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포스트모던 댄스 이후, 무용예술은 안무에 대한 개념과 정의를 새롭게 고민해야 할 상황 에 처해 왔다. 모던 댄스를 거치며 춤의 자율적인 예술적 지위를 정립하고, 더 나아가 움직 임을 춤의 본질로 인식하는 방향성이 전개되어 왔다면, 1960년대 이후 예술계에서는 다매 체적이고 다학제적인 실험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며 이런 전개를 하나의 방향성으로 특징 지을 수 없는 양상이 관찰된다. 한편으로, 춤의 본질적 형식에 대한 주장이나 분명한 양식 적 구분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퍼포먼스적 상황, 그리고 퍼포머 의 몸과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들이다. 이때 몸은 그 자체로 정치, 사회, 문화 및 각종 맥락 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여기 주목하는 퍼포먼스는 점차 분석적이고 자기 성찰적이며, 작업에 대해 말하고 소통하려는,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협업을 시도하는 과정적인 성향을 나타내게 된다. 동시에, 동시대 무용실천들은 현존에 초점을 맞추는 기존 의 퍼포먼스 개념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이는 곧 근대적인 예술가에 부여 되던 특권을 퍼포머의 신체로 이동시키는 것, 즉 무용수의 물질적 현존과의 만남이나 현장 성, ‘지금 여기’의 경험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양상은 동시대 무용에서 주목하는 몸이 과연 어떤 장소(locus) 혹은 존재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컨템퍼러리 댄스의 특징들은 특정한 예술 사조 혹은 형식으로 특정 짓기 어렵게 하는 것이며 이를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이런 매체적 비판성으로부터 하나의 흐름 을 형성하고 있다. 결국 신체에 대한 정치적인 주목과 움직임, 현존, 일시성과 현장성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문제시하는 것은 춤과 안무의 기존 개념에 균열을 가져오는 것이며, 다른 매체나 기법들과의 만남을 통해 다양한 창작의 가능성을 탐색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경향은 이론이나 비평, 담론 등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실천과 상호작용하는 확장된 지평을 형성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 연구는 동시대적 실천들이 지양하고자 하는 양식적 규정을 피하면서도 다양하고 모호한 실천들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이런 실천을 단순히 실험적이고 파편적인 시도로 이해하기보다는 퍼포먼스 및 무용의 존재론적 측면이나 생산, 수용에 대해 진행되어 온 논의의 맥락 속에 서 접근하기 위해, 컨템퍼러리 댄스가 나타내는 매체에 대한 비판성을 해당 실천들에서 강조되는 몸에 대한 이해와 연결 지으며 상호매개성(intermediality)1)의 개념을 통해 살펴 보고자 한다. 특히 상호매개성은 퍼포먼스나 현존과 연관되는 일시적인 시간성과 이를 포 획하려는 안무적 시도 양자를 문제시하고 대신 퍼포먼스를 생활공간으로 확장하며 살아가 는 몸에 대한 주목을 이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논의를 가능하게 한다. 이때 핵심은 컨템 퍼러리 댄스가 ‘사이’ 공간에 주목하는 대안적 시공간을 모색하고 있으며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통제를 벗어나는, 모호한 존재 자체를 긍정한다는 데 있다. 이런 방향성은 컨템퍼러 리 댄스에서 협업, 과정과 리서치에 대한 강조, 사회와의 연관성과 네트워크 등이 강조되 는 경향을 이해하는 데까지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이런 논의는 수행적 전환, 퍼포먼스에 대한 논의가 일반화된 예술적 맥락에서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이루어지는 실천들이 어떻게 예술 매체에 대한 비판성을 개진하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마지막으로는 몸을 아카이브이자 상호매개적 중심으로서 이해하고 등장시키는 대표적 인 사례로 ‘퍼포머가 자신으로서 이야기하는’ 자전적 퍼포먼스의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한 다. 인물의 기억과 삶을 소재로 탐구적 공간을 불러오는 자전적 퍼포먼스에는 다양한 유형 들이 있지만, 특히 삶과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의 예술적 가능성을 탐색하 는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퍼포머가 본인으로써 말하고 연기하며 퍼포먼스 이후로도 본인 으로 살아가게 되는 작품들에 주목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제롬 벨(Jérôme Bel, 1964-)의 「베로니크 두아노(Veronique Doisneau)」 및「 피쳇 클런천과 나(Pitchet Klunchun and Myself)」, 그리고 라비 므루에(Rabih Mroué 1967-)와 리나 사네(Lina Saneh)의 「바이오크라피아(Biokraphia)」 에서 개인과 몸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 고자 한다. 특히 이 작품들은 순서대로 한 개인, 개인과 문화의 만남,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개인의 경계의 해체와 탐구적 자기반성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심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 로, 컨템퍼러리 댄스에서의 몸이 가지는 상호매개적인 확장을 논하기 적합할 것이라고 여 겨 선정되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몸과 아카이브가 가지는, 삶으로 확장되는 상호매개적 잠재성의 대표적인 속성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II. 컨템퍼러리 댄스의 상호매개성
1. 컨템퍼러리 댄스에서의 매체적 비판성
모던 댄스 이후 무용예술은 무용 매체, 춤에 대한 탐구를 통해 텍스트나 표현의 도구로 서의 지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표현으로부터 발생하는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포 스트모던 댄스’에 이르면 움직임과 그것의 구성 자체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2) 동시에, 1960년대 이후부터는 움직임을 춤의 본질로 인식하고 이런 매체적 고유성을 통해 독립된 예술을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와 함께, 다매체적이고 다학제적이며 예술의 경계마 저 모호하게 하는 시도가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특히 저드슨 댄스 씨어터(Judson Church Dance Theater)로 대표되는 실험무용은 춤과 춤이 아닌 것의 결합이나 다양한 분야의 예 술가들의 협업, 일상적인 행동 및 신체에 대한 주목 등을 새롭게 시도했다(베인스 1991, 11-39). 더 나아가 이본느 레이너(Yvonne Rainer 1934-)의 ‘지속적 프로젝트(Continuous Project-Altered Daily)’로부터 형성된 즉흥 그룹 ‘그랜드 유니온(Grand Union)’은 예상치 못한 사건들, 과정, 즉각적인 반응들, 심지어 리허설까지 퍼포먼스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이때 삶과 예술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려는 시도들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공연의 소품이 나 음악, 의상 등을 공연 직전에야 조성하거나 체육관, 갤러리, 교회 등 캐주얼하고 미완성 의 느낌을 주는 공간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공연 이전부터 무용수들이 등장해 준비과 정이 공연으로 이어지거나, 퍼포머들이 관객들을 직접 대면하는 등(Novack 1990, 22-62) 작품의 시작과 끝을 불명확하게 하고 기존의 춤의 범주를 혼란스럽게 하는 시도들도 이루 어졌다. 이런 양상은 1990년대로 확장되어 이론과 정치적 비판의식, 다양한 매체, 춤의 부 재 등이 컨템퍼러리 댄스의 범위 내에서 실험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제롬 벨, 자비 에 르 루아(Xavier Le Roi 1968-), 마텐 스팽베르크(Mårten Spångberg) 등의 안무가들은 실험적 안무를 통해 다른 매체까지 춤의 영역으로 확장시켰으며 춤이 안무의 본질이라는 관습적인 태도에 저항한 바 있다. 이런 시도들은 ‘농당스(Non-danse)’, ‘개념 무용 (Conceptual Dance)’ 등으로 불리며 춤의 ‘부재’를 통해 춤의 주변을 포섭하는 확장된 시 도를 나타냈다(김재리 2019, 87). 이는 곧 기존의 춤에 대한 이해는 컨템퍼러리 댄스의 복잡한 속성을 표현하지 못하며, 새로운 미학적 접근이 필요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문제의식은 1960년대 공연예술을 둘러싼 변동, 즉 소위 ‘수행적 전환 (performative turn)’이 야기한 퍼포먼스의 ‘본질’에 대한 고찰과도 관련될 수 있다. 텍스트 기반의 연극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발전된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대두 및 ‘수행적 전환’ 이 후, 공연예술에서는 몸과 물질성이 강조되어 왔다. 특히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 1943-)는 이런 변동이 작품이 아닌 사건으로의 이동을 나타낸다고 설명했 다. 이때 퍼포먼스는 더 이상 기호로 해석될 수 없고 관객들은 배우의 행동들이 가지는 물질성의 작용으로 인해 육체적 감정을 가지게 되며, 이를 통해 행위자로 참여할 수 있게 되는 변환이 이루어진다. 이런 변동에 따라 의미의 전달이나 재현에 부속되지 않는 퍼포먼 스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의 ‘신체적 공동 현존’, ‘찰나적 물질성’, ‘실제적 육체’ 등이 두드 러지는 경향이 나타난다(피셔-리히테 2017, 57-71). 피셔-리히테는 여기서 전통적인 의 미의 주체-객체, 기표-기의의 이분법적 개념 도식이 불안정해지도록 하는 역동성이 작동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때 퍼포먼스가 관객을 행위자로 변형시킨다는 것의 핵심은 관객 과 무대 혹은 퍼포머 사이, 기호학적 표현과 의미 전달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수행적 전환 이후 퍼포먼스에 대한 이해는 예술의 질료나 의미가 아닌 공연 이 가진 특수한 매체적 속성, 즉 배우와 관객이 동일한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공동으 로 무언가를 행한다는, ‘지금, 여기’의 조건으로부터 발생한다(심재민 2009, 50). 다시 말 해, 1960년대 이후 공연 현상에서의 중요한 변화는 공연예술의 상연이나 행위를 지칭하던 개념인 ‘퍼포먼스’가 곧 그 실천 자체를 대변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변화를 대변할 수 있는 개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데서 드러나듯이, 퍼포먼스, 즉 실연의 형식을 따르는 예술 현상들이 학제적인 집합으로서 탐구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1960년대 이후 퍼포먼스 지형 전반에서 이루어진 이런 논의에서 주목할 점은 예술 매체에 대한 탐구가 질료, 도구, 기법 혹은 물질적 형식이 아닌 퍼포먼스가 성립하게 하는 ‘조건’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매체 개념에 함축된 여러 의미 중) 전달하는 물체 혹은 예술적 재료에 대한 초점이 전달하는 행위나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으로 이동 했다는 점이다. 이는 퍼포먼스 지향적 예술이 작품의 권위와 형식, 퍼포머와 관객, 예술의 생산과 수용 등 사이의 관습적인 이분법을 거부하고 예술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가능성을 가지도록 한다. 하지만 동시에, 텍스트를 거부하고 퍼포먼스의 고유하고 궁 극적인 속성, 즉 퍼포머의 신체와 물질성을 강조하는 경향성은 작품에 부여되던 특권적 지위를 퍼포머의 물질성으로 이동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 혹은 퍼포먼스의 시공간적 조건과 관련된 고유한 매체적 특성을 고수한다는 비판이 가능하게 한다.3) 또 한편으로는, 수행적인 것의 미학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시도들이 컨템퍼러리 공연 현장에서 발견 되고 있다.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거나, 물질성을 강조하면서도 관객의 의식 활동과 사 유 가능성을 주선할 수 있는 공연, 혹은 강연 등 의식적인 다른 활동과의 유사성을 나타내 는 공연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런 현상들은 관객에게 공연에 대해 전통적인 해석학적 의미 찾기를 강요하지 않지만, 동시에 행동의 물질성 자체로부터 신체적인 반응을 야기하 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 작업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도록 한다.
한편으로, 동시대 퍼포먼스의 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무용예술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논 하자면, 전통적인 ‘춤,’ 움직임의 나열과 구성에서 도구나 장치, 메커니즘 혹은 시스템으로 서의 안무(choreography) 개념으로의 이동에 주목할 수 있다. 이런 안무 개념은 춤의 창작 이나 무보의 개발과 필수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신체나 움직임의 구성 외의 요소들을 조직하는 원리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컨템퍼러리 댄스의 공동 작업적이고 혼합적인 경향과도 관련된다. 이런 ‘확장된’ 의미의 안무는 장치(apparatus)4), 즉 푸코에 의해 제안 된 바와 같이 (무용이) 지각 및 의미와 맺는 관계를 유통하는 메커니즘으로 이해될 수 있다 (Lepecki 2007, 120). 그렇기 때문에 컨템퍼러리 댄스의 맥락에서 안무 개념이 논의되는 것은 수행적 전환에서와 같이, 예술 생산의 과정과 조건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는 물 질적인 예술 매체에 대한 논의를 넘어 예술적 참여의 과정에서 작용하는 지각의 양상과 습관들, 매체적 관습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안드레 레 페키(André Lepecki 1965-)는 “포획의 장치로서의 안무(Choreography as Apparatus of Capture)”에서 서양 극장 무용의 중요한 문제로 춤과 시간성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며, 춤 을 순간적인 것으로, 그리고 순간적인 것을 문제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기존 안무적 관습에 대해 경계할 것을 요청한다. 그에 따르면 춤은 16세기 말부터 ‘안무적인 것’으로 일컬어지 는 메커니즘 내에서 움직이기 시작함에 따라, 지각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움직임과 사라져 버리는 춤을 머물러 있게 하는 지각 경제의 작동을 나타냈다(Lepecki 2007, 120). 그리고 이런 지각적 양상에 대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장치 개념에 따르면 지각은 언제나 권력의 모드에 묶여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이런 권력은 사물들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혹은 의미 전달 여부를 결정한다(Lepecki 2007, 120).
그렇다면 이때 문제시되는 것은 무용예술 수행의 조건들에 대해 안무적 작동이 야기하 는 지각적 경향, 그리고 컨템퍼러리 댄스가 이에 대해 어떤 비판적인 가능성을 보이고 있 는지이다. 특히 본고에서는 오늘날 퍼포먼스적 논의에서 두드러지는, 사라짐이나 현존성과 관련된 시간성이 몸의 존재와 나란히 놓이곤 한다는 점에 근거해,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나타나는 몸에 대한 이해와 논의를 통해 그것이 가지는 매체적 비판성에 대한 논의를 심화 시키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컨템퍼러리 댄스에서의 시간성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을 검토하고, 몸의 현존과 재현적 언어로 대표되는 상이한 조건들의 공존을 통해 권위적인 물질성이 아닌 살아가는 존재이자 상호적 교류의 장소로서의 몸에 주목하는 논의들을 살 펴보고자 한다.
2. 컨템퍼러리 댄스에서의 몸-아카이브: 사라짐에서 잠재성으로
무용예술에서 안무는 그 어원에서부터 춤(choreia)과 쓰기(graphia)의 합성어, 즉 ‘춤 쓰 기’라는 뜻을 가지며, 춤을 기록하고 보존해 권위주의적인 기획에 종속시키려는 의지를 가 져 왔다고 레페키는 지적한다.5) 한편, 수행적 전환을 중심으로 퍼포먼스의 조건 및 존재론 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면서, 퍼포먼스의 일시적이고 고정될 수 없다는 속성이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피셔-리히테는 공연에 대한 관객의 기억은 신뢰될 수 없고 관객은 공연을 볼 때마다 매번 다른 경험을 하며, 공연을 보는 과정에서 생성한 의미는 공연이 끝난 후의 언어적 의미와 동일시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피셔-리히테 2017, 352-353). 이때 공연을 후차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고유한 규칙을 따르는 텍스트를 창 출하며, 공연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페기 펠란(Peggy Phelan 1948-)은 퍼포먼스의 나타 남과 사라짐의 동시성을 가지는 속성을 자본주의적 포획 및 체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긍정한 바도 있다(Phelan 1993). 이때 퍼포먼스에 대해서 ‘쓰는’ 것은 (끊임없이 시도되며 여러 수행적 가능성을 가지지만) 불가능한 것으로 강조된다.
그런데 지각 불가능하고 순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움직임을 머물러 있도록 하려는 시 도와 관련해서, 퍼포먼스라는 형식은 이중적으로 문제를 제시한다. 퍼포먼스는 일시적이지 만, 동시에 분명한 체현의 실천으로 물질화되는 측면을 강조한다. 이때 퍼포먼스는 그것이 종료된 이후 완전히 동일하게 재현되거나 기록될 수는 없지만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으 며, 이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퍼포먼스의 확장된 차원의 일부로 논의될 수 있 다. 그리고 퍼포먼스로부터 발현된 가능성들은 삶, 실재 세계로 편입될 수 있다. 컨템퍼러 리 댄스에서는 초기의 과정 중심적이고 즉흥적인 시도들에서부터 이런 확장된 영역을 퍼 포먼스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는 양상이 관찰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특히 ‘아카이브’에 대한 논의 및 실험들에서 이런 양상이 두드러진다. 컨템퍼러리 댄스에서의 아카이브적 실 천들은 문제시되던 안무의 포획을 둘러싸고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경험과 이로부터 발생하 는 의미작용에 대한 문제들을 상기시킨다. 즉, 아카이브는 예술 자체를 저장하는 것이 아 니라 그것의 흔적만을 나타내지만, 한편으로는 지나간 작업에 대해 논할 접점을 제시하고, 그런 확장된 논의와 과정을 오히려 퍼포먼스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기는 것으로 이동한 다. 이런 아카이브의 작동은 독립적인 작품의 존재와 퍼포먼스의 사라짐에 치우친 습관 양자를 불안정하게 한다. 대신, 그것은 안무의 과정과 결과물을 확장된 시공간 속에서 논 의될 수 있도록 하는 중간단계, 인터페이스를 형성한다. 실제로 아카이브는 안무를 이론적, 교육적, 공동체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주목할 만한 변화는 퍼포먼스에 대한 논의와 실험에서 ‘사라짐’에 있던 초점이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되고, 퍼포먼스와 그것의 흔적, 이로부터 야기되는 반응들을 별개의 작동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완벽하게 포착될 수 없는 것으로서 퍼 포먼스가 가지게 되는 잠재성이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레페키는 “아카이브 로서의 몸: 재연하려는 의지와 춤의 사후세계(The Body as Archive: Will to Re-enact and the Afterlives of Dances)”에서 컨템퍼러리 실험 안무의 한 양상으로 과거 작품을 재 연(re-enact)하는 실천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과거에 공연된 것으로 돌아서는 것이 동시대 성을 정의하는 실험의 지표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특히 이런 실천들은 과거 작업을 완벽히 재현해 고정시키거나 회고하는 것이기보다는 작업으로부터 아직 소진되지 않은 가상6)적 인 가능성들을 실질적으로 방출하거나 구현하려는 창조적인 영역에 초점이 있다.
결국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아카이브에 주목하는 것은 가상적인 가능성을 사건이나 대상 으로 구현하는 ‘시스템’으로서의 퍼포먼스적 작동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이런 비 판성 하에서 전과는 다른 중요도를 가지는 것이 언어의 적극적인 관여이다. 일반적인 퍼포 먼스적 논의에서 언어적 의미화가 퍼포먼스에서의 참여나 감각들과 구분되고, 양자가 같 을 수 없다는 특성이 강조된다면,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움직임-언어’는 이론과 안무 양자 를 그것이 구속된 습관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제기한다고 레페키는 말한다. 그리고 이 는 무용을 연구와 리서치의 가능성으로까지 연결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나타나는 것은 물 질적, 신체적 현존으로서의 몸을 넘어 이론적이면서 동시에 지각적인 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이 제기하는 가능성은 억압적이거나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되 던 안무적 포획과 아카이브가 컨템퍼러리 댄스에서는 춤과 이론, 혹은 일상 사이의 인터페 이스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다.7) 이때 퍼포먼스에서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참여자들에게 마치 연구자와 같은 태도를 요구하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안무적인 것의 메커니즘과 아카이브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무용 및 퍼포먼스와 관련되던 순간성과 고정시키는 기록의 이분법을 혼란스럽게 만 들고, 퍼포먼스의 ‘지금, 여기’ 및 퍼포머의 현존과의 직접적인 만남의 순간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시공간적으로 확장된 논의의 장을 열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그 자체로 기억과 경험의 퇴적물이며 퍼포먼스의 실연과 그 전후 시공간 사이에서 오가는 몸은 컨템퍼러리 댄스에서의 매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대표한다.
이와 관련해서 레페키는 ‘살기 위한 것으로서의 몸(body-for-living)’을 재창조할 것을 강조한다(Lepecki 2007, 121-122). 이때 안무를 통해 삶을 향하는 몸으로 자신을 재발견 한다는 것은 이미 아카이브된 정보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위해 기억을 활성화시 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안무적 활동들은 복합적인 생활공간으로 확장된다. 더 나아가, 레페키는 동시대의 많은 안무적 제안들에서 물체(object)와 사물(thing)의 구분이 시도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예술적 상황의 참여자들이 사물이 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때 사물성 은 파악불가능성, 탈의미화, 탈주성으로 설명된다(Lepecki 2020, 112-113). 확고한 기능과 유용성을 가진 명료한 물체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사물성은 그 모호함 속에서 도구적인 것 으로 전락하지 않게 된다. 특히 매우 구체적으로 존재함에도 경험의 차원에서 명확한 이해 나 전달을 피하는 사물은 참여자들의 사변적이고 상상적인 활동을 촉진시킨다.
사물 혹은 ‘살기 위한’ 몸을 앞선 논의와 연관 지으면, 확장된 사유와 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생활공간으로 확장되며 환경을 구성하는 인터페이스로서의 아카이브 개념에 몸이 대 응됨을 알 수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퍼포머의 몸은 지속적인 훈련의 과정 및 과거의 자료 들을 통해 배우고 만들어지는 것으로, 역동적인 퇴적 작용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아카이브 를 구성하며 안무적인 포획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데 몸은 단순 한 저장소, 보관함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어떤 상호작용이 일어났음을 증 언하거나 이를 작동시키는 조건이 될 뿐 아니라 그런 과정을 거치며 계속 변화한다. 결국 몸은 경험의 살아 있는 흔적들을 나타내지만 이런 흔적들로만 환원될 수 없고, 한편으로는 이런 흔적들로 인해 변화된 잠재성을 가질 수 있다. 특히 몸이 불안정하고 역동적인 매체 라는 점은 권위적 고정에 저항하는 아카이브로 더 큰 가능성을 가지도록 한다.
몸과 정체성을 수행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은 새롭지 않다. 하지만 컨템퍼러 리 댄스는 몸을 아카이브로 이해함으로써 그것이 퍼포먼스와 일상적 삶의 사이, 그리고 여러 시간들의 남겨진 잠재성 하에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런 특수한 조건 으로 인해 몸은 특정한 정체성으로 고정되기보다 잠재성을 보존하고 탐구할 수 있다. 또한 몸-아카이브는 물질적인 존재와 대체로 의식적으로 작동하는 그것의 의미구조를 모두 생 각할 수 있게 하고, 이로부터 이론적이고 탐구적이며 사회적인 성향을 강하게 나타낸다는 특성을 가진다. 즉, 몸은 경험이나 기억의 축적으로부터 물질화된 것이면서 동시에 아직 구현되지 않고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의미의 가능성들을 가진다. 이는 신체적 활동에 한정 될 필요 없이 몸에 저장된 지식의 흔적으로 다시 돌아가고, 변형시키고, 분석하는 것을 가 능하게 한다(Cramer 2013, 220). 더 나아가, 마틴 나크바(Martin Nachbar)는 아카이브에 대한 그의 작업 「우르히벤 오프히벤(Urheben Aufheben)」 에서, 아카이브가 몸을 통해 가시 화되는 순간 그것은 차이(difference)를 만들고 그것을 뒤흔들어 놓으며, 우리 자신의 정체 성을 소멸시키고 우리를 차이로 정립시킨다고 언급한 바 있다(Lepecki 2010, 38-39). 다 시 말해, 차이를 만드는 아카이브의 작동에서 몸은 잠재성이 발현되고 실험될 수 있는, 상 이한 시간과 경험들이 교차할 수 있는, 그리고 일관된 파악이 불가능한 사물적인 장소로서 의 몸-아카이브를 나타낸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 큐레이터 프랑수아 프리마(Francois Frimat)도 몸은 생각 패턴, 이데올로기, 상대적인 힘들이 만나는 전쟁터이며, 이런 ‘모순’들 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퍼포먼스의 역할은 이를 가시화하는 것이라 설명한 바 있 다(Cramer 2013, 221).
한편, 이런 사물로서의 몸에 주목하는 것은 몸을 그 사물 자체로 인정하는 윤리학을 나 타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의 독단적인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즉, 컨 템퍼러리 댄스에서 몸에 대한 주목은 그것의 포획을 피하는 저항적인 성격을 강조하며, 예술가나 퍼포머 개인을 예술적 생산과 수행의 주체로 놓는 근대적 예술가상(즉, 현대적인 실천들에서는 퍼포머와의 만남 자체로부터 예술적 경험의 성격이 규정되고 의미를 부여받 는 경향)을 다시 한 번 거부하는 것이다.
3. 상호매개성의 수행적 작동
결국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안무적인 것의 포획과 아카이브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퍼포 먼스가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시스템에 초점을 두고, 몸을 일종의 탐구적 중심으로 설정하 는 일이다. 이때 몸은 잠재성을 가진 아카이브적 존재양상을 나타내며, 여러 경험, 시간, 퍼포먼스와 현실 등 상이한 요소들 사이에서 흔적을 남기고 자신을 새롭게 발현하는 것을 계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컨템퍼러리 댄스의 논의는 ‘지금 여기’의 현존으로부터 의미를 찾기보다는 시공간적 확장을 나타낸다. 아카이브의 개념이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주목받는 것은 관계를 맺는 매개적인 공간, 혹은 매개하는 특성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퍼 포먼스를 아카이브하려는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스코어(score)나 기록들, (퍼포먼스와 시 간차를 두고 발생할 수 있는) 발화나 해석들 등은 퍼포먼스 작업과 ‘함께’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관계적 공간 자체로서 아카이브 혹은 몸에 대해 다루는 것은 빈칸을 채 우고 간극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Thurner 2013, 242-243). 이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날 퍼포먼스의 스코어는 분명한 형식이나 고정된 콘텐츠를 가정하지 않는 경 우가 많음에도 어떤 작업을 대변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스코어는 흔히 작업을 돕는 도구 혹은 참여자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소통의 시스템, 게임의 규칙 등을 나타낸다 (Cramer 2013, 220-221). 이런 퍼포먼스의 특성은 상호매개성(intermediality)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는 특히 컨템퍼러리 댄스가 퍼포먼스라는 매체에 대해 가지는 비판성 과 관련해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
상호매개성의 현대적인 의미는 1965년부터 딕 히긴스(Dick Higgins, 1938-1998)에 의 해 인터미디어(intermedia)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 히긴스 는 인터미디어를 ‘순수한 매체(pure medium)’로 환원되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한 미디어 와 다른 미디어 ‘사이’의 영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했으며, 이것이 하나의 새로운 장르, 사조, 혹은 형식을 선언하기 위한 개념이나 지시적이거나 권위적인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실천들의 모호함에 접근할 방법을 제공하는 개념적 수단이라고 설명했다(Higgins 2001, 49-53). 이런 ‘사이’의 영역은 예술 미디어와 일반 미디어의 사이부터, 복수의 전통적 미디 어의 개념적 융합까지 가리킬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히긴스가 제시한 인터미디어는 혼합매체(mixed media)와는 구분된다는 것이다.8) 혼합매체는 서로 다른 미디어를 사용하 지만, 이는 서로 분리될 수 있다. 반면에 인터미디어에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 로 분리될 수 없고, 각 작품은 임시적이고 개별적인 형식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의 장르로 나타나지 않는다(Higgins 2001, 52). 이때 상호매개성의 핵심적인 속성은 각 예술 형식들 의 순수한 ‘매체’을 확립하려 했던 모더니즘적 ‘매체특정성(media-specific)’과 대립되는 성 질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상호매개성의 속성에 주목할 때, 그것의 수행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카텐벨트(Chiel Kattenbelt)는 “연극과 퍼포먼스에서의 인터미디얼리티: 정의, 지각, 그리고 매개적 관계들(Intermediality in theatre and performance: Definitions, perceptions and medial relationships)”에서 동시대 예술 실천의 다매체성과 다학제성에 주 목하며, 이를 서로 다른 미디어 간의 상호작용과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인 ‘인터미디얼 리티’로 설명한다. 이때, 상호매개성이 다른 매개성 관련 개념들 (예를 들어 멀티미디얼리 티(multimediality)나 트랜스미디얼리티(transmediality))9)과 구분되는 것은 그것이 상호적 인 영향의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 개념이라는 점이다. 이런 상호관계는 서로 영향을 미치는 미디어, 층위, 혹은 차원들을 재정의하도록 하고 이전까지 존재하던 매체에 대한 관습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개념은 조화나 투명성보다는 다양성, 불일치와 더 관련되 어 있으며, 이런 간극을 유지함으로써 더 큰 가능성을 가진다(Kattenbelt 2008, 25). 그렇 기 때문에 상호매개성은 동시대 무용실천에서 퍼포먼스의 매체적 아이디어나 안무 개념의 해체와 재구성을 살펴볼 수 있는 한 시각을 제공한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카텐벨트가 이런 차이의 유지가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지금 여기’ 의 갇힌 연속선상의 한계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고 설명한 점으로, 이는 컨 템퍼러리 안무와 아카이브적 실험들에서 퍼포먼스를 사라짐으로 이해하는 습관을 문제시 하는 것과 관련된다. 또한, 그는 오늘날의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담론들에서 상호매개성은 ‘문화적 가치나 행위의 영역을 개방시키는 것에 대한 의식적인 갈망을 나타내는,’ 예술, 과 학, 윤리의 상호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라 설명했다(Kattenbelt 2008, 27). 이때 컨템퍼러리 퍼포먼스의 실천들을 상호매개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상이한 매체, 층위, 혹은 구성요소들 의 상호적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안무나 퍼포먼스의 메커니즘에 대한 반성적 탐구, 혹은 몸-아카이브의 잠재성을 유지하고 발현하며 이에 대해 집단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해서 중요하다. 특히 퍼포먼스 공간의 상호매개성은 예술과 일상, 가상 과 현실의 층위들의 병치를 나타내고 그 차이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무대화된 것은 상대적으로 외부적 세계에 대해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며 관객 또한 그들의 주체성을 일상적인 삶의 관습들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 동시에, 이는 일상으로부터 고립될 수 없 다(Kattenbelt 2010, 32). 이런 경험에서 물질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은 중첩되어 있기 때문 에 현존의 경험은 분명한 존재론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지 않게 된다. 즉, 차이를 유지하는 상호매개성은 몸을 통해 아카이브가 나타났을 때, 즉 몸-아카이브에 대해 논할 때 그것이 차이로 정립되고 잠재성을 보존하게 되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의 병치를 가능하게 하는 퍼포먼스의 공간은 카텐벨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각자에게서 “수행적인 지향(performative orientation)”을 야기한다(Kattenbelt 2010, 30-31). 다시 말해, 참여자 들을 상호매개적인 상태에 놓는 역동적인 방식으로서의 퍼포먼스는 그것의 일시성을 넘어 선 재생산과 해석, 분석을 요청한다.
그래서, 카텐벨트는 피셔-리히테가 수행적 전환을 작품에서 사건, 의미에서 경험으로의 분명한 변동으로 주장한 것과 달리, 의미화(기호학)와 경험(현상학)은 오늘날의 ‘퍼포먼스 적 문화’ 속에서 서로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중첩되어 있다고 설명한다(Kattenbelt 2010, 29). 이때 인터미디얼리티의 속성은 ‘병치’이지, 대체와 흡수와는 다르다. 컨템퍼러 리 댄스의 특성을 상호매개성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현상학과 기호학, 의미와 경험을 대 립적인 것으로 설정하지 않을 수 있게 하며, 물질적 현존과 그것의 의미구조, 확장된 논의 를 동시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이론적-지각적 몸’, 즉 몸-아카이브를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이런 작동의 핵심에 차이의 유지와 중첩, 즉 아카이브적이 고 사물적인 것으로서의 몸에 대한 이해가 있게 된다.
III. 자전적 퍼포먼스의 상호매개성
이어서는 컨템퍼러리 퍼포먼스의 상호매개적인 속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퍼포머 자신이 직접 이야기하는 자전적 퍼포먼스의 사례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이런 퍼포먼 스에 주목한 이유는 그것이 양식적인 구분의 모호함을 나타냄은 물론, 가장 적나라하게 현실과 예술, 실재와 가상의 영역의 모호한 중첩과 병치를 나타내며 발화를 통해 현존과 재현적 의미의 병치를 나타내고, 리서치 및 공연의 과정에서 다큐멘트와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아카이브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앞선 논의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찰할 수 있 게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안무적 실천들은 안무적 포획과 아카이브를 이론적 탐구 및 공동의 장과의 인터페이스로 가져오며, 퍼포머를 다양한 사회문화적, 시공간적 층 위 사이에 놓음으로써 한 개인의 총체적인 가능성에 접근하려 한다. 그뿐 아니라 개인의 경험이나 기억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공적이고 다수주의적인 안무 장치의 권력으로부터 대 안을 모색하고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재구성을 권장한다. 이때 기억과 경험을 다루는 퍼포 먼스는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현상을 탐구하는 리서치로 이해될 수 있으며,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몸의 잠재성을 알고 이를 분석하는 데 수행적으로 참여하도 록 한다.
1. 퍼포머의 발화: 상호매개적인 소통 공간의 형성
이와 같은 퍼포먼스를 이해하는 데 있어 먼저 설명되어야 할 것은, 무용의 주된 표현 수단이 아닐 뿐 아니라 포스트드라마 이후 지양되어 온 언어적 내러티브가 이런 퍼포먼스 에서는 ‘자기 발화’라는 형식을 통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것이다. 1960년대 말 이후 예술가들은 실재를 재현한다는 것에 대해 한계를 느끼고 전통적인 재현담론이나 텍 스트의 재현에 대해 거리를 두었지만, 다른 방식으로 실재를 불러오고자 했다. 그 과정에 서 예술가들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현실사회의 제반 문제들이 작용하고 교차하는 접점으 로 인식했으며(이경미 2020, 135), 자신을 예술가나 퍼포머 이전에 한 개인임을 부각시킴 으로써 자신의 현실의 문제들을 무대 위에서 풀어내고자 했다. 이런 재현에 대한 문제제기 는 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실제성에 대한 주목을 일으킬 뿐 아니라 거대담론이나 내러티 브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대신 여기에는 개인의 서사와 경험, 사적 다큐 먼트, 그리고 감각적 기억이나 해석이 개입할 가능성이 나타나며 고정된 사실이나 ‘스토리’ 보다는 그것이 전달되는 ‘텔링(telling)’으로 중점이 이동하게 된다. 이런 사건은 퍼포머와 관객의 구분된 관계이기보다는 사람 대 사람으로의 만남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발화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간의 사이-공간과 전달의 과정이 강조된다. 그리고 말과 움직임이 상호 작용하는 것은 이후 이론적인 탐구로까지 퍼포먼스를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낸 다.10) 특히 감각적 경험과 언어적 의미가 함께 나타나는 것은 이론적이면서 동시에 지각적 인 몸에 주목하는 상호매개적 작동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언어와 움직임의 상호작용, 그리고 양자가 해당 표현 방식이 일반적으로 나 타내는 관습들로부터 멀어졌다는 점은 이론과 안무 양자가 각각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나타낸다. 춤추지 않는 몸과 일관된 구조를 가지지 않는 언어는 이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퍼포먼스는 대체로 내러티브의 일관된 구조를 추구하지 않고, 퍼포머를 인물 을 연기하는 연극적 기표로 나타내지 않으며, 소개되는 사례나 자료들의 객관적인 사실 여부나 뚜렷한 내적 연관관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을 완전한 포획, 설명, 혹 은 큐레이팅을 거부하는 사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야기를 듣는 관객 자신이 직접 이런 정보들을 연결하고 사변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을 일으키게 된 다. 그 결과는 마치 실험실이나 공론장과 같이 작동하는 사건-공간으로서의 퍼포먼스이다. 정리하자면, 자기 이야기하는 퍼포머를 등장시키는 퍼포먼스는 언어와 움직임, 다큐멘트의 등장으로 강연, 연극, 무용 등의 구분을 불명확하게 할 뿐 아니라, 현실 속 맥락이나 일상, 무대, 그리고 관객과의 관계 등 사이에서 상호매개적으로 존재하는 퍼포머의 상태를 인지 하고, 완벽하게 재현되어 의미를 전달하는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관객과 배우가 만 나는 과정 자체를 퍼포먼스로 이해한다.11) 동시에, 이런 과정은 그런 공동 현존의 순간으 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각적인 동시에 의식적인 관객 수용, 즉 상호매개적인 수행적 지향성을 야기한다. 그리고 안무적 구성의 과정과 무대에 있는 와중에도 계속 살아가고 있는 퍼포머의 몸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곧 반성적인 살아 감으로 작동하는 아카이브적인 속성을 가진다.
이런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업으로 제롬 벨의 렉처 퍼포먼스 「베로니크 두 아노(Veronique Doisneau)」12)를 살펴볼 수 있다. 이는 벨이 2004년 파리오페라발레단으 로부터 신작을 제안받아 만든 작품으로, 무용수 자신이 본인의 삶을 직접 이야기함으로써 소외되었던 무용수의 존재나 무용의 제작 시스템 등을 가시화시키는 작업을 나타낸다.
이 작품은 아무 무대 장치도 없는 극장에 연습복 차림에 의상과 토슈즈, 물병을 든 발레 리나 베로니끄 두아노가 혼자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관객을 향해 자신을 직접 소개13)하며, 자신의 몸 상태, 발레단에서의 위치와 급여, 좋아하는 안무가와 그렇지 않은 안무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는 와중에 그는 자신이 좋아하거나 영감을 받은, 혹 은 해 보고 싶던 춤을 직접 추기도 하고, 군무의 일부로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어야 하는 안무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를 실연하기도 한다. 이때 무용수는 자신을 재현하는 대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전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분명한 구조 없이 나열함으로써 이야기하는 서술자로서, 그것의 행위와 과정에 대한 주목을 야기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두아노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무용수로서 자신이 관여 되어 있던 현실을 무대 위로 올렸을 뿐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본인의 말로 전달하 고 재구성하며 재창조하는 과정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그래서 두아노는 춤을 출 때도 음악 을 트는 대신 허밍을 하고, 음악을 틀 경우에는 직접 음악을 틀어 줄 것을 요청하거나 볼륨 조절을 요구하며 퍼포먼스의 과정과 공간을 구성한다. ‘파트너와의 리프트’ 같은 표현을 말로 처리하며 당사자에 의해 기억이 재구성되는 양상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 리고 무대 위의 모든 과정이 퍼포머의 몸과 자전적 되돌아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호흡이 가빠지는 등의 변화는 뚜렷이 감지되며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퍼포머를 강하게 느 끼도록 한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셀린 탈롱(Celine Talon)의 퍼포먼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관객을 등지고 본인이 관객의 입장을 취하는 전환을 나타내는데, 이는 관객 과 퍼포머의 분리된 구조 대신 모든 참여자가 두아노라는 인물의 아카이브적 추적 과정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작업으로부터 서로 다른 배경의 참여자들이 만나는 상호매 개적인 공간으로서의 퍼포먼스, 그리고 이로부터 재현이나 저장이 아닌 반성적 구성의 공 간으로 작동하는 아카이브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무용제도의 작동 방식을 안무의 포획을 통해 논한다는 패러독스는 관객이나 예술가로 하여금 안무가와의 관계나 극장 장치와 관련해 발생할 수 있는 권력이나 가시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한다.
2. 차이의 유지와 병치
한편, 실재 자체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아카이브와 관 련해, 단 하나의 보편적인 기억이나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의 서사는 갈등과 충돌 하에 있는 것이다. 결국 푸코(Michel P. Foucault, 1926-1984)가 언급한 바 있듯이, 담론 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담론이 가시화됨에 있어 그 이면에 존재하는 배재의 원칙, 즉 권력과 지식의 상호 형성 및 그 상관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경미 2020, 139-140). 컨템퍼러리 퍼포먼스에서 확장된 아카이브의 개념은 이런 위기를 강조하며, 이 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차이를 유지하고 모순적인 만남과 중첩을 통해 잠재성을 불러온다.
기본적으로, 자전적 퍼포먼스에서 불러오는 실재는 허구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지만 동 시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아니다. 대신 이는 선택, 편집된 것이며 현실과 무대 사이에 있는 것으로, 고정되고 지시 가능한 현실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상이자 행위하는 실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진되지 않은 잠재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실재와 허구의 이질적인 시공 간들의 중첩이라는, 퍼포먼스에서 가능한 상호매개성이 중요하게 된다. 더 나아가, 퍼포먼 스적 공간에서 가능해지는 가상성의 탐구는 일상적으로는 감지되기 어려운, 상이한 요소 들의 동시 존재를 실험할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이는 퍼포먼스에서의 선택과 편집에 따라 서로 다른 층위들을 교차시킴에 따라 실험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자전적 퍼포먼스가 작 동하는 방식은 실재와 허구의 중첩을 통해 특정 담론의 유효성을 중단시키고 논쟁 가능한 공동의 장을 열어, 도구성이나 명백함을 피하는 사물성으로 이동하며, 비판적인 정보 수용 과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특히 강조되는 것은 차이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소통을 가 능하게 하는, 상호매개적인 공간이며, 이런 특성을 통해 상이한 담론과 문화, 층위들이 만 나는 실험적인 공간이 형성될 수 있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의 중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제롬 벨의 「피쳇 클런천과 나 (Pitchet Klunchun and Myself)」14)라는 작업을 참고할 수 있다. 이 퍼포먼스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춤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와 태국의 무용인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되며, 둘이 거리를 두고 서로를 마주한 상태로 상대에 대해 질문을 하고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질문들은 처음에는 단순하게 시작되지만, 계속됨에 따라 상대의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로까지 이어지며, 이는 작품 전체에 긴장감을 형성하게 된다. 특히 이 작품은 처음에는 벨 자신이 상대에게 질문하는, 일방적인 방식으로 시작되지만 이런 질문과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오히려 서구적 춤에 대한 전제와 이와 관련된 자신의 배경, 다른 춤에 대한 기대나 시선, 그리고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작동하는 서구적인 가치 관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것으로 이어지면서 질문의 방향이 혼란스럽게 된다. (이는 상 대인 클런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등장하는 두 인물들을 구성하는 춤과 관련된 문화 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이들은 무엇이 자신에게는 당연하고 상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지 에 대해 되짚고 상대 입장에서 이를 설명하려 애쓰는 일종의 안무적 과정에 참여한다. 이 런 과정은 자신의 일상적인 이해와 관습을 고수하기 어렵게 만들고 자신을 일상적인 상태 와는 다른 자극에 노출시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때 퍼포먼스의 참여자들은 상이한 존재 와의 병치를 통해 자신에게 존재하는 차이들, 즉 조화될 수 없는 상이한 구성요소들과 지 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특성들을 비판적으로 재발견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두 인물은 서로를 이전보다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고, 상대의 낯선 작업으로부터 감정적인 동요를 느낀다. 하지만 이들 사이의 동의는 퍼포먼스가 끝날 때까지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클런천은 (본인의 문화적인 이유로 인해) 벨이 옷을 벗는 것을 강력히 거부한다. 이에 따라 상이한 문화적 층위들은 서로 중첩되어 상호 이해 및 자기반성의 다 양한 시도들을 한 다음, 불일치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런 결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조화와 일관됨을 경계하는 상호매개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때 문화적으로 다수결의, 공리주의적인,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장 치로서의 안무를 재고하고 다양성이 실험될 수 있다.
3. 정체성의 해체와 매개성으로의 이동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퍼포머를 등장시키는 자전적 퍼포먼스는 참여자들을 탐구적 인 소통의 공간에 모이게 하고 퍼포머의 아카이브-몸을 반성적으로 재구성하며, 일상적인 이해나 담론을 불안정하게 한다. 이런 과정에서 퍼포머의 정체성이나 지식은 유동적인 것 이며 이미 그 자체로 맥락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나타난다. 즉, 기억이나 다큐멘트, 정 체성에 대한 가능성을 발현시킬 수 있다는 아카이브적 잠재성은 결국 고정된 주체를 가정 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극단적으로는 분명한 정체성을 소멸시켜 퍼포머의 몸-아카이브 를 상호매개적 채널 자체로 여기는 것이자, 그것을 둘러싼 관계들의 가상성을 보존하는 것으로서 퍼포머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가상과 현실의 사이라는 특수 한 공간 속에서 몸이 아카이브로 탐구될 때, 정체성은 차이가 병치되는 것으로서 소멸된다.
이런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연출가 라비 므루에(Rabih Mroué, 1967-)와 배우 리나 사네(Lina Saneh)의 「바이오크라피아(Biokhraphia)」15)라는 작품을 참고하고자 한다. 이 작품은 사네가 스스로를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예술가의 이미 지와 존재는 무대 위에 등장하는 퍼포머 자신과 그것의 매개된 형태, 즉 ‘아티스트’, ‘오디 오(음성)’, 그리고 ‘비디오(영상)’ 사이에서 움직이면서 서로 상호작용하고, 심문하고, 중첩 되거나 분리되는 양상을 나타낸다. 이때 인터뷰 질문들은 연극과 예술, 성, 검열, 전쟁, 사 회정치적 터부들, 그리고 사네의 개인사에 대한 질문들 등으로 다양하며 분명한 논리적 구성없이 제시되는데, 이는 직접적으로 답변되지 않거나 서로 다른 ‘사네들’ 사이에서 상충 되며, 이런 질문이 반복되고 변주가 이루어짐에 따라 실재와 가상, 진실과 거짓 사이의 경 계가 모호해진다. 이런 과정 중 사네는 직접 오디오를 작동시키고, 스크린의 자기 이미지 를 떨어져서 바라보는 등, 고정된 자기중심으로부터 벗어나 반성적인 자기 이해의 과정을 나타내며, 질문과 답변, 이미지 모두가 그로부터 유래된다는 점에서 역동적인 아카이브로 나타난다. 그리고 무대공간은 어떤 장소를 재현하는 대신 인물이 제시될 수 있는 최소한의 상황만을 설정하며, 이는 자신으로부터 여러 ‘자신들’을 분리하고 이를 선택적으로 취하거 나 분리시킬 수 있도록 하는, 매개적인 상황 그 자체이다. 이런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사네 의 이미지가 비춰지고 퍼포머 본인과 겹쳐 서 있는 수조는 여러 경험과 맥락의 중첩을 나 타내듯 이물질이 섞여 혼탁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퍼포머의 정체성이 어떤 정보의 혼합 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마지막에 사네는 이 수조의 물을 병에 담고 가격표를 붙이는데, 이는 어떤 존재를 고정시키고 보존해, 객관적인 이해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것 에 대한 자조적인 태도로 읽힌다. 실제로 사네는 고정된 이미지를 죽음과 결부시켜 이야기 하며, 정치를 되살리기 위해 고정된 내러티브를 거부할 것을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퍼포먼스에서 퍼포머는 상호매개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잠재적인 정체성을 파편적이고 상 충되는 방식으로 실험하며, 이는 포착하려는 순간 고정된 것이 된다는 점에서 관계적이고 매개적인 상태로 남겨져야 한다.
IV. 결론
컨템퍼러리 퍼포먼스에 있어 상호매개적이고 다학제적, 다매체적인 성격은 이제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다. 이런 특성은 퍼포먼스에 대한 엄밀한 접근을 어렵게 하며, 이에 대한 연 구를 다양성의 긍정으로 한정 지을 위험을 가지는 것이다. 이때 퍼포먼스적 매체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와 그것이 안무적인, 혹은 아카이브적인 포획과 가지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 은 혼란스러운 동시대 퍼포먼스의 흐름이 상호매개성과 과정중심적 유동성, 그리고 더 나 아가서는 정치성의 회복을 향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접근은 퍼포먼스를 사라짐과 나란히 놓고 물질적 공동현존의 순간에 주목하는 매체적인 습관을 재검토하며, 퍼포먼스를 확장된 시공간과 메커니즘들 하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탐구한다. 이에 본고에 서는 공동현존과 물질적이고 지각적인 경험이 의식적이고 해석적인 경험과 함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컨템퍼러리 안무적 실천들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이는 아카이브, 몸, 혹 은 퍼포먼스를 참여자들의 창조적인 구성을 가능하도록 하는 소통적인 장, 즉 매개성으로 이해함으로써 퍼포먼스를 특정 사건이 이루어지는 ‘지금 여기’의 갇힌 연속선상의 한계로 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이때 퍼포먼스를 포획하려는 안무적인 실천들은 오히려 퍼포먼 스에 대한 향후의 의미작용과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사이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퍼포먼스를 시공간적으로 확장시키며, 이런 특성은 포획의 대상이 명확한 이해와 고정을 피해 있다는 점으로 인해 더 강화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물질성과 잠재성이 섞여 모호하고, 감각적 경험과 언어적 의미화의 공존을 나타내며, 춤, 이론, 그리고 일상 사이의 인터페이 스를 형성하는 상호매개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특히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몸은 아카이브적인 잠재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며, 차이 를 보존하고 모으는, 혹은 이를 수행적으로 해석하고 발현하는 장소로서 기능한다. 이때 퍼포먼스는 아카이브로서의 몸이 상이한 층위들 사이에 나타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의 매개적 속성을 가시화시켜 비판적인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고정된 정체 성이나 담론, 관습, 정보는 의심의 대상이 되며, 대신 그것들이 속한 관계의 역동적 시스템 을 지속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퍼포먼스에서 퍼포머가 본인 으로서 말하는 경향은 분명한 장르적 구분을 어렵게 만들고, 실재와 가상, 자연적인 인물 과 퍼포머 사이의 경계적인 존재방식과 관객과의 만남으로서의 퍼포먼스의 매개적 속성을 전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며, 기억과 경험이라는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아카이브와의 관 계를 직접 드러내는 것으로, 상호매개적인 동시대 퍼포먼스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진행할 수 있게 한다. 이때 퍼포머의 발화는 전통적인 공연예술의 내러티브와는 구분되는 유동적 이고 과정적인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이런 과정에 관객들도 참여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특 히 흥미로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컨템퍼러리 댄스의 아카이브적이고 다매체적인 실천들은 과거와 현재, 미 래를 연결하며 아카이브적 탐구와 재구성을 진행할 수 있게 하는 확장된 시간성과, 고정된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 파악 불가능한 존재이자 소통의 장소로서의 몸에 주목한다. 이런 퍼포먼스의 시간성과 매개성,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이론적인 가능성은 예술 매체와 관 습에 대한 지각과 인식의 맥락을 비판적으로 가시화시키고 해체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