에서 춤을 추게 하여 ‘일본화된 조선 소녀’를 굴욕적으로 드러냈다. <도판 1은 단순히 제례의 춤 사진이 아니라, 미래세대도 황국의 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표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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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

    신궁 무희(神宮 舞姬)로 결정된 두 소녀: (우) 조선인 장동윤 양, (좌) 일본인 마츠데라후미코(松寺文子) 양. (Two young women appointed as ceremonial dancers: Right Jang Dong-yun (Korean); (Left) Matsudera Fumiko (Japanese). 매일신보. 1925.10.12. 2면

    2) 조선과 일본 소녀로 구성된 가극단

    조선과 일본 소녀가 함께 구성된 춤 공연단도 조직되었다. <도판 2>는 1월 2일 밤부터 경성 황금관에서 열린 가극단을 홍보하는 사진이다. 조선과 일본 소녀들이 함께 구성된 가극단의 활동을 소개하며, 조선과 일본 소녀 18명이 찍은 단체 사진을 곁들였다. 이들은 함께 공연하는 파트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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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

    내선 소녀들의 가극단(The Opera Troupe of Japanese and Korean Girls). 매일신보 1926.1.1. 2면

    ‘가극단’의 실제 활동은 노래뿐만 아니라 춤이 대부분 동반되었다. 1920년대 가극에 춤이 결합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용어에서 알 수 있다. 가극과 무도를 합쳐 ‘가극 무도’(앵가접무 1921, 3)라 했고, 가극과 무용을 합쳐서 ‘가극 무용’ 대회(개성 소녀 1924, 3)라 칭하기도 했으며 극, 가극, 무용을 합쳐 ‘극·가극·무용대회’라는 명칭이 등장하기도 했다(대성황을 예기하는 1928, 3). 이런 명칭을 유추하면 가극단 활동에서 춤은 필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도판 2>는 조선과 일본의 소녀로 구성된 ‘내선 소녀들’의 가극단을 부각시켜 조선과 일본을 동화(同化) 시키는 활동을 이미지로 드러내려 했다.

    3) 조선과 일본 유치원생의 일장기 춤

    동화정책의 하나로 조선인과 일본인 함께 춤을 추는 기획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 <도판 3>은 ‘내선 소녀들의 봉축 춤’ 사진으로 조선과 일본의 유치원생들이 줄을 맞추어 서서 양손에 일장기를 들고 사선으로 팔을 뻗어 봉축 춤을 추는 모습이다. <도판 3>은 경성 시내에 있는 애국부인회 유치원에서 조선과 일본 아이들이 매일 봉축 춤을 연습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애국부인회는 일본에 애국하려는 대표적인 여성 친일 단체였다. 2026년 1월 15일의 민족문제연구소 웹사이트에 수록된 김혜영(2018)의 글에 따르면 애국부인회는 1911년에 창설되어 주로 군사 후원 활동을 했고, 미성년 자녀까지 보국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애국자녀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린 자녀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려고 했던 애국부인회의 지향대로 유치원에서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유치원생 손에 일장기를 들게 하고 노골적으로 황국 신민으로 자라나게 하는 춤을 추게 했던 사실이 사진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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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3

    내선 소녀들의 봉축 춤(The Congratulatory Dance of Japanese and Korean Girls). 매일신보 1925.12.5. 2면

    2. 동원된 기생의 춤

    1) 비원 왕실 공간에 동원된 일본 기생의 춤

    왕실이 즐기던 잔치 공간에 조선 기생이 아닌 일본 기생이 동원되기도 했다. <도판 4>는 1922년 5월 6일에 창덕궁 후원인 비원(祕苑)에서 열린 원유회(園遊會) 장면이다. 원유회는 연회의 일종이다. 위 사진은 오른쪽부터 이강공비, 왕세자비, 이왕비, 이왕, 왕세자 다섯 분의 전하와 아기씨께서 여흥을 태람하시는 것이라 소개되었고, 아래 사진은 ‘여흥의 굉장한 광경’이라 소개되었다. 무대 위의 여흥에 기모노를 입은 일본 기생이 공연하고 있다. 무대 아래 마당에는 군중이 모여 공연자를 바라보는데, 이때 참석한 이들은 모두 왕실과 귀족으로 전체 참여자가 150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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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4

    비원에 원유회(Royal Garden Party at Biwon). 매일신보 1922.5.7. 3면

    이 사진은 조선 왕실과 귀족이, 왕실 공간인 창덕궁에서 일본 기생의 춤을 보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잔치에서 조선 기생들이 공연했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이 사진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패망하여 무력한 왕실과 운집한 대중이 바라보는 ‘일본 기생’을 대비시켜, 조선 왕실의 공연 문화조차 일본 것으로 점령당했다는 사실이다.

    2) 운동회에 동원된 기생 무용: 조선 춤과 딴스

    1910년대에 이어, 1920년대에도 기생은 조선총독부 관광사업과 박람회와 운동회의 여흥(餘興)에서 춤과 노래에 동원되었다. 근대 시기에 ‘여흥’이란 용어는 공연과 동의어로 쓰였다. 정재, 춤, 딴스, 무도 등을 비롯한 악무 활동이 모두 ‘여흥’의 범주였으며, 유사한 용어로 ‘연예(演藝)’도 쓰였다.

    1910년대에 비해 1920년대 신문의 춤 사진에서는 기생의 춤 사진 비중이 확연히 줄었으나, 여전히 기생은 운동회 공연과 경기에 동원되어 관중을 운집시키는 스타성을 지니고 있었다. <도판 5>는 매일신보사에서 주최하여 1929년 6월 11일에 장충단공원에서 오전 8시부터 개최된 제4회 (경성)부민(府民) 위안 단오 대운동회 관련 사진이다. <도판 5>는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위 사진은 운동회에 출정할 ‘조선 권번 선수’이며, 중간은 ‘한성 권번 선수’, 아래는 ‘대동 권번의 금무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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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5

    단오운동회 여흥 화보(Post-Athletic Meet Entertainment at the Dano Festival). 매일신보 1929.6.11. 2면

    <도판 5>는 운동회에서 하는 기생의 역할이 ‘선수와 공연자’였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운동회 선수로 뛸 한남 권번과 한성 권번 기생들은 사진 속 모습이 앳된 여학생 같다. 한성 권번의 선수들은 열의를 다지듯 모두 머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맨 아래의 금무단은 차려입은 복식을 통해 검무와 승무를 공연했음을 알려준다. 운동 및 여흥의 내용은 신문 기사에 자세한데, ‘사 권번 기생무용(四券番 妓生舞踊)’은 오후 1시부터 진행되었다. 사 권번은 한성, 조선, 한남, 경성 권번을 말한다. 검무와 승무는 한성 권번에서, 사고무와 딴스는 조선 권번에서, 딴스와 남도입창은 한남 권번에서, 딴스와 서도입창은 경성 권번에서 맡았다(대회 순서 1929, 2). 이 내용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사 권번 ‘기생 무용’(Gisaeng Dances by the Four Gwonbeon) (“대회 순서” 매일신보 1929.6.11. 2면)

    권번 명 조선 춤 서양 춤 노래
    한성 권번 검무, 승무 - -
    조선 권번 사고무 딴스 -
    한남 권번 - 딴스 남도읍창
    경성 권번 - 딴스 서도읍창

    <표 1> 처럼 한성 권번을 제외한 세 권번에서 딴스를 공연한 것을 보면, 기생이 운동회에서 펼치는 주요 공연은 딴스였고, 이는 대중들이 바람이 적용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기생들은 이미 1910년대부터 ‘서양 무도’와 ‘전기춤(나비춤)’ 등 서양 춤을 극장 무대에 선보였는데 1920년대에도 기생들의 서양춤은 지속되었다.

    특히 근대 무용사에서 주목할 점은 1929년 당시 네 곳의 권번 기생이 춘 춤을 공식적으로 ‘무용’이라 표기했다는 사실이다. <도판 6>에 제시된 기사는 ‘사 권번 기생무용(四券番 妓生舞踊)’이라는 소제목 아래 조선 춤과 서양식 댄스 종목을 나열되었다. 오늘날 관점으로 ‘기생’과 ‘무용’의 결합이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당대 사료는 검무·승무·사고무뿐만 아니라 ‘딴스’까지도 모두 ‘무용’이라는 범주 안에서 인식되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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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6

    사 권번 기생무용(Gisaeng Dances by the Four Gwonbeons) 매일신보 1929.6.11. 2면

    이는 기생의 춤을 무용에서 배제하고 일본을 경유한 서양식 신무용만을 진정한 무용으로 간주해 온 무용학계의 통설이 역사적 실체와 어긋남을 시사한다. 따라서 근대기 ‘무용’이라는 용어의 범주와 인식에 대한 재논의가 시급하다. 기생의 춤을 무용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결국 서구 지향적인 일본식 신무용을 ‘진보된 근대’로, 기생의 춤을 ‘정체된 과거’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인식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러한 관점은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비판적 성찰이 요구된다.

    3) 일본 박람회와 행사에 동원된 기생의 춤

    기생이 동원되는 행사는 국내에만 그치지 않았다. <도판 7>과 <도판 8>처럼 기생은 일본 박람회에도 동원되었다. <도판 7>은 1922년 동경 평화박람회에 선발된 대정 권번의 기생 열 명이다.

    이들을 동경의 평화박람회로 파견한 표면적 이유는 ‘춤과 가곡으로 박람회의 피곤한 관객의 정신을 새롭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열두 명의 기생은 김금주, 전춘홍, 정유록, 김농옥, 박점홍, 임춘심, 이향심, 신채선, 김옥엽, 현매홍, 윤채운, 김소희인데, 사진 속에는 무용을 담당한 열 명만 등장한다. 이들을 이끄는 악사는 하규일이며, 사진의 가운데 남성이다. 그 밖에 연주자 여섯 명과 사무원 두 명도 함께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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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7

    평화박람회 가는 대정권번 기생(Gisaeng from Daejeong Gwonbeon Association attending the Peace Expo). 매일신보 1922.3.1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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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8

    대판(大阪, 오사카) 조선 물산의 여흥장(The Entertainment Hall for Korean Products at the Osaka Exhibition). 매일신보 1926.3.7. 2면

    <도판 7>의 평화박람회에 동원된 대정 권번의 기생들은 4월 12일 아침에 경성에서 출발하여 15일에 동경에 도착했다. 이후 16-20일까지 5일간 박람회협회의 ‘여흥장’ 무대에서 ‘가무를 연주’한 후 도쿄 유락좌(有樂座) 극장에서 5일간 연주를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대정권번 기생이 공연한 춤은 봉래의, 장생보연지무, 춘앵전, 박접무, 고구려무, 포구락, 무고, 보상무, 검무, 승무, 사자무였다(조선관 무대에 1922, 3). 특히 춘앵전은 경성 제일의 무용 명수인 김농옥이 추었는데 그 상징적 움직임이 좋았다고 평가받았다(임혜정 2012, 56).

    권번 기생들이 서양식 댄스 등 새로운 춤에 능숙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연 종목이 조선의 궁중춤 위주로 선별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근대적 문물을 과시하는 박람회에서 일본의 ‘선진적 근대성’과 대비되는 조선의 ‘정체된 과거’를 부각하려는 의도적 선택으로 보인다.

    당시 평화박람회의 조선관은 전체 진열관 중 ‘제일 추악하다’라는 평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관의 첫 전시물은 야만이라고 보일만한 조선 농민 인형을 배치하여 조선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한규무, 노기욱 2010, 61-62). 이러한 전시 맥락을 고려할 때, 권번 기생의 춤 역시 일본의 근대성과 조선의 후진성을 대조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되었다고 본다.

    Ⅲ. 식민지, 일본의 춤 수용

    1. 천승과 배구자의 춤

    1910년대에 이어 1920년대에도 천승(千勝), 즉 쇼쿄쿠사이 텐카츠(松旭斎天勝, 1886-1944) 일행의 내한 공연이 진행되었다. 1920년대 천승의 내한 공연에서 배구자(裵龜子, 1905-2003)는 함께 공연했다. <도판 9>의 사진은 1921년 천승의 공연 중 대표작인 몽중(夢中)의 호접무(蝴蝶舞)이며, 어두운 무대에서 나비 날개 의상에 조명을 비추어 색이 변하는 효과를 주는 춤이다. 이 춤의 뿌리는 로이 풀러(Loie Fuller, 1862-1928)의 나비춤(The Butterfly Dance)이며, 1917년에 광교 기생조합의 기생도 유사한 형태의 나비춤을 추었다(광교기의 나뷔츔 1917, 3). 천승 일행은 각종 마술, 가장무도회 및 딴스를 구성해 경성 황금관에서 1921년 5월 26일부터 공연을 펼쳤다(송욱재천승 일행 매일신보 192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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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9

    천승 양의 몽중의 호접무 (The Butterfly Dance in a Dream by Tenkatsu). 매일신보 1921.5.19. 3면

    <도판 10><도판 11>은 배구자이다. 천승의 공연을 동양 마술계의 최고라 치켜세우며 조선 소녀 배구자의 존재도 홍보되었다. 고모이자 친일 반역자(스파이)인 배정자(裵貞子, 1870-1951)의 주선으로, 배구자는 1916년인 11살 때 천승의 제자로 일본에 건너갔다. 도일 2년 후인 1918년 내한 공연 때 엄마와 조선말이 통하지 않았던 배구자는 1921년에도 조선말을 전혀 못 했다. 인터뷰에서 천승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배구자이며 1921년 공연에서 배구자는 소공자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며, 이전 평양 공연에서 ‘일본 춤’을 추어 대환영을 받았다고 치켜세웠다(배구자양의 묘기 202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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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0

    천승의 제자로 있는 배구자양(Bae Guja, an apprentice of the Tenkatsu). 매일신보 1921.5.12.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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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1

    배구자(Bae Guja). 조선일보 1928.1.3. 2면

    2. 일본 무용의 권위자 초청: 귀미자와 등문간지

    1920년대 일본 무용가로서 내한 공연을 펼친 귀미자, 즉 모토오리키미코(本居貴美子, 1911-1972)의 행보는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초청으로 1925년 10월 17일부터 3일간 공회당 무대에 올랐다. 당시 언론은 귀미자(貴美子)를 일본 ‘동요음악계의 여왕’으로 치켜세우며, 그의 방문을 조선 동요계에 내리는 ‘선물’이라 극찬했다. <도판 12>에서 15살의 앳된 귀미자의 모습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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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2

    동요음악계의 여왕(The Queen of Children’s Songs). 매일신보 1925.9.13. 3면

    귀미자 일행의 활동은 2년 뒤인 1927년 10월 17-18일 공회당에서도 이어졌으나, 그 성격은 ‘자선’이라는 명목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구세군 경성 육아 홈의 운영비 마련을 위해 개최된 ‘동요 무용대회’는 표면적으로는 조선 고아를 위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표방했다(육아 홈 1927, 3). 그러나 ‘자비로운 제국의 여왕’인 소녀가 ‘불쌍한 식민지 고아’를 구제하는 이러한 수혜의 구조는, 일본의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제국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동요 무용은 예술적 교류라는 형식을 빌려 식민지 조선을 동화시키고 관리하려 했던 제국주의적 기획이 담겨 있었다.

    <도판 13>은 동방 무용의 권위자가 조선에 온다며 떠들썩하게 소개된 등간정지, 즉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 1880-1966)가 춤추는 모습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초청한 등간정지에 관해 고전무용과 민요, 동요, 서양딴스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사람도 흉내를 내지 못할 독특한 ‘무용의 신비경을 개척’한 인물로 소개되었다. 특히 그는 샤미센(三味線)은 물론이며, 거문고에도 춤을 추고, 피아노에도 춤을 추고, 척팔(사쿠하치)에도 춤을 추고, 육성에도 춤을 추고. 리듬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한 춤을 창조해서 관객을 경탄케 한다고 평가했다. 당시 언론은 그의 공연이 "조선 무용계에 새 기록을 일구는 가장 기념할 날이 될" 것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그가 ‘조선무용을 연구하고자’ 한다는 보도는 이후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보여준 언사와 흡사하다. 그러나 제국의 문화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이 식민지 조선의 춤을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삼으려 했을지 의문이다. 아마도 식민지 문화를 포용하고 수렴하는 태도를 연출하여 제국의 문화적 권위를 공고히 하려 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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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3

    동방 무용계의 권위(The Authority of the Eastern Dance World) 매일신보 1925.10.28. 2면

    3. 일본 신무용가 국내 공연: 석정막, 석정소랑

    1) 1926년 이시이 바쿠(石井漠) 내한 공연의 배경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920년대 신문에는 일본인의 춤이 비중 있게 등장했는데, 그 중 심에는 이시이 바쿠가 존재했다. 다른 일본 무용가와 비교하면 이시이 바쿠에 관한 ‘춤 사진’이 가장 많았으며 매일신보에 주로 등장했다. <도판 14>는 첫 내한 공연을 앞둔 석정막과 그의 여동생 석정소랑의 인터뷰 장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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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4

    무용계의 명성(Renowned Figure in the Dance World). 매일신보 1926.3.21. 2면

    ‘무용계의 명성’

    동경에셔 무도로 유명한 셕정막(石井漠)과 셕정소랑(石井小浪)은 금 이십 일일부터 (이)십 삼일까지 경성일보(京城日報) 후원으로 시내 공회당(公會堂)에서 일 륙시부터 츌연한다함 은 긔보한 바어니와 입장료는 특등 삼원 이등 이원이요 학생은 팔십젼이며 경성일보 애독자 와 우대권을 가지고 오는 이에게는 각 등을 모다 이 할인하리라는 바 이 일힘은 여려나라로 순유하면셔 각국 무도를 연구하얏다는대 금번에는 됴션춤도 연구하랴고 한다하며 더욱히 십 이세로부터 십오세까지의 됴션 여자로 무도를 연구하고자 하는 이가 잇다하면 자긔들이 다리 고 다니며 가르켜 주겟다고 하더라(매일신보 1926. 3. 21. 2면)

    <도판 14>의 ‘무용계의 명성’ 기사는 세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첫째, 이시이 바쿠(石 井漠) 일행이 여러 나라의 무도를 연구해 온 연장선상에서 조선의 춤 또한 연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둘째, 무도를 배우고자 하는 12-15세의 조선 여성을 선발해 직접 가르치겠다는 일종의 제자 모집 공고를 병행했다는 점이다. 최승희가 그의 제자가 되고자 했을 때 즉각적으로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이시이 바쿠가 조선에서 제자를 육성하겠다는 의도를 신문에 미리 표방했던 사실이 작용했다. 셋째, 기사 내에서 ‘무용’과 ‘무도’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사 제목은 ‘무용계’라고 표기했으 나, 본문에서는 “동경에서 ‘무도’로 유명한 이시이 바쿠”, “‘무도’를 연구하고자 하는 이” 등으로 서술했다. 이는 1920년대 당시 무용과 무도의 개념이 엄격히 분리되지 않고 유연하 게 통용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시이 바쿠의 첫 조선 공연은 유럽 순회공연을 위해 이동하던 도중 성사되었다. 경성 애호가들의 요청에 응해 3월 21일부터 사흘간 공회당에서 공연하기로 했다는 기사 (세계적 무용시가 1926, 2)에서 알 수 있듯, 그의 내한은 단독 기획이라기보다 경유지 공연 의 성격이 강했다. 즉, 당시 이시이 바쿠에게 조선은 예술적 교류를 위한 주요 무대라기보 다 일시적인 거점에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1926년 이시이 바쿠의 첫 조선 공연은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성사되었다. 공 연 후원사가 총독부 기관지이자 매일신보도 발간하는 ‘경성일보사’였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공연은 3월 21-23까지 3일간 경성 공회당에서 개최되었으며, <도판 15>는 이시 이 바쿠(石井漠)와 그의 여동생 석정소랑(이시이 고노에, 石井小浪)의 내한 공연 광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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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5

    석정막, 석정소랑 무용회(Dance Performance by Ishii Baku and Ishii Konoe). 경성일보 1926.3.21. 11면

    이시이 바쿠는 다른 국가 순회 중 총독부 관련 단체의 후원을 받아 잠시 경성을 거쳐 갔을 뿐이며, 조선 소녀를 선발해 자신의 무용단원으로 활용하려는 실리적 의도를 보였다. 조선 소녀를 제자로 거두려 한 행보는 “내선일체라는 조선총독부식 대의명분을 앞세운 것”(안제승 2022, 31)이라고 날카롭게 지 적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이식되고 일본화된 신무용을 인식하면서도, 이시이 바쿠는 신무용의 정신을 깨우쳐 준 재생 과 부활의 인간 석가 같은 존재로 평가되 기도 했다(성기숙 2003, 69). 무용계에 팽 배한 이시이 바쿠를 향한 우호적 인식에 는 피식민 지배를 받았던 민족이 지배국 의 가치관, 문화, 논리를 비판 없이 받아 들여 그것을 자신의 것(내면)으로 고착화한 상태, 즉 ‘식민성이 내면화’되어 작용했던 측면 은 전혀 없는 것일까? 이 근본적인 문제는 차후 별도로 심도 있게 다루고자 한다.

    3) 석정막, 석정소랑의 경성 공연 사진 소개

    (1) 1926년 석정막, 석정소랑 무용회

    1926년 3월 21-23일 6시에 공회당에서 열린 ‘석정막, 석정소랑 무용회’의 입장권은 특 등 3원, 이등 2원, 학생 80전이며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애독자는 할인되었다. <도판 16><도판 17>은 남매가 듀엣으로 춤추는 모습이다. 1926년의 공연은 ‘석정막과 석정소랑’이 공동 주역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간 과도하게 석정막의 존재에만 치우쳐 석정소 랑의 존재는 미미하게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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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6

    세계적 무용시가 (World-renowned Dance Poet). 매일신보 1926.3.16.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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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7

    석정막 남매의 무용(Dance Performance by Ishii Baku and Ishii Konoe). 매일신보 1926.3.28. 4면

    그러나 석정소랑(왼쪽)과 최승희(오른쪽 줄무늬)가 함께 동경의 조선박람회에서 찍은 사 진인 <도판 18>의 설명에는 “일본에 유명한 석정소랑의 수제자가 되야 목하 동경셔 그 재죠와 미모를 유감업시 자랑하고 잇는 죠선이 나흔 처녀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양”이라고 하며 최승희를 ‘석정소 랑의 수제자’라고 표현했다. 이후 1929년에 최승희가 석 정막 무용단에서 나올 때도 석정소랑과 함께 나왔으므로, 석정소랑과 최승희의 친연성과 사제관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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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8

    조선박에 최승희양(Choe Seung-hui at the Joseon Exposition in Tokyo). 매일신보 1927.8.16. 3면

    2) 1927-1928년 석정막 무용단과 최승희의 내한 공연

    위의 <도판 19>에서 <도판 25>까지는 1927년 10월 26-27일 경성공회당에서 펼쳐진 석정막 무용단의 공연과 관련해 신문에 소개된 사진이다. 석정막, 석정소랑과 더불어 최승희가 출연한 작품이 신문 사진으로 주로 소개되었다. 경성 공회당과 28일에 우미관에서 앙코르 무대를 펼친 석정막 무용단 공연에는 최승희의 독무와 군무가 포함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최승희를 향한 대중의 관심은 뜨거웠다. 석정막은 인터뷰에서 최승희에 관해 평가하기를 첫째 순진한 맘으로 배우고, 둘째 춤에 나쁜 습관이 없고, 셋째 굳센 맘이 있다고 하면서 이후 조선의 마음을 실은 춤으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했다(독창(獨創)을 기대하는 192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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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9

    산에 오를 때 (The Mountain Climber). 매일신보 1927.10.8.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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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0

    해양의 환상 (Fantasy of the Ocean). 매일신보 1927.9.23.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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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1

    석정막 무용시의 하나(A Piece from Ishii Baku’s Dance Poetry). 매일신보 1927.10.25.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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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2

    최승희 그로테스크 (Choe Seung-hui in Grotesque) 매일신보 1927.10.3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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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3

    최승희 소야곡 (Choe- Seung-hui in Serenade). 매일신보 1927.10.19.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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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4

    최승희 백귀야행 (Choi Seung-hui in Night Parade of One Hundred Demons). 매일신보 1927.10.2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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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5

    곱고 푸른 다뉴브 강가에 노는 원무(圓舞) (A Waltz Performed to ’On the Beautiful Blue Danube). 매일신보 1927.10.27. 2면

    <도판 26>은 1928년 11월 16일 7시에 단성사에서 공연된 석정막의 신무용이다. 이 사진은 조선인 무용수가 대거 포함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선 사람 오른편이 한병룡, 왼편이 조택원, 앞으로 앉은 사람 중에 오른편에서 둘째가 최승희이며, 가운데 높이 선 여성이 석정소랑이다. <도판 26>의 작품에 출연한 총 7명의 무용수 중에 3명이 조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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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6

    석정막 씨의 신무용(New Dance by Ishii Baku). 매일신보 1928.11.10. 7면

    4. 일본 무용가의 제자가 된 조선인: 최승희 사례

    <도판 26>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20년대 석정막 무용단에 있었던 조선인은 최승희, 조택원, 한병용이었다. 그 밖에 이등비행사 출신 이정희도 있다. 1929년에 "조선이 나은 여류 이등비행가 리정희양은 어느 덧 일본 석정막 무용단의 대표로 무용대회에 출연"하였다. 이 출연이 이정희의 첫 무대였다(이정희양의 첫 1929, 3). 석정막의 첫 조선인 제자이자 신문의 압도적 주목을 받았던 최승희가 어떻게 제자가 되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6살의 최승희(崔承喜, 1911-1969)가 이시이 바쿠를 따라 조선을 떠날 때의 모습은 경성일보사에 소속된 경성일보매일신보 1926년 3월 25일 신문에 똑같이 실렸다. 제목은 약간 다르게 달렸는데, 경성일보에는 "이시이 바쿠 씨에게 입문하다, 카나리아의 여동생 같은 아름다운 조선 소녀, 숙명여학교를 올해 봄에 우등으로 졸업한 최승희 씨라고 했고, 매일신보에는 "무용 예술가의 눈에 운 최승희양: 석정씨 남매의 뎨자가 되야 시의 나라로 쳣발을 내노아"라 했다. 최승희 사진이 등장하는 첫 번째 기사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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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7

    무용 예술가의 눈에 띄운 최승희양(Choe Seung-hui, Discovered by the Eye of a Master Dancer) 매일신보 1926.3.26. 2면

    ‘무용예술가의 눈에 운 최승희양: 석정씨 남매의 뎨자가 되야 시의 나라로 쳣발을 내노아’

    흐르는 곡션! 노리와 가튼 육(肉)의 리슴으로 말업는 시(詩)를 을프며 곡조 일은 비곡(悲曲)을 아뢰어 세게의 마음을 웃기고 울니며 무융의 왕국(舞踊王國)을 창조하는 셕정막(石井漠) 석정소랑(石井小浪)의 남는 그간 구주 만유의 길을 가는 도즁 경성에 이르러 공회당에셔 공연을 하자 특히 무용시가 남매의 눈에 운 가련한 흰옷 입은 됴션소녀의 아담한 자태가 오 흥미를 러 결국은 됴션 소녀를 몃명 뎨자로 겟다는 소리지 낫셧는대 이에 대하야 쳥년 문사 최승일(崔承日)씨의 령매로 금츈 숙명(淑明)녀자 고등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최승희(崔承喜, 一六)양이다. 다히 부모의 승낙과 석정씨 남매의 눈에 드러 이십오일 아침 경성을 나계 된 것이다. 최양은 실노 히맑고 어엿분 수졍가튼 미인으로 희망에 빗나는 동자에는 됴션 소녀에게서나 차즐 아담한 빗이 싸히엇셧다. 그는 쳐음 음악학교로 가랴다가 부친의 반대로 을 이로으지 못하고 부득이 사범학교 도든 차에 석졍씨 남를 맛나 이번 길을 나게 된 것은 오직 최양 일 개인의 깃븜은 안일 것이며 그는 무용을 젼문으로 배우는 동시에 음악과 동요도 연구를 하리라 하니 수년 후 그의 빗나는 뎐재를 대하게 될 우리의 마음이야 일각이 삼츄이다 하겠다=사진은 최승희양 (매일신보 1926.3.26.2면)

    위 기사처럼 1926년 3월 25일에 최승희는 경성을 떠났다. 석정막과 최승희를 연결해 준 주선자는 경성일보사에 근무하는 사전(寺田, 테라다)씨였다. 경성일보사 후원으로 열린 공연을 보고 찾아온 최승희와 최승일에게 석정막은 조선에 있는 경성일보사의 사전씨가 보증한다면 최승희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단서를 달았고, 결국 사전씨와의 면접을 통해 보증을 받은 최승희는 일본으로 떠날 수 있었다(최승일 1937, 38-40). 즉, 최승희의 일본행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를 운영했던 경성일보사 일본인 직원의 주선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16살의 최승희는 불과 3개월 뒤인 1926년 6월 25일 매일신보 3면에 ‘새 무용가 최승자 첫 무대 자태’(<도판 28>)란 제목으로 동경에서의 공연 사진이 게재되었다.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단 3개월간 수련을 한 최승희가 ‘새 무용가’이자 ‘최승자(崔承子)’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소개된 것이다. 최승희가 동경으로 간 직후부터 스스로 최승자(샤이 쇼코, Sai Sho Ko)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고, 이는 최승희의 욕망이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김종욱 1993, 17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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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8

    새 무용가 최승자 첫 무대 자태: 魚의 舞(The Debut Performance of Rising Dancer Choe Seung-ja [Choe Seung-hee]: The Fish Dance . 매일신보 1926.6.25. 3면

    수련 기간을 고려할 때 당시 최승희의 실력이 완성 단계는 아니었겠으나, 신문에 사진이 수록될 정도로 그는 주목받는 존재였다. 최승자(최승희)의 첫 무대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무용가(舞踊家)의 태두 석정막(石井漠)씨를 라가셔 그의 문하에서 연구를 게속하며 그의 입에서 한 가족 갓치 잇고 겸하야 소랑(小浪) 영자(榮子) 흔자(欣子)와의 형졔를 져 사히조케 지나가는 죠션 소녀 최승자(崔承子)양-그는 벌서 텬품의 재질을 발휘하기 시작하야 지난번 대판(大阪)셔 졔일회의 출연을 하고 다시 재작 이십이일부터 동경의 방락좌(邦樂座)에셔 가지가지의 유수한 신무용을 발표한다(강조: 작성자) 함은 임의 보도하엿거니와 이졔 그 츌연곡목(出演曲目) 즁에 즁요한 선춤(魚의 舞)의 무용자태가 도착한 것을 긔회로 다시 우리가 나흔 신무용기의 쟝와 그의 복을 츅수하는 것임니다=사진은 춤츄는 최승자양("새 무용가" 1926. 3).

    <도판 28>은 1926년 6월 22일부터 동경의 방락좌(邦樂座)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 신무용 발표회 중 공연된 최승희의 독무 작품이다. 사진 속 최승희는 소매가 넓은 의상을 입고 양팔을 벌린 채,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도취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 설명에 ‘어의 무(魚의 舞)’라 했고, 기사 본문에서는 이를 ‘생선 춤’이라 지칭했다. ‘생선춤’이라는 제목과 형상을 고려할 때, 물고기 비늘이 연상되는 의상을 입고 유영하는 듯한 유연한 움직임을 선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에 따르면, 이 공연이 최승희의 최초 무대는 아니었다. 최승희의 첫 무대는 이미 오사카(大阪)에서 치러졌으며, 동경 공연은 그의 두 번째 무대였다.

    주목할 점은 춤 경력이 단 3개월에 불과한 신인 최승희를 대하는 당시 언론의 극명한 온도 차이다. 매일신보는 최승희를 일본식 이름인 ‘최승자’로 호명하며 사진과 함께 소개했으나, 같은 시기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는 관련 보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무명 신예의 성장기를 총독부 기관지만이 집요하게 드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의 사례는 조선총독부가 주창한 동화정책(同化政策)과 일맥상통하며,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수직적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에 적합한 사례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시선은 배구자가 천승의 문하로 들어가는 과정과 내한 공연을 상세히 언론에 노출시킨 태도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새로운 춤을 가르치는 일본인 스승과 그 가르침을 받는 조선 소녀의 구도는, 일본을 상위에, 조선을 하위에 두는 수직적 서열을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동아일보와 달리 매일신보가 최승희가 경성을 떠나 입문하는 초기부터 대중 매체에 노출시킨 것은 이러한 제국과 식민지의 위계 구조를 드러내려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라는 매체의 성격이 반영된 듯하다.

    Ⅳ. 근대, 주체적 춤 문화

    1. 기생의 사회 참여

    1910년대에 보여준 기생들의 주체적인 사회적 행보는 192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도판 29>는 1923년 8월 15일에 ‘서선(西鮮)’이라 불린 평안도와 황해도 등 한반도 서북 지방의 수해 이재민 구호를 위한 모금 공연 장면이다. 춤추는 기생은 대동 권번 소속으로 경성 우미관 무대에서 정재를 공연하고 있다. 사진 속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운집된 관객 규모는 당시의 인기를 말해준다. <도판 30>은 1928년에 ‘관북’ 지방인 함경도의 수해 구제 연주회에서 조선권번의 기생들이 경성 매일신보사의 내청각 무대에서 검무와 승무를 춤추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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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29

    서선 수해 연주회의 광경(Relief Performance for Flood Victims in the Western Provinces of Korea). 매일신보 1923.8.1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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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30

    동정연주(同情演奏)에 꽃다운 연습(Elegant Rehearsals for the Charity Performance). 매일신보 1928.9.17. 2면

    기생들의 높은 사회의식은 집회로도 이어졌다. <도판 31>은 진주도청 이전 반대 시위에 기생들이 동참한 역사적 장면을 담고 있다. 경남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한다는 발표 이후 지역 군중과 함께 기생도 지역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행정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사진 속의 진주 기생들은 높은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적 주체로서 능동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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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31

    시위 행렬에 참가한 기생대(A Group of Gisaeng Joining the Procession Against the Relocation of the City Hall. 동아일보 1924.12.17. 3면

    2. 무용연구소를 설립한 신무용가

    1929년에는 최승희, 배구자, 조택원 등 신무용가의 연구소 설립이 이어졌다. 세 사람 모두 일본인 스승의 곁을 떠나 예술가로서 홀로서기를 시도한 근대 예술가의 주체적 행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일본을 떠나 조선에서 예술적 자립을 꿈꾸는 그들의 소식은 당시 신문 사진의 주요 소재였다.

    <도판 32>는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3년간 수학하고 1929년 귀국한 18세 최승희의 모습이다. 기사에서 "석정 씨에 대하여 의무 출연을 하여 오던 중 단연히 뛰어나와"라고 언급한 대목은, 그동안 이시이 바쿠와의 공연이 일종의 ‘의무’로 묶여 있었음을 암시한다. 최승희는 1929년 11월 시내 고시정(古市町)에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무용연구의 뜻을 둔 남녀를 모아 최승희의 창작무용과 외국의 유명한 무용을 가르치겠다고 했다. 연구생의 조건으로 ‘보통 상식’을 강조하고, 합숙비 면제와 공연 보수 지급을 약속한 점은 그가 근대적인 무용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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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32

    새로 설립된 최승희 무용소(The Newly Established Choe Seung-hui Dance Studio), 조선일보 1929.11.2. 5면

    <도판 33>은 바로 이 무용연구소에서 최승희와 연구생들이 춤추는 장면을 담고 있다. 최승희의 홀로서기는 대중의 반응으로 이어졌다. <도판 34>는 1929년 12월 5-6일에 조선극장에서 열린 무용, 극, 영화의 밤행사 장면으로, 제목의 순서가 말해주듯 극과 영화도 함께 진행되었지만, 행사의 주인공은 단연 최승희였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의 뜨거운 열기로 공연은 2회 연장되었으며 "고전적인 맛과 신비스러우며 꿈같은 무용에 일반관중은 크게 감격하여 상찬치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그의 장래를 깊이 촉망하는 이"가 많다는 찬사가 이어졌다(영화와 연예 1929, 5). 최승희의 단독 무용공연은 이듬해인 1930년 1월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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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33

    최승희와 연구생들(Choe Seung-hui and Her Apprentices). 동아일보 1929.11.28.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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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34

    대성황의 무용, 극, 영화의 밤의 첫날(The Opening Day of the Great Success: An Evening of Dance, Drama, and Film). 조선일보 1929.12.7. 5면

    천승 문하에 있던 배구자 역시 1926년 6월에 경성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활동이 뜸하던 그녀는 1929년 배구자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첫 공연을 개최했다. <도판 35>는 배구자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연구소를 통해 독립된 예술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당시의 공연 사진이다. 키 순서로 정렬하여 한 다리를 접어 올린 채 포즈를 취한 사진에서 조형미가 느껴진다. 이들은 "대개 보통학교 교육을 받는 점잖은 집 영양들이라 소개됐다. <도판 36>은 조선극장이 석정막 무용단의 조택원을 초빙하여 신설한 ‘조택원 무용연구소’에서, 기존 조선극장의 레뷰를 개량해 처음 선보인 무용 장면이다. 조택원 무용연구소의 공연은 이미 레뷰를 해왔던 조선극장의 의뢰로 진행되었기에, 그가 추구했던 ‘무용시’가 아니라 레뷰 댄스로 첫 공연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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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35

    배구자 무용연구소 초회 공연(The Inaugural Performance of the Bae Gu-ja Dance Studio). 조선일보 1929.9.18.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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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36

    조택원 무용연구소 인형의 춤 레드 딴스 (Jo Taek-won Dance Studio, Doll Dance: Red Dance. 조선일보 1929.10.29. 5면

    3. 대중(The Mass), 새로운 춤의 주체 등장

    1920년대 신문의 춤 사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분야는 단연 교육 관련 춤이었다. 이는 교육 무용이 1920년대에 새로운 영역으로 부상했음을 보여준다. 무용 교육은 식민지교육의 한 갈래이다. 식민지교육의 본질은 ‘훈련받은 노예적 인간의 창출’이었고, 식민지교육은 민족성을 말살하고 친일 계층을 육성하는 황국신민화에 목적이 있었다(노영택 1994, 113).

    이런 맥락에서, 언론이 교육 춤 사진을 비중 있게 다루었던 배경은 피지배층의 신체 단련을 통해 효율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하려 했던 일제 제국주의의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신체를 단련하는 해외 춤이나 체조도 신문에 자주 소개되었다.

    <도판 37>은 이화학당 운동회에서 단심주(丹心柱)를 추는 장면이다. 댕기머리에 한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기둥에 연결된 긴 줄을 잡고 교차하며 기둥의 줄을 완성해가는 모습이다. <도판 38>은 동덕여자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표정 유희’ 장면이다. 흔히 ‘유희’를 아동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고등학생조차 정규 교육 과정으로 유희가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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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37

    단심주 : 이화학당 운동회(Dansimju (The Loyal Heart Pillar): Ewha Hakdang Sports Day). 조선일보 1927.5.3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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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38

    표정 유희: 동덕여자고등 보통학교 (Expression Play: Dongdeok Girls’ Higher Common School). 조선일보 1928.10.10. 3면

    <도판 39><도판 40>은 당시 개최된 ‘체육 딴스’ 강습회 장면이다. 체육과 딴스라는 용어의 결합도 특징적이다. 두 사진은 학교 현장에서 학생을 지도하기 위해 참여했던 일종의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도판 39>는 네 명이 조를 이루어 사각형으로 춤추는 서양의 과토릴 땐스(Quadrille Dance)를 배우는 장면이고, <도판 40>은 개별적으로 신체 숙련 동작들을 배우는 모습이다. 조를 이루거나 개별적으로 추는 체육 딴스를 배운 이들이 공적 공간인 학교에 돌아가 학생들에게 이런 움직임을 전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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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39

    과토릴 땐스(Quadrille Dance) 매일신보 1926.8.3.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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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40

    본사 주최 체육딴스의 제 이일(Day 2 of the Gymnastic Dance Exhibition Sponsored by this Paper). 매일신보 1928.12.27. 2면

    1920년대 학교에서 시행되었던 춤은 신문 사진으로 비중있게 등장했다. 그 중 <도판 41><도판 42>는 대규모로 참여하는 집단 무용의 형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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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41

    전교생의 유희: 진명여학교 추계운동회(The All-Student Performance (Yuhui) at Jinmyeong Girls’ School Autumn Sports Festival). 매일신보 1928.10.1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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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42

    매스게임: 운율에 움직이는 오천 여학생(Mass Games: Five Thousand Female Students in Rhythmic Motion). 매일신보 1928.10.04. 3면

    <도판 41>은 진명여학교 추계운동회에서 전교생이 선보인 유희 장면으로,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학생들이 짝을 지어 춤추고 있다. <도판 42>는 무려 5,000명의 여학생이 운율에 맞춰 동시에 움직이는 거대한 매스게임을 담고 있다. 당시 학생들의 복장은 전통적인 한복과 서구식 양장이 공존했는데, 이런 대규모 체조나 매스게임, 유희는 근대신문 사진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소재였다. 이는 춤이 개인의 예술적 표현을 넘어, 교육과 운동회라는 틀 안에서 집단적이고 규율적인 신체 활동으로 자리 잡았음을 방증한다. 유치원과 학교 교육의 틀에서 재편된 춤과 체조는 조선인의 신체를 근대적 규율의 체계 속으로 편입시키는 동시에, 집단적 일체감을 통해 식민 지배에 순응하는 신민을 양성하는 고도의 통치 기제로 작동했다.

    반면, 무용사적 관점에서 학교 교육을 통한 유희와 체조는 ‘누구나 춤을 출 수 있다’는 보편적 경험을 하도록 했다. 즉 규율의 형식을 빌렸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유년기부터 춤을 추는 주체가 되어 춤의 저변이 확대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춤이 ‘공적 공간’으로 진입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과거 사적 공간에 머물렀던 여성과 아이들의 춤이 신문 매체와 학교 운동장이라는 공적 공간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운동장에서 펼쳐진 대규모 유희와 체조는 피지배층의 신체를 가시화함으로써 그들이 근대적 전환기 춤의 주체로서 인식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즉 규율의 장 내에서 역설적으로 ‘대중적 춤의 주체’가 탄생한 것이다.

    춤의 경험은 학교 교육을 넘어 대중의 영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도판 43>은 예술학원이 주최한 ‘무도 음악대회’의 풍경을 담고 있다. 종로청년회관에서 개최한 이 대회에서 실력이 우수한 남녀는 화려한 복장으로 나비같이 노닐면서 여러 딴스를 선보였으며 관객이 1,000명에 육박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성황으로 폐막 1923, 3). 이처럼 춤의 주체로서 대중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춤의 근대성 중에서 가장 선명한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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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43

    예술학원의 음악무도대회(Music and Dance Exhibition by the Art Institute). 동아일보 1923.6.4. 3면

    이러한 춤 주체의 확산은 세계 각국의 춤 문화를 수용하고 소개하는 지평의 확장으로도 이어졌다. 당시 근대신문은 서구권은 물론 비서구권의 다양한 춤 사진을 적극적으로 게재했는데, 특히 동아일보조선일보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지면의 한계로 한 사례만 제시하겠다. <도판 44>는 멕시코의 국민제(國民祭)에서 포착된 장면으로 "역사적 의상을 입고 고대의 춤을 추는 묵서가(墨西哥: 멕시코) 소녀들"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미국이나 유럽을 넘어 아니라 중남미의 춤까지 소개된 것은 다양한 국제적 춤 문화에 관심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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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44

    맥시코의 국민제(The National Festival of Mexico). 조선일보 1927.2.17. 3면

    Ⅴ. 맺음말

    지금까지 1920년대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수록된 ‘춤 사진’을 통해, 식민지라는 역사의 질곡 속에서 근대적 춤 문화가 전개되는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았다.

    먼저, 식민지의 타율적인 춤 문화를 사진으로 확인하였다.

    첫째,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춤추는 사진들을 매일신보에 게재하여 동화정책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조선과 일본 소녀들로 구성된 가극단 사진을 게재하고, 조선과 일본 유치원생들이 일장기를 양손에 들고 추는 ‘봉축춤’을 소개했다. 특히 1925년에 설립한 조선신궁에서 춤을 출 천녀(天女)로 선발된 조선과 일본 소녀가 일본 제례 무복을 입은 사진을 게재한 것은 천황의 신민이라는 동화정책을 춤으로 표상한 대표적 사례였다.

    둘째, 동원된 기생의 춤 사진에서 식민지 춤 문화를 확인했다. 조선 왕실과 귀족이, 왕실 공간인 창덕궁에서 일본 기생의 춤을 관람하는 사진을 매일신보에 게재했다. 이 사진을 통해 패망하여 무력한 왕실과 운집한 대중이 바라보는 대상인 ‘일본 기생’을 대비시켜, 조선 왕실의 공연 문화조차 일본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1922년 대정 권번 기생이 동경 평화박람회에 동원되어 가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서양 춤에도 능숙했던 기생들인데도 동경박람회에서 공연한 종목이 정재에 국한된 것은 제국의 근대 문물을 과시하는 박람회에서 일본의 ‘선진적 근대성’과 대비되는 조선의 ‘정체된 과거’를 부각하려는 의도적 선택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의 춤이 수용되는 양상을 사진으로 확인하였다. 예술 교류라는 형식을 빌려 식민지 조선을 동화시키고 관리하려 했던 제국주의적 기획이 담겨 있었다.

    첫째, 1910년대에 이어 1920년대에도 천승(千勝) 일행의 내한 공연 사진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천승의 공연을 ‘동양 마술계의 최고’라 치켜세우며, 제자인 조선 소녀 배구자의 존재도 함께 홍보하였다.

    둘째, 1920년대는 일본 무용의 권위자를 초청하여 사진으로 전시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1925년에 15세의 귀미자(貴美子)를 일본 ‘동요음악계의 여왕’으로 소개하였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초청으로 경성 공연이 진행되었다. 그녀는 2년 뒤인 1927년에 조선 고아들을 위한 자선공연까지 펼쳤는데, ‘자비로운 제국의 여왕’인 소녀가 ‘불쌍한 식민지 고아’를 구제하는 이러한 수혜의 구조는, 일본의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제국의 전형적 모습이었다. 1925년에 ‘동방 무용의 권위자’로 소개된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의 춤추는 모습을 신문 사진으로 게재하며, 조선 무용계에 가장 기념될 날이라고 언급하였다.

    셋째, 일본 신무용가인 이시이 바쿠(石井漠)와 이시이 고노에(石井小浪)의 국내 초청 공연도 사진으로 비중있게 게재되었다. ‘세계적인 무용가’라고 치켜세운 석정막과 석정소랑의 1926년 첫 경성 공연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사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의 내한은 단독 기획이라기보다 경유지 공연의 성격이 강했으며, 무도를 배우고자 하는 12-15세의 조선 여성을 선발해 직접 가르치겠다는 모집 공고를 곁들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조선 소녀를 제자로 거두려 한 행보는 "내선일체라는 조선총독부식 대의명분을 앞세운 것"(안제승 2022, 31)으로 지적되었다. 이후 1927년 경성 공연에서는 최승희의 공연 사진이 비중있게 게재되었고, 1928년의 경성 공연에서는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된 최승희, 조택원, 한병용이 한 무대에 서는 사진이 수록되었다.

    넷째, 일본 무용가의 제자가 된 조선인의 사례로 최승희의 사진이 지속적으로 게재되었다. 1920년대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 있었던 조선인은 최승희, 조택원, 한병용이었으며, 이등 비행사 출신 이정희도 있었다.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의 사례는 조선총독부가 주창한 동화정책과 일맥상통한다.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수직적 관계를 사제 관계라는 설정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므로, 지속적으로 사진으로 전시되었던 듯하다. 이러한 시선은 배구자가 천승(千勝)의 문하로 들어가는 과정과 내한 공연을 상세히 언론에 노출시킨 태도에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조선일보동아일보와 달리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만 유독 최승희가 경성을 떠나 입문하는 초기부터 대중 매체에 지속적으로 노출시킨 것은 제국과 식민지의 정치 문화적 위계 구조를 드러내려는 조선총독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근대의 주체적 춤 문화가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첫째, 기생의 주체적인 사회 참여 모습이 사진으로 게재되었다. 기생들의 높은 사회의식으로 1900년대부터 이어졌던 자선 공연은 1920년대에도 이어졌다. 대동 권번과 조선 권번 기생들이 지방의 수해 이재민 구호를 위한 공연을 펼치는 모습이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진주 기생들의 집회 장면이 사진으로 포착되기도 했는데, 경남 도청의 진주에서 부산 이전 발표 이후 지역민들과 함께 기생들도 지역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행정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둘째, 일본인 스승을 떠나 예술가로서 홀로서기를 도전한 근대 예술가의 주체적 행보가 사진으로 등장했다. 1929년에 최승희는 근대적인 무용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으며, 1929년 ‘무용, 극, 영화의 밤’ 행사에서 운집한 관객의 모습을 사진으로 공개하여 그의 스타성과 대중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같은 해 배구자와 조택원도 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그들의 ‘레뷰(Revue)’ 공연 사진이 게재되었다. 조택원은 추구했던 ‘무용시’가 아니라 레뷰 댄스로 첫 공연을 선보인 점이 특징적이다.

    셋째, 대중(The Mass)이라는 새로운 근대적 춤 주체의 등장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신문 사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교육 무용은 일제가 피지배층의 신체 단련을 통해 통치 기반을 마련하려 했던 정책과 맞닿아 있었다. 학교에서 유희와 대규모 체조를 하는 사진은 피지배층의 신체를 규율 속에 머물게 한 것이나, 역설적으로 학교라는 공적 공간에서 경험했던 움직임과 춤을 통해 이들이 근대적 춤의 주체로 발돋움했다. 즉, 일제의 규율 내에서 역설적으로 ‘대중적 춤의 주체’가 탄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1920년대 춤 사진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동화정책 기획과 이에 맞선 근대적 주체성이 교차하며 식민지 조선의 복합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이 드러났다.

    저자소개

    조경아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 전공으로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구 관심사는 문화사적 시각에서 바라본 조선과 근대의 춤이며, 주요 연구로는 『한국춤통사(공저 2014), “그림으로 읽는 조선시대의 춤 문화 I·II·III (2019-2022)”, “근대 무용가 최승희의 친일 행적에 관한 역사적 성찰(2024)” 등이 있다.

    Cho Kyung-a [Jo Gyeong-a] majored in Korean history a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nd earned her doctoral degree with a thesis titled “A Study on Jeongjae through Uigwe in the Late Joseon Dynasty.” She currently serves as an academic research professor at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 Her research interests include Joseon and modern dance from a cultural and historical perspective, and her past publications include “History f Korean Dance” (2014), “Joseon Dynasty Read through Paintings I·II·III” (2019-2022), and “A Historical Reflection on Modern Dancer Choe Seunghui’s Collaboration with Japanese Imperialism.”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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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궁 무희(神宮 舞姬)로 결정된 두 소녀: (우) 조선인 장동윤 양, (좌) 일본인 마츠데라후미코(松寺文子) 양. (Two young women appointed as ceremonial dancers: Right Jang Dong-yun (Korean); (Left) Matsudera Fumiko (Japanese). 매일신보. 1925.10.12.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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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선 소녀들의 가극단(The Opera Troupe of Japanese and Korean Girls). 매일신보 1926.1.1.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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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선 소녀들의 봉축 춤(The Congratulatory Dance of Japanese and Korean Girls). 매일신보 1925.12.5.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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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원에 원유회(Royal Garden Party at Biwon). 매일신보 1922.5.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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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오운동회 여흥 화보(Post-Athletic Meet Entertainment at the Dano Festival). 매일신보 1929.6.11.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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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권번 기생무용(Gisaeng Dances by the Four Gwonbeons) 매일신보 1929.6.11.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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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박람회 가는 대정권번 기생(Gisaeng from Daejeong Gwonbeon Association attending the Peace Expo). 매일신보 1922.3.1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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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판(大阪, 오사카) 조선 물산의 여흥장(The Entertainment Hall for Korean Products at the Osaka Exhibition). 매일신보 1926.3.7.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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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승 양의 몽중의 호접무 (The Butterfly Dance in a Dream by Tenkatsu). 매일신보 1921.5.19.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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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승의 제자로 있는 배구자양(Bae Guja, an apprentice of the Tenkatsu). 매일신보 1921.5.12.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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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구자(Bae Guja). 조선일보 1928.1.3.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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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요음악계의 여왕(The Queen of Children’s Songs). 매일신보 1925.9.13.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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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 무용계의 권위(The Authority of the Eastern Dance World) 매일신보 1925.10.2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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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계의 명성(Renowned Figure in the Dance World). 매일신보 1926.3.21.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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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정막, 석정소랑 무용회(Dance Performance by Ishii Baku and Ishii Konoe). 경성일보 1926.3.21.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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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무용시가 (World-renowned Dance Poet). 매일신보 1926.3.16.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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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정막 남매의 무용(Dance Performance by Ishii Baku and Ishii Konoe). 매일신보 1926.3.28.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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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박에 최승희양(Choe Seung-hui at the Joseon Exposition in Tokyo). 매일신보 1927.8.16.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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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에 오를 때 (The Mountain Climber). 매일신보 1927.10.8.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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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의 환상 (Fantasy of the Ocean). 매일신보 1927.9.23.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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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정막 무용시의 하나(A Piece from Ishii Baku’s Dance Poetry). 매일신보 1927.10.25.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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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희 그로테스크 (Choe Seung-hui in Grotesque) 매일신보 1927.10.3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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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희 소야곡 (Choe- Seung-hui in Serenade). 매일신보 1927.10.19. 3면

    SDDH-80-1-189_F24.jpg

    최승희 백귀야행 (Choi Seung-hui in Night Parade of One Hundred Demons). 매일신보 1927.10.2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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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곱고 푸른 다뉴브 강가에 노는 원무(圓舞) (A Waltz Performed to ’On the Beautiful Blue Danube). 매일신보 1927.10.27. 2면

    SDDH-80-1-189_F26.jpg

    석정막 씨의 신무용(New Dance by Ishii Baku). 매일신보 1928.11.10.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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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 예술가의 눈에 띄운 최승희양(Choe Seung-hui, Discovered by the Eye of a Master Dancer) 매일신보 1926.3.26.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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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무용가 최승자 첫 무대 자태: 魚의 舞(The Debut Performance of Rising Dancer Choe Seung-ja [Choe Seung-hee]: The Fish Dance . 매일신보 1926.6.25. 3면

    SDDH-80-1-189_F29.jpg

    서선 수해 연주회의 광경(Relief Performance for Flood Victims in the Western Provinces of Korea). 매일신보 1923.8.17.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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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정연주(同情演奏)에 꽃다운 연습(Elegant Rehearsals for the Charity Performance). 매일신보 1928.9.17.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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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 행렬에 참가한 기생대(A Group of Gisaeng Joining the Procession Against the Relocation of the City Hall. 동아일보 1924.12.17. 3면

    SDDH-80-1-189_F32.jpg

    새로 설립된 최승희 무용소(The Newly Established Choe Seung-hui Dance Studio), 조선일보 1929.11.2. 5면

    SDDH-80-1-189_F33.jpg

    최승희와 연구생들(Choe Seung-hui and Her Apprentices). 동아일보 1929.11.28. 5면

    SDDH-80-1-189_F34.jpg

    대성황의 무용, 극, 영화의 밤의 첫날(The Opening Day of the Great Success: An Evening of Dance, Drama, and Film). 조선일보 1929.12.7. 5면

    SDDH-80-1-189_F35.jpg

    배구자 무용연구소 초회 공연(The Inaugural Performance of the Bae Gu-ja Dance Studio). 조선일보 1929.9.18. 3면

    SDDH-80-1-189_F36.jpg

    조택원 무용연구소 인형의 춤 레드 딴스 (Jo Taek-won Dance Studio, Doll Dance: Red Dance. 조선일보 1929.10.29.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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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심주 : 이화학당 운동회(Dansimju (The Loyal Heart Pillar): Ewha Hakdang Sports Day). 조선일보 1927.5.30. 3면

    SDDH-80-1-189_F38.jpg

    표정 유희: 동덕여자고등 보통학교 (Expression Play: Dongdeok Girls’ Higher Common School). 조선일보 1928.10.1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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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토릴 땐스(Quadrille Dance) 매일신보 1926.8.3.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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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 주최 체육딴스의 제 이일(Day 2 of the Gymnastic Dance Exhibition Sponsored by this Paper). 매일신보 1928.12.27. 2면

    SDDH-80-1-189_F41.jpg

    전교생의 유희: 진명여학교 추계운동회(The All-Student Performance (Yuhui) at Jinmyeong Girls’ School Autumn Sports Festival). 매일신보 1928.10.10. 2면

    SDDH-80-1-189_F42.jpg

    매스게임: 운율에 움직이는 오천 여학생(Mass Games: Five Thousand Female Students in Rhythmic Motion). 매일신보 1928.10.04. 3면

    SDDH-80-1-189_F43.jpg

    예술학원의 음악무도대회(Music and Dance Exhibition by the Art Institute). 동아일보 1923.6.4. 3면

    SDDH-80-1-189_F44.jpg

    맥시코의 국민제(The National Festival of Mexico). 조선일보 1927.2.17. 3면

    Table

    사 권번 ‘기생 무용’(Gisaeng Dances by the Four Gwonbeon) (“대회 순서” 매일신보 1929.6.11.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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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동방 무용계의 권위” [The Authority of the Eastern Dance World]. 「매일신보」 [Maeil sinbo], 1925. 10. 2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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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동정연주(同情演奏)에 꽃다운 연습” [Elegant Rehearsals for the Charity Performance], 「매일신보」 [Maeil sinbo]. 1928. 9. 17. 2면.
    34. “매스게임: 운율에 움직이는 오천 여학생” Mass Games: Five Thousand Female Students in Rhythmic Motion). 「매일신보」 [Maeil sinbo], 1928. 10. 4. 3면.
    35. “무용 예술가의 눈에 띄운 최승희양” [Choe Seunghui, Discovered by the Eye of a Master Dancer] 「매일신보」 [Maeil sinbo], 1926. 3. 26. 2면.
    36. “배구자” [Bae Guja]. 「조선일보」 [Joseon Ilbo], 1928. 1. 3. 2면.
    37. “배구자 양의 묘기” [The Feats of Miss Bae Guja]. 매일신보」 [Maeil sinbo], 2021, 3. 5. 22. 3면.
    38. “배구자연구소 초회 공연” [The Inaugural Performance of the Bae Guja Dance Studio]. 「조선일보」 [Joseon Ilbo], 1929. 9. 18.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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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신궁 무희로 결정된 두 소녀” [The Two Young Girls Selected as Ritual Shrine Maidens]. 「매일신보」 [Maeil sinbo], 1925. 10. 12. 2면.
    52. “앵가접무” [Warbling Orioles and Dancing Butterflies]. 「동아일보」 [Dong-a ilbo], 1921. 11. 26. 3면.
    53. “영예에 꽃 피인 양양의 가정” [The Families of the Two Girls Honored with Grace]. 「매일신보」 [Maeil sinbo], 1925. 10. 12. 2면.
    54. “영예에 빛나는 이십이 명의 무희” [The Twenty-Two Honored Ritual Maidens for the Shinto Shrine]. 「매일신보」 [Maeil sinbo], 1925. 10. 6. 2면.
    55. “영화와 연예” [Film and Entertainment]. 「조선일보」 [Joseon Ilbo], 1929. 12. 7. 5면.
    56. “예술학원의 음악무도대회” [The Music and Dance Exhibition by the Art Institute]. 「동아일보」 [Dong-a ilbo], 1923.6.4. 3면.
    57. “육아 홈 자선 동요회” [Charity Children's Music Festival for the Orphanage]. 「매일신보」 [Maeil sinbo], 1927. 10. 5. 3면.
    58. “이정희 양의 첫 무대” [The Debut Stage of Miss Yi Jeonghui]. 「동아일보」 [Dong-a ilbo], 1929. 9. 21. 3면.
    59. “전교생의 유희: 진명여학교 추계운동회” [The All-Student Performance (Yuhui) at the Jinmyeong Girls' School Autumn Sports Festiva]. 「매일신보」 [Maeil sinbo], 1928. 10. 10. 2면.
    60. “조선관 무대에 출연할 대정권번 명기 십이 명” [Twelve Renowned Gisaeng of the Daejeong Gwonbeon to Perform on the Korea Pavilion Stage]. 「매일신보」 [Maeil sinbo], 1922. 3. 17. 3면.
    61. “조선박(朝鮮博)에 최승희양” [Choe Seunghui at the Joseon Exposition in Tokyo]. 「매일신보」 [Maeil sinbo], 1927. 8. 16. 3면.
    62. “조택원무용연구소 인형의 춤 「 레드 딴스 」 ” [Jo Taekwon Dance Studio, Doll Dance: Red Dance]. 조선일보」 [Joseon Ilbo], 1929. 10. 29. 5면.
    63. “천승 양의 「 몽중의 호접무 」 ” [The Butterfly Dance in a Dream by Tenkatsu]. 「매일신보」 [Maeil sinbo], 1921. 5. 19. 3면.
    64. “천승의 제자로 있는 배구자양” [Bae Guja, an apprentice of Tenkatsu]. 「매일신보」 [Maeil sinbo], 1921. 5. 12. 3면.
    65. “최승희 그로테스크” [Choe Seunghui in Grotesque]. 「매일신보」 [Maeil sinbo], 1927. 10. 30. 2면.
    66. “최승희 백귀야행” [Choe Seunghui in Night Parade of One Hundred Demons]. 「매일신보」 [Maeil sinbo], 1927. 10. 28. 2면.
    67. “최승희 소야곡” [Choe Seunghui in Serenade]. 「매일신보」 [Maeil sinbo], 1927. 10. 19. 3면.
    68. “최승희와 연구생들” [Choe Seunghui and Her Apprentices]. 동아일보[Dong-a ilbo], 1929. 11. 28. 5면.
    69. “평화박람회 가는 대정권번 기생” [Gisaeng from Daejeong Gwonbeon Association attending the Peace Expo]. 「매일신보」 [Maeil sinbo], 1922. 3. 17. 3면.
    70. “표정 유희: 동덕여자고등 보통학교” [Expression Play: Dongdeok Girls' Higher Common Schoo]. 「조선일보」 [Joseon Ilbo], 1928. 10. 10. 3면.
    71. “해양의 환상” [Fantasy of the Ocean]. 「매일신보」 [Maeil sinbo], 1927. 9. 23. 3면.
    72.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Korea Newspaper Archive, National Library of Korea] https://www.nl.go.kr/newspaper
    73. 김혜영 Kim, Hye-young [Gim, Hyeyeong]. 20 18. “애국부인회” [The Patriotic Women's Association]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Center for Historical Studies on National Issues Official Website] [검색일: 2026. 1. 15] https://www.minjok.or.kr/archives/99043
    74.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NAVER News Library] https://https://newslibra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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