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진도(珍島)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거제도와 함께 세 번째로 큰 섬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유배지로 유배 온 죄인 중 높은 지식과 예술성이 뛰어난 사람들의 영향으로 지 금까지 많은 훌륭한 예술인들이 배출된 보배의 섬이다. 또한 그 예술가들은 진도지방의 민속예술을 발전시켜 한 지역에서 10개의 무형문화재가 지정될 수 있었다. 특히 진도지 방의 무속의식으로 대표되는 씻김굿은 음악학에서는 남도음악, 나아가 우리 민속음악의 중요한 토양과 뿌리가 되어왔다. 또한 굿 안에 연행되는 의식에는 음악 뿐 아니라 의례와 춤 등도 어우러져 있다. 진도씻김굿은 음악적으로 그 예술의 가치가 높은 만큼 의례나 춤 역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게다가 대대로 전승된 세습무가의 예술적 역량의 축적은 무속 활동의 학습효과를 높여왔기 때문에, 강신무 계에서 볼 수 없는 예술적 토양을 폭넓게 형 성해 왔다.
진도지방에서 굿을 했던 세습무 집안은 강(姜)·김(金)·노(盧)·박(朴)·안(安)·양(梁)·이(李)· 진(陣)·채(蔡)·최(崔)·한(韓)·함(咸) 등 12개 성씨에 이른다. 12개 성씨가 가계(家系)별 굿 형식의 문화적 구조와 형태가 상호작용하며 발전·계승되어오던 중 1970년대 초반에 시작 된 새마을 운동 등 급격한 지역사회 개발운동이 무속마저 ‘미신타파’의 대상으로 취급하여 씻김굿 당골들의 경제적·사회적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태생적인 신분의 사회적 제약과 당골 판 내 젊은 세대들의 당골에 대한 몰이해는 세습 무업을 지속할 수 없는 사유가 되었 다.(박미경 2007, 61) 이후 1980년 11월 17일에 진도씻김굿이 중요무형문화재1) 제 72호2) 로 지정되었고, 문화재 지정 당시 세습무가(世襲巫家) 박가계를 중심으로 박병천3), 김대 례4), 체계만5)이 보유자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문화재 지정과 상관없이 채정례 지무6)는 함씨가계의 씻김굿을 전승해 왔다.
이처럼 사라져가는 가계별 세습무계 지무의 전승과정을 찾아내어 기록·보존하는 것은 진도씻김굿을 바르게 전승하는데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지름길이다. 진도씻김굿에 대 한 연구는 섬 문화의 특수성으로 인해 지금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조사·연구되어 왔다. 진 도지방은 문화예술이 특히 발달되어 민속학·인류학·음악학·국문학 등 여러 학문분야에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진도씻김굿 연구는 주로 제차에 대한 설명과 굿의 기능 및 무구의 상징성을 밝히고 있으나, 본 연구에서는 세습무계의 계보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자 한다. 진도씻김굿 세습무계 관련 선행연구는 진도지방 세습무가의 무계연구와 박가계 를 중심으로 여러 편이 발표되었다.
박주언(1985)은 진도문화원에서 발행하는 격월간지 『예향진도』 6∼7월호에 “진도의 무 속”이란 제목으로 진도의 세습무계들의 역사와 변화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박주언 (1985)은 『예향진도』8·9월호에서 “진도의 단골판”이라는 글을 통해 단골들에게 ‘판’이 무 엇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였고, 씻김굿이 1980년에 중요무형문화 재로 지정되면서 그 당시의 전수현황과 변화과정을 설명하였다. 노동은 외(1994)은 「박병 천과 신청음악(朴秉千과神廳音樂)」에서 신청출신인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 자 박병천에 주목하면서 대금산조의 창시자인 그의 작은 할아버지 박종기(朴鐘基,1879∼ 1953)를 비롯 면담을 통해 음악적 역사를 그 시대 그대로 증언하면서 우리들의 역사와 민 족전통음악을 어떻게 학습하고 적용하였는지를 밝혔다. 또한 박미경(2002)은 「진도당골의 즉흥성 퇴화양상에 관한 연구」에서 씻김굿의 음악은 본질적 의식음악으로 당골의 기능을 넘어 예술성의 극치를 이룬다고 보고하였다. 다만 최근 강신무들은 예술성보다 신성이 강 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하였으며, 당골의 즉흥성 퇴화현상도 당연한 사실이라고 보고하 였다. 이후 국립남도국악원(2005)은 『진도단골 채정례 구술채록 연구』에서 채정례의 가계 를 비롯하여 성장, 활동, 진도씻김굿의 절차와 내용 등이 한 예술가의 생애뿐 아니라 진도 씻김굿 등 진도 문화의 이해에 관한 내용을 보고하였다. 박미경(2007)은 「진도 세습무 박 씨계보와 인물연구」에서 9대째 세습인 진도북춤의 명인이자 진도씻김굿 문화재보유자 박 병천의 가계를 연구하였다. 진도세습무 중에서 큰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박씨가계의 예 술성과 후대 인물들의 활동분야 그리고 음악의 최고경지를 이루는데 중심역할을 한 박씨 가계를 설명하면서, 한국의 예술적 가문을 재구성하여 국제학계에도 한국예술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을 밝혔다. 박미경·박주언(2007)은 「진도세습무 박씨가계도 재구성에 관한 연구」에서 진도 세습무계의 구성을 각 가계별로 가계도를 만들어 제시하였으며, 특히 밀양박씨는 청제공파 족보로부터 후대까지를 나열하면서 가승보와 족보를 통해 예술가문 의 후손임을 밝혔다. 김명현(2008)은 「진도씻김굿의 전승과 변화양상에 관한 고찰」에서 진도씻김굿이 문화변동에 의해 어떤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는지를 남아있는 세습무들의 면 담과 지역주민의 면담녹취를 이용해 연구하였다.
진도는 오래 전부터 많은 세습무가들이 씻김굿을 그들의 방식대로 전승 발전해 오고 있 었다. 그러나 시대적 변화와 전승의 부적합한 환경으로 인해 현재 남아있는 세습무가는 박家(박병천)·강家(강준섭)·함家(함인천)·채家(채정례)의 가계만 남아 있다. 따라서 본 연구 는 진도씻김굿을 연행하는 지무(무녀)들의 각 가계를 중심으로 전승된 상황과 가계별 상호 작용 및 발전·계승 상황을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연구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구체적인 연구방법은 선행연구 및 자료를 문헌 고찰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이를 확인하고 검증하는 관점에서 면담녹취를 병행하였다. 진도씻김굿 지무계보를 보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정 리하기 위해서 故 박병천(전 진도씻김굿 보유자), 故 강준섭(전 다시래기 보유자, 박병천의 동갑친구), 박병원(현 진도씻김굿 보유자, 鼓人), 송순단(현 진도씻김굿 전승교육사7)), 김 오현(현 진도씻김굿 전승교육사) 선생과의 직접면담 녹취를 실시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화를 통한 면담도 수차례 실시하여 가계를 올바르게 고증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이미 2007년에 고인이 된 박병천과의 면담녹취 기록을 본 연구자가 소장할 수 있었던 배 경은 고인으로부터 약 20여 년 동안 그의 춤을 사사한 인연에 있다. 그 밖의 면담녹취의 대상이 된 선생님들과는 함께 공연하고 활동한 내력에 의해 접근성과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Ⅱ. 진도지방 무계(巫系)의 이해
진도지방의 무업은 일반적 세습무권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가계를 중심축으로 시어머니 로부터 며느리에게로 사제권이 전승되는 부가계내(父家系內) 고부계승(姑婦繼承)이 원칙 이다. 진도씻김굿은 ‘당골(혹은 단골)’이라고 부르는 세습무당에 의해 연행된다. 즉, 여성이 결혼하여 시가(媤家)에서 시어머니의 무업을 이어받는 세습무 전통이 일반적이다. 무당이 되는 것은 여성이지만 그 계통이 부계(父系)의 출계를 따라 이어지는 것이다.
진도지방 세습무 가계에는 ‘당골판’이라는 독특한 굿의 구역이 존재한다. 이것은 각 가 계별로 가지는 무형의 재산으로써 평생 동안 ‘당골판’ 내 신도들을 축원해 주고, 봄과 가을 에 ‘도부’로 받는 곡식으로써 생계를 유지해 왔다.(박주언 1985, 23) 그런데 이조차 산업사 회로 변화해 가면서 신도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다. 굿이 없는 무가(巫家)들은 생활이 곤란하게 되어 무업을 이어가기 더 힘들어졌다. 그중 몇 가계는 진도를 떠나 무계 임을 감추고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자기의 ‘당골판’을 버리고 진도를 떠남으로 인해 ‘비어 있는 판’이 속출했다고 전한다. 박주언의 연구에서 밝힌 ‘당골판’의 현실에 대한 기술은 다음과 같다.
무(巫)들은 신도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면서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도부’를 받아야 먹고 살 수가 있다. 그들이 떡이나 성냥 등 약간의 선물(그냥 가기 미안하니까)을 가져왔다고 쌀 한 되라도 선뜻 내주는 일은 흔하지 않다. 고군면 오일시리의 양(梁)씨, 오산·지막리의 안(安) 씨도 ‘판’을 버리고 떠난 무(巫)들이며 이로써 근래에 와서 진도에서 양씨·안씨·노(盧)씨 무가 가 또 사라져 버렸다.(박주언 1985, 23)
‘당골판’은 무(巫)와 신도(信徒) 사이의 종교적 독점관계를 토대로 형성되는데, 이 ‘판’의 소유권은 남자에게 있다. ‘당골판’은 상속이나 매매가 가능한 경제권에 해당한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판’의 전부나 혹은 일부를 상속받을 수 있고, 딸은 어머니로부터 세습된 무 가(巫歌)를 배우기는 하나 출가 후 다른 가계의 시어머니로 부터 굿을 배운다. 처녀 때는 굿에 참여하지 않고 결혼한 후에 시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서 처음부터 배운 다음, 함께 굿을 한다. 어머니와 며느리가 굿을 진행할 때, 아버지와 아들은 악사(樂士: 고인)가 되어 한 가족이 행사를 치른다. 만약 굿의 규모가 클 때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남무와 여무를 불러서 함께 굿을 진행한다. 굿을 마친 후에는 적당한 대가를 지불한다. 이처럼 무가(巫家) 의 경제를 뒷받침하고 무(巫) 기능의 기본 활동 영역이 되는 곳이 다름 아닌 ‘판’이다.
1987년 국립민속박물관의 진도무속 현지조사에 따르면 당시 조사된 과거의 무계(巫系) 와 그때까지 이어온 무계를 합쳐 14개 성씨의 친족집단이 진도에 분포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010년에 갱신된 인터넷 『한국민속신앙사전』에 의하면, 진도지방 당골은 강(姜)·김 (金)·노(盧)·박(朴)·안(安)·양(梁)·이(李)·진(陣)·채(蔡)·최(崔)·한(韓)·함(咸) 등 12개의 세습무 계 씨족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성씨가 진도의 무계를 이루었었지만, 오래전에 타 계하고, 건강상 무업을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은퇴하였거나, 무계집안임을 밝히기를 싫어 하는 등의 이유로 상세하게 계보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1960년대의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 면 성내리(城內里) 서외부락(西外部落) 무당촌에는 집단으로 당골무들이 거주했었다. 최길 성에 의하면 진도군청 사회계에서 작성한 ‘미신업자 통계’가 있는데, 1967년 당골은 남자 22명, 여자 65명이 있었다고 한다(박미경, 박주언 2007, 22-24). 하지만 70년대 초에 시작 된 새마을운동 등 급격한 지역사회 개발운동은 무속마저 ‘미신타파’의 대상으로 취급하여 씻김굿 당골들의 경제적·사회적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태생적인 신분의 사회적 제약과 당골판 내 젊은 세대들의 당골에 대한 몰이해는 무업을 지속할 수 없는 사유가 되었다. 이에 따라 해당 지역에서 가능한 먼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박미경에 따르면 당골은 당골 집안간의 혼사를 통해 세습 무계를 전승해왔다. 진도 밀양 박가계로 시집 온 지무의 성씨만 보더라도 무안 박(朴)씨·김해 김(金)씨·청주 김(金)씨·진주 강(姜)씨·평강 채(蔡)씨·순창 조(趙)씨·제주(濟州) 양(梁)씨·함씨·한씨·순흥 안(安)씨 등 10 여 성씨를 볼 수 있다. 반대로 박가의 딸로서 이름난 당골 박선내(朴先乃)는 이명수(李明 洙)와 결혼하여 이씨 당골 무계를 이끌었고, 다시 박씨 가계의 박만준(朴萬俊)은 한산련(韓 山漣)을 부인으로 맞았으며, 그의 아들 박승×(朴乘×)은 최유×초(崔有×草)를 며느리로 들여 무계를 이었다. 이처럼 박씨 가계와 관련된 지무의 성씨가 10여개 성을 웃도는 것은 반면 강씨나, 안씨, 채씨 등등의 가계에서도 무속활동이 지속되었음을 나타낸다. 진도에는 여러 당골 집안이 있어서, 동간(同間)끼리 혼인 관계를 맺어 씨족 간에 거미줄 같이 얽힌 관계를 지속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동간이란 ‘같은 사이’라는 뜻인데, 세습무계 사람들이 자기들 끼리를 뜻하는 은어, ‘우리네’라는 표현도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박미경 2007, 61~65).
다음은 국가무형문화재 ‘진도다시래기’ 보유자 故 강준섭과의 생전 면담녹취를 통하여 세습무계로 남아 있는 성씨가 박·김·강·채·함씨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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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현주 : 굿하는 집안이 그 진도에는 몇 분이나 계셨었어요? (뭐라? 다 했지!) 다하면 어떡해요~ (굿을.. 다했지 옘병하네). 왜 여러 집안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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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섭 : 그라지 박씨, 김씨, 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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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현주 : 박씨네는 박병천선생님네 (어이~ 김씨) 김씨네는요?( 또 채씨. 강씨) 김씨, 강씨 예 (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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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섭 : 또 김 귀봉이~김귀봉이 알지? 뚱뚱한 애! 귀봉이 응 김, 김귀봉 (김귀봉.. 누구신 지 모르는데요...) 그...머 박선생이랑 갑이여. (네~~~) 김씨, 내가 김씨. 채씨, 박씨, 강씨 음 다... (박씨, 김씨, 강씨, 채씨 이렇게 네, 네 집안이 굿을 했나요?) 에 그리고 한씨 한씨 (함이요!) 응 함 함을 함자 (네 함씨) 응 함씨.
(강준섭, 개인면담, 2013년 4월 10일)
조선시대 초기부터 무당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체제 확립 과정에서 천민(賤民)으 로 규정되었고, 그 제도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시행되었다(이두현 1995, 51). 1894년 갑 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된 후에도 전라남도 진도지방의 무계 전승은 10여 성씨가 ‘동 간(同間)’이라는 동질 집단 안에서의 혼인을 이루며 세습무계를 유지해 오면서, 경제활동 의 터전인 ‘당골판’을 중심으로 가계가 구축되고 무업이 전승되고 있다. 당골은 일정 지역 의 관할권을 갖고 있어서 그 지역 사람들의 온갖 굿을 도맡아 하게 되는데, 진도에서 ‘당골 판’이 없는 무계는 대장간·목수·이발사·유랑극단 등 다른 직업을 택하거나 굿판의 악사 겸 놀이판 악사가 되기도 하였다. 당골판은 구역으로 나누어지는 듯하지만 사실은 씨족별로 담당한다. 당골판은 한사람의 당골네가 당골판의 소유자로서 관리한다. 따라서 자기의 관 할 판 안에서는 다른 당골이 들어와서 굿을 하는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골판 안에 거주하게 된 소수 타성 제가(祭家)를 매매 또는 전세로 내어주거나, 당골 간에 판 전체를 전세로 거래하기도 했다고 한다(한수민 2003, 17). 결국 ‘당골판’이 형성된 구역 범위는 당골들의 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박미경(1981)의 연구에서 세습무인 당골의 수는 약 20여명으로 파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조사에 의하면 당골 중에는 자녀들의 학업 을 위하여 도시로 이사를 한 경우와 질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쇠약해져 더 이상 일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 당골의 사망으로 인해 ‘당골판’이 거의 분열되기도 했 다고 한다(김명현 2008, 178).
1980년 11월 17일 진도씻김굿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만 해도 상당수의 세습무가 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황루시 2001, 78). 그러나 그 형세가 위축된 진도의 씻김굿 보존회 현황을 전승교육사 김오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지금은 전반적으로 진도에서 이케 많이 나오는 72호가 갖고 있는 것은 박병천 선생님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예~) 채정례 선생님이 가장 연로한 분으로 계시는데 (네) 그 분이 현재 에.. 그나마 그 그런 일들을 좀 하고 계시고, 또 거기에서 이제 그 파생된 어떻게 보면 이 무업을 전문으로 하지 않았던 분들이 새삼스럽게 나타나서 하는 게 이제 채정례 선생님 제자들로는 안정자, (네에~) 어.. 모 그런 분들이 현재 일을 하러 다니더라고요. (네에) 거기 인제 채정례선생님 거.. 또 거 왜, 이종.. (이종조카요) 조카 강정태란 분이 지금 고인(鼓人)으 로 같이 다니고 있고 (아 강정태 선생님이요?) 예에. 또 어... 지금 채정례 남편 되시는 함... (네 함선생님) 네 함 선생.. 에. 그분이 이제, 지금 현재 그... 박진섭 선생님이라고 (네) 에 그 선생님이 또 유일하게 현재 고인(鼓人)으로 많이 상좌하고, (아~) 또 인제 에헴, 강신과 이게 어떤 부분이 접목되어있는 (네) 저거, 박순심 보살이라고 또 있어요. 그분이 나름대로 또 자기 신도리를 저기에서 그 굿을 하고 있고, 그러고는 특별하게 지금 우리 72호가 가장 중심에서 하고...
(김오현, 개인면담, 2013년 4월 12일)
선행연구들과 면담녹취를 통해 진도지방 무계 전승양상을 조사한 결과 현재 남아있는 당골네는 박병원·박미옥·박환영·박성훈·강정태 등이다. 이들은 진도씻김굿보존회를 중심으 로, 각자의 가계와는 상관없이 연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함인천·채 정례 부부는 보존회에 소속되지 않은 상태로 개별적인 활동을 해왔으나, 2010년경부터 건 강이 악화되어 무업을 거의 못하다가 2013년 10월 21일 87세로 타계하였다. 결국 수많았 던 세습무의 빈자리를 최근에는 강신무들이 남도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한다.
Ⅲ. 진도씻김굿 가계별 지무의 전승 양상
1. 박씨가계 지무의 씻김굿 전승
세습무가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박병천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 등등 조상의 가 업이 서로 전해져서 오늘의 진도씻김굿에 귀착되었다. 그리고 1980년 11월 17일 중요무형 문화재 제72호가 지정되기까지 박병천은 사라져 가는 고향 문화 알리기에 노력을 집중하 여 점차 사라질 위기에 있는 진도씻김굿의 보존 필요성을 강조하여 알렸다. 이로 인해 진 도 12성씨의 세습 무계 중 박가 집안네의 씻김굿이 자연스럽게 중요무형문화재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박병천은 스스로 9대째 세습 무업을 지속해 왔다고 증언했다. 박병천의 아버지 박범준 과 큰아버지 박판준, 고모 박선내가 모두 당골임은 물론 사촌들이 모두 무계로서 박종기와 같이 개별적인 유명 악인(樂人)으로 활동하거나 지무들을 돕는 고인(鼓人)으로 활동했다.
타계 전 강준섭과의 면담에 의하면, 박병천 어머니 김소심은 그 당시 지무로서 단연 인 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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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섭 : 잘 춘사람 있지. (예 누군가요?) 누군가 하니... 저.. 병천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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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현주 : 아 박병천 선생님 어머님이요? 성함이 김~뭐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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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섭 : 이름 잊어 버렸네 나도.. (네 김소심 맞나요) 응 맞어.. 잘~지청에 딱 들어서면 옆에서 굿 본 놈들이 환장해. (네~~~) 잘~~~옷 입고 지청에 딱 들어서면 잘~~해! (네~~) 굿 본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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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현주 : 무엇을 제일 잘 하셨어요. 그분은? (응?) 무엇을 제일 잘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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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섭 : 아 인제 춤도 잘 추고, 또 대사 사설도 똑똑 떨어지고, (네~) 춤도 잘하고 (춤은 어떤 걸 잘하셨어요?) 아 그.... (지전춤?~) 짝 지전 들고 애항 옆에 딱 찍고 나오면 미치제. (네~).
(강준섭, 개인면담, 2013년 4월 10일)
강준섭은 박병천과 동갑으로 진도다시래기 보유자이고, 강가계의 무계를 대표하는 인물 로 이미 앞 절에서 설명했다. 그가 기억하는 박병천의 어머니 김소심 지무는 외모와 춤과 사설에 모두 뛰어났다. 하지만 영상자료 등이 남아있지 않아 실제 그녀의 굿춤 양상을 살 필 수 없는 점이 아쉽다.
본고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의 지정과 관련된 박병천의 사촌 여동생 김대례, 부인 정숙 자, 김대례의 생질녀인 이완순이 국가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 보존회에서 박가계의 굿을 보존 전승하다가 모두 작고하였으므로 이를 기초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후 박병천과 정숙 자의 딸 박미옥이 이를 계승하고 있고 송순단은 강신무로서 진도씻김굿을 주재하는 지무 로 활동하고 있다. 박병천의 부인 정숙자로부터 지무 전승 양상을 살피면 아래와 같다.
1) 정숙자 지무
정숙자는 1939년생으로 충청도에서 태어나 남사당패인 이동식 예술단에서 활동했다. 진 도지역으로 공연 와서 스물세 살에 박병천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결혼하여 진도에 머무 르게 되었다. 그녀는 당골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굿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 어머님의 병세로 인해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로써 무업을 시작하게 되었 다. 그 후 정숙자는 시어머니 김소심과 고모 박선내에게 본격적인 어정판의 기능을 지도받 았다. 비무계로서 당골 출신은 아니었지만, 당대의 최고 지무들에게 정식으로 굿을 배운 덕분에 진도에서 전승되는 모든 굿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춤사위가 고왔던 지무로 사람들 은 기억하고 있다. 진도씻김굿이 무형문화재가 된 이후부터 진도씻김굿 보존회에 속해 있 었고, 1993년부터는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하였으나 2001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황루시 2001, 80-81). 정숙자에 이어 며느리를 지무로 전수시키고자 노력했으나 며느리 중에는 지무를 이어갈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큰딸 박미옥이 무녀의 길을 가기로 하고, 딸에게 굿 을 전수했다.
2) 박미옥 지무
박미옥은 1963년생으로 박병천과 정숙자의 큰딸이다. 진도출신의 김씨 남편과 혼인했 지만 시댁이 무가 집안이 아닌 관계로 친정에서 전수받을 수 밖에 없었다(박병천 2004). 박미옥은 진도씻김굿 보존회에서 이수자로 활동하다가 친정어머니의 타계 후 2008년에 전 수교육조교로 선정되어 현재 진도씻김굿 보존회에서 세습무계의 지무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는 친정어머니에게 무계를 전수 받았고, 박씨 가계의 좋은 목청을 이어받았기에 특히 사설이 좋다는 평판을 듣고 있다. 비무계였던 친정어머니와는 또 다른 능력의 지무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3) 김대례 지무
김대례(金大禮)는 1935년에 진도군 이매면 삼막리에서 태어났다. 김대례와 박병천은 6 촌간이다. 박종기가 외할아버지였고, 친정어머니 박소심은 유명한 당골이었다. 또 김대례 의 외숙모인 한산달은 남편 한찬용의 큰누나면서 박씨 가계 박만준의 부인으로 지무였다. 남편 한찬용은 한성원의 1남 7녀 중 외동아들로 굿을 하지 않았다. 23살에 본격적으로 굿 판에 나선 김대례는 어머니 박소심의 사촌 언니 박선애(선내)로부터 굿을 배웠다. 당골판 은 삼막, 용호리, 길우지 등지이다. 하지만 1960년대에 임회면 백동으로 이사한 뒤 당골판 의 도부를 중단했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으나 현재 무업을 이을 자손은 없다.(황루시 2001, 86-88) 한씨 가계의 무업은 단절되었다. 1980년에 진도씻김굿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지무로서는 유일하게 보유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50대 초반에 중풍으로 쓰러 진 이후로는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제대로 굿을 하지 못하다가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박미경, 박주언 2009, 432).
4) 이완순 지무
이완순은 1942년생으로 이태홍과 한미달의 장녀이다. 영암으로 시집갔으나, 29살 때부 터 큰이모부인 박만준에게서 굿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하여 김기봉과 함께 굿을 하러 다녔 다. 박만준은 대금의 명인 박종기의 삼남이다. 처음에는 영암제(육지제)라고 많은 지적을 받았으나 이완순의 남편 작은 어머님이 진도출신이고 그 밑에서 이미 공부를 하였고, 김귀 봉, 김만준과 한산달의 굿판을 함께 다녔다(앞의 책). 이후 진도씻김굿 보존회 이수자로 활동하면서 1990년대 굿을 이끌다가 1995년에 53세를 일기로 갑자기 타계하였다.
이완순은 타계 전 1년 정도 송순단과 함께 굿을 다니며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했다(앞 의 책). 송순단은 강신무이기 때문에 악사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완순이 갑 자기 타계하고, 제주도에 예약된 굿이 일주일 후로 잡혀 있었는데, 이를 송순단이 주재하 면서 자연스럽게 이완순의 굿을 이어받아 성공리에 주재했다고 한다(앞의 책, 446-447).
5) 송순단 지무
송순단은 1959년생이다. 진도군 지산면 길은리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났 다. 신이 내린 29살 전에는 그저 평범한 농사꾼으로 생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친정어머니 여금순이 신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강신의 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친정어 머니와 친정오빠의 갑작스런 죽음과 남동생의 교통사고 등 집안의 많은 풍파를 겪으면서 결국 31살에 지산면 오보살에게서 내림굿을 받았다. 기왕 무당이 되었으니 제대로 굿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1992년에 진도씻김굿 보존회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황루시 2001, 90-91).
송순단은 정숙자 지무가 타계한 2001년에 전수교육조교가 되어 현재까지 국가무형문화 재 진도씻김굿을 보존·전승하는데 힘써왔다.
이로서 국가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 보존회에서 활동한 지무들의 전승관계는 다음 <도 판 1>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김대례는 박병천의 사촌 동생이므로 정숙자와는 사촌 시누이이다. 이완순은 김대례의 시댁 생질이면서 한산달의 이종조카이다. 이들이 문화재 지정 당시를 이끈 1세대 지무이 다. 송순단은 박씨의 친인적 관계는 성립되지 않지만, 문화재 제도권 안에 편입되어 이완 순에게 굿을 학습한 내력으로 박씨 계통의 씻김굿을 전승하게 되었다. 박미옥은 박병천과 정숙자의 딸로서 어머니 사후 실질적인 박씨계 굿을 전승하고 있는 중요인물이며, 딸 박향 옥도 언니의 뒤를 이어 보존회에서 활동하고 학습하면서 이수자가 되었다. 이하 이수자 강은영, 박영애를 포함한 전수생들이 진도씻김굿을 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세습 무가의 계보로 전승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진도지방의 씻김굿이 무형문 화재 진도씻김굿 보존회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양상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2. 강씨가계 지무의 씻김굿 전승
강씨가계 지무들은 故 강준섭이 생존해 있을 때 강준섭과의 면담자료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강준섭의 할머니는 박가인데, 성명은 알지 못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굿판을 다니는 지무였다. 강준섭의 어머니 故 박석화(색화)와 작은어머니 김씨도 지무로 활동했다. 이규 원(1995년)의『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에서 할머니(박씨)와 어머니(박석화)도 진도 제일의 예술가 집안인 故박종기 가문에 시집와 천부적 목구성을 타고 났었다고 한다. 강준섭의 어머니 故박석화는 4남을 두었는데, 비무계와 결혼한 막내 강준섭말고는 삼형제의 며느리 를 모두 지무로 전수시켰다. 그 첫째 며느리는 故채둔굴로 채정례의 둘째언니이다. 둘째 며느리는 한가, 셋째 며느리는 김가로 모두 동간 혼인을 통해 강가계보의 세습무계를 이었 지만, 더 이상 며느리로 계승되는 강가의 지무는 단절되고 말았다. 고인(鼓人)으로 활동하 는 강정태와 강민수가 국가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 보존회에 소속되어 있다.
이상의 강가 계보는 강준섭의 가계만을 정리한 것이므로, 세습무계로서의 강씨계열은 보다 폭넓게 분포했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더 이상의 세습 상황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단절된 것이 현실이다. 위의 설명에 대한 강가계 지무들의 전승관계는 위의 <도판 2>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3. 함씨가계 지무의 씻김굿 전승
함씨 가계의 지무는 함인천씨의 부인 채정례를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 채정례 선대의 지무들 역시 현재 문헌 기록으로는 남은 자료가 없으며 함인천이 세습무가에서 태어났다 는 문헌기록에서 그 존재만을 추측할 뿐이다.
채정례는 1924년에 신안군 세습무계집안인 채백주와 임득춘의 1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채백주 부부의 딸 셋은 각각 김모선, 강홍섭에게 시집가서 모두 무계 단골을 계 승했다. 채정례는 40세쯤 되었을 때 무업을 하던 언니의 갑작스런 병으로 대신 굿판을 나 가게 되면서 지무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제대로 무업교육을 받아 지금까지 무 업에 종사하고 있다. 무계집안간의 혼인으로 지무가 되었으나, 전수과정이 시어머니가 아 니라, 어렸을 때 보고 듣고 배운 채씨 무계의 전통을 재현한 것으로 친정 부모로부터 다시 배워 익힌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채정례의 시어머니 김막동(함영언의 부인)과 시할머니 박씨(함임복의 부인)도 모두 함씨가계의 지무를 계승했음을 볼 때, 채정례의 결혼 후 지무 활동이 채씨가문의 것이라고 못 박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함인천의 아버지는 함영 언 고인(鼓人)으로부터 가계의 단골판을 세습 받지 못하여 채정례의 친정에서 생계를 위해 단골판을 받았다는 것이 곧 채씨가문의 굿을 받은 것이라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처녀 때는 굿을 학습하지 않고 결혼 후 시어머니로부터 굿을 전승하는 것이 관례라면, 채정례도 생활 속에서 시어머니의 굿을 습득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채정례 후대의 세습무계 지무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혈연적 혼인 관계가 아닌 제 자를 길러 굿을 가르치고 전수하고 있었다. 타계 당시 지무 안정자(1944년생)는 강신무로 서 채정례에게 사사받으며 함께 활동했으며, 2013년 채정례의 타계 후 현장에서 채정례선 생의 굿을 이어가고 있다. 위의 설명에 대한 함가계 지무들의 전승관계는 아래 <도판 3>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4. 진도씻김굿의 전승가계
세습무가란 남성 가족 성씨를 기준으로 계승되는 선대와 후대의 밀접한 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실제 굿 의식의 진행은 시어머니를 통해서 며느리에게로 전승된다. 이러한 고부(姑 婦)간 무속 계승은 혼인으로 인해 형성된다. 임석재에 의하면 결혼 전의 딸은 자기 어머니 로부터 무가를 학습하는 정도이고, 직접 굿의 기술을 익히는 것은 결혼하여 시어머니로부 터 습득하게 된다고 한다(임석재 1999, 171). 이처럼 시어머니로부터 굿의 수행능력을 전 승받은 며느리는 자기가 속한 시가계의 굿을 주재하고 이끌어가는 ‘지무’가 된다. 진도에서 는 무당을 지무라고 부른다. 지무는 기혼(旣婚) 여성의 몫이다. 결국 지무는 시댁의 가계를 계승한 굿 연행자로 활동한다. 남자들은 지무를 도와 음악 반주를 해주는 ‘고인(鼓人)’이 되어 굿을 바라지(뒷매김)한다.
진도에는 이처럼 가계를 중심으로 실제로 굿을 행하던 무가(巫家)가 12개 성씨나 있었 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단절되었고, 단지 2개의 지류가 남았을 뿐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보존회가 하나의 큰 강을 이루었고, 채정례 지무의 함가계는 보존회와 별도로 평행으로 나란히 흐르는 냇물과 같은 양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3년 채정례가 타계 후 그 맥은 끊어졌으며, 문화재 씻김굿보존회는 박가계의 친인척간 지무들 이 연합하여 굿을 진행해 왔다.
1980년 문화재 지정 당시의 첫 지무는 김대례(1935-2011년)이며, 진도씻김굿 예능보유 자가 되었다. 김대례는 박병천의 6촌 누이동생으로서 원래는 한씨 댁으로 시집간 한씨가계 의 지무다. 하지만 국가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은 박병천의 노력을 기초로 문화재적 가치 를 인정받게 된 종목이다. 그런 이유로 박병천과의 친척 관계에 있던 김대례가 첫 번째 지무로 인정되었다. 김대례의 친정이 박가계였다는 점이 간과할 수 없는 배경이 되었다.
박병천의 부인 정숙자(1939-2001년)는 김대례를 도와 함께 굿을 연행했던 지무인데, 이 수자로 활동하다가 김대례 사후 1993년부터 전수교육조교가 되었다. 정숙자는 비무계로서 박병천과 혼인한 후 지무가 되었다. 이로 본다면 정숙자야말로 박가계의 지무였다. 한편 김대례, 정숙자와 함께 활동한 이완순(1942-1995년)은 진도씻김굿 보존회 안에서 지무이 자 이수자로 굿에 참가했다. 이완순은 김대례와의 인척 관계로서 보존회의 지무가 되어 활동하다가 1995년에 별세했다. 이완순과 김대례는 한씨 가계(시댁)의 조카와 외숙모 사이 였다. 또 이완순의 이모 한산달의 남편이 박만준인데, 박만준은 박병천의 당숙이었다. 따라 서 김대례와 정숙자, 이완순은 박가계와의 친인척간 인연을 토대로 국가무형문화재 진도 씻김굿 보존회의 지무로 할동한 제1세대를 이룬다.
다음 이완순에게 학습한 송순단(1959년생)이 강신무라는 본래의 신분으로 보존회에 입회 하여 사제 간이 되었다. 그리고 송순단은 이완순 사후 보존회 굿을 집전해왔으며, 2013년 전수교육조교가 되었다. 또 박병천과 정숙자의 첫째 딸 박미옥도 전승교육사가 되어 함께 활동하고 있으니, 보존회의 제2세대 지무는 더 이상 며느리를 중심으로 전승되던 세습무계는 아닌 셈이다. 강신무와 타성으로 시집간 딸이 박가계를 잇는 지무가 된 것이다. 그 외 현재 이수자로는 강은영, 박향옥 등이 지무로서 진도씻김굿 전승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들 중 무용 연구자로서 특히 관심을 갖게 되는 사람은 박가계의 며느리 정숙자인데, 현행 지전춤 등에 춤 적인 요소를 크게 확대 발전시킨 주역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숙자는 비무계 출신이었는데, 박병천과 결혼하고 시어머니 김소심 지무로부터 학습 후 굿의 즉흥 적 요소가 있는 부분에서 그녀의 혼전(婚前) 특기인 춤을 굿에 대거 삽입하여, 춤이 풍성한 진도씻김굿을 재탄생시켰다. 강준섭이 회고하는 박병천의 어머니 김소심 지무의 춤과 노 래의 굿연행 실력이 남다르게 뛰어났던 점을 고려할 때, 정숙자 지무의 굿춤은 정숙자 개 인의 춤적 소양과 함께 시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박가계 굿의 전승양상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 보존회에 소속된 고인(鼓人)은 박병천, 박병원, 박환영, 박 성훈, 채계만, 김오현, 장필식, 이종대, 홍옥미, 임수정이다. 이는 문화재청의 2011년도 공 식 등록인원이다(황루시 2001, 74-77). 이들 중 당시 보유자인 박병천(1933-2007년)과 채계만(1915-2002년)은 타계했고, 이어 박병원이 2001년 11월에 채계만을 승계한 고인 (鼓人)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2022년 현재는 보유자 박병원(고인)과 전승교육사 김오현(고 인), 송순단(지무), 박미옥(지무), 박성훈(고인), 장필식(고인) 5명이 활동 중이다.
이상의 보존회와는 다른 지류인 함가계의 채정례(1924년생) 지무는 독자적으로 씻김굿 을 전승해 왔었다. 고인(鼓人)은 남편 함인천(1925년생)과 이종조카 강정태(1937년생)이 다. 강정태는 강준섭의 장조카로서 진도다시래기 전승교육사이다. 또 채정례의 언니 채둔 굴의 아들로서 이모인 채정례의 씻김굿을 바라지 해 왔었다. 채정례 타계 후 현재 채정례 를 계승하는 지무로는 안정자(1944년생)가 있다. 그러나 안정자 역시 세습무계가 아닌 강 신무이다.
Ⅳ. 결론
본 연구는 진도씻김굿을 연행하는 지무(무녀)들의 가계별 전승된 현황과 상호작용 및 발전·계승 상황을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연구방법으로는 선행연구 및 자료를 문헌 고찰 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이를 확인하고 검증하는 관점에서 면담녹취를 병행하였다. 가계별 계보에 따른 연구의 대상은 세습무가인 박·강·함·채가의 지무를 중심으로 하였다.
진도씻김굿 세습무계 지무의 전승과정을 파악한 결과 가계별 지무의 계보는 박가계의 1세대 지무로 김대례·정숙자·이완순, 2세대 지무로는 박미옥과 송순단이 계승했다. 그리고 채정례는 함가계의 지무로 구분했다. 박가계의 1세대 지무는 세습무계로 계승되었지만, 2 세대는 세습무와 강신무가 혼재한 가운데 진도씻김굿이 전승되고 있었다. 채정례도 본인 은 함씨가계의 세습무계이지만, 그의 제자는 강신무당으로서 채정례의 굿을 계승하게 되 었다. 강가계는 ‘진도다시래기’를 계승하고 있어 씻김굿을 전승한다고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진도씻김굿은 현재 두 지류의 전승 상황이 파악된다. 하나는 국가무형문화재 진 도씻김굿보존회이고, 둘은 함가계이다. 이처럼 두 가계만 남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무속에 대한 세속의 뿌리 깊은 천시와 하대로 인해 세습무계들이 무업을 스스로 버리거나 자손으 로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당골판에서 점점 도부가 보장되지 않아 경제적 고난의 악순환이 되면서 굿판을 떠나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이렇게 멸실 위기에 놓였던 씻김굿은 1980년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 72호로 지정됨으 로써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씻김굿 가계의 어려운 생활고를 해결해 주는 긍정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조사보고서는 박가계를 중심으로 작성되었고, 혜택 도 박가계에 집중되었다. 반면 국가로부터의 경제적 지원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 다른 세습 가계들은 독자적 생존이 더욱 힘들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로인해 각 가계들의 무속활동은 급속히 위축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보존회 역시 박씨 중심의 세습무계 마저 단절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에 무계와 비무계를 구분하지 않음은 물론, 강신무와 다양한 예능전공의 고급학력 전수자 들까지 수용되었다. 이로써 현재는 세습이 아닌 교육을 통해 전수하는 학습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진도씻김굿 보존회는 더 이상 박가계의 세습무가를 계승하는 것이 아닌, 사제 간 의 전수와 이수로 운영되고 있다. 세습무가는 물론 강신무와 일반 전승자들의 합동단체로 활동 중이다. 함가계는 채정례 지무의 타계 후 무속을 세습할 자손이 없어 세습무계의 계 승은 단절 되었지만, 제자인 강신무 안정자에 의해 채정례의 굿이 전승되고 있으므로 진도 씻김굿은 더 이상 가계로 전승되는 세습무의 활동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는 각 지역마다 각기 다른 양상의 굿 문화를 가지고 있고, 세습으로 무계를 계 승하던 진도지방의 진도씻김굿은 남도지역을 대표할 만한 굿문화로 인정되고 있다. 그 역 사성과 예술적 가치는 이미 많이 연구되어져 오고 있다. 씻김굿은 굿의 연행단계를 모두 지무가 진행해 나가야 하기에 지무의 역할 비중이 크며, 지무의 전승계보는 그만큼 중요성 을 의미하는 바이다. 하지만 진도지방의 씻김굿 세습무계는 시대적 변화와 전승의 부적합 한 환경으로 인해 소멸위기에 놓여 있는 현실이다. 이렇듯 그나마 잔존해 있는 세습무가의 올곧은 계승과 보존을 위해 지무의 계보를 이해하고, 원류를 찾는 것은 필요하며, 역사를 올바르게 수용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는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