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본 연구는 실기와 이론의 통섭을 바탕으로 국내외 연구가치가 높은 우수한 작품을 무대공연과 연구발표로 함께 탐구하는 무용역사기록학회의 ‘2025 Performance Based Research-춤유산극장’ 기획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춤유산극장’은 학회 소속 안무가 및 실기자들을 대상으로 연구의 가치가 있는 작품을 공모하고, 내부 심사를 거쳐 선정된 작품에 대해 적절한 학회 소속 연구자를 매칭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형식이다. 연구 방법과 주제에는 제안을 두지 않았으며, 매칭 연구자 선정 후 한 달 반 정도의 연구 기간이 주어졌다. 또한 연구의 결과는 안무가의 공연과 연구자의 연구 결과를 한 무대에서 제시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마련되었다. 이와 같은 기획의 틀 안에서 본 연구자는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의 「백조의 호수」 원작을 토대로 한 박기현 안무가의 "백조의 호수 中 아다지오 파드되" 공연이 연구의 주제로 매칭되었다.
박기현 안무가가 ‘춤유산극장’ 발제문에서 밝혔듯, 「백조의 호수」는 프티파의 3대 고전 발레 중에서도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특히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의 서정적인 음악과 함께 고도의 기교와 감정적 서사가 정교하게 안무 된 작품임에도 주로 연구가 동작 재연과 무대 연출에 집중된 경향이 있어 다양한 관점에서의 연구의 필요성을 지적하였다(박기현 2025, 13).
그러나 연구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백조의 호수」는 잘 알려지고 널리 추어진 만큼 많이 다루어진 연구주제이기도 하다.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역사적 문헌 사료를 충실하게 분석하고 해석(이지선 2017)하거나, 대본과 안무 구성에서 오는 버전의 차이를 논의(전효정 2023;배금연 2020;문병남 2015; 김운미·황희정 2011)하거나, 작품의 장르적 특성을 규명(신혜조 2024)하거나, 작품이 놓인 맥락을 분석(노영재 2025;조언위, 안남일 2025)하는 등 작품의 2차 문헌 또는 결과인 공연물에 대한 논의가 개진되어 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미 잘 알려진 ‘고전’을 연구하기 위한 주제와 방법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고전(classic, 古典)이란 오랜 시간을 거쳐 많은 사람에게 널리 가치를 인정받은 훌륭한 작품"을 일컫는다. 그래서 고전 작품은 예술적 행위에서 새롭게 무엇을 만들기보다 원래의 가치를 보존하고 되새기는 것에 더 예술적 무게를 둔다. 발레의 고전이라 대표되는 「백조의 호수」는 19세기 러시아의 초연 이래로 버전에 대해 재현(reproduction), 복원(reconstruction), 개정(revised), 재안무(re-choreography), 재해석(reinterpretation) 등 세세한 차이를 구별 지으며 원본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전승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내었다. 연구자는 그러한 맥락에서 고전 작품들을 공연을 ‘반복되는 무엇’으로 간주해왔다.
이에 연구자는 박기현 안무가와의 1차 인터뷰(2025년 11월 6일)를 시행하여 안무가가 본 공연에서 원작의 무엇을 어떻게 재연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수집하여 연구의 주제와 방법을 강구해 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인터뷰 과정에서 고전을 재연하는 공연(무대화 연구)의 목적에서 "원형 그대로의 안무를 손대지 않고 살려내는 것(보존)"과 동시에 "무용수의 해석을 존중한다(재해석)"라는 양가적인 진술에 주목하여 연구주제의 접점을 모색하게 되었다.
본 연구는 ‘보존’의 대상으로서 고전은 충실하게 재현해 내야 하는 사명, 이미 예술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의 원본(original)을 그대로 본다는 당위를 넘어, 오랜 시간 동안 단지 그러한 동일성을 재생산해 내는 것만으로 예술적 타당성을 지속해 왔을까 하는 의문으로 출발한다. 연구에서는 고전으로서 당연하게 넘겨버렸던 그 출발, 즉 반복되는 것은 무엇이고, 변화되어 얻게 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원형(prototype/archetype)’과 ‘재연(re-enactment)’의 개념을 중심으로 탐구해보고자 한다.
연구는 「백조의 호수」 1막 2장 "호숫가 아다지오" 재연에서의 역사적 원형 보존과 다른 몸들로의 수행이 어떠한 예술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논의하는 데 목적이 있다. 논의는 보존되고 반복되는 것으로서 원형이란 무엇인가, 원형은 원본의 무엇을 어떻게 담고 있는가, 고전 발레의 재연은 무엇인가, 재연에서 어떤 예술적 의미와 가치들이 생성되는가의 연구문제로 구체화한다.
연구의 방법으로는 「백조의 호수」 역사의 보존과 전승의 계보 안에서 "호숫가 아다지오"를 중심으로 1차 사료에 해당하는 무보와 악보, 공연영상, 문헌을 분석한다. 이와 더불어 재연이라는 현재의 맥락으로서 박기현 안무자의 작품 연습 과정과 관찰의 질적 데이터를 함께 논의하기 위해 안무가와 무용수 인터뷰(2025년 11월 5일, 20일), 그리고 연습 현장 관찰(2025년 11월 20일, 연습실)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연구 방법의 설정은 앞서 분석한 선행 연구들이 2차 문헌 또는 결과인 공연물에 집중된 것과 달리, ‘재연’ 논의에서 중요한 과거의 토대로서의 원본과 현재의 재연 작업 과정을 직접 들여다보고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함이다. 이는 또한 이론의 구축을 통한 작품에의 적용, 또는 이론 연구와 안무 연구의 위계적 유형적 구별을 지양하고 작품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론과 실천이 연구로서 만나는 수평적인 실천방법을 모색하고자 한 의도를 담는다. 나아가 수없이 많은 재연으로 이미 어느 정도 고정된 안무와 영상기록을 통해 거의 동일한 형태의 춤이 반복되고 있는 작품에 대해, 연구자로서 직접 그 원형으로서의 실제를 들여다보고 그로부터 현재를 의미화하고자 하는 반성과 필요를 반영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서두에서 밝히다시피 ‘춤유산극장’ 기획으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일반적인 연구설계와는 달리 그 대상의 선정과 연구 방법, 연구 기간에 대해 차별점과 동시에 제한점을 갖는다. 학회 기획 단계에서 연구의 가치가 필요한 작품을 공모 선정하고 이에 대해 이론연구자를 매칭하였기에 연구 대상의 학술적 가치논의는 본 연구 단계에서 강조하지 않았다. 또한 창작이 아닌 고전 발레 레퍼토리의 특성상 연습이 공연 직전에 이루어져 질적 데이터를 확보하고 논의하는 데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으나, 이론과 실기의 통섭을 실천하고자 한 기획 취지를 담아 제한적이나마 다루어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제한점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는 그간 「백조의 호수」 연구가 주목하지 못한 원전의 기록에 대한 추적과 고전 재연의 예술 철학적 논의를 문헌과 무보, 작품 영상, 연습 관찰, 안무가 인터뷰라는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매칭 연구라는 기획 아래 안무가의 춤 공연과 이론연구자의 발제를 한 무대에서 나란히 실천하고 함께 논의함으로써 「백조의 호수」 연구에 대한 새로운 읽기와 이해를 독려한다는 데 연구의 의의를 두고자 한다.
Ⅱ. 원형과 기록
1. 원형이란 무엇인가?
고전 발레 작품을 공연한다는 것은 원래 있었던 무엇을 다시 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있었던 무엇, 즉 원형이 무엇인가를 구별하는 것은 고전의 보존과 연행에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원형이란 무엇인가?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원형에는 세 가지 의미의 갈래가 얽혀 있다. 첫째, 본래의 형태로서의 ‘원전(The original form, 原形)’, 둘째, 같거나 비슷한 여러 개가 만들어져 나온 본바탕으로서의 ‘원형(prototype, 原型)’, 셋째, 발생 면에서 유사성에 의해 추상된 유형으로서의 ‘전형(archetype, 元型)’이다. 원전이 원본, 고유성, 유일무이함에 강조를 두었다면, 원형은 본과 틀의 물질적인 개념에, 전형은 다소 추상적인 집합으로 변화 가능성의 의미의 무게를 둔다.1)
이러한 의미적 구분에 따르면 율리우스 라이징거(Julius Reisinger) 안무와 차이콥스키 음악의 1877년 볼쇼이 극장 초연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백조의 호수」의 ‘원전’이다. 그러나 1877년 초연은 공연예술에서 보존될 수 있는 형태의 요체인 대본이나 안무, 프로그램 북의 기록 등은 소실되고, 다만 평론과 증언의 형태로만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어(Cohen 2004, 29), 원본으로서의 기능, 즉 형태적으로 보존되어 재연 가능한 기능은 상실한 채 처음이라는 상징성만을 간직한 원본으로 자리하고 있다. 첫 공연의 실패, 출연자를 바꾸거나 안무가를 바꿔 안무를 새롭게 하는 등의 지속되는 노력에도 「백조의 호수」는 1883년 볼쇼이 극장 레퍼토리에서 제외되었다는 기록(Ibid, 30)만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한편 「백조의 호수」의 원전에 대한 논의에서 함께 언급되는 작품은 초연이 있은 지 18년 후인 1895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된 프티파와 레브 이바노프(Lev Ivanov) 안무 버전이다. 이 버전은 백조의 테마, 마법과 사랑, 차이콥스키의 음악 등 원작의 주요한 요소들을 지니면서도, 1877년 작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과 삭제, 재배치를 단행하였다. 극장장은 사망한 차이콥스키를 대신해 그의 동생에게 새로운 대본 수정을 요청했고, 음악은 수정된 대본에 따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 초연을 지휘했던 이탈리아 작곡가 리카르도 드리고(Riccardo Drigo)에 의해 재작업 되었다. 초연보다 길이가 4분의 1 정도 짧아졌으며, 4막은 3막으로 압축되었다(Homans 2014, 344). 1895년의 버전은 이후 러시아 및 전 세계 다양한 공연들에 바탕이 됨으로써 1877년의 개작이 아닌 ‘원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백조의 호수」 전막 중에서도 1막 2장의 "호숫가 아다지오"는 2장의 백조들의 춤의 가운데 있는 오데트와 지그프리트의 2인무이다. 2막의 "흑조 파드되"와 대비하여 "백조 파드되"라고 부르기도 하며, 마임이 없이 오로지 춤으로 사랑과 마법의 슬픔을 표현하여 "파닥시옹(pas d‘action)"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프티파의 2막 그랑 파드되가 강한 감정을 기교로 표현한다면, 이바노프의 1막 2장의 파드되는 서정적 감정을 발레적 움직임으로 표현한다는 안무적 특징을 갖는다.
2. 원형의 보존으로서 기록
기록은 무용에서 ‘대필적인(allographic)’ 속성(Goodman 2002)을 붙잡아 원형을 보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대필적 속성이란 작품에서 기록 가능한 성질로 기록만으로 작품이 재현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프티파-이바노프의 「백조의 호수」 원전은 마린스키 극장 감독이었던 니콜라스 세르게예프(Nicholas Sergeyev)에 의해 스테파노프법(Stepanov system)으로 기록되었다. 그 기록물에는 작품의 무보와 피아노 악보, 그리고 공연에서 필요한 메모기록들이 포함되어 있다. 스테파노프법은 「백조의 호수」의 초연 직전인 1891년 프티파와 이바노프 및 마린스키 관계자들에 의해 그 효과성을 인정받아 공인기록법으로 사용되고 교육되었다(Marion and Eliot 2013, 310)는 점에서 원형의 실체를 담아내는 유의미한 방법으로 인정받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스테파노프법은 파리의 신경학자와의 공동연구로 프랑스에서 『인간 신체 운동의 알파벳(L’Alphabet des Mouvements du Corps Humain)』(1892)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893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기록법을 통한 공연이 성공적으로 무대화되면서, 1984년부터는 발레단의 작품들이 이 기록법으로 표기되기 시작하였고, 발레학교 학생들의 교육과정으로 포함되어 가르쳐졌다.
이 기록법이 발레의 무엇을 어떻게 기록하였는가 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는 기록을 통한 원형 보존의 타당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스테파노프법은 당시 발레가 가진 음악과의 공통분모인 시간성을 기록하기 위해 수정된 악보 양식에 움직임 정보를 음표의 형태로 기록하였다. 또한 무용수 신체 동작을 정보화하기 위해 해부학적 지식을 기본 원리로 채택한다(Guest 2001, 95-96). 특히 〈도판 1〉과 같이 관절의 각도에 따라 음표를 위치시켜 동작의 변화와 시간적 진행을 표기한다. 간소한 표기를 위해 해부학적 이해는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는데, 팔다리의 큰 움직임 중심, 앞/옆/뒤의 주요 방향으로만, 다리는 90도의 범주 내에서, 팔은 뒤로는 45도로 제한되지만, 앞과 옆은 최대 180도까지 기록할 수 있었다. 이는 해부학을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 동작의 표준을 가진 발레를 기록함에서 생략되거나 덜 구체적이어도 되는 부분을 간소화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해석된다(Marion and Eliot 2013, 321-323).

도판 1
스테파노프법에서 다리 관절의 범위와 동작 표기 (The range of leg joints and the notation of movement in the Stepanov System) Stepanov, Vladimir. 1892. Alphabet-Des Mouvements du Corps Humain, Paris: M. Zouckermann.
스테파토프법에서 음표의 경우 둥근 머리는 뛰거나 움직임을, 직사각형 머리는 지면과의 접촉을 나타낸다. 음표 머리는 2분음표의 경우 비어 있고, 4분음표는 까맣게 채워진다. 머리 색으로 동작의 지속 시간이 표기되고, 느리거나 연속적인 움직임은 활처럼 선으로 연결된다. 음표의 막대기가 아래로 향하면 오른쪽, 위는 왼쪽 다리를 의미한다. 동작의 추가사항은 음표 막대기에 표시하고, 악보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오케스트라 악보가 악기의 편성으로 나뉘듯 〈도판 2〉처럼 제일 위에 두 줄이 몸통, 중간의 세 줄이 팔, 아래 네 줄에 다리의 움직임을 표기한다.

도판 2
스테파노프법 보표 상 신체 구분과 오른발 원스텝(저자 재구성) (The bodily division on the staff and right-foot on step in the Stepanov system) Sheila Marion and Karen Eliot. 2013. Dance on Its Own Terms. Oxford University Press,
1896년 스테파노프의 사망 이후에는 그의 동료인 알렉산더 고르스키(Alexander Gorsky)가 그의 작업을 이어받아 체계를 보완 완성하였다. 1900년 고르스키가 볼쇼이 극장의 발레 마스터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는, 그의 후임으로 세르게예프가 감독(régisseur)직을 맡아 기록 프로젝트를 이어나갔다. 세르게예프는 1919년 러시아 혁명 이후 스테파노프법으로 기록된 프타파-이바노프 안무의 약 20편의 기록을 가지고 유럽으로 건너갔으며, 그의 사후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이 세르게예프 컬렉션(Nikolai Sergeev Choreographic and Music Scores for Ballets Swan Lake, 1905-1924 and undated)으로 관리하고 있다. 컬렉션에는 「백조의 호수」 및 주요 러시아 고전 발레 작품이 무보와 악보 및 메모들로 보존되어 있다. 해당 자료들은 디지털 아카이브로 누구나 온라인 이미지로 내려받아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스테파노프법을 개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Marion and Eliot의 연구(2013)내용과 Stepanov(1892)의 원전을 참고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시스템의 완벽한 해독보다는 주로 다루고 있는 내용과 범주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기록으로 「백조의 호수」 1막 2장 "호숫가 아다지오"의 무엇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작품은 그 기록에서 3막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도판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6개의 칸으로 이루어진 보표 7페이지에 걸쳐 기록돼있다.

도판 3
스테파노프법으로 표기된 “호숫가 아다지오” 안무 (The choreography of the “Lakeside Adagio” notated by the Stepanov system) Sergeev Collection, Harvard Library, 1967. https://hollisarchives.lib.harvard.edu/catalog/hou01289
전체적으로 무보의 내용을 훑어보면, 가장 눈에 띄는 두 가지 정보는 보표 상의 ‘음표’와 무대 공간상의 ‘기호’이다. 무보에는 춤 움직임을 위한 계획을 담고 있는데,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 음표는 복잡한 디코딩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동선의 변화는 매우 직관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형태로 기호를 활용하여 성별과 움직임의 수행 방향, 이동하는 경로를 표시한다. 표기법의 초점은 인체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 즉 움직임의 최종지점을 정확하게 그리는 데 있고, 움직임이라는 것이 지점에서 지점으로의 직선 이동이라는 발레적 이해를 기반으로 기록하고 있다. 움직임의 모양을 기록하는데 집중했으며, 머리 등의 일부 신체는 기록하지 않아 발레의 기본 동작과 수행에 익숙한 이들의 사용을 전제하고 최대한 간소한 표기방식을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호숫가 아다지오" 부분에는 해당 사항이 없지만, 마임이 있는 다른 부분들의 무보에는 동작 대신 마임의 내용이 대화형식의 글로 적혀 있기도 하며, 장면에 덧붙여야 할 기록들이 필요에 따라 메모지로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다. 메모지의 기록에는 1917년 마린스키에서 공연된 「백조의 호수」 프로그램 내용에 들어갈 장면별 춤과 출연자의 명단, 소요 시간(약 2시간 반) 등이 별도로 첨부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컬렉션에는 러시아에서 출판된 차이콥스키의 악보도 소장되어 있다. 〈도판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1막 2장 아다지오의 음악은 파란 색연필로 19-25번까지 7개의 변화 구간이 구분되어 표시되어 있다. 차이콥스키가 채택했던 곡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f)는 표기의 구분과 같이 도입부의 긴 하프연주를 제외하면 ABCBCBA의 순서로 세 가지 요소의 반복으로 구조화 됨을 알 수 있다.

도판 4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표지 및 “호숫가 아다지오” 악보 (The cover of Swan Lake and the score of “Lakeside Adagio”) Sergeev Collection, Harvard Library, 1967. https://hollisarchives.lib.harvard.edu/catalog/hou01289
Ⅲ. 원형의 복원과 재연
1. 기록으로부터 원형의 복원
세르게예프의 기록은 러시아 안에서보다 밖에서 「백조의 호수」를 재현해 내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는데, 세르게예프 본인이 직접 참여한 것과 볼쇼이 극장 감독을 지낸 알렉산더 라트만스키(Alexei Ratmansky)가 활용한 복원 작업이 대표적이다.
먼저 세르게예프가 직접 활용한 경우로는 1934년 영국 새들러스 웰스(현 로열발레단)의 「백조의 호수」전막 공연이 해당한다(Royal Ballet Homepage, n.d.). 이론적으로라면 이 재현은 러시아 내에서 제작된 작품의 원형을 기록한 1차 자료로 재현한 것이기에 가장 설득력 있는 재현이라 볼 수 있다.
재현 공연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호숫가 아다지오"가 3인무로 안무 되었다는 점이다. 2025년 11월 15일 프티파협회 웹사이트에 따르면, 정확하게는 "세 명이 등장하는 2인무(pas de deux à trois)"라고 표기하고 있다. 3인의 구성에 대한 기록적 근거는 Ⅱ장에서 살펴본 〈도판 2〉의 무보에서 남성 무용수를 뜻하는 X가 2개 등장하는 장면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프티파협회에 따르면 주인공의 2인무에 남성 보조 무용수가 개입하는 것은 프티파-이바노프가 안무를 했던 19세기 황실극장의 관행이었다. 당시 극장에 남성 무용수 수가 매우 부족했고 대부분 작품의 주인공을 모두 도맡았던 파벨 게르트(Pavel Gerdt)(당시 50세)의 체력적 부담을 덜기 위한 방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은 1900년대 즈음 니콜라이 레가트(Nikolai Legat)가 그의 뒤를 이어 지크프리트 왕자 역할을 맡으면서 이인무로 바뀌었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호숫가 아다지오"가 2인무 형식으로 전승되어 온 것과 달리 영국에서는 세르게예프의 무보를 토대로 클래식 본고장의 원형을 그대로를 되살리고자 한 예술적 목표 아래, 복원 이후에도 3인무의 형식이 얼마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 마고트 폰테인(Margot Fonteyn)과 마이클 솜즈(Michael Somes)가 로열발레단의 주역을 맡았을 때의 2막 일부 영상으로 제작되었는데, 〈도판 5〉에서와 같이 이때도 "호숫가 장면"은 프레더릭 애쉬턴(Frederick Ashton)과 세르게예프 안무라는 표기와 함께 3인무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판 5
1960년 로열발레단 “호숫가 아다지오”의 오데트와 베노, 지그프리트의 3인무(영상 캡처) (The trio of Odette, Benno, and Siegfried in the “Lakeside Adagio”) Royal Ballet. 1960. https://youtu.be/XWtOeyB9aY8.
두 번째 대표적인 사용은 폰테인과 솜즈의 영상이 기록된 지 약 50년 후인 라트만스키의 작업이다. 2016년 라트만스키는 취리히 국립발레단과 라스칼라 발레단에서 세르게예프의 무보를 토대로 작품을 복원하였다. 그가 작업을 복원이라 이름 붙인 것은 무보에 기록된 춤에 직접적인 수행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물리적인 자료들만을 바탕으로 작품에 최대한 원전의 가치를 재현해 냈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라스칼라 발레단의 촬영 영상을 토대로 세르게예프 무보와 실제 춤의 진행을 대입해 보면 〈도판 6〉과 같다. 파란색 박스는 악보에 표기된 숫자와 위치를 일치시키기 위해 추가한 표기이며, 노란색 박스로 베노와 오데트의 이인무가 진행되는 부분을 표시하였다. 영상에서 해당 장면을 캡처하여 무보와 동선의 일치도를 확인하기 위해 해당 보표 위치에 장면을 대입해 보았다.

도판 6
라트만스키의 복원 영상과 무보 기록 비교 분석(저자 재구성) (The comparision of Ratmansky’s reconstuction video and the Stepanov notation by score column) Sergeev Collection, Harvard Library, 1967. https://hollisarchives.lib.harvard.edu/catalog/hou01289
장면을 분석하면서 3인무의 전개와 특히 무용수의 동선이 명시적으로 기록과 동일한 형태로 전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구체적인 동작에서는 기록법 자체가 움직임의 형태가 아닌 관절의 각도와 지속 시간을 기록한 방식이고, 모든 신체의 움직임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각 움직임별 정확한 수행방식을 대조하기는 쉽지 않았다. 발레 기교와 작품의 장면에 대한 전문적 이해와 함께 해석적인 능력이 요구되었다.
한편 안무와 음악의 전개를 분석하기 위해 차이콥스키 악보를 기준으로 해당 마디에서 수행되는 동작을 분석하여 대입해 보면 다음 〈도판 7〉과 같다. 보라색 박스는 각 마디에서 진행되는 주요 단위 움직임을 분석한 것으로, 데벨로페, 피루엣, 아라베스크, 팡셰, 컴블레, 에티튜드, 프로미나드, 시손느, 바퇴, 보레 등이 주 동작으로 진행됨을 알 수 있다.

도판 7
라트만스키 복원 영상의 동작 전개와 차이콥스키 음악 전개 비교 분석(저자 재구성) (The comparison of movement development in Ratmansky’s reconstuction video and the musical development in Tchaikovsky’s score
ABCBCBA로 구성된 음악의 테마와 함께 주 동작들이 호응을 이뤄 반복과 변형으로 감정의 변화를 구조화한다. A에서는 프로미나드와 에티튜드를 중심으로, B에서는 합핑 동작을 오데트와 군무가 번갈아 추고, 세 번째 B에서는 오데트의 팡세로 변형되고, 첫 번째 C에서는 시손느 3번->피루엣, 두 번째 C에서는 파세->에티튜드, 피루엣->아라베스크로, 마지막은 변형으로 바퇴->푸에테 피루엣을 2번 반복하고 마무리하는 춤의 전개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춤의 전개 구조는 음악의 구조와 완벽한 조응을 이룬다. 각 에피소드 간의 조화로운 조성의 변화와 호응은 단순한 리듬적 패턴 이상의 역할을 하며, 극적 메시지와 복합적인 감정의 변화를 발레 동작과 구조를 이뤄 뒷받침한다. 이 부분의 음악은 차이콥스키가 4막으로 작곡할 당시, 2막 13번 전곡 중에서 파닥시옹(pas d’action: andante, andante non troppo, allegro)의 가운데 소절에 해당하는 곡으로 당시 그가 작곡 중이었던 오페라 「운디나(Undina)」(1869)의 마지막 듀엣곡 ‘오 행복, 오 축복받은 순간(O happiness, O blessed moment)’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Cohen 2004, 29, 114). 남녀 주인공의 죽음과 이별의 합창이 삭제되고 그 자리에 각각 바이올린과 첼로가 선율로 배치되었다. 두 현악기가 오데트와 지그프리트를 상징하며 연주되는 반면, 움직임은 오직 오데트의 춤으로 감정의 전개를 담당하고 있다.
노란색 박스는 베노와 오데트의 듀엣 부분으로 아다지오 전반부에 치우쳐 있음이 두드러진다. 베노의 동작은 오데트를 지지하고 등퇴장 시 두 주인공에게 예를 갖추는 목례가 포함되며 고전적인 질서를 작품에 그려내기 위한 안무적 배치로 해석된다. 따로 그림에 포함해 넣지는 않았으나 지그프리트 역시 독무보다는 오데트를 지지하는 역할에 전적으로 할애되었다.
2. 재연과 창조적 수행
1)「백조의 호수」 원형의 재연
세르게예프의 기록으로 「백조의 호수」 원형을 재현하고 복원한 과정을 살펴보면 무보는 발레 재현에서 ‘대필적 속성’의 중요한 토대가 됨을 알 수 있다. 기록은 원형적 속성, 즉 "호숫가 아다지오"에서의 ‘춤의 움직임과 동선의 핵심 구조와 전개’, ‘음악과 움직임의 상관성과 배치에 따른 정서의 표현’이라는 프티파-이바노프 안무의 정수를 보존하고 재현 가능케 했다. 그러한 점에서 영국에서 그의 작업은 높이 평가받았으며, 왕실 발레단에 고전을 위치시킨 장본인으로 인정받았다.
라트만스키는 마리나 하스(Marina Harss)와의 인터뷰에서 역시 혁명 이후 고전 제작에 직접 가담했던 제국극장의 3분의 2가 러시아를 떠났고, 관객 역시 일반인들로 채워졌기 때문에 레퍼토리에 대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강조한다. 고전 발레 역시 이 같은 사회변화에 발맞춰 나가기 위해 많은 수정이 가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널리 익숙하게 공연되고 있는 「백조의 호수」라 할지라도 무보에 의한 원형의 복원이 프티파-이바노프가 완성한 예술적 가치를 조명하고 되살리는 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Harss 201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무보의 신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존재했다. 마가렛 플레밍(Margaret Fleming)은 새들러 웰스 발레단이 1955년에서 1970년까지 대부분의 재현 작품들을 다시 베네쉬법(Benesh system)으로 기록해 보관하였음을 지적한다. 이는 1940년대 초 세르게예프가 발레단을 떠난 후 적지 않은 시간의 간극을 메워야 할 필요가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르게예프와의 작업과정에서 스테파노프법의 기록적 한계, 특히 동작의 타이밍을 담지 못하는 한계와 고도의 해석적 능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함을 즉시 한 결과로 해석한다(Fleming 2010, 45).
2016년 라트만스키의 복원작을 본 비평가 제라드 도울러(Gerald Dowler)는 라트만스키의 복원이 세르게예프의 무보로 래퍼토리화 된 영국발레단의 다른 버전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 복원 작품보다 기존의 다른 작품들이 정확하게 원형의 안무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고 언급했다. 다만 복원작이 팔다리의 높이나 수행이 더 보수적이고, 특히 1막 2장의 베노의 재등장을 이례적이라 평가했다(Dowler 2016).
도울러의 지적과도 같이, 실제로 유리 그리고로비치(Yury Grigorovich)의 볼쇼이 버전, 콘스탄틴 세르게예프(Konstantin Sergeyev)의 마린스키 버전, 세르게예프의 로열발레단 버전, 라트만스키의 라스칼라 발레단 버전의 "호숫가 아다지오" 영상을 비교해 보더라도, 〈도판 7〉에서 분석한 주요 동작과 움직임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용백과사전(International Encyclopedia)』에 정리된 「백조의 호수」 재현과 보존의 역사를 살펴보면, 러시아 내에서 프티파-이바노프 원형에 본을 둔 재현들은 1901년 볼쇼이의 골스키, 1933년 레닌그라드의 아그리피나 바가노바(Agrippina Vaganova)와 1945년 페도르 로푸코푸(Fedor Lopukhov), 1969년 볼쇼이의 그리고로비치가 대표적이다. 러시아 밖으로는 마린스키와 볼쇼이의 개정 안무들이 옮겨져 재현되고 각 발레단의 고유 레퍼토리로 고정되었으며, 이에 다시 각 발레단의 안무가들 재해석과 재안무가 더해졌다고 이해된다(Cohen(ed.) 2004, 31-35).
여기서 확인되는 점은 1895년 초연 이후 작품은 기록에 의해서 보다는 수많은 발레단의 안무가와 발레 마스터들에 의해 전승되고 재구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발레 마스터와 무용수들의 경험과 기억이 원형을 보존하고 재현하는데 절대적 토대로 사용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경험과 기억은 기록이 담아내지 못하는 발레의 ‘자필적(autographic) 속성’을 재현 가능의 영역으로 중개한다.
러시아 안에서 유지되어온 「백조의 호수」 공연들은 ‘레퍼토리(repertoire)’라는 목록으로 고정되어 반복되었으며 러시아 밖으로 나가 재현되었다. 레퍼토리의 기능은 반복 가능한 무엇으로 체계화하는 것이다. 기억된 안무로서 레퍼토리란 지식을 생성하고, 기록하고, 전달하는 수행적 행위로, 구체적인 기억은 생생하기 때문에 공연의 본질을 포착하는데 기록 보관소의 능력보다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레퍼토리는 ‘그곳에 있음’으로써, 즉 전달의 일부가 됨으로써 지식의 생산과 재생산에 참여하게 된다(Taylor 2003, 21).
그렇다면 몸으로 기억하는 재현은 무엇인가. 발레의 전승 현장은 기록보다 ‘신체적 기억’으로 이루어진다. 고정된 교과서가 없고, 개인 대 개인, 마스터와 제자 사이의 유대로 현재의 무용수와 과거의 작품을 연결한다. 무용단에서는 작품을 몸에 저장할 수 있는 무용수를 특별히 고용해서, 동료 무용수들이 특정 춤에 대해 상기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Homans 2014, 20). 몸은 아카이브로서의 공간이며, 무보가 추구하고자 했던 원형 그대로의 재현이 아닌 ‘재연(re-enactment)’을 가능케 한다. 몸은 아카이브로서 닫힌 체계가 아니라 유연하게 열려있는 유기체로서 지식을 저장하고 확장한다. 따라서 재연은 단순히 과거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수행적 사건으로서 살아있는 아카이브를 창출하는 것이다(Lepecki 2010, 46).
2) 박기현 안무가의 「백조의 호수」 재연과 창조적 수행
2025년 ‘춤유산극장’에서 박기현 안무가의 「백조의 호수」는 국립발레단의 버전2)을 토대로 한다. 국립발레단의 버전은 2001년 볼쇼이 발레를 33년간 지휘했던 그리고로비치가 본국의 세트, 의상, 소품을 모두 가지고 방한하여, 직접 안무, 연출, 지도해 완성한 버전이다(국립중앙극장 2020, 565). 마린스키 버전이 고전주의 전통의 균형감과 서정미를 강조한다면, 그리고로비치의 버전은 강한 드라마와 웅장한 구성미를 바탕으로 서사적이고 극적 긴장감에 무게를 두는 차이점이 있다(박기현, 개인 면담, 2025년 11월 6일).
서론의 연구 문제에서 안무가가 강조했던 ‘보존’과 ‘재해석’이라는 양가적인 맥락으로 박기현 안무가의 재연을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보존’의 맥락에서, 박기현 안무가는 발레 마스터로서 「백조의 호수」의 버전을 벗어나지 않고 원작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그대로 담아내어야 할 임무임을 강조한다.
발레단에서는 작품이 원형에서 변형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원작의 계보에 있는 스태프를 초청해 안무를 다시 점검받기도 하는데, (중략) 1895년의 원형에서 갈라져 나온 재안무 유형(type)들의 개별적 차이점을 구별하고 이해해야 하며, (중략) 장면의 음악적 흐름과 인물의 감정선, 각 장면이 지닌 정서를 되짚어내고, (중략) 발레에서 지켜야 할 기본자세와 선, 동작의 강약과 흐름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박기현, 개인 면담, 2025년 11월 6일).
재연을 위한 연습 과정은 앞장의 여러 버전의 논의에서와는 달리 원본에 대한 대조, 즉 원작의 움직임 순서를 일일이 두 무용수에게 옮겨 새기는 과정은 생략되었다. 발레 전공자이자 관찰자로서 보더라도 무용수들의 춤은 프티파의 안무로 기록되었던 안무의 구조, 즉 앞서 분석하였던 ABCBCBA로 구성된 음악의 테마와 함께 전개된 동작들이 호응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간의 기교적 수행적 진보에 따른 난이도와 공간 크기에 따른 동선의 재조정이 일부 용인되었다. 마스터의 역할은 아라베스크, 애티튜드 등 무보에서 확인되었던 프티파 안무의 주요 동작을 형식적으로 옮겨내는데 머물기보다, 각 동작의 의미와 맥락을 점검하고 발레의 테크닉적 기본의 자세, 손발 끝의 위치, 움직임의 선과 수행의 리듬을 다듬는 데 집중되었다. 클래식 발레의 속성상 기교와 동작이 표준화되어 있기에 수행에 대한 질적 정보를 재연해 내는데 더욱 예술적 강조점이 드러나고 있었다(이지선, 관찰 일지, 2025년 11월 20일).
그 과정은 직업무용수에 대한 신뢰와 체화된 지식에 대한 명시적 암시적 합의로 ‘기록’이나 ‘원형’에 대한 물리적인 대조작업은 불필요하거나 이미 축적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전 국립발레단 솔리스트이자 발레 마스터를 역임한 박기현 안무가는 해당 버전의 안무에 대한 지식을 몸으로 저장하고 마스터링 한 연구자로, 남녀 주인공을 맡은 김희현(지그프리트 역)과 홍주연(오데트 역) 역시 전·현직 직업발레단 무용수 출신으로 본 작품의 안무에 대한 체화적 지식이 확보된 무용수로 간주되었다.
작품의 연습 과정에서는 무용수들은 이미 기존의 경험과 지식으로 안무를 숙지한 상태였고 기억을 위한 기록이나 도구는 필요치 않았다(이지선, 관찰 일지, 2025년 11월 20일). 이는 이미 참여자들 사이에 "호숫가 아다지오"에 대한 공통된 전형을 공유하고 있다는 깊은 신뢰를 기반한다. 그 공통된 전형은 발레 마스터이자 무용수로서의 오랜 경험을 통한 레퍼토리의 반복으로 저장된 체화된 지식이 근본을 이루었다.
둘째, ‘재해석’의 맥락에서는 수행적 실천의 가치가 강조된다. 박기현 안무가는 "현대 안무가들이 악보, 동작 스케치, 사진, 동영상 등 다양한 기록법을 가지고 자신의 작품을 레파토리화 하고 재현하는 데 활용한다"라고 설명하면서도, 고전의 재연에서 동작의 순서를 지키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기보다 안무가의 의도와 표현을 이해하고 담아내는 것에 더 중요한 무게를 두었다(박기현, 개인 면담, 2025년 11월 5일).
특히 전통의 기교를 엄격히 확립하는 것과 동시에 발레의 기본자세 중에서도 손끝의 정교함을 강조하고, 표현의 예술적 완성에서 그 정교함이 중요한 요소가 됨을 지적하였다.
연습 과정에서 알롱제 같은 동작을 손끝까지, 음악을 끝까지 다 써서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종종 하체는 ‘사진’, 상체는 ‘동영상’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는데, 발레 관객은 하체 기교만 계속 볼 수는 없고, 결국은 상체와 얼굴의 표현을 보게 된다는 것이죠. 하체가 좀 부족하더라도 상체의 표현이 좋은 주역들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박기현, 개인 면담, 2025년 11월 20일).
이는 발레의 기교 일반으로 해석에서 나아가 박기현 안무가의 예술관이 반영된 결과로 주목할 수 있다. 발의 기교에서 출발한 발레의 무보가 스텝을 주요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재연 과정에서 마스터의 재해석이 발휘될 수 있는 지점이라 해석된다.
더불어 안무가는 「백조의 호수」가 "무용수들의 춤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원작이라는 것은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와 마스터의 몸을 통해 세대를 거쳐 살아 움직이는 예술이기에 미세한 감정의 표현은 무용수로부터 발휘될 수 있는 부분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박기현, 개인 면담, 2025년 11월 6일).
연습 과정에서는 무용수 저마다의 경험과 차이가 드러났다. 홍주연 발레리나의 경우 프로 발레단에서 김주원, 황혜민과 같은 전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들로부터 작품에 대한 마스터링을 받았고, 김희현 발레리노는 국립발레단 단원 시절부터 해당 안무를 몸에 저장하고 있었다. 무용수들은 이러한 경험들이 오늘의 연습과 춤에 재연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전막 발레를 직접 경험한 마스터로부터의 전이는 극 전체의 흐름 안에서 부분의 춤과 동작들의 맥락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직접적인 지식을 제공해 준다고 하였다(김희현, 홍주연, 개인 면담, 2025년 11월 20일).
무용수가 원작의 질서를 엄격하게 재현하고자 함에도 그 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까닭은 발레 메소드나 동작의 차이 또는 기교의 몰이해가 아닌 발레의 기본을 체화하는 방식의 고유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홍주연 무용수는 기본적으로 발레의 기본 테크닉에 충실한 것이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 자신만의 이상적인 발레리나를 모델 삼아 끊임없는 모방과 탐구를 반복하여 움직임으로 배어 나오도록 연구하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는 로파트키나를 롤모델로 해서 그 영상을 계속 봐요. 잘 추는 것 외에 최고라고 평가하는 이유를 찾고자 합니다. 발레리나의 기본 동작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들을 무수히 반복해서 보고 체득하려고 노력합니다. 메소드의 차이라기보다 기본 동작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종합적으로 움직임의 차이와 개성, 미적 훌륭함으로 드러나게 됨을 깨달았어요. (중략) 아라베스크만 해도 흑조, 백조, 지젤 등... 다 달라서 연구가 필요했어요(홍주연, 개인 면담, 2025년 11월 20일).
김주원의 경우 워낙 상체 표현에 능한 무용수입니다. 제가 같이 발레단에 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김주원 무용수가 한 동작을 몇 시간 동안 연습하고 또 연습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해외 공연에서도 댄서가 아니라 액터라 불릴 만큼 뛰어난 표현과 해석능력을 가진 무용수로 평가받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박기현, 개인 면담, 2025년 11월 20일)
안무가와 무용수들의 위와 같은 증언은 곧 마스터뿐만 아니라 무용수의 개인적 미적 취향이 안무의 재해석, 즉 수행적 지식에 개입함을 의미한다. 많은 노력과 공부의 시간을 통해 자신만의 동작을 찾아내는 것이 고전 발레의 재연에서 주역 무용수에게 필요한 소임임을 이해할 수 있다.
Ⅳ. 논의 및 결론
앞 장들의 분석 내용을 종합하여 서론의 연구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첫 번째 연구 문제 ‘보존되고 반복되는 것으로서 원형이란 무엇인가’에서 원형이란 개념의 층위에는 원전, 원형, 전형이라는 세 층위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즉 고전의 재연에서 무엇을 본으로 삼는가에 대한 개념적인 논의는 보존의 맥락에서 잠재적인 대상으로의 논의를 제안한다. 잠재적인 대상으로서 전형이란 물리적 실체로 보존된 것이라기보다 해석과 실천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포함한다.
두 번째 연구 문제 ‘원형은 원본의 무엇을 어떻게 담고 있는가’에 대해 본 연구에서는 원형의 보존을 위해 기록이 어떻게 무엇을 담고 있는가 살펴보았다. 프티파의 「백조의 호수」 원형을 담고 있다고 간주 되는 세르게예프 컬렉션의 무보 원본을 찾아 분석하였다. 무보에는 스테파노프 기록법을 통해 프티파의 안무에 관한 정보, 특히 고전 발레 안무에서 강조되는 주요 동작과 동선, 군무의 대형이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분별 가능한 수준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음악의 전개와 구성의 분석 내용 역시 악보와 메모기록을 통해 파악 가능함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한편 그 기록 방식은 해부학적 원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발레 동작의 전체를 수용하지 못하며, "호숫가 아다지오"에서 원본의 모든 것을 기록하기보다 강조하거나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악보의 마디 개수와 무보의 보표 개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만 보더라도 춤의 모든 시간 기반 정보를 무보에 기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연구 문제 ‘고전 발레의 재연은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에서는 무보에 기반한 라트만스키의 복원 영상과 무보의 보표를 1대 1 대응으로 대조해 보았다. 이러한 대조작업은 라트만스키의 작업이 ‘재현’ 대신 ‘복원’이라는 구별처럼 원형의 기록에 철저하게 기반하고자 한 의도가 잘 이루어졌는가를 파악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도판 6>과 <도판 7>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라트만스키의 버전은 형식적으로 원본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고자 함을 확인할 수 있다. ‘춤의 움직임과 동선의 핵심 구조와 전개’, ‘음악과 움직임의 상관성과 배치에 따른 정서의 표현’이라는 원전의 대필적 요소들이 명시적으로 반복된다. 특히 오늘날의 「백조의 호수」에 대한 일반적인 관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호숫가 아다지오" 원본의 3인무 형식을 되살려내었다는 점에서 고전의 재연에 ‘보존’의 맥락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박기현 안무가의 "호숫가 아다지오" 재연은 연습 과정 관찰과 인터뷰를 통해 재연 과정에서의 실제를 들여다보았다. 과정에서 안무가는 무보를 기반한 라트만스키의 작업과는 대조적으로 신체적 기억과 예술적 탐구를 토대로 원형을 이해하고 재연하고자 하였다. 이는 종래 러시아 밖에서의 반복이 원본적 가치를 담아내고자 한 재현에 무게를 둔 전통과 달리 러시아 내, 즉 원형의 지식을 체화한 수행자들에 의해 공연이 계승되어 온 맥락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음으로 해석된다. 이들의 작업은 "호숫가 아다지오"가 무보에 기록된 실체로서 정형화된 작품이 아닌 신체적 기억으로서 완성되는 ‘레퍼토리’로서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박기현 안무가의 재연은 원형의 유지라는 재현 또는 복원의 작업과는 달리 원형에 대한 또 다른 전형의 작업으로 이해된다.
마지막 연구 문제로, 그렇다면 ‘재연에서 어떤 예술적 의미와 가치들이 생성되는가?’ 박기현 안무가의 작업을 포함하여 과거 또는 미래에 행해지는 "호숫가 아다지오"의 재연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이들의 작업을 고전의 ‘재연’이라 해석할 때, 이는 절대적인 ‘보존’보다는 ‘재해석’의 맥락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필적 요소들의 되살림에 의해 겉으로 자못 반복적인 행위로 보이는 레퍼토리의 재연은 연구 분석의 과정에 그 실체가 잠재적인 대상임을 주지할 수 있다. 원형의 자필적 속성이라 지칭되는 경험적이고 수행적인 지식들은 무보가 아닌 무용수의 신체에 아카이빙되고 보존되며 재연 과정에서 확장된다. 원형이 갖는 불완전한 기록과 재해석이 갖는 자의적인 지식 가능성은 재연에서 창조적 수행으로 실천적 가치와 의미를 일으킨다.
따라서 연구에서 주지할 수 있는 것은 첫째, 고전의 재연은 ‘보존’과 ‘재해석’에 대한 의지의 교차점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재연은 원전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원본에 기록된 3인무 형식은 보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적 취향에 따라 탈락되었으며, 원본에 기록되지 않은 실제적 수행적 요소들은 체험적 기억과 해석으로 계승된다. 원전의 예술적 가치를 적절하게 간직하고 의미화해 나가는 것은 방법론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의 문제로 귀속된다. 발레의 훈련과 연습의 문화는 반복과 엄격함, 마스터와 무용수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고전의 가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보수적인 태도와 현재의 예술로 살아 숨 쉬게 하고자 하는 의지의 교차에서 이루어진다.
두 번째, 자필적 속성으로서 논의되던 기록할 수 없는 원형의 지식들은 무용수의 몸에서 체화된 지식으로 재연을 통해 실천된다. 살아있는 아카이브로서 무용수의 몸 안에는 원작의 원형에 대한 마스터의 가르침과 스스로의 몸에 이입한 고전적 기교의 기술, 발레 움직임에 대한 자신의 미적 지향이 저장되고 창조적으로 재연된다. 따라서 고전 발레의 재연은 오래된 유물을 발굴하여 박물관에 모형을 주물하는 고고학이 아니라, 재연을 통한 원작의 예술적 가치를 창조적으로 수행하고 이어나가고자 하는 탐구적 실천이다.
셋째, 창조적 실천으로서 재연은 끊임없는 연구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전의 재연이 단순한 반복이 되지 않기 위해서 원전에 대한 대필적 자료들에 대한 지속적인 대조와 환기, 마스터와 무용수의 발레에 대한 미학적 가치관과 체화적 훈련과 탐구가 ‘보존’과 ‘재해석’의 의지 안에서 팽팽하게 맞물려 실천되어야 한다. 그 탐구와 훈련은 특정 작품 안에서 작품에 관한 미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연습과 연구 과정 일반의 종합적인 결과물임을 강조할 수 있다.
원형을 재연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은 ‘창조적’ 수행이라는 표현에 보수적인 태도를 가질 수도 있다. 다만 연구에서 주목한 것은 고전 발레의 재연이 가치 보존에 주력하면서도, 현재의 관객과 함께 숨 쉬고 진화하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동시대 관객에게 의미 있는 고전으로 살아있기 위해, 고전 발레의 원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수동적인 보존이 아닌 무엇을 어떻게 전승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참여자들 간의 지속적인 연구와 합의가 고전 발레의 재연을 그저 반복과 저장이 아닌 예술과 창조로 가능케 할 것이다.
덧붙여 본 연구가 시도하고자 하였던 실천연구 방법은 예술가의 체화적 지식을 규명하는 데 유의한 방법으로 이해되었다. 연구의 설계는 안무가의 실천작업의 주제와 연습 과정 및 인터뷰의 질문들로부터 출발하였으며, 연구 과정에서 인터뷰의 내용에 따라 연구 논제가 첨삭되었다. 결과적으로 연구는 논문이라는 형식이 취할 수밖에 없는 선형적인 과정으로 정리되었기는 하나, 실제로는 비선형적이고 개방적인 방식으로 조율되었다. 그러한 과정은 연구의 전개와 방향이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난점에도 불구하고 이론과 실천의 평행적 탐구 관계에서의 ‘사이의 지식들’3)이 규명되는데 유용하다는 판단을 제공해 주었다. 모쪼록 미약하지만 본고를 통해 고전의 재연에 대한 예술적 가치를 환기하고, 현장에서의 체화된 지식에 대한 실천기반의 연구가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